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3.3 연변과기대 집회 기도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주기도문이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졌는지를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고 계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와서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라고 말입니다. 제일먼저 기도의 주어가 등장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기도의 주어가 되셨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유한하고 무능한 인간이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께 비는 행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습니다. 우리는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와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능력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영적인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성령의 은혜를 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은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님께 기도하지만 예수그리스도는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하게 되는 창조주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기도하셨다고 되어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기도하여야 했을까요?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구속사 전체는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구속사 전체는 기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기도 가운데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이 예고되고, 기도 가운데 예수그리스도께서 헤롯의 박해를 피해 피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도 알려주시고, 기도 가운데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음을 맞이하시기 전 사형의 시작을 준비하셨고, 기도 가운데 십자가 고난을 예비하셨고, 기도 가운데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기도 중에 복음이 유대인들의 지경을 넘어 이방으로 확장되었고, 기도할때마다 부흥이 일어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것은 한편으로는 당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모본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기도의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존 칼빈은 자기의 책에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겠냐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두 가지로 대답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첫째는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만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좋은 일이 생긴 사람은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기도를 많이 하고 좋은 일이 생긴 사람은 하나님이 응답하셨다고 하며 영적인 기쁨을 함께 경험합니다.
두 번째는 생사 간에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슬퍼하시는 생활은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독립적으로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죄도 없으시고 모든 능력을 가지신 분이었지만 생애 전체가 눈물과 땀의 기도로 얼룩진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맨 처음 우리들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의존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회를 개척할 때 그런 마음이었고 우리 총장님은 간증을 하면서 우시는데 혼자 손수건을 꺼내서 계속 눈물을 닦고 계셨습니다. 아마 20년 전에 허허벌판에서 학교를 세우실 때 그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하셨던 놀라운 은혜들이 우리의 가슴속에서 스쳐가지 않았지만 총장님과 함께했던 옛날 분들의 마음속에는 스쳐갔을 것입니다. 그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이 마음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품기를 원하시는 마음이십니다. 기도는 하나님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아주 위대하고 놀라운 원동력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은 사람들은 일평생을 살아도 간증거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매일 매일이 간증으로 이어지는 생활을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애 전체를 기도에 바치면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하나님이셨지만 자신의 신성을 인성아래 감추시고 스스로 연약한 인간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을 죄인처럼 의지하며 사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님을 섬겨야할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삶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사람들의 마지막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실패하든지 성공하고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이 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장소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곳에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토포티니’(τόπῳ τινὶ)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로 직역하자면 ‘a certain place’입니다. 어떤 장소에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의 생애를 목격했던 복음서 기자들도 그 장소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불특정하게 어떤 장소라고 기록하였을까요? 이것은 그들의 기억력과도 관계된 것이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생활양식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주거가 일정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동네에 사시면서 “내가 진리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으니 히브리로 날 찾아오너라.” 그렇게 사람들을 불러 모아 진리를 가르쳐주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끊임없이 여행하시는 생애였습니다. 죄인이 있는 곳이면 거기가 어디든 유대지방이든지 사마리아 지방이든지 갈릴리 지역이든지 여행하셨고, 만나는 사람마다 천국복음을 선포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주린 자를 먹여주시며 일생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도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환경이라는 자기합리화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일생을 얼마만큼 살면 기도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만날 수 있을까요? 기도할 마음이 있을 때는 시간이 없고 시간도 있고 마음이 있을 때에는 일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도 기도할 여유가 없습니다. 시간도 있고 일도 없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을 때에는 마음이 강퍅하여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습니다. 이러면서 우리의 인생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하나님과 함께 했더라면 굴착기로 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호미로 일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를 보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한 20년 전쯤 성경을 읽으면서 이러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도대체 왜 예수님은 새벽에 기도를 하셔서 새벽기도라는 것을 교회에 만드셨을까? 곤히 자야하는데 고단하게.’ 저 같은 사람은 밤이 되어야지만 정신이 잘 집중되는 사람입니다. 지금껏 쓴 60권의 책 중 절반 이상이 밤11시에서 새벽4시에 써진 것입니다. 그러니 새벽에는 그 시간이 곤하게 잠을 자고 있을 시간입니다. 지금이야 나이가 들고 밤에 하는 일을 안 하지만 그때는 그랬었습니다. 한번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시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새벽미명, 즉 날이 아직 밝기 전 아니면 깊은 밤이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기도하면서 성경전체를 뒤진 결과, 아주 위대한 발견을 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새벽미명과 깊은 밤에 그렇게 많이 기도하셨을까? 제가 발견한 위대한 발견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낮에 예수님이 기도하시면 기도 하는 시간만큼 복음을 선포할 수 없고 병든 자 고치지 말아야 되고 주린 자를 먹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잠자는 시간에 당신은 기도하시고, 다들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는 기도하심으로, 그들이 당신께 나아오는 모든 시간동안 그들을 맞이하시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신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로이드 존스목사님에게 어느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위대한 설교가 인데 설교와 기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분이 간단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설교는 항상 쉽고 기도는 날마다 어렵습니다.” 설교는 저도 해보니까 어느 정도 하면 대가까지는 몰라도 비슷하게는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제까지 열렬히 기도했으나 오늘 기도할 때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3년 전에 설교를 아주 잘했는데 3년 후에 만났더니 몹쓸 설교자가 되었다는 경우 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식은 후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후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한없이 겸손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젊은 교수님들이 계시는데 젊어서는 이상하게 잠이 많습니다. 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집니다. 두 시 반 새벽에 일어나면 잠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무릎을 꿇으려고 하는데 관절염이 심합니다. 또 늙은 사람과 젊은 사람의 차이점은 관절도 튼튼하고 잠도 없는 대신에 일이 그 사람들에게 쏟아집니다. 그래서 숨 쉴 틈도 없이 바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환경에 매이지 않고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홈그라운드에서 수많은 자국민들의 박수와 열렬한 환호 속에서 경기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교 우리의 신앙생활은 홈경기가 아닙니다. 다른 나라 국민들이 사방에 둘러싸고 우리를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응원합니다. 천국에 갈 때까지 우리의 싸움은 그와 같은 싸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사는 생활이 힘들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예수를 위해서 웬만한 것은 다 버렸습니다. 모두 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대부분 버렸다고 말합시다. 그런데 마음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우리의 기도의 자리를 눈물로 적시며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아까 교수님이 간증한 것처럼 육신이 연약하여 괴로움, 질병, 두고 온 가족들의 소식과 이런저런 이유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찬양)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주는 괴로움 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영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생선가운데 하나가 청어입니다. 북쪽에서 많이 잡히는데 그물로 잡아서 큰 탱크로리에 넣어서 가져옵니다. 그런데 이 청어가 아주 성질이 급합니다. 그래서 몇 번 성질을 부리다가 죽어버립니다. 수산물 유통업자가 이것을 살리려고 산소를 잔뜩 집어넣어도 밤새도록 출렁거리고 오니까 죽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다 메기 큰 것을 두 마리 사다가 거기다 집어넣습니다. 이 바다메기는 청어를 아주 잘 잡아먹습니다. 이것을 집어넣었더니 안 잡아먹히려고 도망 다니는 것입니다. 런던에 도착했는데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기도제목을 주셨는데 얼마나 감사합니까? 사실 우리인생에서 제일 위험할 때는 순풍에 돛단 배처럼 항해할 때입니다. 그때가 제일 위험합니다. 깊은 밤 학교 앞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주시는 것 자체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핍박과 시련과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언제나 그것을 이기면서 복음사역에 승리하실 수 있었는데 그 비결은 환경에 매이지 않는 기도 생활이었습니다. 어디에 가시든지 그분은 한적한 곳을 찾으셨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세 번째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그랬습니다. ‘마치셨다’는 이 단어가 희랍어 성경에는 ‘에파우사토’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단어에는 히브리어 동의어, ‘샤바트’에서 나온 단어인데 안식일을 의미합니다. ‘마쳤다’기 보다는 ‘쉬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고 쉬시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짧은 구절은 예수님의 기도가 공중전화를 거는 것처럼 간단한 대화가 아니라 장시간 하나님 앞에 간절히 헌신하는 기도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도의 길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도의 깊이는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깊은 기도는 대부분 오랜 시간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기도의 헌신을 통해서 아주 천천히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론을 제기합니다. 성경에는 아주 짧은 기도가 많이 등장하고 짧은 기도를 했을 때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이 있었다고 말입니다. 대표적인 기도는 여호수아를 통해서였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할 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원주민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도망가는데 해는 지고 있습니다. 어두움이 깔리면 그들을 놓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태양을 향하여 멈추라고 명령했는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변형된 기도였습니다. 응답되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사도바울도 귀신들린 자와 병든 자를 명하여 고쳤는데 이것도 변형된 기도였습니다. 짧은 기도지만 하늘의 능력을 불러들이고 기적의 역사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짧은 기도로 큰 기적을 불러왔던 기도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기도를 올린 사람들은 평소에 깊고 긴 기도 속에서 자신을 헌신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여 모세가 진노하시는 하나님께 용서를 빌던 장면에서 모세는 회막을 만들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누구든지 그곳에 와서 기도하게 하였습니다. 연로한 모세도 지쳐서 잠자리에 들었을 때 그 회막을 지키며 떠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섬겼던 사람이 바로 후계자 여호수아였습니다. 오랫동안 기도에 헌신한 사람만이 짧은 기도의 큰 능력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많은 시간을 기도에 바치는 것은 깊은 기도를 위해서도 매우 필요한 기도 입니다. 공중전화에 거는 것처럼 간단한 기도는 하나님 앞에 큰 능력을 불러오는 깊이 있는 기도일 수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정의 내리기를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하는데 대화는 단순한 청구서를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도하고 주님도 말하실 수 있는 여력을 두는 것입니다. 공중전화 거는 것처럼 간단히 기도하고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네가 기도를 올렸느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말씀을 시작하시는데 그 사람은 벌써 가고 없습니다. 그래서 간절하고 깊은 기도의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장시간을 기도에 헌신하셨고 그런 기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그분께로부터 오는 큰 위로와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얼마 전에 네덜란드를 방문하였습니다. 선교학을 전공하고 있는 젊은 학자를 만났습니다. 대화를 하다가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혹시 데이비드라는 사람을 알고 있냐?” 했더니 들어본 적이 없답니다. 그래서 “당신은 선교사를 지망하면서 어떻게 모든 선교사들이 존경하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를 모를 수 있느냐?”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미국에 주문하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를 주문해서 제가 사인을 해서 화란에 선물로 보내주면서 열심히 읽고 은혜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는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주님의 사역을 한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오늘날 볼 수 있는 선교사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적하고 역사가 기억해줄만한 혁혁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른 빵 몇 덩어리를 들고 흩어진 도시민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21살에 회심하고 24살에 선교사로 헌신해서 28의 꽃다운 나이로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기도로 섬겼던 생애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의 생애와 일기가 영국에서 출판 되었을 때 수많은 영국의 젊은이들이 선교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생애와 일기를 여섯 권을 샀고 여섯 번을 읽었습니다. 지금도 마음이 곤고할 때면 손이 가는 책 중 하나가 그것입니다. 그의 일기 전체는 기도책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기도에 대한 간증과 경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그의 일기 가운데 한 대목이 기억납니다.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나는 오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 결심했다. 새벽에 별을 보고 기도하러 숲속에 들어갔다. 생각나는 이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했다. 온몸이 땀에 젖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달콤함이 마음이 가득 찼다. 기도를 모두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는 하늘의 별들이 총총하였다.” 그는 역사상 자기를 모두 쏟아 부어 주님처럼 선교지에서 살다간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폐에 사지의 몸을 이끌고 눈 덮인 언덕에서 인디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고, 그가 기도하고 난 자리에는 붉은 선혈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질그릇같이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큰 축복이 있어서 완악한 인디언들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기적과 같은 회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질그릇처럼 연약하고, 낙심하기 잘하는 사람을 통해서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자기를 쏟아 부으며 기도한 세계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불꽃같은 은혜로 얼어붙은 동토의 땅에 복음의 계승을 이어가는 위대한 선교지의 역사와 성령의 권능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사람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나 인간은 이기심을 가진 존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의 현장에서도 일꾼들끼리 마음이 맞지 않아서 다투고, 사랑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불러일으키고, 은혜는 우리의 마음속에 언제나 거룩한 사랑을 가져다줍니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저는 그 사람의 책을 읽으면 한없이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일기 속에 나오는 어는 한 구절을 가지고 곡을 붙여서 제가 노래를 지었습니다.
(찬양)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는지 나는 관계치를 않노라
잠을 자면 저를 꿈꾸고 잠을 깨면 저들의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아무리 박식하고 또 설교와 청중을 감동 시키는 웅변 있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인간에 심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결핍을 대신 할 수는 없노라
그렇게 이기심 넘치는 인간으로 하여금 깨뜨려지고 자기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남을 섬기며 살아가게 만들어주시는 놀라운 은혜는 깊고 오랜 시간 기도를 통하여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자신을 하나님 앞에 기도로 바치는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의 피를 흘리셨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에게 속죄를 피를 받으시고 먼저 십자가에서 흘리시던 피를 받으신 다음,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린 눈물의 기도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예수그리스도의 기도는 배우고 싶은 감화력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아마도 이런 문맥일 것입니다. 전날도 고달픈 사역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숙소에서 잠자리에 드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눈을 뜨니 예수님은 어디에 가시고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고 저 멀리 새벽미명부터 나와서 새벽이슬을 맞으며 혼신의 힘을 쏟아 부으며 기도하는 예수님을 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그분을 뵈오며 조용히 그분이 기도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기도를 마쳤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처럼 “예수님, 우리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주십시오.” 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인의 경륜입니다.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 나의 행복의 이유가 되시는 하나님과 지극히 큰 친밀함 속에서 그 사람에게 기도를 배우고 싶어 하는 믿음의 제자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서 공부를 잘 가르치면 좋은 학자는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잘 가르치는 것과 함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사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날 학생들이 여러분을 찾아와서 부탁할 것입니다. “선생님, 나에게 공부만 가르쳐 주시지 마시고 내가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도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이 의지하며 사는 그분을 나는 알고 싶습니다.”
저는 방황하는 젊은이였다가 21살에 회심했습니다. 그리고 긴 세월이 지났지만 가장 행복한 시간이 무어냐고 물으면 기도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고,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도 역시 기도시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학문이 깊어질수록 설교가 유창해질 수 있고 교회를 경영하면서 교회를 운영하는 실력은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해도 해도 어렵습니다. 때로는 마음에 밀려오는 갈등과 괴로움 때문에 기도의 세계가 어렵게 느껴지고 때로는 마음의 정욕과 부패함 때문에 순전한 마음이 되지못하여서 기도에 방해를 받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미 이루어 놓으신 은혜의 보혈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흘리신 피 때문에 우리의 행위와 공로가 아니라 중생의 씻음과 정결함과 그의 공로를 따라 우리를 용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공로가 없지만 그분이 우리를 위해 찢으신 육체로 갈라놓은 휘장과 그분이 뿌려놓으신 핏 길에서 우리는 의의 신발을 벗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핏 길을 걸어 휘장을 지나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우리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지고지순하신 그분의 대속의 공로, 우리를 친자녀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찬양)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는 온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어느 때보다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 간절히 비는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