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감사의 이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에베소 지역을 전도하던 사도바울이 3년 동안이나 한 지역에 머물며 성도들을 가르치고, 교회를 굳건히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은혜를 받은 사람이 에바브라디도라는 인물이었고, 이 사람이 바로 골로새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1장 7절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너희가 에바브로에게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요”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로마 옥중에 있었던 사도 바울을 에바브로가 방문하였고, 이때 아마 골로새 교회의 여러 가지 형편들에 대해서 보고를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 소식은 즐겁고 희망적인 소식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골로새 교회를 현실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이단적인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골로새 교회를 그토록 괴롭혔던 이단적인 가르침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지주의의 강력한 영향이라고 주장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유대교의 이단적인 신비주의가 위협을 하고 있었다고 진단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 바깥에 있는 유대인들이 조직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한 그런 분위기였다고 주장을 합니다. 최근까지의 연구를 보면 이 모든 주장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 최근의 평가입니다. 짧은 시간에 이 내용들을 모두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요약을 하자면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유대인들의 거짓된 가르침과 이교도들의 잘못된 철학 사상들이 함께 혼합주의를 이루면서 실질적으로 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골로새라는 도시는 밀레토에서 약 200km 정도 내륙에 떨어진 도시입니다. 예전에는 아주 번영한 도시였는데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쯤이면 아주 현저히 낙후된 지역으로 전락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 골로새는 많은 지역의 사람들이 여행을 하고 왕래하는 요충지에 있었기 때문에 각 지방에서 여러 가지 사상과 이방인들의 종교들이 유입돼 들어와서 거기에서 혼합주의를 양산해 내기에 적합한 지리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골로새 교회의 어려운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 골로새서에서 그 유장한 우주적인 기독론을 설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혼합주의의 이단적 가르침의 유혹과 위협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많은 골로새 교인들이 참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붙들고 신앙생활 했기 때문입니다.
II. 가장 큰 감사의 이유
그러면서 사도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께 올릴 최고의 감사의 이유를 또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감사의 제목을 두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첫째는 빛 가운데 살게 하신 은혜였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기업의 상속자가 되게 하신 은혜였습니다. 이 두 가지를 차례대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A. 빛 가운데 살게 하심
첫째는 빛 가운데서 살게 하신 은혜였습니다. 이 빛은 의심할 여지없이 진리를 아는 지식의 빛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듯이 골로새서 2장에서부터는 참된 진리가 아닌 것들이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장면들을 그리고 이에 대한 경고를 심각하게 꽤 긴 분량을 할애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철학과 헛된 속임수였습니다. 이것은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유대교의 초보적인 율법의 가르침을 그리스도의 속죄를 대신하려고 하는 시도라고도 주장되고, 또 이교도들 속에 있었던 진짜 철학의 사상들이 이성에 호소하는 형태를 가지고 종교적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지시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든지 간에 아무튼 이것은 세상의 초등 학문이었고, 이것들이 골로새 지역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고 교회의 성도들까지 위협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빛이 아닌 진리가 결핍된 어두움 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뒤편에는 거짓된 가르침이 나오는데 아마도 율법을 잘못 적용한 것 같은 이 가르침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성취하신 절기와 음식에 대한 강조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천사들을 숭배하는 사상까지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중보자라고 하는 복음적인 사실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마지막 뒤편에는 금욕주의에 대한 강조, 이것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데 이는 아마도 율법이나 혹은 이교도의 철학에 호소한 인본적인 금욕주의를 가리키는 것일 것입니다. 이런 모든 복음에 배치되는 위협적인 사상들에도 불구하고 골로새 교회 교인들이 빛 가운데 살게 해 주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최고의 감사를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매스컴을 통해 문화를 통해 그리고 매일매일 마주치는 현대의 사조들을 통해서 우리도 모르게 이 진리가 아닌 헛된 철학, 그릇된 가치관, 거짓된 가르침,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섬기라고 하는 물질 숭배의 사상, 혹은 자아 숭배의 사상 같은 것들에 매순간 노출되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 밖을 떠나고 나면 어디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진리의 빛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지난 1년 동안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날개 그늘 아래 살게 하셨습니다. 어거스틴의 표현대로라면 젖비린내 나는 어린 아이를 당신의 교회인 어머니는 그 품에 안고 젖을 먹이듯이 진리로 자신을 길렀다고 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지식의 빛이 우리에게 수시로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믿음도 지금은 아마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골로새 교회에 베푸신 은혜였고 또 우리 교회에 베푸신 은혜였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지식의 빛 가운데 살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지식의 빛에 부합하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윤리의 빛 속에서 우리를 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같이 너희의 빛을 비춰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하나님께 세상 사람들이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우리아 이 세상에 빛이 되는 방법은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지식과 윤리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기독교 사상이라는 테이피스트리를 형성할 때 그때 우리가 진정으로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진리를 알뿐만 아니라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 이 진리에 부합하도록 살게 하는 것은 우리의 결심을 사용하시지만 우리의 결심으로 그것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에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지만 선을 행할 때에는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불신자들이 선을 행할 때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으로 그를 감화시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지는 않지만 성령의 은혜로 눈이 밝아져 양심에 자극을 받고 사람들 마음속에 심어놓으신 율법을 이해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양식에 맞게 행동하게 되는데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가져다줍니다. 그 은혜가 반복되고, 반복되고, 반복됨으로써 이 사랑은 순간의 정서의 움직임이 아니라 성향이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경향성은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지향성을 형성해서 그것이 우리의 성품의 일부가 되게끔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은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라고 말할 수 있고, 이 사랑의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의무에 헌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런 은혜를 우리에게 늘 베푸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조금이라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 안에 있을 때만 우리를 붙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강할 때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이 아니라 약한 순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매순간 붙들어 주셔서 주님의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윤리의 빛 가운데서 살아서 짐승 같은 사람들이 되지 않을 수가 있었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신자가 신령해지면 신령할수록 그의 사고방식이나 마음의 움직임도 신령한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좇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신령함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신자의 마음은 세속적이 되어서 감사의 조건조차도 세속적인 것에서만 찾으려 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서 하나님도 인간의 욕망을 다 만족시키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점증하는 욕망의 증대 앞에서 아무리 이 세상에 있는 자원들을 많이 모은들 그것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고 욕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 언제나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러한 짐승 같은 삶을 살지 않도록 우리를 매순간 주님의 은혜로 붙들어 주셨기에 오늘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마 붙들고 주님 앞에 서 있게 되었으니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상속자가 되게 하심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빛 가운데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업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라고 말입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성도들의 기업의 참여자들이 되는 것을 감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라고 쓰여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을 참여자가 될 수가 없는 그럴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럴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끔 그 유업을 받은 사람처럼 살 수 있게끔 우리를 변화시켜서 그 유업을 받는 것을 합당하게 만들어 주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기업, 희랍어로 ‘클레로스’(kleros)라고 하는 단어는 사실 구약의 언어입니다. 옛 언약의 용어를 새 언약에 신학적으로 적용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이 기업이라고 하는 것을 히브리어로 ‘헬레끄’라고 하는데 이 헬레끄가 뭐냐 하면 ‘할라크’의 명사형입니다. ‘취하다’ 그 헬레크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기에 앞서서 제비를 뽑아 땅을 지파별로 나눕니다. 그러면 지파별로 나누어진 땅은 다시 씨족별로 나뉘어지게 되고, 씨족별로 나누어진 넓은 땅은 다시 가족별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비를 뽑은 그 땅의 자기 몫이 있습니다. 그 몫을 헬레끄라고 하고 그것이 여기에서 ‘끌레로스’라는 단어가 되었으니 기업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할당된 자기의 몫입니다. 하나님 땅인데 하나님이 그것을 떼어서 자기의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주신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자, 하나님이 한 사람, 아브라함을 택하신 후 그로 가정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을 번성시켜 씨족이 되게 하시고, 그 씨족들을 애굽에 보내어 거기에서 거대한 민족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종살이하던 그들에게 땅을 유업으로 주십니다.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노예살이 하는 이유는 땅이 없기 때문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땅이라고 하는 유업이 없으면 그는 그 땅에서 낯선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늘 자기의 정체성을 ‘나는 이 땅에 우거하는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기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땅을 주십니다. 그것도 저 아프리카의 한적한 곳이나 시베리아의 외딴 벌판이 아니라 당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에 하나님이 이 땅을 주셔서 선진국과 어깨를 겨루며 사는 이스라엘이 되도록 알박이처럼 그 땅 한 가운데다 박아놓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땅에서 자기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샬롬을 누리며 독특한 존재와 삶을 삶으로써 모든 이방의 나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존재의 울림이 있는 국가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바로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는 언약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한 옛날 방식의 경륜이 구약이고, 이 약속에 대한 새로운 방식이 바로 신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땅을 중심으로 백성들을 모으시고 당신이 친히 왕이 되심으로써 그 백성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모든 이방사람들에게 보여주어서 그들도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육적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성공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용도가 다했을 때 그 육적인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멸망하여 사라지게 되었고 그것은 곧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았습니다.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질 것인데 이제는 면적으로 잴 수 있는 넓이를 가진 땅이 아니라 각 사람의 마음속에 영적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 때문에 그들이 있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나라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러니까 이 나라는 본질적으로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나라이고, 물질세계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영적 세계에 속한 나라이기 때문에 면적을 잴 수 있는 땅 같은데 사람을 모아놓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국경선을 정하고 사람들을 왕래하지 못하게 한다 할지라도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어디든지 영혼의 자유함이 있고 그들이 하나님과 샬롬의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모든 문화와 삶 속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하며 살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백성들,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하나님이 그들의 소유가 된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하지를 보여줄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입니다. 가나안 땅은 수없이 제비를 뽑아 나누었지만 그러나 이방인들을 위한 기업의 몫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나안 땅은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 안에서 살았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 것을 바라본 것이었고,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샬롬을 누릴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한 평의 땅도 상속 받을 자격이 없는 이방인이었던 골로새 교회 교인들과 오늘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그 기업을 물려받을 수 있는 참여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복음 때문에 우리들이 그 기업을 누릴 수 있는 사람으로 자격이 갖추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를 죄인의 지위에서 의인의 지위로 바꾸시고, 죄의 종 되어 살던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의 상태로 우리를 바꾸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공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대속을 통해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신앙의 타락은 구원을 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는 사람들은 세상은 작아 보이고 예수는 커 보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은혜를 하찮게 생각하고 나면 세상은 엄청난 중요한 존재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고, 예수는 아주 작은 존재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기업을 물려받은 사람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든 자원을 누리며 살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지상의 자원을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예전에는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세상 자원은 우리의 법적인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부터 이 세상의 모든 지상의 자원들도 합법적인 우리의 유산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사람들이 불법적으로 이 세상의 자원들을 점유하고 있어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그것을 획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당당히 그 유산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신분이 되었고,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많은 이 지상의 자원들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결핍할 때도 있었지만 그러나 먹고 입고 마시고 누릴 수 있도록 적절한 자원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고, 또 우리는 그것들을 소비하면서 육체의 생명과 건강을 유지했고 인간다운 품위를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도 남는 자원들이 있어서 자신보다 더 어려운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자원을 나누어주며 그들을 도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주님의 커다란 은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지상의 자원들을 우리에게 풍족히 주셔서 한 해 동안도 누리며 살게 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힘쓰고 애써서 생업에 종사함으로 얻은 열매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이 손이 행한 대로 그 열매를 얻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요즘 배추 값이 폭락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 한 쪽이 쓰립니다. 그 농부들이 열심히 가꾸어서 가을에 튼실하게 배추를 길렀습니다. 그래서 끌어안으면 한 포기가 될 정도로 그렇게 배추를 잘 길렀는데 그게 마트에서 500원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산지에서는 얼마에 가져왔겠습니까? 거저 갔다 공급해 줬을 리는 없으니까 거기에서 운반비, 이윤 다 하고 나면 산지에서는 그저 1~200원도 안 주고 퍼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공급과 수요가 안 맞은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선진국에서는 정확하게 예측을 해서 기획 영농을 합니다. 그러면 소비자는 적절한 가격에 구할 수 있고 생산자는 적절한 이윤을 보장을 받습니다. 우리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정부를 안 믿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말을 해도 반대로 할 때에 덕을 보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경제학에서 콘-호그 사이클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미국의 예를 든 것인데 옥수수 값이 폭락을 합니다. 그러면 사료 값이 엄청나게 싸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돼지를 사육하는 비용이 똑 떨어져서 기대 이익이 늘어납니다. 돼지를 잔뜩 삽니다. 그리고 이제 그 싼 옥수수를 먹이면서 저렴한 생산비로 돼지를 생산해 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돼지 값이 폭락을 합니다. 그러니까 다 처분을 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 해에는 사람들이 옥수수를 안삽니다. 옥수수 값이 폭락하니까 그 다음에 옥수수를 안 기릅니다. 그러면 옥수수 값이 올라갑니다. 그래서 옥수수 곡물 값과 돼지 값이 이렇게 쌍곡선을 그리면서 계속 교차를 합니다. 이게 콘-호그 사이클입니다.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지금은 정확하게 통계적으로 예측해서 곡물 값을 조정합니다. 그것도 안 되면 매점매석을 통해서 다 조절하는 것입니다. 인류가 식량 때문에 난리치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지금 이 세계에 있는 농토를 잘 가꾸면 120억까지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오대오 연안에 어마어마하게 기름지고 넓은 땅들이 몇 년에 한 번씩 곡식을 안 심습니다. 왜냐하면 곡물 값을 조정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은 힘들게도 농사를 안 짓습니다. 비행기가 날아가면서 볍씨를 확 뿌리고 나중에 추수하면 됩니다. 왜 제가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정부를 안 믿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떨어진다고 공고를 해도 계속 기릅니다. 남이 그 말 듣겠지 하고 자기는 그냥 갑니다. 그러니 농부들이 그 애써 기른 배추를 그냥 트랙터로 갈아엎습니다. 그거 보면서 가슴이 아주 아립니다. 왜냐하면 내가 옛날 배추 장사를 해보았습니다. 특히 김장배추. 그래서 그 심정이 어떤지를 압니다.
우리가 애써 성실하게 수고한다고 항상 우리의 마음에 만족한 대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지상의 자원을 하나님이 주셔서 궁핍하지 않게 살게 해 주신 것도 은혜인데 또한 하나님은 천상의 자원을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이 우울한 소식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이 골로새 1장에 나오는데 거기서 그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주신 신령한 지혜와 총명, 순종할 수 있는 능력과 열매 맺는 삶,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가는 지식의 성장,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힘으로 모든 고난을 이기는 기쁨의 삶과 인내하는 생활,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가게에서 사거나 농토에서 거두어들일 수 있는 작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열고 부어주시는 신령한 은혜의 자원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육신의 필요한 지상의 자원들을 1년 내내 공급해주셨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불순종할 때에도 주님이 주시는 밥을 먹고 힘을 내서 불순종했습니다. 성령 충만할 때만 이것을 주신 것이 아니라 가슴이 메마르고 침체에 빠졌을 때에도 우리의 육신의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은 언제나 공급해 주셨습니다. 지난 한해도 우리에게는 기쁘고 행복하고 인생에 기억하고 싶은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견디기 힘든 영혼의 괴로움도 있었고, 저녁 때 눈을 감으면 아침에는 이 지상에서 눈을 뜨고 싶지 않은 절망적인 시련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마다 우리의 영혼에 필요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아시고 그에 합당한 천상의 자원들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넘어질 때도 있었지만 미끄러질 때도 있었지만 아주 엎드려져 원수의 이빨에 씹히거나 그 발굽 아래 짓밟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실족한 자를 붙드시고 미끄러지는 자를 건지시는 에벤에셀의 은혜가 그때그때마다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마 붙들고 이만큼 살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핍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풍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게 하셨고, 우리에게 미치는 고난의 때는 아팠지만 고난보다 더 큰 우리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환란은 우리가 얼마나 무능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었지만 그래서 그 환란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좋아 보이는 것을 통해서만 좋은 것이 우리에게 온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셔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한 해 동안 살아온 모든 날들이 주님의 은혜가 아닌 때가 없었고 그리고 돌이켜보면 우리가 잊어먹고 살아온 많은 사건들 하나하나가 사실은 감사의 제목이었고 찬송할 이유이었던 것입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도와주시네
III. 적용과 결론
그렇습니다. 욕망의 끈끈이에서 우리의 마음을 떼어 잠시 하늘을 우러러 보면 그리고 우리가 살아온 날들의 그 힘겨웠던 발자취들을 돌아보노라면 우리의 삶 한 순간, 한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던 적이 없고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노래가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그 은혜 때문에 전날의 한숨은 변하여 찬송이 되었고 매순간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던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우리의 삶의 환경들은 주님을 향해 마음을 쏟는 기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매일같이 주님을 거스르고 대항하며 사는 막 되먹은 인간들을 향해 주님을 막 대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젖내 나는 얼간이와 같은 우리들을 당신의 교회의 품에서 입히시고 젖을 먹이면서 우리를 보양하셨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당신은 진노를 당하시고 우리는 사랑을 받게 하셨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주님의 은혜를 우리의 가슴 속에 칼로 새겨서 피를 발라도 지워지지 않게끔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각을 돌이켜 지난 한 해 동안에 우리의 삶에 감사의 조건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생각하고 주님을 찬송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향한 최고의 감사는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소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 진리의 빛, 그 은혜의 빛 아래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사람답게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던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이 너희 안에 계시는도다 하고 고백을 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렇게 우리의 눈을 들어서 한 해 동안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그 분을 송축하기를 원하시니 주님의 기대에 부응하며 사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