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마음이 괴로운 자의 기도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 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 하겠나이다”(삼상 1:10-11)
인간에게 있어서 고통의 문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인간은 바로 그 고통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지 않을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누구든지 이런 고통을 경험해 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고통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고통스런 상황은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생각을 주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I. 본문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는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 이렇게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불쌍한 한 여자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가나라고 하는 남편을 가진 한나라는 여인이었습니다. 다복한 가정에 시집와서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살고 있는 모자랄 것이 없는 행복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한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브닌나라는 첩이 들어오게 되었고 어쩐 일인지 브닌나는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들’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벤(בֵּן)’입니다. 여러분들이 ‘벤허’라는 영화에서 보는 바와 같은 그 ‘벤’이 바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벤’ 이라는 명사는 ‘바나(בָּנָה)’라는 동사에서 왔는데 ‘바나’는 ‘집을 세우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 시집가서 여자가 아이를 낳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집을 세우게 된다는 히브리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입니다. 첩은 들어와서 아이를 낳고 자신의 집을 세웠는데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는 한나라는 여인은 아이를 낳지 못해서 자신의 집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결국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브닌나의 분노는 한나를 향한 질투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첩에게 끊임없이 학대를 당하고 고통을 받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II. 하나님이 막으실 때에
오늘 성경은 바로 이런 고통의 문제를 지니고 있었던 이 한나란 여인의 고통의 근원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라”(삼상1:5하) 즉, 하나님이 막으셨기 때문에 한나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는 문제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하나님은 막으시지 않는데 우리가 좀 더 노력하지 않고 우리가 좀 더 지혜를 쓰지 않고 우리가 좀 더 자원을 투자해서 분발하지 않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우리의 태도만 고치면 됩니다. 열심히 하나님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하면 그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못하게 막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많은 자원을 쏟아 붓고 우리가 아무리 많이 애를 쓰고 아무리 많이 분발하고 아무리 많이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에 아무리 많이 노력을 하고 애를 써도 성취되지 못하는 어떤 일들은 아마 하나님이 지금 막고 계시는 일일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바로 막으시는 그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당신 앞으로 부르신다는 message입니다. ‘너는 내 앞에 서라’ ‘너는 벧엘로 올라와서 나와 대면하자’ ‘너는 십자가 앞에 나와서 나와 만나자’ 이런 message입니다.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문제도 그런 문제였습니다. 다복한 가정에 태어났으니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나의 처지가 엘가나를 비롯한 온 가족에게 얼마나 큰 근심거리였겠습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불임 clinic에 안 가 봤을 리가 없겠죠? 산부인과 의사는 물론이고 한의사를 찾아가서 보약도 지어 먹고 아이를 낳게 하는 많은 민간요법도 실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막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위에 설상가상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도 억울한데 첩으로 들어온 여자가 심히 자기를 구박하고 박해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런 속에서 한나를 에워싸고 있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틀림없이 그 첩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남편의 우유부단함도 이 여자에게는 원망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많은 문제들이 한나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한나가 바로 하나님이 막으시기 때문에 자기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아주 지혜로운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로 결심한 것이었습니다.
III. 하나님께로만 나아가라
이제 모든 환경을 뒤로 하고 한나는 하나님의 집을 찾았습니다. 당시에는 성막이었습니다. 그 성막을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대면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문제보다 훨씬 큰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1.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
한나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지극히 개인적인 고통을 경험했고 어떻게 보면 가장 세속적인 기도제목이었지만 그것을 가장 영적인 기도제목으로 승화시킨 사람이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 올라갔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해 괴로워하고 번민하는 한나에게 지극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엘가나는 위로했습니다. “왜 그렇게 슬픈 얼굴을 해. 여보, 괜찮아. 나는 당신이 아이 없어도 괜찮아. 난 당신을 사랑해.” 이런 마음으로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더 낫지 아니하냐”(삼상1:8)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한나의 마음은 그것을 통해서 위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올라가지 않을 때까지는 문제가 여러 개인 줄 알았습니다. 남편 엘가나와의 서먹한 관계, 가문에 대한 깊은 미안한 마음, 브닌나와의 깨어진 관계, 그 사람으로부터 오는 분노, 그 아이가 낳은 자식들을 자기 친자식처럼 사랑해주지 못하는 가책 등등 많은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한나가 그 모든 것들을 접고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시작하니까 문제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 문제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을까?’ 그랬다면 사무엘이 태어나지도 말고 이 기도가 응답되지도 말았어야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태어났고 이스라엘 역사의 새장을 여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 인생의 갈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지혜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지혜가 어떤 것이었을까요? 아마 성경에서 한나처럼 복된 여인이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다복한 여인이었습니다. 변함없이 남편의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물질도 넉넉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한나에게 이러한 고통, 하나님이 막으시는 고통의 문제가 없었더라면 한나가 여기 이름을 올릴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들 쑥쑥 낳고 잘 먹고 잘 살다가 구약 속에 스쳐갔던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한 가정으로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구약시대에 가장 중요한 인물 하나를 꼽으라면 모세이고, 두 사람을 꼽으라면 모세와 다윗이고, 세 명을 꼽으라면 모세와 다윗과 사무엘입니다. 모세는 왕 없이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던 신정시대의 율법수여자였고, 다윗은 하나님이 왕으로 세워 나라를 다스리던 때에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왕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표본으로서의 인물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신정시대와 왕정시대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큰 인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의 수문과 같은 존재, 신정시대에서 왕정시대로 흘러나가는 수문과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나서 왕이 없던 시대에 사사가 통치하게 되고 사사시대 마지막에 사무엘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그를 통해 사사시대를 모두 마감하고 왕정시대에 첫 기틀을 마련하는 수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위대한 인물을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위대한 인물은 하나님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태어나게 하시지만 반드시 그 인물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을 준비하셔서 그 인물을 만드십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만남이 몇 개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모와의 만남, 두 번째는 남편이나 아내와의 만남이고 그 이전에 좋은 스승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Ⅳ. 하나님에게만 쏟아놓으라
이렇게 하나님이 막으시는 지극히 고통스러운 역경을 통해서 한나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삶의 모든 기대를 접고, 오직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쏟아 부으며 매달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했습니다. 그 후에 사무엘을 잉태하게 하시고 그 어머니의 하나님만을 향하는 절실한 마음에 영향을 받으며 그 태내에서 자라게 하시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젖 뗄 때까지 그 경건하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어머니의 영향을 물려받으며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탁월한 영향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아이를 바친 후에도 어머니는 수시로 아이를 만났을 것이고 이때에 미친 그 신앙의 감화는 우리가 아는 사무엘이 되게 하였습니다. 스승 엘리는 부패한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그런 영향을 사무엘에게 미치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만 나아가는 법을 한나는 터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오래된 인생의 문제, 모든 자원을 동원하고 마음을 끓이고 원망하고 시기하고 괴로워하고 모든 것을 다 해봐도 이루어지지 않는 인생의 문제, 그 앞에서 여러분들이 받는 message는 무엇이지요? 어떤 message들을 받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막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들이 인간의 모든 방법을 포기하고 자신의 재능과 자원, 다른 사람들의 도움, 이런 모든 것들로 문제를 해결해 보는 것으로 문제를 처리하고 하나님과는 대면하려고 하지 않는 여러분들의 방식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갈 길을 막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생의 길에 가시밭길을 두고 주님의 쓰시려는 사람의 가는 길을 막으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형벌 가운데 제일 무서운 형벌이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간섭하시는 한 여전히 희망은 있는 것입니다. 간섭하시는 한 여전히 하나님이 그 사람을 포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포기하시지 않으면 않을수록 여러분들은 더 고통스러워 질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고통을 가중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돌아오게 하심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간 한나가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가 한 일은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쏟아놓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다 쏟아놓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의 마음을 쏟아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한나의 마음이었습니다.
1. 하나님만이 가장 잘 아십니다.
우리가 어떤 고통스러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여기에 우리들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이 크게 둘로 나누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마음 깊이 받아들여서 자기가 삭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분노로서 바깥으로 표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게 친구가 있었습니다. 오래 동안 사귀었던 친구인데 결혼도 못하고 결국은 암으로 죽었습니다. 제가 직장생활을 하고 얼마 안 되었는데 가정이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책임감이 없는 아버지와 이 세상을 잘 모르는 어머니 사이에서 굉장히 힘들어 했습니다. 어느 날 전화가 와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남준아 큰일났다.” “무슨 일이야?” “빚쟁이들이 우리보고 나가라고 하는데 일주일 후에 나가면 갈 곳이 없다.” 제가 직장에서 대출을 내서 월세 방을 마련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특별히 그 후에 저를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했습니다. 어머니가 암이라는 판정을 받았는데 그 받기 얼마 전에 제가 그 분을 모시고 한의원에 갔습니다. 나이 많은 목사님이신 그 의사가 진맥을 하며 하는 말이 “여보쇼, 뭐 그렇게 마음에 한이 많소? 다 훌훌 털어버려야지 당신 몸도 건강해지지. 그것을 품고 있으니까 이것이 마음에 쌓여서 당신 몸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삭힌다고 말하지만 삭혀지지 않습니다. 정리되지 못한 분노와 미움, 원망, 시기의 감정들은 우리의 마음 안에 그대로 남아서 우리의 온 몸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은 생각이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좀 멍한 사람들이 잘 살고, 무언가 생각을 골똘히 하고 뭔가 하나를 품으면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들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물론 생각 없이 백치같이 튼튼하게 백 살만 살면 그것이 인생의 행복이냐고 물으면 가치관이 다르지만 어쨌든 그렇다는 것입니다. 가슴에 품으면 몸은 형편없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바깥으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그런 것을 밖으로 표출하지도 못하는 주변 없는 여자였습니다. 밖으로 표출하는 사람들은 훨씬 낫습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은 우울증 같은 것에 안 걸립니다. 걸릴 새가 없습니다. 폭발을 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바가지 던질 때 도자기 던지는 여자들은 절대로 정신 문제없습니다. 이것을 보는 아이는 상처를 받으며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밖으로 표출하면 다른 문제를 파생시킵니다. 이것은 ‘해결의 길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 건널 수 없는 고통의 강을 만났을 때에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갈 길이 없습니다. 고통하면서 심한 정신병과 이런 많은 질병들을 얻으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인생의 갈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특권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쏟아놓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기도하라
마음을 쏟아놓는 한나의 기도에 두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드리는 간구였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오래도록 기도하며 입술은 움직이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더라”(삼상1:12-13) 이것이 한나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중에 우상에게 기도하거나 조상에게 기도하거나 아니면 나무 막대기인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이고 하나님을 향한 기도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기도가 없는데 그러면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기도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 없이 기도해서 하나님 앞에까지 배달되지 않는 기도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많이 기도생활 해 왔다고 할지라도 내 기도의 모든 향연이 오늘 하나님께 올라가고 있으며 하나님이 나의 기도의 향연을 맡으시고 나를 흠향하도다. 마치 홍수 후에 노아가 드린 제사에 그 향기로운 제사의 냄새를 맡으시고 노아를 받으신 것처럼 그래서 이 땅에 다시는 그런 재앙을 주시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무지개의 하나님처럼, 우리가 그렇게 기도의 향연이 하나님께 올라가므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하는 연합의 감정이 있는 기도가 있는 때가 얼마나 드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가 주님 앞에 몇 번이나 우리의 마음을 다 쏟아놓았습니까? 우리의 꿈도 눈물도 막으시는 하나님의 길 앞에서 느낀 우리의 좌절과 고통과 분노도 주님 앞에 모두 쏟아놓으므로 우리 자신을 드렸던 때가 몇 분이나 되었습니까?
한나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자기 기도를 다 올렸습니다. 모든 기도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닙니다. 한나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 그 모습을 보니까 미친 사람 같아서 영안이 흐려진 엘리 제사장은 ‘네가 낮부터 술을 먹었나 보구나.’ 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때 한나는 말했습니다.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토하는 것입니다.’ 실성한 여자처럼 깊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게 되자 눈물도 마르고 부르짖음도 그쳤습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다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마음을 쏟아 붓는 이 기도야말로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이고 기도의 정수입니다. 이 기도의 경지를 맛보기 전까지는 누구도 기도했다고 감히 말할 수가 없는 그 진수가 마음을 쏟는 기도이고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예수님의 기도를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엎드리자마자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나요? 아닙니다. 간절히 매달리며 세 번이나 기도하시고 마지막에는 땀에 피가 배어서 쏟아질 때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한 10일 정도만 금식하고 소변을 누면 피가 섞여 나옵니다. 사람에 따라서. 예수님이 그 땀방울에 피가 섞여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에게 인간으로서 더 이상 기력이 없을 그때쯤 되어서 천사를 보내어 예수님의 기도를 돕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쏟는 1분의 기도는 전혀 마음을 쏟지 않는 1년의 기도보다도 하나님을 움직이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편지가 옵니다. 편지가 수없이 오는데 미국에서 오는 speed post가 있습니다. ups 같은 것을 해서 48시간 되기 전에 오는데 모두 최선 편으로 달려옵니다. 차를 타다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직원들이 그것을 들고 2층으로 뛰면서 김남준 목사를 찾습니다. 그 편지 먼저 보겠어요? 아니면 어디서 보냈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인쇄물 더미를 먼저 찾아보겠어요? 무엇을 먼저 보겠어요? 미국 어디어디에서 온 목사님을 향한 편지입니다. 36시간 만에 날아왔습니다. 어느 것을 먼저 보겠어요?
마음을 다 쏟아 붓는 편지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특급 우편입니다. 매일 인쇄물만 발송하니까 그 천사들이 다 정리해서 주님 앞에 보내기 전에 쓰레기통에 넣어버립니다. 바쁘신 하나님이 읽으실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쓰레기 같은 우편물 1년 보내는 것보다 특급우편으로 한 번 보낸 것이 더 강력한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쏟아 붓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왜 하나님이 그렇게 마음을 다 쏟아 놓는 이 기도를 특급 배달된 기도처럼 여기실까? 하는 해답을 찾게 됩니다.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과 영혼이 움직이는 도구일 뿐입니다. 이 마음이 어떠하냐에 의해서 그 사람의 인생은 갈 길이 결정이 됩니다. 마음의 본질적인 부분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먹는 것 좋아하다 놀러가는 것 좋아하는 것으로 이 취미로 갔다 저 취미로 가는 것은 바뀔 수 있지만 그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은 둘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사느냐 자기 마음대로 사느냐 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쏟아놓아져야지만 바뀝니다. 마음을 다 쏟아놓으면 피고름이 나옵니다. 피고름이 쏟아져 나오듯이 나 중심으로 살려는 상처와 욕심과 원망과 이런 모든 것들이 마음을 쏟아 붓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를 통해서 짜 지듯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쏟아 놓는 기도는 반드시 참회가 없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불결하고 더러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보는데 무슨 수로 참회를 안 합니까? 거기서 마음을 쏟아 놓으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이 고름들이 다 짜내어 지는 것입니다.
한나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마음을 다 쏟아놓기까지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남편에 대한 섭섭함, 가문에 대한 미안함, 브닌나에 대한 원망 수많은 문제들이 있었는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마음을 쏟아놓고 나니까 쏟아놓을 그 때는 문제가 오직 하나입니다. 나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내 인생의 모두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 앞에서 나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그렇게 보니까 나는 너무 더러운 인간이다. 하나님 앞에 다 쏟아 부으면서 그때에 이 속에 있는 더러움의 찌끼들이 다 쏟아져 나갑니다. 충분히 쏟아져 나가고 나면 하나님의 것이 들어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마음을 쏟고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를 괴롭히던 문제들이 그 순간에 해결이 됩니까? 그럴 때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게 안 됩니다. 자기가 그렇게 피고름 같은 더러운 것들이 다 짜내어지고 나면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 들어옵니다. 평강이 밀려옵니다. 미운 사람도 없고 원망하고 싶은 사람도 없고 모두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를 꽉 채웁니다. 예전에는 낙심하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심지어 이제는 하나님도 나를 버리셨구나. 그러니까 나를 이 고통 속에 버려두시는 거야. 나는 아마 지난날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벌 받고 있는 거야. 이제 나는 아무 희망도 없어. 이 세상에서 절대적으로 나 혼자 밖에 없는 외톨이가 되었어. 그런 마음밖에 없었는데 마음을 다 쏟아놓고 하나님 앞에 진액을 짜서 기도하고 나니까 하나님의 생명이 밀려옵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그 후에도 그런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가까운 경험을 이야기하면 제 자랑이 될 것 같아서 먼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제가 대학 학부 2학년 쯤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저에게 갈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message는 간단했습니다. “너는 내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사람으로 불렀으니 그렇게 알아라.” 그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연약한 그리 유능하지도 못한 그저 가난한 신학생에 불과했습니다. 별로 좋은 학교도 아니고 야간 신학교를 다니면서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그런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믿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계속 믿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부터 제 인생의 고통은 시작되었습니다. 공부를 해야겠는데 정말 시간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면서 이제는 공부에 전념해야지 하고 사표를 냈더니 직장이 빼앗아 갔던 모든 시간을 교회가 가져가더군요. 목사님이 별로 나를 사랑하시지도 않으면서 얼마나 부려 먹으시는지 일복이 터지다 터져 버렸습니다. 들어보실래요? 주일학교, 고등부, 청년부 지도자였고 구역 4구역, 장년 성경공부 모임 2개 낮에는 목사님 심방 따라 다니고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서 교회 불을 피고 새벽예배를 매일 준비해야 하고 교회 청소하고 심지어는 겨울에 수도 얼지 않게 보호하는 역할까지...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새벽기도 끝나고 한1시간 기도한 다음에 단 걸음으로 달려 나가면 청량리에서 용인가는 school bus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타고 학교에 도착하면 수업 시작하기 꼭 30분 전이었습니다. chapel실에 들어가면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한두 명, 서너 명, 들어가면서 눈물이 막 쏟아집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주님은 나를 쓰시겠다고 하는데 나는 나를 준비할 수가 없어. 어떻게 해야 해. 의자에 앉으면 막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공부를 하려고 하면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이 눈에 들어오고 회심하지 못한 영혼을 위해 하려면 밀린 책들이 눈에 들어오고 후에 학생들에게 바르게 가르치지 못해 하나님께 욕 돌리는 모습이 들어와서 적은 사례비로 고통 하는 아내의 모습이 밀려들어와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러면서 앉으면 말을 이을 수 없이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놓아 언어는 없고 통곡만 있었습니다.
3. 영혼의 통곡, 간절한 기도
한나의 두 번째 특징은 바로 통곡하는 기도였습니다. 자기를 다 쏟아 부으며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다고 무슨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교회의 일이 줄어들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데 어느 날 목사님이 불러서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너무 많은 일로 자기를 소진하는구나. 그러지 말아라하고 일을 줄여주었겠습니까? 마지막 사표내고 나올 때까지 더 많이 더 많이 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30분을 울면서 쏟아냅니다. 더 기도하고 싶은데 수업 종이 울립니다. 그러면 펑펑 울면서 가방을 들고 일어납니다. 신기하게 눈물은 계속 흐르는데 이제는 그 눈물이 고통의 눈물이 아니라 은혜의 눈물입니다.
(찬양)
주께서 내 길 예비 하시네 주께서 내 길 예비 하시네
오늘 하루하루를 주를 위해 살리라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텅 빈 chapel실을 빠져 나오다가 다시 바닥에 엎드려서 통곡 할 때가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때마다 눈물을 씻고 예배실 문밖을 빠져나가면 아침 바람이 확 불면서 하나님의 생명이 스며들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과 같이 나아오리라’ “아들아” 어제도 기도하는데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너를 아노라” 이 세상의 헛된 것들로 채워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왕이신 주님이 우리 마음에 좌정하시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통곡하며 기도하는 성도의 마음은 가장 순결한 마음입니다. 그 영혼의 몸부림이 모든 찌끼를 털어내고 순결하도록 정화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제가 아무리 크고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일을 못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여러분들이 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막으실 때 하나님 앞에 나가 마음을 쏟아 붓는 것, 그분의 임재 앞에서 기도하는 것, 그분 앞에 통곡하며 기도해 여러분 안에 있는 더러운 마음의 피고름을 쏟아내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 채우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기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매달릴 때까지 여러분의 인생 문제를 막으시는 것입니다.
한나가 이렇게 매달려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그 태를 여셨습니다. 하나님이 닫으신 문은 열 사람이 없고 하나님이 여신 문은 닫을 사람이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해 주시겠다는데 누가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의 태를 열어 아이를 갖게 해 주셨습니다.
Ⅴ. 기도의 결과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참 놀라운 것이 이 여자가 하나님 앞에 그 괴로운 마음을 토하여 기도할 때 이 여자의 마음에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겠죠? 그래서 그는 서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주의 여종을 불쌍히 여기셔서 아이를 주시면 이 아이를 오직 평생에 하나님께 드리고 아이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삭도는 머리 깎는 칼입니다. 이 삭도를 대지 않는다는 것은 머리를 자르지 않는 다는 뜻인데 이것은 바로 민수기에 나오는 나실인의 서원입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바쳐진 선지자나 제사장이었는데 이런 사람들은, 특별하게 서원된 나실인은 포도주를 먹지 않고 포도씨도 먹지 않고 부모가 죽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바쳐진 사람입니다. 그 의미가 바로 나실인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길을 막으셨지만 그 응답을 통해서 한나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기회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매달려야 할 기도제목의 성취를 통해 하나님께 어떤 영광을 돌려 드리겠습니까? 이 한나는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젖 뗄 때에 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하나님의 집에 바쳤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아침에도 이 본문 읽으면서 가슴이 아렸습니다. 아이를 가져본 여성은 알 것입니다. 아이가 갓 태어나서 그 젖을 먹고 점점 자라 젖 뗄 때쯤 되었으니까 돌은 좀 넘었겠지요? 그 아이가 젖을 먹고 무릎으로 아장아장 기고 젖을 먹을 때는 엄마의 눈을 맞추고 웃기 시작하고 무릎을 기어오르며 엄마의 품을 헤쳐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따로 서기를 하고 뒤뚱뒤뚱 걷기 시작하며 두 주먹을 쥐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주먹을 쥐고 엄마를 보며 웃기 시작합니다. 엄마들은 아이에게 빨려 들어갑니다. 그때 그 아이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가능했겠습니까? 그러면 다시 아들 없는 여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이 슬퍼하지 않고 하나님의 집에서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의 인생의 분깃이신 하나님 자신을 다시 만났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하나님 집에 바쳐졌으나 돌아오는 길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더 감동을 주는 것은 무엇이냐면 이 정도로만 끝났어도 감동인데 그게 아닙니다. 이 한나가 하나님 앞에 사무엘을 바쳤을 때까지 또 다른 아이가 없었습니다. 바칠 때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쳤을 때보다 훨씬 더 절실했을 겁니다. 엘가나에게는 애가 여럿이었지만 한나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 아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이를 하나님 앞에 드리면 자기는 다시 아이 없는 그 여인이 되는데도 하나님께 이 아이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후에 세 아들과 두 딸을 주셨습니다.(삼상2:21) 다섯 명의 자녀와 함께 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고치시기 위해서 “네가 사랑하는 것을 내려놓아라. 나 아닌 것에 대한 애착을 버려라. 네가 아직까지도 포기하지 못하는 그것을 버려라.” 할 때 이것을 버리면 이제 나는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될 것 같지만 하나님은 절대 그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을 내려놓고 나면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셔서 위로를 삼으며 살아가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 밖에 없는 이 아이를 하나님 앞에 서원한대로 드렸더니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은 여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최대의 하나님의 종이 되었고 바침 때문에 다섯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게 되었고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하게 되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자기 것을 움켜쥐고 있다가 하나님도 잃어버리고 그것도 잃어버리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결단하십시오. 우리 하나님 앞에 이제껏 넘지 못했던 우리의 인생의 벽, 우리가 이제껏 건널 수 없었던 신앙의 강을 건넙시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아버지 집으로 올라갑시다. 이 여자처럼 마음을 다 쏟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응답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