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갈망함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 42:1-2)
녹취자: 이새봄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42편은 전형적인 탄원시입니다. 이 시는 고라자손의 시라고 되어있는데 구약학자 들 사이에서는 고라자손이 쓴 책인지 아니면 다윗이 쓴 시를 고라의 집안에서 보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저는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지간에 그리 큰 문제가 안된다고 보고.
이 시편 41편의 정황은 당시 주군이었던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서 망명길에 올랐고 요단강 건너편으로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성소가 없었고 법궤조차 예루살렘에 두고 왔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이북 땅에서 하나님을 만나던 성소의 예배를 그리워하면서 지은 시가 바로 이 시편 42편인 것입니다.
시의 표제에 보면 마스길이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지혜롭게 하다’라는 뜻이고 이런 시들을 잘 읽고 반복해서 묵상할 때에 지혜롭게 된다라고 하는 의미라고 여겨집니다. 아무튼 이 시편 42편 1절에서 이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거룩한 갈망을 하나님 앞에 표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라고 하는 노래였습니다. 이 시를 지은 사람이 고라의 자손이라고 생각하든, 혹은 다윗이라고 생각하든 얼마나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었겠습니까.
왕국은 악한 자들의 손에 떨어졌고 누가 보더라도 이것은 패역하고 패륜적인 반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절실한 기도제목은 하나님이 반란을 일으킨 악인들을 토벌하시고 자신들에게 다시 왕국을 되돌려 주시는 것이 최고의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해달라고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는 가장 커다란 어떤 열망과 마음의 욕망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토로하는 내용이 바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처럼 내 영혼이 주님을 찾기에 목마릅니다, 라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간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그가 행하는 일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 사람이 선한 일을 행할 수도 있고, 이런 저런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그가 해야 할 피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에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있으니 바로 그의 욕망입니다. 그의 욕망은 그가 누구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구도 간섭함 없이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고요한 욕망, 그 욕망에 따라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고 있다 할 지라도, 마음에서 솟아나는 욕망이 악한 것이라면 그는 선한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 이 시인처럼 예배할 자유를 박탈당하고 하나님을 경배할 기회를 잃어버린 채, 남의 나라 땅에서 조롱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마음속에서 시인처럼 주님을 향한 갈망이, 욕망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임에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우리가 하던 모든 일들로부터 손을 멈추고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욕망을 잠잠히 살피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욕망은 결국은 언젠가는 우리의 몸을 통해 다른 사람과 관계를 할 것이고 또 이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믿음의 선배들은 ‘정사’라고 불렀습니다. 꼼꼼하게 자기 자신을 살핀다, 라고 하는 의미의 정사, ‘scrutiny’라고 하는 이 정사, ‘scrutinize’라고 하는 이 자기 자신의 정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기독교가 한없이 가벼워져서 그래서 마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있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이 정신을 차리시고 우리에게 돌아와야 되는 것처럼 그렇게 모든 주객이 전도된 바뀐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분명하게 이 시대의 정신에 의해서 기독교의 복음이 재편성된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 어느 기독교TV에서 조엘 오스틴의 방송을 내보내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조엘 오스틴은 미국에서 지금 가장 인기 있는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고, 지금은 오만 명이 넘는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신뢰하지 않습니다. 제가 외국에 갔을 때 학자들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조엘 오스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래서 제가 그 사람들에게 얘기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에 깊이 심취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하면, 완전히 이 시대의 코드를 정확하게 읽고 있고, 저도 외국에 가서 가끔 숙소에서 탁하고 텔레비전을 리모콘으로 켰는데 그 사람이 나오면 저건 볼 필요가 없는데 내려놓고 빨리 자야되는데 하면서도 리모콘을 들고 한 삼십 분동안 보고 있습니다. 그 현란한 말솜씨, 배우 같은 외모, 그 감미로운 목소리, 그리고 그 세련된 매너와 탁월한 수사법, 이런 것들이 설교자인 제 마음까지도 끕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우리의 신앙의 모든 중심점에 사람을 둔다면 거기서 나오는 모든 표현과 가치들이 우리 보기에 훌륭해 보여도 그것은 토대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 중심으로 하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고전적으로 성경의 진리를 따라서 믿는 신앙은 이 세상에서 환영받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더 많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진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체득하고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선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세상정신에 의해서 퇴화되고 융화되어버리는 복음을 믿을 때 사람들이 정말 행복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고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진리를 향한 갈망이 있고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안에서 살 때에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감각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돌아가서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이 시편 42편은 우리에게 그런 점에서 신앙의 진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주님의 은총을 기다리며 주님께로 돌아가고 우리가 주님 앞에서 우리 삶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이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하나님을 갈망한다, 라고 간절히 자기의 마음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신앙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지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사슴들이 아주 많이 있고 가을이 교미기입니다. 가을철이 되면 사슴들은 이제 짝을 찾아서 들판에 나오게 되고 이때에 사슴의 신체에는 변화가 찾아오게 되는데, 타는 듯한 목마름이라고 합니다. 발정한 사슴들이 이제 암컷을 찾아서 길을 나서게 되고 때로는 한 마리의 암컷을 두고 여러 마리의 사슴들이 목숨을 걸고 그 뿔을 가지고 서로 싸움을 하게 됩니다. 이때의 사슴의 특징이 타는 듯한 목마름인데, 발정난 사슴들이 짝을 찾기 위해서 나섰다가 이제 이 목마름이 엄습하게 되면 물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아시는 바와 같이 팔레스타인은 아무데나 그렇게 물이 넉넉한 땅이 아닙니다. 물을 찾게 되고 마침내 물을 마시지 못한 이 사슴의 눈에는 신기루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 멀리 샘물이 보이면 미친 듯이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가고, 가보면 다시 그 신기루는 저만큼 멀리에 있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그 뜨거운 팔레스타인의 태양 볕 아래서 쓰러지고 마지막 죽을 때에는 본능적으로 앞발로 땅을 파다가 죽어간다고 합니다. 이러한 죽어가는 사슴들의 시체를 보면서 시인은 자라왔고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목마른 마음이 이 사슴들이 시냇물을 찾다가 땅을 파고 죽어가는 그것과 아주 훌륭하게 유비가 된다, 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일이면 예배당에 가고 헌금하고 적절히 선교활동하고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의무들을 감당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죠.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정말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를 보면 많은 교인들의 신앙생활이 마치 그렇게 특별한 사랑은 없지만 애들 때문에 마지못해서 사는 중년 이후의 부부처럼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죠. 그게 선교에 도움이 안 됩니다. 왜냐면 예수를 믿는 사람의 가장 큰 의무는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 세상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똑같은 이유에서 행복해지는 것은 선교에 조금밖에 도움이 안돼요. 세상 사람들은 동의가 되지 않는 이유 때문에 행복해질 때, 그때의 존재 자체가 최고의 선포가 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질서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많아서 행복한 것, 세상 사람들도 할 줄 압니다. 승진을 해서 즐거운 것 그것도 할 줄 압니다. 성형수술을 했는데 결과가 좋아서 거울을 보니까 딴사람이 됐더라, 그래서 출입국관리소에서 여권을 두고 승강이를 할 정도가 됐더라, 그래서 나는 요즘 행복하다, 세상 사람들도 그런 것은 할 줄 압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도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 자신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건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거죠.
저희 교회에 안수집사가 한분 계십니다. 방황을 많이 하다가 한 7-8년 전에 우리교회 오셔서 많이 변화되셨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에게 전도를 하는데 동생인가, 동생의 남편이 예수를 끝까지 안 믿어서 열심히 전도를 했는데 이들이 암 말기에 걸렸답니다. 오빠도 나 같은 사정이 되면 아마 그렇게 쉽게 예수를 믿지 못할 거라고. 이분이 실제로 매년 꼬박꼬박 정기검진을 하는데 몸이 안 좋은거야.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혈액암 3기랍니다. 그런데 그 순간 자기 동생 생각이 나더랍니다. 그래서 내려가서 “봐라. 다행히 내가 암에 걸렸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만약에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면 신앙의 가치가 무엇이 있겠냐. 그것이 신앙이다.” 그래서 심방을 병원에 갔는데 머리를 빡빡 깎고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행위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행위가 당신 자신을 향한 갈망에서 우러나오는 행위인가 하는 것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나라를 되찾게 해주십시오, 편안한 왕궁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다시 우리가 그렇게 그 지위를 되찾고 월급을 받고, 그리고 그렇게 다시 우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는 벼슬을 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 가장 슬픈 것은 이 이방의 땅에 쫓겨나 있으면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고 하는 현실입니다.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매 주일 약 2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추정합니다. 그 예배가 무언의 예배입니다. 속으로 찬송을 부르는 예배, 그리고 속으로 기도하는 예배, 그리고 설교를 하기 어려운 예배.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 우리의 영혼을 바꾸고, 바로 그 갈망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역사가 나타나고 기도할 때에 그 기도가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게 만들고 그 갈망에서 솟아나오는 섬김이 하나님 앞에 커다란 기적의 역사를 가져오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사람이 있는데, 중세시대에 스콜라주의 신학을 완성한 위대한 인물입니다. 가톨릭에서는 그 사람을 자기네 선조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보편 교회의 교부입니다. 이 사람이 수도사이던 시절에 하나님이 이렇게 위에서 내려다보시니 젊은 수도사 한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때로는 금식하고, 때로는 밤을 새우며 하나님 앞에 그렇게 부르짖으니, 그랬더니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퀴나스야. 나의 종 아퀴나스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아퀴나스가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이제껏 하나님이 제게 주신 은혜로 충분합니다. 나에게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너는 무엇 때문에 밤을 새워서 고행을 하며 금식을 하며 나에게 매달리느냐.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랴.”
그러자 수도사는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인가를 주시려거든 당신 자신을 나에게 주십시오. 나는 당신의 것이고 당신은 저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한 것이었습니다.
(찬송)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 찾으며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기도든 섬김이든 선교든 전도든 무엇이든지 간에 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마음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여러분, 직장에서 전도해보면, “예수 믿으세요.” “쉬는 날 한번 나와 보세요.” “예수님 한번 믿어보세요.” “예수 믿으면 참 좋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느 한 사람을 딱 꽂고 매일 기도하십시오. 심지어는 금식을 하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전혀 믿을 것 같지 않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변화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의 집중과 갈망입니다.
여러분, 겨울에 우리 어렸을 때, 비디오도 없고 게임기도 없던 한 50년 전 시절에 늘 가지고 놀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돋보기입니다. 특히 겨울에, 춥습니다. 마루에 나와서 돋보기를 탁 놓고 탁 비추면 먹종이를 가져다놓고 비추면 불이 붙습니다. 헝겊도 탑니다. 그렇게 추운 날씨인데도.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요? 빛을 다 모아가지고 한 지점에 쪼이니까 그렇게 추운 날씨에 햇빛이 모여서 물건을 태울 정도의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간절한 갈망이 담긴 기도, 갈망이 담긴 섬김, 갈망이 담긴 전도, 갈망이 담긴 예배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우러러 간절할 때 거기에서 우리의 영혼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떤 한 사람의 말이 영혼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이 있을 때, 그것은 언변의 화려함이나 지식의 크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태워진 불붙은 그 한마디의 말이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화염처럼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런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 언젠가 우리가 가진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갈망들이 사라져가는 이유가 뭐 때문입니까? 그것은 영적인 무감각 때문이고, 바로 우리의 죄, 은근한 하나님을 향한 게으름과 나태 같은 것들이 스며들어, 이런 불순한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들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새벽기도나 혹은 예배를 드릴 때 보면 아주 어린 아이들, 이제 초등학교나 중학교 밖에 안 된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주먹을 쥐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광경을 봅니다. 그러면서 때로는 어른들도 못 만나는 하나님을 아이들이 만납니다. 주님은 정말 좋아하시는 것은 바로 그렇게 당신을 향한 갈망하는 마음, 그 마음이 하나님이 거처하시기에 가장 좋은 곳입니다. 이 봄에 하나님을 향한 이런 갈망을 회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 갈망 속에서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이 갈망 속에서 주님을 향해 사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같이 한마음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하실 때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고 특별히 주님이 여기에 우리의 직장을 주시고 선교의 사명을 주셨으니 정말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달라고 한마음으로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