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죄 죽임
녹취자: 조경훈
여러분 가운데 극소수만 공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은 그냥 학교에 다니니까 공부 하는 것 아닙니까? 공부가 너무 좋은 사람 손 들어보세요. 몇 명 있네요. 제가 여기서 이야기 하는 공부는 일반적인 공부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서 교수가 되고 싶어 하거나 더 많이 공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중요한 깨달음이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일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아직까지 경제격차가 있습니다. 옛날에 일본은 우리나라 전체예산이 일본 치과협회의 예산도 안 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굉장히 부강해 졌지만 GDP는 아직도 우리나라의 3배입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절반 밖에 안 되니까 사실은 0.5배 정도 GDP가 많은 것입니다. 국민소득은 한 3만 8천 불 쯤 되는데 우리가 3만 600불이니까 8천 불 쯤 차이가 나는데 2,023년이 되면 골든크로스가 되어 국민소득이 일본을 초월하게 됩니다. 수출 물량에 있어서도 2,023년 정도 되면 일본의 수출량을 능가하게 됩니다.
일본이 저렇게 난리를 치는 게 일본 사회학자들, 심리학자들의 공통된 대답은 질투입니다. 자기네들이 잃어버린 30년 세월을 보내는 동안 한국과 중국은 계속 발전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이 한창 잘 나갈 때 GDP 세계 2위의 국가였는데 지금은 28위로 떨어졌습니다. 중국은 워낙 강대국이니까 일본이 함부로 질투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게는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한 때는 일본사람이 보기에 우리나라가 자기네들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우리나라가 잘 사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끝없이 한국을 깎아 내리고 한국에 대해서 나쁜 평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냉정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매우 중요한 얘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여러분도 일본을 가 보셔서 알지만 우동집 하면 보통 3대가 우동집을 합니다. 할아버지도 그 집에서 우동집을 했고 아버지도 했고 아들은 와세다 대학교를 나왔는데도 계속해서 우동집을 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때, 고조할아버지 때,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자동차 베어링을 만드는 회사를 세워서 아들의 아들에게 가업을 계속 물리면서 세계 최고의 볼베어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나라에는 좀 모자랍니다. 산업에 있어서는 사실 그런 면에서 일본이 훨씬 더 발전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형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1차 산업혁명이 있고 2차 산업혁명이 있고 3차 산업혁명이 있는데, 1차 산업혁명은 농업이 주를 이루었고, 2차 산업혁명은 기계의 발견이 주를 이루었고, 3차 산업혁명은 서비스와 금융 같은 것이라면 2차 산업혁명 때는 그런 것들이 국가 간의 우열을 만들어 냈습니다. 여러분들은 기억이 안 나겠지만 우리 어렸을 때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한국 라디오는 잘 안 나올 때 때리면 소리가 나오고 일본 라디오는 때리면 망가진다고 그랬습니다. 일본 라디오는 때려야 될 필요가 별로 없을 정도로 워낙 잘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소달구지 끌고 다닐 때 거기는 제로센 이라는 전투기를 만들어서 하늘을 띄었던 나라여서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비근한 예를 들어서 스마트폰을 보겠습니다. 스마트폰은 이름도 없었던 한국이 최강국입니다. 노키아와 모토롤라가 주름 잡았을 때 우리나라는 이름도 없었습니다. 저도 맨 처음에 모토롤라를 샀는데 지금은 이름도 기억을 못합니다. 다른 회사들이 압도적으로 만들면서 그 중에 삼성이 되었습니다. 맨 처음에 셀폰 하나를 만들면 다들 욕을 한 게 만들어 봐야 72%가 다 외국에 돈을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전부 다 남의 나라 부품을 가지고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에서 만들었지만 한국제가 아니라 조립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고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삼성이나 엘지에 있는 사람들은 미래를 내다 본 것입니다. 무슨 생각을 했냐하면 어떤 부품은 꼭 우리가 만들어야 되겠지만 대부분의 것은 만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장사를 잘 하면 기가 막히게 부품을 만들어서 납품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는데 그 중에서 싸고 품질 좋은 것을 구해서 쓰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그런 거에 전념을 해서 진짜 부속을 잘 만듭니다. 독일 같은 데도 대표적인 예입니다. 1905년도에 처음 벤츠 차가 나왔습니다. 지금도 1930년대의 벤처가 굴러다닙니다. 자기네들도 언제까지 쓸 수 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럴 정도로 잘 만듭니다. 일본차 같은 것들은 오래 탑니다. 한국 차는 금방 망가집니다. 이런 것들이 결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야흐로 시대는 바뀐 것입니다. 엘지나 삼성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차피 한 회사에서 모든 부품 하나하나를 잘 만들지는 못합니다. 수 백 개의 회사의 제품들이 모여서, 비행기 같은 회사는 수 천 개의 회사의 부품들이 모여서 하나의 제품이 되는 것입니다. 삼성이나 엘지에서 리더십에 있던 사람들의 생각은 부품을 잘 만드는 기술과 이것들을 모두 합쳐 어셈블(assemble)해서 새로운 디바이스(device)를 만들어 내는 기술은 완전히 영역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중국에서 삼성 폴더폰이 출시됐는데 2초 만에 매진됐습니다. 또 다른 사이트에서는 2만 대가 5분 만에 매진됐습니다. 폴더폰이 나오고 다음 버전이 클랜폰이라고 해서 지갑처럼 조그만 해서 쏙 들어가고 앞쪽으로 접힙니다. 부품을 아무리 잘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고 그런 식으로 사고의 전환을 해서 만들지 못한 것입니다. 예전에 맨 처음에 아이폰이 나왔을 때의 충격을 기억합니까? 단추를 눌러야 되는데 단추가 없는 것입니다. 예전에 컴퓨터에 파일 복사할 때 *.hwp 그런 도스(DOS) 명령어 기억합니까? 파일을 복사할 때는 모두 하고 싶으면 copy하고 *.hwp하면 모두 복사가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GUI(Graphic User Interface)명령어가 나와서 그림을 이렇게 드래그하면 바로 복사가 되는 것입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은 더 충격이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만들었을 때 아무도 상상하지 않던 폰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데이터 한 개 올리고 내리는데 얼마 받던 시절이었는데, 장소만 빌려주는 플랫폼을 만들어서 수많은 지식들이 공유되면서 거기에 지식을 올린 사람들이 돈을 벌어가게 만들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시장이 열리는 것입니다. 스티브잡스 이래로 아이폰이 그런 식으로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번에 아이폰 11이 나왔다는데 그렇게 특별한 게 없다고 합니다. 화면이 좀 좋아지고 사진이 좀 좋아진 것 이외에 혁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폴더폰은 혁신입니다.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을 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노하우는 비유를 하자면 하나 하나 제품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부품을 결합해서 A를 만든다고 생각해볼 때 이 사람은 상상 속에서 이런 것들을 결합해서 전혀 다른 Z라는 작품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부품을 만드는 능력과 완전히 다른 능력입니다. 이것은 상상력이 필요하고 공대생들은 할 수 없습니다. 공대생이 아니라 아주 자유롭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이것들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한 30년 전에 엘지에서 광고 하나를 냈는데 파도가 막 치는데 그 파도를 찍어서 요만한 핸드폰으로 보내는 광고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바다로 데려갈 수는 없지만 보여 줄 수는 있지” 그러면서 요만한 폰으로 들어와서 파도가 치는 광경이 펼쳐지는데 충격이었습니다. 저런 시대가 진짜 올까? 그랬는데 온 게 아니라 그런 광고가 나가고 나서 몇 년이 있다가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해서 주먹만 한 핸드폰을 가지고 전부 다 영상을 주고받는 시대가 되지 않았습니까? 제가 왜 이 이야기를 드리는지 알겠습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면서 공부에 관심을 가져요. 나한테 공부에 대한 도전은 크게 못 받겠지만 어쨌든 여러분들이 공부 하다가 보니까 재능도 있는 것 같고 흥미도 있어서 예를 들면 신학에서 요거 하나를 해서 깊이 전공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공을 해 봐야 목회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 것입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다가 몰라서 목사님을 찾아가서 목사님. 이게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뭐냐고 물어서 로마서 9장에 나와 있는 구절이라고 하니 이렇게 어려운 것은 목회자들이 모르고 교수를 찾아 가야 된다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교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제가 좀 여쭤볼게 있는데 로마서 9장입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저는 조직신학 전공이어서 성경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찾아 가냐고 했더니 성서학을 전공하시는 분을 찾아가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찾아갔더니 그 분이 어유. 죄송합니다. 저는 구약이 전공입니다. 그러더랍니다. 그러면 누구를 찾아가야 되냐고 하니 신약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교수를 찾아갔더니 그 분이 아유. 죄송합니다. 저는 마가복음이 전공이라서 바울서신은 잘 모른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를 찾아 가냐고 했더니 바울신학을 한 사람을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신히 바울신학을 한 사람을 찾아갔더니 아유. 죄송합니다. 제가 데살로니가서를 전공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냐니까 로마서를 전공하신 분을 찾아 가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가까스로 로마서를 전공해서 박사논문을 쓰신 교수님을 찾아가서 로마서 9장을 보여주면서 이것의 올바른 해석을 듣고 싶습니다. 라고 했더니 죄송합니다. 제가 8장을 전공했습니다. 9장에 대해서는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제가 만들어낸 예화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의 상황입니다. 9장에 대해서 물어볼 때 “죄송합니다. 제가 9장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 할 처지가 아닙니다. 제가 8장을 전공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아우라입니다. 얼마나 8장을 깊이 연구했으면 9장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고 얘기할까? 이것이 사실은 기독교 전통신앙에서 보면 웃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기독교신앙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9장의 한 구절을 공부해서 단어 하나를 가지고 박사학위를 쓴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스어 단어 하나를 가지고 어마어마하게 파고 들어가서 했다고 치면 거기에 한해서는 세계에서 자기를 따라 올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요기에 한해서입니다. 우리들이 인생 전체를 살아갈 때는 이런 지식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사실 이런 지식은 다 필요하지 않고 일부 필요하고 이런 지식들을 어셈블리로 만들어서 독특하게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이 목회를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공부 못하는 사람이 목회를 잘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전혀 아닙니다. 그것은 상관이 없고 공부가 어떤 식의 공부냐 일까가 걸려있는 문제입니다. 공부를 이렇게 계속해서 파고 들어가면 요 밖의 세계는 모릅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것을 파고들어가서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깊은 세계에 도달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것을 목표로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특별한 분야를 전공하는 사람들은 그래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없으면 사회가 어떻게 발전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깊이 팔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은 게 아니고 이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극소수입니다. 제가 외국에 많이 다녀봤는데 유학을 간 한국 학생들을 볼 때 10명이 유학을 하고 있으면 그 중에 8명은 학문에 재능이 없습니다. 10명 중에 한 두 명 그것도 많고 수 십 명 중에 한 두 명 정도가 특별히 재능이 있습니다. 여기서도 공부를 잘 못하던 학생들이 유학을 가거나 여기서도 공부에 흥미가 없던 학생들이 다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유학을 가는 것입니다. 유학을 가면 다 영어로 해야 되는데 여기서는 한글로 된 것도 안 읽던 사람이 그게 뭔 고생입니까?
제가 지금은 힘들어서 못하는데 한 10년 가까이 월요일마다 스터디를 했습니다. 가르치는데 그 학생들 중에 굉장히 많은 학생들이 유학을 갔습니다. 아침 7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메타 피지카(형이상학), 10시에는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 2시에는 에티엔느 질송(Etienne Gilson)의 중세교회사, 7시에는 Post-Reformation Reformed Theology 이런 것들을 영어 원서가지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중에는 정말 똑똑한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총신대에서 거의 대학원생들인데 한 3프로 안에 드는 진짜 똑똑한 학생들이 많이 왔습니다. 영어로 20페이지씩 읽고 와서 발표를 하고 했는데 유학을 에든버러 간 사람도 있고 칼빈 간 사람도 있는데 Th.M 과정에 들어가 보니까 하는 얘기가 “목사님. 목사님하고 다 배운 것입니다. 그 때 한글로 배운 것을 여기서는 영어로 배우고 있습니다.” 세계의 수준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문제는 영어를 이렇게 엮어낼 수 있어야 됩니다. 예를 들면 이번에 작은 비행기인 보잉 737 맥스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보잉이 진짜 비행기를 잘 만드는 회사입니다. 그 회사의 비행기 중에서 특히 747 8 I dreamliner같은 것은 내가 타본 비행기 중에서 진짜 잘 만든 최고의 비행기였습니다. 737의 뭐가 문제가 됐냐 하면 날개 쪽에 있는 볼트 하나가 금이 가고 파손이 되는 것입니다. 벌써 여러 대의 비행기가 떨어져서 한 4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얼마큼 배상을 해야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불행히도 그 비행기가 많이 팔렸습니다. 우리나라에도 80대 정도가 들어와 있습니다. 전수조사에 들어가고 지금은 운행을 안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뭘 보여 주냐 하면 비행기 부품이 100만개 이상이 들어가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수 천 개 회사에서 납품을 받아서 만들고 보잉에서 직접 만드는 부품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극소수일 것입니다. 다 납품을 받아서 하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만드는 것은 별도의 기술인데 이 사람은 비행기를 못 만듭니다. 이 사람이 그 기술을 가지고 디자인을 해서 최고의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부품 하나가 잘못 들어가서 비행기 제조사 전체가 도산까지는 아니진 천문학적인 액수의 배상금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까지 다 배상을 한다면 어마어마한 액수일 것입니다.
결국 뭘 보여 주냐 하면 비행기를 만드는 사람은 이 부품을 보면 되지만 부품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비행기를 만들면 저런 결과가 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부품을 정확하게 알고 그것이 저렇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미리 예측해서 그것을 쓰지 말고 더 좋은 회사의 부품을 사용해야 됐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판단할 능력이 없으니까 납품된 것만 믿고 확실한 실험도 안하고 장착을 해서 얼마 안하는 부품하나에 회사 전체가 문을 닫을 정도의 창사 이래로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737 맥스가 2,000대 이상 팔렸다고 그럽니다. 공교롭게도 그 시리즈 이름이 NG라고 합니다. NG가 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강의를 듣고 있는데 나는 이런 것들을 쭉 보면서 이 부품을 이런 식으로 만드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혀 관심이 없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부품에서 여기서 내려온 부품에서 여기서 내려온 지식의 부품에서 이것들을 조립해서 여태까지 누구도 띄워 본 적이 없는 새로운 형태의 항공기를 만들어내는 느낌으로 강의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이런 거를 배워서 누구에게 팔아먹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라 나는 내 인생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배우는 내용들이 여러분들의 인생과 관계가 없는 문제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것을 가르친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어떤 지식을 자신의 삶으로 연결을 시켜서 그것이 어떻게 의미를 갖고 있고 어떻게 삶을 개선할 것인가 라고 하는 것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죽은 지식이라고 말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C. 실효적인 힘으로서의 죄
오늘도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강의안 37쪽을 들어가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계속 이어서 실효적인 힘으로서의 죄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지난 시간에 악은 원래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이라는 것을 배웠고 따라서 인간에게 은혜가 결핍될 때에 그 결핍된 것만큼 죄가 있게 되고 그 죄는 실체라기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치게 되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의 몸은 실체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실체입니다. 죽어서 몸은 장례식장에 남겨놓고 영혼은 하늘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마음에 죄가 있기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 나쁜 짓을 하고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드디어 죽었으면 죄는 어디로 갔을까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옆에 있는 사람에게 결핵균이 옮겨 가듯이 옮겨갔을까요? 결핵환자가 죽었을 때 곁에 가면 안 되는 것 아십니까? 죽기 직전에 몸에 있는 모든 결핵균이 도망을 칩니다. 균들은 이미 직감적으로 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바깥으로 어마어마한 양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큰일 납니다. 죄가 그렇게 했을까요? 균은 실체이지만 죄는 실체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죽는 것과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실체가 아니니까 어디로 사라진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너. 나만 그렇게 사랑하더니 어떻게 환승 연애를 할 수 있냐? 예전에 네 마음속에 있던 나를 향한 사랑은 어디 갔니?” 라고 물으면 이 여성이 뭐라고 대답할까요? “출장 보냈어.” 그렇게 말 할 수 있습니까? 그냥 싫어지니까 없어진 것입니다. 가슴에 와 닿아요? 이해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뜨겁게 사랑하던 사람이 요새는 안 하고 계속해서 문제만 일으키고 세속적입니다. 예전에 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 갔니? 라고 물으면 어디 갔다고 대답을 해야 되겠습니까?
문제는 죄가 실체가 아닌데도 엄청난 힘을 우리에게 행사합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우리들이 알고 있는 바입니다. 죄는 엄청난 힘을 우리에게 행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실효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을 합니다. 이것을 efficacious 라고 이야기 합니다. 에피션트(efficient)라는 말하고 같이 나오는 건데 실제로 어떤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힘입니다.
예를 들어서 개미가 이것을 밉니다. 개미 한 마리가 이것을 민다고 움직입니까? 안 움직입니다. 힘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실효적인 힘이 아닙니다. 실효적인 힘은 진짜 작동시킬 수 있는 힘입니다. 그것을 이 안에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온갖 죄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죄가 실효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들이 어떻게 그것을 이해해야 되겠습니까?
한 번 보겠습니다. 37쪽입니다. 셋째로 죄는 실효적인 힘이다. 죄는 영적인 선의 결핍이지만 실효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죄를 실효적인 힘으로 묘사하는 것은 욕망과 관계가 있다. 다음 째 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그 지성이 계명되어 진리를 의식하고 선에 이끌리면서도 온 마음을 다해 이것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악한 욕망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것을 영혼의 무게라고 하였다.
끌고 가기가 너무 힘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요새 너무 힘들어.” 그렇게 얘기 할 때 있지 않습니까? 뭐가 힘들다는 것입니까? 마음에 무게가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끌고 다녀야 되는데 가뿐하게 탁 붙어있는 게 아니라 너무 무거워서 끌고 다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라는 사실이 너무 힘들다는 뜻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사는 게 너무 힘겹다는 뜻입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힘들기도 하고 힘든 일이 많이 일어나는데도 너무 가볍기도 한 것입니다. 기쁨의 삶을 사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어려운 일들이 생겨서 다들 근심하는데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에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함께 하며. 꼭 그렇게 신령한 것뿐만 아니라도 너무 너무 어려운 일이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열애에 빠졌다고 할 경우에는 가볍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물론 착각이어서 언젠가는 무겁게 느껴지겠지만 말입니다.
영혼의 무게라고 표현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악을 행함으로 만족을 누리지만 마음 안에는 지속적으로 악에 기울어지는 성향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 성향이 그로 하여금 또 다른 악을 행하게 하는 필연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 중에 명품에 탐닉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헤르메스라는 명품 매장에 심방을 갔었습니다. 압구정 매장에서 제일 싼 게 요만한 여자용 반지갑이었는데 10년 전에 330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없는 것입니다. 이 비싼데서 이렇게 해서 장사가 되냐고 했더니 막 웃으면서 여기는 사람이 몰려와야지 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놀다가 저녁 때 두 사람만 오면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이 나온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와서 쇼핑백에 “이거. 이거.” 몇 개 담아가면 보통 7천 만원에서 8천 만원이 나온다고 합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물론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헤르메스 매장을 쭉 돌면서 “목사님. 이 중에서 아무거나 하나 가져가세요.” 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특별히 가져가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남성과 여성 것들이 다 섞여 있는데 하나 괜찮은 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게 필요가 없는 것인데 말안장이었습니다. 1,200만원을 써 붙여 놓았습니다. 보통 여성 가방 요만한 거 들고 다니는 것은 600만원에서 800만원 혹은 1,000만원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저는 욕망을 못 느꼈습니다. 그런데 연예인 지망생 같은 애들은 사채를 얻어서 그 신상을 사야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털려가지고 장기 적출을 한다고 협박을 당하고 위협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살겠습니까? 그런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욕망을 품으면 일어나는 일과 그 사이에 필연이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필연은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 필연입니다. 그리스어로 아낭케(Ανάγκη)라고 하는데 피할 수 없는 일이 ‘필연’입니다. 그런 필연이 많이 생기면 많이 생길수록 인간은 자유롭지 못한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 필연이 생겨도 자유가 방해받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필연이 아닙니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에게 자유롭게 선택하게끔 만들어 줍니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해서 내가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고,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이 사람이 생각이 나서 이것도 사줘야 되는데 생각합니다. 옷을 보면서도 저거 입혀 줬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뭘 사러가도 내꺼 사고 싶지 않고 저 사람 꺼 사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거기서 속박을 느낍니까? “아이 씨. 나는 내 마음 속에서 자꾸 잘 해주고 싶은 생각만 나지? 나 힘들어 죽겠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유기 때문에 자유롭게 그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락입니다. 물리적인 힘은 물리의 법칙을 따르는 운동력이지만 도덕적인 힘은 인간에 영혼의 경향성 안에 작용하는 욕망의 힘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악한 사람은 악하게 행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것입니다. 두 개가 싸우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필연성은 운동에 있어서 전권과 후권 사이에 피할 수 없는 힘의 관계지만 도덕적 필연성은 마음의 운동에 있어서 그것이다. 즉 인간이 외부의 사물을 육체의 감관으로 감각하고 마음에 지각하여 지성으로 인식하게 되는 과정뿐 아니라 인식한 것에 대해 행동으로 반응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죄는 도덕적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면 담배가 너무 피고 싶은 사람은 담배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해독성에 대해서 아주 가볍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 영향은 바로 사람 마음 안에 있는 죄의 성향과 크기가 힘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며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의 전건과 후건 사이를 필연성으로 연결시키는데 이 지향하는 방향이 악이다. 곧 하나님께 적의를 품고 반감과 대적으로 역사하게 하는 경향성이다. 의지 밖에 있는 힘이 아니라 선택하는 인간에 의지 안에 있는 힘이다. 그리하여 신자는 자신 안에 죄가 융성할 때 원하지 않으면서도 악을 향하여 이끌리게 되고 싫지 않은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죄가 그 사람의 마음 안에서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모순율들을 반영한다. 마음에 성향이 악함으로 악을 행하게 되는 필연성으로 신자로 하여금 죄로 향하여 몰아붙이며 작용하게 하는 힘인데 의지 안에서 강제력을 지니게 된다.
죄가 인간에게 들어오게 되면 지성적으로는 사람은 속이고(deceit), 의지에는 힘(force)을 가해서 저항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부터 술을 안마시기로 다짐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며칠 전에 딱 한 번 술을 맛본 사람입니다. 나는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 그 결심을 이행하기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태어나서 며칠 전에 처음 술을 맛 봤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되겠다고 하고 나는 이제 오늘부터 술을 안 먹겠다고 결심을 할 때 그 결심을 실행할 가능성이 많습니까? 적습니까? 적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5년 동안 술에 쩔어서 매일 저녁에 술이 없으면 못 잡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말씀에 은혜를 받고 깊이 결심을 했습니다. 이것은 나를 망가뜨리는 삶이구나. 이제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 결심을 이행하기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으로는 그렇게 결심을 해도 이 속에 정서가 이미 그것을 기뻐하고 의지에 술을 먹고자 하는 힘이 굉장히 가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끊으면 고통을 느끼는 겁니다. 그것이 금단현상입니다. 그러니까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중독의 치료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치료가 어렵습니다. 알코올 중독은 심각한 정신병입니다. 알코올 중독 만인 줄 아십니까? 여러분들이 잘 빠지는 게임중독은 알코올 못지않게 웬만하면 못 끊습니다. 사람이 놀음, 섹스 이런 것들에 깊이 물들어버리면 벗어나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그 성향으로 이끌리는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도 “싫어. 마시면 안 돼. 마시면 안 돼. 마시면 안 돼.”하지만 그러면서도 한 쪽에서는 “빨리 들어와. 빨리 들어와. 온 몸이 너를 원하고 있어. 빨리 빨리.”라며 두 마음이 이 안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결국은 앞에 있는 마음이 뒤에 있는 마음에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마음에 죄의 성향이 이미 커진 사람은 끝없이 헛된 결심을 말합니다. 스스로 진지하게 결심을 하고 혀를 깨물어 혈서를 쓰는데 죄는 그것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그래서 무엇으로 그 죄를 이겨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화) 제가 미국에서 온 설교자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실화입니다. 자기 친구 중에 하나가 음란물에 푹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진짜 평생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사랑에 푹 빠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 중독을 끊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좋아하던 것을 끊을 수 있었냐고 물었더니 “그 여자를 사랑하고 나니까 그런 거 하고 싶지 않아.”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은 끊겠다고 수없이 결심하는 것만 필요한 게 아니라 사랑의 방향을 다른 데로 옮겨 놓는 것입니다. 술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포르노그래피보다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을 찾으면서 그런 식으로 인생의 기쁨을 찾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화) 섹스 홀릭에 빠진 젊은이가 장문의 편지를 나한테 세 번이나 보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편지를 보내서 친절히 가르쳐 줬습니다. 두 번째 편지가 왔는데 너무 힘들어서 다 때려 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하늘나라 가는 거 아닌지 자기는 겁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절대 못 들어가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러다가 하늘나라에 간다고요? 하늘나라가 그렇게 쉬운 나라입니까? 당신을 위한 나라는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무 화가 나가지고 당신이 말씀으로 돌이키든지, 계속 짐승처럼 살다가 죽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될 거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편지가 또 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얼마나 재미있는 일들이 많은데 그것만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가을의 단풍, 친구와 떠나는 여행, 맛있는 음식 등 꼭 은혜가 아니더라도 재미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감동적인 음악회, 신나는 놀이와 같이 것이 얼마나 많은데 컴퓨터 하나 켜놓고 섹스 동영상 그것 하나가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눈을 뜨라고 충고했습니다. 제일 충고하고 싶은 것은 우선 기도도 못 할 테니까 기도할 생각하지 말고 체육관에 가서 토하도록 뛰면서 에너지를 발산하고, 집에 들어와서 그런 거 할 기운이 없게끔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정신 차리고 살지 않으면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될 것이라 충고했습니다.
오락에 빠지면 안 됩니다. 그런 거에 빠지면 주체성이 없는 삶을 살게 되고 주체성이 없으면 그가 느끼는 모든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이것이 행복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애굽의 때에는 좋았는데” 라고 후회합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뭐가 좋았습니까? 고깃국을 한 그릇 먹는 것이 좋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 그릇을 먹기까지 무엇이 있었습니까? 수없이 노예로서 짓밟히고 채찍에 맞고 사람대접을 못 받은 일들은 기억이 안 나고 고깃국 한 그릇만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솔직히 이야기해서 수제비 먹으면서도 그렇게 살지는 말아야지 내가 한 인간으로서 왜 다른 사람 앞에 짓밟히고 업신여김을 당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됩니까? 감히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존엄한 인간인데 누가 나를 그렇게 짓밟고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런 정신으로 살아야 됩니다. 고깃국 한 그릇에 취해서 사는 그런 삶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굶어죽어도 자유인으로 주체성 있게 살다가 죽어야 인간이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런 거에서 빨리 떠나야 됩니다.
집착을 갖지 마십시오. 사람도 너무 집착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늘 얘기하지만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는 사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헷갈리죠? 헤어지라는 얘기는 진짜 헤어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건 아주 아름다운 거고 젊었을 때 해 보라고 얘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떠나면 인생이 무너지는 것 같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 아니면 죽어 버릴 거야. 라고 말하는 남자하고 결혼 하라고 그랬습니까? 하지 말라고 그랬습니까? 절대 그런 사람과는 결혼하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예전에도 여러 사람한테 그랬고 앞으로도 여러 사람한테 그럴 것입니다. 그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인데 인간 의존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주체적인 사람하고 결혼해야 인격적인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지 종속적인 사람하고 결혼하거나 폭압적인 사람하고 결혼하면 주인으로 섬기고 살든지 종으로 살든지 둘 중에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런 삶을 삽니까? 너나 나나 하나님 앞에서 다 똑같은 인간인데 왜 그렇게 삽니까? 남성우월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하고 살면 안 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멋있게 살아야 됩니다. 결혼안 하고 결혼 하는 것, 여러분들이 졸업해서 어마어마하게 훌륭한 직장 어디일까요? 연구소를 들어간다든지 공부를 더 해서 교수가 돼는 것은 모두 삶의 한 양상이지 삶의 본질은 아닙니다. 어차피 65세 되면 다 은퇴해야 됩니다.
마음에 성향이 악함으로 악을 행하게 되는 필연성인데 죄를 향해 몰아붙이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의지 안에서 강제력을 지니게 됩니다. 의지가 자유로 와서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 노예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람을 노예처럼 만드는 잔인한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이리로 가자.”고 얘기하면 안 간다고 그럽니다. 그러면 잡아 당겨야지 되는 것입니다. 더 하고 싶으면 꽉 잡고 댕기면 됩니다. 그런데 (일정한 폭력을 가하여 한 사람을) 노예 상태로 만들게 되면 “쉭!”하는 것만으로도 바로 따라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안 했을 때 수많은 폭력을 경험한 것입니다. 6개월 밖에 안 걸린다고 합니다. 사람을 가둬놓고 무언가를 말할 때 안 들으면 무자비한 폭력을 가해서 6개월 만에 아주 고분고분한 사람으로 바뀌는 겁니다. 정신이 완전 노예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우리가 무엇에도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중간을 보겠습니다. 성화에 있어서 이러한 죄를 죽이는 성령의 역사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죄가 가지는 실효적인 힘을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의미라고 보았다. 경향성으로서의 구체적인 힘을 행사하는데 지성을 속이고 정서를 부추기며 의지의 동의를 받아서 죄를 행동으로 산출하고자 한다. 마음이 가지고 있는 말하자면 능력입니다. 지성의 능력, 정서의 능력, 의지의 능력입니다.
D. 역설적 개념의 종합
그 다음에 뒤고 들어가겠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죄의 형이상학에는 종합하기 어려운 역설의 개념이 있다. 즉 죄를 은혜의 결핍으로 보면서 결핍인 죄가 강력한 힘을 인간 안에서 역사한다는 상반된 사실이다. 이것은 신학에 있어서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다. 은밀한 의미에서 신학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철학적인 문제이다. 존 오웬은 다른 저작에서도 이 죄의 역설적인 문제를 풀어보이지는 않았다. 역설의 상태는 결핍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힘을 갖는 것이다. 결핍인데 실재하는 것이 아닌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죄의 역설이다. 은혜의 결핍은 오히려 강력한 힘을 갖는다. 따라서 영혼이 죽어있는 자는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행실들을 산출한다. 그리고 그것은 강한 힘으로서 이루어진다. 비중생자 안에서 강력하게 나타나며 은혜가 결핍된 신자 안에서 강력하게 나타나며 은혜가 결핍된 신자 안에서 대부분 재현된다. 은혜의 결핍으로서의 죄가 갖는 강력한 힘의 역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은혜의 결핍을 통해 역사하는 죄의 힘은 은혜의 결핍의 결과가 아니다. 은혜 자체가 인간의 마음 안에 역사하는 강력한 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화) 제가 이런 비유를 듭니다. 한 25톤짜리 트럭이 여기에 서 있습니다. 짐을 잔뜩 싣는다면 45톤 쯤 될 수가 있습니다. 여기가 언덕에다 차를 세워놓고 운전수가 너무 불안하니까 여기다가 나무를 받쳐놓고 갔습니다. 그러면 미끄러집니까? 안 미끄러집니다. 이렇게 서 있는 동안에는 이게 무슨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안 됩니다. 그런데 누가 와서 이것을 발로 탁 쳐서 빼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한 45톤 쯤 되는 트럭이 언덕을 구르면서 아래에 내려와서는 어마어마한 가속력을 얻으면서 상상치도 못했던 문제를 일으킵니다. 집을 다 부서트리고 차를 몇 대나 부수면서 아래로 굴러 내립니다.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이런 힘이 우리 안에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이것들을 억제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억제하는 죄의 논증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을 가리켜서 억제하시는 은혜(restraining grace)라고 부릅니다.
(예화)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돈이 너무 갖고 싶어 죽겠어서 어디서 훔치고라도 싶은 것입니다. 누가 소중한 정보를 구해 줬는데 10억이 현찰로 들어있는 엄청난 캐리어가 지금 있고 보관 장소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어디? 내가 구하면 반 나눠줄게 어디?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에베레스트 산 맨 꼭대기에 어떤 사람이 잠시 보관해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거기를 훔치러 가겠습니까? 감시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못 갑니다. 에베레스트 산에 도움 없이 등반할 수 있는 사람이 전 세계에 수 백 명도 안 됩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삶들이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8,884 미터를 돕는 사람 없이 거기를 올라간다고 하는 게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4,000미터 올라가서 졸도 합니다. 저는 3,800미터에서 졸도 했습니다. 물론 에베레스트 산은 아니었지만 필름이 순간적으로 탁 끊겨서 계단에서 쓰러졌습니다. 두 번 갔는데 두 번 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두 배 높이를 올라가도 가방이 안 나옵니다. 올라가겠습니까? 10억이 아니라 1,000억이 있다고 그래도 우리 같은 사람은 못 갑니다. 갈 수도 없지만 갔다고 칩시다. 10억의 무거운 가방을 어떻게 가지고 내려오겠습니까? 얼어 죽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불편의 논쟁입니다. 불편해야 죄를 안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죄를 막아주심으로써 이 사회가 질서를 유지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모든 질서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III. 죄의 작용과 은혜의 작용
A. ‘마음의 틀’(프로네마)의 개념
40페이지 위에서 셋째 줄을 보면 성경구절이 나오는데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거기에 보면 ‘생각’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나옵니다. 생각이라는 말이 없어서 그렇게 번역했는데 사실은 생각이 아닙니다. 그리스어로 프로네마(φρονημα) 라는 단어입니다. 프로네마 라는 단어는 정확하게 말하면 “생각되어짐” 이란 뜻입니다. 마인드(mind)는 “생각하다” 라는 뜻도 있는 어려운 단어입니다. 마음이 가지고 있는 사물에 대한 인식 작용을 가리켜서 마인드라고 하는데, 생각이라고 번역되면 좋은 경우도 많지만 지성이라고 번역해야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동사가 되면 “생각하다” 도 되고 “싫어하다” 도 됩니다. 이렇게 붙이면 생각되어지는 것이 됩니다. 여기에 ness를 붙이면 이것이 프로네마의 정확한 번역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육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나오는데 프로네마가 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존 오웬은 마음의 틀로 이것을 설명하는데 마음의 틀을 어떻게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이것들이 어떤 쪽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심리학을 배우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심리학에서 핵심감정이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많은 감정들이 있습니다. 그 감정은 어떤 상황들을 만날 때 바깥으로 나타납니다. 무서운 것을 만나면 무섭다는 느낌을 받고, 예쁜 것을 보면 진짜 예쁘다, 반가운 사람을 보면 정말 기쁘다 이러한 감정들을 느낍니다. 이런 감정들이 한꺼번에 불이 다 들어오는 게 아니라 외부의 상황과 만났을 때 불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핵심감정이라는 것은 이런 감정들 중에 하나인데 이것이 어떤 이유로 상승하는 것입니다. 상승해서 여기에 자리를 잡으면서 다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핵심감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해도 잘 모르실 것입니다. 아주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핵심감정이 두려움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두려움이 핵심감정으로 자리를 잡으면 무슨 감정이 생기든지 간에 두려움이 주도적인 감정이 되어서 그것을 통해서 감정들을 해석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자매가 있는데 평생 소원이 멋진 남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자기가 꿈에 그리던 그런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조건도 좋고 얼굴도 잘 생겼고 공부도 많이 했고 집안도 좋고 성격도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 남자에게서 프로포즈를 받았을 때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히도 이 자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핵심감정이 두려움입니다. 저 남자가 나한테 프로포즈를 한 것은 꿈만 같고 너무 좋은데 기본적으로 이 자매를 지배하고 있는 핵심감정이 두려움입니다. “내가 여태까지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는데 저 남자하고 잘 할 수 있을까? 내가 차이면 어떡하지? 내가 마음을 많이 뺏겼는데 나를 싫다고 그러면 어떡하지? 집안이 너무 차이가 나는데 좋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결혼할 수 있을까? 저 쪽의 높은 집안에서 반대하면 더 많은 상처를 내가 받지 않을까?”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그 프로포즈에 대한 응답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남자도 그럴 수 있습니다. 저 사람 너무 좋아. 그런데 격렬하게 몇 번 딱지를 맞은 경험이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핵심감정이 되어서 다시 한 번 그런 상처를 받기 싫습니다. 일단 얘기를 해봐야 되든지 안 되는지 결정이 날 것인데 그것을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분노가 핵심감정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정의를 말합니다. 정의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사회를 위해서 정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을 행복하게하기 위해서 정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불공정한 사태에 대해서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공정하게 했기 때문에 공정했더라면 기회를 얻을 사람이 기회를 못 얻고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런데 저는 묻고 싶습니다. 아니. 좀 차별하면 안 됩니까? 차별이 좀 있는 세상이 되면 안 됩니까? 왜 단호하게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행복의 기회를 박탈하기 때문입니다. 안 될 사람이 밀어내서 낙하산으로 특채가 되어서 들어가면 밑에 될 사람 한 사람은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의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보면 결국은 행복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당연히 공평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핵심감정이 분노입니다. 그러면 그 공평에 대한 의식이 분노에 물 드는 것입니다.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싹 죽여 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트랙터 같은 걸로 싹 밀어서 묻어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안 되면 자기 온 몸을 불 질러버리고 죽어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이제 이해됩니까?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핵심감정에 사로잡혀야 되겠습니까? 핵심감정이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굳이 저 용어를 빌린다면 하나 있어야 되는 것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 지배하고 해석하고 그 아래에 놓고 통제할 수 있는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젊어서 학교 다닐 때 데모를 많이 했습니다. 굉장히 심했습니다. 그때는 분노에 물든 정의감인 경우가 대게 많았습니다. 그런 것들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왜 좋은 것이 아니냐하면 주체성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욕망에 확 사로잡히게 만드는 것도 안 좋은 것입니다. 언제든지 그만 둘 수도 있고 할 수도 있는 그런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 것에도 욕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 됩니다.
프로네마를 얘기하면서 이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심리학에서 최근에 프로네마 같은 저런 것을 얘기하지만 벌써 400년 도 더 전에 아퀴나스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미 다 이야기 되어진 것들입니다. 프로네마 라고 하는 것은 생각되어짐 인데 결국은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틀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림을 그려서 이렇게 있다고 칩시다. 국화빵처럼 홈이 파여져 있는 쇠이면 여기에다가 밀가루를 붓고 덮은 다음에 구우면 당연히 붕어빵이 나올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여기에 밀가루로 안 집어넣고 플라스틱 녹은 물을 넣어도 똑같이 뒤집으면 붕어모양이 나옵니다. 뭘 집어넣어도 항상 이 틀이 형성이 되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인간의 마음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프로네마의 개념입니다.
이것은 육입니다. 영적이지 않은 육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입니다. 육은 결국은 한정된 물질세계와 관련이 있는 거고 영은 정신세계와 신령한 세계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은 결국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육에 속한 인간의 생각되어지는 것인 사람의 프로네마는 항상 사망을 지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망은 무엇입니까? 우선 첫째로 현재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영원한 날에 죽은 것입니다. 영의 생각은 어떤 식으로 틀이 찍히느냐 하면 생명과 평안입니다. 이것을 현재 누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누릴 것, 이것에 대한 것으로 찍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적인 은혜의 세계,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 알게 되면 모든 생각이 그 쪽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후자의 사람은 예쁜 여자를 만나서 사랑해도 이 여자와 함께 일생을 묶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둘이서만 살고 싶지는 않은 것입니다. 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뒤에 있는 사람은 돈이 생겨도 그것을 가지고 내가 어떤 호사를 누릴까? 어떤 명품을 살까?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어떡하면 이 돈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써서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고 사람들을 구원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는데 이바지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공부를 잘 해서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공부를 잘해서 최고의 학자가 되어서 연봉 많이 주는 대학에 가서 명예와 칭찬을 한 몸에 받으면서 그 돈으로 부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서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그런 재능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하나님이 나에게 이 방면에 이렇게 훌륭한 학자로, 기술자로 만들어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과 평안 쪽으로 계속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자의 사람은 무엇을 주어도 최종 소비자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예쁜 남자를 만나도 그 남자하고 착 달라붙어서 한없이 꿀을 빨 듯이 둘이서 아무의 간섭을 안 받고 부모도 필요 없고 돈만 있으면 자기네끼리 여행 다니고 맛있는 거 먹고 그림같이 재미있게 살다가 죽고 싶은 것입니다. 돈이 주어지면 어떡하면 그 즐거움을 위해서 호사스럽게 쓸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그것이 다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프로네마입니다. 프로네마가 육적으로 가면 죄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영적으로 가면 은혜 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받고 참으로 회심하면 프로네마가 전자로 됐다가 후자로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에 자기가 어떻게 성화의 생활을 잘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유지하고 믿음을 따라서 사느냐에 의해서 프로네마는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합니다. 기본적으로 구원을 받은 다음에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지 않고 지식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러면 불신자하고 거의 똑같은 삶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더 나쁜 삶으로도 돌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프로네마 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구원받고 구원받지 않은 것에도 달려있지만 그가 계속해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현실적은 생활에 따라서 프로네마는 B쪽으로 강화되기도 하고 A쪽으로 강화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A쪽은 가려고 해서 가는 게 아니라 B가 없으면 노력을 해서 가는 게 아니라 그냥 저절로 A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매우 유식합니다. 그 사람이 노력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노력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지하게 무식합니다. 노력해서 무식합니까? 피나는 노력 끝에 무식하게 됐습니까? 아닙니다. 지식을 습득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저절로 무식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원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고 지식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에 빠진 삶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다. 가만 놔두면 되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40대 정도가 되면 슬슬 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먹는 것을 좋아하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여러분들이 아주 끔찍하게 생각했던 외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런 몸을 만들려고 목표를 세우고 노력해서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나이가 됐는데도 많이 먹고 활동도 많이 하는데 사람이 완벽한 몸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피나는 운동을 한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피나게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몸에 대사율이 떨어집니다. 젊었을 때는 살이 쪄도 골고루 살이 붙어서 예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특정부위에 살이 몰리고 그것이 늘어지게 됩니다. 결국은 이 안에 신진 대사율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의 기운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이 찔 수도 있고 날씬할 수도 있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런데 대사 작용이 떨어지게 되면 많이 먹어서 소화해 내는 것이 사뭇 다르게 됩니다.
우리들이 보통 남자권장 칼로리가 2,400이라고 하고 여성은 1,800정도라고 얘기를 하는데 펠프스 라는 수영선수는 하루에 섭취하는 칼로리가 12,000칼로리 였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물고기 같은 몸매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올림픽에 가서 7개의 금메달을 혼자 딴 7관왕이었습니다. 12,000칼로리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아침 식사를 계란 10개로 시작한다고 하니까 12,000칼로리면 꽤 많은 겁니다. 매일 우리가 그렇게 먹으면 한 달 안에 5-6킬로 정도는 찌고 두세 달 지나면 10킬로 가까이 찔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왜 물고기 같은 몸매를 유지하고 살까요? 미국 사람을 만나서 펠프스 얘기를 했더니 자기는 펠프스를 펠피쉬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수영을 할 때 들어가는 에너지 대사량이 권투를 할 때 들어가는 에너지하고 거의 똑같이 들어가는 어마어마하게 힘든 운동입니다. 한 시간에 6,000칼로리 이상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양을 먹으면서도 감당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프로네마가 결국 어느 쪽으로 향하는 사람이 되느냐에 따라서 좋은 사람도 되고 악한 사람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이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신학대학교 넓게 보면 기독교대학교에 왔으니까 너무 너무 세속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학생들도 물론 있겠지만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들어와서 공부하는 게 훌륭하게 인격을 도야하려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책도 그렇게 안 읽고 무슨 인격도야가 되겠습니까? 온갖 이상한 일들을 하면서 학교생활을 합니다. 결국 좋은 대학교 들어가려고 몸부림치는 이유는 직장입니다. 서울대 들어간 사람이 다른데 들어간 사람보다 훨씬 더 고매한 인격을 가질 기회가 많아서 서울대를 들어갑니까? 아닙니다. 취업의 확률이 높은 것입니다. 들어가서 대학도 못 나온 사람들은 그래도 훌륭한 직장도 얻을 수도 있고 사업을 해서 성공할 수도 있지만 확률적으로 볼 때는 매우 어렵습니다. 좋은 대학교 나오고 거기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던 사람들이 확실히 확률적으로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연봉도 높은 곳에 들어가고 대우도 좋은데 들어갑니다. 그 확률 때문에 몸부림치면서 <스카이 캐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하게 하겠다고 하는데 정부에서 감독해서 그것이 가능할지 궁금합니다. 저는 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과외를 금지하던 시대도 있었는데 한 달에 몇 백 만 원씩 내고 아빠 승용차를 계속 타면서 과외를 받는 겁니다. 커튼을 내리고 큰 승용차 뒤 칸에서 공부를 가르쳐 주는데 어떻게 막겠습니까? 못 막습니다. 민주사회에서 그럴 가치가 있나 나는 생각을 합니다. 학생들한테 조사해서 과외 하는 거 색출해서 처벌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쨌든지 간에 돈 있는 사람들에게는 부가 대물림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학생들이 결국 일류대학을 들어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합니다. 그렇게 못한 학생들은 180만원 받기도 힘든데 얘는 초봉에 연봉 6,000을 받고 시작하는 겁니다. 두 사람 사이의 삶의 차이는 하늘과 땅입니다. 다행히 부모로부터 좋은 유전자를 받아서 멋있는 남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그만큼 기회도 많습니다. 아빠한테 물려받은 성질도 너무 좋고 가문 대대로 예수를 믿는 집안입니다. 그러면 점점점점 더 좋은 선택의 조건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차피 60세가 되면 다 나가야 됩니다. 좋은 그룹에 들어가면 60세도 필요 없습니다. 승진 못하면 45세 쯤 부터 밀려나고 다행히 승진을 거푸거푸 해서 사람들이 바라보는 탑으로 올라가면 60세 정도까지 합니다. 그 다음에는 밀려나는 것입니다. 밀려나도 이 사람은 벌어 놓은 돈이 있으니까 노후를 편하게 보낼 것입니다. 그런데 180만원, 150만원 받고 간신히 먹으며 카드 값 갚으며 산 사람들은 60세에 밀려나도 또 폐지를 줍거나 뭘 하든지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친 듯이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후자와 같이 고단하게 사는 삶 그 자체를 좋아하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먼 관점에서 보면 결국 그것은 삶의 양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돈 없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넉넉잡고 집도 사고 한 20억 모아놓았다고 칩시다. 노후는 편안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행복의 다인가를 묻고 싶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사람이 뭘 하면서 살아가든지, 기혼이든지 비혼이든지 아니면 미혼이든지, 예쁘게 생겼든지 그냥 평범하든지 별 볼일 없던지, 남자가 똑똑하든지 덜 똑똑하던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던지 아니면 수저 없이 태어났던지 간에 그것은 삶의 양상인 겉모습에 불과합니다.
여기에 한 대학생이 이 외모에 이런 셔츠를 입고 왔습니다. 어느 날 머리를 빡빡 깎고 몸에 용 문신을 새기고 삼각 수영복을 입고 왔습니다. 그래도 이 학생은 박상준입니다. 이 사람이 심한 중병에 걸려서 누워서 오늘 내일 하면서 호흡기에 연명하고 있어도 이 사람은 살아있는 한 박상준입니다. 머리를 깎고 난리를 쳐도 박상준이고 여기에서 놀랍게 기회를 잡아서 서울대 교수가 됐어도 박상준입니다. 할아버지가 돼서 폐지를 줍더라도 박상준입니다. 어차피 박상준으로 살아가야 됩니다. 박상준으로 사는 게 행복하지 않으면 나머지는 행복을 가장한 거지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행복함은 무엇이냐 하면 그릇된 프로네마에 붙잡혀 있을 때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지배받게 됩니다. 이 핵심감정 자체가 하나님을 어게인스트(against)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복이신데 그 때 행복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42페이지로 넘어가서 프로네마에 심리철학이 나옵니다. 거기는 여러분들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41페이지로 넘어가면 우리 안에 죄가 있는데 이 죄가 죄의 크기만큼 프로네마를 육신적으로 만듭니다. 그러면 이 죄가 무엇이냐 보면 죄가 활동을 하는데 반감과 대적으로 활동을 합니다.
B. 죄의 활동: 반감과 대적
4번째 줄로 내려갑니다. 마음에 틀은 죄가 적합하게 활동하거나 혹은 반대가 되게 한다. 활동하기에 적합한 마음의 틀이 형성되면 죄는 자기를 발전시킬 수 있는 환경을 갖게 된다. 죄는 신자 안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면서 자기의 계획을 이루어간다.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는 두 가지 방식으로 활동하는데 반감(aversion)과 대적(apposition) 이다.
1. 반감과 대적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반감이다. 반감은 지성과 감정에 관한 것이고 대적은 의지에 관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 중에서 청소년 중에서 반항심이 있어서 아빠를 싫어했던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아빠가 어디가 싫으냐고 물으면 아빠의 모든 것이 싫은 것입니다. 말소리, 냄새, 발자국 소리 심지어 아빠가 입는 옷까지도 싫은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아빠가 살고 있는 집도 싫은 것입니다. 그렇게 반감은 존재와 관련된 모든 것에 번집니다.
세 번째 줄에 죄의 활동으로서의 반감은 생각과 감정의 움직임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싫어하거나 혹은 소극적으로 실정을 내는 것이다. 마음 안에 죄가 융성할수록 반감은 높은 강도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혐오하고 싫증나게 하는 죄의 활동은 생각과 정서가 작용하는 목적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의 기능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성의 기능을 주신 것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알기 원하는 방식대로 이 세상에 사물들을 알라는 뜻으로 우리에게 지성을 주신 것입니다. 지성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면 지성이 원래 지성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대로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하나님을 향한 대적입니다. 반감이라는 활동이 의지와 함께 작용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대적은 죄가 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죄의 본질인 적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행동할 때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도 작용을 합니다.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갈 때 그것은 의지의 선택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특정한 생각이 마음에 착상될 때 그것은 반드시 의지의 작용을 거친다.
우리 속에 수많은 생각들 오고 가지만 우리 의지가 다 선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글짓기 연습을 할 때 백지를 주고 단어의 연결해서 한 100단어를 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름, 허무함, 죽음, 고통, 이별 이렇게 해서 자신 속에서 어떻게 그 단어를 연결할 수 있는지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반복함으로써 문학적인 상상력이 풍부해 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연결할 때 그만큼 사고가 독창적이게 되는 것입니다. 작가로서 아무한테 안 가르쳐 주는 영업 비밀에 관한 것인데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결국은 끊임없이 의지를 가지고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생각이 오가는데 어느 생각이 내 마음에 딱 떨어져서 떠나지 않고 내 마음을 파고 듭니다. 그 때는 우리의 마음속에 의지가 그것을 딱 붙들고 낚아 챈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에 품은 것입니다. 그것이 점점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약에 좋은 것이면 선한 일을 위해서 큰 뜻을 품도록 발전하고 나쁜 일이면 매우 큰 악을 행하도록 마음이 준비하는 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줄입니다.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대적하는 활동은 의지 안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정서를 지배하는 죄의 성향은 의지를 밀어붙여 하나님을 향해 맞서게 한다. 이로서 신자는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죄의 작용은 죄가 얼마나 뛰어난 속임과 강압으로 역사하는지를 보여줍니다.
2. 반감과 대적의 대상
죄는 어디에 있든지 동일한 본질이다. 존 오웬이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특성과 활동, 힘을 입증하기 위해 비중생자 안에 역사하는 죄의 능력을 예로 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존 오웬이 이런 예를 듭니다. 전쟁이 나서 도망을 가는데 애기를 업고서는 도저히 도망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적에게 잡혀서 죽을 지경에 이르게 돼서는 부모가 그 아이를 버리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버려진 아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죽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은데 저는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가 보면 발로 땅을 툭툭 차면 1970년대에 땅에 묻은 죽은 사람들의 옷이 계속 나옵니다. 그것을 파내지는 않고 그냥 내버려 둡니다. 그 중에서 제일 끔찍한 게 뭐였는지 아십니까? 노동자 이 외에는 모두 죽인 거 아십니까? 한 20년 전까지만 해도 음악을 하는 사람들을 다 죽여 버려서 학생들이 화성이 뭔지를 몰랐습니다. 거기에서 끔찍한 것은 자본가 집안의 갓난아이를 데려다가 그 아이의 두 다리를 잡고 나무에다가 머리통을 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인 다음에 공중으로 던지면 저기서 군인들이 클레이 사격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죽은 사람들이 200만 명입니다. 해골들이 아직도 거기에 쌓여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악독해 질 수 있는지를 토할 것처럼 보여준 것입니다. 나는 거기서 분노했습니다. 세계가 한 쪽 구석에서 200만 명이 저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광경을 나는 보고만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무한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인간으로서 그럴 수가 없습니다.
존 오웬이 그런 식으로 설명하면서 인간이 얼마나 악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자기중심으로 살고 육적으로 살려는 프로네마가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불신자인데도 그 아이를 끌어안고 자기는 죽고 아이는 살려냅니다. 비근한 게 폼페이에 가보면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해서 8킬로 바깥의 재가 날아와서 다 타서 죽어버렸습니다. 도시가 묻혀 버렸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게 폼페이입니다. 극히 일부분만 발굴했는데 거기 보면 아이를 끌어안고 죽은 것입니다. 화산 불덩어리가 떨어져서 화산재가 쏟아졌는데 사람은 다 타고 없고 공간만 남았는데 그 공간에 다시 석회를 집어넣어서 본을 떠 보니까 아기를 끌어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면도 있는데 인간다움을 저버리게 되면 결국은 끔찍한 악을 행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결국은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춘재 같은 경우도 그런 경우입니다. 인간의 죄가 인간 속에서 어마어마한 힘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죄는 우리에게도 역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죄라는 점에서 자신의 본질을 깊이 인식하고 공정하고 정확한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자신에 대해서 무조건 비관적으로 생각하거나 무조건 자기가 대단한 존재인 줄 알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삶을 구축할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가 안 되어있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반감과 대적의 대상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43페이지 죄의 속임 실재와 표상에 대해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