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Ⅰ
(199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5년 2월 26일 - 4월 23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회막으로 나아오라(출33:6-7) 1995.2.26 주일오후 1
2. 기도의 사람 엘리야(약5:17-18) 1995.3.5 주일오후 11
3. 겟세마네의 기도(눅22:43-44) 1995.3.12 주일오후 25
4. 변화산의 기도(눅9:28-29) 1995.3.19 주일오후 35
5.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예수님(눅6:12) 1995.3.26 주일오후 42
6. 기도의 능력(수10:12-14) 1995.4.2 주일오후 53
7. 중보기도의 필요(살후3:1) 1995.4.9 주일오후 66
8. 기도와 순종(행16:6-7) 1995.4.16 주일오후 79
9. 기도자의 삶(요3:22-23) 1995.4.23 주일오후 87
1. 회막으로 나아오라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산에서부터 그 단장품을 제하니라 모세가 항상 장을 취하여 진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출33:6-7)
기도 I (1995.2.26 주일오후 1)
“성공하려면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지 말고 한 사람의 천재에게 눈을 돌려야 한다.” 어느 재벌 기업의 총수가 한 이야기입니다.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기껏해야 제 밥벌이나 하지만, 천재적인 발명가, 사업가, 전문가는 수십만 명이 먹고 살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이와 유사한 공식이 통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지만, 특별히 준비된 뛰어난 한 사람을 통하여 잠들어 있는 교회에 영적인 회복을 주시기도 하고, 어두운 역사를 깨우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탁월한 영적 관계를 맺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위대한 기도의 세계를 가진 한두 사람 때문에 역사가 움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지나서 광야로 들어서기 전에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시나이 반도였습니다. 그 시나이 반도에 시내산이 있습니다.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로 들어가기 전에 약 열한달 동안 그 산에서 머물렀습니다. 오랜 애굽 생활로 몸에 밴 불경건한 습속과 불신앙의 잔재들을 털어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믿음과 삶을 위한 율법을 수여 받게 됩니다.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은 모세가 계명을 받기 위해서 시내 산에서 지내는 동안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게 된 때의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서 범죄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진멸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9-10) 그때 모세는 생애적인 중보의 탄원을 올립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하면서 매달립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32:31-32)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진노를 진정하신 후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당신의 뜻을 보이셨습니다.
모세가 자신의 영생을 걸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하자, 비록 하나님께서 완전히 용서하신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그 진노를 푸시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모세에게 말합니다.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34) 그러나 이어서 하신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33:1-4)
이스라엘의 각성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로소 제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범죄하고 타락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로서로 반문하였습니다.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모세는 어디 갔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를 인도해냈다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인도한 이가 모세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지니까, 하나님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시야에 들어 왔습니다. 그들이 우상을 만들게 된 것도 사실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약속대로 가나안을 그들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제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성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범죄 하였든지 어쨌든 자기들은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가서 기업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4).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 부분의 “황송한 말씀”이라는 말이 “재앙의 말씀(הערה רבד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 축복의 약속이 그들에게 재앙의 말이 되었습니까? 그들이 무엇을 주목한 것입니까?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앙의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각성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태도가 바뀌게 되자 이런 놀라운 영적인 분별력들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소 같으면 그렇게 사랑하였을 단장품들을 모두 제해 버리고 슬픔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을 손에 넣어도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시지 아니하면 자신들의 행복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눈뜨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선택된 무리임을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증표는 세성의 번영이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들이 과연 하나님이 동행해 주심을 누리고 있는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는가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유일한 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올라가라. 나는 너희들에게 약속한 바를 다 이루어 주겠다. 가나안도 갖고 그리고 원주민도 쫓아내고 잘 먹고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서 실컷 먹고 잘 살아라.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너희와의 관계는 끝이다. 자, 올라가거라.”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적인 긴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결정적인 화해의 선언은 없었습니다. 결심을 굳히신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냉담한 선언 앞에서 그들은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과연 이처럼 진노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가? 아니면 이것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심판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가나안으로 올라가야 하는가? 이 두 갈림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영적 지도력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모세가 제일 먼저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장막을 취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거하는 저 바깥에 한적한 곳에 텐트를 하나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르쳐서 말하기를 “회막”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회막을 설치한 것입니다. 이어서 모세는 다음과 같이 제의하였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저 회막으로 나아가서 기도하자”고 말입니다. 그래서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은 회막으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곧 떠나 버릴 것 같은 영적인 위기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지도자였던 모세가 한 일은 이처럼 자기의 백성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 삼백 만명 가까운 엄청난 인구의 대집단 이였습니다. 본문에 회막을 만들어놓았다고 하였는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그 회막이 단수(להא)로 나옵니다. 모세는 단지 하나의 회막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거기에 나와서 기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모세도 그 같은 일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이스라엘 진과 떨어진 곳에 단 하나의 회막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7).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곧 하나님의 앙망하는 자들만이 그 진 바깥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회막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거기로 나아가서 자신들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의 참다운 치유와 영적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판단은 모세의 영적 지도력의 깊이를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모세의 이러한 행동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실 때에 그 진노를 일단 거두신 것이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주겠노라고 다시 말씀하시리만치 그 마음을 돌려 드린 것도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이 모두 모세 한 사람의 기도를 기억하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물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렇게 깨어진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기의 기도만으로 해결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그 환경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하여 회막을 세워주었습니다. 이제껏 이스라엘 백성을 앞서 이끌며 인도하며 나가던 모세가 갑자기 뒤로 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등을 밀어 기도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여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생각하여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각성이 가져다 준 결과였습니다. 영적인 각성은 우리로 하여금 평상시에는 보지 못하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든 공동체적으로든 영적인 각성은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기도로 이어지지 않는 영적인 각성은 진정한 의미의 각성이 아닙니다. 중보기도는 중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놀라운 은혜를 받을 만한 관계를 하나님을 향해 유지할 때 더 큰 추진력을 발휘합니다. 모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전심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이 백성들이 기도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깨뜨려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치유하는데 자신을 헌신하게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백성들이 이 회막에서 기도했고 하나님의 응답은 모세를 통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모세와 대면하셨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표증을 주셨습니다.
거처에서 떨어진 회막
오늘 우리의 첫 번째 관심은 회막이 위치하게 된 장소입니다.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모세는 이러한 위기 앞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진밖에 멀리 떨어진 곳에 회막을 정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여기서 일컫는 “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거 지역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께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매달린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영적인 상태나 자신의 신앙의 태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보다는 자신들의 일상적인 일들에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교회가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로 붐비는 시대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영적인 일이나 위에 것을 찾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육신의 안목을 쫓고 세상의 환심을 사는 일에는 열렬한 법입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이 진중에서는, 비록 하나님께서 한 번 경고하신 위기 상황이지만 여전히 저녁이면 텔레비젼을 켜 놓고 연속극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가롭게 잠자리에 누워 일찌감치 잠을 청하는 사람, 인간 세상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대부분의 일들이 이 진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거기도 비록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 어울리는 신앙적인 긴장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거기는 기도에 몰두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그 회막을 진 바깥 그것도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조용한 시간, 일상의 번잡함으로부터 구별된 장소,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고독이 보장된 처소가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분께로부터 오는 응답의 음성을 듣기 위한 장소가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고독한 기도가 깊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의 처소를 마련하는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기도로 살아 온 생애의 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결별하지 못하고 잠시도 하나님 앞에 홀로 대면하는 고독한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은 일의 성공과 육신의 즐거움을 얻는 대가로 하나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들은 하나님 자신과 대면하기를 사모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번잡하고 바쁜 일과 속에서 영적으로 깨어 있기 위하여 더욱 고독한 시간을 그리워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사 속에서 영적으로 뛰어난 인물들이 거의 예외 없이 자연과 매우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인 것도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속에 묻혀 있을 때 보다 자연 속에 있을 때 더욱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는 일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였던 것입니다. 기도의 영으로 소유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자연 속에서 고독한 시간을 마련하며 하나님과 만나기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기껏해야 고기나 구워먹고 싶어 하였을 그 숲 속에서, 그 해변에서 그들을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곳이 어디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분은 어디서든 기도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거리에서도 기도하셨고, 문상객들이 운집한 무덤 앞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병자들 앞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늘 기도하는 생활 이면에는 구별된 시간과 장소 속에서 고독한 시간을 가지며 아버지와 교제하시던 집중된 기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집중된 기도를 위하여 언제나 홀로 계실 수 있는 한적한 장소를 택하셨습니다.
마음을 준비하라
기도는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사역이며 섬김입니다. 언제나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의하여 점령당하여 있는 마음의 상태로 하나님을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간절히 찾는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통로는 기도이지만, 그 샘의 근원은 마음입니다. 그 샘이 맑고 깨끗한 물을 풍부하게 쏟아낸다면 그것은 반드시 기도의 통로를 넓게 할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샘에서 솟아나는 물이 더럽고 그 양도 풍부하지 못하다면 기도라는 통로는 오물로 가득찬 하수관과 같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죄악 된 세상에서 도무지 거룩함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환경 속에 길들여져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외로운 환경의 도움 없이 우리의 마음의 정결함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깊은 기도로 들어가기 전에 일반적으로 먼저 자신의 마음과의 치열한 싸움이 있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자신의 마음과 오래도록 치열한 싸움을 다한 후 그것을 정복하였을 때 우리는 거룩한 빛이 있는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에서는 결코 기도가 고통스러운 의무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과정들을 통하여 우리의 더러운 마음이 정결함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의 마음을 정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정복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는 마음을 통하여 흐릅니다. 이러한 깊이 있는 마음의 준비가 영력 있는 기도의 조건이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축복을 위하여 우리는 복잡하고 일상적인 생활로부터 잠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의 사람은 고독한 벌판에서 만들어 집니다.
고독을 회복하라
오늘날 조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회복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고독입니다. 일상의 번잡함이 침범 할 수 없는 거룩한 외로움 속에서 하나님만을 응시할 수 있게 되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기도의 영은 방법을 찾아다니기에 바쁜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하지 아니하고 자신과 교회를 도우실 분이 오직 하나님 밖에 없으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그분을 응시하는 고정된 마음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관계를 위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는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가장 잘 경험됩니다. 평소에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는 고독한 시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단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일간 신문이나 잡지를 읽는 것만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자신의 육신을 위하여 즐기는 일에는 시간을 바쳐도 기도를 위하여는 거의 자신을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도무지 홀로 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조용히 하나님만을 대면하고자 하는 마음의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교제의 달콤함과 기도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단지 고통스러운 의무일 뿐입니다. 그래서 더욱 일상의 번잡함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굴삭기를 버리고 호미로
묘목과 같아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아도 거목과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띠지 않습니다. 설교자는 많아도 방금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보내심을 받은 것 같은 거룩함의 흔적이 설교 속에 깃들여 있는 증거자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전도자는 있어도 불타는 마음을 가진 전도자는 흔치 않습니다. 교회는 많은 봉사와 세밀한 계획을 세우는 일에 몰두하지만 세상을 향하여 충천하는 능력과 영적인 승리를 가져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많이 생겨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땅에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데 거의 기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바로 기도의 영을 잃어버린 오늘날 교회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의 조국교회가 방법에 대하여 궁리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묵상하고,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기를 힘쓴다면 더욱 더 커다란 복음의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굴삭기를 버리고 호미로 일하려는 공사장의 인부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일하시도록 간구하여 하나님을 감동시킴으로 위대한 일을 보리라는 결심을 포기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계속되는 복음 전도의 실패나 패배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상황이 바로 우리를 회막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
그 다음의 보도가 또 한 번 우리의 시선을 끕니다.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다시 올라가도록 일단 허락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동행하지 않으시겠다고 하는 상황을 위기라고 받아들인 것은 몇 사람의 지도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같은 상황을 위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단장품도 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팽팽한 영적인 긴장이 감돌고 있는 위기 상황 속에서 진에 가만 앉아서 하나님의 처분만을 기다릴 수 없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하여 회막으로 나아간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신앙적인 정체는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앙모하는 자(שׁקבם)”는 원의상 “(간절히) 찾는 자” “(반복해서) 추구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기도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진리의 진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는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더 명백히 말해서 기도하게 하는 마음을 하나님 자신을 찾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거의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따라서 한 교회가 기도의 영을 유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곧 그 교회 속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의 상태는 모든 그의 영적 수준과 상태의 핵심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이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며 평소의 생활로 돌아 갈 수 없도록 그 무엇이 가슴 속에서 역사하던 소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일상적인 일에 종사하는 동안에 진을 떠나 한적한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 다른 백성들이 잠자리에 들 때도 그들은 진을 떠나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진으로부터 멀어져 회막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진중의 일상적인 일들과 번잡함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들의 마음도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었습니다. 진중의 백성들의 소리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 또렷하게 느껴지는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갖추어 갔습니다.
보십시오. 모세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큰소리로 부르짖는 열렬함 보다 더 시급한 것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이들의 마음이 속된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한 때에는 특별한 기도가 필요함을 알았고, 특별한 기도를 위하여 특별히 구별된 마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를 앙모하는 소수들과 함께 회막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을 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하여 먼저 우리의 마음을 정결게 하고 하나님과의 대면을 위하여 구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으로 하여금 더욱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과 싸우며 자신을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 성별하여야 합니다.
갈릴리 해변이 어디예요
언젠가 교회학교 교사들이 모인 세미나에서 교사의 영적 삶에 대하여 강의하는 가운데 기도생활에 대하여 가르친 적이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는 도구가 되기 위하여 교사 자신이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가 누구이든지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갈릴리 해변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때 제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우리에게 갈릴리 해변은 어디입니까?” 저는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다니십니까?” 그는 대답했습니다. “아뇨, 새벽기도에 나오지 않습니다.” “내일 아침부터 평소에 안 나오시던 새벽기도를 결심해 보십시오. 새벽에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교회당에 나아오십시오. 은혜로운 예배를 마친 후 고요한 예배당 한 구석에서 홀로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거기가 바로 당신의 갈릴리 해변입니다.” 저는 답변했습니다.
방해받지 않고 홀로 고독한 장소에 있을 때 우리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그가 하나님을 추구하며 살아온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 고요함 속에서 그가 더욱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찾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모세가 만들어 놓은 기도 처소에 나아갔던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각성한 소수로서 대다수의 백성들과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진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홀로 매달려서 간구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이 마음속에서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오늘 성경은 “여호와를 향한 앙모함”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살아있게 하는 것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기도의 영을 간직하고 있는지의 여부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모든 삶 속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며 살아가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결집된 기도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은 교회가 전심으로 추구하는 바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따라서 교회를 운영해 나감에 있어서도 순간순간 도우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기 보다는 제도와 방법과 계획을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일에 실패한 결과입니다.
여러분이 단지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이름값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실로 바보 같은 자기만족입니다. 우리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를 단지 예배하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림으로써 어두운 세상에서 의의 길을 걷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찾는 이가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추구하며 살아감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찾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 주기 위하여 선택된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처럼 가난한 교회의 시대에 변하지 않는 민족의 역사를 보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느낌이 아니라 실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볼모로 잡아 우리는 안전하고 평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능력 있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권능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분투하는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불현 듯 흘리는 눈물은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도 없고 마음의 정함도 없으면서 수시로 우는 사람들의 눈물은 우리로 하여금 그 무기력함에 짜증나게 합니다.
기도의 용사가 되어
여호와를 앙모하는 사람들이 이 위기에 기도의 짐을 진 용사들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들은 기도로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역사를 움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문제기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자신을 모두 바치는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십시오. 위기 가운데 교회가 정말 위기라고 느낀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한 때에도 먹고 마시는 일에 열중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를 인질로 잡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이런 연약함들을 극복하고 우리와 조국교회를 새롭게 하실 하나님 앞에 간구하기 위하여 진을 떠나 멀리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신앙으로 변혁하도록 부름을 받아 마주한 이 세대 앞에서 오히려 함께 죄에 물들어 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위기는 우리를 회막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복음에 대하여 냉담한 세상과 목메어 전파할 선포의 제목을 잃은 교회의 영적인 상황도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용기를 갖자
우리는 거룩한 교회의 소명을 다하기 위하여 잠시 세상의 즐거움을 버릴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보다 영원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세상 날에서 잠시 소외될 용기를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만약 열렬한 기도의 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마음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사람들은 먼저 행동으로 침륜에 빠지기 전에 영혼의 침륜을 경험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골고다의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시기 전에 먼저 영적으로 승리하신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믿지 마십시오. 오늘 게으름을 벗삼아 나태와 안일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내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며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먼저 태만과 안일의 진중을 떠나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앙모하며 기도하십시오.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부르짖으십시오.
맺는 말
다시 한 번 여러분 자신을 추스르시고 이전에 여러분들에게 주셨던 기도의 도전들을 되새기십시오.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의 영을 회복하도록 분투하십시오. 여러분들이 그렇게 깨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시는 은총을 회복시켜 주셨던 것처럼 그렇게 여러분들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중에 머문 현실만족적인 다수가 되시렵니까? 역사를 움직인 소수가 되시렵니까?
2. 기도의 사람 엘리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 5:17-18)
기도 I (1995.3.5 주일오후 2)
지난 주부터 기도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조금 더 기도에 관한 신학적인 문제부터 하려고 했는데 아시다시피 몇 주 동안 독감이 우리 교회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아마 지난 수요일은 우리 교회 생기고 한 석 달 이후로부터는 아마 그렇게 소수의 무리가 모여서 예배를 드린 적이 없을 정도로 교회당이 텅 빌 정도로 독감과 몸살로 고생들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급격하게 교회가 기도가 약해지는 것 같다하는 느낌을 아주 불안하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지난주에 제가 출애굽기 33장을 펼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회막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한 번 기뻐해 주시기를 기도했던 그 사건을 강해하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이 진을 떠나서 안락한 삶을 버리고 그리고 회막에 나아가 기도했던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자 그래서 그랬는지 지난주에는 하루 저녁도 교회가 비지 않고 여러 분들이 나와서 철야하고 또 어떤 날은 아주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감기가 다 물러갔습니다.
그래서 이제 삼월이 되었습니다. 이월과 함께 모든 일은 다 끝났습니다. 그래서 기도에 관한 조금 더 넓은 신학적인 문제들은 이제 차차 풀어 가기로 하고 우선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 지난주에 메시지를 하나로 요약을 하자면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영적인 상황의 개선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반드시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하나님을 찾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진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관여 우리와 함께 가나안에 올라가실 것이냐 안 올라가실 거냐? 누가 이렇게 물어 보면 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글쎄’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진에 주저앉아서 텔레비전도 보고 잡지도 보고 그리고 먹고 마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진실로 경험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미래에 염려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냥 진 안에 머물러 앉아서 일상적인 생활을 하며 모세의 기도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세가 진밖에 쳐 놓은 그 회막으로 쉬지 않고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그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그렇게 백성들이 기도했기 때문에 모세가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얻어낸 것입니다. 그 이야기였습니다.
조금 더하면 재미있겠지만 오늘은 야고보서를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여기에 보면 이 야고보서 마지막에 믿음의 사람 한 사람을 기도로 소개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 야고보 사도가 야고보 서신 속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 이 사람은 주님의 동생 야고보라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 그런데 그 야고보 선생이 우리에게 야고보서를 통해서 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뭐냐 하면 믿음과 삶이 분리된 것이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이러한 교리를 널리 전파했더니 사람들은 믿음과 삶이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있는데 삶이 없는 사람들이 믿음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삶이 잘못된 것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이러한 잘못된 바울이 맨 처음에 의도한 것과는 다른 현상들이 일어나게 됐습니다.
이렇게 신앙과 삶, 믿음과 생활,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이런 것들이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 같이 있는 것인데 영적으로 교회가 타락하거나 잘못 되게 되면 두 가지가 분리될 수 있을 것 같은 사상들이 유행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믿음 그 자체도 온전하지 않고 신앙 그 자체도 온전하지 않으니까 그 온전하지 않은 것을 온전한 것처럼 설명하려고 하니까 천상 이 두 가지를 분리해서 이야기 하게끔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렇게 분리해서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면 믿음도 온전한 믿음이 아니고 행위도 온전한 행위가 아닙니다. 이것에 대해서 야고보 선생이 아주 강조를 하면서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행위가 없는 믿음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사실은 그것이 참다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너희들이 표현하는 대로 행위가 없는 믿음이 있다고 친다면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지만 있다고 친다면 그렇다면 그 믿음은 이미 죽은 믿음이니라.” 이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가서 이제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나갑니다. 아주 이것이 스토리가 정교하게 맞아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고난을 당하는 자가 있으면 기도를 해라. 또 병든 자가 있으면 교회에 장로를 청해라.” 그러니까 여러분 이것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교회가 알아서 교인들을 찾아가 주기도 해야 하지만 그러나 오늘 야고보서를 통해서 보면 필요한 교인들이 교회에 도움을 구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깊은 병이 들거나 아니면 커다란 위기가 있거나 가정에 큰 어려움이 있거나 아니면 누군가의 깊은 기도와 조언이 필요할 때 당당히 교회에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 와 주시기 바랍니다. 하면 교회는 거기에 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장로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가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말씀으로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훈련들이 아주 안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가 - 우리같이 작은 교회는 문제가 안 되는데 큰 교회에서는 다 못 찾아 가지 않습니까? - 그리고 나서는 나중에 뭐 누구네 집은 많이 가고 우리 집은 한 번도 안 왔다고 그러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요청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살아가는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필요로 한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한다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가정에서 위기를 만났을 때에 자기의 지식과 자기의 생각으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러나 참 신앙이 있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면 이 상황 속에서 예배드리기를 원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에게 말씀으로 권면받기를 원하고 그리고 이 모든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 영적인 시야에서 자기의 상황을 해석하고 그래서 그 말씀에 입각한 권면을 통해서 가닥을 잡아 나가기를 원하는 이러한 말하자면 영적인 요구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야고보 선생이 이 편지를 쓸 때는 교회의 성도들이 어려움에 처해있거나 병들었을 때는 수시로 교회에 우리 집에 와 달라고 그랬던 풍조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성경에 비추어서 다시 한 번 되찾아야 할 훌륭한 유산들입니다.
지난번에 교회 생활 시리즈에 대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관계라는 시리즈에 대해서 여러 번 설교하는 가운데 시편 84편을 강해하는 가운데에서도 많이 말씀을 비슷하게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그러한 맥락이 여기에도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집을 교회를 향해서 차단하는 사람치고 영적으로 깊이 있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물론 또 개방만을 한다고 해 가지고 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는 어떤 데에서는 구역예배라고 모여 가지고 말이야 구역예배는 쥐꼬리만큼 드리고 해서 먹는 것은 개꼬리만큼 해서 먹고 그리고 나서 삼부 순서로는 이런 것도 하고 그런 사람들도 있다고 그러는데 이것은 전부가 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철저하게 교회로부터 자기의 집과 자기의 모든 생활을 봉쇄하고 살아가는 것은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는 것과 자기를 사람들에게 개방을 하는 것과는 아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천성적으로 이렇게 헤벌레 하게 사는 사람이 물론 있습니다. 비밀도 하나도 없이. 그러나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천성적인 기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면 할수록 자기를 개방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형편을 알아주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주기를 사모하고 그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배 속에 나아가기를 원하는 그런 요구들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이 야고보 선생이 하다가 뭐라고 그랬냐면 “혹시 죄 때문에 병이 들었다면 서로 죄를 고백을 해라. 그리고 병이 낫기를 위해서 너희가 서로 기도를 해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그러니까 이 의인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죄가 원래 없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간구하고 기도함으로 죄사함을 받은 사람 이런 사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를 누구를 들었냐면 엘리야를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엘리야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오늘의 핵심적인 이야기만 해보도록 합시다. 엘리야가 도대체 무엇 하는 사람이었는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엘리야는 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 선지자 가운데 가장 능력으로 이름을 떨친 선지자였습니다. 비록 엘리야 선지자가 이사야나 예레미야와 같이 성경은 남기지 않았지만 - 기록 선지자라고 부르지요 - 기록 선지자는 아니지만 이 사람은 열왕기 상하 곳곳에 아주 커다란 능력을 행하였던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가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게 되어서 활동을 하던 때는 북왕국의 오므리 왕가의 아합이라는 인물이 왕으로 있을 때입니다. 이 아합이라는 인물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우상을 숭배하는 데 있어서 모든 열조들에게 뛰어난 충성을 보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그가 그만 시돈 사람의 왕의 딸, 시돈 사람의 왕 중에 엣바알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시돈은 여러분 지도를 보면 알지만 지중해와 바로 통하는 항구 도시입니다. 그래서 지중해에 있는 많은 문물들이 흘러들어 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해양민족 출신입니다. 그들이 바알을 아주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그래서 이세벨이 이스라엘 땅에 시집을 오게 되는데 이 때 이 사람은 아주 헌신된 선교사로서 이스라엘에 시집을 온 것입니다. 무엇에 헌신되었겠습니까? 바알 종교를 전파하는 일에 바알을 들고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그리고 목숨도 버리고 그 다음에 말하자면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서 그래서 이제 사고무친한 땅에 혈혈단신으로 시집을 왔는데 오직 바알만을 의지하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의 신앙이라는 것은 대단합니다. 나중에 보면 알지만 이 사람이 결국은 북왕국 뿐만 아니라 남왕국까지도 이 여자 하나가 완전히 다 뒤집어 놓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여자가 낳은 딸을 통해가지고 하나는 북쪽에서 하나는 남쪽에서 서로 쌍두마차가 되서 활동을 해 가지고 완전히 북왕국과 남왕국을 피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위대한 일을 합니다. 여자는 역시 위대합니다. 여자는 참 위대한 저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알을 아주 충성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이 여자가 하나님을 이렇게 섬겼더라면 아마 성경에 룻이나 라합이나 이런 사람을 능가하는 정말 믿음의 위인으로서 히브리서에도 올랐을 그런 여인입니다. 그런데 하여튼 나쁜 쪽으로 대단한 여자였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 그야말로 바알이 낸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디 가든지 바알과 동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궁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누구를 잡았느냐 하면 아합이라는 왕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여자가 아마 이런 종교에서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남편을 손아귀에 넣는 처세술에 있어서도 탁월한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미루어볼 때 이 여자는 확실히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똑똑했습니다. 아주 영리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담대했습니다. 아주 담대했습니다.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담대함은 불행히도 하나님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 만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여튼 담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여인은 끝까지 바알을 향한 지조를 지킨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떻게 보면 본받을 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여튼 참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그와 반대로 주관도 없고 하여튼 머리는 원래 그렇게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여튼 멍청한 일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 손아귀에서 놀아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참 결혼을 잘 해야 된다는 예화를 들을 때 언제나 이 사건이 예화로 떠오르는 것은 여자들에게 있어서 수치가 아닐 수 없지만 모든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 중의 하나는 아합이 이세벨만 아내로 맞이하지 않았더라면 저렇게까지 천추의 죽일 놈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열린 교회 자매들 정도하고만 결혼을 했어도 아마 아합이 청사에 길이 빛난 믿음의 사람은 못 되었어도 그래도 그저 당대에 밥값은 하고 죽지 않았겠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뭐 죽은 사람이야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바알을 섬겨서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다가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고 이러면서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뛰어나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분노를 격발하게 한 사람이 누구였냐 하면 이 아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합의 뒤에는 이세벨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하여튼 이 여자가 대단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하는 일마다 전부다 죽일 일들만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여자가 가는 곳엔 피바람이 이는 것입니다. 담대합니다.
아합이 고민합니다. “왕이여 왜 그렇게 근심하시나이까?” “내 고민이 하나 있소.” “그것은 뭡니까?” “나봇이라고 하는 놈이 가지고 있는 포도원 있지않소? 그 땅이 기름지고 포도송이가 계란만해. 나는 그 포도원 한 번 손에 넣어서 주인 노릇 조금 해봤으면 여한이 없겠네.” 그것은 나봇의 포도원인데 아합은 그것을 한 번에 뺏을 수 없었습니다.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이 뭐냐 하면 구약에서 기업사상입니다. 기업사상. 그러니까 기업으로 받은 땅은 뺏겨도 죄고 빼앗으면 더 죄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왕은 왕에게 준 기업이 있습니다. 왕이라고 할지라도 그 땅은 여호와의 것인데 여호와가 나봇이 속한 지파에 줬고 그 지파에서 쪼개고 쪼개고 쪼개고 받아서 나봇의 집에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왕도 주책이 없지. 포도나 가서 사 먹으면 되지. 무엇을 그걸 또 주인 노릇하고 싶다고 그러면서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그 고민이 뭐냐 하면 신앙과 욕망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세벨은 “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합니까?” 가서 죽이고 뺏어 버렸습니다. 간단한 해결사였습니다. 왜? 신앙이 없으니까. 그런 것을 보면 아들을 낳는데 아하시야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높이실 것이다.” 그런 것을 보니까 하나님에 대한 뭔가 기본적인 향수와 같은 신앙은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를 잘못 만나가지고 그 여자를 잘못 만난 것이 아니라 이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잘못 만나는 바람에 그 헌신된 선교사가 왜 하필이면 그 땅으로 들어오느냔 말입니다. 들어와 가지고 결국은 집안을 전부 다 초토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악한 때에 하나님은 아주 걸출한 선지자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대가 악하고 어두울수록 하나님은 아주 강력한 선지자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 선지자가 누구였는고 하니 바로 이 엘리야라는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야 엘리사 이 사람이 가장 캄캄하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말하자면 하나님을 반역하는 세력들과 더불어 싸웠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그 선지자가 그렇게 위대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그 시대 한 복판에 서서 그렇게 용감하게 투쟁하며 싸워서 승리할 수 있었던 한 비결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우리는 여기서 위로를 받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하루 종일 일하고 그 다음에 강의하고 혹은 하루 종일 노동하고 그리고 밤에 와서 기도를 하려고 하면 기도를 해야 되는 것은 분명한데 피로감이 몸을 확 휩쓸면서 그러면서 도저히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매일 그러면 안 되겠지만 어쩌다 그러는 것은 육신이 약하니까 그렇습니다. 새벽기도 - 지금은 종이 없지만 - 종소리가 뎅그렁 뎅그렁 울리지는 않아도 따르릉 따르릉 자명종 소리가 울리는데 이불로 얼굴을 뒤집어 쓰고 손을 쭉 뻗쳐서 그 자명종 우는 단추를 꽉 누르는 것이 성정이 연약하기 때문에 팔을 뻗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밤에 잘 때는 ‘내일 새벽에 도전해 봐야지.’ 그리고 결심합니다. 잠 잘 때도 자기가 일어나면 되지 “주님 내일 새벽 4시 45분에 깨워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하고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따르릉 종이 울릴 때 바람이 훅 부는 추운 방배동 골목 그리고 그 계단 그리고 그 을씨년스런 교회 그리고 거기서 기도하면 피곤에 쩔어서 직장에 출근해야 하는 그 전철이나 버스에서 조는 자기 모습 피곤한 몸 생각하다가 그 판단이 한참 걸리는 것이 아니라 불과 일이 초 사이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나서는 손을 쭉 뻗어서 꽉 눌러 놓고 나중에 같이 모여서 하는 이야기는 이상하게 우리 시계가 종이 안 울렸다고 그러는 것 다 인간의 성정이 연약한 것입니다.
엘리야도 이런 성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끔은 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새벽기도 석달동안에 된 것도 없고 안 된 것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계속 나가야 할 도전을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가 무슨 장사인 줄 압니까? 그러면서 손익 계산을 튀겨보는 것 이것이 다 성정이 인간의 성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도 이런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단 말입니다. 그렇죠? 무슨 뭐 특별한 사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새벽에 일어나기 싫습니다. 그리고 실컷 잠 자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인간의 성정입니다. 물론 가능하면 새벽에 눈 뜨자마자 기도의 영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솟구쳐가지고 도저히 거기 가는 동안에 참을 수가 없어서 통성 기도를 하며 방배동 골목을 그야말로 어두운 새벽에 불꽃과 같이 걸어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항상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연약한 성정입니다. 그렇죠? 연약한 성정입니다. 조금 더 수준을 낮춰서 이야기를 해야 되겠지요? 그러면 오전 예배를 딱 마치고 오후에 가서 편안히 쉴 것인가 예배를 드릴 것인가? 잠시 계단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올라갈까 내려갈까 그러다가 누군가 ‘지금 가는 거야?’ 그러면 용기를 얻고 올라가고, ‘예배드려야지’ 그러면 용기를 잃고 내려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성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주님만 위해서 살겠다고 그렇게 다짐하고 ‘주님 말씀으로 살게 하옵소서’ 하고 수요일에 교회로 갈 것인가 아니면 친구들과 차를 마시고 노닥거릴 것인가 생각을 하다가 교회로 발걸음을 못 옮기는 연약함 이것이 전부 다가 인간의 성정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위로가 됩니까, 안 됩니까? 위로가 되면 아멘 해보십시오. 위로가 됩니까? (아멘) 그런 것은 아멘을 어떻게 잘 해요?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정을 엘리야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도 그런 성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우리와 그런 연약함을 똑같이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언젠가 한번 예레미야를 보면서 그런 것을 발견을 했는데 다른 것들을 보면서도 그런 것을 연구를 하면 상당히 재미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선지자 그러면 와 그러면서 우리가 가까이 하기엔 너무 그냥 먼 사람으로서 이러고 쳐다보는데 그런데 선지자들이 얼마나 쉽게 영적인 침체에 빠지고 낙담했는지 조사해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서도 나타나고 예레미야 뭐 하박국은 유명하고 그 다음에 늘 헤매던 선지자 요나 이런 사람 그런 늘 헤매던 선지자입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헤맸는지를 알고 싶으면 이 테이프를 갖다 들으시면 다 나옵니다. 요나의 진면목이 나타납니다. 호세아의 낙망 이런 것들 다 나옵니다. 무너지는 것과 같은 낙망 이런 것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조금 잘 봐야지만 맛이 납니다.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엘리야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신령으로 말하자면 하늘의 불을 땅으로 불러 내린 사람 아닙니까? 영력으로 말하자면 하늘의 불을 이 땅에 불러 내려서 청천 하늘에 불을 불러 내려서 바알의 선지자들이 몸을 칼로 그으면서도 일으킬 수 없었던 역사를 일으켰던 사람 아닙니까? 이러한 위대한 일들을 했지만 그러나 우리와 같이 연약한 꼭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연약한 성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우리와 같이 연약함에 얼마든지 맞을 수 있습니다.
새벽기도 석 달에 ‘남은 것도 없고 모자란 것도 없네.’ 그런 생각도 할 수 있고 ‘나 혼자 이렇게 몸부림치며 기도한들 무엇 하겠는가?’ 이럴 수 있습니다. ‘나 혼자만 남았나이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낙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지만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신령한 체험을 했지만 인간의 성정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보면 교만한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진짜 담대해야 될 때는 비굴해지고 진짜 겸손해야 될 때는 쓸 데 없이 교만해져가지고 이것이 박자가 성경하고 안 맞아서 신앙생활이 더 고달프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보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흔히들 뭐라고 하냐면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다 뛰어났나봐.’ 이런 생각은 뭐냐 하면 ‘다른 사람이 나보다 기도도 많이 하고 그 다음에 전도도 많이 하고 뛰어나니까 나는 참 부족하다. 그러니까 나도 더 열심히 저 사람들을 본받아야겠다.’ 그것은 아니라 ‘어이구 너희들은 잘 났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 너는 잘났다. 나는 못났다. 어이할 꼬.’ 그러는 것입니다. 그것은 겸손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뭐냐면 영적인 삶의 변화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변혁을 위한 도전을 잃어버렸다는 어떤 자조적인 도피의 말입니다. ‘아이고 그 사람 나하고 틀리지.’ 진짜 그런 것을 인정해야 할 때에는 자기가 최고라고 그럽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낙심하고 좌절하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로 하여금 하늘을 열고 닫게 만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인정하도록 만들어 주었던 힘은 이 성정이 우리와 다른 신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성정은 우리와 똑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성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 성정이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과연 참 여호와이심을 보여줄 수 있었던 비결은 이것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지만 저가 비오지 않도록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너희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실 것이다.” 이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는데 그 바알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뭐냐 하면 풍년입니다. 딴 거 아니고 풍년입니다. 바알은 원래 농경문화 사회에서 말하자면 농경문화의 신이었습니다. 그가 비를 좌우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내가 한 번 설명을 했나 모르겠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비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홍수가 나서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다리 위에서 그랬다지 않습니까? “아이고 저 물 저 물 저거 바다로 다 가는데. 바다로 가지.” 한국 사람이 “왜 그러십니까?” 그러니까 “어이구 아까와라 저 물 저 물.” 그랬다고 합니다. 그럴 정도로 물이 귀한 나라입니다.
풍년은 뭐와 관계가 있을까요? 비의 양과 그 다음에 비 내리는 시기, 그래서 파종하기 직전에 비가 한 번 와 주고 그 다음에 추수하기 전에 한 번 와 주어야지만 늦은 비와 이른 비가 딱 맞아야지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의 양이 많아야 됩니다. 그런데 비가 안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죽 했으면 지붕을 경사되게 만들어가지고 빗물을 받아서 먹었습니다. 그래서 지붕에서 물이 흘러내려서 땅 속에 항아리를 묻어 놓고 거기에 물이 고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빨이 다 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렇게 비를 갈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섬긴 것입니다. 바알 신당에 가가지고 격자가 쳐진 많은 방이 있는데 거기서는 바알 종교에 헌신된 바알 교회의 직원들이 있었습니다. 여직원들이 모두 돈을 내고 가서 그 여인들과 함께 동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바알 성전에서 남녀가 막 동침을 하면 바알이 비를 안 오게 하려고 하다가도 바알이 덩달아 흥분을 해서 비가 내리게 한다는 이런 아주 미신적이고 괴상망측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면서 바알을 섬긴 것입니다. 바알이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가장 확실히 보여 주기 위해서 무엇을 하면 될까요? 비가 안 오고 곡식이 완전히 망가지는 역사를 보면 바알이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엘리야는 위대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보다 주목해야 될 바는 뭐냐 하면 엘리야는 정말 하나님의 소원을 반영하는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이 그 시대에 가장 간절히 원하셨던 바는 바알의 도움을 입어서는 너희들이 축복받을 수 없고 내가 너희를 인정해 주고 나와 관계를 가져야 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를 원하셨는데 그 같은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는 비 오지 않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지금 몇 달 비 안 왔습니다. 이것이 가끔 오면서 불과 몇 달 안 왔는데 난리입니다. 오늘도 모여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 손 집사님 말씀 들으니까 지금 철에 오이 이십 킬로 한 상자가 이만원 해야 정상이라고 합니다. 사만오천원이랍니다. 그러니까 천원짜리 들고 가면 오이 일곱여덟 개 주던 것은 벌써 가락동 시장에서도 물 건너 간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유월까지 비 올 계획이 없다고 합니다. 기가 막힌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태풍이라도 지나갔으면 하고 바랐겠습니까? 그랬는데도 비가 요정도 안 왔는데도 이 난리인데 그렇게 비가 안 오는 땅에서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안 왔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당장 곡식은 그만 두고 먹고 사는 문제가 물의 문제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 정도로 비가 안 오면 지하수도 마릅니다.
엊그제 불광동 수양관에 특강을 하러 갔는데 그 계곡이 꽤 깊은 계곡입니다. 저 끝서부터 여기까지 계곡이 언제 물구경을 했는지 배짝 말라 있습니다. 생태계가 파괴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년육개월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이 한발의 끔찍한 재난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면서도 조국을 사랑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선지자가 비를 주시지 마시라고 기도할 때에 그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백성들의 행복보다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 백성들에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도가 우선 하나님의 마음에 엄청나게 합했던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영적으로 타락해서 바알 숭배를 하고 하면서 완전히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 앞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선지자가 사십일 동안 금식하면서 ‘주님 새로 나온 대형 승용차 한 대를 주시옵소서.’ 기도했더라면 하나님이 이러한 위대한 역사를 일으켰겠습니까? 우선 말입니다.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을 굴복시키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무슨 소리냐? 하나님이 아무 일을 행하시려고 하지 않는데 강하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꼼짝 못하고 우리 기도를 들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미신적인 생각을 기독교 속에 가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밀어 붙인다고요? 밀어 붙여서 밀릴 하나님을 왜 믿어요? 밀어 붙일 때가 따로 있지. 우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오늘 강하게 도전 받고 돌아가야 될 제목은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지금 하나님이 내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제목이 무엇일까 그것을 생각을 해야지, ‘무조건 주님 주시옵소서.’ 무엇을 줘요? 무조선 세게 기도하면 밀어 붙여서 하나님 밀면 하나님 어디로 떨어트리려고요? 밀어 붙여지지 않습니다. 우선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순간에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려고 딱 접어들면 기도의 추진력이 생깁니다. 그 말 알아요? 제트기가 비행기가 큰 비행로로 말하자면 자리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얼른 오죠? 딱 된 다음에 일단 길로 딱 들어선 다음에 그 다음에 우-우-우-웅 하다가 한 이백 미터나 오백 미터 쯤 난 다음에 갑자기 온 몸을 뒤로 잡아 땡기는 것같이 비행기가 확 떠오릅니다. 밤에 보면 불이 막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행기가 하늘 높이 단숨에 확 차고 올라가서 칠천 미터 상공으로 올라가는데 불과 몇 초밖에 안 걸립니다. 일단 중요한 것은 무조건 간절히 기도를 해서 소나무 뿌리 뽑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나에게 무엇을 기도하기를 원하시는가?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그것은 깊이 잠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건 정말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그럼 무엇을 기도하여야 할까요? 그 기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지만 기도가 추진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전혀 기뻐하지 않는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기도할 때에는 처음에는 간절히 기도가 되는데 깊이 기도할수록 간절히 기도가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엘리야가 그러했던 것처럼 엘리야는 정말 하나님이 바라시는 목적을 가지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비가 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 목표는 무엇이었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만이 여호와이신 것을 이 백성들에게 알게 하기 위해서 이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기도 제목을 찾았던 것입니다.
첫 번째 여러분들에게 주는 도전은 그것입니다. 요즘 여러분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몰아붙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몰아 붙이셔서 기도하게끔 하시는 그렇게 눈을 감으면 밀려오는 떨쳐 버릴 수 없는 부담을 동반한 기도가 무엇인가 그것을 확인을 해야 됩니다.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영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고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정상적인 영적인 생활이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생활 속에 있는 사람이 요즘 나에게 집중적으로 주시는 말씀이 있다 그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무엇을 기도하게 하시는지 모르는 사람의 수준에서 요즘 하나님이 집중적으로 주시는 말씀을 내가 깨닫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오늘 이 첫 번째 대목에서 ‘야 그건 참 모르겠다.’ 생각하면 그러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리고 주님 내가 어떤 제목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하나님 가장 원하시는 기도입니까 기도를 해서 찾아내야 됩니다. 믿습니까?
두 번째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바른 목표와 바른 동기에 기초해서 기도하는데, 기도하면 들어 주시면 되지 왜 간절히 기도하도록 허락하시는가? 왜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에 비가 안 왔다고 성경에 기록함으로 간절한 기도가 잘 안 되는 사람들이 기죽게 만드시는가? 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들이 조금 생각해봐야 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기도해서 응답을 받는 것이 목표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우리가 기도하는 바를 타내는 것이 우리의 목표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도 바꾸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주시고,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타내는 것만을 최고의 목표로 삼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기도하게 하셔서 기도하는 과정에서 우리도 바꾸시고 우리가 간구하는 것도 주십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즉시 주실 때도 있지만 즉시 안 주시고 오래 기다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기다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전폭적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어려운 일이 있었는데 기도도 안하고 놀다가 펑하고 일이 터져서 길이 확 풀리면 뭐라고 그러냐면 예수 믿는 사람들도 ‘어떻게 그렇게 잘 될 수 있어’ 그러면 ‘재수가 좋았지 뭐’ 그런다고 예수 믿는 사람이 무슨 재수가 있습니까? 조금 더 세련되게 ‘운이 좋았지.’ 그렇지 않으면 ‘누가 참 적기에 도와줬지’ 그럽니다. 그러나 평소에 그 문제를 가지고 간절히 기도를 하다가 길이 열린 사람은 그것은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반드시 자기에게 찾아 와야 할 필연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침없이 ‘어떻게 그렇게 됐어’, ‘하나님이 하셨지.’ 아멘. ‘하나님이 하셨지.’
단순한 예화입니다만 여러분 느끼는 것 없습니까? 그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후자의 사람은 의식이 바뀐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이 천박하고 경박하고 그리고 말하자면 체험이 없는 많은 사람들은 경박한 기도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참 깊이 있는 기도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점점 변해갑니다. 신중해지고 깊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가 깊어지고 있다는 것도 스스로 잊어버릴 만큼 그렇게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은 한 번 기도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다음 주에 보면 알겠지만 비가 오게 하는데 이미 하나님이 기도할 때 하늘 문을 닫으신 분이 기도할 때에 하늘을 안 여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늘을 여실 텐데 한 번 기도한 게 아니라 일곱 번을 기도했습니다.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확실한 것 하나는 엘리야 선지자는 배가 안 나왔다는 것 그것은 분명합니다. (웃음) 어느 목사님이 주보에다 설교 제목을 냈는데 수요일 제목인데 ‘무릎과 무릎사이’ 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목사님 무슨 여기가 영화관일줄 아십니까?’ 그랬는데 뭐냐 하면 무릎과 무릎 사이에다 선지자가 집어 넣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목사님도 자기도 한 번 해보려고 그 본문을 기도하기 위해선 자기도 한 번 해봐야겠다. 그랬는데 아무리 고개를 집어넣으려고 해도 배가 나와서 고개가 들어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이제 무릎을 꿇고는 안 되고 무릎을 세우니까 겨우 들어가더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무릎에 얼굴을 묻을 정도였으니까 그것은 간절함의 표시입니다. 간절하지 않으니까 누워서 기도해도 된다고 그러지 다급해 죽겠는데 어떻게 누워서 기도가 나옵니까? 누워서도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집에서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다급한데 속에서 불이 타는데 어떻게 집에 가만히 앉아서 누워서 기도하냐는 말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니까 엘리야는 지금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몇천 년 뒤에 열린 교회 설교자가 자기를 예화로 삼아 주기 위해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집어넣을 것이 아닙니까? 기도하다 보니까 간절히 하다 보니까 들어간 것입니다. ‘비가 오느냐?’ ‘아니요.’ 날이 파랗습니다. ‘가서 봐라’ 몇 번을? 일곱 번을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올랐습니다. 목표가 올바르고 그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해도 간절한 기도 없이는 응답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개 기도하다가 낙심하는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응답해 주지 않는다는 불신앙이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기도하면 무슨 소리가 들리느냐 하면 ‘삐그덕 삑 삑’ 소리가 들립니다. 여전히 문이 열리고 있지 않은데 뭔가 강한 힘이 지금 그 문을 열고 계시다는 느낌이 든단 말입니다. 정말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은 상황은 바뀌지 않았는데 상황은 바뀌지 않는 대신에 상황은 자기에게 아무런 희망적인 보고를 안 해 주지만 상황 뒤에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수시로 듣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변하는 것이 없는데도 계속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사람,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들만이 느끼는 영적인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상황은 그대로인데 그 상황의 빗장이 깨어지는 소리가 서서히 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산사태 만나봤습니까? 지금은 사태가 그래도 많이 안 납니다. 사당동에도 한 이 년 전에 사태가 나 가지고 반포 사거리 완전히 뒤집어 졌었지 않습니까? 그런 적이 가끔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 나무를 하도 안 심어가지고 오죽 했으면 나무를 심는 것을 사방공사라고 했지 않습니까? 사방, 모래를 막아주는 공사입니다. 비만 오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산사태를 경험해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산사태가 나기 전에 밤새도록 산이 운다고 합니다. 우-우-웅, 우-우-우-웅, 우릉. 그러면서 아무 무너지는 데도 없는데 그렇게 밤새도록 운다고 합니다. 울다가 어느 날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 회개하는 것하고 비슷합니다. 그러다가 다 울고 나서 그냥 와장창하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불현듯 무너졌다고 하는데 불현듯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큰 산이 무너질 때는 우는 소리를 내다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간절히 기도를 하니까 그 기도를 통해서 상황은 바뀌어지지 않고 산은 그대로 있는데 그 산이 태산과 같은 환란이 우는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우르르릉 우는 소리를 냅니다. 더 간절히 기도를 해야지 그것은 무너질 텐데 두 번 우는 것 보다가 ‘에고 아무 것도 안 되네.’ 그리고 중간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간절한 기도가 아닙니다. 간절한 기도는 이렇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의 위대한 능력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우선 간절해야 됩니다. 기도가 아무리 수준이 높으면 무엇합니까?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지 않고 그 기도가 성취되어야 되겠다는 사모함이 없는데 아무리 기도가 장황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기도할 때도 보면 그런 생각에는 저는 백 퍼센트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글을 썼는데 성장하는 모든 교회는 통성기도 하는 교회하고 합니다. 백퍼센트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통성으로 부르짖으면서도 간절하지 않은 기도가 얼마든지 많이 있고 간절하면서도 소리 나지 않는 기도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확실한 사실 하나는 통성기도를 안 하면서도 사람들이 고요한데도 뭔가 이렇게 가서 기도할 때는 기도의 힘이 확 밀려오는 것 같은 교회를 난 아직 한 번도 못 봤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는 봤습니다. 소리 소리 지르는데 깡통 울리는 소리가 나는 교회는 가끔 봤습니다. 교인들이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그러면 ‘주여 주여’ 그러는데 보기는 그렇게 주님을 부르는 것 같지 않습니다. 주님을 그렇게 간절히 부르는 사람이 주여 세 번 부르고 금방 일어나서 집에 가요? 그러니까 막 고함소리는 있는데 영적으로 텅 빈 깡통 같은 교회는 여럿 봤습니다. 그런데 기도에 아무 소리도 안내면서도 뭔가 기도의 힘이 밀려오는 교회는 하나도 못 봤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부르짖고 안 부르짖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간절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죠. 그리고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떨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통성기도 하셨는가 묵상기도 하셨는가 물어 보는 것은 바보 같은 이야기입니다. 보다 중요한 관심은 주께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그리고 기도 간간히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에서 물밀 듯이 터져 나왔습니다. 간절함입니다.
성경이 뭐라고 그럽니까? 예수께서 힘을 다하여 간구하시다가 힘이 다하니까 천사가 도와주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자기의 힘이 다해야지 뭐 누가 와서 도와주든지 하지. 기도의 의사가 없는 사람들이 모인 기도회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소리를 안 내고 나는 간절히 기도해야 되겠다.’ 뭐 그런 것을 목표로 삼을 필요도 없습니다. 내고 싶으면 내고 말고 싶으면 만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 말마따나 통성 기도시키니까 하는 말이 뭐 통성기도는 자기 체질에 안 맞는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이단에 온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이단입니까? 그렇다고 다른 사람 기도도 못하게 혼자서 막 기도하면 그것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몸의 힘과 마음의 모든 것을 다해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보십시오.
저는 묵상기도를 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는 사람들을 가끔 봤습니다. 그런 일도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어느 정도 깊이 들어 간 사람들은 무릎을 탁 꿇고 묵상으로 쑥쑥 들어갑니다. 그러나 기도가 별로, 평소에 잘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묵상기도를 하면 아주 깊이 가버립니다. 아주 엄청나게 깊이 가가지고 본인도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깊이 갑니다. 그러니까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그런 것도 지혜롭게 해야 됩니다. 제일 좋은 것은 모든 사람들이 와 간절히 기도를 하면 좋습니다. 그런데 또 그렇게 기도를 못 쫓아오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런 사람들도 다 연약하니까 다 돌봐주면서 간절히 힘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큰 소리를 낸다고 해서 간절한 것도 아니고 안 낸다고 해서 깊은 수준의 기도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몸과 마음을 모아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막 어떤 때는 자기도 주체할 수 없게끔 막 그냥 진짜 성령께서, 지난번에 저한테 와서 성령 체험했다고 하는 할머니, 자기도 평소에 그렇게 소리 내서 기도하고 싶지 않았는데 성령이 자기에게 착 오시니까 아침 햇살이 방안에 먼지가 보이듯이 자기의 죄가 드러나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막 몸부림 치며 기도하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 대신 또 자기만큼 기도 못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수건으로 얼굴을 틀어막고 기도를 한다든지 무릎 사이에 얼굴을 집어넣고 기도한다든지 엎드려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집어 놓고 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집어넣고 기도를 한다든지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황급히 더 은밀한 곳을 찾아가서 엎드려서 기도를 한다든지 그것도 정 안 내키면 기도원을 올라간다든지 해야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선을 이루면서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할 수 없게끔 하는 모든 것들을 우리들은 찾아내서 그래서 몰아내야 됩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하나님 앞에 순종할 마음이 없는 말씀 들음,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는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기도, 이런 모든 것들은 정말 하나님 앞에 정말 불쾌하기 짝이 없는 정말 신앙의 모습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정말 고쳐야 됩니다. 그래서 새벽 기도에는 제가 가끔 말씀을 드렸는데 새벽기도 나올 때 우리들이 의식을 다 가지고 나와야 됩니다. 그 추운데 꼭 기도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각오를 탁 하고 그러고 나와야 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왜 기도에 있어서 이 간절함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오늘 그것을 다 말씀드릴 수 없고 그 중에 한 가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기도에 있어서 이런 간절함의 요소가 필요한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바깥에 이 간절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게끔 하는 방해가 기도 속에 아주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단은 놀다가도 가장 연약한 신자가 무릎을 꿇을 때 그 사람을 주목한다.” 방해가 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방해를 능가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위해서는 그 방해를 능가하는 강력한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부르짖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씨름을 이야기 합니다. 씨름장에서 선수들이 쓰러뜨리고 씨름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양반입니다. 옛날에는 쳐서 한 쪽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 끔찍한 씨름이 기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쉽게 이야기하면 많은 기도의 위인들이 도달했던 기도의 그 놀라운 달콤함, 그 다음에 ‘기도를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도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다. 기도는 우리의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다.’ 이런 사람들은 단 번에 거기로 가는 것이 아니라 깊은 투쟁 끝에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로 깊이 들어가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시간도 없고 장소도 없고 그 다음에 오직 하나님과 자기가 대면하는 그런 장소로 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공중전화 거는 것처럼 기도하는데 어떻게 영적인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 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을 가끔 보면 한 번의 기도함으로 위대한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리는 그러한 기도 응답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처럼 가나안을 정벌하다가 해가 떨어지니까 태양아 멎어라 하니까 태양이 멎었습니다. 그래서 악한 자들을 진멸했습니다. 이런 위대한 일들은 짧은 기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 그들은 평소에 아주 긴 시간 동안을 아주 간절한 기도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우리들이 받아야 하는 도전은 우리가 깊이 하나님 앞에 깊은 기도 뛰어난 기도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인간적인 면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천사를 통해서 도우셨던 것처럼 우리의 기도를 성령을 통해서 도우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우리들은 기도의 응답의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기도 제목이 여러분의 신앙의 상태에 따라서 수준이 다소 낮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간절히 기도를 해야 응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렇게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삼년육개월 동안 비가 아니 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하니까 하늘이 열리고 비가 내리고 땅이 열매를 내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비가 육개월 정도 안 오니까 농수산부 직원들이 돼지 머리를 가지고 무슨 산에 올라가서 고사를 지낸다고 하더랍니다. 이 개명한 천지에도 그러는데 하물며 삼년육개월 동안 비가 안 오고 땅을 파도 샘이 솟지 않을 때 가축들이 들판에서 기갈에 쌓여서 죽어가고 곡식이 누렇게 다 타들어 갈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비가 오게 해 달라고 기도 안 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가 기도를 안 했겠습니까?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그 사람의 그 수많은 사람의 대중적인 기도에 대해서 신경도 안 씁니다. 그리고 누가 기도하니까 그러니까 누구만 하나님이 주목하셨다는 것입니까? 엘리야만 주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무슨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춤을 추고 그러는 것 이러한 것을 하나님이 하나도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비를 받아 내는데 아무런 도움을 못 주었고 오직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비가 오게 해 달라고 삼 년 육 개월 동안 그렇게 통성 기도를 하고 금식 기도를 하고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쳐다도 안 보시고 누구를 기다렸어요? 엘리야가 다시 ‘하나님, 여시옵소서’ 할 때까지 열쇠를 손에 쥐고 누구의 기도도 듣지 아니 하시고 엘리야 한 사람만 바라 보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바라보시기에 의인이었기 때문에 의인의 간구하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야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삶이 정말 이 땅에 비나 내려가지고 사람들의 기근의 문제나 해결하러 온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삶 전체를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한다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비가 오지 말게 해 달라고 간구하면서 부르짖었던 것은 그렇게 살아 온 엘리야의 삶의 한 반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위대한 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교회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일주일 동안 아무렇게나 살다가 교회에 와가지고 예배나 한 번 드려주고 축도가 끝나기 전에 도망가는 사람이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리도 없거니와 설령 가끔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들어 주시겠냐 이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뭔가 자기의 삶 속에서 그 교회의 참된 부흥과 변화를 위해서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거기에 자신의 삶이 집중되어 있는 사람, 마음이 거기에 고정되어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부르짖으면 기도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불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역사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에서 한 번도 복음을 전하지 않고 하루에 십 분씩 기도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 번도 기도하지 않고 나와서 복음을 전하면서 걸어 다니면서 “저 영혼을 내 손에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가 더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를 하는데 말씀을 사랑하면서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야지, 설교하는 시간엔 자고 성경도 안 읽고 그러면서 “말씀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건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식세계를 가득히 지배하고 있는 어떤 사역과 어떤 일이 기도에 떠오를 때는 가슴을 울리고 심금을 울립니다. 예를 들면 그래선 안 되는데 가정을 나 몰라라 내 팽개치고 살아가는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아들도 있고 딸들도 있고 며느리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진정으로 가정을 위해서 기도를 할 것인가? 한다고 하더라도 그 기도가 힘이 있겠는가? 그러나 정말 가족의 영혼의 구원과 그들이 참 그리스도를 알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이런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매일 식탁을 마주하면서도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 이 가족이 어떻게 예수께 돌아 올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 복음을 전할 기회를 하나님 앞에 찾는 사람들, 그들은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때에 목이 메는 아픔과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삶이 동반되고 삶으로 고민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기도시간에만 인상을 쓰고 고민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고민하는 기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벌써 기도는 잘 하는데 삶이 개판이라면 이것이 분리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이 뭐가 잘못되든지 기도가 뭔가 잘못되든지 둘 중의 하나가 잘못된 것입니다. 삶은 기도를 능가할 수 없고 기도는 삶 속에 갇힙니다. 삶은 기도를 이끌어 가고 기도는 삶을 통제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엘리야 선지자가 이렇게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적을 불러 내릴 수 있는 어떠한 신비한 능력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이 사람을 기뻐하셨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제목으로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간절한 기도가 가능했던 것은 그가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나는 확신합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간절한 기도를 하기 원하면 간절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
(찬양)
그 뜻이 이루어 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그러니까 간절하고 절박한 그런 삶을 살아야 됩니다. 삶은 헤벌레 한데 기도는 눈물이 펑펑 솟고 마음이 타는 것 같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불꽃과 같이 어두운 세상을 지나며 살자 이것이 우리 교회의 영원한 표어입니다. 우린 매년 바꿀 필요 없습니다. ‘ 어두운 세상을 불꽃같이 살자.’ 그런데 어두운 세상을 불꽃같이 살게 만들기 위해서는 기름이 준비되어야 됩니다. 타올라야 합니다. 그러니까 간절한 기도의 눈물이 기름이 되고 그 눈물에 응답하시는 성령이 기름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어두운 세상을 타오르는 불꽃처럼 타오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삶이 하나님을 떠나고 삶이 하나님 앞에 어떤 간절한 목표가 없는 삶은 하나님 앞에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주일 예배 시간이건 새벽기도 시간이건 금요기도회 시간이건 이 기도의 분위기 영적인 분위기에 대해서 그렇게 노심초사하고 염려하고 어떤 때는 심하게 말해서 너무 지적도 많이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금요 기도회가 그러면 닷새 동안 우리가 어떻게 살다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없고 부르짖음도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기도의 영을 마음에 소유했던 모든 사람들은 전부 다 치열한 간절함이 마음속에 타오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 전에 간절하고 절박하게 살지 않을 수 없는 삶의 목표를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고 그들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절박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느 하나가 먼저가 아닙니다. 함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삶이 그렇게 절박한 목표를 잃어 버렸다면 오늘 기도할 때에 그 절박한 목표를 찾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이 간절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간절해지면 기도가 간절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순환을 이루면서 기도 속에서 우리도 변해가고 우리가 간구하는 기도의 내용도 변해가고 우리가 부르짖는 기도의 상황도 변해가고 바뀌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엘리야가 어떻게 이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렸는가 이것은 다음 주에 하겠습니다.
3. 겟세마네의 기도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3-44)
기도 I (1995.3.12 주일오후 3)
오후마다 이제 기도시리즈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몇 번째 시간입니까? 3번째 시간입니다. 첫 시간에는 출애굽기에서 회막의 기도를 가지고 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향한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비범한 기도 때문에 펑범한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도 여호와 경외하는 자는 회막 앞으로 나와서 그 회막에서 더 간절히 기도하도록 하였다 그 이야기였습니다. 둘째 시간에는 무엇을 했습니까? 엘리아의 기도에 대해서 했습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대해서 오늘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43절을 봅시다.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었더라”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주의를 기울이는데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고난에 대해서 우리들의 이해가 너무 피상적입니다. 십자가 시리즈를 이번에 한 거 말고도 가상칠언을 다룰 때 사실은 그 이야기를 조금 더듬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마 책을 통해서는 설교보다 더 깊이 달구어 졌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고난 그것이 있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는 그 말하자면 영적인 그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결국 승리하시는데 그 승리의 이면에는 그 전날 밤에 기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 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엄격히 말하면 금요일의 승리는 목요일의 깊은 기도 전날 밤의 깊은 기도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생애가운데서 늘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기도는 기도대로 나가고 생각은 생각대로 돌고 마음은 딴 데 가있고 이런 것은 예수님께서는 경험되어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앞에 아버지의 이름은 부르며 기도할 땐 언제나 정신과 마음과 몸이 하나로 묶여져서 거룩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지상생활에서의 모든 기도가 다 간절하고 그리고 다 완전한 기도였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올렸던 이 기도는 우리들이 특별히 주목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특별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기도가 특별한 기도가 있고 일반기도가 있느냐? 있습니다.
특별한 때에는 특별한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어딘가를 특강을 하러 갔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옹기종기 한 40명 모여 있는데 그리스도인인 헌신된 삶과 섬김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 중에 명명인 형제자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게 헌신을 하기위해서 그렇게 희생하면서 그렇게 섬기고 기도했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그중에 한 사람이 번쩍 손을 들더니 무슨 이야기를 듣다가 밤 10시가 넘어서 직장에서 가서도 교회에서 기도하고 간다 그랬던가 그런 이야기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짐에는 언제 들어갑니까? 잠은 언제 잠니까? 부모님께 효도는 언제 합니까? 상황이 특별할 때는 특별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상황이 필요하면 특별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반적인 원리는 잘 먹고 잘사는 것입니다. 육체에 건강도 돌보는 일도 하나님의 일이라고 주님이 주신 성전을 잘 돌봐야 합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그런 원리를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면서 광야에 나가서 40일 동안이나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온몸이 수척해지신 이유 그건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특별한 때에는 특별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것입니다.
오늘 이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서 드리는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새벽 미명의 습관을 따라 나가서 기도하신 그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니까 특별한 상황이 있을 때는 특별한 기도를 해야 되는데 상황은 특별한데 일반적인 기도로 넘어가려고 그러니까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특별한 상황인데 말하는 건 특별히 말하는데 말은 특별히 하지 기도는 안 해 그러니까 늘 특별한 상황 속에서 일반적으로 패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상황도 특별하고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처하는 기도는 일반적입니다. 안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거가지고 충만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신앙이 이렇게 서서히 그래프를 그리면서 신앙이 올라가는 것보다도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특별한 기회를 주실 때 그 기회를 극복하고 위기를 넘길 때 우리의 신앙이 확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다고 그걸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신앙을 키우기 위한 기도는 아니었지만 예수님이 이제껏 태어나셔서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사셨던 그 모든 삶은 오직 하나의 푯대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입니다. 인자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그것 하나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생을 살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생애가 그 한 지점을 향하여 달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한 지점에 당신이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그 시간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는 특별한 각오와 특별한 결단으로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장면이 여러 면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깊고 오래되고 감화력이 있는 기도였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하시는 모습에 완전히 반했습니다. 아니 그래서 더 정말 나도 어떡하면 저렇게 깊은 기도를 할 수 있을까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감화력이 있는 기도의 삶을 사셨습니다. 결코 그분은 우리처럼 곤고해지거나 아니면 우리 안에 있는 기도의 영을 다 잃어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신 적이 없었습니다. 늘 기도 가운데 사셨습니다. 삶 장체가 기도였고 기도 자체가 삶의 연장이었습니다. 기도의 영으로 사셨고 하나님을 섬기는 영으로 기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살아오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특별한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왜 특별한 위기가 다가오니까 위기가 오는지 어려움이 오는지 늘 감각이 없습니다. 이미 나도 죽어있는 신앙의 치명적인 모습입니다. 분명히 지금 이 상황은 특별히 기도해야 될 텐데 그런데 감각이 없습니다. “아이구 그렇게 유별을 떨 필요가 뭐 있나.” 평소에 하던 대로 오늘 아침에도 어느 책을 읽다 보니까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기도를 얼마나 하십니까? 특별히 정해 놓지 않고 늘 생활 속에서 기도합니다. 그 이야기는 얼마나 높은 수준의 신앙에 도달한 사람이라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늘 기도합니다. 쉬지 않고 생활 속에서 늘 기도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높은 수준의 영적인 삶인지를 사람들이 모릅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시간을 정해 높고 기도하지 않는 것을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르기나 하면 밉지나 않지 이렇게 손바닥에 드러난 것처럼 뻔히 보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높은 수준의 영적인 삶인지 아십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것은 뭐냐면 기도와 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정도의 영적인 세계를 그런 정도의 영적인 세계를 그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면 감히 자기가 그 수준에 도달했다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그건 최고의 수준의 영적인 삶입니다.
기독교 복음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들이 그런 식으로 유린되거나 오용되거나 남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그렇게 보면 참 그 구제받을 길이 없는 자기의 그리고 그 교묘함 이런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희망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육신이 마음의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다는 둥 하면 뭐 늘 항상 기도하면서 산다는 둥 그런 정말 항상 기도하면서 삽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항상 기도하며 기도의 영속에 살아있는 사람 길을 걸으면서도 기도 영이 주장해서 그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고 그리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기도의 영이 그를 주장해서 기도하게 하고 청소하면서도 기도하는 영이 그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고 그렇게 늘 모든 행동이 기도에 배어 있는 사람이 기도만 가지고 산다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생각을 하는지 참 난 모르겠습니다.
오늘 자신의 기도가 경박하고 천박하다는 깊은 절망에 직면해야 됩니다. 로이드 목사님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셨습니까? 그 부인한테 나중에 물어보니까 부인이 “사람들은 우리 목사님이 한시대의 설교자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 남편은 누가 뭐래도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읽고 그는 자신이 거의 기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쥐뿔도 없으면서 그렇게 자신에 대한 평가가 너그럽고 왜 사람들이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보십시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오늘 확실히 하고 갑시다. 기도가 생활 속에서 늘 배어있는 사람 그래서 무엇을 보던지 무엇을 먹던지 무엇을 만지던지 기도의 영에 의해서 통제를 받으며 쉽게 이야기해서 기도의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 그런 영적인 삶이 바로 하나님의 원하는 삶이 있는 그러한 영이 자기 가운데 충만하게 지배해서 살아가면 삶 자체가 기도입니다.
제가 여러 가지 일들을 많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 주변이 저를 사랑하는 목사님이 저한테 일을 너무 많이 하지 말고 개인의 시간을 많이 가지라 그래서 제가 이야기 했습니다. 충고는 매우 고마운데 한가해 진다고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고 생각하면 그건 넌센스입니다. 또 바쁘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바쁘다고 해서 그 바쁜 것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생각하면 넌센스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떤 영적인 상태로 어떤 영에 어떤 기도의 영으로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그가 모든 범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아무것도 안하는 것 대문에 오히려 더 안일해져서 하나님께로부터 더 멀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주욱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충고는 매우 고맙게 받아들여진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한참 생각하더니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스펄전 같은 사람은 지금 제가 이야기한 말에 아주 대표적인 증인입니다. 쉰 세 살밖에 안 되는 짧은 나이에 죽었지만 엄청난 그 통증에 그런데 주일날 설교를 마치면 꼭 한 달에 얼마씩은 공기 좋은 호수가에 가서 쉬어야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편지를 보내는데 악마가 와서 팔을 꺾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이 편지를 씁니다. 그런 육신의 통증을 막 고통스럽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에게 맡겨지는 모든 일들을 거절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떻습니까? 철저하게 기도의 영에 의해서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어나는 한 사건 한사건 통해서 말하자면 기도의 영이 교류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을 다라 살아가는 말입니다. 그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영적인 삶속에 들어오게 되면 순간순간 그 속에서 늘 영적인 예민함이 계속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을 슬퍼하신다. 내가 또 어떤 일을 계획할 때 그 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으신다. 이런 것들이 무슨 며칠을 기도해야지 아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기도할 준비 설교할 준비 예배를 드릴 준비 그건 따로 준비가 필요 없습니다. 왜 그 영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설교를 하라 그러는데 뭐 어디 갑자기 설교하라 그러면 내가 어떻게 설교하냐 그래서도 안 됩니다. 기도하라 그러는데 그 일주일전에 이야기를 해주어야지 이제 와서 기도하라 그러면 어떻게 하냐 그러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늘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준비를 다 갖추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이 별도의 시간 하나님과 대변하는 시간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이건 거짓말입니다. 그건 불가능한 거라고 앞에게 거짓말인지 뒤에게 거짓말인지 하나가 거짓말이라고 그런 관계에 있을 수가 없다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수준의 삶을 사셨거든요. 그런 수준의 삶을 사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자 그러면서 나와 찬송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성을 보시면서 막 통곡하며 우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그로 눈물 흘리게 만들었던 건 애로적인 열정이나 미래에 대한 가족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오늘 그 가슴속에 역사하는 기도의 영이었습니다. 그랬는데도 예수께서 특별한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특별기도 하시기 바랍니다. 맨날 말로는 난 지금 특별한 상황이냐 늘 그렇게 사람들 다 그러지 나는 뭐 특별할 게 하나도 없어 나는 뭐 쥐뿔이고 나는 남처럼 똑같이 나는 지금 남보다 특별한 상황에 있다고 그러는데 특별히 하나님한테 매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특별하다고 말하는 그 자체가 특별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보십시오. 그런 수준의 기도의 영을 유지하면서 사셨던 그분이 오늘 특별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갔습니다. 특별기도 하는 게 어디서 드러나냐 하면 예수님은 그렇게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야고보 베드로 요한 세 사람 다 데리고 가다가 “너희들 여기 있어.” 그리고 세 사람을 데리고 더 가까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예수님이 생각 하시기에 그래도 영적으로 뛰어났다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래도 너희들은 나를 위해서 깨어있어 달라고 그러니까 기도 해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 깨어 있어 달라.” 그리고 거기다 놔두고 돌아앉으면 떨어질만한 장소에 가서 간절히 기도하시고 그리고 나와서 보셨습니다. 왜 함께 깨어있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영적으로 깊은 사람들은 깊은 잠이 푸욱 빠졌습니다.
영적인 깊이 만큼이나 아주 깊은 잠에 푸욱 빠져서 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간절히 기도하시는데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예수님의 힘을 도왔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기도는 영적인 노동일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노동입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난 우리교회에 이 기도가 정말 영적인 노동이 있을 뿐 아니라 육체적인 노동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체험적인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누군가 한 번 기도의 영에 붙잡혀서 간절히 기도한 적이 있는데 저한테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기도 할 때만 되면 내가 기도하는 것이 육신의 힘을 사용하면서 기도의 진흙을 다 짜놓으시고 그 다음에는 다시 떠나가 버리시는데 주님이 그런 느낌을 받아서 주님의 기도가 내 앞에서 끝나고 나면 그 다음엔 깊은 탈진 상태에 빠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육신을 입으신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연약하시기 때문에 오셔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시고 간구하실 때 육신의 몸인 힘을 다 쏟으셨습니다. 더구나 그 전날 밤에 전도하시고 그리고 그 다음에 만찬을 드셨는데 무엇을 드셨겠습니까? 고별 만찬이되 그리고 올라가서 엎드려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나 예수님이나 마찬가지였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육신이 피곤도 영적인 긴장은 경우에 따라서 이길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간절히 인간이 영적으로 하나님께로 힘을 얻어서 긴장하면 유신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간절히 기도하니까 그 간절한 기도 속에서 육신의 힘이 다 빠졌습니다. 마치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높이 들면 아말렉을 이긴 것 같았습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한 번 명령을 해가지고 홍해를 갈랐던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 팔 하나 감당을 못해 그 인생에 그렇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리라고 그러니까는 육신의 힘이 다하게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누가 도왔습니다. 천사가 왜 언제 와서 도왔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할 때 그때 천사가 나와 가지고 예수님 팔을 붙잡아서 도와줬습니까? 아닙니다. 어떻게 간절히 기도해서 육신으로서 더 이상 버티면서 기도할 수 있는 힘이 사라져가는 그때에 천사가 와서 도와준 것입니다. 뭐 힘을 다 쏟아 부어야지 성령이 와서 돕든지 붙들든지 하지 힘이 펄펄하게 남아 있는데 도와줄 것이 있습니까?
다음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그랬으니까 그 앞에서도 힘쓰고 애쓰고 있어서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시니까 육신의 이미 다 진하여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힘이 다 진하여진 것과 간절한 기도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기억을 해야 되는 우선 마음을 기울이고 힘을 다하고 그러니까 힘이 떨어지고 육신의 기력이 쇠약해지면 이 마음이 이 정신이 모아지지를 않습니다. 정신이 의학적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무언가를 떠올리거나 기억을 시키거나 할 때에는 에너지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에너지가 없는 것입니다. 힘이 그러니까 기억도 안 되고 그 다음에 집어넣은 것도 표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력이다 떨어질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완전한 죄가 없으신 고통을 가지실 수 없던 분임에도 불구하고 힘쓰고 애써서 땀방울이 떨어져 피가 될 때까지 간절히 기도하심으로서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셨다면 우리는 더 많은 방해를 받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엉뚱한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이니까 잃게 간절히 기도했지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간절히 기도할 수 있나.’ 이런 생각하면 안 된다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는데도 이렇게 간절히 투장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면 우리들은 죄로 말미암아 수시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를 받기 때문에 기도의 영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간절한 몸부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개판처럼 살다가 와가지고는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죄와 이런 것들이 가득 차 있는데 자기 힘으로 그것을 치우면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냐는 말입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제대로 살아야 되고 제대로 살기위해서 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뭐 아무렇게나 살고 금요일에 와서 무릎만 꿇고 고개만 땅바닥에다 푹 숙이고 있으면 뭐가 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기도의 영을 보존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씨름한 것입니다. 자신과 더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힘들 다 쏟아서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힘쓰고 애썼다 그랬습니다. 힘쓰고 애썼다 자신의 힘을 다 들이는 것입니다. 엎드려서 무방비상태로 몸과 마음이 다 풀어져서 그것은 기도가 되느냐 이야기입니다. 그건 생각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우리를 기도로 데려가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선 이번 주에 새벽기도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는데 그 정도가지고 안 되는 것입니다. 아예 집에서 나올 때부터 뭣인가 오늘은 이 새벽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특별한 교통을 해야 되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다가 10분이고 20분이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다가 가야지 그냥 그저 몸과 마음이 다 풀어져가지고 그렇게 해가지고 가봐야 주일예배 끝마치고 가면 머리만 아프단 말입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힘스고 간절히 써야 되는 것입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히 힘을 다 쏟았습니다. 힘이 하나도 안 드는 통성기도가 있을 수 있고 그 다음에 힘이 모두 들어가는 묵상기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마음의 간절함입니다. 마음의 간절함 마음의 간절함이 없는 모든 기도는 하나님을 희롱하는 것입니다. 간절함이 없는 기도가 진지할 수 없습니다. 진지하면 모두 간절히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을 다해서 간절히 기도하시니까 힘이 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천사들이 하늘로부터 와서 예수께 힘을 도왔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자기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그 순종을 구하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급히 하늘을 여고 천사를 파송하셔야 할 만한 삶을 여러분들이 살고 있습니까?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급히 하늘을 여시고 군대를 파견해서 사당동으로 보내서 도와주셔야 할 그런 종류의 삶을 살고 있느냐 이야기입니다.
이번 주에 온 부흥 강사한테 들었는데 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은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 그 세속이 뭔지 설명을 하시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는 한 번도 시간을 지킨 적이 없으면서 바겐세일 그러면 새벽부터 택시타고 가가지고 개장하기 전에 제일 좋은 물건 사려고 가서 줄서고 서기 위해서 박 터지는 거 이런 건 다 세속 에 물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는 그래 본적이 없으면서 그 뜨거운 열심히 몇 푼 안 되는 돈 싸게 사기 위해서 가서 이른 새벽에 가서 줄서는 이런 열심 이것이 다 세속저긴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있는 것들을 향해서는 간절하게 사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하나님 몸과 마음이 다 흩어진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뭐냐 하면 자기는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장부에는 매일 2시간씩 기도 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장부에는 하나도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다줍니까? 마음을 다하고 힘써서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니까 자기가 기도를 했는데 무엇을 기도 했는지도 모르고 응답이 됐는지 안 됐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다 비정상적인 삶입니다. 과감한 수술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당신 특별한 상황이니까 특별히 기도하라 아무리 이야기 해줘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본인이 내가 지금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될 때다 이걸 느껴야지 되는데 말입니다.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기도의 영속에서 그렇게 하나님과 고통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돌아봐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간절함을 추구해야 됩니다.
아주 조금 요즘은 좋아졌는지 한달 전에 깊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누가 찬송을 해도 기도를 해도 예배를 해도 간절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밥 먹을 때는 다들 간절한 것 같습니다. 다들 여기 반찬 없습니다. 하고 진짜 간절합니다. 간절히 반찬과 국과 그리고 추가 밥을 열심히 찾는데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간절함이 없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초토화 시키고 황폐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굳어져 버리면 그 다음에는 정말 주님 만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를 부인하다 그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심으로써 이런 모본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잘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우리가 사실은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대부분인 것은 기도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그랬는데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하면 기도다운 기도를 안 하기 때문에 응답다운 응답이 안 오는 것입니다. 기도다운 기도를 안 하니까 응답다운 응답이 안 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그 이유의 다른 것들이 아무렇지도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오직 모범만 보냈습니다. 자기 앞에 있는 그 십자가 그 대 속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그 사실을 그리고 이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모든 연약함들 이런 것들과 더불어서 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깊이 싸우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했더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해석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땀이 하도 많이 나와서 뚝뚝 떨어지는 것이 상처를 입고 흘리는 피와 같더라 그렇게 보는 사람이 있고 실제로 예수님의 땀이 피가 되어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나는 후자의 해석을 지지 합니다. 그냥 단순히 예수께 아부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나는 어디서 그런 것을 느꼈냐 하면 살인적인 금식도 해본적도 없지만 실로적인 금식도 해본 적이 없지만 그러나 일주일밖에 금식을 안했는데도 소변은 받아가지고 보면 새빨간 피가 섞여서 나옵니다. 평소에는 그런 때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지금 온 몸과 온 영혼을 다 바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땀이 땀방울 속에 피가 섞여서 그 땀이 핏방울 같이 변하는 일들은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라도 물리적으로도 가능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없이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때는 추운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모닥불을 피워놓고 사람들이 가야바의 뜰에 앉아 있었지 않습니까? 그 모닥불을 또 곁불을 쬐려고 누가 갔습니다. 베드로가 갔었지 않습니까? 그렇게 추운 날 밤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위에 올라서 간을 바람도 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절히 기도하시니까 땀이 떨어져서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과 같이 그렇게 흘러내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간절한 기도와 세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간절하지 못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 기도하고자 하는 제목이 정말 절박하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믿음 때문에 절박하지 않으면 할렐루야인데 그것이 신앙의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에 자기가 위기 속에 있으면서도 위기가운데 특별한 기도를 해야 될 도전을 못 느끼면 할렐루야가 아니라 놀랄 일입니다. 마지막에 남은 얼마 안 되는 기도의 열정도 다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기도를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다음에는 기도하는 사람도 만나는 것도 괴로워지고 기도의 분위기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고통스러워지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간절히 힘써서 애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더라” 천사가 내려와서 힘이 빠진 예수 그리스도에게 새 힘을 주었더니 그 새 힘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생하신 것이 아니라 그 받은 힘을 가지고 더욱더 간절히 이번에는 자신의 힘이 나리라 만들어 주는 천사의 힘까지 활용해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니까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하나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도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고 이기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점에 있어서 아주 특별히 간섭을 해야 되는 마음이 없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 이것은 우리를 바리새인이요 위선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이 다음이 없는 하나님 앞에서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우리를 파별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하든지 이렇게 간절하게 마음을 실어 마음을 실어서 마음을 얹어서 그 마음이 우리를 움직이고 역사해서 그래서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들어지는 일들이 먼저 일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실 때 흔히 그러시지 않던 하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도 제자들이 잠들어 있어서 중보기도를 받으실 수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천사를 보내서 중보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도왔습니다. 그분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중보기도도 자기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위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간절히 기도하면 다른 사람이 자기는 별로 기도 안 해도 간절히 기도하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넘치는 힘을 주셔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그렇게 새 힘을 주시고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정기적인 기도의 시간을 꼭 가져야 됩니다. 절대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저 최소한으로 줄여서 이야기하면 30분 이상을 기도하지 않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삶이 가능하겠느냐 그러니까 뭐 그니까 육신이 연약하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해보도 모이고 간구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그렇게 깊은 기도 속에서 살아오지는 못했지만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한찬 기도의 영이 살아남을 때는 모든 사람이 모여 할 때 모여서 기도해서 좋고 홀로 고요히 평일날 교회당에 나왔을 때는 혼자 있어서 좋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러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그리스도를 기도하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생활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다같이 기도 합시다. 그때 그 교회가 어떤 영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지를 그 교회의 영적인 수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삶을 살수가 없다고 아무리 밖에 표가 나도 결국은 그 정도의 밑도는 삶을 살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넘어서는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 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제 수난 주간을 바라보면서 여러분들이 특별히 이번 수난주간을 통해서 네가 그리스도와 밤이 가까워지도록 도와 달라고 여러분들이 간절한 기도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도 속에서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지만 십자가에서 흘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하나님이 받으시기 전에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린 기도의 피를 다 받으시고 나서야 비로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보혈의 피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속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에 대해서 깊은 체험을 갖게 되는 그 순간 기도의 영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래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이외에는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는 말에 가장 원초적인 의미는 기도입니다. 그 기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찾는 이러한 기도의 세계 속으로 여러분들이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기도 시간이든 수요예배 시간이든 금요기도회든 우선 열심히 나와야 됩니다.
새벽기도 많이 늘었습니다. 이정도 가지고는 안 됩니다. 우리교회가 뭔가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들로 살아가는 자녀들을 길러내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 교회는 많은 사람들의 평범한 기도가 아니라 아주 특별히 하나님 앞에 기도로 헌신된 그 사람의 기도를 그 위에 더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평범한 사람은 평범하게 하고 그 위에 하나님이 특별히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고 갈망하는 그런 그 기도의 열망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이 부르셔서 그들로 하여금 회막 밖으로 나가게 하시는 회막 밖으로 기도하다 회막으로 기도하다 진밖에 있는 회막으로 기도하다 나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는 공식적인 프로그램이 아니었습니다. 갈 사람만 가는 거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 중에는 자기가 아니면 누가 가냐 하는 이 절박한 말하자면 몸부림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들에게 응답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의 그런 섬김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누가 그걸 알아주겠습니까? 교회에 무얼 한 번 사다가 달아놓고 나면 저거 누가 사다 달아났지 다 대부분의 경우 까닥 잘못하면 천국에서 받을 상 여기서 다 받습니다. 기도는 아무도 모릅니다. 주님만이 알아요. 간절히 기도하면서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로 하여금 더 큰 하나님의 사랑과 인격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디서 기도의 세계 속에서 깊이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프로그램을 짠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희생이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이 어떻게 간절해 질 수 있겠습니까? 고통이 없이 어떻게 애쓸 수 있겠습니까? 아픔이 없이 어떻게 힘을 다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피가 얼마나 남아있기에 이튿날이면 다 쏟아야 하는데 그거 미리 쏟고 있습니다. 얼굴에는 가시관을 쓰지 않으셨는데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희생이 없이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육신의 안위를 추구하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차라리 돈을 몇 낸다고 그럽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모든 일들이 기도의 영과 분리되 가지고 행해지면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해났는데 난 저걸 해났는데 하나님 앞에 청소를 하던지 교회를 무엇을 교치든지 무엇을 하든지 늘 그것을 보이지 않는 교회와 연관 시키면서 기도의 영속에서 자기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도록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한 번 해보십시오.
토요일 날 일직 나와서 청소하면서 “주님 오늘도 예배 속에 말씀으로 성령으로 오셔서 이 더러운 교회당을 이 청소기가 깨끗이 하는 것처럼 그 말씀으로 성령으로 우리의 더러운 마음을 청결케 하여 주시옵소서.” 개척교회에서 그 어떤 자매가 말입니다. 목사님한테 와서 제가 섬길 일을 달라고 섬기고 싶다고 그래서 교회의 강단을 청소하는 일을 네가 맡아서 해라 그랬습니다. 자매가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더 큰 교회 일을 하면서도 기도 안하고 하는데 어느 날 토요일에 깊은 밤에 혼자 나와서 강대에 누가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보니까 그 자매입니다. 이렇게 보니까 손에는 그 추운 겨울날 걸레가 들려져 있고 기도하는데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 제가 이 강대를 청소할 텐데 주님 이 더러운 강대가 이 거룩한 말씀을 선포해야 할 강단이 삼일동안 이렇게 더러워진 것 같이 그렇게 우리의 마음도 더러워졌습니다. 이것을 청소하면서 내 마음이 정결케 되게 하시고 정결케 된 강단을 통해서 말씀이 선포될 때 이튿날 성도들의 마음이 이렇게 정결케 되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일이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섬기면서 그 일에 의해서 점점 무관심해지는 거 그건 기도안하면서 하기 때문에 점점 무관심해지고 나중에는 발 빼고 손 빼는 것입니다. 간절함이 깊어져야 그것은 바로 기도의 영에 의해서 움직이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범사를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하나님과의 기도와 교통이 끊어진다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전기가 들어오니까 빛도 들어오고 그 다음에 환풍기도 돌아가고 시계도 돌아가고 히터도 돌아가고 다 전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습니까? 우리 살아가는 삶도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먹고 어떤 때는 노래하고 어떤 때는 찬송하고 어떤 때는 직장에서 일하고 어떤 때는 가정에 가서 섬기고 어떤 때는 동네 사람들하고 교제합니다. 모습은 달라도 전기를 딱 내리면 다 되듯이 그리스도인의 삶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도 자체를 많은 생활 속에 하나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니라 모든 삶의 구석구석에 전기와 같이 배선이 되어서 그래서 그것이 모든 삶을 지배하는 것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한 주간 동안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는데 이정도 가지고 안 됩니다. 정말 간절하게 하나님 앞에 매어 달려서 간절히 기도하고 부르짖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어두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4. 변화산의 기도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 9:28-29)
기도 I (1995.3.19 주일오후 4)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오늘 다루고 있는 이 장면 변화산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러 변화산으로 올라 간 것이 맞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기도하시다가 변화가 되니까 그 산이 변화산이 되었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오늘 이 본문을 다루면서 우리의 기도와 인격 우리의 영적인 수준의 변화에 대해서 어떤 관계가 있는지 오늘 한번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러 갔는데 이산이 어느 산이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변화산이라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는 장소는 일정하지가 않았습니다. 주님 자신의 인생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처음 오시면서부터 공생애를 사셨던 그 삶의 방식이 늘 돌아다니는 삶이었습니다. 늘 여기저기를 다니시고 이 동네에서 복음을 전하고 저 동네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이러한 삶을 예수님께서 쭉 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정해놓고 한 장소에서 기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는 시간만 일정했습니다. 대체로 보면 한낮에는 거의 기도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한낮에는 기도하는 시간이 아니라 열심히 섬기시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그리고 억눌린 자에게 해방을 주시는 이러한 실제적인 일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깊은 밤에도 이런 일들을 하셨지만 대개 낮에 이런 일들을 많이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을 대개 새벽미명에 기도했다는 기록이 몇 번 나오고 깊은 밤에 기도했다는 기록도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장소는 일정하지가 않습니다. 어느 곳에서는 감란산, 어느 곳에서는 빈들, 그렇게 여러 곳에서 상황 닿는 곳마다 택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걸어다니까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주님에게 있어서 기도하는 장소가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대단히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으면 예수님은 한적한 곳을 찾고자 원했습니다.
그러니까 고독한 장소, 남이 찾아오지 않는 장소 그런 곳을 예수님은 찾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 조건이 만족되면 어디서든지 예수님은 기도하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때로는 빈들에서 때로는 산에서 그렇게 하나님을 찾으면서 기도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을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늘 출장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주일이나 교회에서 지키고 해외로 지방으로 출장을 다니는 그자체가 직업이니까 도저히 교회에서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어냐 하면 어디든지 출장지에 도착해서 며칠을 묵든 도착하고 나면 가장 기도하기 좋은 장소를 먼저 찾는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교회를 찾던지 아니면 기도할만한 가장 좋은 장소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거기에 유하는 동안은 그 장소를 기도 장소로 알고 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은 기도할 수 없게 하는 많은 요소 속에서 우리를 지키는 길입니다. 일단 우리는 늘 항상 범사에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이러한 삶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먼저 환경과 사람들로부터 떨어진 그래서 하나님과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구별된 장소가 필요함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기도합니다. 하는 이야기와 거의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과는 동일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장소가 특별히 없다는 것은 거의 기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도 어느 날 산을 택하셨습니다. 아마 이때에는 더 특별한 기도가 필요하셨던 것 같습니다. 산에 올라가면 하늘하고 더 가까워지기 때문에 산에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그 산속에서는 보장된 고독이 있습니다. 방해받지 않는 일들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산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때는 새벽기도 끝나고 가서 계속 강의가 있기 때문에 한 시간이라도 자고 가야겠다하면 전화통이 아침부터 불이 납니다. 별의별 사람들한테 별의별 전화가 다옵니다. 이것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과 만의 시간과 장소를 Ep어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산을 택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보장된 고독이 있습니다. 방해받지 않는 고독이 많이 보장되어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곳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기 전에 중요한 것은 이런 보장된 고독, 그런 것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도 그렇고 장소도 그렇고 보장된 그런 곳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께서도 산을 택하셨습니다. 이렇게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자리하시고 나와 더불어 대화 하실 수 있는 그 공간을 치워놓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과 공간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이산에 올라가신 시간은 아마도 밤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울 때도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임하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시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내려왔습니다. 특별한 때에 특별한 장소를 택해서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오늘은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엘리야와 모세와 만나서 틀림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구속의 사업에 대하여 의논하셨을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을 위해서 고독이 보장되어있는 산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 말이 주는 도전은 바로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고독이 보장된 시간과 장소가 우리의 삶 속에 있어야겠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올라가셔서 용모가 놀랍게 변화되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얼굴이 변화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얼굴이 형체가 변화된 것이 아니라 그 형체에서 풍기는 인상과 이미지가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의 모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과 대면하고 왔을 때 용모가 변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마찬가지고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것은 용모가 변화되고 싶어서 올라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올라간 것은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 올라간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 예수님도 역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위해서 올라가신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이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이미 죽어야 할 것이 임박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제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다시 살아나야지 너희들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는 고난에 대한 말씀을 생생하게 직접적으로 일러주시고 난 후였습니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기도하기 위해서 마지막 시시각각으로 당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십자가의 고난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누구도 바라보지 못하는 그 십자가의 고난의 그 그림자와 그 십자가를 통해서 구속을 얻게 될 수많은 백성들의 생명과 기쁨을 위해서 자신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에 순종시킴으로 말미암아 구약이래로 줄기차게 계속되어오던 인류구속을 향한 하나님의 예언, 하나님의 메시지, 아브라함도 그토록 사모하면서 바랐던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버리시기 위해서 이렇게 이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옴을 알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한 기도가 필요한 때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산에 올라 가셔서 기도하시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다른 사심은 없었습니다. 무슨 위대한 영적인 체험을 하고 싶다든지 심지어는 권능을 한손에 받아야 하겠다든지 아니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겠다든지 하는 야망이 그로 하여금 산에 올라가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직 기도하고 싶었습니다. 마음을 다 바쳐서 하나님께 주님을 뜻을 이루어 달라고 간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응해서 그 말씀이 자기를 향해서 이루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성취되고 혹시라도 마지막 한순간에 인간적인 불순종이나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은 아니더라도 주위의 사람들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방해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와의 대화를 미루어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십자가를 지는 것뿐만 아니라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난 후에 홀로 남게 될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한테 뭐라고 하셨습니까? “시몬아 사단이 너를 밀 까부리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내가 너희가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느니라. 네가 돌이킨 이후에는 형제들을 구제하리라.”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십자가를 위해서 고난을 지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을 지고 홀로 죽으신 이후에 홀로 남게 될 제자들이 견고한 믿음 가운데 서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사역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속의 사역의 토대 위에서 아버지께서 세우시고자 했던 교회들을 세워가는 이러한 일들을 예수 그리스도는 원하셨기 때문에 틀림없이 이곳에서도 기도하러 올라가신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의 제목들을 가지고 올라가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올라가셔서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눈과 같이 희어져 광채가 나는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언제였습니까요?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기도하실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한 그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소의 기도생활의 깊이를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깊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다하자 어느 한 순간에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눈같이 희어져서 광채가 나는 영적인 체험이 주어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는 기도 없이도 졸지에 영적인 은혜를 깊이 체험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죄인들을 사람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보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쩍새가 다 울고 나니까 국화꽃이 피었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자신을 다 드려서 기도하고 나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용모가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변화가 기도를 통해서 일어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말씀을 통해서 깨달은 바가 정말 참으로 깨달은 바라면 그 깨달은바가 우리를 기도하게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큰 감명을 받았는데 그것이 우리를 기도하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야고보서에 나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울을 보고 더럽다 그것을 깨닫고 다시 돌아가는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감동시킨 그 감동이 참된 감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움직인 것이 참으로 우리를 움직인 것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말씀을 알았다는 그 사실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알았다고 하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 깊이 들어온 것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 속에 느껴지고 성령을 통해서 그것이 우리의 삶과 인격을 움직여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천박한 사람들 대부분이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할 줄은 모르지만 열심히 기도한다는 것이 깊이 기도한다는 것과 비슷한 말이기는 하지만 똑같은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더 깊은 기도 속에 들어가게 되면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자기를 부수는 것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격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큰소리치기 잘하고 장담 잘하는 사람들 대부분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언제나 스스로 결단하고 결정하는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러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깨닫는 사람들은 늘 담대해도 성령 안에서 담대하고 자랑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고 견고해도 복음 안에서 견고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변화를 받으러 산에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신 것인데 기도하다가 이처럼 신령한 모습으로 변화된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기도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가? 기도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이유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들이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이 참다운 깨달음이라면 그것은 머리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이 참다운 깨달음이라면 그것이 우리의 밑에까지 내려가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충격 받았다고 하는 것은 못 볼 것을 보거나 아니면 기대치 못한 것들을 들었거나, 아니면 맡을 수 없는 냄새를 맡았거나, 셋 중에 하나입니다. 머리하고 관계되지 않은 충격은 없습니다. 갑자기 쳐다보자마자 어디가 두근거립니까?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떨리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보고 그것이 나와 관계가 있으니까 봤을 뿐만 아니라 그 본 것이 내 마음 깊은 곳에 큰 파장을 던져 줍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충격을 받았다 그러는데 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차원적인 영적인 유희를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 부르다가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마음이 움직이고 변화를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져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라야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나라 입니다.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에 올라가신 것은 철저히 기도하기 위해서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변화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깊이깊이 기도 속에 들어가니까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보이고 오직 하나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깊어지게 되니까 신적인 영향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외모 속으로 비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최고의 단계는 언어가 살아지고 하나님의 신적인 영향이 우리에게 비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거룩한 성품의 빛 영광의 빛이 비췸으로 말미암아 그 영향을 육체를 입은 우리들이 받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거룩해지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고 주님처럼 살고 싶은 간절한 사랑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이변화산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는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눈뜨고 기도 안 할 때는 다 내가 잘한 것 같은데 기도하면 성령이 우리의 잘못을 생각나게 만들어 줍니다. 내가 얼마나 모난 사람이고 못됐는지를 깨닫는 것도 눈뜨고 있을 때 깨닫는 것이 아니라, 눈감고 있을 때 깨닫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기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눈뜨고서 기도의 영의 사로잡혀있지 않을 때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사실들을 성령은 우리에게 인정하도록 촉구하십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는 우리가 다 잘난 것같이 생각되는데 깊이 기도할 때는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목사님 댁에 세 들어 살던 성결교 전도사가 할머니와 말다툼한 후기도 할 때마다 그것이 마음에 걸려 찾아와서 용서를 구한이야기.
기도는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만약에 기도하지 않고서 그 사람이 살아간다면 그것이 생각나겠습니까? 그렇게 마음에 고통이 되고 내가 잘못했는데 이런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 무시하면서 살아갑니다. 즉 하나님을 막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무슨 깊은 기도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기도만 열심히 하고 인격은 엉망인, 교회는 열심히 다니는데 삶은 개차반이고 그러니까 사람들은 삶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고 생활습관에 대해서 회의를 느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기도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고 신앙생활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에 우리는 이런 인격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기도는 우리를 경건을 넘어서 거룩한 사람을 만들어 줍니다. 디모데 후서4장에 보면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말씀을 바로 깨닫고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환경에 의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듬으신다고 하시는데 그거 잘 안 다듬어집니다.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환경에 의해서 하나님이 나를 많이 다듬으셨다고 하는데 환경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환경으로 우리를 다듬으신다고 말하면, 환난이 닥치고 시련이 닥치면 점점 환난과 시련을 많이 겪으면 하나님이 잘 다듬으셔서 신앙적으로 세련되고 거룩한 사람이 될까요? 어림없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환난을 겪은 사람들은 환난이 많이 닥친 다음 세월이 흘러가면 그 환난으로 말미암아서 마치 야곱처럼 인격이 거룩해지게 됩니다. 내 나이가 몇이냐 내 나그네 세월이 일백삼십년이오만 조상의 년 수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그에게서 그렇게 바로를 축복하면서 기도하는 야곱의 모습 속에서 이전에 있던 탐심이나 그런 것들을 볼 수 있습니까? 이미 그런 것은 초월했습니다. 환난과 풍파를 수없이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지 않고 환난과 풍파만 당하면 사람이 더 강퍅해지고 모질어지고 잔인해지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 시집살이하고 남편으로 부터 구박받고 그러면서 고생하면서 한이 맺힌 사람들은 결국 고생을 많이 해서 인격이 거룩해진 것이 아니라 이속에서 한이 맺힌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멍이 들어서 무엇이든지 똑바로 보지 못합니다. 뭐든지 사물을 삐딱하게 쳐다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정신적인 불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환경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다듬으셔도 환경자체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너무 기도를 하지 않으니까 환경 때문에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환경이 아무리 풍파가 일어나도 거기서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은 개꼬리 삼년 묻어서 황모가 되지 못합니다. 환난을 많이 당하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가슴에 한이 맺힌 것만이 남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자신은 자기의 가슴을 움켜잡고 스스로 불쌍히 여길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다 쓸 데 없는 인간의 고집과 완악함과 패역함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환경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우리를 더욱 황폐하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사랑에 굶주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아와 같이 산사람들이 사랑에 굶주렸으니까 뜨겁게 사랑을 하면 살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환난과 시련이 우리를 고상한 인격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환난과 풍파 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당신을 찾고 부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야곱을 다듬은 것은 시련이 아니라 야곱을 다듬으셨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야곱은 철저히 다듬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기도를 얼마하지 않던 사람이 말년에 가서는 틈 나는대로 기도합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만나도 기도, 자식들이 모여도 기도,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만큼 그의 삶이 하나님과의 기도 속에서 바뀐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 속에는 그런 놀라운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질이 급한 사람을 유하게 만들어 줍니다. 결단력이 없던 사람들에게 꼭 필요할 때에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분명한 성격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태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근면하게 하고 옳고 그른 것들에 대한 의식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 분명한 양심의 각성을 심어주는 것도 기도가 하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깊은 기도는 우리에게 온유한 마음과 탁월한 영적인 분별력을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정말 변화되는 것입니다. 앉아서 같이 대화를 해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깊이 기도하며 사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기도하기 위해서 변화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를 그치시니까 그 기도 가운데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영적으로 신령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몸과 그의 마음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켜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영적인 변화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도 결국은 그 말씀을 붙들고 여러분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그저 박수치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보다 높은 영적인 삶보다 완전한 신앙생활, 보다 깊은 하나님과의 만남, 이러한 것들을 사모한다면 듣기만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영성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시는데 누구를 데리고 가셨습니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곱을 데리고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오늘 여기서 기도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 속에 나타나는 참된 경험은 우리가 배울 수 없습니다. 받은 사람만 알고, 주신 하나님만 아시고, 그리고 받아본 사람끼리만 이야기가 통합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문득 성전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 그들을 고친 것이 베드로와 요한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 안에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이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시간이 되어서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 갈 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던 사건과 관련지어 일어난 것입니다. 비록 이 자리에서 이들은 졸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을 이 땅에 살아계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들을 가르치는 것만큼 기도로 가르치기 위해서 힘을 쓰셨습니다. 기도를 배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를 믿게 된 순간부터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교장이요 선생으로 계시는 기도의 학교에 입학한 것입니다. 그 학교에 입학해서 우리는 기도의 초보에서부터 시작해가지고 기도의 깊은 경지에까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엔 영혼을 움직이고 우리에게 불과 같이 달려드는 어둠의 세력들의 이빨을 꺾으며 그리고 달려드는 죽음의 파도를 잔잔케 하고 심지어는 엘리야와 같이 하늘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능의 열쇠를 손에 넣기까지 우리는 그 기도의 학교에서 배우고 또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책 한권이나 말로 가르쳐주시지 아니하시고 예수께서 몸소 기도하시는 그 현장에 데리고 가셔서 기도를 가르치셨다는 사실을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그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기도하는 현장 속에서 그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이렇게 학교를 열고 그 학교 속에서 우리는 배웁니다. 그리스도의 학교 속에서 배우는 그 교훈, 수없이 흩어진 성경 속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관한 교훈과 주옥과 같이 그리스도의 삶속에서 우리는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을 다하여서 그분처럼 그렇게 기도하기를 소원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을 훈련시켜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변화산에서 기도하시다 자신이 변화되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그렇게 인격과 영적인 삶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위대한 힘과 능력을 여러분의 손에 주시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5.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예수님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 6:12 )
이 세상에는 질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합니다. 한 끼만 안 먹으면 신호가 옵니다. 제가 어젯밤 글을 쓰다가 저녁을 안 먹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안 먹었는데 12시가 넘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밥을 먹었습니다.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됩니다. 질서가 깨지면 반드시 신호가 옵니다. 잠을 자야 합니다. 잠을 자지 않으면 반드시 신호가 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질서들입니다. 몸이 너무 피곤하면 쉬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몸이 너무 자주 아픈 사람들은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몸이 튼튼해서 아프지 않으면 모르는데 이것이 몸의 체계가 잘못되어서 아파도 신호가 잘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다 곪아서 회복이 불가능할 때가 되어야지만 신호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몸이 민감하게 반응을 해서 조금만 피곤해서 쉼을 필요로 하면 쉬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모든 질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맞게 되어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사람이 이 체계만 무너지지 않으면, 물이 빠져 나가면 목이 마르고 영양이 빠져나가면 먹고 싶고 에너지가 빠져나가지 않으면 먹고 싶지 않고, 이렇게 균형을 맞추며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이것이 깨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아파서 쉬어야 하는데 쉴 때라고 스스로 느낄 수 없게끔 감각이 마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픈데 통증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비정상인 것들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밤에는 자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예수님이 밤이 맟도록 기도하셨다는 예수님의 철야기도가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글을 쓰셨는데 그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조금 유별조금 떨지 말고 밤에는 자고 그리고 식사 때가 되면 먹고, 그러면서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지 않느냐? 맞습니다. 문제는 예수님도 늘 금식하시고 철야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필요하면 밥도 굶을 수 있고 잠을 쫓으면서 기도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예수께서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 시간은 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밤에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있습니다. 우선 산이었다는 사실은 -물론 산이라는 장소 자체에 거룩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 산이니까 그 산에 고요히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이 산이었기 때문에 그 주님께서 산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산을 택하셔서 그렇게 올라가셔서 기도하시는데 그 때가 밤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한 번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시간이 하필이면 밤이나 새벽 미명이었을까? 왜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시간들 가운데 하필이면 새벽 미명과 깊은 밤을 택해서 기도시간으로 삼으셨을까? 그런 궁금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을 그 궁금한 생각이 꽤 여러 달 갔습니다. 마지막에 깨닫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기도하신 것은 무슨 특별한 영적인 의미가 있었다기보다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새벽 미명과 깊은 밤을 택해서 기도하신 것은 다른 시간에는 일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날이 밝으니까 예수님 앞에는 벌써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제자들을 사도라 세워야 하는 그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파송해야 하는 전도의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밤에 기도하셨다, 그리고 새벽에 기도하셨다’는 것은 시간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낮에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서 쓰시기 위해서 밤 시간을 저녁 시간을 택한 것입니다. 이 사실 자체는 우리에게 커다란 시사를 던져줍니다. 그것은 무슨 이야긴가 하면 낮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똑같이 일하셨습니다. 그보다도 더 넘치게 일하셨고 그리고 힘에 지나도록 일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낮 시간이 아니라 새벽의 시간을 통해서 기도하셨고 밤 시간을 통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새벽시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서 기도하시고 밤 시간에 기도하신 것은 낮 시간에 일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과 똑같은 삶을 사시면서 똑같이 희생하시고 똑같이 육신의 힘을 소모하면서 그렇게 하루를 지내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자는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는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쉬는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슨 결론이 나오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생활 속에서는 기도와 삶이 나뉘어지지 않았다는 결론을 우리들이 갖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루를 경건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하나님이 도와줄 만한 삶을 살지 않은 사람들은 밤 시간에 깊은 기도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우리의 삶 자체가 넓은 의미에서 기도입니다. 그런데 넓은 의미에서의 기도가 제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좁은 의미에서의 기도가 간절해 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게으른 사람치고 경건한 사람이 없습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물론 부지런한 사람이 다 경건한 사람은 아닙니다. 정서도 거룩한 정서가 있고 세속적인 정서가 있듯이, 속된 정서가 있고 구별된 정서가 있듯이 열심도 속된 열심, 육적인 열심이 있고 영적인 열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은 게으른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가 그래서 신학교에서 이야기했습니다. “하루에 6시간 이상 자면 회개해야 된다.” 그러고도 어떻게 기도가 나오겠는가? 물론 몸이 아프면 예외입니다. 6시간이 아니라 600시간도 잘 수 있고, 아주 심하면 아예 죽어버리지 않습니까? 푹 자지 않습니까? 우리 할아버지는 벌써 35년 전에 주무셔서 아직도 안 일어나시는데 말입니다. 몸이 아프면 예외에요.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 몸의 특질을 벗어나기 어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내가 거기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아는 어떤 사람 하나는 몸에 과로가 오면 심장에 이상이 옵니다. 말도 큰 소리로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꼭 스피커를 들고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그런 사람들은 조심하면서 사는 게 주의 일입니다. 비실비실 살면서라도 주님을 섬기다 죽어야지 막 죽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정상적이면서 매일 늦게 자는 사람치고 신령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속된 것과 게으른 것, 타락과 불경건, 게으름, 이것은 친척입니다. 같은 집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을 보십시오. 모두 부지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목표 의식에 불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목표 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직장에서 돈 주는 것이 아깝습니다. 돈을 줄 테니까 차라리 안 나왔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목표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여러분, 학생들에게 제가 이야기합니다. 하루에 6시간 이상씩 자고 시간이 없어서 못했다. 그것은 진정한 소명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게으름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고 어떻게 간절한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그렇게 간절한 기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게으르게 살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간절한 기도는 소리소리 지르는 것이 간절한 기도가 아닙니다. 운다고 해서 간절한 기도는 아닙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견딜 수 없다는 절박함이 사로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안도와주시면 어떻하나.’ 하는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모든 것을 주께 맡기오니.” 하고 퍼 자요? 그걸 우리는 또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주께 맡긴다는 말을 사람들 대부분이 포기한다는 말과 같이 쓰는데 포기하는 게 아닙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디서 그러셨어요? 십자가에 달려서 물과 피를 다 흘리고 그리고 이제는 기력이 하나도 없어서 더 이상 자기의 힘으로 버틸 수 없을 그 때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나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것도 불가능한데 마지막에 물과 피를 쏟고 힘을 다 쏟고 소진 했을때 “내 영혼을 받으소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태만과 나태는 무지의 친구고 무지와 나태는 불경건과 이웃입니다. 서로 말을 왔다갔다하면서 사는 사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중에 한 놈만 들어오면 나머지를 달고 들어오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그런 게으름과 나태가 있는 사람들이 하루를 그렇게 살고 전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하루가 아니었는데 무슨 새벽에 나오고 무슨 밤에 나와서 그런 간절한 기도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나올 수는 있습니다. 나와서 졸다가 자다가 마시다 또 율동도 하고 노래도 하고, 그렇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는 기도만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통곡과 눈물의 삶이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삼일 되던 날 무덤 앞에 섰을 때 예수님은 “내가 살린다” 그런데 믿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막 우셨습니다.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보시고 안타까워 하시는 것입니다. 삶이 게으르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 구석구석에 기도의 영이 배어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기껏해야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핑계하기는 늘 기도한다고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사람 안 됩니다. 그것은 기도의 최고 수준입니다. 성경을 자꾸 고생시키면 안 됩니다. 삶 자체가 기도 속에 완전히 배어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이 붙어있는 한 그 기도의 영이 삶의 구석구석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하나님!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 주일날 집에 갑니다. 그리고 “수요일에 만납시다” 하고 수요일에 만나고, “주님,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갔다 오고 “안녕하셨습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문안인사 하는 식입니다. 이런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어떤 열심을 가지고 있든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열심 하나만 있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간절하고 뜨거운 기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치고 삶이 간절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뜨거운데 골수에 미치는 뜨거움이 있는데 눈만 껌벅껌벅하고 살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디가면 좋은 소식이 있을까? 삶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으로 가득 차 있는 삶이었기 때문에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밤을 기도 시간으로 택하시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과를 포기하시고 기도하신 것은 40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내가 기도해야겠다’고 일과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기도원에 들어가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그런 기도의 삶 속에서 그런 기도의 세계를 구현해 가고 계시니까 말하자면 이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매일 한 학기동안 놀고 그저 사는 건지 만 건지 그러다가 방학 때 기도원에 한 주 올라간다고 해서 무슨 가불 외상값 갚듯이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삶이 진해야 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피리를 불어도 도무지 춤추지 않고 가슴을 쳐도 애곡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동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늘 깊은 잠에 쩔어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다가 누가 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은혜를 받으면 부시시 하고 깨어나는데 그 다음에는 더 깊이 잠듭니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한없이 자는 것입니다. 발로 차도 간신히 일어나는가 했는데 다시 쓰러져 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삶이 그렇습니다. 부지런하게 살면 뭐합니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모든 삶은 분량이 크면 클수록 죄만 늘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밤이 맟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낮에는 뭐하셨어요? 밤 기도를 위해서 푹 주무시고 나오셨어요? 그것은 아닙니다. 하루를 사시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철야기도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최고의 희생입니다. 아침부터 철야기도 대비하면서 6시까지 자고 나오는 것은 철야기도가 아닙니다. 내일 금식할 것 생각해서 오늘 세 배 네 배 먹고 소화제 먹는 것, 이런 것들은 금식기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든 삶을 다 살면서 그것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나와서 다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 이런 게 희생입니다. 산에 올라가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밤이 맟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밤이 맟도록 기도하셨다는 것은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철야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밤에 기도하시러 산에 가셨고 기도하시면서 밤을 마치셨습니다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언젠가 철야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아직 안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 눈앞에 보이는 철야기도를 반복할까봐 겁이 나서 안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기도하고 싶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실 때 그것은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철야기도라고 모였는데 가면 커피 한 시간 마시고 율동 한 시간 하고 교제 한 시간 하고 설교 한 시간 듣고 그러고 나니까 새벽 네 시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그 밤에 순수하게 기도하기 위해서 그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추측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열 두 사도를 세우는 문제였습니다. 왜? 내려오셔서 열 두 사도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매일 철야기도를 하신 것은 아닌데 이때 해야 하셨습니다. 분명한 목적과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으니까 오신 것입니다. 우리교회에는 아직 없는데 교회에 보면 괜히 교회에 와서 개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집 놔두고 괜히 교회 와서 누웠다 앉았다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성경을 읽으려면 집에서 읽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명한 목적의식이 없이 밤을 새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제자들을 사도로 부르시는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밤을 기도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럴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육체적인 힘이나 이런 것에 있어서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되는 어떤 특이한 체질을 지니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그렇지요? 점심 먹고 졸립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러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실 만한 간절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 분의 기도의 세계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사도들을 세워서 하나님의 복음이 그리고 잃은 양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구원하는 구원의 사역이 모든 동리에 퍼지기를 원하는 간절한 열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시고 산에 올라가셔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어떻게 보면 이상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불러다 놓고 누구를 시킬까 하고 하루 아침에 뽑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초창기부터 쫓아다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눈에 뻔하고 누구를 세울지 다 아실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체적으로 누구를 하나님의 사도로 세워야 할지를 하나님께 묻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셔서 밤이 맟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고 하나님은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사역의 원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해 나가거나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자꾸 회의하지 말고 떠들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최선의 것을 선택하게 하십니다. 회의는 차선입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인도받는 단 한 사람의 선택은 육신의 생각에 의해서 인도받는 일만 사람의 선택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그렇지요?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사람이 바로 다수지 수적인 우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수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도 그 다음날 와서 “내가 너희를 사도로 세운다”고 하시기 전까지 누구한테도 말을 안 하셨습니다. 그리고 홀로 산에 올라가서 간절히 기도하시면서 평소에 의중에 있던 사람들의 명단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주님. 얘는 어떻습니까? 얘 성격이 조금 급하긴 하지만 어떻습니까?”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그 밤에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응답해 주셨어요? 무엇을 보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분명히, 심지어는 여기에 하나님이 간섭하셨다는 사실을 누구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가롯 유다가 들어간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제자를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아서 사도로 세우셔야 되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산에서 내려오실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요? 내가 사도로 세우는데 이 놈이 나를 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최선의 선택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룰 수 있는 구체적인 장치까지 사람들 속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내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산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런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응답해 주셨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기도하러 올라가기 전에 살았던 삶과 그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이 일치한 것입니다. 그 전날도 무엇을 하면서 사셨겠습니까? “이제 다른 동네로 가자. 내가 그 곳에서도 전도하여야 하리라. 그리고 너희는 차라리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병자를 고치고 구원하고 그리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회개시켜서 아버지께로 불러오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루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온 몸을 다 드려서 힘에 지나도록 일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한 다음에 그 날 밤에 가지고 올라오신 기도 제목도 바로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루 동안에 고민하던 그 문제를 그대로 가지고 올라와서 그 고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았던 삶과 기도의 제목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자기의 육신만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없이 살다가 밤에 거룩한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나아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낮에는 하나님을 새카맣게 잊어버리다가 밤이 되니까 하나님을 찾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밤에는 거룩한 기도를 하고 낮에는 속된 삶을 살아가는 이런 삶을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능력이 안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백 번을 전도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한 번 나와서 복음을 전하면서 핍박을 받아서 우리 전도사님처럼 개한테도 물려보고 그리고 아파트 경비원에게도 쫓겨나 보고 하는 그것이 아무것도 안하면서 백 번 기도하는 것보다 나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그날 저녁에 한 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복음을 듣지 않는 현실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영적인 전쟁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뭐지요? 자신이 전쟁을 안 하니까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총탄이 막 날아다니고 옆에서 동료들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거꾸러져야지만 그것은 전쟁인가 합니다. 6.25 날 때 대전까지 밀려와서 사람들이 끌려가고 죽는 상황이 일어났는데 부산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댄스홀에서 음악 틀어놓고 춤췄습니다. 그리고 부산 앞바다에는 배가 둥실둥실 떠 있었습니다. 여차하면 그것타고 제주도로 튀고 제주도가 안 되면 일본으로 튀겠다는 것입니다.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삶을 기도와 일치시키도록 노력을 하십시오. 그때에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영혼을 위해서 기도한다. 영혼을 위해서 아무것도 안하는데 그 기도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런 기도는 어떤 의미에서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 저 아이를 도와주시옵소서.’ 삶 자체가 영혼을 세우고 그 영혼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는데 그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아무것도 안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삶이 거기에 관심이 안 갑니다. 삶 자체가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딴 데 가 있습니다. 콩밭에 가 있습니다. 비둘기가 콩밭에 가 있는데 날아다니는 일에 대해서 기도하면 그것은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진짜 영혼을 위해서 심방을 하거나 복음을 전할 때, 아니면 안 나오는 영혼을 찾아가서 그들을 권하고 그리고 함께 교제하고 권면할 때 그때 기도가 가슴에 와 닿고 피부에 와 닿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삶과 기도가 분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 일주일에 두 번 금식기 도하는 사람 있으면 한번 손 들어보십시오. 없습니다. 그것도 일이 년이 아니라 삼십 년 사십 년 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열심을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절대로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삶이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가 삶을 보상해 줄 수 있습니까? 그럼 태도가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보상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은 바로 무엇이냐 하면 뼈가 가득한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밤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까? 올라와서 하는 기도 제목이 바로 한 낮에 간절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며 수고하며 사셨던 그 삶의 고민을 그대로 반영하는 기도였습니다. 그 고민이 그 기도 속에 그대로 녹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찬양)
만왕의 왕 그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같은 나위해 그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주 십자가 못 박힘은 속죄함 아닌가 그 긍휼함과 큰 은혜 말할 수 없도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같을 수 없네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삶이 기도와 일치해야지만 응답이 있고 그 다음에 그 기도가 힘이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노는 사람들은 노는 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간절해질지도 모릅니다. 자기의 삶과 기도가 일치되지 아니하고 분리되어 버리면 그것이 결국에는 외식하는 기도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왜 그렇게 열심히 사느냐고 묻거든 기도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왜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느냐고 물으면 살기 위해서 기도한다고 대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순환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밤에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왜? 그분의 하루의 삶과 그분의 기도가 일직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같은 선상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입니까? 저는 새벽기도를 지금부터 한 십여 년 전에 매일 나가면서도 거의 한 달 가까이 전혀 기도하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이유를 나도 몰랐습니다. 문제는 삶 속에서 기도제목이 발견되는 것이지 머리속에서 발견되는 기도제목은 의미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러니까 ‘복음 전파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대부분의 교회가 그 문제에 대해서 기도하는 것이 약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자기가 삶으로 복음 전파를 위해서 기여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복음 전파를 위해서 잘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펴 놓고 어느 나라가 인구는 몇 명이고, 그것을 보고 기도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얼마나 간절한 기도가 되겠습니까? 삶 자체가 복음 전파를 향하여 불타면 그 사람의 기도가 그 문제에 대해서 간절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런 삶을 살지 않는데 그런 기도를 아주 뼈 속 깊이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둘 중에 하나가 거짓말입니다. 기도가 거짓말이든지 삶이 거짓말이든지. 그것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삶과 기도를 어떻게 볼 수 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히브리서 5장에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는 것은 바로 삶 자체가 통곡과 눈물로 얼룩진 삶을 사시니까 그런 기도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또 어때요? 그런 기도를 하시니까 그 삶을 그렇게 이어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이것이 신앙의 세계라고 하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한 이틀에 한 번은 전화가 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오류가 뭐냐 하면 어떤 하나를 조금 고치고 싶어 합니다. 예를 들면 설교를 잘 하고 싶다든지 아니면 유능해지고 싶다든지 아니면 교사 생활을 잘 하고 싶다든지. 그런 식의 부속품 갈아 끼우는 식의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총체적으로 변해야 변하는 거지 총체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우리 교회에 있는 조그만 봉고차 있지요? 그것은 아무래도 쿠션이 불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그렌저 바퀴를 끼우면 차가 편해질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될 게 아닙니다. 정말로 편하게 다니고 싶으면 큰 차로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생활도 총체적인 변화가 와야 변화가 오는 것이지 뭐 하나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저는 몇 주 동안 계속 기도에 대해서 설교를 해왔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기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데 간절히 기도가 안 됩니다. 간절히 살지 않는데 어떻게 간절히 기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절박한 기도가 하고 싶습니까? 절박하게 살아 보십시오. 절박한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태만하게 사니까 태만한 기도밖에 안 나오는 것입니다. 응답이 별로 필요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번 전쟁에서 이길 것이냐 질 것이냐? 뒤집힐 것이냐 뒤집어 엎을 것이냐? 이런 기로에 선 긴장 속에서 살아야 절박한 기도가 나오고 간절한 기도가 나오는 것이지 삶이 그런 것들이 없는 삶을 사는데 무슨 절박한 기도가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가 없으니까 삶도 그것을 넘어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에 물탄 것 같이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학교 가 봐도 꼭 그렇습니다. 교회 축소판입니다. 복사판입니다. 교회 와서 설교하면, 우리 교회에는 별로 없지만, 뭐가 움직이는지 뭐가 돌아가는지 급한 게 없습니다. 그리고 타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냥 물 같은 것입니다. 평안한 것입니다. 거짓 평화입니다. 학교에서도 그런 사람들 보면 영적인 상태가 순수하지 않습니다. 맑은 물같이 솟아나는 영적인 샘물을 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주 부지런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느 학생이 와서 “교수님. 제가 개척교회를 하는데 이번에 등록금을 못 냅니다.” 하는데 너무 불쌍합니다. ‘교인 서너 명 모이면서 등록금도 못 내고 어떻게 하나. 장학금을 주자.’ 하고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주려고 성적표를 갖고 오라고 하니까 세 개가 F입니다. 제가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냥 줄 그어버렸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눈빛이 마음에 안 듭니다. 몇 점 이상 맞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얼마나 불성실하게 살았으면 열 과목 중에 세 과목이 F가 나왔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슨 소명감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열심히 살려고 애를 쓰고 몸부림치는데 교인이 세 명밖에 안 모인다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리고 그렇게밖에 안 모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난번에 제주도에 갔는데 거기는 100명이 모이면 큰 교회입니다. 제가 그래서 처음에 시험에 들었습니다. 교인이 70명밖에 안 모이는데 목사님이 소나타Ⅱ를 타고 다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렇습니까?” 하니까 거기는 100명이 모이면 큰 교회랍니다. 서울의 1000명 교회와 맞먹는 것이라고 합니다. 새로 전도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주도 본토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은 정말로 하늘이 갈라지는 기적입니다. 그것은 씨족으로부터 탈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사람들은 시집갈 때 보자기에 뱀을 싸가지고 시집을 간다고 합니다. 그렇게 민심이 유행하는 동네에서 사람들이 물이 기름에서 돌듯이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빙빙 돌면서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얼마 안 됩니다. 3만인가 얼마 됩니다. 그러니까 100명이 모이면 대단히 많이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통 부락 전체를 털어도 예수 믿을만한 사람이 열댓 명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수지가 안 맞는다고 해서 교회가 없으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고난을 받는 거야 정말 우리가 못가니까 안타깝고 도울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F가 세 개인 학생은 사정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불쌍히 여기던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주석가가 말합니다. 하늘 문을 잠그고 열쇠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창고를 자기 마음대로 열어서 그래서 마치 자기 창고처럼 썼던 대표적인 사람이 죠지뮬러였습니다. 5만 2천 번의 기도를 했고 5만 2천 번 다 응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몇 가지 응답을 못 받은 것은 죽은 다음에 응답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응답을 마치 자기의 특허품인 것처럼 응답을 받으며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 주위에 보면 ‘이상하게 저 사람 기도는 잘 들어주는 것 같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삶이 달라야 합니다. 죠지 뮬러가 5만 2천 번의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했지만 그 중에 몇 번이나 자기 육신을 위해서 기도했겠습니까? 재미있는 일화가 있지 않습니까? “목사님, 우유가 없습니다.” 했더니 “있다” 아이들을 불러놓고 빈 컵을 갖다놓고 “기도하자” 기도가 끝나니까 “딩동”하고 울리면서 우유차가 들어왔습니다. 기적의 연속 속에서 그는 수백 명의 고아들을 돌보면서 평생 살았습니다. 왜? 삶이 다르니까 하나님의 응답이 다른 것입니다. 목마르게 자기의 삶으로 하나님을 찾고 애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응답해 주시지 않으면 누구에게 응답해 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기도는 전부 다 하늘에 올라가기는커녕 중간에서 부러진 화살처럼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라간 기도도 대부분은 천국에서 어느 목사님 말처럼 쓰레기 우편물 취급을 당해서 쓰레기처럼 뒹굴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삶이 하나님 앞에 고정되고 삶으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의 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움직이는 위대함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진 모든 능력과 응답을 마치 자기의 소유물인 것처럼 사용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위탁을 받은 것처럼 천국의 모든 좋은 것들을 한 손에 넣고 움직이면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주님이 주신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열망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은 하늘을 위해서 살고 위엣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위엣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마음껏 사용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밤에 주무시지도 않고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실 때 그 기도제목은 삶이 없는 기도제목이 아니라 진한 삶으로 기도해 오던 하룻 동안의 그 삶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살아갈 때에 고민과 하나님 앞에 응답을 기다리는 기도가 동일했습니다. 저는 지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생각이 ‘설교자를 깨운다’는 책 쓰는 일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글을 쓸 때는 하늘에 올라간 것 같고 쓰고 내려오면 땅에 내려온 것 같고 눈만 감으면 그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삶이 그 쪽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결론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국화꽃을 피우려고 재주를 부리고 배우는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결론은 ‘하나님을 추구하라, 목마른 사슴처럼 하나님 자체를 추구하라. 그것이 너무 힘겹게 느껴지거들랑 그만둬라’ 그러니까 어느 한 부분이 아닙니다. 삶 전체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그 삶이 기도의 제목과 교류할 때 그 때 기도가 힘이 있고 위대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입니까? 주일학교도 마찬가지고 중고등부도 마찬가지고 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을 전심으로 섬기는 사람의 한 마디의 간절한 기도는 섬기지 않고 희생하지 않는 사람의 수만 마디의 말보다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많은 말을 하는 설교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은혜로 담금질된 설교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듯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는 수많은 단어나 말의 나열이 아니라 문법의 나열이 아니라 삶이 진하게 배어있는 말입니다. 기도와 삶이 분리되지 않은 간절한 부르짖음이습니다. 삶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살지 않는 사람이 “주님! 만나 주시옵소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속지만 하나님이 속으시겠습니까? 삶 전체로 하나님을 만나고 추구하기를 원하는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그 기도가 힘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산에 올라가서 간절히 기도하신 제목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런 고민을 그대로 반영한 기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기도 제목이 간절하면 육신이 어느 정도 피곤해도 이길 수 있습니다. 왜? 집중하면 간절하고 새롭게 되니까. 저는 글을 쓰면서 그런 것을 많이 느낍니다. 이틀을 거의 잠을 못 잤는데도 글을 써 내려갈 때 마치 숲 속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너무 피곤하다가도 글을 쓰면 가슴 속에서 뜨거운 눈물 같은 것이 흘러요. ‘그래, 내가 이렇게 살아야지’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도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절박하게 살지 않으니까 절박한 기도제목이 없고 절박한 기도제목이 없으니까 기도가 너무 힘든 것입니다. 삶을 변화시키십시오. 바꾸십시오. 그리고 기도 제목에 합당한 삶을 여러분들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루 종일 병자를 고치고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알지 못하는 목자 잃은 양과 같이 고생하는 영혼들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그리고 그 지친 몸으로 오늘 산을 오르시는 그 뒷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 밤에 주님께서 간절히 사도들을 세우시는 문제와 복음을 전파하는 문제에 대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신앙생활의 모든 피곤함은 자기를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의 모든 피곤함은 자기를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모두 버린 사람들에게는 갈등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온전히 다 버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고민만이 그를 번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민 속에서 소쩍새는 울고 국화꽃을 피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이처럼 필요할 때에 환경에 매이지 않고 기도의 삶을 사셨습니다. 환경에 매이지 않고 환경에 핑계대지 아니하고 특별한 때에는 환경보다는 그 특별히 이루어져야 할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응답을 받으셨습니다.
새벽에 내려오셨습니다. 못 주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빛나셨습니다. “너, 너, 너, 너, 마지막 너. 이상 열두 명이다.” 그렇게 세우셨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을 버리며 간절히 기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간절한 기도 속에서 분별력을 주셨습니다. 놀라운 신적인 분별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특별히 기도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말하자면 꿋꿋함이 있습니다. “예수님, 개는요 성격이 너무 급해요” “그래?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니?” “걔는 안 되요” 그러니까 저쪽에서 “아닙니다. 밀어주세요.” “그럼 어떡할까? 우리 위원회를 만들까?” 하며 우왕좌왕하지 않으셨습니다. 내려오셔서 사람들이 다 모였을 때 그리고 제자들이 다 모였을 때 - 이 사람들 말고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Full Time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 많았습니다. - “너, 너, 너, . , 열 둘, 끝” 이렇게 세워진 열두 명이 사도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롯 유다를 보면서 ‘냄새가 나는데’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야비한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셨을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신적인 분별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담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을 때 우왕좌왕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기도를 안 하니까 그렇습니다. 평소에는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냥 먹고 사니까.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기로에 놓였을 때 분별력이 없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라 다 사연이 있는 것입니다. 소쩍새가 운 게 아니라 오랫동안 잤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시간에 와서는 우왕좌왕하다가 목회자 말이라도 들으면 그래도 B 학점이나 받지. 그런데 그럴 때는 또 용감해 진다고 계속 고민하다가 훈수 두면 용감해져서 “이거다” 하고 발을 쑥 집어넣는데 애처롭게도 허탕입니다.
여러분, 이런 어리석은 삶이 우리에게 되풀이 되서야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분별력을 주셨습니다. 그 밤에 간절히 기도할 대 분별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일군을 세우게 만드셨고 복음 전파에 박차를 가하게 만드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움을 받고 잃어버린 이스라엘에게 그 영혼들에게로 찾아가서 복음을 전파할 때 말하자면 귀신이 내어 쫓기고 병든자가 고침을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위대한 역사를 하나님께서 이루실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사건이 여기에 이렇게 밖에 안 나오지만 마태복음에 보면 이 사람들을 부르셔서 그 다음에 무엇을 주시는가 하면 사도라 칭하기 전에 병을 고치는 권세와 귀신을 내어 쫓는 능력을 이들에게 주셨습니다. 모든 병을 고치고 그리고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밤이 맟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나오신 후에. 그 놀라운 영적인 권세를 가지고 와서 제자들에게 나눠준 것입니다. 그런 권능을 주신 것입니다. 역사할 수 있도록 그렇게 영적인 지도력을 아울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난 사람들의 표증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삶이 간절하지 않으니까 기도가 간절하지 않고 기도가 간절하지 않으니까 응답이 애매모호하고 응답이 애매모호하니까 분별력도 마찬가지이고 진전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의 기도를 해도 조금 간절히 하나님 앞에 드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런 기도할 만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가슴에 후벼 들어오는 기도 제목이 없다면 삶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너희는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기도하라. 의를 구하라” 또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제목은 일상적인 기도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먹고 입고 쓰고 자는 그 문제를 넘어서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일상적인 기도를 넘어서는 삶을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허비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기도 세계에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된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우리는 원했던 것도 아니지만 우리 자신이 변화되는 모습을 발견하고 변화된 기도 속에서 자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6. 기도의 능력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 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수 10:12-14 )
기도 I (1995.4.2 주일오후 6)
오늘도 라디오에서 들으니까 어느 교회인지 설교가 나옵니다. 설교를 늘 하는 사람으로서 설교를 들을 때 강단 아래에서 듣는 그 느낌은 전할 때 하는 느낌과 다른 것도 있지만 같은 것도 많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확실히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마음과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매우 중시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의 삶을 붙들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힌 가운데 살아가는 그 말할 수 없는 즐거운 영적이 삶, 이런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너무나 알지 못하거나 혹은 알아도 피상적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왜 일어나는고 하니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깨달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저는 여러 해 전에, 한 이 삼년 전에 서울의 어느 잘 알려진 교회의 청년부인가 대학부에를 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설교시간에 “아멘”하는 것 있지 않습니까? 나는 아주 혐오하고 또 한편으로는 아주 좋아합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한 번 학교 채플실에서 설교를 하는데 한 문장 끝날 적마다 “아멘”이 나오는 것입니다. 다 모아보면 ‘아멘’ 소리가 설교 소리보다 더 길게 생겼습니다. 이것이 무슨 은혜가 될 때, 설교자는 직감적으로 알지 않습니까? 이 아멘이 여기서 나오는 소리인지 영혼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아멘인지 알지 않습니까? “여러분, 제가 오늘 성경을 폈습니다.” “아멘” 뭐를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제가 “제발 아멘 좀 하지마세요.” 라고 그랬습니다. 아멘 하고 싶으면 다 모아놨다가 한꺼번에 도매급으로 끝날 때 열 번 하든지 백 번 하든지 맨 마지막에 혼자 하라고 했더니 그것을 들으면서 또 “아멘” 그렇습니다. 그런 아멘은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잠깨기 위해서 아멘 하는 것 같아서 싫습니다. 어쨌든 그 집회는 기상천외의 집회였습니다. 내 몸이 찢어지는 것 같이 힘든 상상하기 싫은 집회였습니다. 설교를 안 듣습니다. 안 듣는 설교를 왜 그곳까지 불러서 설교하라고 하는지 나는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런데 이틀째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자매 하나가 있는데 그 교회는 원래 ‘아멘’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통성기도도 없고 아멘도 없고 박수도 없는 교회입니다. 성경을 막 풀어 나가는데 세 시간을 설교를 했습니다. 처음부터 고성으로 시작해서 악을 쓰면서 세 시간을 나갔는데 자매 하나가 앞자리에 앉았는데 막 무너지는데 떨면서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그 속의 불이 시킨 것입니다. 그 자매가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설교자도 안보이고 나도 안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설교를 해나가는데 눈물을 흘리고 온 몸을 덜덜덜 떨면서 “아멘” “아멘” 하는데 내가 흉내를 못 내겠습니다. 그 때 내 마음에 확 다가왔던 그림이 뭐냐 하면 장마철에 물에 빠져서 막 허우적 거리다가 무엇을 잡는 몸부림.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대부분의 사람들의 말씀을 하거나 듣는 태도가 뭐냐 하면 전문가의 견해를 자기의 삶에 참고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아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지식이 바로 바울이 우리에게 이야기했던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느니라” 아주 찬란한 기독교의 진리도 그 사람을 교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진리 그 자체를 아는 방식이 잘못되면, 그 지식의 내용이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 지식을 습득하는 방식이 잘못되면 그는 자기의 영혼에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나는 꽤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막 통곡을 하며 우는 것도 아니고 비 오듯 눈물을 쏟으면서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떨면서 “아멘”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듣는 것입니다. 구약을 누벼보면 어디에서나 나오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들으라” “들으라” 그런데 요즘 세대에는 듣는 것 보다 말하고 싶어서 아주 안달복달 합니다. 그러니까 신학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하나님은 말하고 너희는 듣고 하는 이 관계가 계속 잘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항상 충만한 은혜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들을 사람들이 못하는 것입니다. 단지 안 듣게 되면 몰라도 안 듣는 관계 속에서 다른 것들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설교자는 설교하는 일에 면역이 되는 것,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게는 설교 듣는 것이 면역이 되는 것, 이것이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전심으로 마음을 기울이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가르쳐 주시는 은혜와 지식에 따라서 살아야겠다는 절박한 소망을 가지고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속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고 오니까 그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모든 요소들은 이렇게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기도와 삶이 분리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왔습니다만, 오늘도 그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것과 삶도 분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야 똑바로 살다가 와야지만 그 말씀의 능력을 알게 됩니다.
오늘 왜 이 말씀을 드리는고 하니, 오늘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여호수아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읽어드린 이 본문은 이미 요단강을 건너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밀듯이 가나안 땅을 점령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모세가 카리스마적인 통치력을 가지고 있고 또 Leadership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게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는 못 건너가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안수해서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삼아서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세는 율법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인도는 가나안 거기까지입니다. 율법의 인도는 구약시대까지입니다. 여호수아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거기까지 인도하고 마지막 구원까지 성취하지 못한 것을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 같습니다. 이름도 같지요? 예수-여호수아. 그 여호수아에 의해서 새로운 가나안 땅을 정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언약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렇게 정복을 해 나가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아모리 족속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너희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거기에 있는 모든 족속들을 다 진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명령에 완전히 순종을 못했기 때문에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명령을 듣고 아모리 사람을 치기 위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놈들이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자꾸 해가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어두워지면 추격할 수가 없습니다. 어딘가 산지에 가서 숨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막 공격을 해 가는데 계속해서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그 유명한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치고는 조금 이상하지요?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물러라” 태양이 지면서 달이 떠오르니까 태양도 멈추고 달도 같이 멈춰야지, 그렇지 않아요? “태양아, 너는 거기에 멈추어라. 달아, 너도 거기에 가만히 있어라” 그렇게 명령을 하니까 즉시로 그 여호수아의 말에 순종해서 해가 멎고 달도 그 자리에 정지한 사건입니다. 나는 과학을 모르니까 이런 것을 과학으로 푸는 것에 대해서 별로 흥미도 없지만, 언젠가 잡지에 보니까 과학자들이 지구의 자전한 것을 컴퓨터에 집어넣었는데 열 한 시간 사십 분인가가 모자라더란 것입니다. 시간이 실종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대답을 성서학자들에게 듣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온 시간하고 히스기야 때 해 그림자가 십도 뒤로 물러간 시간을 계산하니까 실종된 시간하고 딱 맞아 떨어지더란 말입니다.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하여간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태양이 멎고 달이 멈추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것을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기도가 되려면 이렇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 태양을 멈추게 해 주시옵소서” 그런 게 기도 아닙니까? 그런데 그냥 명령하는 것입니다. “태양아, 거기 서라. 달아, 너도 거기에 가만히 있어라” 이것을 오늘 성경을 여호와께 고한 기도였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이 사람만 이런 줄 알았더니 뒤로 넘어가 보니까 사도 바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귀신이 들린 이 자매를 고쳐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귀신아! 그 아이에게서 나와라” 하니 나왔습니다. “하나님!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시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그래야지만 기도라고 할 수 있는데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렇지요? 예수님만 그런 줄 알았더니, 뒤로 넘어가니까 바울도 같습니다. 병든 자를 고칠 때 명령해서 고치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자를 고칠 때 명령을 해서 고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보기에는 아주 높은 수준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뭐냐 하면 영적인 면에서 보면 이것은 싸움이 아니라 명령하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사도바울이나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악령의 세력들과 싸웠다고 말하기에는 그 삶이 너무나 당당했습니다. 싸운다는 것은 무언가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인데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나와라” 사망이 붙들어서 이미 죽어서 냄새가 나게 하는 그런 사람을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향해서 명령하고 사망을 향해서 명령하고 귀신을 향해서 명령하고 환경을 향해서 명령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에요. 풍랑이 이는 바다를 향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주님! 이 풍랑을 잠잠케 해 주시옵소서”하지 않고 “바다야! 잠잠하라” 하니까 잠잠해 졌지 않습니까? 이것도 기도라는 사실을 오늘 알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여호수아가 길지도 않은 이 짧은 기도로 하늘을 운행하는 이 해를 멈추고 떠오르는 달을 정지시킬 수 있으리만치 그렇게 위대한 기도의 세계와 능력을 갖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오늘 우리들이 한 번 검토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겉으로 드러난 하나의 아름다운 결과에 대해서만 주목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요? 언제든지 좋게 보는 것 하나를 주목하면서 그 결과를 보고 우리는 그 결과에 대해서 부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소쩍새 우는 이야기 했지요? 사람들이 보니까 가을에 국화가 이슬을 머금고 함초롱하게 멋있게 흐드러지게 핀 것입니다. “야. 국화가 멋있다. 어떻게 하면 국화가 저렇게 필까? 나도 한 번 저렇게 돼 봤으면” 그렇지만 봄부터 소쩍새가 울다가 피토하고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국화꽃이 하나 피어난 것입니다. 오늘 이 “태양아, 달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모리 족속을 쳐부수기 위해서 공격을 할 때 시간이 모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기도한 사람은 이 사람 하나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그렇습니다. 아파서 병석에 누웠습니다. 나중에 저를 만나서 하는 말이 참 이상합니다. 목사님이 아파서 병석에 누워있으니까 친구 목사님들이 많이 와서 문병을 하는데 아무도 와서 기도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대장간에 쓸 칼이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함정이라고 할까요? 허구를 신앙생활에 있어서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베드로가 옥에 갇혔습니다. 온 교회가 모여서 통성기도와 철야기도를 하면서 “주님! 우리 베드로를 살려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진짜 천사가 옥문을 열어줘 가지고 베드로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두들기면서 “나 왔다. 문열어.” 하니까 사람들이 “너 헛소리 들었구나.” 계집아이가 와서 베드로가 왔다고 하니까 “네가 잘못 봤겠지.” “우리 계속 기도하자.”이것이 신앙생활의 허구입니다. 이런 허구들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의 신앙생활이 허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그렇게 간구하는 정도가 아니라 명령하면 그것이 서리라고 하는 그러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기도 속에 그런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결국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지도자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우선 성경구절 하나를 찾아봅시다. 출애굽기입니다. 33장 17절부터 제가 읽겠습니다.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다 진 밖의 회막으로 나아가며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서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경배하며 사람이 그 친구를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이 이야기는 언젠가 우리가 한 번 들은 기억도 있지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난 너희들하고 같이 안 간다. 가나안은 주겠다만.” 하나님의 심정을 무엇입니까? “잘 먹고 잘 살아라” “다 가져라, 그리고 나는 너희들과 상종 안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야흐로 이스라엘과 맺은 결혼을 취소하고 이혼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이 팍 든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가나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면서 사람들이 막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할 때는 다같이 동참해도 그 회개가 궁극적으로 그렇게 자기들이 처한 삶의 개선에 이어지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동안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회개할 때 즉시 회개에 대해서 응답해 주실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많은 경우에도 회개를 해도 용서를 받고 회복될 때까지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까? 여호수아가 진 밖에 회막을 쳐 놓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가서 하나님에 간절히 기도하라고 그렇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와서 기도한 것입니다. 분명히 소수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모세도 와서 거기서 기도했습니다. 신령한 기도를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돌아가지 않고 회막에 남아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여호수아입니다. 회막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장기두면서 사람들을 기다렸어요? 아닙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지도자를 만드시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오랜 동안의 세월이 걸리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가 한 번은 학교에 찾아왔습니다. “제가 신학을 하려고 합니다.” “나이가 몇 살이냐?” 스물여덟인가 아홉이라던가. 제가 그랬습니다. 신학을 먼저 하지 말고 신앙생활을 잘 해라. 교역자가 되는 것은 1년만에 될 수도 있습니다. 아주 쉽습니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신학교 들어가서 1학년 때 전도사 되면 1년, 1년은 무슨 1년입니까? 요즘은 학적부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설교하겠다고 강단으로 뛰어 올라가는 세상이니까. 그것은 그야말로 1년이 아니고 한 달만 있어도 되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런데 뭐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학교 입학시험을 보는데 “어떻게 해서 신학교 오게 되었습니까?” 하는 말이 “교수님,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우리 집사람이 다 압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럼 집사람을 보내시지 왜 선생님이 오셨습니까?” 그런 사람이 지금 벌써 다 목사가 됐습니다. 교회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뭐에요? 심각하게 느끼는 것은 이러한 뼈를 깎는 것 같은 깊은 고뇌와 영적인 단련의 기간이 너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없으니까 사람들이 가볍고 가벼우니까 기도가 가벼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가볍고 피상적이니까 본질적인 이야기는 언제나 가슴에 와 닿지 않고 자기처럼 가볍고 피상적인 이야기가 입맛에 맞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상적인 본성이 피상적인 삶을 부채질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상적인 설교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현실도 피상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유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호수아가 한 번의 기도로, 모세와 같지는 않지만 한 번의 기도를 가지고 그렇게 위대한 역사를 불러일으키고 태양을 멈추고 떠오르는 달을 정지시킬 수 있는 그런 놀라운 기도의 능력을 소유하고 싶다고 하는 것도 탐심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모세가 그러한 놀라운 기도의 능력을 갖기까지 그는 오랜 시간동안 기도 속에서 다져진 것입니다. 깊이 다져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기도를 안 하면 오늘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면서 살기에 역부족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살아가는 삶을 힘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보약과 같은 효과도 있습니다. 기도 속에서 서서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능력과 기도하면서 사태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의 저력이 서서히 쌓아져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모세가 살아있을 때 그 곁에서 거의 바보 비슷하게 생활을 했습니다. 누가 여호수아에게 주목했겠습니까? 모세가 마지막으로 이 여호수아에게 바톤을 넘겨주고 죽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야말로 대들보가 무너지는 것 같이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모세가 마지막 죽기 전에 다 죽어가는 기력없는 모습으로 여호수아에게 안수하는 것입니다. 그때 여호와의 지혜의 신이 여호수아에게 충만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만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된 모습이 오늘 여기에 나타난 것입니다. 모세와 함께 해 주셨던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시대에 거의 동일하게 함께 해 주신다는 놀라운 증거들을 속속히 보내주신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정벌을 하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모세라는 인물을 잃었지만 가나안 땅을 정복해 가는 그 모든 과정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게 자기의 사역을 감당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왜? 준비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안됐지만, 제가 김승기 전도사님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것입니다. 친구들은 다 목사가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축도해 줄 사람도 없는데 빨리 안수를 받고 축도를 조금 하시오.” 그러니까 “그럼 제가 축도 목사입니까?”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근본적으로 이렇게 겉에 보이고 외관에 보이는 것들이 우리를 완성해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 속에 하나의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들을 혹은 남이 갖지 않은 어떠한 놀라운 사역의 비결들,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 밑에는 말하자면 한없이 고통스러운 - 여호수아도 사람이었습니다. 다 진으로 돌아가서 낮에는 열심히 기도했을지라도 밤에는 밥 먹고 자고 TV도 보고 가족들과 신문도 보고. 누가 싫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세는 모든 사람이 다 돌아간 다음에 외로움과 싸우면서 하나님 앞에서 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위기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입니다. 모세도 아마 체력이 진하여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여호수아는 젊은 날에 하나님 앞에 깊이 매달렸습니다.
여러분, 여호수아가 이렇게 매달리며 기도할 때 앞으로 위대한 영력을 갖기 위해서 그렇게 기도했습니까? 아닙니다. ‘앞으로 내가 지도자가 될 텐데 지금부터 이렇게 기도해야 하나님이 나를 예쁘게 보실거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했습니까? 아닙니다. 한 순간 한 순간을 하나님 앞에 이 세상에서 위로받을 수 없는 그런 마음을 안고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는 이 일을 위해서 자신을 다 바쳐서 헌신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그 상황 속에서는 깊이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준비되어 가는 것입니다. 너무 급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천히 사람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저는 신앙생활하면서 그런 간증들을 굉장히 많이 가졌습니다. 즉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제가 전에 있던 교회의 목사님이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충성했더니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했는데 세월이 흘러가고 보니까 그렇게 충성을 해서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했는데 결국은 하나님이 나를 바꿔 놓으시고 그리고 그렇게 나는 섬기고 나왔으니까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섬겼던 과정들의 열매가 사실은 내 인격과 내 신앙 속에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부분은 여호수아는 그 때에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에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때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만약에 간절히 기도해서 그렇게 태양이 멈추고 달이 안 뜬다고 하면 온 세상이 보통 복잡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야간업소 하는 사람이 매일 기도하기를 “태양아! 너는 땅 속에서 나오지 말지어다.”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낮에 유원지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태양아! 너는 거기에서 가만히 매달려 있거라” 그럴 것입니다. 얼마나 혼란이 일어나겠습니까? 누가 간절히 기도 안했겠습니까?
3년 6개월 동안 이스라엘에 비가 오지 않을 때 간절히 기도한 사람이 엘리야 한 사람이었겠습니까? 누구든지 다 간절히 기도합니다. 고통을 당하면 그 고통이 미워서라도 누구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간절히 기도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렇게 간절히 기도한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오랜 동안 기도하면서 기도의 능력을 천천히 쌓아온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한번 철야하고 온 곳이 금방 응답을 가져온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철야한 기도가 뚜렷이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도 여호수아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움직여서 기도하게 하셨는데 누가 멈추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심령을 움직여서 하나님 앞에 민족과 그리고 이 교회를 매달리게 하시는데 누가 멈출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기도했습니다. 매달렸고 간구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기도의 영이 서서히 쌓아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는 한 순간에 필요할 때 “태양아! 멎어라.” 하니까 그 자리에 멈춘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기도 하나도 안하던 사람이 위기를 만나면 손을 들고 통성기도를 하고 기도원으로 내뛰는데 왜 그렇습니까? 평소에 기도 못한 것을 보상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상이 통하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명성을 원치 않으며 즐겁게 고난의 길을 가는 마음으로 자기의 안락과 안위를 포기하면서 장시간에 걸쳐서 기도와 투쟁하며 백전노장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옛 날에 공비가 남파해서 나라가 어지럽던 것을 보여주면 애들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립니다. 끝나고 나면 일어나서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부르면서 감격적인 분위기가 됩니다. 우리 부흥회 때 찬송가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 “나는 전쟁나면 군대 갈거야.”라고 합니다. 그건 그때지 전쟁 나서 간다고 칩시다. 거의 전쟁도 해보지도 못한 사람이 어느 한 순간에 “나라를 위해서 죽겠노라” 하고 부엌칼 하나 들고 전쟁터에 뛰어나가면, 마음은 좋다고 쳐도 그것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말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평소에는 아무런 기도가 없고 위기의 순간에 “주여! 믿사오니.” 하고 기도하는 것은 평소에는 전쟁이라고는 하나도 모르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에 복받치는 심정으로 부엌칼 들고 쫓아가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수많은 세월동안 기도의 전쟁에서 악한 세력들의 총탄을 맞으면, 혹은 칼자국을 맞으면서 그렇게 위기와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적군들의 치열한 공격이 그치지 아니하는 들판을 포복으로 지나면서 백전노장이 된 기도의 용사와 당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믿어도 같이 믿는 것이 아니고 두 사람이 간절해도 수준이 틀린 것입니다. 두 사람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도 수준이 틀리고 두 사람이 같이 눈물을 흘려도 눈물의 농도가 틀립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너무 무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엇을 배우냐 하면, 믿으라고 해서 믿었는데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라고 해서 간절히 기도했는데, 어떻게 하면 간절히 기도하냐는 것입니다. 간절히 살아야지 간절한 기도가 되지, 그 사람이 지금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지금 답답해서 매달리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주십니다. 출발은 그렇게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멎어서는 안 됩니다. 들어가야 됩니다. 계속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가까이 계신 분은 새벽기도에 나와야 합니다. 그냥 새벽기도 나오는 것을 남이 안하는 것, 보너스로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하니까 새벽에 못나오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새벽에 ‘따르릉’ 하고 종이 울리면 “오! 운명이여” 그러고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숙명이다. 끊을 수 없다’ 그러고 나와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집이 먼 사람들은 새벽에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새벽기도 한 번 빠졌다고 해서 오늘 아침이 무슨 타이어가 빵구가 납니까? 월급이 떨어집니까? 그런 것 없습니다. 아무 일 없습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아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계속 곶감처럼 빼먹으면 우리의 기도의 저력이 자라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상황을 움직일 수 있는 영력있는 기도를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교역자들의 세계도 똑같습니다. 신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면 매일 방바닥에서 우유나 먹고 신앙생활하고 교회를 섬기다가 자란 사람인지 진짜 들판에서 맹수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손을 높이 쳐들고 “주여! 믿사오니” 광야의 먼지를 맡으면서 기도를 하며 자라온 사람인지 벌써 표시가 납니다. 요만한 어려움에도 견디지를 못하고 허덕이는 것입니다. 요만한 환란이 와도 성도들이 견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요만큼만 기도하고 실망은 이만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안 되더라.” 그런 사람들 보면 대개 기도를 별로 안했습니다.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무엇을 열심히 해. 새벽기도 몇 번 눈 비비고 간 것을 가지고. 그러고 나서 하나님이 능력이 다하지 않았나? 아무래도 요즘 하나님은 옛날 하나님과 효과가 틀린가보다. 이런 소리나 하고. 요즘 하나님과 옛날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여호수아는 이런 전력을 탄탄히 세워나간 것입니다. 내가 그래서 신학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교지 보낸다.” 이 땅에서도 전도를 못하는데 무슨 선교입니까? “신학교 가겠다.” 설교를 듣지도 못하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그러면서 말렸습니다. “될 수 있으면.”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제도 속에서 이런 것들을 얻는 것들은 순간적인 일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떨지 모르지만, 대부분 그냥 가만히 다니면 세례를 줍니다. 그리고 다니면 집사가 됩니다. 나이 먹고 허리가 약간 구부러지면 권사가 됩니다. 남자는 흰 머리 나면 장로 되고 다 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과 거의 관계가 없을 적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여호수아의 위대한 기도의 능력을 보지 말고 여호수아 자신 속에 일어난 변화를 보십시오. 오랜 세월이 걸린 것입니다. 추구해도 변화가 안 일어난다고요? 얼마나 추구했습니까? 1년, 5개월, 6개월, 날짜 세고 작대기 그으면서. 이것이 뭐 하나님 만나고 변화받는 게 무슨 계 타는 건 줄 아십니까?
여러분, 여호수아는 그런 탐욕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 당시의 상황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민족적으로 볼 때 교회적으로 볼 때 기도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연로하신 모세는 들어가 주무셔도 ‘내가 아니면 누가 이 회막을 지키겠는가?’ 하고 지켰습니다. 그리고 넘치는 헌신으로 살았습니다. 모세가 광야교회의 당회장님 아니십니까? 여호수아는 그 교회의 전도사쯤 되지 않습니까? 부목사나. ‘당회장이 철야기도를 하지 않는데 나는 왜 하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황에 충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살았습니다. 모세는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지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가 앞으로 아모리 족속을 쳐부수는 총사령관이 되었을 때 태양을 멈출 수 있는 저력을 키워가고 싶어서 지금 이러는 것입니까? 전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매 순간순간 하나님의 교회와 조국과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그는 충성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서서히 축적되어 온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오늘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여호수아 한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까? 여호수아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표증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들이 다 기도해도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옛날의 교부들은 말입니다. ‘공중설’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하늘에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이 있고 그 유대인들의 말하자면 공중관입니다. 두 번째 하늘은 악한 영들이 지배하는 하늘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하늘이 신령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늘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삼층천을 갔다 왔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 신령한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는 칠층천을 갔다 왔다고 하는데 그렇게 자꾸 고층빌딩처럼 올라가는 게 아닙니다. 삼층이 끝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도들이여! 오늘도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기도의 화살을 쏘자” 이것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화살이 맥아리가 없으면 이층천에 있는 악령의 세력들이 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까지 올라가다가 맥이 없어서 ‘픽’하고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쩌다가 가끔 강력한 화살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피유욱’하고 쏘니까 이것이 이층천에 있는 악한 영들의 지붕을 뚫고 순식간에 미사일처럼 하나님의 보좌위로 날아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서적으로 타당한가 아닌가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하나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기도에 대한 예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예지는 무엇인가 하면 ‘말한다고 해서 다 기도는 아니다. 강한 영력의 후원을 입으면서 악한 영들의 세력과 씨름해서 그들의 권세를 찢으면서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것이다.’ 이 개념은 성서적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이들은 기도의 수련을 계속 쌓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광야의 풋풋한 냄새가 나는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교회에 장님 목사님이 설교를 하러 가셨습니다. 올라갔는데 눈이 머셨으니까 지팡이를 들고 올라가는데 담임목사님은 앉아계시고 부목사님이 사회를 봤습니다. “다같이 묵도하시겠습니다.” 하고 사회를 다 봤는데 끝난 후에 “오늘 사회보신 분이 누구입니까?” 부목사가 와서 “목사님. 접니다.” 하니까 “나하고 방에 잠깐 들어갑시다.” 해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눈이 멀었으니까 이 부목사가 나이가 몇 살인지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앉혀놓고 하는 말이 “당신, 교역을 할 거야, 집어치울 거야?” 이 사람이 완전히 뒤통수 맞은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한 게 있나?’ 하고 눈을 껌벅거리고 있다가 “목사님. 제가 혹시 목사님께 무슨 결례를 했습니까?” “이 사람아, 목숨을 걸고 하나님과 한 번 담판을 지어서 교역을 하든지 집어치우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하도록 하게.” 그때까지도 그것은 무슨 소리인지 그 양반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 분은 워낙 영적으로 깊이가 있으니까 성경 봉독하는 것을 듣고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야, 이거 완전히 생짜구나.’ 하는 느낌이 온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도가니에서 삶아지고 진리의 도가니에서 아니라는 것들이 느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목회자라고 와서 하고 있으니까 안타까워서 직설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영력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따귀나 맞지, 그런데 뭔가 방바닥을 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주위에 있는 교역자들도 그 속에서 무언가 위엄을 느낀 것입니다. ‘저 사람이 무언가 잘못되었구나’ 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짧은 기도로 위대한 능력을 이 땅에 불러내는 기도는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는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 앞에 깊이 훈련된 가운데 매달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깎이고 깎이고 깎여가면서 이루어져가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몇십 년이 걸려서라도 한 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합당하게 딱 붙잡히기만 하면 그 사람이 100년 동안에도 할 수 없는 일을 몇 달 동안에 하고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늘 방법을 찾아다니지만 하나님은 누굴 찾으신다고요? 준비된 사람들은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기도를 통해서 그 기도를 했다는 것 자체가 의가 되거나 그 기도한 것 때문에 무슨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에 대해서 보상할 의무만 있는 것 같은 그런 생각만 자꾸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명백하게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과 뜻들이 있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 계획과 뜻들이 나의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서 성취되지 못하는 오류가 없도록 끊임없이 나를 복종시키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들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모든 악한 세력들을 묶고 속박하고 그들을 꺾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불철주야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을 그렇게 살아가는 진지한 기도생활이 내일의 기도생활의 놀라운 변혁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또 하나 본문을 보면서 이해가 안가는 곳이 있습니다. 잘 보십시오. 거기에 뭐라고 했습니까? 12절 보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어떻게 하던 날입니까? 이것이 히브리 성경에는 완료형으로 되어있습니다. 주님이 오늘 이제 붙이실 예정이 아니라 이미 붙이셨습니다. 붙이셨다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밥이라고 생각하시면 적합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의 밥으로 만드시던 날에” 그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이미 붙여버리셨습니다. 무슨 기도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붙이셨는데 누가 하나님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막을 수 있다면 그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모리 사람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이스라엘 사람에게 밥이 되게 만들자.” 하나님은 “앞으로 그렇게 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를 보면서 “아모리 사람들을 이스라엘의 밥으로 만들까 말까?” 그러신 것이 아니라 “만드셨습니다.” 완료형입니다. 그런데도 뭐가 필요했습니까? 기도가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약속하셨어도 그 승리가 오늘 현재적으로 성취되게 하시는 것도 물론 하나님입니다. 약속하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그 승리의 약속을 오늘 우리의 현재적인 삶 속에서 성취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주신 약속을 성취하시지만 성취하시는 방법은 기도를 통해서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기차가 어디든지 다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레일만 깔린 곳이어야 합니다. 레일만 깔면 공중이라도 올라갑니다. 물속으로도 가고 땅으로도 가고 산도 넘어갑니다. 하나님은 이 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여호수아의 기도를 통해서 그렇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홀로 일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역사에 참예하고 있는 그런 특권을 우리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여호수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아모리 사람들을 완전히 붙이셨지만 하나님은 이 여호수아가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태양을 멎게 하시고 달을 더 떠오르지 못하게 하심으로 완전히 아모리 사람들을 진멸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남았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 얼마나 위대한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의 필요성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 그래서 그들과 특별히 친근하시고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뛰어난 사람들이 되고 그렇게 뛰어난 교통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소유하고 살아감으로 말미암아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마치 그들의 기도만을 들어주시는 것같이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불순종하니까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너희가 왜 의심하느냐? 봐라, 하나님이, 기도할 때 우리처럼 들어주신 민족이 어디 있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독점하면서 살았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려하지는 않고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의 능력을 소유하고 싶은 모든 시도들과 노력들은 올바르지 않은 것입니다. 늘 신앙은 총체적인 것입니다. 어느 하나를 개선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총체적으로 변화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를 간절히 하나님 앞에 하기 위해서는 간절히 살아야 합니다. 어제도 어느 형제가 “간절히 기도하는 방법이 뭡니까?” 묻습니다. “간절하게 살아라. 그렇게 간절하게 사는 것이 방법이다” 삶이 하나님 앞에 간절하고 절박할때 기도도 간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니까 삶을 간절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풀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의 어느 한 요소만을 개발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왜 하나님이 이같이 사람의 목소리를 완전히 들어주신 날이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이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 간단한 말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롯한 여호수아가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누렸던 그런 영적인 교통이 얼마나 탁월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깊이깊이 말하자면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하늘의 은혜와 능력을 한 손에 쥐고 그 어두운 가나안 땅을 혁혁히 지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똑바로 보여주셨습니다.
한번 여러분들이 여호수아의 입장이 되지 말고 아모리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십시오. 하늘만 보면서 막 도망가는 것입니다. 무력으로는 당할 수 없고 ‘어휴, 이제 해가 떨어지는구나. 해만 떨어지면 우리는 살아가겠지.’ 그런데 뒤에서 뭐라고 뭐라고 떠드는데 가만히 보니까 말도 안 되게 막 떠드는 것입니다. “태양아, 멎어라. 달아 stop”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다가 보니까 이것이 밤 9시가 되었는데 해가 안 떨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죽기 전에 이미 죽음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 저 사람들이 보통 민족이 아니구나. 도대체 우리 가나안 땅에서 어느 민족이 어느 신에게 호소를 해서 태양을 멈추게 한 적이 있었는가?’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밤 9시 10시가 되었는데도 훤한 것입니다. 그래서 “얘들아!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 하니까 “전하, 태양이 멈췄나이다.”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이것이 단순히 웃을 사건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어마어마한 두려움이었습니다. 홍해바다가 갈라진 사건보다도 더 간담이 서늘해지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가나안 족속들에게로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신발가게에서 신발 하나를 안 사신은 떨거지들이 말입니다. 무슨 소총을 들고 왔겠습니까? 대포를 들고 왔겠습니까? 탱크를 몰고 왔겠습니까? 그러고 달려드는데 그 떨거지들을 보면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초라했지만 그들 속에는 놀라운 권세와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능력과 권세가 그들과 함께 하니까 그 심령들이 막 녹아서 벌벌 떠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의 기도를 통해서 깊이 교통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영적인 능력입니다.
저는 이번에 책 한 권을 끝내고 다시 한 권을 쓰고 있는데 이번에 쓰는 것은 ‘부흥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쓰고 있습니다.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그것을 쓰면서 귀한 자료 하나를 봤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16세기 종교개혁 지도자 ‘죤 낙스’입니다. 그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설교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하여튼 불굴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죽었을 때 묘비에 뭐라고 했냐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던 죤 낙스, 여기에 잠들다’ 그렇게 씌여져 있습니다. 메리라고 하는 여왕이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여왕 말입니다. 영국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잉글랜드와 위의 스코틀랜드. 이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가만히 보니까 개신교 신앙을 갖고 싶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죤 낙스가 계속해서 개혁신앙을 외치니까 개신교도를 하려고 하는데 가만히 있다가 보니까 남편이 죽었습니다. 남편이 죽으니까 그런 결혼에 관한 이유 때문에 카톨릭을 해야지만 자기에게 유리하게 생겼거든요? 그러니까 다시 카톨릭으로 가겠다고 로마 교황청에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줄타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죤 낙스가 그 여왕에게 막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왕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지고 사람들 부축을 받으며 가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폐하, 그러면 안 됩니다.” 하니까 이 여왕이 하는 말이 “내가 죤 낙스 당신 마음에 들게 하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우리 숙부들하고 싸우면서 어떻게 하면 당신 마음에 들어볼까.” 그러니까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주의 종인 당신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얼마나 헌신적인 노력을 했는지 모릅니까?” 하면서 그 여왕이 면류관을 집어던지고 죤 낙스 앞에서 살려달라고 펑펑 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권세입니다. 권위입니다.
그 사람이 말년에 설교했던 그 기록은 제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습니다. 어느 날 죽기 2년 전 1570년에 중풍에 걸렸습니다. 어느 정도 중풍에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설교는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단상에 올라서서 설교를 했을 때 그 설교를 1년 동안 계속 경청했던 사람 하나가 제임스 맬리빌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딱 앉아가지고 그 죤 낙스가 하는 설교를 받아 적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냐하면 다니엘서 강의였습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다니엘서를 강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적용부분에 들어가서 막 설교하는데 이것이 심적인 두려움으로 벌벌 떨려가지고 받아 적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외모가 어땠는지 아십니까? 그 기록에 뭐라고 했냐하면 ‘죤 낙스는 목에 털목도리를 두르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교회당을 걸어왔다. 설교하기 위해서 단상에 올랐지만 그는 자신의 몸을 지탱할 수가 없어서 몸을 강대상에 기대고서야 겨우 설교할 수 있으리만치 불편했다.’ 그렇게 설교하던 사람에게서 그러한 위대한 영력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 속에서 살던 사람의 저력이요 능력입니다. 사람이 변화되니까 그런 위대한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남긴 유명한 기도가 그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귀족출신의 사제로 부르지 아니하시고 평민출신의 설교자로 부르셔서 고난의 가시밭길을 가게 하심을 감사하옵나이다.” 그리고 그의 묘비에는 “하나님밖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 낙스가 여기에 잠들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과 깊이 교통하는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교회가 이런 권세를 소유할 때 이 세상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동안 육신의 즐거움과 세상의 안일을 포기하며 늘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고 매 순간순간 주어지는 그 상황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 세상의 안일함과 육신의 즐거움을 버리고 영적인 고난을 택하고, 오늘의 달콤함 보다는 오늘의 쓰디쓴 고통을 통해서라도 완전히 성취되는 아버지의 뜻을 기다리면서 그렇게 고난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이런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짧은 기도로 위대하게 태양을 움직이고 달을 움직이는 이 여호수아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마치 텔런트 지망생이 유명한 텔런트를 바라보고 박수를 치고 흉내를 내는 것 같은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이 본문을 보면서 이렇게 놀라운 기도의 능력을 소유하기까지 여호수아가 살아왔던 진지한 영적인 삶의 방식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 순간 그렇게 쓰디쓴 영적인 삶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자신의 즐거움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 육신적인 요소와 더불어 싸우면서 자신을 말씀 앞에 거룩한 소망 앞에 굴복시키면서 살아갈 때 여러분들도 능히 하나님의 이 놀라운 구윈의 역사 속에서 믿음의 증인들로 기도의 증인들로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7. 중보기도의 필요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살후 3:1)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주다 보면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면 기도 시간이 한 없이 즐겁고 너무 감사하고 그 사람들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한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람 이름이 떠오르면 가슴이 답답하고 식욕이 떨어지고 난감하고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도 이것이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들이 여러 교회들이 있는데 그 교회에서 어떤 교회 이름을 떠 올리면서 기도할 때에는 너무 피곤하고 정말 입맛이 없고 어느 교회를 생각할 때에는 너무 기쁘고 즐거운 그런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문제는 뭐냐 하면 신앙이 지나치게 좋다고 그래야 할까 뭐라고 그래야 할까, 우리 주님 곧 오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이제 무엇을 하고 있겠냐 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종일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맨날 모여서 주님 곧 오신다는 이야기나 하고 깨어 있자는 이야기나 하고 이제 이런 것들이 바울에게 있어서 고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1장에 보면 바울이 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뭐라고 그랬냐 하면 “우리가 너희를 위해서 항상 하나님 앞에 너희 때문에 감사한다. 왜냐하면 너희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풍성하고 인내와 환란을 참고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바울은 늘 다른 교회에 말할 적마다 “데살로니가 교회 봐라 얼마나 잘 하냐.” 그렇게 떠올릴 정도였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여기 주일학교 선생님들도 있고 전도사님들도 계시고 중고등부 선생님들도 계시고 청년부 리더들도 있습니다. 뭔가 이렇게 안 되는 사람들 쳐다보면 ‘참 비참하구나.’ 그러다가 또 이렇게 자라나는 영혼을 보면 소망이 생깁니다. 사도도 그랬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면서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훌륭한 믿음을 가진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대해서 편지를 쓰면서 그러면서 이제 마치는 부분에 가서는 바울이 늘 잘 쓰는 말이 ‘종말로’입니다. 그 말은 마지막으로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것이 너희는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과 오늘 보니까 바울이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데살로니가 교회에 문안을 하면서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한다고 그랬습니다. 실루아노나 디모데 같은 사람은 바울하고 영적인 권위나 신앙의 경륜이나 교회의 위치나 모든 것으로 볼 때 이렇게 나란히 서서 우리가 편지한다고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즐겁게 자기 자신을 실루아노, 디모데 이런 사람과 함께 묶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우리가 모두 사람들은 신앙의 수준의 차이가 있고 생각이 다소 다르고 태어난 가문도 틀리고 그러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치점이 있습니다. 실루아노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고 디모데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바울, 실루아노, 디모데 모두 하나가 되어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문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바울은 실루아노나 디모데나 능력의 크고 작음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그런 것은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일꾼들이란 사실을 중시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한 동아리로 묶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비롯해서 복음전도를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얼마나 우습습니까? 바울이 편지를 쓰게 된 모든 교회를 보면 항상 마지막에 들어가서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러니까 중보기도의 능력을 안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서도 그랬고 에베소 교회에서도 그랬고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골로새 교회에서도 마찬가지고 에베소 교회에서도 마찬가지고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교회가 아무 일이 없기 때문에 편지를 쓴 게 아니라 언제나 문제가 있기 때문에 편지를 쓴 것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신학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연약한 교회였습니다. 더군다나 골로새 교회는 말 할 것도 없었습니다. 이단의 위협을 받으면서 자신의 몸 하나도 어떻게 추스를 수 없는 그러한 어려움에 놓인 연약한 교회였습니다. 그런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이 대 사도가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신약성경을 넘기면서 정직하게 신약 성경을 살펴 볼 때 사도 바울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기도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지는 그런 연약함이 있었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그 다음에 귀신 들린 자를 내어 쫓고, 귀신 들린 자를 내어 쫓는 것이 아니라 귀신 들린 자 속에 있는 귀신을 내어 쫓고, 그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하는 이러한 이적들을 척척 행해가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에게 무슨 기도가 필요가 있겠느냐 이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보기도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진실로 자기가 중보기도를 해 본 사람들만이 중보기도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자기가 중보기도에 깊이 헌신해서 그리고 그 중보기도를 통해서 기도를 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살아나는 놀라운 광경들을 볼 때에 그 중보기도가 얼마나 중요하고 그리고 자신의 신앙생활을 위해서도 이렇게 남들이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이 얼마나 필요하고 절대적으로 요청되는가 하는 것을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렇게 문제 있는 교회가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조차도 오히려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럼 기도에 대한 이와 같은 간절한 바람은 바울의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의뢰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깊이 기도하고 기도 자체가 거의 인격의 특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연구대상입니다. 대개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대부분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더라도 기도가 경박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비유가 적합할지 모르지만 저는 에스겔이 꼭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기도의 깊이는 마치 물하고 비슷합니다. 우리 그 때 여기 물 많이 찼었지 않습니까? 물이 찼는데 물이 발목 정도 찼을 때는 마음대로 헤치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그 물이 무릎 정도 차게 되면 움직이는 일이 용이하지가 않습니다. 허리 정도 차게 되면 그 다음에는 쉽지가 않고 가슴 정도 차게 되면 이제 움직이는 것은 고사하고 물에 떠밀려 가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 힘 들 정도고 그 다음에 이제 물이 턱 위로 올라오기 시작하면 발뒤꿈치를 들고 그 다음에 간신히 움직여야 하는데 물이 조금만 밀면 사람이 넘어집니다. 마찬가지로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아주 자유롭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유롭다는 말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천방지축입니다. 하여튼 자기 마음대로 돌아 다닙니다. 말 갈 데 소 갈 데 갈 데 못 갈 데 다 돌아 다닙니다. 기도가 점점 깊어지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 이제 자기 뜻대로 안 움직여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영적으로 깊이가 있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기도가 깊어지면 인간적인 박력은 점점 없어집니다. 신앙적인 박력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박력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범사에 작은 일 하나도 기도 속에 사는 사람은 쉽게 결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세밀한 부분에까지 우리의 삶을 간섭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이런 기도의 영속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신학대를 들어갔는데 이제 직장도 안 다니고 신학교 야간을 다니는데, 학교 가는 것은 교회에서 칠 만원인가 얼마를 주는데 육 개월 타 봐야 사십 만원밖에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등록금 이 사십오 만원입니다. 주관적인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돈이 없어서 신학교를 못 다닌다는 것은 조금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믿음이 없어서 못 다니는 거지. 하나님이 기가 막히게 채워 주시더라고요. 그렇게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계속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통지표가 왔는데 충격입니다. 전체적인 점수는 가장 많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됐는데 그 중에 하나가 칠십구 점이 나왔습니다. 다른 점수가 다 많이 나와도 그것은 팔십 점 이하짜리가 하나라도 있으면 점수를 안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또 사지 선다형이나 찍는 것이 아니라 논술형 시험에서 칠십구 점하고 팔십 점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날 저녁에 그것을 받아 놓고 학교 가서 조사를 해보고 나서 큰일났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주위에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뭐 복잡하게 생각하냐고, 교수 찾아 가서 일점만 올려 달라고 하는데 일점을 안 올려 줄 교수가 어디 있겠냐고. 일 점 올리면 장학금 사십오 만원인가 얼마가 나오는데 그것은 뭐 문제가 되겠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심을 하고 교수님 연락처까지 받아가지고 내려오는데 그 때 이제 기도를 많이 할 때였습니다. 새벽에 나아가서 이렇게 기도를 하는데 내 마음에 들리는 의문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주권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왜 이런 의문이 떠오를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데 그 교수가 팔십 점을 안 주고 칠십구 점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는데 그 날 새벽에 나아가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산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주권을 핫바지로 만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 일 점이 아주 육 개월 동안 내 자신을 엄청나게 근신시켰습니다. 돈이 없는데 그 사십오 만원을 대려니 어땠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을 산다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거기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엊그제도 어느 큰 교회에서 부목사로 있는 친구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구멍가게를 해도 내 가게를 해야지. 신이 안 나.’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열심히 봉사를 합니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내가 생각해도 내 나이가 벌써 얼마 안 있으면 오십 가까이 되는 이런 상황인데 내 생각에도 빨리 교회를 개척해야겠는데 하나님이 있으라고 그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있는 것입니다. 자기도 자다가 눈을 번쩍 뜨면 자기도 정신이 번쩍 든다는 것입니다. 내 나이가 언제 벌써 이렇게 됐나. 머리에는 흰머리가 나기 시작하고 개척을 하려고 해도 빨리 하고 무슨 사업, 사업이 아니라 무슨 하나님 사업을 하려고 해도 빨리 해야 할 텐데 이거 이러다가 어떻게 되려나 그런 생각이 퍼뜩 나는데 그건 인간의 마음이고 결국은 기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간단하게 자신이 결단하거나 자신이 판단을 해서 할 수 없게 하는 어떤 힘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렇게 이렇게 만나야지만 그것은 제대로 된 동역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바울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기도를 얼마나 신뢰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보기도의 능력을 얼마나 신뢰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신뢰했다는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이 기도를 통해서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는 사람이 행할 수 있는 두 가지 일이 있는데 하나는 상황에 부딛혔을 때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으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비록 키가 구척이나 되는 그런 골리앗이 서 있더라도 믿사옵니다 하면서 물맷돌하나 간편하게 들고 투구도 벗어 던지고 갑옷도 벗어 던지고 뛰어 나갈 수 있는 그 믿음의 행동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그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홀로 하나님 앞에 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고 그렇게 깊이 기도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단호한 결단이 요구될 때 그렇게 단호하게 행동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목회하면서 이렇게 세월이 지나가고 보면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은 평소에 신앙생활을 꽤 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기도도 아는 것 같고 교회도 안 빠지는 것 같고 뭐 교회 일도 열심인데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 그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정해야 되는 순간인데 자기가 표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뒷감당을 할 수 있나 인생이란 것이 뒷감당을 못합니다. 자기가 그렇게 선택해 놓고 그 다음에는 신앙의 미로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한 번 신앙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어렵지 한 번 딱 선택을 잘못해서 말려들게 되면 그 다음서부터는 헤어 나오지 못하게끔 말려드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결국은 멀어져가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건들건들 하는 것 같고 저거 어디 가서 밥값을 하겠나. 그런데 이상하게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신을 다 쏟아 부으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인생이 이렇게 전환점을 맞이할 때에 하나님이 전환점으로 부르실 때에 신적인 확신을 가지고 발걸음을 옮겨 놓을 수 만들어 주는 것이 무슨 힘닙니까? 하나님 앞에의 기도의 힘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양이 제법 신앙생활의 모양을 갖추고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고 그 기도의 능력을 알던 사람들이 그 중보기도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 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놀랍습니다.
제가 집회 나가면 그런 것을 많이 느낍니다. 지금 상당히 기도가 많은 기도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그 느낌이 옵니다. 그리고 뭔가 깊이 말려드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나중에 와서 확인해 보면 역시 기도를 거의 못 받을 때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중보기도를 통해서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굉장히 신비가 깃들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럼 왜 하나님 이렇게 복잡하게 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지 먹을 것 지가 찾아서 먹고 살지 왜 다른 사람., 그냥 그렇게 각자 기도 하면 되지 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중보 기도를 하게 했나. 이것이 결국은 교회를 하나로 묶는 것입니다. 깊은 중보기도 속에 들어갈 때보다 더욱 분명하게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사실을 느낄 때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 오 월 오 일에 야유회 갑니다만 사람들은 뭐 실컷 먹고 놀다 와서 지체의식을 느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은 조금밖에 못 느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불러다가 야외에다 돗자리 펴 놓고 도시락 주고 물주고 밥 주고 빵 주고 과일 주는데 거기서 인상 쓰고 싸움 걸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문제는 무엇입니까? 영혼 깊은 곳에서 진정한 사랑, 그것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고 아픔을 아픔으로 느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로 우리 아픔을 나눕시다. 무엇을 나눠? 떡은 나누고 물질은 나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얼굴 마주 보고 아픔이 나눠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아픔을 나누기 위해서는 그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안 다음에 깊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기도할 때와 마찬가지고 그렇게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고통 받는 사람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렇게 기도할 때에는 깊이 중보기도에 들어가면 그 다음에는 내가 저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느낌이 안 들고 저가 내 안에 들어 와서 자신을 위해 기도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일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기가 막힌 분이십니다. 이러한 중보기도를 통해가지고 내가 기도하는데 저 사람의 고통이 내게 전해지고 저 사람이 기도하는데 저 사람의 기도로 말미암아 내가 하고 있는 일들에 하나님의 응답이 온다는 사실들을 경험하면서 이것이 보통 모임이 아니라는 사실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일들이 이러한 영적인 교통이 이 세상에 있는 단체에는 없습니다. 계로 모이면 이런 일들이 생겨요? 동창회에서 이런 일들이 생깁니까? 아니면 친목회에서 이런 일들이 생깁니까?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일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 일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그 중보기도를 통해가지고 우리가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바울은 문제가 있는 교회들에 조차도 그렇게 중보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던 이유는 뭐냐 하면 그들이 비록 신앙에 문제가 있고 영적으로 어리지만 그러나 그들도 그리스도 안에 붙어있는 지체이기 때문에 그들이 진심으로 자신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 기도가 자신들을 위해서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자신들을 위해서 하는 그 기도를 통해서 그들이 변화되리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 가장 결핍된 것들이 말하자면 그 애끓는 중보의 기도입니다. 이런 것들을 거의 안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을 위해서도 거의 기도를 안 하는 사람들이 무슨 남을 위해서 애끓는 중보기도를 하겠습니까. 그런 쓸 데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결론을 우리들이 하나 얻게 되느냐 하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때에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진정한 의미의 깊은 기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흥의 때 이외에는 교회가 중보기도로 가득 차는 그런 일들이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흥의 때는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부흥의 때를 맞이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역사해 주신 것과 같은 이러한 놀라운 은혜와 영적인 축복들을 다른 사람들도 누리면서 살아야 된다고 하는 절박한 사명감들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무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첫 번째로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 마음속에 중보 기도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없는 것도 사실은 우리가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란 것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어떤 의미에서 그런 연약한 사람들의 기도 없이도 얼마든지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우리가 보이는 것이지, 영적인 실제에 있어서는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그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또 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기도의 능력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들이 우리 속에서 재연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예 명함 같은데다가 자기 기도제목을 인쇄를 해가지고 다닙니다. 그러면서 주면서 이러이러한 사정이 있는데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해 놓고 자기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효력이 적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간절히 기도를 받아야 할 그런 절박한 필요를 느끼는 그런 사람이 그 가난한 마음으로 그 중보 하는 수많은 사람의 기도와 함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할 때에 정말 놀라운 역사가 놀라운 은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때요? 사도 바울은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바울과 이렇게 함께 엮어져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일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 사람들은 단지 가서 복음을 전할 뿐이지 그 뒤에서 말하자면 기도해 주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그들은 서로 분리됐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오늘 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내는 것들을 보아도 결국은 오늘 날 우리 가운데에 있는 그 많은 교회 안에서의 갈등 그런 것들도 결국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니까 서로 중보기도하지 않으니까 그 다음에는 이해가 없게 되고 그리고 참된 사랑이 식어지게 되고 서로 미워하게 되니까 마음이 가리고 그러니까 더 기도가 방해를 받게 되고 하면서 담을 쌓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는 교회가 결집된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그건 정말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계셨는데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인데 집회를 나가면 가서 설교를 하다 보면 막 밀리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에다 전화를 합니다. 그러면 전화 한통을 하면 교회에서 죽 전화 연락이 갑니다. 그리고 그 교인들이 자기 일처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런 면에 있어서 너무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생각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자기 교회와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살아가니까 그러니까 그런 교회주의와 이런 이기심들이 만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삭개오가 그 구원을 받게 되었을 때 그 때 많은 사람들은 수근거렸습니다.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누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다. 어느 교회가 이번에 집회를 해서 은혜 받았다고 그러더라.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는데 우리가 입을 씰룩거릴 이유가 뭐가 있느냐 이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들이 은혜 받고 성령 충만해졌다고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인해서 진심으로 기뻐해야지 그들이 은혜를 받고 교회가 커졌다는데 우리가 입을 씰룩거리고 그렇게 해야 될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건 전부가 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는데 왜 배가 아파 딴 사람이 사면 배가 안 아프고 자기 사촌이 사면 배가 아프데. 사촌이 땅을 사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사촌이 부자라 이렇게 명함도 내놓고 다닐 수 있는 세상인데 왜 싫어할까요? 이런 마음들이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이기심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신앙의 영역 속에도 침투하게 되면 참 곤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함께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가 있는 그 곳에 여러분도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함께 같은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위해서 부르짖고 그것을 위해서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들을 이뤄가고 영혼들의 참된 변화를 가져오는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는 중보기도가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의 그런 일들이 안 이루어지고 있는 것들이 오늘날 우리들의 실정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커다란 능력과 은혜를 가지고 교회를 사용하시고자 해도 교회 속에는 결집된 힘이 없는 것입니다. 중보기도의 심각한 상실입니다.
이런 비밀들을 사도는 알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데살로니가와 같은 교회를 향해서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줘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해 달라고 중보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교회는 기도해 달라고 그러는 것 그 자체는 구걸이 아녜요. 자존심 상해할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왜 자존심 상합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 요구를 들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지금 인간이 인간 개인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는 것입니다.
제일 부담 가는 선물이 뭐냐 하면 뭐 쪼끄만 것 줘 놓고 볼 때마다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예 받으면서 그렇게 못한다고 미리 이야기를 합니다. 옛날에 누군가가 손수건을 하나 갖다 주고 그 손수건을 볼 때 마다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그거는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다 기도는 하는데 볼 때마다 기도해 준다고 나는 약속을 못하겠다. 주머니에 넣고 맨날 코 닦아야 되는데 맨날 그 볼 적마다 족쇄입니다. 여러분 중보기도의 참된 능력을 우리들이 깊이 이해하고 우선 기도 받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기도하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교회는 부수적으로, 원론적으로는 기도를 통해서 능력이 나타나게 되지만 부수적으로는 교회가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를 제대로 안 했으니까 응답이 제대로 됐는지 안 됐는지 내버려두지 기도를 제대로 하면 물어 볼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 교회는 일치된 마음을 가지고 하나의 영 안에서 주님 앞에 기도하는 그러한 공동체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이제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하냐면 기도의 제목이 참 재미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이 사람들 선교사 아닙니까? 선교 회비가 잘 걷히기 위해서, 아니면 교회 건축을 위해서 그것은 아니라, 잘 보십시오. 너희는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어떻게?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에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도록 기도해 달라 그랬습니다.
입시 때였습니다. 사람들이 학교 대문밖에 꽉 찼습니다. 골목 넓은 길에 차가지고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데 조금 학교에 들어가고 싶어도 가자고 그래도 사람들이 비켜 주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더니 지각한 수험생이 사이드카를 타고 오는 것입니다. 오토바이에도 마이크가 달렸습니다. 지금 수험생이 가고 있으니까 비키라고 말입니다. 역시 경찰이 셉니다. 한 마디 하니까 그 많이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시에 비키기 시작하는데 그 어떻게 순식간에 길이 나는지 모릅니다. 오토바이가 그냥 질주하는데 그냥 가는데 가면서 그냥 사람들이 홍해가 갈라지듯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뛰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닫히면 그 다음에 갈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달음질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휭 하고 휘돌다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달음질치지 않을 때는 쭉 이야기하면 고개를 끄떡 끄떡 알아서 끄떡거리는지 조느라고 끄떡거리는지 그건 자기만 압니다. 주님의 말씀이 달음질치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달음질치는 것입니다. 가르면서 불꽃처럼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요동을 치면서 흔들리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이런 역사를 바로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한 번 교회에 들어와서 데살로니가 지방에서 줄달음치는 역사를 맞이한 것입니다. 이것을 간단히 이야기하면 부흥입니다. 복잡하게 이야기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이방의 땅인 데살로니가에 들어와서 한번 불꽃처럼 후욱 가르면서 동네를 헤집으면서 달음박질치는 광경을 본 것입니다. 말씀이 지나가고 나면 말씀이 지나간 흔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씀이 한번 사람의 마음을 팍 치고 지나가면 교만하던 죄인들이 거꾸러지면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겸손해지기 시작합니다. 확신이 없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치고 들어갈 때 그 사람의 모든 우유부단하고 확신이 없는 애매모호한 신앙의 태도가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확신에 불타고 신념을 가진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칠 때에 그들은 믿음이 없고 불순중하며 살아가던 삶을 바꿔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의 거룩한 뜻을 따라서 살기를 소원하는 불같은 열망을 가진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달음질칠 때 게을렀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충성된 마음을 주고 잠들었던 모든 사람들이 침을 닦고 일어나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치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회중들 속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 속에 와서 우리들을 스치고 지나갈 때 그리고 우리 속에 달음질치면서 지나갈 때 우리의 심령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그리고 우리의 신념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신의 살아왔던 삶을 뉘우치고 새롭게 점검하고 그리고 참된 확신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들 가운데 달음질칠 때 사실은 하나님의 영이 그들 가운데 달음질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닫지 못하던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달음질칠 때 비로소 잠들었던 사람들이 깨어나고 어두웠던 눈들이 열리고 은혜가 떨어졌던 사람들이 은혜를 받게 되고 그리고 졸던 사람들이 깨어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가 기도해야 할 최대의 기도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중언부언할 때는 기도제목이 엄청 많은 것 같아도 그러나 기도를 깊이 들어가 보면 기도제목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진리가 달음질치게 하옵소서. 그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물론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도 구하고 그리고 날씨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자동차 가다가 펑크나지 않도록 기도하고 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고 나지 않기 위해서도 기도하고, 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런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그 인간 자체가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심령이 변화되어지고 말하자면 불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렇게 가슴에 신적인 불을 안고 살아가는 이런 사람으로 변하면 그런 것은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어려움 조금 만나면 어떻습니까? 믿음으로 이길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 믿음이 있으면 환란을 주면 그 환란을 축복의 기회로 바꾸고 시련이 오면 그 시련을 가지고 은혜 받을 기회로 바꿉니다. 신앙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줄달음쳐서 이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 환란을 만나요? 환란을 만나면 그 환란을 축복의 기회로 바꾸는 것입니다. 시련을 만나요? 시련을 만나면 믿음이 오히려 더 돈독해집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저 놈들을 어떻게 하면 좋으냐?” 그러니까 “굶깁시다.” 그러는 것입니다. 로마시대 때 일어난 일입니다. 거기 한 사람 하는 이야기가 그 놈들은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때려라.” 그러니까 저 사람들은 얻어맞는 것이 복 속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렇게 말하면서 때려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여라.” 죽이면 저 사람들이 제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상급이 내 것이요. 천국이여 어서 오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감당할 수 없는 놈들이옵나이다.” 그래서 성경도 이런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는 자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가슴 속에 줄달음질 친 사람, 하나님의 진리가 그 속에 달음질 치고 있는 교회, 하나님의 진리가 달음질치며 역사하고 있는 그 도시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땅, 그 땅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땅입니다.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때리라고 그러니까 때리면 그것은 할렐루야 한다는 것입니다. 굶기라 그러니까 금식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죽여라 그러니까 죽음이여 어서 오라 면류관이여 어서 오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지 않습니까? 무엇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줄달음질치면 말하자면 참된 구원 (tape 면 바뀜)
기도 제목은 하나입니다. “시집도 제 때에 가게 해 주시옵소서. 사업도 잘 되게 해 주옵소서. 올 여름에는 천장에서 비 조금 안 새게 해 주옵소서.”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다 해도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그 기도의 응답이 우리들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달음질치는 하나님의 진리, 그리고 그 달음질치는 진리 속에 역사하면서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변화들이 결국은 교회가 기도해야 할 유일한 기도의 제목들입니다. 그러니까 수없이 많은 기도의 제목이 있는 것 같아도 마지막에는 그것입니다. 폭풍과 같이 하나님의 진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쓸고 지나가는 것 그리고 폭풍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 가운데 줄달음치고 복음이 역사하여서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가 기도해야할 최대의 것입니다.
(찬송 172장)
빈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결국은 이 사도 바울이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 하나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이 됩니다. 교회가 물질이 없으면 말씀이 달음질치면 됩니다.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치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바치고 싶어서 견디지를 못합니다. 웨슬리가 이야기한 것이 그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의 지갑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당신들의 회개를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지난 번 교사 대학 할 때도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인생, 우리의 마음, 우리의 건강, 우리의 생명, 그리고 그 모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제일 쉽게 허비해 버릴 수 있는 것이 건강이나 시간이나 생명이 아니라 돈입니다. 간단합니다. 그냥 줘버리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장 쉬운 것도 허비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모든 것들을 허비하고 있다고요?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말씀이 줄달음치니까 얼마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느냐?
나는 선교사한테 직접 간증을 들었습니다. 간증하는데 자기가 자기를 파송한 그 교회가 백 오십 명이 모이는 데 지난주에 백오십세 번째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합니다.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이야기 하는데 사실입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모 교단 전체에서 사십 년 동안 파송한 선교사 숫자보다 많습니다. 어떻게 했냐고 그러니까 세 사람이 개척교회를 했는데 개척교회를 천막을 치고 시작하면서 그 중에 한 가정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생활은 어떻게 했냐고 그러니까 한 가정을 보내고 두 가정 받는 수입을 모아서 셋으로 쪼개서 삼등분을 그리고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면 간단합니다. 선교가 무슨 코 묻은 돈 몇 푼 거둬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 자체가 그런 생각입니다. 세 가정이 모여서 그 중에 한 가정이 가고 그 다음에 두 가정이 번 것 모아가지고 나눠 가지고 세 가정이 나눠서 삼분의 일 저쪽 보내고 삼분의 이 가지고 자기네들이 먹고 산다는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니까 늘어가는 대로 늘어가는 대로 말하자면 선교를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오십 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백오십세 번째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그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줄달음치면 이러한 것들이 문제가 안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 하나님의 말씀이 줄달음치니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냥 다 팔아 가지고 왔습니다. 이것이 영혼과 영혼 틈바구니에 사는 인생이 이런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찬송하다가 가겠다고 생각하고 온 것입니다.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뭐 일꾼이 없다고요? 일꾼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줄달음질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달음질쳐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주님을 향해서 자기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치고 진리의 말씀을 달음질치게 해서 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신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어떻게 그냥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일꾼이 차고 넘칩니다. 그런 일꾼들은 진짜입니다. 제대로 된 일꾼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일꾼들을 세워 놓으면 꼭 대가, 보수, 기회, 비용,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섬긴다는 이야기입니다. 순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치기만 하면 일꾼의 기근 이 모든 현상들이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치지 않으니까 엊그제도 나 아는 목사님 한 분이 그렇습니다. 필리핀 선교를 열심히 하는 분인데 필리핀 선교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마닐라 시 하나에 삼십 명의 선교사들이 모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하니까 잠시 후에 그 사람들이 LA에서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중에 훌륭하게 헌신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속에 줄달음질 쳐서 보배피를 드리니 이 죄인 받으옵소서. 몸밖에 드릴 것 없으니 이 몸 바치옵니다. 그런 생겨난 사람들이 가야지만 생명 걸고 설교를 하는데 이렇게 말씀이 줄달음질치지 않은 교회에서 사람들을 파송해 놓고 보니까 말하자면 헌신적인 복음전파가 안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대단한 통찰을 가지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들 가운데서와 같이 우리들이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그 곳에도 달음질치도록 너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만큼은 이런 면에 있어서 열린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절대 이것은 내 사심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개인적인 것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많은 교회가 목회자를 독점하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독점이 물론 목회자 한 사람이 교회를 세 개씩 네 개씩 하면서 얼굴 마담 격으로 한 달에 한 번 나타나서 설교하고 사라져 가는 그런 교회는 정상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무슨 잘못된 생각들을 가지고 있냐면 그 교회라고 하는 그 자체를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부름을 받은 그런 하나의 큰 그리스도 안에서의 지체로 보지 않고 자기 교회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 그 것 하나를 강조하면서 그 속에서 목회자들을 독점하려고 하는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신학교에 강의 나가는 것, 신학교에 가는 것 아무나 신학교에서 오라고 그럽니까? 그래도 뭔가 들을 게 있으니까 오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걸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사례비는 우리가 주는데 왜 거기 나가서 강의를 하느냐. 그리고 심지어는 교회에서 임직을 할 때 각서를 쓰라고 그런다고 합니다. 다른 데 강의도 안 나가고 설교도 안 나가겠다고 말입니다. 그런 것들은 전부 다 세속 사회에서 말하자면 사장 고용하는 것 같은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사도가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이방의 땅에서 전할 때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이 거기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기도를 통해서 사도 바울의 그 말씀이 그렇게 달음질치는 역사를 원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세운 교회의 부흥을 보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을 기뻐했던 것이 아니라 온 시위대 뜰과 그리고 모든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된다는 이 사실을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이런 열린 마음들을 우리들이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치는 이러한 역사 하나를 위해서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기도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생각해 봅니다. 과연 오늘날 교회 가운데 얼마나 많은 교회가 자신의 교회 목회자가 밖에 나가서 설교하거나 집회를 인도할 때에 자기들도 거기에 있는 마음으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통해서 줄달음질치고 이방 가운데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린 사람 가운데 참된 은혜의 표징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절박하게 중보기도 하는 그런 교회가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섬김입니다.
하나님이 이 바울을 통해서 오늘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진리가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그런 중보기도의 방식으로 교역자와 교회 교회에서도 모든 지체들은 하나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비록 죽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실루아노는 그런 사람이 못 됐고 디모데는 육신적으로 연약해서 포도주를 먹어야 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하나로 묶을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결코 나뉘어지지 않았습니다. 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의 교회를 섬기고 하나의 섬김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실제적으로 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간절한 중보기도의 부탁을 간청하는 이 장면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기도의 제목이 우리들에게 깊이 다가와야 됩니다.
여러분,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중보기도 하겠습니까? 담임목사님 없어지면 곤란하니까 한 구십 쯤 살게 해 주십시오. 그런 것은 기도 제목도 아닙니다. 건강하게 열심히 살다가 가면 그만이지 뭐 그런 것까지 우리가 정해 놓고 기도할 필요 없습니다. 최고의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치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의 모임이 얼마나 의미 없는 모임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치지 않으면 모이는 사람이 늘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줄 것입니다. 지난 주 전도사님 거기 앉아있지 않았습니까? 자매 거기 않았었고 집사님 거기 앉아있지 않았습니까? 위에서 내려다보면, 교회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면 똑같은 사람들이 모여가지고 앉아서 맨날 않는 자기 자리에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중얼중얼 거리고 돈 몇 푼 내고 가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칠 때 그 현장이 일생이 바뀌고 삶이 바뀌고 인생의 목표가 변화되고 그리고 이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그런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만들어 지는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난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정말 마음이 변할지 모르겠지만 교인이 꽉 차도 이 장소를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정이 들었습니다. 화장실 앞을 내려오지만 그러나 진짜 정이 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진실로 사람들이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치는 이러한 현장들 속에 사람들을 불러서 하나님 앞에 세워줄 수 있는 교회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위해서 정말 기도해야 됩니다. 여러분, 교회가 가지고 있는 돈을 쓰면 없어집니다. 그리고 연약한 것들은 강해지다가도 또 약해집니다. 그러나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할 교회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표증은 달음질치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속에 살아 역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답답한 것입니다. 온 교회가 이렇게 간절히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가 어두운 이 교회 가운데 어두운 세상 가운데 달음질치도록 절박하게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이 언제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도 교회가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갔으니까 한 가지는 더 합시다. 다른 교회에도 이렇게 기도를 부탁했는데 데살로니가 교회에 부탁한 것이 정말 노골적입니다. 뭐라고 그랬는지 잘 보십시오. “주의 말씀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다른 골로새서나 에베소서에 이야기할 때도 전도할 문을 열어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 달라 이렇게 여러 가지 말로 부탁을 하지만 여기에서는 아주 깊이 부탁을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영광스럽게 되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에 뭐가 붙었냐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그러니까 결국은 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줄달음질치는 그러한 놀라운 역사를 경험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는 사도가 이 말을 하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차릴 수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수준의 기도를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보여 주시는 바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줄달음질 치고 지나갔더니 다른 교회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사모하며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의 부흥은 교회의 부흥에 절대적인 조건이 됩니다. 그러니까 개인의 부흥은 교회의 부흥에 절대적인 조건이 되고 교회의 부흥은 세상의 선교 역사의 판도를 바꾸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됩니다.
선지자들이나 예수님이나 이런 분들이 그렇게 한 세상을 사시면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고 비관하는 것처럼 사셨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이사야 선지자 같은 경우는 육 장에서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 앞에 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자기가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다스려 주실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사귀고 그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이 이런 영광스런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는데 그런데 눈을 뜨고 와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로 나아와 보니까 이름은 믿는다고 그러고 맨날 불 피우고 제사 드리는데 그런데 그 속에서 보니까 사람들이 보니까 그런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하나님과의 교통에 대한 갈망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때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 거룩한 임재가 자기 속에 달음질치는 이런 체험을 가진 이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인정받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이런 심정이 되어서 그 백성들에게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경험하게 되니까 그러니까 그러한 기도의 제목을 부탁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걸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 와서 우리의 영혼 가운데 줄달음질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체험하고 우리 자신이 달음박질하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받는 역사가 일어날 때 그 때 우리가 진심으로 교회 전체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역사할 때에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그 축복과 그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마음을 기울이고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말 부흥을 위해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러면 우리가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때에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 보다 훨씬 더 높은 그런 말씀의 삶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인정을 하면서 성경을 보기 시작하면 보입니다. 설교를 듣기 시작하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책을 읽기 시작하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딱 닫으면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책이 그렇게 쏟아져 나와도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치던 역사를 귀중하게 생각하면서 기록하고 있는 책이 거의 없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 때문에, 그러니까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모함이 없으니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하나님의 말씀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달음질친 것과 같이 그렇게 동일하게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는 일들을 위해서 사도가 간절하게 부탁할 때에 사도의 마음속에는 정말 그러한 말씀의 위대한 역사가 데살로니가 교회에만 일어났을 뿐 아니라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래서 이방인들 앞에 서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 속에도 동일하게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역사해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 또 다시 그들은 교회가 세워질 것이고 그리고 그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부탁 받았던 것과 같은 동일한 부탁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 되어가는 것입니다.
기도가 얕을 때는 기도가 거의 할 것이 없고 기도가 조금 깊어지면 기도할게 많고 기도가 아주 깊어지면 기도 제목이 아주 간단 해 지는 것입니다. 정말 폭풍과 같이 바람과 같이 그렇게 어두운 세상에서 달음질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역사 이것 밖에는 기도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중보 기도의 참된 능력 이것들을 깊이 이해하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깊이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들 모른다고 기도 안하니까 모릅니다. 기도하면 압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싶으면 그 사람이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지 알게 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알려주십니다.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 중보기도의 강한 끈으로 엮어질 때 그것은 마치 잘 짜여진 그물과 같아서 하나님의 손에 붙잡힐 때에 말하자면 커다란 역사를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이렇게 우리가 기도해야 할 기도 제목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 가운데 달음질 칠 수 있도록 이런 말씀의 역사를 우리에게 주실 수 있도록 이것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기도제목입니다.
8. 기도와 순종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6-7)
사도행전 16장은 2차 전도여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차 전도여행에서 세운 교회를 돌아보고 그리고 다시 전도계획을 세우는 그런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하는 것은 전도하고는 상관이 없는 그 이야기를 기도와 관련해서 오늘 이야기를 말씀 드려야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기도 I (1995.4.16 주일오후 8)
바울과 그 일행들은 1차 전도여행을 한 다음에 2차 전도여행에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냐면 더베와 루스드라에 이른 다음에 아시아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아시아로 복음이 들어가게 되면 중국 쪽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자면 전도여행을 하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길을 택했는지 거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안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이것은, 그래도 사도가 전도여행을 하고 교회를 세우고 그러면서 비교적 복음의 혜택들을 입을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팔레스타인 위쪽으로 복음의 혜택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복음의 혜택을 전혀 못 받았던 반대편으로 가고 싶었던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서 무시아 앞에 이르러서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를 않았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게도냐로 가게되었다 이 말입니다.
7절을 한 번 봅시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기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사도를 비롯해서 전도를 하러 여행을 다니던 일행들은 그냥 보통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탁월한 사람들 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재능이나 자질에 있어서 탁월 했다기보다도 말하자면 만천하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소명이 충실했고, 그 다음에는 이 복음전도를 다니는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그런 열망이 가득 차있었습니다. 또한 동시에 기도하면서 자신의 갈 길을 인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뒤편에도 보면 사도가 교회들에게 편지할 때, 꼭 전도할 문을 열어주도록 그렇게 부탁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을 볼 때, 그 사도들은 언제나 이전도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그런 불변하는 신앙의 고백을 했던 사람들 이였습니다. 그러니까 늘 기도하면서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고 하나님은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이 사람들은 비두니아로 가고 싶어서 한두 번 시도해본 것이 아니라 애를 썼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굉장히 많은 의문들을 갖게 됩니다. 우선 첫째는, 왜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못 전하게 하셨을까? 아시아에 있는 영혼들도 다 불쌍한 영혼들인데 왜 하나님이 아시아로 못 가게 하시고, 비두니아로도 못 가게 하시고, 마게도냐로 가게 하셨을까? 이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되겠습니까? 저는 확언하건대 바울의 일행이 마게도냐로 가면서도 왜 예수의 영이 비두니아에서도 복음을 못 전하게 하고 아시아에서도 복음을 못 전하게 했는지 그들이 대답할 수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그 당시로서는 왜 하나님이 아시아에 복음을 못 전하게 하셨는지 그것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추론해 낼 수 있는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명백하게 ‘하지 말아라. 하라.’ 이렇게 금지되어있는 것들을 억지로 하려 할 때에 그것도 불순종이 되지만 그러나 이렇게도 관계가 없고 저렇게도 관계가 없는 것 같은 일에도 하나님의 뜻은 그 속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예를 들면 ‘도적질하지 말라’ 그렇게 되어 있으면 그것은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저 물건이 탐나는데 훔쳐올까요? 아니 저 집에도 우리 집으로 장소 이동할까요? 할까요? 말까요? 그런 기도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이미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에. 기도하면 오히려 시험에 듭니다. 그건 즉각 순종해야 됩니다. 딴 짓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만 하셨지, 어디 가서 전하고 어디 가서는 전하지 말라 그렇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에 뭐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라.’ 그러니까, 만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아시아지방도 만천하고 비두니아도 만천하고 마게도냐도 만천하고 거기에는 죽어 가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거나 아시아로 가고자 애를 썼을 때 이 사람들이 비두니아나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러 갈려고 할 때 거기에 무슨 전도자로서 사심이 있었어요? 아무런 사심이 없었습니다. 비두니아로 가서 교회를 세운 후 사례금을 많이 준다든지 아니면 아시아 쪽으로 가면 설교 한편 하는데 몇 백만 원 돈을 준다든지 그런 거 전혀 없었습니다. 순수하게 영혼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동기 하나 때문에 복음을 전해왔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명령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껏 까지 전해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지금도 비두니아와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문제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결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동기가 순수하고 사심이 없는 것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있다는 증거는 된다? 안 된다?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 나쁜 일이었습니까? 좋은 일이었습니까? 좋은 일 이 세상에 누가 나와서 사도가 애를 쓰면서 동역자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지도를 펴놓으면서 아시아 선교를 위해서 비젼을 가지고 몸부림치면서 애쓸 때 누가 그 자리에 나와서 그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전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그 일을 기뻐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자, 동기가 순수하고 전혀 사심이 없고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고 싶어 하는데 이렇게 그렇게 동기가 순수한 것만 가지고 그 사람이 진정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무서운 사람은 누구냐 하면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사람들이 더 무섭습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사람들 속에 있는 그 편견이 훨씬 더 무섭고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편견이 더 높고 더 완고합니다. 정말 안 깨집니다. 그것은 문제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없고 그 일이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계획이고 그리고 그 일에 성취를 통해서 자기가 어떤 이득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또,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그 일이 성취 될 때 하나님이 정말 영광을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또, 그 일이 성취된다고 할 때에 결국은 그 혜택이 나에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가고 하나님께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기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수 있는 기도라고 하는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충격 아닙니다.
또 하나는 사도와 같이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분별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보여줍니다. 이 사람들은 뛰어난 영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면서 애썼다고 그랬는데 무엇을 애썼겠습니까? 가고 싶어서 애를 막 썼는데 비두니아 공안 당국이 돌아다니지 못하게 족쇄를 채웠습니까? 복음을 전하려 아시아나 중국 쪽으로 갈려고 애를 많이 썼는데 그런데 국교가 단절 되가지고 문이 막혔습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애를 쓴다는 것은 행동적으로만 애를 쓴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분명히 기도도 들어갑니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기도하면서 선교전략을 세우고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할것인가 하는 모든 노력을 마음을 다해서 기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썼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영은 성령입니다. 왜 예수의 영이라는 말을 쓰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보좌 우편에서 앉으셔서 이제는 당신이 하던 일을 성령을 통해서 역사 하시니까, 그것을 예수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특별히 전도사역과 관련해서 예수의 영이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의 영이 가로막는 것입니다. 못 가게 하는 것입니다.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 우리의 기도가 소모적인 기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양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 애를 쓰면서도 잘 성취되지 않고 있을 때는 믿음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삶 자체가 예수의 영이 인도하는 그 길을 따라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아무리 기도 많이 할지라도 우리는 이와 같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기도한다는 것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애를 쓰고 비두니아로 가고 싶어서 그렇게 애를 쓰고 노력을 했는데 그렇게 헌신되고 사심이 없이 복음사역 하나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잠시 분별하지 못하는 이런 혼란이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아무리 헌신되고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럴 수 있는 한계를 우리들이 깊이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일단 삶과 생각과 관심과 목표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쪽으로 들어서게 되고 그리고 그 길을 계속 걸어가게 되면 그 다음에 기도는 아무런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불신앙과 죄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야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화) 매달 부정한 돈을 상납 받는 어는 동사무소 직원의 은혜 받은 후 고민.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면서 기도의 영을 잃어버리고 기도가 안 되고 신앙이 약해지고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기도 그걸 압니다. 내가 이 길을 이렇게 걸어가고 하나님이 이 길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은혜가 떨어지고 기도의 응답이 없고 그리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들을 내가 얻지 못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당연하고, 지금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심이 없고 죄악의 길로 걸어가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기도의 영이 메말라버리는 불순종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극적인 죄는 아닙니다. 고의성이 있어 가지고 아주 용기를 내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범죄를 하는 고의적인 범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범죄는 오히려 해결이 쉽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늘 죄를 짓고 있다는 자책감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내 남편을 불러오라’ 하면 터질 수 있습니다. 그럼 문제는 뭐냐면 이렇게 만천하에 복음을 전하라 그래서 만천하 중에 아시아를 택했고 비두니아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라 그래서 복음을 전하라 그래서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우고 기도하라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전파의 역사가 Stop되는 것입니다. 전파가 안 되는 것입니다. 작동을 안 하는 것입니다. 멈추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성도들 속에 있을 수 있다는 그래서 요한 사도가 뭐라고 그랬냐면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든지 우리가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그 하나님께 받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의 계명을 지키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계명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와 있고 계명에 나와 있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뭐가 나오냐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과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 말하자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명을 전심으로 지킬 뿐만 아니라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나님이 기뻐하는지를 분별을 해서 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열심히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기 때문.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예화) 미국에서 아버지에게 뺨을 맞은 후, 한국인 2세 曰 “법에는 부모가 자식을 때릴 권리가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부모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도 그것을 안 하니까, 존속살해범이니 별별의 별 범죄가 다 나오는 것 아닙니다. 자식이 됐으면 부모를 부양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부모를 부양할 능력이 없으면 부모를 모시거나 아니면 생활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드려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되냐는 것입니까? 마치 동회에서 극빈자 구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것이 부모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까? 마땅히 그 일을 하되 그 이외에 부모가 기뻐하는 일들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부모가 금하는 것은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믿으라는 것 빼놓고는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나 하지 말라는 하지 않아도 그것으로 다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서 더 무엇이 부모에게 필요하고 어떤 일을 해야지만 부모가 기뻐할 것인가 생각하면서 그 기뻐하는 일을 해줘야지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하지 말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지를 분별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행하며 살지 않는 것도 불순종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 하는 말이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애를 써야지만 자신을 드리는 제사가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지만 자신을 영적으로 드리는 제사가 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걸 보십시오. 얼마나 이런 함정이 있습니다. 헌신됐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사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복음전파의 열정이 모든 섬김의 동기입니다. 이외는 생명과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아시아에서 죽음이 기다린다고 해도 기꺼이 달려갈 사람이고 비두니아에서 순교에 칼이 기다린다고 해도 기꺼이 달려갈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헌신됐고, 우리는 사심이 없고,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고 이렇게 자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일단 죄를 짓는 불순종의 길을 걸어 들어가면 그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죄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그렇게 원하시지 않는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그러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기도의 영을 말리시는 것입니다.
(예화) 목사님 대학원 2학년 때, 아시는 집사님이 그 교회 담임목회자로 청빙하고 싶어서 교회에 한 번 선보이려고 하셨던 사건. 결국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하면서 돌아왔습니다. 말할 수 없는 그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제가 담임목회자 없는 그곳에 가서 말씀을 전한다는 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도 누가 보더라도 비난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 교회에 간다 그럴지라도 그것이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내가 그 자리에 서있을 때에 그 자리에서 내가 살아가기를 원하는 삶이 있는 것입니다. 그걸 원하는데 그 길은 잠시 분별을 안 하고 내가 원하는 길로 가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교회 가서 기도도 안 되겠지만 붙들고 매달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 들으시겠습니까? 안 들으시지. 언제나 그 자리로 돌아와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서있기를 원하는 그 자리에 서있지 않는 사람들의 기도는 의미가 없다고요. 하나님이 서있기를 원하는 그 자리에서 서있는 사람이 아니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화) 시골목회하시는 분이 요번 부흥회 후에, 서울로 가기로 결심. 부흥강사가 창세기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거기 두사” 하는 말씀을 전함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거기서 있을 때 기도가 능력이 나타나고 기도도 거기 있다고 저절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으면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고 그 기도가 역사하고 그 기도가 변화를 일으키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지.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리에 있지 않는데 아무리 사람들에게 내가 여기에 필연적으로 있어야 할 수밖에 없다는 사정을 아무리 변명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해준다고 해도 인정 안 해주시면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큰 길만 가도록 제시해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작은 길도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그렇다 고해서 누구 말처럼 쌀가게에 가서 한말 살까요? 두말 살까요? 통성기도 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하나는 무엇을 행하든지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뜻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모든 문제들을 쉽게 결정하는 사람들은 어렵게 인생을 삽니다. 간단간단 결정하는 사람은 복잡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 길이 아니구나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예화) 목사님 길 물어보시는 것을 싫어하는 것에 대해 길을 물어보지 않은 대가는 모두 내게로 온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도 동일한 것입니다. 아무데나 사심 없이 그것을 선택한다는 것이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일 수가 없습니다. 이런 뛰어나 성령의 사람들도 실수를 했습니다. 그렇죠.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후에 모든 교회들에게 선교에 있어서도 커다란 경종을 울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심중을 헤아리라. 너희의 선교의 계획 말고 하나님의 심중을 헤아리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라. 그러니까, 더군다나 결혼 같은 것들을 내키는 대로 덜컥 해버리는 사람들을 보면 참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나서 그때 내가 성령의 인도를 못 받은 것 같아. 벌써 아이도 몇씩 되는데, 그때 어떻게 합니까? 돌이킬 수 없는 것들도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다고 해서 모든 것들이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그런 것들은 돌이킬 수 없지 않습니까? 돌이킬 수는 없지만 모든 영적인 면에서 충분한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충분한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이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애썼다’ 그랬는데 난 이것을 기도와 관계시키고 싶습니다. 애쓰고 힘쓰고 간절한 기도도 그 사람의 삶의 태도 그리고 서있는 자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자리라면 애쓰는 것도 소용없고 힘쓰는 것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순종부터 먼저 고쳐야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돌아와야 됩니다. 하나님이 서있기를 원하는 자리. 우리가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두신 자리가 있지 않습니까? 저에게도 마찬가지로 지금 있기를 원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이동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여기 서있기를 원하는 이 자리는 비워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워있게 되면 간절히 기도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기도의 능력으로 작용을 안 하는 것입니다. 여기 있어야 됩니다.
(예화) 배가 맞바람으로 가느냐? 바람을 타고 가느냐? 이것의 엄청난 차이.
우리는 단순히 그런 게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이 역사 하시고 하나님이 움직이시지 않으면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움직이고 그리고 교회를 이 험한 세상에서 파도를 헤치며 진군할 수 있게 만드는 그 힘은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의 엔진을 돌릴 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의 방법과 인간의 지혜도 어느 정도는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 하셔서 그것을 움직이셔야 되는데 그런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제도와 방법 같은 것들도 힘이 약한데, 그것이 성령이 기뻐하시지 않는 맞바람 치는 그 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 그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애를 쓰고 힘을 쓰는데 이것을 간절한 기도라고 착각을 하면 문제는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힘을 쓰고 애를 써도 이것이 뭔가 큰 장애가 부딪쳐서 내가 애를 쓰는 것인지 아니면 기도를 딱 하려고 하는데 성령이 우리를 뒤에서 밀어주시면서 추진을 하는데 악한 세력들이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는지 이 두 차이는 아주 분명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사심이 없고 순수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니까, 힘쓰고 애쓰는 것이 별로 유익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애를 쓰고 순수한 마음으로 많이 했는데도 결실을 맺기 어려운 것입니다. 비두니아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아시아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그런지는 모르지만 결과론 적인 이야기겠지만 선교학자들이 공통된 이야기는 만약에 이 복음이 아시아 땅으로 들어가서 중국으로 들어갔다면 그러면 그 복음이 우리나라를 통해서 일본을 통해서 태평양을 건너야하는데 아마 선교의 역사가 오늘같이 이렇게 번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첫째는 우선 중국을 제외해놓고는 이쪽지방으로 내려와 가지고 전부다 가난한 민족이었습니다. 결국은 복음이 전해졌다하더라도 일본쯤 와 가지고 끊어졌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전파의 길이 끊어지거나 또 하나는 중국이나 이쪽을 지나올 때 너무 미신과 종교들이 너무 무성했기 때문에 결국은 그 복음이 불교권이나 이런 데로 들어오면서 말하자면 다 뭉개져서 복음이 이상한 복음으로 변질됐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네스트리우스교입니다. 경교. 기독교신앙이 들어왔는데 중국을 거쳐 오면서 신앙이 변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랬을 거라는 것입니다. 또 결국은 결과론적인 이야기겠지만 마게도냐로 들어가게 되니까, 마게도냐는 나라는 그렇게 큰 나라가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 마게도냐는 바로 헬라나라입니다. 헬레니즘의 주인입니다. 시대는 로마시대였지만 헬라문화가 온 땅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마게도냐에 들어오니까, 마게도냐를 중심으로 해서 로마제국 전체에 퍼져있는 문화의 물결을 타고 그 복음이 쏜살같이 흘러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이 다 잘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구라파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잘사는 나라들의 문화적인 혜택이 동방으로 전해져 내려오면서 복음이 타고 흘러 들어오는 그래서 결국은 복음이 한 바퀴 도는 이러한 역사를 하나님이 기대하셨기 때문에 결국은 그쪽 방향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해석이 어느 정도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일리는 있다고 일단은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렇게 매달리면서도 하나님의 영이 그것을 막고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제발 봐서 우리를 복음으로 도와달라고 구걸하면서 간청하는 장면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때 비로소 바울을 비롯한 그 일행은 그 비젼을 해석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비두니아나 아시아가 아니라 마게도냐에 복음을 전하라는 뜻인가 보다 그리고 마게도냐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 들어갔더니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되고 그 복음이 3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온 유럽의 땅에 복음이 편만하게 전해지는 괄목할만한 역사를 하나님께서 심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자기가 노력한 것 이상의 성과가 있습니다. 조금 기도했는데 크게 추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하급수적으로 그 기도에 축복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그래서 난관이 부딪히고 어려움이 부딪치지만 그러나 기도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뒤에서 미신다고 하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구하면 기도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댕기시는 것이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허리에 끈을 묶고 준비, 땅! 하고 달려가다 당겨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서 마게도냐를 건너서 우리를 도와라 그러니까, 거기에 가서 마게도냐로 떠나가기를 힘썼다 그랬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에 순종하면서 그렇게 마게도냐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힘쓰니까, 하나님께서 복음의 문을 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은 다시 막혔던 전도의 문이 열리면서 말하자면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다시 한 번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간절함, 기도의 능력, 사모함, 끈질긴 기도, 이 모든 것들도 중요하지만 한 번쯤은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삶 자체가 하나님이 나에게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을 원하시는가, 그것을 전면적으로 검토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기도가 점점 약해지고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강한 추진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 그 원인이 결국은 기도의 간절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만 계속해서 생각하지 말고 한 번쯤은 그런 간절함을 하나님께서 자꾸 앗아가시는 이유가 결국은 내 삶의 자리가 정말 전적으로 이 자리가 아닌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점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필요합니다. 헌신된 사람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확신이 충만한 사람들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신념이 있는 사람들에게 더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이 많을수록 우리가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해야 됩니다. 『구령의 열정』을 쓴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님이 자기는 매순간 묻는다는 것입니다. 이일을 하는 것을 기뻐하시는가? 그리고 내가 여기 서있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는가? 자기에게는 기도보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주 정확한 지적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여기 서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데, 거기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데 거기서 기도하는 게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서있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좋아하시지 않는데 그가 거기서 하는 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자리 기뻐하시지 않는 자리에 서있으면서 우리들이 아무리 간절히 기도한다하더라도 거기 기도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점검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을 바꿔야 되고 고쳐야 됩니다. 그때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러한 기도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함도 나오는 것입니다. 대부분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었던 사람은 간절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간절한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하게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자리에 서있을 때 간절하게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 주님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는 길속에서 사는데 어떻게 간절히 살 수 있겠습니다.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이런 귀한 교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귀한 교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헌신되고 사심이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깊은 불순종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정리해야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번 한 주간동안 우리들이 한 번 기도해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여기 서있는데 여태까지 하나님의 인도였고 그리고 그렇게 서있는 것이 하나님이 좋아하신다 그리고 내가 여기 서있었는데 하나님 내가 여기 이런 모습으로 이런 삶의 태도로 이런 식으로 서있는 것을 하나님이 슬퍼하시고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우리의 기도에 영이 마르고 우리의 기도의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 우리에게 정말 마게도냐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보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삶을 고칠 때 우리의 기도가 큰 힘과 능력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9. 기도자의 삶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침례를 베푸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침례를 받더라”(요 3:22~23)
오늘로서 주일오후에 기도에 대해서 설교하던 시리즈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일 낮 수요예배 주일오후 전부다 시리즈가 끝났습니다. 오늘 기도에 있어서 마지막 부분입니다. 우리 지난 시간에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보면서 아시아로 가고자 하였지만 그 길이 막히고 거기서 바울과 그 일행들이 마게도니아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헌신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만하지 말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아니면 우리가 열심히 기도를 하면 할수록 그것이 하나님에게 좋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눈치로 살아야 합니다. 보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지 좋아하시는지 알아야지 기도를 세게 해서 하나님을 넘어트릴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기도의 교훈을 요한일서에서 사도가 주면서 그 기도를 삶하고 연결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와 삶, 삶과 기도 이거는 서로 유통하는 것입니다. 삶을 넘어서는 기도도 할 수 없고 그리고 기도를 넘어서는 삶도 살수가 없습니다. 기도는 삶속에 갇히고 삶은 기도 속에 묶입니다.
그러니까 수준 높은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수준 높게 사는 사람이고 또 수준 높은 삶을 사는 사람은 수준 높은 기도가 뒤에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모든 요소들이 이렇게 하나가 줄달음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하나가 줄달음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전부다 서로 때어놓을 수 없이 묶여서 앞으로 함께 전진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뭐라고 그러냐면 요한 사도는 이전에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도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더 자신의 많은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로 가려고 할 때 사람들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자 “하늘을 원하여 이땅에 불을 내리기를 원하나이까, 심판을 하기를 원하옵니까?” 할 정도로 과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품이 변해갔습니다. 결국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품이라는 것이 원래 다 악한 것이지만 그 성품이 변화되어지는 과정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깨어져야 됩니다.
늘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도 부서져야지만 새로운 삶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깨어지고 부서진다 하는 것이 결국은 부딪쳐가지고 세상의 풍파를 많이 겪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 깨어진다 부서진다 하는 것도 결국은 기도입니다. 풍파를 많이 겪은 것 너무 자랑하지 마십시오. 풍파를 자랑하지 말고 인격을 자랑합니다. 그러니까 풍파 속에서 시달려서 그래서 주님을 만나서 다듬으신 나를 바라봐야지 바라보면 자랑할게 뭐있습니까? 뭐가 자랑할게 있습니까? 들여다보면 시커멓습니다. 그렇게 깨어지고 부서진다 하는 이야기는 결국은 깨어지고 부서지는 그 승복은 어디로 표현되느냐면 기도로서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자칭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이 오시더니 “너 너는 목사감이다.” 나는 그때 구원의 체험도 없고 교회에 그냥 덜렁덜렁 다니고 그러던 땐데 조그만 아이한데 “넌 목사감이다.” 그래서 속으로 “목사하려면 자기나 하지. 왜 나한테 목사를 하라고 그러나. 나는 이다음에 돈 많은 장로할거야. 그래서 기분도 조금 쓰고 이러면서 살고 싶어.” 그렇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쭉 살아왔는데 결국은 하나님이 마지막 승복할 때 그때 결국은 기도로 승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때로는 불같이 다가오시기도 하지만 그러나 여러분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도 바울 같은 사람들의 체험이 아니라 서서히 다가오십니다. 정말 인내심을 가지고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서서히 우리의 마음을 녹이시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이렇게 잘못되는 것 같아도 확 이렇게 꺾으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모여서 제각기 신앙생활 하는 것이 확 꺾는다고 꺾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이렇게 걸어가는 걸 만약에 하나님이 확 꺾으신다면 우리는 목뼈 부러지고 발목뼈 부러지고 허리뼈 부러지고 우리는 성한 데가 없을 것입니다. 인간들은 얼마나 잔인합니까. 말을 막 채찍질 해가지고 달립니다. 채찍질 하니까 이 말은 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딱 스톱을 해야 될 때는 어떻게 합니까? 사정 볼 것 없이 고삐로 딱 잡아당기니까 결국은 입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발을 높이 들고 하늘 꼭대기를 향하여 소리를 지르고 살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잔인한 것입니까? 자동차도 그렇게 브레이크를 밟으면 자동차가 못 살겠다고 난리를 치는데 살아서 달리라도 채찍질 할 때는 언제고 막 잡아당기면 인간의 신앙과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시편 130편에 보면 “하나님도 우리의 체질을 아시나니” 하나님도 우리의 처지를 아시니까 그런 식으로 다루시지 않으시고 다가오셔서 인격적으로 다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녹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다 녹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놈이 잘 녹지를 않아. 돌멩이 같이 딱딱해가지고 그러니까 안 녹으면 하나님께서 더 뜨거운 사랑의 날개 속으로 품으시는 것입니다. 엊그제 어떤 어른들하고 같이 식사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을 쓰는 그 용인술에 대해서. 말하면서 뭐라고 하냐면 정말 대적자를 만나거들랑 그 대적자를 그 자리에서 밀치면 그 사람은 자기의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품어서 자기의 사랑의 날개 속에 집어넣어가지고 뜨거운 사랑의 날개로 품어가지고 그 마음을 완전히 녹여버리면 그 사람은 자기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우리를 다루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녹이시는 것입니다. 안 녹을려고 그러지. 녹을 때 다 녹은 다음에는 녹은 것이 감사하지만 그러나 맨 처음에는 진짜 녹는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을 녹이시는데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가오셔서 녹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승복하게 됩니다. 그렇게 승복하고 하는 것들이 결국은 결정적인 항복이 어디서 일어납니까? 기도 속에서 일어납니다.
저도 신학을 안 한다고 맨날 그랬습니다. 신학 안하고 다른 것 한다고 별 꿈을 다 꾸지만 하나님은 영락없이 막으시면서 그리고 결국은 인격적으로 결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주일학교가 시작이 되는데 혼자서 일주일동안 금식을 하면서 기도를 하는데 그때 기도를 할 때는 사실 내가 신학교 가야겠다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가운데, 그래서 내가 젊은이들도 그렇게 늘 말을 하는데 교회를 뜨겁게 섬겨야 됩니다. 열린교회에 와서는 가만히 말씀을 듣고 정리를 하고 그리고 가닥이 잡히면 그다음에는 자신의 몸을 던져서 열심히 섬십니다. 섬기다가 보니까 절박한 기도 제목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설교 안하고 목회 안하고 교회봉사 안하고 아무것도 안하고 그리고 남의 교회 가서 뒤에 앉아서 예배나 드리고 졸다오면 기도 제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지않고 사는 사람이 무슨 기도 제목이 있겠습니까? 나는 교회 봉사를 딱 석달을 쉬어봤는데 기도할게 없습니다. 뭐 할게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전심으로 살아서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삶을 살아야지만 절박한 기도 제목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교회 와서 신발장이라도 정리하면서 하나님 앞에 섬겨야 됩니다. 그렇게 섬기니까 기도 제목이 나오지 않습니까?
여름성경학교를 해야 되는데 전도사님은 없고 나는 총각 집산데 총각 집사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 사람 보고 직장에는 어떻게 아둥바둥 해가지고 휴가를 얻어놨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기도하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주일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마음을 녹이시는 것입니다. 십년 이십년 끌어오던 걸 항복하면서 “주님, 내가 내 인생을 드립니다.” 승복은 기도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한도 바로 그런 깊은 승복을 통해가지고 사람이 사랑의 사도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사랑이 충만했으면 사람이 마지막에 너무 기운이 없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부축을 받아가지고 강대상에 올라가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하고 한마디만 하고 내려가면 온 교회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들이 결국은 무엇이냐면 하나님 앞에 승복인데 하나님 앞에 승복은 “네 하나님, 당신이 대단한 힘이 있는 걸로 내가 인정을 해주겠습니다.” 그런 것이 승복이 아닙니다. 자신의 무가치함을 전폭적으로 느끼고 그리고 하나님만이 은혜로우시고 자기는 가치가 없고 하나님만이 전폭적으로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을 깊이 인정하고 그 사랑에 감격하고 그래서 자기의 쓸데 없는 아집과 모든 고민들을 꺾어서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깨어질 때 어때요. 아푸죠. 안아푼게 어딨습니다. 너무 아푸지. 너무 아푸지. 아파요. 때릴 때 얼마나 아파요. 깨어질 때 아픈데 아푸기 싫으면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아푸기 싫어서 가만히 있으면 그러면 개꼬리 삼년 묶어서 황보가 안되는 것입니다. 맨날 같애요. 예수를 맨날 믿어도 신앙 인격도 맨날 그 정도, 영적인 생활도 맨날 그 정도, 생각하는것도 맨날 세속적이고 형식적이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속에서 아침에 설교한데로 인격이신 성령을 계속 슬프게 하는 삶을 살고 그 관계의 진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때요. 나중에는 어떻게 되냐면 그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평범한 성경의 진리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힘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처음서부터. 그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그 힘을 의지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시고 미워하신다고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날 상당히 중요한 설교를 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많이는 못했지만 기회가 대면 다시 설교하겠지만 그 아삽의 지적이 기가 막힌 것입니다. 다윗의 이야기가 솔로몬이 준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을 버리는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고의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지 않으면 버리는 것입니다. 무슨 왜 그런 의미가 됩니까? 우리로 하여금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정상적인 삶을 살게 만드는 힘이 우리 안에 인격으로 계신 그 성령을 통해서 그런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도움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자기 힘으로 넉넉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거든요. 그거를 성경은 하나님을 버린 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일주일 동안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또 하루 살았고 앞으로 일주일 동안 살 것입니다. 생명 주시는 날까진 우리 이 땅에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뭔가 움직이고 하여튼 살아 갈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도 이젠 어쩔 수가 없습니다. 뭐 실수했다면 그건 큰일 날 말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제 물릴 수가 없습니다. 일수불퇴! 바둑에서도 한 수 안 물러줍니다. 신앙에서는 더더군다나 물러주지 않습니다. 일수불퇴입니다. 들어설 수 없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그 힘과 그 능력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결국은 자기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시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일주일 동안 살았는데 결심은 고상하지만 항상 살아가는 삶은 고상하지 아니하고 천박할 때가 많습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그러나 내 힘과 내 뜻대로 삽니다. 그리고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라고 할 때 무슨 자기가 엄청난 고난을 겪는 것처럼 그래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다 자기 벌어서 자기 먹는 건데 무엇을 그런 생각을 하느냐 이것입니다. 잘못했으니까 결과가 자기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곤고한 길을 걸어갑니다. 그 속에서 수단을 생각합니다. 방법을 꾸며냅내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 가듯이 휘도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판단력도 흐려지고 혼돈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살아가면서 소용돌이치면서 그러면서 밑도 끝도 없는 깊은 침체 속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식하게 고백을 해보십시오. 내가 살고 싶은 삶을 못 살았습니다. 못 살았으면 그러면 그 못산 이유는 많은 이유를 대지만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나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게 하는 그 하나님의 능력이 내안에 역사해서 그가 나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시도록 성령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걸 슬퍼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포함해서 일주일을 실패한 삶을 살고 와서도 뻔뻔합니다. 가책이 없습니다. 후회도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자고 그러면 일주일 동안 개판 치면서 살았는데 주님, 대단히 유감이라고 생각하는 바이올시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동안 사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뻔 한 실패입니다. 그래도 마지막에 결국은 그 실패가 반복되고 반복되면 죄가 쌓이고 싸이면서 자기가 숨도 쉴 수 없는 극한 상황으로 하나님이 몰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왜 평소에는 안합니까? 그런 마음이니까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깨어지는 경험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걸 아셔야 됩니다. 이러고 가만히 있는데 오셔서 뻥 터트리시고 아닙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가운데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면 깨어져본 경험이 없습니다. 이렇게 교회 나오고 헌금내고 예배드리고 절기 때 헌금내고 와서 봉사하고 이런다고 깨어지는 것 아닙니다. 깨어지지 않으면 자기 인격에 발전이 없습니다. 상승이 없습니다. 그걸 기억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사람들이 아니면 깨어져 본 경험이 없는 것입니다. 내 평생소원은 환경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깨어지라고 환경을 그 앞에 놓은 것입니다. 깨지면 그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그것은 사탄의 시험입니다. 깨지도 않은 사람이 환경이 깨어지는 것을 눈앞에서 경험하게 될 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식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평탄한 길을 걸어가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되면 안 됩니다.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 듣기 좋은 이야기 하면서 서로 좋게 지내다가 함께 지옥에 가서 반상회 하는 게 낫습니다. 아니면 얼굴 붉히고 눈물 흘리고 회개하고 정신 번쩍 차리다가 생명수 강물이 흐르는 생명나무 실과가 있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천국에서 동창회를 하는 게 낫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피차에 사람을 즐겁게 하는 사람들이면 안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찾고 갈망하는 것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만 그러나 기억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갈구하는 가운데 자신이 깨어지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그렇게 불같은 성격을 가졌던 사람이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럴 정도로 변화된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깨트려지는 걸 통해서 변화된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그렇게 깨트려지는 전형적인 형태가 기도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는 것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가장 쉬운데 예배시간 십오분 전에 나옵시다. 안 고쳐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는 것은 숨길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야단치는 게 아닙니다. 숨길 수가 없습니다. 갈망이 있으면 그것도 숨길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것입니다. 그때 깨어짐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그 기도가 자신을 깨뜨리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그렇게 과격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도가 주님을 섬기고 주님과 함께 동행 해 오면서 말년에 사랑의 사도로 바뀐 것입니다. 속된 사람이 거룩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완악하던 사람이 변해서 사랑의 사람이 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살다가 잠깐 동안 가셨지만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모든 삶으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나타냄으로 다시 제자들의 인격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사도가 하는 이야기는 “우리는 무엇을 구하는지 그에게서 받는다.” 여러분, 이것을 그냥 평범하게 봐 넘기지 마십시오. 무엇이든지입니다. 이것이 지금 사도가 그럴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그 교훈을 몸소 사실이라는 사실을 체험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가르쳐 주셨습니까? 더군다나 그 예수님이 가르쳐준 것을 자기가 기억하고 있다가 자기 복음서 속에 썼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그대로 시행하리라. 무엇을 구하든지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라. 그리하면 내가 행하리라.” 그거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했다가 자기 손으로 썼습니다. 그런데 손으로 썼는데 이번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교인들에게 들려주는 가운데 썼는데 그 속에서 뭐라고 그러냐면 이번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무엇이든지 구하면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쓰지 않고 이번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의 말로 바꾸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뭐라고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그에게서 받는다. 무얼 구하든지 그에게서 받는다.
이 편지를 쓰는 사도의 마음도 이 편지를 읽는 교인들의 마음도 이 이야기에 대해서 다 공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구하든지 우리가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그들의 삶속에서 입증된 이야기입니다. 삶속에서 몸소 체험하고 그리고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무엇이 무엇이든지 구하면 우리가 그에게서 받는다는 것을 받는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다 구하는 걸 받습니까? 우리는 구하는데 못 받는 게 왜 그렇게 많습니까? 두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우선 하나는 설교 속에서 이야기 할 것이고 또 하나는 뭐냐면 이들은 하나님 앞에 구하기전에 전에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기뻐하시지 않는가를 분별할 수 있는 정도의 영적인 수준 속에서 산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하고 아이들하고 씨름이 뭐냐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들 길러보면 “안돼.” 가져서는 안 될 것들을 달라고 때를 쓰면서 우는 것입니다. 칼 달라고 그러고 가위 달라고 그러고 성냥 달라고 그러고 화장품 엎겠다고 달라고 그러고 뜨거운 다리미 달라고 그러고 물 끼엊는 호수 달라고 그러고 가스불 자기가 켜겠다고 그러고 그거 달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 어떻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안돼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점점 자라고 지각이 들면 여러분들 부모님한테 가서 지금 우리 이십대 삼십대 된 다음에 부모님한테 가서 무엇을 이야기 할 때 ‘안돼’ 소리를 두 살 세 살 때하고 똑같이 듣고 있다면 여러분 정신병자입니다. 벌써 압니다. 용돈을 탈 때도 부모님 화가 났나 안 났나 눈치를 보면서 달라고 그래야지 불난 집에 불붙이면 가다가 용돈을 고사하고 욕이나 얻어 먹습니다. 다 압니다. 분별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구하면 부모가 아무리 좋아도 슬퍼할 것이다 이런 것들을 안단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장하고 분별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에게서 받는다 할 때 이거는 방종하게 아무거나 그냥 눈감고 그냥 나와라 뚝딱 그렇게 구한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슬퍼하신다는 사실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들이 수많은 기도 응답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주님 승용차를 그랜저로 바꿔주십시오. 이런 기도 했겠습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십이기통짜리 외제차를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니면 사도들이 주님, 우리에게 최고급 양복을 한벌씩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했겠습니까? 우리 애들 훌륭한 대학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이런 기도 했겠습니까? 거기서부터 벌써 신앙의 수준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기도를 많이 하는데 공수표가 계속 난발되고 있으면 여러분들의 수준을 다시 재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기도를 무한하게 바겐세일을 열어놓고 거기가서 기도하는 것을 기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수준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욕망이 정화되고 삶의 동기가 정화될 때 그들은 기도 응답의 확률이 더 높아지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욕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변화되지 않고 자신이 깨뜨려지지 않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나오는 기도가 깨뜨려지지 않는 기도입니다. 그야말로. 그런데 그렇게 무엇이든지 구하면 우리가 그에게서 받는다. 우리가 이 얘길 더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그러냐면 이는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기뻐하시는 바를 행하기 때문이라고 그랬습니다. 우선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사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깨어 있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기도 자체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욕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야 되겠다는 삶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진 사람들 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 없어져 버리고 타내야 되겠다는 것들은 곤란합니다. 바겐세일 하는데 가보면 진짜 머리가 터지려고 합니다. 그런걸 보고 머리가 터진다고 그럴 것입니다. 막 사람들이 몰리지도 않다가 백화점 같은데서 깜짝 세일합니다. 딸기가 이천오백 원짜리가 팔백 원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우르르 몰려 이동하면서 그 틈 사이를 머리를 비비고 들어가서 그거 한두근 이천 원어치 사다가 먹고 살찌겠다고 말입니다. 세속적인 것입니다. 그런 열망 그런 욕망이 그렇게 예민합니다. 그런 욕망을 기도에 그대로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기도에 그대로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물론 바겐세일해서 딸기 싸게 사서 돈 몇천 원 버는 거보다 더 큰 이익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하시면 하나님께서 딸기밭을 송두리째 우리에게 주실 수도 있습니다. 정 원하면 진짜 원하면 딸기밭 아들한테 시집보내실 수도 있습니다. 가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화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입니다. 그것은 깨어짐 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무엇이든지 받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기 때문이다. 그 계명을 지킨다는 것에 대해서 사도는 뭐라고 설명을 하느냐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라 이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분명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라” 주님의 말씀을 생생하게 기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사랑하면 그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어떤 관계에서 나오냐 하면 기도 응답의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무슨 관계라고요? 무슨 관계를 통해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킨다 그랬는데 오늘 기도 응답 받는 것이 계명을 지키기 때문에 받는다고 그랬습니까? 결국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어떤 관계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에서 기도 응답이 기도가 올라가고 기도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격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간들은 그런 인격적인 접근이 너무 피곤합니다. 자신의 전체를 다 노출해야 됩니다. 인격적인 관계에선 자신이 다 노출되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 학교 소속된 교단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는데 인허를 받으면 그것은 제도이긴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강도사라는 것은 이제는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옛날로 말하면 설교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설교했지만 교회가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교회가 위탁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심각한 순간입니까? 그걸 잠바때기를 입고 왔습니다. 몰상식한 것입니다. 거기도 목사님 한분이 있었습니다. 소리를 꽥 지르면서 “저것들 다 잘라.” 공식석상에서 그랬습니다. 인성이 되먹지 않은 놈들이라고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한 달에 월급 오육십 만원 받는 직장에 취직하려고 그래도 면접을 보러갈 때 잠바때기에다 운동화 끌고는 안 올 텐데 그러고 왔다고 그럽니다. 왜 그러고 왔냐니까 옷이 없어서 이러고 왔다고 그러더랍니다. 말도 안 돼는 것입니다. 도대체 앞으로 나가서 무슨 목자가 된다고 자르라고 소리를 쳤더니 노회장이 데리고 가서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도록 야단을 쳤는지 결국은 식전에 참석도 못하고 다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그 계명을 전심으로 지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러니까 자기들이 그 순간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했다면 그렇게 하진 않는 것입니다. 뭐 중심이 하나님께 드려지면 된다. 그런 사람들이 중심 훈련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학교에서 레포트를 받아 봐도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글씨가 깨끗해야지 속에 내용도 있지 글씨가 개차반이면 내용도 개차반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이렇게 구하는 모든 것을 다 받는데 그 받는 것만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강도사 인허를 받으러 오는데 그렇게 와가지고 와서 예배나 드리고 가니까 그렇지 만약에 개인적으로 면접을 한다고 그러면 감히 그렇게 못 올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가보면 토큰 판매소에서 토큰을 팝니다. 그 속에 파는 사람이 남잔지 여잔지 손을 보곤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돈 집어넣으면 토큰을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한테 갈 때 아이고 토큰 사러 가야지. 그리고 넥타이 메고 머리 빗고 갑니까? 그렇게 안 합니다. 그러나 어른을 뵈러 갈 때 그렇게 단정하게 하고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후자는 인격적인 관계이고 앞에 있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돈 주고 그냥 토큰 사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비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지만 거기서 기도 응답이 주어지고 뭐든지 주어지고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하는데 싫은 것입니다. 차라리 불교에서 절 삼천 번 하면 응답해준다고 하면 나중에 삼천 번 하고 깁스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은 속편한 것입니다. 예배를 드렸는데도 “인격적인 관계가 바르냐?” 돈을 냈는데도 “주님의 자녀로서 의무를 다했느냐?” 그건 뭐 수요예배 나와서 예배드리고 구역예배도 참석하고 교회 와서 성가대 밥도 하고 다 했는데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격적입니까?” 이것이 못 견디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어치워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또 주님을 사랑하는,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내가 알고 그런 관계가 되어졌을 때 기도를 많이 했다고 해서 그것을 응답받지 못했다고 해서 막 주저앉고 괴로워하고 그러겠습니까?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럴 수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결국은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에 메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는 싫고 주고받는 관계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관계로 부르시지 않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렇게 인격적인 관계를 언제든지 버릴 수 있고 내 문제만 해결 해 주고 해결 해 달라고 요청하고 청구서와 결산서가 오고가는 관계를 택했다면 신앙을 잘못 택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뭐 미신을 믿든지 다른 데로 갔어야 맞는 것입니다. 여기는 번지수가 틀렸습니다.
여기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선행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왜 우리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일 수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께서 한없이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이용하고 싶어 하고 인간은 신앙을 이용하고 싶어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푸신 당신의 애정을 미끼로 해서 우리를 노예삼거나 아니면 우리의 믿음을 이용하시거나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성도들이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특히 구약의 기록들을 읽어볼 때, 여러분들은 지금 제 이야기를 듣고 나면 구약에서 나오는 신실한 하나님이라는 이야기를 쉽게 못 넘길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사람들은 그 중동지방 그 자체가 전부다 신들의 천지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신이 많습니다. 얼마나 신이 많습니까? 부뚜막엔 부뚜막에 신이 있어서 심통이 나면, 심통이 나서 한번 흔들면 국에 맛이 가는 것입니다. 밥이 타고 그것도 다 신들의 장난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장독대엔 장독대에 신이 있어가지고 화딱지 나면 딱 쳐 버리면 장맛이 완전히 가는 것입니다. 화장실엔 화장실 귀신이 있어서 가끔 나이든 사람들을 가게 만듭니다. 혈압이 높은데 변을 보느라고 막 힘을 주니까 꿀꺽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혈압 높으신 분들은 화장실에서 아주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죽으니까 이상합니다. 밥 잘 먹고 노래 부르면서 뒷짐 지고 걸어간 사람들이 화장실에서 시체가 되서 발견되니까 그것도 귀신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처마 끝에도 달리고 터줏대감도 있고 온갖 신들의 천지입니다. 이 나라도 그랬습니다. 중동 지방에도 수많은 신입니다. 그런데 이 신이 그냥 이렇게 뭐 이 사람들이 신들이 축복해 주는 것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하고도 비슷합니다. 신이 축복 해주는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신들이 너무 심통을 부리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보면 홍수가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설화가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이 패악해서 물로 심판 하셨다고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신들이 모여서 쉬는데 밑에서 인간들이 너무 시끄럽게 굽니다. 그래서 “야 물부어.” 신이 물을 부으니까 홍수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신들이 괴팍하고 변덕이 심합니다. 자기네끼리 암투하고 고자질하고 막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그 아래서 어떠하면 그 신들의 비위를 맞출까 하고 전전긍긍하면서 일평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신들의 속에서 시달리면서 살아오는 자신들의 삶을 보았고 조상들의 삶을 보았고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을 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느 날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시는 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마음에서 “신실하신 하나님, 주의 신실하심은 궁창에 미치나이다.” 노래할 때 그 감격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구약을 한번 봐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그런 신을 믿어본 적이 없으니까 이해가 안 가겠지만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십시오. 수시로 변하는 주위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수시로 변하는 무엇보다도 여러분들 자신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보십시오. 오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걸어 나가고 그리고 며칠 있다가 나와서 실컷 실패해 놓고서도 유감이옵나이다. 한마디로 입을 씻는 게 우리 마음입니다. 이런 신실하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봅니다. 그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무엇을 구하든지 받는다고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해먹을 생각도 했고 신앙을 이용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 수준에 놓고 한번 잘 살아 보려는 생각도 갖고 인생을 편하게 살아보려는 생각도 갖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수단으로 생각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보고 “왜 우리를 구하셨습니까” 물으면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왜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까?”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삼천포로 나가도 “그래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항상 거기에 계시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구할 때 주시는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신실한 성품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한없이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뭐냐면 계명을 지키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또한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고 계명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뉘우치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하면서 자신의 삶이 바뀌어가면서 기도가 영적인 수준이 깊어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의 수준이 깊어진다고 하는 것을 너무 신비하게만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기도의 수준이 깊어지는 것이 어느 날 하나님이 영적인 은사를 주셔서 그 사람의 기도가 수준이 높아지는 것, 이런 것들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끊임없는 도전과 시련 속에서 자신이 깨뜨려지고 까지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계명을 지키는 삶, 그걸 통해서 하나님이 응답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기뻐하시는 바를 행하기 때문에 우리가 받는다. 쉽게 이야기해서 술을 먹지 말라는 이야기는 성경에 안 나옵니다. 신학교 다니면서도 술 먹는 학생들을 많이 봤습니다. 대학원 다닐 때도 맥주한잔 했다는 학생들도 있고 그랬는데 그들은 뭐냐면 자신들이 이렇게 얽매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폭 넓은 신앙이 있다는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도 디모데에게 자주 나는 속병을 위하여 물만 먹지 말고 포도주도 먹어라. 왜 그런 성경 구절만 잘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누가 술을 먹어도 그 사람을 정죄할 순 없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신약에서 나오는 ‘아디아포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뭐냐 하면 아무래도 괜찮은, 절대적으로 정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담배 피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땐 담배가 있기 전이니까. 마약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땐 마약이 없었지 않습니까? 마약, 이런 것들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성령이 안에 계시는 사람들은 그런 일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토레이 목사님이 1900년대 초 사람입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우리는 춤 문화가 발달이 안 됐습니다. 그러나 미국 같은 데서는 춤과 포커, 이것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18세기만 되어도 영국은 어느 정도였냐 하면 지하실에 무도실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사교계에 끼지를 못했습니다. 나는 처음 봤는데 어느 집에 가보니까 지하가 진짜 바로 되어 있었습니다. 쓰진 않는데 내려가 보니까 대리석으로 깔아놓고 구석에 바가 있습니다. 거기 얼음 창고도 있고 조명이 들어오고 그곳에 이제 내려가서 춤추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서 온 거냐 하면 미국, 영국, 이런데서 온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 사람들이 춤에 완전히 생활화 되어있었습니다. 토레이 목사님은 절대 반대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경이 안나와있지 않느냐고 하는데 누가 나에게 그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면 나도 그 일을 행하겠다.” 이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확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술 먹고 남의 집 여자를 가슴에 안고 춤추면서 불빛 아래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목사님 이야기는 단도직입적이고 간단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설사 나쁜 생각을 안 한다고 치더라도 나쁜 생각을 안 하는데 왜 그렇게 하고 안하느냐 그것입니다. 그 일을 자기는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이 하라고 하신 것 말고 아디아포라 그런 것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전심으로 찾고 추구해서 그대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 응답을 받았던 삶입니다. 그러니까 이 삶, 계명을 지키고 전심으로 그의 기뻐하는 바를 행하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추구하지 않으면서 이런 삶이 가능하겠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계명도 다 못 지키고 사는데 그것은 물론 거의 다 지키도록 노력을 하고 그거 가지고도 하나님 앞에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충분치가 않아서 그렇게 성경이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도 위에서 기도하면서 무엇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헤아리면서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살아 드리는 것 이것이 쉽겠느냐 이 이야기입니다. 이런 삶을 사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구하시든지 우리가 받나니” 이것은 ‘받을 것이다, 받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사도가 무엇을 구하든지 우리가 주님께 받는다고 합니다. 듣는 사람도 편지를 받으면서 고개를 끄떡끄떡 그랬습니다. 우리 서로 다 아는 이야기다 경험해본 이야기다 이것입니다.
삶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는 그 사람의 기도에 변화가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물건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원하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자녀들이 부모가 주지 않으면 어디서 먹겠습니까? 자녀가 부모가 입히지 않으면 어디서 입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아주 갓난 애기 때뿐만 아니라 장성할 때까지는 부모에게 신세를 지는 것입니다. 그것 부담스러워 할 필요 없습니다. 부모에겐 그것이 특권입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일학년도 안 되서 “내 힘으로 자립하겠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자기가 벌어서 먹는다는 것은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대십시오. 쌀 떨어지면 주님한테 기대십시오. 학비가 없으면 주님한테 기대십시오. “주님, 학비가 없습니다.” 기대라는 이야기입니다. 잘 데가 없으면 “주님, 내가 오늘 어디서 잡니까. 해결해 주시옵소서. 책임져 주시옵소서.” 기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기대야지 그런 일이 생길 때만 기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있어도 “주님, 주 없이 잠들 수 없사옵나이다.” 기대는 것입니다. 그런 인격과 사랑의 관계 그것이 신앙의 요체입니다. 이건 기도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무엇인지를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계명을 지키고 그 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것들을 행하면서 살았던 이런 사도들의 삶이 있으니까, 교인들의 삶이 있으니까 그 속에서 그들은 모두 무엇을 구하든지 우리가 받는다는 이야기를 다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산 것입니다.
삶이 하나님을 향한 사람들은 모든 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과 자기를 위하는 것이 분리되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분리되지 않으니까 구하는 것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들만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실 수 없는 것들, 기도해도 주님이 주실 수 없는 것들은 계명을 지키고 그의 기뻐하시는 바를 행하며 살아가는 이 사람들에게는 갖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갖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기도를 통해서 시험할 일이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이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향해서 선회해야 됩니다. 돌아와야 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기도와 간구와 모든 것들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는 계명이라고 말할 때 이 계명을 성경 66권에 나와 있는 모든 이야기, 그걸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계명은 모든 것을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사도가 오늘 여기서 특별히 깊이 체험했던 바는 무엇이냐면 그 계명은 이것이니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 상황 속에서 사도에게 강하게 도전하고 또 사도의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강하게 도전하고 있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형제 사랑이었습니다. 왜, 이단들이 일어나는 가운데 교회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 사이에 극도의 경계와 미움과 반복들이 교회에 팽배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기도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어떤 것을 어기면 하나님의 계명이 덜 기뻐하시고 더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계명을 우리가 지켜야 되지만 사도는 자신들의 상황에서 특별히 깨닫게 된 것이 오늘 우리들이 놓여있는 형편에서 하나님이 주신 기도의 응답들을 받지 못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의 계명을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기도 하나 어떠하면 효과적인 기도를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하면서 성경을 폈는데 결국은 그거 하나만 딸려 올라와서 카드가 하나 나오면서 “이리로 가시오.” 이렇게 표시가 되어 있으면 아주 실천하기 좋겠는데 하나 빼니까 계속해서 딸려오는데 결국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이 다 딸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느끼는 것은 전체적인 개혁이 일어나지 않고는 기도의 변화가 안 일어나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흥이 일어날 때 그때만 순수한 열망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만지고 지나가실 때 그때 사람들은 기도의 영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는 사람들은 그런 복스러운 일들을 위해서 사모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정상적인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사도는 얼마나 기도의 제목에 기도 응답에 방해가 되는지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웨슬레가 이야기했듯이 기독교는 혼자 믿는 종교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없습니다. 성경은 아는바가 없습니다. 필연적으로 함께 묶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사랑하지 않을 때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 결국은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라이라는 관계도 온전한 관계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두 관계는 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제물로 다 내어주기까지 헌신되고 불꽃처럼 자신을 태워드리는 사랑의 삶을 산 사람들이 누구입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 입니다. 오늘 누가 원수를 향해서 손을 벌리고 내 품으로 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그 사랑에 한없이 감동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수직적인 사랑과 수평적인 사랑이 분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막대기만 서있고 아니면 가로 막대만 서있고 세로 막대만 서있는 그런 것일 수 없습니다.
사도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기뻐하는 바를 행하는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가 하나님 안에서도 성립되어있지 않은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전체적인 삶을 포괄하는 내용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집회에 가면, 초창기 때 집회에 가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첫 번째 말씀전한 다음에 그다음에는 우리 가운데 미워하는 마음, 그리고 우리 가운데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들 먼저 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와 삶을 주님께서 엮으셔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도는 얼마나 자기가 살아오면서 또 그 교인들을 돌아보면서 깊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못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들이 받는 영적인 해독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차가 가기 위해서는 요란스럽게 시동을 거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길을 치워야 됩니다. 길을 치우지 않고 계속해서 밟으면 타는 건 바퀴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차가 망가집니다. 길을 치우고 그리고 앞길을 연 다음에 장애물을 치우고 그리고 달려야 합니다. 그래야 수렁에서도 나오고 언덕을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것으로서 만족치 않지만 기도 시리즈를 일단 마칩니다. 그러나 기도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설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에게 당부하는 바는 뭐냐 하면 기도 시리즈를 다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그 말씀에 대해서 삶으로 반응해야 됩니다. 그래야 기도에 변화가 옵니다. 그리고 기도로 삶을 바꾸려고 애를 써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삶의 변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께서 받는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여기서도 결론은 부흥입니다. 무엇이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이 나오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감격한 삶을 살고 싶어도 안 나오고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드리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가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하고 싶어도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바꾸어서 그렇게 주님만을 위해서 살고 그 계명을 지키고 그것도 모자라서 기뻐하시는 것을 다 찾아서 행하기 전까지는 속이 시원치 않은 사람으로 바뀔 수 있겠느냐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부흥을 주실 때 그들에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완전한 변화에 이르기를 사모하면서 오늘 주신 말씀을 붙들고 자신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면서 이 관계의 변화가 일어나기를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됩니다. 그리고 간구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보다 완전한 관계를 사모하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메시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