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새로운 것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애3:22-2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한 것은 주전 586년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우상 숭배의 불순종을 경고하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에 의해 침공 당하게 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은 자신이 예언을 했고 자신이 죽은 후에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경우였지만 이 사람 예레미야는 자기가 예언한 내용이 자기 시대에 이루어지는 비극적인 광경을 목격해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황폐하게 된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선지자가 지은 탄식의 노래가 바로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바로 이 비극적인 광경을 통해서 오히려 현실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굳게 하였습니다.
II. 고통 받는 날의 희망
분명히 시인은 커다란 환란 가운데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고통 가운데 그는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암담하고 어두웠어도 하나님이 그 모든 현실을 능가하는 당신의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음을 믿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A. 인자와 긍휼
그는 제일 먼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찬송하였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인자로 번역된 ‘헷세드’()는 하나님이 당신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베푸시는 언약적 사랑을 뜻합니다. 그리고 긍휼이라고 번역된 ‘라함’()’이라고 하는 단어는 비참한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슬픔어린 사랑을 뜻합니다. 이 단어의 뿌리가 ‘레헴’()이라는 단어인데 ‘레헴’은 여자의 자궁, 혹은 태를 가리킵니다. 한 여자가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 아이를 갖고, 그 아이가 태안에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산달이 가까워오자 아이는 가끔 발길질을 하며 태동을 합니다. 엄마는 그 아이가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을 충분히 느낍니다. 그리고 산기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때 이 어미의 자기의 태속에 있는 아이를 향한 사랑이 어떠할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바로 긍휼이라는 마음의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긍휼은) 하나님이 마치 자신의 몸 안에 있는 혹은 그가 낳으신 친자식처럼 그렇게 운명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엾이 보시고 그들이 비참할 때에 슬픔을 동반한 사랑으로 그들을 아끼시는 것을 가리킬 때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로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하나님이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을 이루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시련을 주셔서 나라를 멸망당하게 하셨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멸망당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탄식으로 이 노래를 시작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3장에 와서 그는 비극적인 현실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의 풍성함을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그 중요한 찬송 제목이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었습니다.
어디 이것이 260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었겠습니까? 오히려 이것은 지난 한 해 동안에도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이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가진 모든 인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뜻은 그 모든 인류가 당신을 알고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친히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값주고 사셔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아들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은 그 아들과 혼인을 맺은 교회에 부어지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 베푸신 사랑에 참여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찬란한 햇빛과 같습니다. 색깔도 모양도 없지만 그 찬란한 빛은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일곱 가지의 찬란한 빛깔의 무지개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지만 비참한 자에게는 긍휼로 나타나 슬픔을 동반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또한 곤경에 처한 자들에게는 이 하나님의 사랑이 구원으로 나타나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여전히 살아계시고, 그들을 건져내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십니다. 궁핍한 자에게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필요한 물질을 주심으로 우리는 가난하지만 하나님은 하늘 부자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끊임없이 불의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정의를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굽고 휘지 않는 진리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세계는 우리들이 신앙의 눈을 가지고 보면 이런 찬란한 하나님의 사랑의 빛깔로 가득 찬 아름다움의 나라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된 때도 있었고, 우리의 뜻한 대로 되지 않은 날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기뻐했지만 때로는 가슴아파했던 날도 있었고 또 슬퍼했던 시간들도 있었습니다. 며칠 전 새벽기도에 나와서 기도를 하는데 일생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리고 한해 전의 나의 삶도 펼쳐져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시련과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아왔는데 알고 보니 그 모든 시련은 오히려 하나님의 인자를 보여주는 기회였고, 내가 죄와 불순종으로 비참해지는 때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때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는지를 배웠습니다. 갑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터져 나왔습니다.
(찬양)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우리에게는 나쁜 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좋은 일은 원래부터 좋은 일이었기 때문에 좋게 되고, 나쁜 일은 그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좋은 일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 기쁘고 즐거웠던 시간들뿐만 아니라 시련과 고난 속에서, 외로움 속에서 홀로 눈물을 흘렸던 많은 날들도 (우리에게) 하나님을 찬송할 제목이 됩니다. 왜냐하면 거기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은 일체의 인자하심과 긍휼로 여러분들을 붙드셨습니다. 때로는 시련과 고난의 계곡을 지나고 쓴 물을 머금어야 하는 마라와 같은 인생의 벌판을 지날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당신의 자녀인 여러분들이 탄식하고 흐느끼며 ‘하나님이여 어디 계시나이까’ 라고 물을 그 때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하였고 그리고 바로 그때 내가 너와 함께 고난을 당하였노라’고 말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에 대해 올바르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에 대한 우리 인간의 반응이 바로 믿음이요 감사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그 분을 향해 감격할 수 없습니다. 폭풍과 어둠속을 지나는 것 같이 앞일을 알 수 없는 때에도 우리에게 하늘에 빛나는 북극성처럼 우리의 길을 인도하는 별빛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며 그 분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을 향해 바라보던 눈을 들어 위엣 것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가 알 때에나 모를 때에나 지난 한 해 동안 변함없이 당신의 인자와 긍휼로 우리를 붙들어 오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지금이라도 찬송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눈으로 지난 한 해의 삶을 돌아보며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선하게 대해주셨으며 그리고 비참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엄마 같은 불쌍히 여기는 사랑으로 나를 찾아오신 아버지이셨는지를 기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빕니다.
B. 주의 성실함
마지막 두 번째는 주의 성실하심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성실’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래 히브리어에 ‘에무나’()’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단어는 부사인 아멘이라는 단어와 같은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에무나’라고 하는 이 단어는 믿을만함, 신뢰할만함, 혹은 진실함,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다윗의 위를 영원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원히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버리셨습니다. 적어도 버린 것 같았습니다. 나라는 멸망하였고 그리고 영광스럽던 예루살렘 성은 겁탈당한 부녀와 같이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예루살렘의 비참한 멸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양식을 구하러 다니기에 바빴습니다.
사라진 예루살렘의 영광을 보며 눈물로 통곡하던 이 선지자의 눈에 과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믿어졌을까요? 아마 처음에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애가라고 하는 이 노래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공교롭게 ‘에카’()라고 하는 ‘아, 슬프도다’ 혹은 ‘오오 어찌하여’라고 번역될 수 있는 탄식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1장, 2장을 지나면서 시인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능가하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을 읽어냈습니다. 눈에 보이는 다윗의 위는 끊어졌어도 하나님께서 또 다른 영적인 방법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실현해 나가실 것을 믿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아주 버리시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시련과 연단을 통해 남은 그루터기들을 정결하게 하여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이 선지자의 눈에는 하나님의 지극한 성실로 보였고, 바로 그 성실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향해 베푸신 인자와 변함없는 긍휼의 시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있는가 하고 회의를 하여야 할 바로 그 대목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노래할 수가 있었습니다.
시인은, 이것이 시의 형식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선지자는 또한 시인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저는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선지자요, 시인인 예레미야는 바로 하나님의 한 성품에 감격하며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고, 불순종하고, 그 언약을 깨뜨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성실함과 그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한번 맺은 당신의 언약에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으신 하나님, 언제나 거기 계셔서 역사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불변하는 사랑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8장은 노아 홍수의 심판이 지나간 후 하나님이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는 광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라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1-22)”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자연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다 더 큰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대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도덕 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실하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도덕적 성실하심입니다.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하여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배신을 당하셨기 때문에 공의의 원칙으로 보자면 배신을 심판으로 갚으시는 것이 정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끊임없이 당신을 배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없는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악함과 불순종에 하나님은 당신의 인자와 긍휼을 거두지 아니하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사랑의 덧없음과 이스라엘을 향한 당신 사랑의 영원함을 대비하게 하셨습니다.
C. 하나님을 바람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이 이런 성실하심으로 우리를 붙드셨기 때문에 불순종했는데도 우리들이 아주 진멸되지 않았고 때로는 오류에 빠지고 악한 길을 걸어갔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여전히 이렇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자들로 삼으셨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지를 못했습니다. 지금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사람도 언젠가는 신앙으로 살았고, 지금 신앙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불신앙으로 미끄러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변함없이 붙드시는 주님이 안 계셨더라면 우리 모두 우리 스스로의 잘못에 인하여 영원히 미끄러져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과 그리고 일체의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붙들어 우리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예화) 예배 들어오기 전 책을 읽다가 들어왔는데 유명하고 복음적인 기독교 철학자 한 사람이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친구 중 한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포기하고 불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을 찾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만나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이 철학자는 “네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그리고 네 생각은 잘못됐다. 이러이런 것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올바른 사상이 아니다.” 라고 그를 공박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후 며칠 후 그 친구에게서 편지를 받았답니다. 긴 편지 속에 그가 최근에 겪었던 그 너무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들과 혼란들의 경험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비극적인 삶을 이어오고 결혼생활의 비극과 슬픔, 그리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고 합니다. ‘당신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준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당신이 나한테 물었던 그 크고 두려운 질문에 대해서 답할 자신이 없지만 언젠가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 다시 답할 수 있게 될 때 나는 꼭 당신에게 답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문제는 그 편지를 받고 이 철학자가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깊이 후회하고 자신을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그 철학자가 반성한 것이 자기에게 이런 인자와 긍휼의 마음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기독교에 대한 큰 교리를 물어보지 말고 조용히 그가 얼마나 힘겨운 인생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가 왜 그렇게 어려움을 당해야 했는지, 그리고 왜 신앙을 내려놓을 정도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그냥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자책으로 자기를 책망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때로는 악을 행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번에 우리를 후려치시거나 발로 밟아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때로는 우리에게 오류가 좀 있을지라도 우리의 흐느낌에 동참하시고 눈을 감으면 아침에는 다시 눈 뜨기 싫은 그런 날에도 거기 주님이 함께 계셔서 우리가 울 때 함께 우시고, 우리가 한숨 쉴 때 함께 그 소리를 들으며 우리로 하여금 그 인생의 시련의 계곡 속에 우리가 홀로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런 성실하신 성품으로 여러분들의 인생을 지난 한 해 동안 인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혼자 두신 것 같은 때에 사실은 여러분들이 그분을 떠났기 때문이지 그 분이 여러분들을 홀로 내버려 두셨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있었던 모든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찬양)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III. 적용과 결론
주님의 성실하심으로 살아온 한해였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엄숙히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대부분의 나쁜 일들은 대부분 우리 자신의 잘못 때문이었지 그분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것은 좋은 대로 좋게 해 주시고, 나쁜 것들은 주님을 의지하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그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바꾸어 결국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찬송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났던 우리에게 변함없이 자비와 긍휼로 성실히 대해 주셨습니다. 마치 어머니와 같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아버지이셨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우리된 것은 주님의 은혜이고, 거미줄 같은 믿음이라도 우리들이 아주 버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당신의 자녀로 선택하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언약에 변함없이 충실하신 그 성실함 때문에 오늘 여기에서 우리 주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마음에 깊이 새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때가 많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언제나 사랑스러운 자녀였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를 붙들어 주신 1년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을 마음 깊이 찬송하며 다시 한 번 우리 주 밖에 우리가 진정으로 사모할 분이 없는 것을 고백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