엄마가 아이를 버릴 때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청하건대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다른 여자는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왕상 3:2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왕이 된 솔로몬이 일천 번의 제사를 올렸습니다. 왕국의 영광이나 재물을 구한 것이 아니라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이런 마음을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 있었다는 증거를 솔로몬의 첫 재판에서 보게 됩니다.
II. 솔로몬의 첫 재판
등장하는 두 여자는 창기였습니다. 그 당시 조나라고 하는 이 창기는 특히 남들에게 몸을 팔고 살아가는 아주 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여자가 살고 있었는데 동일하게 아이를 가졌고, 3일 간격으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상한 것은 여기에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두 여자가 낳은 아이는 아버지를 밝힐 수도 없는 어쩌면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식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남들에게 몸이나 팔며 사회의 멸시를 받으며 허허롭게 살아온 날들에 대해 이 아들이라도 얻어서 그 아이를 의존하며 일생을 살아볼까 생각하는 여인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한 엄마가 잘못해서 아이를 깔아 죽였고, 죽은 아이가 누구의 아이냐 그리고 살아있는 아이를 훔쳐갔다고 주장하는 엄마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고, 재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받아 자연 본성으로서의 모성을 이용해서 재판에 활용했습니다. 그 방법은 이러했습니다. “자, 너희들이 서로 살아있는 아이가 자기의 아이라고 하고 죽은 아이는 상대방의 자식이라고 하니 그러면 어쩔 수 없다. 칼로 이 아이를 반으로 쪼개어서 반은 네가 갖고 반은 네가 가져라.” 그런데 그 중 한 여자는 “그렇게 하십시오. 그래서 그 아이가 내 아이도 되지 못하게 하고 저 여자의 아이가 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당당하게 요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3장 26절에 보면 어미인 이 여자의 마음은 불붙는 마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이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고 이 아이를 제발 죽이지 마옵소서.” 하고 왕에게 간청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참 살아있는 이 아이의 엄마라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받은 솔로몬은 모든 인간 안에 공통적으로 남아있는 자연 본성으로서의 어머니의 성품을 이용해서 진실을 가려내는 재판을 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오늘 뜬금없이 “엄마가 아이를 버릴 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어나는 매우 심각한 한 사회 현상 때문입니다. 2008년에서 2014년 사이 부모의 학대로 숨진 아동이 253명입니다. 매년 30명이 넘는 어린 아이들이 다른 사람이 아닌 친 엄마와 친 아버지의 손에 의해서 살해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부부싸움 끝에 화난 엄마가 생후 58일된 아이를 물통에 집어넣어서 뚜껑을 닫아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 물통 속에 들어가서 죽임을 당한 사람이 남편이라면 나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난지 58일된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어미가 되어서 그 새끼를, 핏덩어리를 물통 속에 집어넣어 뚜껑을 닫아서 죽어버리게 하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영아 살해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이들을 목 졸라서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이거나, 혹은 너무 화가 난다고 그 아이를 집어 던져서 벽에 부딪혀서 머리가 터져 죽어버리게 만드는 일이 그 애비에 의해서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생후 1주일 미만 된 아이를 의학적으로 신생아라고 부릅니다. 그 신생아들이 얼마나 많이 살해당하는지는 통계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엄마, 아빠의 축복을 받고 기다리다가 기쁨 속에서 태어나야 할 아이들이 처음 들어가는 곳이 검은 비닐봉지입니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던져버려지거나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집니다. 입양 특례법이 세워지고 나서 입양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베이비박스에 버려지는 아이들이 불과 2012년에 67명밖에 안되던 아이들이 2014년에는 240명이나 버려져서 거의 매일 한 아이씩 베이비 박스에 버려지는 것입니다. 그 박스에 버려지는 아이들은 그래도 다행인 아이들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아이들이 엄마의 탯줄을 끊고 나오자마자 화장실에 버려지고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처참한 현실은 우리들이 이 시대가 얼마나 심각한 모성 파괴의 시대를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III. 창조 질서와 엄마
A. 창조 질서와 어미됨
그래서 나는 우선 창조질서와 엄마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창조질서가 한 인간이 어미가 되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봅시다. ‘땅’을 히브리말로 ‘에레츠’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성명사입니다. 땅은 신비로운 사물입니다. 왜냐하면 땅은 수많은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명사를 히브리 사람들이 여성형으로 생각한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고 또 사람도 하나님이 그 육체를 땅에서 취한 흙으로 지으시고 수많은 식물들을 땅에서 내게 하시고 심지어는 짐승과 가축들까지 땅을 명하여 그들을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은 무생물 같지만 사실은 거대한 생명체이고, 수많은 생명들이 이 땅에서 솟아나와 이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이런 시선을 가지고 땅을 바라다보면 우리는 신비한 생각을 그칠 수가 없습니다.
똑같은 시선으로 우리는 여성을 바라봅니다. 이 세상에서는 외모가 잘 생긴 여자만을 여자처럼 생각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모든 사람인 여성은 생명의 담지체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사람이 생겨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그 사람의 몸을 이용해서 또 다른 사람이 생겨나고 그 사람이 인류를 구성하며 역사를 일구어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담의 신체의 일부를 취하여 만드신 첫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고 짓게 하셨습니다. ‘하와’는 옛 히브리말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인간은 그렇게 사랑과 생명의 결합으로 후손을 산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남녀가 만나서 서로 사랑하고 함께 육체의 관계를 갖고 거기서 환희의 즐거움을 맛보고 그 사랑의 결실로서 자신을 닮은 후손들이 태어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 가정에 태어나서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참으로 누군가를 배우고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예의를 갖추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배우면서 그 엄마의 어깨 너머로 아빠를 배우고, 엄마 아빠의 어깨 너머로 형제들을 배우고, 가정을 넘어서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터득하면서 비로소 이 사회 속에서 인류의 행복에 기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갈 수 있는 한 인간성이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동물에게조차도 자기의 종의 번식을 위해 새끼들을 보존할 수 있는 본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이 본능에 아주 충실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동물의 세계에서 그 부모가 혹은 어미가 새끼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을 보면 눈물겹고 거기서 많은 도덕적인 적용들을 배우게 됩니다. 동물들은 자식을 보호해도 그 도덕적인 의미를 모르고 본능의 프로그램에 의해서 그렇게 행동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그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마음이 부패하고 악하여 의지가 잘못된 방향으로 작용할 때는 동물만도 못하게 자기 새끼들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속에 깊이 파고 들어와 있는 도덕적인 악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개나 돼지는 개, 돼지만 못한 돼지, 개가 없지만 인간은 인간만 못한 인간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인간이 인간 이하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어떤 존재의 위대함을 역설적으로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기계처럼 창조하지 않으시고 지성과 의지를 주셔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사랑할 수 있게끔 자유를 주셨습니다. 거기에 바로 인간의 참된 존엄과 가치가 있는 동시에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뜨거운 사랑을 암탉에 비하기도 하셨습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내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2장에서는 가축이 새끼를 낳으면 어미와 그 새끼를 8일 동안 떼어놓지 못하고 함께 있게끔 배려하셨습니다. 결국 인간의 본성 속에 새겨진 새끼 사랑은 자연적인 본성입니다. 거기에만 충실해도 자식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자신이 살기 힘들다고 그 아이를 벽에 내던져 머리가 터져서 죽어버리게 한다든지 살아있는 자식을 물통 속에 집어넣어서 침수시켜서 죽여 버리는 그런 일들은 인간이 동물과 같은 존재만 되어도 그런 일은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못된 인간에게 이 짐승 같은 놈이라고 말할 때 짐승들은 모욕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새끼 사랑을 자연 본성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연 본성을 뛰어 넘어서 도덕으로 완성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버리는 것은 도덕적으로뿐만 아니라 자연 본성적으로도 역행하는 것이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식의 인생을 망가뜨릴 뿐 아니라 자식을 버린 부모로서 자신의 인생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B. 한 인간의 어미됨의 뜻
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미가 된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왜 그 자식을 버렸느냐고 엄마를 꾸짖으면 이 세상의 많은 여성들은 반문합니다. 어떻게 함께 낳은 새끼가 그 부양의 책임을 그 자식에 대한 부양의 책임이 어떻게 엄마에게만 있느냐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자식에 대한 부양의 책임은 엄마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히 아비에게도 있고 그래서 그 부모는 자식에 대해서 공동의 책임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우리들이 생각해 보아야 될 한 가지 사실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엄마 아빠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여성과 남성에게 주신 각자 독특한 성향들입니다. 인간을 처음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이 땅을 다스리라는 명령, 정복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남녀가 함께 하여야 할 일이고, 정복하는 것은 개척 정신을 가지고 남자들이 그 일을 하기에 적합하도록 성향을 주셨습니다. 이미 일구어진 세계를 서로 관계 맺게 하고 그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그 일은 남성의 일인 동시에 여성에게 그런 것들을 집착할 수 있는 성향을 주셨습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 역성적인 성향이 인간에게 생겨나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것이 아직까지도 인간 본성에 새겨진 보편적인 원리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인간의 자연 본성을 보더라도 자식에게 집착하여 그 개체를 보호하는 그 일은 사실 엄마가 훨씬 그 본성에 강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학의천을 산책을 하다가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풍경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미 오리가 새끼 오리 7마리를 데리고 물 위를 헤엄쳐 가는 것입니다. 작년에 내가 그 오리들을 보았을 때에는 큰 어미 하나가 아주 주먹만 한 갓 태어난 작은 오리 새끼 일곱 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어쩜 그렇게 시옷자로 딱 두 줄로 서서 그렇게 엄마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주먹만 한 오리 새끼들이었습니다. 어떻게 겨울을 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뉘 집에서 키우는 오리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랬더라면 요번 복날에 몇 마리 잡아먹었을 텐데 아직도 8마리가 한 가족을 이루면서 헤엄쳐 다니는데 차이점은 옛날에는 시옷자로 서서 두 줄로 엄마를 바짝 따라다녔는데 요즘은 엄마를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서 자유롭게 노닙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느 게 엄마고 어느 게 새끼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아이들이 부쩍 자랐습니다. 그런데 작년이나 올해나 눈에 띄는 것은 아빠는 없습니다. 그 녀석은 무책임하게 어디로 갔을 것입니다. 엄마가 그 일곱 마리 새끼들을 보호하면서 그 추운 겨울들을 어디에선가 난 것입니다. 다행히 학의천에는 작은 물고기들도 많고 오리를 괴롭히는 동물들이 없기 때문에 물론 오소리나 너구리 그런 것들이 좀 있겠지만 피해를 안당하고 그 먹이들을 먹으면서 그렇게 실하게 자랐습니다. 그걸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역시 새끼를 마지막까지 지키는 것은 오리 엄마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2006년부터 13년까지 엄마가 자식을 직접 살해한 것이 107건이었습니다. 이게 전체 살해당한 아이들의 46.5%였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것은 폐륜 엄마다 그리고 자식을 티끌만큼도 사랑하지 않는 엄마다’ 심리학자들은 전혀 다른 연구 결과를 내놓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렇게 자식을 끔찍하게 살해한 엄마 중에는 아주 강한 모성애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강한 모성애를 가졌는데 왜 죽이냐, 자식과 자신의 운명이 하나라고 생각하는 심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살하고 싶다. 그런데 내가 죽고 나면 너희들이 계모 손에 살게 될 텐데 그때에 너희들이 당하게 될 그 끔찍한 고생을 생각하니까 내가 차마 혼자 못 죽겠다.’ 그래서 동반 자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반 자살이라는 것도 그게 말이 안 되는 게 동반 자살이라고 하려면 그 죽음이 동시적이어야 합니다. 함께 뛰어 내린다든지 그래서 물에 빠져 죽는다든지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씩 하나씩 다 죽이고 마지막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반 자살이 아니라 살해입니다. 그런데 어떤 엄마는 자식들을 다 죽인 후 자식을 죽일 때는 그렇게 강인했었는데 자기 목숨을 끊을 때에는 그렇게 강인하지 못해서 자살이 미수에 그칩니다. 그런데 이것은 명백한 살인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것은 모두 인간으로서의 미성숙, 그리고 인간으로 살면서도 인간의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유할 줄을 모르는 무지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자유와 존엄은 무엇에 의해서도 취소되거나 혹은 박탈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개혁 신학을 잘못 이해하는 많은 교인들이 개혁신학에서 이야기하는 절망적인 인간관, 즉 인간은 뼛속 깊이 타락한 존재이고 절대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다. 그런 메시지들을 강력하게 듣습니다. 그런데 그런 메시지들을 성경이 선포하고 있고 또 설교자가 그런 것들을 가르친 이유는 그 구원의 은혜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은총이 얼마나 무한한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 생각해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이 땅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괴물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아주 흉악하고 더러운 존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도 결국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독특한 존엄성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짐승만도 못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학적인 인간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대하는 것도 나쁜 것인데 사람들을 대해서 그런 자학적인 인간관을 가지고 사람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구원 받은 사람만 소중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암적인 쓰레기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까지도 싸잡아서 그런 비관적인 인간관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하고 멸시하는 용도로 사용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한 처사다, 잘못 적용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새끼를 낳아 그래서 그 자식을 사랑합니다. 오래 참는 자비와 사랑으로서 그 아이를 돌보고 그 아이를 위해 헌신해야 됩니다. 그렇지만 그 아이가 자기의 기대에 어긋나거나 자신의 사랑을 몰라주면 자기의 존재를 지탱할 수 없을 그런 방식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합니다. 싸우지 말고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 남편이 눈 떴다고 때리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물어보고 눈을 뜬다고 합니다. 그럼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러니까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었다 그래서 콧바람을 불면서 그 다음날 시집가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지만 남편이 죽어서 자신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버리는 것도 이게 인생을 잘 산 것이 아닙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자기가 원하지 않은 수많은 삶의 사태들을 만나게 되어 있고 자기가 목숨을 바쳐 사랑한 사람도 결국은 헤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자신은 한 인간으로서 여기 살아남아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지탱해갈 수 있는 주체적인 능력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사랑하는데 이것이 모성애가 잘못된 방향으로 너무 강해서 그래서 완전히 자식을 사랑하되 한 인간으로서 독립된 인격을 가진 한 인간을 따뜻하게 인격적으로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니라 찰떡처럼 달라붙어서 한 덩어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들을 만날 적마다 늘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어떤 남자가 와서 너 아니면 절대로 못 살겠다, 너하고 헤어지면 나는 죽어버리겠다 그러는 남자한테는 절대 시집가지 가지 마라.’ 여자들의 로망입니다. 그런 남자를 만나는 게 여자들의 로망입니다. 그런데 그런 남자를 만나서 행복해지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결국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거나 엄청난 집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서로 내가 아무리 이 사람을 사랑해도 저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하나님 앞에 독립된 인격입니다. 그래서 부부와 혹은 친한 친구, 누구 사이에도 뭔가 이렇게 완전히 통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 한분 앞에서만 해결할 수 있는 누구도 나누어질 수 없는 인간 실존의 무게입니다.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예쁜 신랑 만났다고 하나님 필요 없는 사람이 안 되고, 예쁜 새끼 낳았다고, 공부 잘하는 자식 낳았다고 신앙을 가져야 할 이유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의 외로움,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고 사랑해 주어도 벌판에 서 있는 것 같은 누구도 공유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인 외로움을 느끼면서 결국은 그 모든 것을 품으시는 우리 하나님을 의존해야 할 존재라고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도 그러한 독립된 인격체로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식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장가를 갔는데도 며느리가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것을 심리적으로 시기하는 그런 부모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엄마에게 지정한 사랑의 분량을 넘은 것입니다. 그것은 자식도 행복하게 하지 못하고 자신도 행복하게 만들지를 못합니다.
결국 인간은 어떠한 삶의 사태를 만나도 자신이 독립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주체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주체라고 하는 것은 자유로운 주체입니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주체성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인류를 그토록 구원해주시려고 하는 이유도 그렇게 구원하여 진리로서 그들을 자유케 하셔야지만 참으로 자기 인생에 주체성 가진 존재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시고 한없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가 되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로서 서로가 타자인 상태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합치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거기에 인생의 진정한 자유가 있고 주체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제 교리반을 하면서도 내가 젊은이들 보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 핸드폰 좀 갖다 버려라, 그 스마트폰 좀 갖다 버려라. 그게 여러분으로 하여금 정말 생각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그것을 들여다보고 끊임없이 그 영상에 현혹되어서 그러면서 쓸데도 없는 무한한 정보에 몰입해 들어가면서 인생의 허무를 직시하고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수많은 진지한 결정적인 물음들, 그 물음들과 씨름하면서 미래의 남편과 아내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정신의 훈련들, 그리고 미래의 자식과 살아갈 수 있는 정신의 힘들을 배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나방이 불을 향해 날라드는 것처럼 이 세상의 어떤 풍조에 감염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자기가 주인이 된 삶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합니다. 미친 듯이 공부해서 일류대학에 들어가고, 그리고 대기업에 입사해서 연봉을 많이 받고 비교적 얼굴 예쁜 자매를 만나서 큰 집에서 살고 그렇게 하면서 그렇고, 그렇고, 그렇고, 그런데 그게 나만 원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젊은이가 그런 삶을 원합니다. 그게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이냐는 것입니다. 더 많은 소비 생활을 위해서 미친 듯이 일해서 돈을 벌고 그 소비에 취해서 그 재미로 살고 향락으로 사는 그것이 내가 주인이 된 삶이냐는 것입니다.
결국 엄마가 된다는 것과 한 인간이 엄마가 된다는 것과 참으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뉘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엄마도 진공 상태에서 그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인생의 무거운 무게를 짊어지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엄마의 무게까지 감당을 해야 됩니다. 엄마만 그런 게 아닙니다. 아빠도 한 인간으로서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무거운 실존의 짐을 지고 한 아빠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엄마는 자식을 위해 눈물로 헌신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남자들은 남자들대로 할 얘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밖에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일하고, 사업하고 하면서 당하는 그 쓰디쓰고 비감한 일들, 자존심을 뭉개 버리게 만드는 그 많은 일들 중에서 사실은 가정에 와서 이야기하는 것은 1/3도 안된다고 생각하고, 저 같은 경우는 옛날서부터 1/10도 집에 와서 이야기를 안했습니다. 뭐 좋은 얘기라고 사건을 겪는 것도 힘든데 그것을 집에 와서 또 이야기하면서 고통을 배가시킵니까? 아내가 생각하기에 남편은 사회에 나가서 대접 잘 받고 좋은 것 먹으면서 유쾌한 사회생활을 하고 자기는 집에서 빨래나 하면서 무릎이 아프도록 걸레질 하면서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누구도 나눌 수 없는 삶의 무게가 있는 것이고, 그것은 심지어 자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우리 모두가 인정을 해 주는 속에서 가족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러한 사회적인 심각한 문제는 점점 더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세월이 흐르게 되면 한 집안에 태어나서 엄마 아빠에게 살해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말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결국 인간이라는 문제에 귀결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갖는 이유도 우리가 참 인간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 자신이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IV. 네 아이를 버리지 말라
그러면 내가 묻고 싶은 결정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그런 망가진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의 운명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15살 먹은 아이가 교회를 가던 주일에 논둑에 엎드려져서 펑펑 쏟으며 눈물을 흘리며 누구도 대답해 주지 않는 질문 속에 파랗게 질려가는 영혼으로 죽은 자처럼 살 때 우리 가족 중 아무도 질문에 답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었습니다. 그게 바로 버려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물리적으로 여러분의 자식을 데리고 살고 있다고 해서 여러분이 다 그 아이와 함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답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주에 신학교 교수 한 분이 오셔서 교직원 채플에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우리 고등학교 1년 후배인데 그 교수님이 눈물을 흘리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둘째 딸이 있는데 교회를 안 나갑니다. 목사 딸인데, 선교학 교수 딸인데 교회를 안 나갑니다. 교회 좀 나가라고 사정하니까 “아빠, 내가 종교를 가져도 내가 기독교는 안 가져. 내가 굳이 종교를 갖는다면 몰몬교나 통일교로 갈 거야.” 그리고는 금요일마다 홍대 앞에 가서 밤이 새도록 뒤흔들다 오는 것입니다. 그 막나가는 딸을 보면서 아빠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마지막에는 이 아이가 어디선가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기가 어린 시절에 아빠는 나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게 이 아이가 반항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아빠가 내가 인생을 살아오는데 있어서 한번이나 내 인생에 함께 해 준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엄마한테 대해서도 똑같은 감정을 품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데리고 사는 것이 모두 데리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에게 자신이 잘못한 것을 깊이 뉘우치고 다시 그 아이와 관계를 회복하고 그 아이가 신학을 공부하고 독일에서 유학하고 지금도 이렇게 카톡으로 주고받으면서 교제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부모들은 착각합니다. 밥 먹여주고 데리고 살면 그 아이를 버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한없는 사랑으로서 그 아이를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정직히 말해줄 수 있어야 됩니다. “얘야, 인간으로 태어나서 일정 부분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자기만의 인생의 무게가 있단다. 그것은 엄마 아빠도 못 도와준다. 그렇지만 엄마 아빠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생명처럼 사랑한다.” 그게 말이 아니라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그것을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그런 엄마의 사랑을 어렸을 때 다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대중가요를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혀 안 듣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가곡들도 저는 거의 듣지를 않습니다. 유행가는 내 정서에 안 맞고 가곡은 음악의 수준이 저에게 만족을 안줘서 안 듣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SG 워너비의 김 진호라는 젊은 가수가 ‘가족사진’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최근 10년 동안에 내가 들은 그 어떤 대중가요보다도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수백 번을 들었습니다. 근데 그것은 뭐냐 하면 부모가 아이를 끝까지 사랑하면 부모는 죽어도 아이의 마음에 살아있는 것이다. 그 가사의 내용이 이런 것입니다. 아빠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아빠가 젊은 날 미친 듯이 바쁘게 삽니다. 그러다가 자식들이 태어납니다. 그리고는 가족들이 모여서 어느 날 날 잡아서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는 잊혀집니다. 그리고 자기도 한 인간으로서 미친 듯이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현실에 던져집니다. 그리고 바쁘게 삽니다. 여기서 깨지고 저기서 넘어지면서 그렇게 힘들게 인생을 살던 어느 날 너무 외롭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젊음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무렵에 너무 힘드니까 우연히 빛바랜 가족사진을 들여다봅니다. 깜짝 놀랍니다. 왜냐하면 자기 모습이 사진 속에 아빠를 닮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아빠가 왜 저렇게 살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는데 자기가 그 나이가 되고 보니까 이제야 그 아빠가 살아온 나날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날들이었는지 자식인 자신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품으며 살아왔는지가 자기에게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회상을 해보니까 그 엄마 아빠의 인생은 자기 자식의 인생을 꽃 피우기 위해서 말하자면 불타버렸던 그을음과 같이 되어 버린 인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러면서 그 부모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되 자기의 베푸는 그 사랑을 자식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의 어떤 진실은 그 나이가 먹기까지는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못 깨닫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월이 해결해 주는 문제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세월이 더 많이 흘러도 못 깨닫는 인간들이 많습니다. 부모는 그런 것을 기대하면서 자식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마라, 그래서는 안 된다, 자식들이 그런 거 알아주지도 않는다, 그런 논의는 너무 싸구려 논의고 그거는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이런 것은 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것을 물려주면 저 새끼들이 나를 극진히 사랑하고 이 은혜를 죽을 때까지 기억하겠지.” 그런 생각이 있으면 차라리 그 돈 자식에게 물려주지 말고 은행에 갖다 맡기고 그냥 자식하고 좋은 관계를 가지고 적당히 관계를 갖고 사십시오. 그것을 몰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식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그 과정은 자식을 사람 만드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그 엄마 아빠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사회적으로 이렇게 성공하고 지위에 오르고 재산도 꽤 모으고 누구한테 도덕적으로 비난을 안 받으며 살아왔는데 내가 자식은 뼈저리게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내가 인간이 덜된 것입니까?’ 그러면 ‘그렇습니다. 덜된 것입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돈도 모으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회사 사장으로 교수로, 학자로, 목회자로 그런 거지 한 인간으로서는 아직 인간이 덜 되었다.’ 그 엄마가 아빠가 참으로 인간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는 아이들이 더 잘 압니다.
그래서 아이를 버리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인 버림이나 살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립된 인격으로 자기가 주체성 있는 삶을 살아가면서 아이와 올바른 사랑의 관계를 맺고 그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베푼 모든 따뜻한 사랑이 어떤 대가가 되어서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이 아이를 사랑하고 적어도 이 아이가 부모인 우리들이 죽고 어느 날 철이 없어서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모르고 인생을 막 살다가도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인생의 어느 때에 이미 죽고 없는 부모인 우리를 생각하면서 ‘엄마, 아빠, 나 인생을 사는 게 너무 힘들어.’ 그리고 그 품이 그리워질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지난주에 여러분에게 읽어준 시에 나오는 것처럼 하늘나라에 간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한 손으로 엄마의 젖가슴을 만지며 인생에 일어났던 가장 억울한 일 하나를 고자질하고 그 품에서 엉엉 울고 싶다고 했던 그 마음이 자식들의 가슴에 먼 훗날 살아있으면 여러분이 비록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을 산 사람 아니고 사회에서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한 인간으로서 성공한 삶을 산 것입니다.
V. 적용과 결론
오늘 가서 한번 여러분의 아이를 들여다보십시오. 그게 너무 쑥스러우면 여러분이 젊은 엄마였을 때 함께 찍은 아이들의 사진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그 해맑은 눈망울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엄마가 돈 많이 벌기를 바랐을까요? 아빠가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 되기를 원했을까요? 아닙니다. 한 인간으로서 이 아이들은 엄마 아빠와 함께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렇게 각기 힘든 무거운 인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결국은 어떻게 자기 인생의 주체로서 이 모든 무게를 감당하며 살 수 있겠느냐 그게 결국은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를 통해서 그런 인생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합니다. 이것을 찾으려고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예수 믿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가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후일에 나의 행복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나눠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이것임을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삶의 사태에 직면해서 그것을 맞설 수 있는 용기와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은 이 아이가 죽임을 당할 상황이 되자 이 엄마는 차라리 이 아이와 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아이의 생명을 보존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엄마의 생명이 며칠 전에 낳은 자기 자식의 생명과 결탁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엄마의 사랑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충만한 생명과 사랑이 우리가 처음 예수 믿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남이 보기에는 비교적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매일매일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그 자식 때문에 내 인생의 존재 기반 자체가 흔들릴 정도는 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렇게 나 자신을 지탱해 갈 수 있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나는 아이와 함께 나눌 수 없는 독립적인 실존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분신처럼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도 그것이 단지 본능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기도하고 말씀 앞에 깨뜨려지고 변화된 삶을 살려고 하는 것도 결국은 잘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잘 사는 인간의 삶을 위해서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충만한 능력과 은혜, 이것을 구하며 살려고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말해봅시다. 여러분이 예수를 대충 믿고 형식적으로 믿어서 이런 생명과 사랑을 충만하게 누리는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은혜와 진리에 갈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가지고 자식들을 끝까지 사랑해서 자녀들의 마음에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엄마 아빠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