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말을 들으심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 관한 교훈입니다. 이 기도의 교훈이 담겨 있는 문맥은 마태복음 6장에서 시작하는 “외식하지 말라”는 교훈의 맥락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외식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일 먼저 구제에 있어서 외식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한 식으로 구제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그렇게 구제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외식하지 말라는 교훈이 한 번 더 반복되는데 기도와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즉,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기도함으로써 좋은 평판을 얻으려 하였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의 잘못된 모본을 따르는 유대인들을 겨냥한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제자들이 그냥 외우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처음 가르침을 받았을 때 어쩌면 그 기도 속에 담겨 있는 깊은 감화도 함께 받았을지 모르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차가운 기도의 내용만 남아서 사람들이 입술로만 암송하는 기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은 그러한 시대의 맥락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면서도 그 기도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하는 마음이 참 진실한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기도의 능력은 자기 바깥에서 오는 어떤 큰 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마음 안에서 마음과 함께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열렬한 기도는 반드시 진실한 마음과 그리고 순종하는 생활에서 힘을 얻어 우러나오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든지 이미 그 마음을 알고 있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Ⅱ. 마음의 말을 들으심
저는 오늘 주님의 가르침을 토대로 마음의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에 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도와 관련시켜서 말씀드리려 합니다.
A. 이방인 : 중언부언함
첫째는 이방인들의 중언부언함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중언부언하다’고 하는 단어는 ‘바탈로게세테’라고 하는 명령형입니다. ‘로고스, 로고, 로게’는 말하는 것입니다. ‘바토스’라는 단어가 합쳐졌는데 ‘바토스’는 말더듬이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말을 하는데 더듬는 말로 말을 하는 것, 그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말 성경에서 중언부언이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게 무슨 뜻입니까? 말을 더듬는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마음속의 언어가 입으로 정확하게 나오면 말을 더듬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머리에서 생각하는 것이 정확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즉, 자기가 말하고자 의도하지 않은 말이 두 번 나오거나 빨리 나오지 않고 다른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더듬이입니다. 그러면 핵심이 무엇입니까? 발화된 말과 그 사람 속에 있는 생각이 마음속에 있는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분리된 것입니다. 그게 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중언부언이라고 하는 말도 매우 얼토당토하지 않은 번역입니다. 왜냐하면 중언부언이라는 말은 한자로 한 말을 또 하고 겹치는데 말을 또 겹치게 이야기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게 왜 잘못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동일한 내용을 세 번 기도하셨습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여러 번 똑같은 표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뭐냐 하면 말을 더듬는 사람이 마음에 없는 말이 튀어나오듯이, 다시 반대로 말하면 튀쳐 나온 말이 마음에 없는 언어이듯이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일체의 겹치는 말이 없이 유려한 내용으로 기도를 한다 하더라도 핵심은 말의 언사는 계속 발화되는데 그 내용 중 일부나 전부나 마음속에 없을 때 그게 바로 여기서 이야기 하는 ‘바탈로게세테’라는 말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주일과 지지난 주일에 말씀드리기를 기도에 있어서 참된 능력이 바로 두레박을 던지듯이 마음 깊은 곳에서 언어를 건져 올리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의 행위이고, 비록 적은 표현 혹은 반복되는 표현이라 할지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표현으로 그렇게 주님께 드릴 때 거기에서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오해를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그들의 기도를 그릇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시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뜻은 하나님께 언어로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고 주님 앞에 감추지 않고 주님이 그것을 알아주시기를 마음속으로 희망하면 그 마음이 곧 기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명상이 곧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정통적인 기도에 관한 교리가 아닙니다. 정통적인 기도에 관한 교리는 마음속에 있는 소원이나 혹은 고백을 간구의 형태로 마음속에서 언어화하여 하나님께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기도는 누가 뭐라 해도 언어입니다. 하나님을 관상하면 관상하는 것, 하나님을 묵상하고 있으면 그것이 기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도에 관한 올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기도는 반드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마음속에서 언어화되어 하나님을 향한 간구나 탄원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자신의 마음에 있는 어떤 소원을 언어화하면서 자신에게 암시하거나 그저 평범하게 진술해 버리는 것은 따라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당시의 많은 이방인들은 또 이런 이방인들의 잘못된 신관에 의해서 침투된 가르침들은 말을 많이 하는 것 자체가 신들로 하여금 자기 형편을 이해하게 만들거나 혹은 말을 많이 하는 것 자체가 어떠한 치성을 드리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올바른 기도관이 아니었습니다. 올바른 기도에 관한 견해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진 분이신가에 대한 매우 분명한 이해, 그것에 기초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신비체험과 구약선지자들의 신비체험이 아주 뚜렷하게 구별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방인들의 신에 대한 신비체험은 탈혼이 되거나 혹은 지성이 완전히 분리된 상태에서 신에 대한 경험을 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신비상태입니다. 그러나 구약선지자들은 어마어마한 위엄을 가지신 하나님, 신비의 극치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면서 때로는 경외심, 두려움, 감동, 사랑, 은혜, 이러한 것들에 아주 형언할 수 없는 신비에 사로잡히면서도 항상 지성이 올바르게 작동하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선지자들의 신비경험입니다. 그래서 참 신앙은 어떠한 신비의 체험 속에서도 지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참 신앙의 견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가르치시면서 어떠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지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여기에 나오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사람을 넷으로 나누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우리 인간이라고 독특한 개별성을 유지하게 만드는 인간을 인간답게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그 모든 영혼의 기능입니다. 그것을 마음이라고 말하는데 그래서 마음을 점령하면, 사실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뜻’은 그 마음 중에서도 특별히 지성의 기능을 가리킵니다. 비유를 하자면 마음이 꽃잎이라면 뜻은 그 꽃잎 한 가운데 있는 꽃술과 같습니다. 그래서 지성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때 그것에 의해서 마음이 그 생각에 장악됩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이 이렇게 중언부언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책망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일깨우시려고 하였던 교훈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너희의 기도 언어가 너희의 마음과 분리되지 않게 하라는 것, 이것이 핵심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너희가 나에게 토해 놓는 모든 기도의 언어가 너희의 마음에서 솟아나는 것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실행하기가 어려우면서도 쉽고, 쉬우면서도 매우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혀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해보라고 하여도 잘 안 됩니다. 그게 사랑의 힘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나쁘게 말하거나 혹은 때로는 거짓말을 해도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나쁘게 말할 수도 없고 그리고 차라리 말을 듣는 것이 낫지, 나쁘게 말할 수도 없고 마음에 없는 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게 사랑의 힘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연극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사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기도의 은혜가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마음에 없는 말을 기도로 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게 아니라 그것은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고 기도의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기도를 안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언어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뭔가를 기도할 때에는 그게 마음이 없는 말이 되기가 매우 쉬운 것입니다. 그 사람 마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이 아니니까, 마음대로 기도하면 그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없는 기도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알고 그렇게 하자니 그것은 내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령한 은혜를 주실 때 말씀과 성찬, 세례, 이런 것들을 사용하셔서, 엄밀히 말하면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례, 성찬 모두 보이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들리는 말씀이라면 신학 책은 보이는 말씀이고, 성찬과 세례는 상징을 통해 우리에게 그 의미를 전달해 주는 말씀입니다. 상징으로 보이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들리는 말씀, 그리고 상징을 통해 보이는 말씀,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해 보면 기도를 통해 받는 은혜가 말씀을 통해 받는 은혜 못지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기도는 은혜의 수단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기도를 하지만 기도가 우리에게 은혜를 주는 통로가 되기도 하지만 한 신자의 진실하고 간절한 기도는 그 자체가 은혜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표현입니다.
B. 신자들 : 마음으로 기도함
그래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방인들은 중언부언하지만 신자들, 신자들은 마음으로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대조가 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 기도는 기도 그 자체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주님에 대한 신뢰가 기도보다 더 먼저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은혜로운 정서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동차를 추운 겨울에 부릉 하고 시동을 겁니다. 그러면 엔진이 많이 떨리면서 소리가 많이 나고 차체가 흔들립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운전을 하였습니다. 차를 탁 세워놓고 깜빡 중요한 일 하나를 빠트렸습니다. 추운 겨울인데 시동을 겁니다. 그러면 소음이 별로 나지 않습니다. 아주 부드럽게 시동이 걸립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오일이 계속 하루 종일 운전하면서 따뜻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오일이 아주 뜨거우니까 엔진의 열도 남아있으니까 시동을 걸 때 아주 부드럽게 걸리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은혜로운 정서로 가득찬 따뜻한 마음일 경우 기도가 아주 자연스럽게 쉽게 나옵니다. 홀로 있어서 조용히 중얼거려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합니다. 아름다운 산을 산책할 기회를 얻었다고 칩시다. “하나님, 정말 아름답습니다.” 기쁜 일이 생겼습니다. 나도 모르게, “주님, 감사합니다.” 뭔가 반성할 일이 생겼습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기도가 되어서 나옵니다. 왜?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은혜로운 정서에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왔는데 그냥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고 설교 속에서 책망을 잔뜩 받았습니다. 책망만 받으면 안 될텐데 그래도 은혜를 좀 받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반성을 하였습니다. 그날 저녁 기도해 보려고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조용히 걸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해 봅니다. 잘 안 됩니다. 설교를 통해서 생각은 움직였는데 마음은 여전히 사늘하게 식어버린 엔진과 같습니다. 여러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차가 좀 오래된 분들은 말입니다. 요새 차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추운 겨울 되면 어떻습니까? 시동이 잘 안 걸리고 부르릉 부르릉 하면서 툭툭 꺼지기도 합니다. 여름에는 비교적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기도가 안 될 때 그럼에도 하려고 애를 쓰는 것도 믿음이지만 때로는 좀 한발자국 물러서서 기도가 안 되면 나중에 하고 그러고 자기반성을 하라.”고 합니다. 아주 은혜로운 설교를 듣든지, 성경을 묵상하든지, 사실 기도가 안 되는 사람이 성경 묵상이 기가 막히게 잘 될 리는 별로 없습니다. 모든 게 다 같이 갑니다. 어차피 체력이 없는데 100m 달리기는 못해도 마라톤은 아주 잘 할 수 있다? 그런 일 별로 없습니다. 아니면 책을 읽습니다.
여러분 은혜로운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합니다. 요즘 젊은 신학생들이나 목회자들은 책을 읽을 때 자기가 이만큼 많은 책을 읽었다는 것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경향이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그것을 소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노력보다는 휙휙 훑고 지나가면서 말하자면 얇고 넓은 지식을 가져서 누가 대화를 하거나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을 굉장히 많이 비중을 둡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어차피 우리의 모든 지식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한 지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행복해 지기 위한 지식입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이 입만 열면, “저분 대단해! 엄청난 지식을 가지고 있어. 모르는 게 없어.” 그런 이야기 몇 번 들어봐야 들을 땐 좋을지 모르지만 뭐 그렇게 대단한 거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책들은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야 하겠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유익한데, 하나는 반복해서 읽으면서 한 번 혹은 두 번 읽었을 때 깨닫지 못하였던 내용들을 깨닫게 됩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읽으면서 예전에 감동되었던 책들은 나중에 읽어도 여전히 감동이 됩니다. 그렇게 감동을 받으면서 우리의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추진력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들을 발판 삼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돌아가는 길도 없는 계곡 사이에 다리를 놓고 하는 것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돌아갈 수 없을 정도의 계곡이 존재하지 않지만 중국이나 티벳 같은 지역에는 그러한 골짜기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 어떻게 하는가 하면 가느다란 줄 하나로 시작합니다. 줄 하나를 가지고 할 수 없이 최초는 줄을 가지고, 지금이야 드론도 있지만 그 줄을 가지고 한 사람이 도저히 넘기 힘든 계곡을 지나면서 줄을 끄는 것입니다. 그 것을 잡아 당겨서 줄을 이어서 낚시 줄 같은 것을 잇고, 그리고 그보다 더 굵은 줄을 잇고, 잇고, 잇고 이으며 거기에 나무도 매달고 철사도 매달면서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지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러한 마음이 따뜻해지는 은혜로운 정서에 의해서 기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런 책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저도 100번 씩 넘게 읽는 책들이 있습니다. 그런 책들을 가까이 두고 계속 읽는 것은 그 책의 내용은 지식적으로 거의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들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이 계속 은혜로운 정서로 순화되고 그래서 기도의 은혜를 유지할 수 있기 위해서 읽는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가슴이 타들어갈 정도로 염려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저절로 그 사람이 간절히 기도하게끔 만들어 주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삶의 상황 속에서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우리의 자연적인 본성으로도 가능한데 우리가 그러한 염려와 근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하나님을 바라보는 간절한 마음으로 바꿔 열렬히 기도하게 만드는 것은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8절에 보면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아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 네가 무엇이 필요한지 그리고 네가 간절히 구하는 바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하나님이 듣고 겨우겨우 지식을 획득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 그런데 알고 계시는 그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라는 단어에는 가족관계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우리 아빠라고 하는 아주 따뜻한 개념의 담겨 있습니다. 그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해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올바른 마음이 계속 세워지는 과정이고, 망가져 고장 난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회복되고 온전해져 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고 그릇된 길로 갈 때에는 먼저 마음이 망가지는 일이 있었고 그러한 망가진 마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료하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다시금 자신의 마음속에서 솟아나게 된 경외심을 온전한 마음으로 표현한 것이 기도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탄원들이 언어의 형태로 형성이 되고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그 자체가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고치시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불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려고 하는 것들을 죽이시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것들을 살리시면서 그렇게 우리의 망가진 마음을 하나님이 고쳐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한번 우리가 철학자는 아니지만 건전한 인간의 상식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를 해야지만 그런 일이 있었니? 정말 난 몰랐다, 그렇게 해서 깨우쳐 드려야지만 겨우 이해하시는 분이시라면 그분이 어떻게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기도를 안 하면 모르시고 기도를 해야만 겨우겨우 알아들으신다면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때로는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묘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그러신 게 아니라 우리가 이해력이 너무 떨어지니까 어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말하는 엄마처럼 성경이 우리를 수준에 맞게끔 타이르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해라. 그러면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 기도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고 기도 안 하면 안 들어 주신다.’ 그렇게 타이르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매우 특별히 그 기도를 들으시고 나를 위해서 역사하시는 것을 몸소 체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예화) 이번에도 외국에 갔을 때 제가 간 교회의 목사님이 우리나라 돈으로 한 16억 정도 들여 교회를 크게 지으셨습니다. 마지막에 1억 5천만 원이 모자라 근심을 하고 있는데 새벽기도에 얼굴을 전혀 모르는 교인이 와서 며칠 새벽기도를 드리더니 목사님에게 헌금을 하고 싶다고 하면 그러더니 정확하게 1억 5천만 원을 헌금하였답니다. 잠깐 친척집에 다니러 온 사람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부자도 아니었습니다.
왜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그러한 일들을 일어나게 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깨우쳤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을 훈련시키시고 격려하시는 방법입니다. ‘모든 좋은 것들이 아버지께로부터 오는구나.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아버지는 우리를 아시고 우리에게 주시는구나.’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은 응답의 간증을 갖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현란한 생각으로 그렇게 일을 꾸미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간절한 무릎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소원을 아뢸 때, 때로는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응답해 주셔서 그 사람을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나를 기억하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구나.’ 하는 것을 깊이 경험하며 살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머리에 있는 생각이 마음에까지 내려오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기도로 훈련시키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에 있는 많은 생각과 그리고 왔다 갔다 하는 많은 이 상념들을 기도로 끌어 올려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머릿속에 있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마음까지 내려오도록 만들어주고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도록 그렇게 만들어 줘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많은 언어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생각들을 길어 올리는 언어가 되고 그것이 조합되고 언어로 형성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고치고 바꾸고 변화시키신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Ⅲ. 결론과 적용
이방인들은 신들을 이해시키는 것이 기도라는 생각으로 혹은 이렇게 많은 말을 하면 그것이 신을 향한 치성일 것이라고, 혹은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그 자체가 어떤 주술의 힘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기도를 하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외형이 아니라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우리의 입술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말을 듣고 싶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려고 힘쓰기 전까지는 부풀려진 자신을 직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우리 자신이 바람이 들어간 것처럼 헛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안팎에 많은 시끄러운 것들로 에워 쌓여 있는 것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간구의 언어만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의 가장 연약한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자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바라고 주만 바라볼지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내는 마음의 말들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비록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거기가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마음 중심에서 드리는 탄원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죄가 있다면 그 기도로 말미암아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갈 길을 모른다면 그 간구와 탄원을 들으시면서 주님이 밝은 빛을 비춰주셔서 갈 길을 보여 주십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를 길어 올려 마음의 말을 들으시는 우리 주님을 만나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