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생애와 기도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하늘을 연 기도(눅3:21) 2001.4.22 주일오후 1
2. 광야의 금식기도(눅4:1-2) 2001.4.29 주일오전 15
3. 새벽에 기도하신 예수님(막1:35) 2001.5.6 주일오전 29
4. 예수님의 기도생활(눅6:12) 2001.5.13 주일오후 40
5. 무덤 앞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요11:40-42) 2001.5.20 주일오후 48
6. 변화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눅9:28-29) 2001.5.27 주일오후 57
7. 기도의 감화를 끼치신 예수님(눅11:1) 2001.6.3 주일오후 69
8. 예수님의 중보기도(눅22:32) 2001.6.10 주일오후 82
9. 습관을 좇아 기도하신 예수님(눅22:39) 2001.6.17 주일오후 95
10. 간절히 기도하신 예수님(눅22:44) 2001.6.24 주일오후 105
11. 십자가에서 남긴 첫 기도①(눅 23:34上) 2001.7.1 주일오후 119
12. 십자가에서 남긴 첫 기도②(눅 23:34上) 2001.7.8 주일오후 131
13. 십자가에서 남긴 둘째 기도(마27:45-46) 2001.7.15 주일오후 140
14. 십자가에서 남긴 셋째 기도(눅23:46中) 2001.7.22 주일오후 149
1.하늘을 연 기도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눅3:21)”
오늘부터 예수님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훑으며 예수님의 생애에 나타난 중요한 기도의 장면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제가 이 계절에 이런 시리즈를 시작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가을이 되면 마음의 생각이나 경향들이 내면으로 많이 향하게 됩니다. ‘한해동안 무엇을 하며 살았나. 낙엽은 떨어지는데 한해동안 일구어 놓은 것이 무엇인가’반성하면서 겸비해지고 자기를 성찰하게 됩니다. 계절적으로도 가을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내면을 응시하면서 성찰하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물론 개인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가을은 지적인 활동도 활발해지고, 그래서 독서의 계절이라고 불려지기도 합니다. 자기반성과 지적인, 영적인 성숙을 위해서 매진하기에 좋은 때입니다.
그러나 봄은 정반대입니다. 괜히 마음이 들뜨기 쉽고 왠지 박차고 바깥으로 튀어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분산됩니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목회를 하면서 교인들을 돌보기가 가장 힘들 때가 지금부터 시작해서 여름수련회 끝날 때쯤 됩니다. 십자가 사경회를 고집스럽게 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맞불을 질러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기도에 대한 교훈을 깊이 성찰하고 자기 자신을 세우는 일이 시급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성경은 기도에 관한 교훈들을 수없이 담고 있지만 저는 특별히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묵상하면서 제 자신의 기도생활의 원천을 삼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에게는 일생에 거쳐서 가장 커다란 감화를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기도를 배우는 것도 의미가 있고 소중한 것이겠지만 특별히 영원한 우리의 모본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그분의 고난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기도의 생애를 보면서 감화를 받는 것은 저에게 있어서 한없는 감동과 기도생활의 깊이를 더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감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생동안 주님의 생애의 기도의 장면을 통해서 받았던 감동들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초기생애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고 승천하시는 날까지의 모든 생애를 아우르면서 거기에서 주님의 기도에 관한 장면들을 택해서 한번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 기도의 첫 장면으로 그 배경은 아주 깊은 산골이나 뭔가 신령한 일들이 일어날 것 같은 높은 산, 아름다운 기도원에서의 기도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으로 붐비는 요단강 가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삼십 년 동안의 사생애가 있으셨고 그 생애동안에도 예수님께서는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삶을 사셨고 경건한 생활을 해오셨기 때문에 깊은 기도생활 속에서 그의 사적인 생애를 보내셨으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사적인 생애에 있어서 그분이 어떻게 깊은 기도 속에 사셨는지에 대해서 거의 침묵하고 있고 성경의 몇 구절을 제외하고는 그분의 개인적인 성장에 대해서도 거의 성경은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몰라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그분의 공적인 생애에 집중적인 포커스를 제공하면서 예수님의 생애를 상세하게 기록해서 우리에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이 장면은 아직은 공적인 생애의 시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유대광야에 들어가서 주리시고 사십 일을 금식하신 후에 시작된 생애가 진정으로 공적인 생애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는 점에서 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이 시점은 공적인 생애와 사적인 생애를 갈라놓는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첫 번째 기도의 장면은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즉각적으로 이런 의문이 제기됩니다. “세례가 무엇이뇨?”하는 교리문답에 있어서 여러분들은 “세례는 죄 씻음의 표요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표적입니다”하고 답변을 했습니다. 원래 이 세례는 불결을 씻는 표징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죄 씻음을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례는 우리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 씻음의 표가 세례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이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었고, 만약에 이 세례가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표적이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과 하나될 필요가 없으니 이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실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할 때 그 세례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 그 삼위 일체의 이름 속으로 이 세례를 통해서 신자가 연합되는 광경을 의미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고 할 것 같으면 이렇게 죄를 씻고 하나님과 하나되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례라고 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진실한 죄에 대한 참회가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이 수세 사건은 우리에게 더더욱 이해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이 모습은 우리와 똑같은 모습이지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그 의미는 우리들이 받은 세례의 의미와는 다르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없는 이 세례 받으시는 독특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데 첫째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는 이 장면은 바로 메시아로서 공적인 취임을 하는 표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 씻음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이 세례의 사건을 통해서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왔으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었고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들린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음성은 두 가지 사실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치고 있으니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인 침이며,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서 하실 일들에 대한 인 치심이니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 즉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나는 좋아하노라”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인 치심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로서 공적인 취임을 하게 되시고 이 공적인 취임을 통해서 감추어져있던 메시아가 아니라 드러난 메시아로서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고 인류 구속의 대업을 이루시기 위한 첫 발을 역사 속에 내디디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두고두고 사도들에게 회상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았던 요한은 물론이거니와 또 그 광경을 전해 들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회상할 때마다 이 장면을 회고하였습니다.
또 하나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의미는 죄인은 아니시지만 죄인인 우리와 한 형제라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독특한 사랑의 방법을 입증하셨으니 즉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죄인과 동일한 한 부류의 사람들처럼 세례를 받으심으로 당신이 우리들과 한 몸을 이루는 한 지체라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죄인은 아니시지만 죄 있는 지체들과 함께 한 몸을 이루신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들의 세례 받음에 참여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한 지체되심을 입증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되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지만 죄인들과 하나되셨고 죄 없으신 분이지만 인간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슬픔과 아픔, 고통, 유혹을 한 몸에 받으시면서 자기가 구원해야할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자리가 어떤 것인지 직접 내려와서 맛보면서 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을 배우게 되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백성들을 온 몸과 마음으로 사랑하시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넘치는 긍휼과 사랑으로 구속해야할 자기의 백성들이 어떻게 죄와 결별할 수 없는 부패한 인간이 되었고 그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고 앙망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알게 되었으며 전적으로 타락한 그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 그것밖에는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터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자기의 백성들을 위해 온전히 내어주심으로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백성들을 인도하는 목자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선교의 한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니 도성인신의 선교의 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선교하기 위해서 유대인의 모양으로, 헬라인들을 선교하기 위해 헬라인의 모양으로 나타나 그들 가운데 도성인신의 삶을 살면서 그리스도를 전했던 사도 바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아름다운 자기 낮아짐의 선교의 원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통해서 터득했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한 인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먼 곳에서, 거룩한 교회에서 정죄의 돌멩이만을 던지는 것으로서는 그들을 선교할 수 없습니다. 주님 없이 살수 없는 우리들이 처음부터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을 결코 필요로 하지 않던 사람들이었음을 기억하며 그들의 마음, 그들의 자리로 내려가서 그들처럼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면서 사는 그러한 백성들로 이어가는 삶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도 이 부분은 수동태로 적고 있으니 하늘이 자동으로 열린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여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열려졌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누가 이 닫쳐진 하늘의 문을 열었는지 보십시오. 하나님 이외에 하늘의 문을 여실 분이 누가 있겠으며 닫쳐진 그 하늘을 하나님 이외에 다시 활짝 열어놓으실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말라기 이후로 성경을 기록하는, 소위 정경 선지자들이 그쳤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그러한 위대한 역사가 말라기 이후 400년 가까이 그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은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그 문이 굳게 닫히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너무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민족들에게 포로가 된 생활은 그치지 않고, 그들을 지배하는 나라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들은 이 성경이 기록되는 시기까지도 여전히 역사의 부침을 계속하면서 바뀌는 이민족의 말발굽 아래서 살아가는 압박 받는 피지배 식민지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의 문이 열린 이야기들도 성경에 많이 나오고 닫히는 이야기들도 많이 나옵니다. 하늘의 문이 굳게 닫힐 때, 제일 먼저 일어나는 비참한 일은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사 시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각기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참된 신앙의 도리를 잃어버려서 거의 무정부 상태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 냈습니다. 유일신 신앙은 간 곳 없이 사라지고 사람들 사이에 마땅히 깃들여야 할 정의와 공평과 인자는 사라졌습니다. 폭력이 지배하는 비참한 시대가 되었고 여호와가 누구 신지 여호와의 행하신 위대한 일들이 무엇인지를 새카맣게 잃어버린 세대들로 가득 찬 시대가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가 사라지게 되니까 순결한 유일신 신앙을 가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삽시간에 그 신앙을 모두 잃어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비참한 이민족과 다름이 없는 백성들로 변질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 당시를 생각해보십시오.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하늘의 문이 굳게 닫히고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자 유대교라고 하는 아주 이상한 종교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신봉하고 성경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참된 계시의 말씀을 전해주는 선지자들이 그치자, 구약종교의 뒤를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구약의 참된 의미를 풀어서 그들에게 종교의 도리를 설명하실 때에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박해하고 핍박하다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정도로 그렇게 성경과는 완전히 다른 이교에 가까운 거짓된 종교들을 만들어 내고 그 아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벌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무리 경건하게 살아가려고 애쓰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있다고 할지라도 하늘이 열리고 참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더 이상 들리지 않자 이제 그들에게는 참된 신앙의 도가 무엇인지 오리무중이 되었고 그들은 영적으로 방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하늘의 문이 닫히고 나면,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게 되면 여러분들의 영적인 생활은 급속히 빛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만일 일주일만 해가 빛을 잃어버린다고 하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아마 상상할 수 없는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논밭에 있는 수많은 작물들은 아마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될 것이고 이상 기온으로 인해서 생태계에 엄청난 변화가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이 활짝 열리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깃들여 그 말씀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인도하실 때에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와 강퍅함으로 인하여 하늘의 문이 닫히고 더 이상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깨달아지지 않을 때에 우리의 영혼의 핍절함을 경험하게 되고 그 속에서 우리는 영혼이 열려진 하늘의 문 앞에 사는 이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잘 모릅니다. 설교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늘 쏟아 부어지고 은혜가 내릴 때에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심령이 고갈되어서 몇 번만 설교를 죽을 쑤고 나면 하나님 앞에 깊이 겸비해지게 됩니다.
보십시오. 하늘의 문이 닫히고 나면 여러분들에게 은혜는 없습니다. 그렇게 가슴을 파고 들어와서 나를 녹이고 내 인생에 깊은 감화와 은혜를 주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동이 사라지고 우리의 심령에는 깊은 어두움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계시의 은혜 속에서 살기보다는 우리의 마음대로 우리의 상식과 우리의 판단을 기초로 허둥대면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마치 더듬이를 잃어버린 귀뚜라미와 같이 어디로 뛸지를 모르고 방황하는 그런 신세가 되어버린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화) 집회를 가다가 어두운 시골길에서 차의 라이트가 모두 나가게 되었는데 단 1미터도 갈 수 없었다.
그 때 제가 깊이 깨달은 것은 우리의 영적인 상황도 이렇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길은 캄캄한 어두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면서 가는 것입니다. 시편의 기자가 말했듯이 “여호와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그것이 시인의 고백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백입니다. 짐승과 같이 무지한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셔서 주님의 빛이 들어오게 하실 때에 나는 비록 판단이 어리고 미약하지만, 그리고 주위는 캄캄한 어두움이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비추어볼 때, 어느 길은 걸어가야 할 길이고 어느 길에는 함정이 놓여 있는지 어느 길에는 한 번 빠지면 큰 덫에 걸려서 살이 찢기고 뼈가 드러나도록 몸부림을 쳐도 그 덫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지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 문이 닫히면 그것이 딱 끊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 살 수 있습니까? 얼마나 위험합니까? 온갖 구덩이와 함정, 지뢰, 덫, 이런 것들이 가득 찬 숲 속을 시력도 없는 소경이 더듬어서 산길을 걸어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하늘이 닫히면 우리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에게 있어서 소중한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우리의 귀에 들리는 것입니다.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사업이 조금 안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직장을 잃어버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가장 큰 문제는 하늘이 닫히고 더 이상 인격적인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늘이 닫히면 우리의 기도의 문이 닫힙니다. 예전에는 곤고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주님이 우리의 위로였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날 몰라라 해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는 타오르는 사명과 같이 되어서 우리 주님에게로 흠양되고,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받고 나면 항상 넘치는 위로와 그 기도에 대한 보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 문이 닫히고 나면 더 이상 기도할 수도 없고 기도해도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로 열납되는 경험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늘의 문이 닫히면 우리는 결국 곤고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빛을 받지 못하는 식물처럼 먹을 것을 잃어버리고 마실 것을 찾지 못하는 짐승처럼 그렇게 기갈을 면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입니다. 저는 일만 명의 교인들로 교회가 붐비는 것보다는 얼마 안 되는 공간이지만 새벽기도에 교인들이 가득 차서 자기와 교회와 잃어버린 영혼들과 하나님의 복음에 의해서 전복되어야 할 세상을 위해서 간절하고도 열렬하게 기도하는 그런 교회를 백 번이라도 더 원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귀한 사람은 높은 학력을 가진 유능한 사람, 많은 물질을 가진 사람,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열린 기도의 문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열린 기도의 문을 통해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 속에서 사는 사람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예화) 부자들이 꽤 많은 교회여서 어렵지 않게 교회를 지을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헌금을 했는데 실망스러운 액수였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은 한 부자들의 재산은 그대들의 교회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지갑의 회개는 심령의 회개의 절반이올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심령이 두 번 찢어지면 지갑은 반쯤 열립니다. 그러나 유능하고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이 주님에 의해서 점령되면 너무나 훌륭한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은 열린 문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열린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활짝 열려서 뭐든지 다 받아들여지는 교회인줄 알고 자유를 느꼈다고 하는데,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습니다. 간판을 보고 열린 교회에 들어가면 예배도 굉장히 신나게 드리고 모든 것이 용납되는 자유로운 교회일 것이라고 하는데, 이 ‘열린’이라고 하는 말은 ‘opened to the heaven’입니다. ‘하늘을 향해서 열려졌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아무 것이나 다 들어와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열려있다는 의미입니다. 보십시오. 요즘 ‘개방’ ‘열린’하는데 하늘을 향해서 열려지지 않은 곳이 세상을 향해서 문을 열어 놓으면 세상에 의해서 지배되는 일 말고 뭐가 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하늘을 향해 열려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부흥에 관해서 오해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착각 중 하나가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면 한 두 사람이 기도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능력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는 착각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항상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에 의해서 부흥이 왔다기 보다는 순결하게 자기를 다 드리는 소수의 사람들, 그들 앞에 열린 하늘의 문을 두신 사람들이 그들의 자기를 쏟아 붓는 기도와 헌신을 인정해 주실 때에 부흥의 놀라운 역사가 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그 앞에 열어두신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지 모릅니다.
하늘의 문이 닫히고 나면 그런 기도 생활이 불가능해집니다. 기도생활이 불가능해 지면서 그의 심령은 깊이 메마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기도하기 싫어서 기도를 버리는데 시간이 흘러가면 기도가 자기를 버리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닫힌 하늘 아래서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 닫혔을 때 일어나는 또 하나의 현상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그럭저럭 잘 살아가는 여러분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아십니다. 기도의 문이 열려있습니까, 닫혀있습니까? 기도할 때마다 주님의 은혜의 빛이 쏟아져 오나요, 아니면 아무 것도 들리지 않나요?
세 번째는 하늘의 문이 닫히면 이 땅의 물질적인 축복들이 그치게 됩니다. 이런 사상은 특별히 구약에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닫으셨던 아합의 시대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닫으시니까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고 땅들은 식물을 내지 않고 온 땅에는 가공할 기근이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절망적인 궁핍이 찾아왔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물질의 축복만을 쏟아 부어주심으로서 당신이 그를 인정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기복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지키면서 사는 사람들을 순교로 데려가실 수도 있고 순결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일생동안 피 어린 핍박을 받다가 주님께로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난하지만 신실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부하지만 악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과 궁핍 속에서도 순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정직한 믿음의 사람들, 참된 real christian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을 다 인정하면서 확실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의 삶에 깊은 고갈이 온다고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없이 잘 나가던 사업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할 때 하늘의 문이 닫히고 있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견디기 힘든 궁핍이 찾아오고 어두움이 찾아오기 시작할 때 혹시 하늘의 문이 닫히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문이 닫혀진 사람들이 사업을 하면 곤궁과 어려움에 처하게 되고 동업을 하면 동업한 사람에게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안겨주기도 합니다. 그것이 하늘의 문이 닫힌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받는 불행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영적인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이지만 물질도 우리에게 얼마나 귀합니까?
지금 제 마음속에는 여러 번 외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선교사들을 만나고 꼭 하고 싶은 선교 사업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때를 주시기만을 기다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지금 제게 돈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돈이 있어서 꿈꾸고 있는 그 선교 사역에 투자를 하고 그 선교사업에 헌신하면 그것을 통해서 선교지는 지도가 바뀌기 시작할 것입니다. 주님이 그것을 사용하셔서 역사 해 주시고 선교사들이 그리고 그 선교지에 있는 수많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계획으로 말미암아서 선교적인 혜택을 받게 될 때 선교의 지도가 바뀌기 시작하고 그렇게 바뀌어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만큼 놀라운 변화들이 이 세상에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부름을 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돈이 없으니까 때를 미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그런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만큼 물질은 소중합니다. 물질은 칼과 같아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면 죄를 증가하게 하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가 오도록 만드는 풍부한 방법이 됩니다. 하늘의 문이 닫히면 이런 축복들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고 하늘의 문이 닫힌 사람들의 번성함은 마치 여름날에 베어놓은 풀과 같아서 잠시는 번성한 것 같지만 햇살이 내려 쬐면서 모두 말라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하늘 문이 닫힐 때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하늘의 문이 닫히고 나면 또 하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트려지고 부서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담을 보십시오. 처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던 자기의 아내 하와와 어떤 다툼도 없었지만 범죄하고 하늘의 문이 닫히자 그들은 서로를 원망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가득 찼던 부부관계는 지긋지긋한 관계로 바뀌기 시작했고 평화와 기쁨은 사라지고 갈등과 슬픔이 두 사람 사이에 관계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보듬어야할 그들의 관계가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로 바뀌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비극들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늘 문이 닫히고 나면 사람들과의 아름다운 관계는 깨트려지고 사랑하여야할 사람들 사이에는 상처와 고통이 헤집고 들어옵니다. 가족들과의 관계가 파괴됩니다. 목회자와의 관계도 파괴되고 지체들과의 관계도 깨트려집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도 파국으로 몰고 가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스스로 외톨이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 모두 하늘의 문이 닫혔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문이 열렸을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정 반대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순서를 따라서 말씀드리자면 우선 하늘의 문이 열리면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 같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한줄기 강렬한 빛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파고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지나가는 이야기와 같아서 오랫동안 모두 마음속에 떠돌기만 하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선명한 진리의 빛이 비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터득하게 되고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 없이 살아왔던 수많은 날들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본성을 변화시키고 나의 심령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인생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뜨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알게 하시고 주님의 진리가 하나님의 빛이 되어서 자신의 어두운 생애와 어두운 인생의 그늘을 비춰주게 됩니다. 어느 길이 가서는 안될 길이고 어느 길은 걸어가야 할 길인지 판단하게 됩니다. 놀라운 은혜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맛을 알고 그 말씀에 변화를 받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내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놀라운 비밀이 무엇인지를 터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문이 열릴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랫동안 하늘의 문이 닫혔다가 주님이 문을 열어주시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우리에게 깊이 깨달아집니다. 강퍅하던 우리의 마음이 녹아지고 교만하던 우리의 마음이 낮아집니다. 이런 강력한 변화가 말씀의 빛이 열려진 하늘을 통해서 쏟아 부어지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닫혔던 기도의 문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릴 때에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어쩔 수 없는 환경 속에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할 수 없어서 가슴만 두드리던 영적으로 막혔던 신자들이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여시자마자 폭포수와 같이 쏟아지는 기도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같이 더러운 인간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나같이 불결한 인간의 간구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그 응답을 보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주님을 멀리 떠났지만 여전히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기다리셨다고 하는 사실들을 터득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신령하고 놀라운 기도의 은혜의 세계 속에 다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열린 하늘의 문을 소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실패하고 곤궁하고 힘겹던 사람들,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열어주시자 이제 그들의 요령과 처세술, 인간적인 재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물질적인 축복들, 이 세상에서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게 됩니다. 물론 이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늘 들어주시는 주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싸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상당히 여러분들이 '맞아. 저 말씀은 참 진리야‘ 할 것입니다. 오랫동안 사업에 실패하고 직장을 잃어버리고 적절하게 자기의 인생을 의탁할 때가 없어서 유리하고 방황하던 사람들이 먼저 주님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렸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서 자신의 인생이 이처럼 곤고한 것은 하늘의 문이 닫혔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과의 관계를 돌아보며 깊이 기도하고 아버지 앞에 매달립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하늘의 문을 열어주시고 다시 그들에게 축복을 부어주시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물질의 축복과 이 세상에서의 형통한 복들은 앞으로 받을 신령하고 놀라운 축복의 맛보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고쳐지게 만드시고 그들의 생업과 그들의 가정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 시작하십니다.
개인적으로 사업하는 사람을 만나면 사업이 잘 되느냐고 묻습니다. 사업이 잘된다고 하며 밥이라도 한끼 사주면 흡족합니다. 그런데 안 된다고 하면 속으로 ‘내가 내야되는 것 아닌가’합니다.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민망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주님이 그런 은혜를 주십니다.
인간이 자기 수단과 방법으로 큰돈을 벌어보려고 머리 악을 쓰면서 살아가는 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이 축복하지 않는 목회 지에서 인간의 방법으로 큰 교회를 만들어보려고 몸부림치는 목회자만큼이나 가련하고 불쌍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여서야 합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빗줄기
우리 위에 부으시도록
하늘을 열고 주님이 다 부어주실 때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두 사람이 있는데 주님이 망하게 하시려고 작정하신 사람과 주님이 축복하시려고 작정하신 사람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주님이 다시 하늘을 여실 때 우리에게 막혔던 축복의 문들이 열려서 하나님 앞에 섬기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번째는 하늘 문이 열리면서 다시 화해의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다 박살나서 깨어진 가정이 아내가 와서 펑펑 울며 은혜를 받고 막혔던 하늘의 문이 열리고 말씀의 빛이 들어오니까 자신이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는지를 보게 됩니다. 기도의 문이 열리니까 가족들을 사랑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축복의 문이 열리니까 자기가 기도하면 자기의 가정에 놀라운 변화들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자신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가정의 영적인 가장이 됩니다. 호적을 떼어보면 자기 남편의 이름이 올라가지만 하늘나라의 호적을 떼어보면 호주가 자기입니다. 그렇게 변화를 받고 아버지 앞에 새로워지니까 그렇게 미웠던 남편이 사랑스러워집니다.
여기 설교를 듣는 지체 가운데에서 은혜 안 받았으면 벌서 가정이 대 여섯 번쯤 날아가 버렸을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남편은 하나도 안 변했는데 아내가 변했습니다. 아내와 자식은 전혀 안 변했는데 남편이 변하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사람들을 고쳐나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 문이 열릴 때 일어나는 놀라운 일입니다. 하늘 문이 열릴 때만이 이렇게 깨트려졌던 사람들과의 관계에 놀라운 화해와 일치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하늘 문이 열리면 좋겠는데 언제 이 하늘이 열렸다고 했습니까? 기도하실 때입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실 때에 하늘의 문이 열리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에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자신 있게 “하나님, 내 앞에 이렇게 열린 하늘의 문을 두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에게 그 열린 문을 통해서 말씀의 은혜를 주실 뿐 아니라 기도의 은혜를 부어주고 계십니다. 저의 생업에 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열려진 하늘의 문을 통해서 치료의 빛이 우리의 가족과 내 사랑하는 형제들 속에 있게 해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렇게 열린 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언제 악마가 그 문을 닫을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언제 죄가 그 문을 닫을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열려진 그 문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지속적으로 기도하면 더 열심히 기도생활로 주님의 모본을 따라야 합니다.
캄캄한 어두운 절망의 역사 속에서도 신앙의 보이지 않는 역사를 적어갔던 믿음의 사람, 다니엘의 경험을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방의 나라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한 나라의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그의 사랑은 이국의 땅에서 재상의 노릇을 하며 호의호식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언제나 경건한 슬픔으로 눈물이 고여 있었으며 그의 마음에는 언제나 두고 온 예루살렘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가 어떻게 열린 기도의 문을 유지하며 살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간신배들에 의해서 왕 이외의 누구에게든지 기도를 하면 사자 굴에 집어넣는다고 하는 조서의 어인이 찍힌 것을 알면서도 그는 한번의 기도, 하루의 기도생활을 생명과 바꿀 각오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을 열고 하나님 앞에 하루에 세 번씩 예전과 똑같이 일관되게 기도하면서 자기의 기도의 열려진 문을 지켰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열린 기도의 문을, 열린 은혜의 문을 두셨다면 여러분들은 더 더욱 그 열려진 문을 지키기 위해서 깊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악한 세력들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여러분들을 멸하기 전에 먼저 기도의 문을 굳게 닫아 하나님의 은총의 빛을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려고 합니다. 말씀을 거둬감으로 감각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판단을 잃어버리게 만들며 기도의 문을 닫으므로 기도할 수 없게 만들고 축복의 문을 닫음으로서 곤궁하게 만들고 치료의 문을 닫으므로 사람들과의 관계에 상처를 받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되도록 혈안이 되어서 노력하는 피조물이 바로 악마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런 기도의 문을 열어놓으셨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이 깊이 기도하면서 기도로 열려진 이 하늘의 문을 유지하면서 살려고 몸부림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전쟁 중에 잃어버린 평화를 찾는 일도 힘들지만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은혜를 주실 때에 여러분들은 깊이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될 때에 열린 기도의 문이 열려진 채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하늘의 문이 굳게 닫혀져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왜 하나님이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문을 닫고 외면하시는 지를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우리를 곤궁하게 하고 무엇이 우리에게 하늘의 문을 닫아버리게 만듭니까? 환난입니까, 위험입니까, 적신 입니까, 칼입니까, 궁핍입니까, 시련입니까, 핍박입니까, 건강을 잃어버린 것입니까, 질병입니까? 이 모든 것들은 결코 하늘의 문을 닫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런 것들이 하늘의 문을 닫을 수 있다면, 지금 나열한 모든 역경들을 딛고 하나님 앞에서 열린 교재를 가지며 주님 앞에서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의 간증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일 것입니다. 핍박도 이기고 신앙도 이겼습니다. 무엇으로도 그 문을 닫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열린 하늘의 문은 한가지에 의해서만 닫히니 그것은 곧 죄로 말미암아 닫히는 것입니다.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닫히게 마련입니다. 죄와 불순종이 하늘의 문을 닫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던 우리의 영혼에 어두움이 깃들도록 만들어 주고 하늘의 닫힌 문이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기도할 수 없게 하고 하늘의 닫힌 문이 이 땅에서의 축복을 거둬가고 하늘의 닫힌 문이 사랑해야 할 사람들 사이에 상처와 갈등이 깊어지게 만들어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닫혀진 기도의 문을 여는 열쇠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곧 회개의 열쇠입니다. 회개하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다시 닫혀진 하늘의 문을 여십니다.
기도생활에 있어서 우리들이 있지 말아야 할 것은 영원히 열려진 기도의 세계도 없고 영원히 닫혀진 기도의 세계도 없다는 것입니다. 열려진 기도의 세계는 언제든지 닫힐 수 있고 닫혀진 기도의 세계는 언제든지 열려질 수 있습니다. 열려진 기도의 세계는 죄에 의해서 닫혀질 수 있고 죄에 의해서 닫혀진 기도의 세계는 회개의 열쇠로 열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들이 이렇게 닫혀진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다면 나는 여러분들의 삶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는 바입니다. 몸은 교회에 나왔으나 여러분들은 얼마나 곤고하시겠습니까? 이따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지만 놓쳐버리는 말씀이 태반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에는 어두움이 깃들이고 여러분들의 영적 생활에는 생기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 닫혀진 하늘의 문을, 우리의 죄와 우리의 불순종, 우리의 악함을 인해서 굳게 닫혀져 4백여년동안 열리지 않던 이 하늘의 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도로 여시면서 우리에게 한가지 중요한 진리를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얘들아 지나온 4백년처럼 시시때때로 이 하늘의 문이 닫힐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이 하늘의 문은 무엇으로도 열 수가 없고 기도로 열어야 하느니라” 이것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 정말 우리에게 주어진 이 놀라운 기도를 보십시오. 10년 20년 혹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날 동안 하늘의 문이 굳게 닫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모두 잃어버리고 죄와 갈등 속에서 살고 기쁨과 희락을 잃어버린 어두운 생활을 해왔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 손에 열쇠를 쥐어 주셨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열쇠입니다. 회개라고 하는 열쇠입니다. 이 열쇠를 통해서 기도의 문을 열기를 하나님은 오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가장 견딜 수 없는 고통, 자기의 외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은 자기의 외아들이 그렇게 자기의 몸을 찢어 산 하나님의 백성들, 한때 피길을 걸어 구속의 은혜를 입은 자기의 사랑하는 그 자녀들이 수많은 축복의 약속, 하늘 문이 열릴 때에 쏟아 부어질 하나님의 위대한 언약에도 불구하고 마른 뼈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위로대신 죄 가운데 울고 소망을 잃어버린 자기의 백성들을 지켜보시는 것만큼 주님의 마음의 큰 고통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머뭇거리십니까? 그리고 왜 도전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닫혀진 기도의 문은 숙명이 아닙니다. 오늘도 자신의 지난 모든 죄, 주님이 열어놓으신 하늘의 문을 죄와 불순종으로 닫아버린 것을 깊이 참회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찌할 수 없는 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빈들과 같은 실패한 인생의 벌판에서 무릎을 꿇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며 주님이 주신 이 기도의 열쇠를 가지고 하늘 문을 열어보십시오. 달그락 달그락 오랜 세월동안 닫혀진 하늘의 문에 열쇠를 대며 열고자 애쓰는 그 소리가 들릴 때에 우리의 기도를 도울 천사들은 기뻐 뛰기 시작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시켜 굳게 닫힌 그 하늘의 문을 열고자 준비하실 것입니다.
이윽고 하늘 문이 열리고 쏟아지는 은총의 빛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죄 가운데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찬란한 빛이 비취면 예수의 사랑을 모르던 실패한 사람들, 주님이 뜨겁게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감히 “나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말하며 절망 속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날 위대한 일들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빛줄기처럼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총의 햇살아래서 오랫동안 묵었던 우리의 슬픔은 물러갈 것이며 오랫동안 숙명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해졌던 실패는 우리와 결별할 것입니다. 마른땅과 같았던 우리의 영혼에 다시 물 흐르고 새들이 노래하고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패하지 않는 성도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을 제외하고는 일평생을 열린 하늘에 살아가던 사람들은 없습니다. 우리의 죄와 우리의 강퍅함, 그리고 우리의 부주의함, 때로는 우리의 게으름으로 가끔은 하늘의 문이 닫힙니다. 그러나 영원히 닫힌 문은 없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간절한 기도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정의 달이 다가오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고 주님의 은혜의 빗줄기를 한 몸에 받으며 사는 열린 하늘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어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가정은 놀랍게 하나님이 치료하실 것입니다. 오랫동안 패역과 견디기 힘든 시련 속에서 고침 받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던 그대들의 영혼에 놀라운 신령의 빛이 깃들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그래서 이 계절에 여러분들은 더욱 기도에 힘쓰며 예수님께서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시는 이 첫발을 그 요단강에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심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열려지는 하늘을 보실 수 있으셨던 것처럼, 여러분들이 이렇게 주님처럼 기도해서 수많은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닫힌 하늘의 문을 열고 또 그 열려진 문을 통해 주님의 은혜를 빗줄기처럼 내리게 하는 도구들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광야의 금식기도
“예수께서 성령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사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눅4:1-2)”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늘이 열리는 가운데 비둘기 같은 성령이 그에게 충만히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음성도 들렸습니다. 이제는 모든 준비가 끝났겠지요. 이제는 사명만 감당하시면 모든 것이 될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이끌려 가셨습니다. 성령님에게 이끌리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그런 일들을 먼저 겪으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여러 가지로 당하시는 시험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때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사십일 동안 주리셨다고 말합니다. 이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사십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역으로 등장하는 그 직전에 예수님을 광야에 보내시고 거기에서 시험을 받게 하신 이 사건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대개 우리는 예수님의 이 시험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네 가지 있었다고 보는데 우선 첫째는 예수님은 이 광야에서의 시험을 통해서 죄를 이기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는 죄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졌고 죽음을 들어오게 하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죄를 이기심으로서 이후에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위해서 하신 그 사역이 죄를 이기시기 위한 사역이 될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광야에서 이 시험을 당한 사건은 마귀의 권세를 물리치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도 마귀가 다가왔고 또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마귀가 다가왔으나, 첫 번째 아담은 그 마귀에게 져서 실패했지만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를 깨트리심으로서 그 시험을 이기신 것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 이후에 예수님이 하실 모든 일들이 마귀의 권세를 멸하기 위한 일이 될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이처럼 시험을 당하시고 고난을 당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광야에서 당한 사십 년의 시험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모세를 비롯한 엘리아, 위대한 수많은 선지자들이 광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하면서 모세와 엘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도 하였고 새 힘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렇게 두 번째 모세로서 모세가 가나안으로 인도하기에 실패한 그 백성들을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이제 이 광야에서 그들이 당했던 모든 고난에 참여하시며 함께 굶주림으로서 금식의 기도를 감당하셨던 것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는 광야에서 예수께서 당하신 이 시험은 참 선지자로서 거짓 선지자들의 본을 거절하신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들을 물리치심으로 말미암아 당시에 있었던 많은 무능한 거짓선지자들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선지자로서 말씀으로 이 백성들을 위해서 구속 사역을 하실 뿐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십일 동안 굶주리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셨을까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예수님께서 그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에 사십일 동안 주리며 기도하는 가운데 신령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아 역시 사십일 동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제 자신의 이 구속사역을 시작하시기에 앞서서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주리시면서 기도하시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자기를 준비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둘기와 같이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신 그분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하나님의 영적인 권세를 무장해야될 필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해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전에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입었어도 우리는 또 다른 충만함을 필요로 하고 예전에 성령의 많은 은혜를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예전의 경험을 능가하는 더 강력한 영적인 권세로 무장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사명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이 인생의 길에서 주님 앞에 승리하는 사람들로 나타날 수가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에게 언제나 이런 것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이런 기도생활을 통해서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져서 사명을 감당해나가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심으로서 어떤 시험들을 이기셨을까요? 성경은 오늘 세 가지 시험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메시아의 독특한 시험이라기 보다는 메시아를 믿고 따르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공통적으로 직면하게 될 시험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제일 첫 번째 당한 시험은 물질의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십일 동안 주리셨고 몹시 허기지셨을 것입니다. 그 때 마귀는 이 돌들로 떡을 만들어 보라고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육신을 위한 물질을 만드는데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주신 신령한 능력을 사용해보라고 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자신의 육신의 필요를 위해서는 돌로 떡을 만들어야 했으나 그 마귀의 물질적인 시험을 물리치시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지니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이 시험을 보기 좋게 물리치셨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잘 믿고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모두 물질적인 축복을 누리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그리스도인이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지라도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고 곤궁한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곤궁하고 어려운 형편들을 보면서, 그가 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결함이 크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벌하시는 한 방법으로 그에게 물질을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경륜과 그 뜻은 인간의 간단한 지혜로는 헤아릴 수 없는 넓고 깊은 성질의 것이어서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매우 합하고 주님을 진실 되게 사랑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물질의 축복들을 주시지 아니하셔서 곤궁한 가운데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아도 지금보다 믿음이 훨씬 좋고 하나님을 더 뜨겁고 열렬히 사랑하던 때에도 경제적으로 곤궁한 가운데 처해서 고통을 받을 때가 얼마든지 있었다는 사실을 부끄러움 없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든지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물질의 문제로 인해서 고통을 받을 때에 열렬히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물질을 주심으로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성실하게 살면 대부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셔서 주님을 섬기도록 만들어주시겠지요. 그러나 안 그런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 한가지는 물질적인 어려움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다가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만 하면 물질을 당장 주시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물질로 인해서 당한 곤고함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영혼의 힘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안 사람이 아니면 진정으로 인생의 맛을 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굳이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 아니면 인생을 말할 수 없다’고 하는 속담과 같은 구절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이 경제적인 고통이 우리를 얼마나 힘겹게 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제대로 가정이 넉넉하지 못해서 자녀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하는 그 부모의 마음의 고통은 경제적인 궁핍에 처해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사랑하는 가족이 깊은 질병의 상태에 있는데도 그들을 적절히 치료해줄 수 없을 때에 사랑하는 가족들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픕니다. 자녀들이나 사랑하는 부모들이 끼니를 걸러야 하는 경제적인 고통을 맛본 사람들은 물질이 인생의 행복에 있어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쉽게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채무관계와 엮어졌을 때의 고통은 점점 더 가중됩니다. 오늘날 신문지상을 보십시오. 불과 일이 백 만원의 부채를 갚지 못해서 인신이 매매되고 신체포기의 각서를 써서 농락 당하는 많은 젊은 여성들의 비참한 삶의 기록들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물질이 별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악성부채에 시달리면서 눈만 뜨면 빚 독촉을 받아야 하고 수시로 죽음을 생각하는 빚진 사람들의 마음은 당해본 사람들이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방법으로 몸부림쳐 보지만 해결의 길이 없고, 그럴 때 우리는 당연히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트려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물질적으로 과도하게 고통을 받게 되면 사랑해야 할 사람들에게 기대할 마음이 생기고 기대하는 그 마음에 부응하도록 도와주지 아니하면 그들을 향한 기대의 마음은 원망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과의 관계도 모두 깨트려지고 심지어는 경제적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불법한 일을 하려고도 시도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서 인생 자체가 물질적인 문제로 인해서 죄악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을 얼마든지 보게 됩니다. 누가 물질의 문제를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견디다 견디다 도저히 자기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어서 주님 앞에 나오게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죽음의 문턱 앞에 서서야 비로소 주님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손들고 옵니다”하며 포기하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게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 돈 좀 주십시오” 하며 매달립니다.
기도는 자기의 각자 믿음 수준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 약간 방향이 틀렸어도 진심으로 찢어지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방향이 바로 잡힙니다. 여러분 중에도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돈 좀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마음속에는 돈 생각이 가득한데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해주시고......”하지 말고 본론을 이야기하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면 정말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빚쟁이들의 독촉, 아이들의 고통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매달리며 비로소 자기가 무너집니다. “하나님, 정말 이제는 살수가 없습니다. 이 경제적인 고통에 시달릴 바에야 내 생명을 거둬 주시옵소서”하며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몸부림칩니다.
마음이 그렇게 찢어지듯이 아프면서 가난해지면 심령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낮아지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고 은혜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니까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게됩니다. 돈에 미쳐서 돌아다닐 때는 자기의 모습에 관한 것이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돈돈돈 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다가 보니까 자기의 모습이 보입니다. 자기의 모습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 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이제까지 나는 돈이 없어서 인생이 고달프고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내가 이렇게 시련을 당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돈 문제가 아니라 내 영혼이 너무 고통 하는 문제가 있었구나’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니까 한없는 회개의 은혜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주님이 돈 안 주신다고 물질의 고통 때문에 견딜 수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하나님은 내가 물질로 인해서 당한 고통과 아픔의 수천배 수만 배를 못된 나를 보시면서 아파하시고 고통을 당하셨구나’하며 비로소 철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돈 보따리가 놓여있었다더라’ 하는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성령 충만해서 기도하고 돌아왔는데 빚쟁이들이 기다리고 있고 그 다음날도 아이들은 돈을 달라고 합니다. 집주인은 집 내놓으라고 합니다. 상황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하지 않았을 때에는 그 고통 때문에 죽을 것 같았는데 기도하니까 이상하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빚쟁이가 오면 전에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혈관이 멎는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는데 이제는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주님이 지켜주시겠지. 이제껏 까지 인도해오신 주님이 이 시련도 이기게 해주시겠지’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물론 근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눈으로 보면 근심이 생기고 어려움이 생기지만 깊이 기도의 은혜를 회복하고 나니까 근심이 되고 걱정이 되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처럼 고통스럽다가도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전에는 돈 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 아버지 앞에 나와서 간절히 기도하니까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자기는 물질적인 문제로 인해서 고통을 받았지만, 이것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당연한 고통이고,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자기와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깊이 감화를 받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한푼이라도 벌어야겠다고 몸부림치던 그 사람이 변해서 이제는 물질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을 살릴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경험됩니다.
물질적인 면으로 고통을 받을 때 물질이 조금 생겨도 가문 땅에 비 내린 것과 같아서 돈이 어디로 사라지는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즉시 다시 고통이 밀려옵니다. 또 사람이 빚이 없고 쓸 만큼만 있으면 만족을 합니까?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누리기 위해서 혈안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면서 까지 라도 그 물질의 탐욕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인 인간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시험이 끝없이 밀려옵니다.
그런데 기도하기 시작하면 이런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십니다.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어려움이 가득 차서 우리의 영혼이 거의 고사 상태가 되어서 죽어갈 때에 무엇이 우리의 영혼을 살립니까? 무엇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서 하나님 앞에 새 생명 누리게 만들어 줍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 일을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 물질적인 문제를 놀랍게 극복합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바르게 함으로 주님이 물질을 주시기도 하고, 또 주시지 않는 동안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신령한 은혜와 능력과 놀라운 사랑을 간직함으로서 물질적인 그 시험을 이기고 거기에 매이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런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의 기도생활을 통해서 인간이라면 도저히 피하기 어려운 이 물질적인 시험을 단 칼에 물리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경제적인 어려움, 물질로 인한 시험, 물질로 인해서 여러분들의 심령이 고통받고 침체에 빠지는 그 모든 경제적인 어려움을 무엇으로 극복해야 할 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돈을 찾아다니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찾으십니다. 여러분들은 물질로서 물질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무릎을 꿇고 깨트려져서 자기가 힘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며, 주님의 축복과 은혜를 구하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시험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제안했습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이 천사를 시켜서 너를 받아서 다치지 않게 해주시지 않겠느냐?” 결핍 속에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고 육신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좋던 사람들이 뭔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어버리자 믿음까지도 잃어버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예화) 어느 권사님과 장로님 부부가 늙어서 얻은 아들이 수영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익사를 한 후 교회를 안 나가버리는 것을 보았다.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데려가셨을 때 그 때 비로소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모두 드러내 보여줍니다. 반대로 욥과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거둬 가셨는데도 “주시는 이도 여호와 시고 취하시는 이도 여호와이시니”하며 주님의 이름을 송축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요단강 변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갈라지고 소리가 들렸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는 가정법이 필요합니까? 이것은 마치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에 ‘하나님이 정말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며 유혹했던 뱀의 말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뭔가 하나님의 선언, 주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신뢰하지 못하도록 의심을 유도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그래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시험해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신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인가 우리들이 많이 잃어버릴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잃어버립니다. 경제적으로 하나님이 많이 거둬 가시고 가난해지면 우리의 심령이 메마르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고, 때로는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나’ 생각하게 됩니다. 영적인 은혜가 사라지고 심령이 고갈될 때, 심령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정서와 은혜에 대한 거룩한 경험들이 사라져가고 차가운 마음으로 굳어질 때 , 그리고 어디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심령의 평안, 만족, 이런 것들을 누릴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 도래할 때에 그 때에 우리는 종종 의심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내가 혹시 주님께 버림받은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깊이 낙심하게 됩니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시며 내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의심하게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그 관계를 확신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그 관계를 확신하고 그 관계를 붙들면 붙들수록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가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 속에서 삽니다. 이런 것들을 마귀는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어두움 속에 살게 만들어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잘 모르게 만들고, 주님을 오해하게 만들어서 참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서 살지 못하도록 그렇게 우리를 유인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때가 없습니까? 하나님의 도움이 모두 사라진 것 같고 하나님이 이제 더 이상 여러분들을 사랑하시지 않는 것 같고 ‘내가 정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가?’ ‘내가 정말 하나님의 큰사랑과 은혜를 받은 주님의 소중한 자녀인가?’하며 의심될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침체 속에서 이런 의심들은 더 가중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끊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제 더 이상 내 인생을 주장하지 않을 때 그 때 우리의 인생은 점점 더 세상 중심의 삶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안에 계시고 자기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 같은 온전한 일치를 이루면서 살 때 그 때 그 신자의 영혼은 가장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주님 없이 살 수 없다고 하는 인격적인 사랑과 관계의 신뢰가 가득 차있을 때가 오히려 더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정말 잃어버리고 삽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오랫동안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방탕하게 살다가 몸도 망가지고 영혼도 망가지고 인생의 수많은 고통스러운 짐들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너무 괴롭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일까?’ 의심까지 생겨납니다. 그런 어려움을 깊이 당하면서 고통받게 될 때에 그 때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매달리고 기도의 은혜를 회복합니다.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살았던 지난날들을 깊이 회개하고 아버지 앞에 용서를 빌고 펑펑 울면서 뉘우치고 나면 그 회개한 심령에 주시는 첫 번째 놀라운 일은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라고 하는 확신입니다.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배워가고, ‘내가 비록 방탕하게 살고 주님의 뜻을 벗어나서 살았지만 그러나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이고 주님의 사랑 받는 백성이구나’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될 때에 이 믿음의 시험은 물러가는 것입니다. 마귀가 의심하도록 유혹을 해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합니다. 모든 도덕적인 삶, 모든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 어디에서 나오냐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이고 내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다’는 확신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예화) 토지평가사인 어떤 집사님이 평가를 하러 갔는데 낡은 구권 천 오 백 만원을 갖다 놓았더 라는 이야기-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며 거절했다.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이 세상에 있는 것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께 받는 사랑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것이 있으니까 ‘이 물질이 무엇이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은 모두 중요하고 의미가 있지만 주님이 안 주시는 것들은 모두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관계의 확신입니다.
기도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잃어버린 관계의 확신을 되찾도록 만들어 주고 되찾은 그 관계의 확신 속에서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라’고 하는 확신을 우리에게 갖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 지, 왜 똑같은 사람들인데도 이 세상에 똑같이 살면서 우리에게는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하나님께서 그 관계의 확신을 통해서 알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관계의 확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기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다시 찾게 해 주는 것은 역시 기도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도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냥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임하신 것이 아니라, 기도할 때 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엇을 기도했을 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아마 틀림없이 메시아로서 공적인 생애에 취임하시니까 이제는 주님이 꼭 함께 해주셔서 인간의 구원을 위한 이 대업을 이루게 하시려고 기도하셨겠지요? 그렇게 기도하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임하면서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인 쳐주시는 축복을 받게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내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이다’라는 영적인 자존감을 회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돈 좀 없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의 확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다. 내가 비록 부자는 아니지만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아름다운 확신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 생활은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자신 이외에 주님의 자녀들에게 행복이 누가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도 주님이 안 계시면 그것은 가진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없어도 거기에 주님이 계시면 주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이런 진실한 백성, 진실한 주의 자녀들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또 지켜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명예의 시험입니다. 온 천하를 그림처럼 보여주면서 예수님께 마귀는 말했습니다. “나에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노라” 사실 어떻게 보면 죄로 말미암아서 이 세상의 공중 권세를 마귀가 쥐게 되었으니 어떤 면에서는 타당성이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에게 넘겨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의 임금이 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것을 원하셨더라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과 함께 온 우주를 다스리시고 천국에서 그 많은 천군 천사와 성도들의 경배를 한 몸에 받으실 수 있는 분이었는데, 무엇 때문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겠습니까? 세상의 임금들이 쓴 아름다운 면류관은 하나님의 영광에 비하면 마치 들풀과도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이러한 마귀의 요구를 받아들이셔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명예로 유혹하고 시험했지만 예수님께는 명예보다도, 이 세상에서의 영화보다도 더 귀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당신이 이 세상에서 마귀에게 절함으로 이 세상 모두를 소유하고 임금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불쌍한 인간들을 마귀의 손에서 구출하여 당신 자신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를 돌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이처럼 예수님은 사십일 동안의 간절한 금식 기도를 통해서 이런 명예의 시험을 단칼에 물리치심으로서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에서의 명예와 높아진 권세와 영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따라야 할 것임을 주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시험에서 너무나 쉽게 넘어집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열심 있는 안수집사 중 삼분의 일을 장로로 투표했는데 아홉 명 중 세 명만 붙고 여섯 명은 떨어지게 되어 교회가 큰 시험에 들었다.
명예의 시험에서 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두 번 실수한 것입니다. 섬기도록 주신 직분인데 그것을 명예로 안 것이 첫 번째 실수였고 그 명예도 아닌 것들을 받지 못했다고 시험에 든 것이 두 번째 실수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이 열심히 교회를 섬겼을 지는 모르지만 간절한 기도 속에서 사는 영적 생활이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에 배짱에 맞을 때만 하나님을 섬기는 육적인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시험이 닥칠 때에 힘없이 무너져 버리고, 내가 언제 신앙생활을 했었는가 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예화) 안수 집사 하다가 시험에 든 어떤 사람이 동네 골목을 술 먹고 왔다 갔다 하며 교회도 나 오지 않았는데, 장로를 세워준다고 하니 다시 교회에 나왔다.
모두 명예의 시험입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십시오. 기도하지 않는 영적인 지도자는 거짓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교회의 일꾼들은 항상 불안합니다. 위험한 사람입니다. 언제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저지를 지 모르는 사람들이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가 배짱에 맞아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인지 주님의 사랑에 감동이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도장 찍어주면 절대 안됩니다. 저는 일생동안 신앙생활 하면서 장로 투표할 때 누구에게도 도장 찍어 준 일이 없습니다. 그릇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찍어만 주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왜 기도 안 하는 사람들을 찍어주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교역자로 찍어줍니까? 기도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다리 태우듯이 올라가게 하니까 우수수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자기 혼자만의 시험이 아닙니다. 교회의 시험입니다. 모두 명예의 시험에 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늘 간절한 기도의 세계를 유지하며 사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주님은 나를 훌륭한 주님의 일꾼이라고 말하시고 주님은 나를 훌륭한 하나님의 사명자라고 말씀하셔도 기도의 세계가 살아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압니다. 자기는 예수 죽인 것을 자신의 몸에 짊어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제가 “정말 집사님은 하나님의 종이십니다”라는 말을 드릴 때 화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종처럼 무엇을 시킨다면 뒤집어지실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기도의 세계가 살아있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압니다.
제가 사도 바울을 존경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예수 죽인 것을 날마다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여 함이라 자기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고 선교사업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갈 때에는 자기가 무엇인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기도의 세계가 없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이 된 것 같다 는 느낌을 계속 가지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세계가 살아있는 사람은 자기가 뭔가 좀 된 것 같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엎드립니다. 그러면 비로소 깨닫게 되는데 자기가 잘 한 일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쓰임을 받았지만 자기는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기는 예수를 죽인 사람이요,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원수로 갚았던 막 되먹은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끊임없는 기도의 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분수를 알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를 겸비하게 만들고 주님이 우리를 훌륭하게 쓰셔도 교만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안전장치가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훌륭하게 쓰셔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며 박수갈채를 보내도 어느 순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마다 깨닫는 것은 ‘나는 아무 것도 아니요, 나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고,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나는 쓰레기와 같은 인간이며,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이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 지 난 알 수 없도다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나는 아무리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도 자랑할 것이 없고 누가 만일 내가 무엇인가 된 사람처럼 느낀다면 ‘나의 나된 것은 모두 주님의 은혜로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나는 정말 쓸모 없는 사람이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인데 주님이 나를 이렇게 구원해 주셨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어느 한 순간에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하고 거기서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구나
저 무지한 사람들 메시아 죽였네
사실은 저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나 때문입니다’ 그것을 깊이 깨닫고 ‘왜 이 벌레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하며 울며 심령이 녹아질 때 명예에 대한 욕망이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주님의 명예를 짓밟으면서라도 내가 명예롭게 되겠다고 하는 사악한 욕망은 그런 십자가의 감화가 있는 기도생활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물론 잠시 그런 욕망이 생겨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살아있는 사람들은 기도할 때에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가 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그 멸시와 수치를 기억하면서 나에게는 나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살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산 것은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게 하시고 그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살게 하시려고 나를 살려두셨다’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예의 시험을 단칼에 물리치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은 우리에게 이런 시험을 이기게 만들어 줍니다.
이 세 가지 시험을 이기면 거의 모든 시험을 다 이긴 것입니다. 마귀의 입장이 되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돈을 준다고 해도 싫다고 하고 빼앗아가도 근심을 안 하는 사람을 어떻게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온갖 시련을 주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심하게 만드는데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며 나는 그 분의 사랑 받는 자녀라’고 확신을 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높여주겠다고 그렇게 감언이설로 유혹을 해도 ‘내 기쁨은 내가 명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라고 거절합니다. 결국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생활에 지니까 결국 시험에 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은 어떤 때에는 전쟁의 한복판에 터지는 폭탄과 같이 적군의 사령부를 때려부수는 역할을 하는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기도는 보약과 같습니다. 오늘 하루 기도 안 했다고 해서 내일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반대로 오늘 하루 기도했다고 해서 갑자기 내 인생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지만 안 일어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렇지만 하루하루 기도하기를 마다하면서 안일한 생활과 타협하면서 기도를 게을리 할 때 그 때에 우리의 이 영적 생활과 인생전체에는 균열이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수대교를 누가 무너뜨렸습니까? 지은 사람을 닦달하고 돈 먹은 사람을 이야기하는데 아무리 부실하게 지었어도 그 떨어진 버스가 처음 지나가는 다리였다면 안 무너졌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여태껏 지나간 수백만, 수천 만대의 차가 다 범인입니다.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지 않는다고 잃어버리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기도해도 쉽게 회복될 수 없는 어려움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육신적인 성품이 남아있는 우리 인간들에게는 쉬운 것이라기 보다는 어려운 것입니다. 쉬운 것이 오히려 예외적인 삶입니다. 은혜 많이 받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새벽기도를 꾸준히 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지만 아침에 늦게까지 자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가 없습니다. 내버려두면 그렇게 됩니다. 그렇게 육신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들이 계속 쌓일 때, 이렇게 예수님께서 사십일 기도 끝에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수 있으셨던 것처럼, 기도 안 했더라면 질 수밖에 없는 명예의 시험을 단칼에 이기도록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도로 이렇게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기도가 금식 기도였다는 사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금식 기도는 양식을 끊으면서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하는 기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목사님이 꿀을 계속 먹으면서 금식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것은 금식기도가 아닙니다. 링거를 맞으면서 하는 기도도 금식기도가 아닙니다. 금식기도는 물을 제외한 일체의 곡기를 끊는 것입니다. 죽을 먹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성경 속에서 오래도록 구약뿐 아니라 신약에까지 금식 기도의 전통이 내려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 금식기도가 우리의 영혼에 주는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면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육체의 욕망을 어느 정도 털어 냄으로서 우리의 영혼의 자유로움을 갖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식욕은 일에 대한 욕망과 비례하고 다른 여러 가지 욕망과도 함께 갑니다. 그러니까 식사를 할 때 젓가락으로 헤집으면서 제대로 안 하면 대부분 일에 대한 정열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밥만 많이 먹을 뿐 일에 대한 열정이 없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는 식사를 잘 하는 사람이 일에 대한 성취 욕도 갖고 있습니다. 일뿐 아니라 안 좋은 육신의 욕망에 대해서도 강합니다. 그런데 금식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죽이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들이 아름답고 깨끗한 마음, 잘 정돈된 은혜에 젖은 마음속에서 기도가 솟아오르는 것이지 욕망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줄달음질 치기 시작하면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 잡기에 빠지면 영적인 생활이 안됩니다. 조금씩 하면 몰라도 누우면 생각날 정도로 빠지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안 됩니다. 심지어 공부에도 그렇게 빠지면 안됩니다. 너무 지식을 사랑해도 예수님을 찾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육체의 욕망이 피어나고 지배를 하게 될 때 그 때 신령한 기도생활이 되겠습니까?
그 때에 금식을 통해서 한번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굉장히 힘듭니다. 저도 2-30대에 금식기도를 많이 했는데, 왜 연세 드신 목사님들이 그렇게 금식을 잘 못하셨는지 이해가 갑니다. 저는 1주일씩 금식기도하고도 친구들 짐까지 들고 오르내리고 그 다음날 주일을 지켰는데, 세월이 흐르고 나니까 3일 금식기도 하면 회복이 그만큼 더딥니다. 그래서 요즘 3일 금식하면 20대때 열흘 금식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쳐주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금식기도는 그렇게 욕망으로부터 자기를 자유롭게 해주는 힘이 있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집중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니까 하나님을 집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금식 기도 하루나 이틀은 몰라도 4-5일이 지나갈 때는 오히려 열렬하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적당하게 밥을 먹으면서 기도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금식 안 할 때에는 하루에 열 시간 정도 기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금식하면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많은 시간을 누워서 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차이는 금식할 때는 가만히 누워있어서 세속적이고 잡다한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응시하게 되는 힘이 금식 기도 속에는 있습니다. 그것이 넓은 의미에서의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우리들이 번잡하게 중언부언하며 기도하는 것보다 영혼의 시선을 그분에게 응시하는 것입니다. 응시된 상태에서 마음을 다 쏟아 붓고 집중하는 가운데 기도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새벽기도를 오래 다닌 사람들은 그것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다른 데 놀러가도 깨면 새벽기도 시간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자기의 일과인 것처럼 꾸역꾸역 나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오늘 이 말씀을 좀 기억해봐야 합니다.
성경은 오늘 단지 기도하고 있느냐, 기도 시간을 지키느냐 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집중된 기도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주리면서 사십일 동안 광야에 계시면서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영혼의 시선을 자기를 통해 구원의 위대한 일을 이루실 하나님 아버지께 집중하시면서 아버지 앞에 금식 기도로 매어 달리셨고 그 금식 기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넘어트리는 사단의 강력한 세 가지 시험을 단칼에 물리치심으로서 이후에 우리들의 집중된 기도가 이런 일반적인 마귀의 시험들을 물리치는데 얼마나 결정적으로 필요한 지를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집중된 기도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런 기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물질적인 시험과 어려움, 그리고 믿음의 확신이 흔들리고 명예의 시험을 받을 때 여러분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고 여러분들의 실제적인 삶의 체계들이 흔들리고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고 있는데도 여러분들이 그런 흔들림을 경험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 기도가 예수님이 광야에서 하셨던 기도처럼 그렇게 강력하고 집중된 기도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중언부언하는 백마디의 기도보다는 한마디의 집중된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이 더 뛰어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집중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런 세 가지의 시험들을 단칼에 물리칠 수 있는 신령한 능력들을 공급해주시고 그 은혜 아래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이 이렇게 집중된 기도를 하신 장소가 광야라고 되어있습니다. 희랍어로 ‘에레모스’라고 하는 이 광야는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아닙니다. 꽃이 피어나고 시냇물이 흐르고 벤치가 있고 새들이 노래하는 그런 아름다운 정원이 아닙니다. 황량한 벌판입니다. 거기에는 맹수의 때들이 있고 고적한 곳입니다. 속된 세상의 시장바닥이 아니라 황량한 벌판입니다. 주님의 음성이외에는 들리지 않는 외로운 벌판, 누구도 의지할 사람이 없고 오직 하나님 한분 이외에는 바라볼 분이 없는 그러한 광야에서 예수님이 이런 집중된 기도를 하셨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뭔가 깊이 생각나게 만들어 줍니다.
뜻 없이 되풀이되는 그런 형식적인 기도생활, 그리고 그저 일상적으로 참여하는 예배생활, 생각 없이 이 사람 저 사람과 몰려다니는 절제함이 없는 그릇된 교제의 생활들, 이렇게 저렇게 그저 살아가면서 가끔 헌신하는 제멋대로의 통제가 없는 생활, 이런 것들은 주님을 만날만한 광야가 아닙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만난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 영적인 인물들이었고, 영적인 인물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그 기도를 광야에서 드린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광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를 생각해보십시오. 광야를 생각하지 않고는 모세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었던 여호수아와 갈렙도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신앙을 가진 유일신 신앙의 신봉자로서 침몰되어 가는 이스라엘 역사의 한복판에서 유일신 신앙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을 외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의 고결한 신앙의 인격, 그들의 불같은 열정, 그들의 거룩한 영성이 어디에서 형성되었습니까? 광야를 생각하지 않고는 그들을 떠올릴 수 없습니다. 엘리아의 광야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광야의 사람 세례요한을 생각해 보십시오. 광야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즉시 같던 곳이 아라비아 광야였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이 왜 당신의 특별한 사람들을 그렇게 다른 곳이 아닌 외로운 벌판, 광야로 내보냈을까요? 사람들과 사람들에 대한 기대를 끊고 오로지 하나님 한 분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모래바람이 이는 그 광야에서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앙망하는 그러한 기도의 시간들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그 광야에서 만들어 가십니다. 광야의 사람들에게는 광야의 냄새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도 도울 곳 없는 외로운 광야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며 기도함으로서 영력을 공급받고 이런 인생의 무수한 시험들을 극복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인격 속에는 광야의 냄새가 납니다.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말하든지 그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그 기도의 흔적을 지워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말, 그들의 글, 그들의 태도, 그들의 인격 속에서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과의 이 기도의 경험이 묻어 나옵니다. 거룩함의 흔적으로 묻어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여러분들이 서있는 영적 생활이 어디입니까? 속임수와 거짓이 난무하는 더럽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시장바닥과 같은 마음입니까? 아니면 정말 하나님 한 분, 그 음성 이외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외로운 벌판에 혼자 서있는 것과 같은 마음입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모아져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영혼의 온 시선이 그분께 집중되어있습니까? 오직 기도를 들으시는 그 하나님 한 분을 응시하며 간절한 마음을 쏟아 부으며 기도하고 계십니까? 오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의 이 승리는 우리에게 이것을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3.새벽에 기도하신 예수님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예수님의 생애와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기록 중 주님이 기도하시는 장면이 바로 우리가 읽은 이 본문입니다. 누가복음에도 이 기사가 나오는데 거기에서는 간략하게 나오고 마가복음에서는 이 기사가 비교적 상세히 나오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1장에서 이렇게 예수님의 하루 일과에 대해서 긴 행적들이 나오고 그 이튿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을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에서 기도하시는 이 새벽의 장면은 요단강 변에서 기도하실 때처럼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어마어마한 광경도 아니었고 공생애에 들어서기에 앞서서 광야에서 기도하시던 때와 같이 그렇게 특별한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기록한 장면도 아닙니다. 이 세 번째로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그저 예수님의 일생동안에 계속되었던 일상적인 기도생활 중 하나를 여기에 적은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와 같이 성령이 임하는 사건이나 또 광야에서 사십일 간 주야로 주리신 기도를 통해 악한 영을 제압하신 이 위대하고 엄청난 일은 우리가 본받고 따르기에는 너무나 높은 수준에 있는, 기도의 특별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생애의 기도에 관한 세 번째 장면은 너무나 인간적인, 그러면서도 너무나 신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생각하기에 앞서서 안식일에 있었던 일들을 길게 기록하고 있는 성경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전하시기 시작했고 -이것이 아마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신 후에 돌아가셔서 행하신 첫 번째 설교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말씀을 전하실 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귀신들이 주의 명령에 꼼짝하지 못하고 축출되는 역사가 일어났고 말씀을 들을 때에 그들은 이제껏 듣지 못한 새로운 교훈을 접하게 되었으며 그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은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교훈일 뿐만 아니라 능력에 있어서도 자신들을 제압하고 압도하는 강력한 영적인 권능을 가진 말씀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처럼 이렇게 평범한 설교가 아니라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가운데, 말하자면 이제껏 까지 복음의 소식이 들리지 않던 악한 세력들이 가득한 그 땅에 나타나셔서 영적인 사명을 감당하셨을 때에, 그분에게는 엄청난 체력을, 그리고 영력을 요하는 순간이었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와 같이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도 힘을 다해서 설교를 하면 어떤 때는 탈진하는 것을 느끼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훨씬 더 뛰어난 집중력과 영력을 쏟아 부으면서 영혼들에게 권세 있는 말씀을 전파하셨을 때 그 때 예수님의 이 설교사역에 엄청난 힘이 소모되었으리라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이 설교시간의 길이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느낌상으로 볼 때 예수님의 이 설교는 상당히 장시간의 설교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말씀을 전할 때에 사람들이 그 교훈을 받고 뚜렷한 인상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영들이 나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귀신을 쫓아내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고 사람들이 그러한 예수님의 설교사역 끝에 나름대로 평가도 달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주고받을 정도였으니까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몇 편의 설교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해서 설교사역으로 힘을 소진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 가서 심방하고 고쳐주시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어떻든 그 하루 종일 사역으로 가득 채워진 하루였고 저녁때가 되어서 숙소에 돌아와 보니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병자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그날 밤에 예수님께 치료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는 너무 지치고 피곤하니 내일 오라’고 말씀하시면서 병원에서 하듯이 번호표를 나눠주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날 밤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일일이 하나씩 치료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 지 모르지만 아마 지금 시간으로 새벽이 훨씬 넘지 않았을까요? 한두 시쯤 끝났을 수도 있고 더 일찍 끝났을 수도 있지만 더 늦게 끝났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밤늦도록, 길면 이른 새벽까지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수고는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을 때에 그저 집안에 모여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손을 높이 들고 ‘모두 나아라’고 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병든 그들의 육신만큼이나 그 육신 속에 있는 그들의 곤고한 영혼이 예수님의 섬김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그들의 영혼을 병든 육신보다 훨씬 더 연민과 긍휼에 넘치는 마음으로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그들 하나 하나를 고쳐주시면서 죄에 대해서 불순종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아버지의 은혜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고 각자에게 적절한 교훈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역은 정말 긴 시간을 요하는 사역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같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몸이 아파서 기도해달라고 하면 그저 단지 병만 낫게 되면 이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건 지금 무슨 삶을 살고 있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던 나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고 기도해줄 수 있다면 그는 복음 사역자가 아니라 무당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마음으로 한 영혼 한 영혼을 그렇게 돌보셨을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이 사람들의 처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약자였습니다. 의료 혜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병 걸림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께 온 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고칠 능력도 없고 혹은 고칠 경제적인 능력이 있어도 의원들이 고칠 능력이 없어서 찾아온 중한 병에 걸린 각색 병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바라보셨을 때에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데 이들을 적절히 가르쳐서 주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도록 부름 받은 종교지도자들은 성경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이미 변질된 이상한 종교를 신앙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고전적으로 가지고 내려오던 신앙생활은 이들의 육체와 영혼의 상태를 치유할 길이 없었습니다. 병들어 죽게 된 이들의 육신은 어쩌면 이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서 징벌 아래 놓여 있는 그들의 망가진 영혼을 반영하는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틀림없이 이들의 육신뿐만 아니라 곤고한 이들의 영혼에 대해서까지 깊은 연민을 느끼시면서 기도하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적절한 가르침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얼마나 많은 육체의 노고를 요하는 힘든 사역이겠습니까? 이 대목을 기록할 때 우리들은 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말고 육신으로 말하자면 그는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평범한 인간의 몸을 가지신 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셨지만 그분의 육체는 연약한 인간의 형상을 가진 육체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에게 얼마나 커다란 짐이 되었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시고 그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자신을 다 소진하시고 예수님께서 잠자리에 드신 시간은 언제였을까요? 그 시간은 알 수 없지만 깊은 밤, 혹은 이른 새벽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사역으로 육신의 힘을 소진하시고 밤에 잠자리에 드신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신 그분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온갖 하나님을 섬기고 영혼들을 섬기는 복잡하고 힘겨운 일과를 마치고 약간은 피곤한 기색으로 잠자리에 누워서 곤하게 잠드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신 그분이 이렇게 연약한 육체를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서 가졌던 그 육체는 성질상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 육체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분에게는 죄가 없으시다는 것 이외에 인간의 육신이 갖는 모든 연약함을 그대로 가지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육체의 연약함이 일평생 연약하고 병든 영혼들을 섬기는 데 있어서 얼마나 무거운 짐이 되셨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거운 연약함이라는 육신의 짐을 지고 영혼을 섬기신 그분은 성실하셨습니다. 성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서 그분은 성실하게 영혼을 섬기셨고 연약한 육신에도 불구하고 성실한 그 섬김의 삶을 준수하시기 위해서는 그분에게는 남다른 희생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화) 피곤이라는 것이 왜 있는지 몰랐다. 불규칙한 식사와 부족한 잠, 금식 기도 후에도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 힘들다는 말은 성실성과 정신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목회 하면 서도 5년간 19권의 책을 쓸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겸손하게 하셔서 체력이 급격 히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 다음부터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많이 생각하고 나니까 두 가지 변화가 오기 시작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갈망과 연약한 자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깊이 알고 나면 의지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내 주는 아신다
내 영의 깊은 간구 마음의 소원을
그리고 또 하나는 사람들에 대한 긍휼입니다. 연약함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니까 약한 사람을 보면 긍휼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게 연약한 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양성교리에 대해서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30대셨으니까 자연적으로 보더라도 노인상황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30대과 그 때 30대는 또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50도 안되었거늘 네가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고 종교지도자들이 물을 정도였으니까, 예수님께서 얼마나 고달프게 인생을 사셨으면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예화: 컴퓨터 합성으로 예수님 얼굴을 그려낸 것은 사실과 다르다)
유대종교사에 보면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님의 외모를 묘사한 글을 보면 굉장히 수려한 외모였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얼마나 고단한 인생을 사셨으면 공생애 동안 그렇게 늙으셨겠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가 하나님과의 풍부한 교제 속에서 사시고 섬기신 것은 틀림없지만 얼마나 진력을 쏟아 부으신 생애였으면 30대밖에 안 된 사람을 50으로 보겠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고생하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셨다는 것들은 생각하지만, 그런 연약한 육신을 가지시고 우리를 섬기셨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안 합니다. 항상 육체의 연약함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한없는 짐입니다. 연약해져 본 사람이 아니면 그것을 모릅니다. 오늘 꼭 해야만 하는데 체력이 도저히 자기를 받쳐주지 않아서 그 일을 덮고 잠드는 심정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합당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그 마음을 강하기만 해본 사람들은 그 연약함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런 식으로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 대해서 별로 묵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30 갓 넘은 나이에 오십은 되었겠다는 소리를 우회적으로 들으시면서 그 연약한 육신 위에 짊어지셨던 그 살인적인 어마어마한 일들을 보십시오. 새벽에 잠들고 아직 어두울 때에 -틀림없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 잠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오십니다. 이런 삶에 대해 ‘예수님이니까 얼마든지 사실 수 있었을 것이다’ 한다면, 예수님의 고난도 의미 없는 것입니다. 특수한 몸을 가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그것이 무슨 고난입니까? 로봇이 십자가에 못 박힌다면 그것이 무슨 고난입니까?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 하셨네
주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육체를 가지시고서 그렇게 자기를 혹사하시면서 그 새벽에 제자들은 잠들어 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러한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에 관한 교리를 한번 묵상해 보십시오. 아마 인간의 연약한 육신을 입으신 그 처지는 죽도록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며 살아가려고 애쓰는 그분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이었을 것입니다.
(예화) 고등학교 때 축구부원들이 운동하는 것을 보니 느리게 뛰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었다-실제 시합 때 그것을 풀고 뛰면 날아가는 것 같을 것이다.
연약한 육신을 입으신 주님의 처지도 마치 모래주머니를 달고 경기를 하는 축구선수처럼 그렇게 부자유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래주머니는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건강을 잃어보거나 혹은 나이가 들어서 육신이 쇠약해지면 질수록 우리는 더더욱 이런 자신의 처지로 인해서 많이 눈물나게 됩니다. 밤새워서 기도하고 싶은데, 자신의 육신이 부서지도록 주님을 위해 더 일하고 싶은데,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우리의 마음을 바꿔놓는 그 비참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지닌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적어도 그러하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새벽미명에 일어나시는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읽어드린 이 본문의 삶은 예수님의 생애 중 몇 번 있었던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에 일어났던 일상적인 삶입니다. 예수님이 왜 새벽미명에만 기도하셨을까요? 그렇게 어두울 때 밖에는 기도할 시간이 없으셨기 때문에 그 때 기도하신 것입니다. 기도하고 끝나니까 제자들이 몰려와서 벌써 예수님을 찾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때 “다른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우리가 전도하여야 하겠다”하십니다. 그러니까 일을 정지시켜놓고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일은 일대로 하시면서 기도하셨던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일을 정지시켜놓고 기도하는 것은 차선이고 최선은 일은 일대로 다 하면서 자신의 안식을 줄여가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최선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차선이라도 하라고 가르치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면에 있어서 최선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저는 ‘왜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기도하셨을까?’를 묵상하다가 아무 뜻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무슨 신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낮에는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을 받기 원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내버려두고 혼자 기도하러 들어가시면 그 영혼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당신의 도움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이 아직 잠들어 있는 새벽에 예수님께서 기도 속에서 자기를 쏟아 붓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신 후에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벽기도하고 돌아가서 다시 자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보다, 새벽기도를 하고 바로 일과로 이어지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하루 내내 그 고단한 일과로 병자들을 고치시기까지 지치신 그 몸으로 별로 잘 드실 수 있는 넉넉한 처지도 아니어서 30이 훨씬 더 되어 보이는 그 모습으로 새벽의 시간에 아직 어두울 때에 일어나셨습니다. 특수한 몸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으신 그분이 새벽에 일어나셨습니다. 제자들이 아직 잠들어있는 그 새벽에, 깰 새라 조용히 방문을 열고 아직 어두운 그 길을 걸어 빈들로 가시는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들이 배우는 것은 환경과 기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환경 탓을 많이 하는데 기도할 수 있으리 만치 환경이 길을 열어주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물론 영향을 전혀 안 받을 수는 없지만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순전히 환경의 요소만은 아닙니다. 물론 새벽에 출근을 시켜서 오밤중에 집에 돌려보내면 실제적으로 대여섯 시간밖에 못 자는데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 빠진 사람들은 모두 과중한 일이 나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런 과중한 일이 없는 사람들은 기도할 수 없는 이유가 그것보다도 더 커다란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적인 이유입니다. 기도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든지, 기도를 해도 왠지 시원하지가 않다든지 아니면 하나님에 대해서 뭔가 토라진 마음이 있어서 하나님을 원망한다든지, 무지해서 더 이상 어떤 진전을 보기 힘들다든지 아니면 시간도 있고 체력도 있고 집중도 되는데 누군가를 깊이 미워하는 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 기도에 방해를 받고 있다든지 합니다.
일이 많아서 기도를 하지 못하는 환경적인 어려움 하나라면 그것은 어떻게 보면 기도하지 못하게 우리를 대적하는 요소 가운데 가장 극복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지 시간만 없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적당히 병들어 있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으리 만치 그렇게 건강하지를 못하니까 이것저것 몇 가지가 합쳐져서 그냥 기도 안 하는 쪽으로 편안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 들키셨지요?
그리고 남에게 이야기할 때에는 요즘 내 마음에 죄가 많고 나쁜 생각을 많이 해서 기도의 영이 흐려져서 기도를 못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무 늦게 끝나서’ ‘피곤해서’ ‘회사에서 프로젝트가 떨어져서’......늘 그런 쪽으로 핑계를 대지만 정말 순수하게 환경적인 어려움 때문에 기도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환경은 영원히 우리가 타협을 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싸우고 이겨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극복해야할 숙제입니다. 그것을 극복하고 극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싸워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이것은 정말 힘겨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육체를 가지신 그분이 그 일이 얼마나 힘겨우셨겠습니까?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자신이 영혼을 돌보고 그 영혼들을 고치는 사역을 해나가시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이 새벽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하늘에 속한 에너지를 공급받음으로서 자신이 이 사역을 낮 시간 동안 감당할 수 있다고 믿으셨기 때문에 늘 이렇게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침체되었던 우리의 기도생활이 계속 침체로 누워있는 동안에 어느 순간 활기롭게 기도할 수 있도록 벌떡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기도하게 하시지만, 기도하려고 환경과 더불어서 싸우면서 애쓰는 사람들에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 기도의 문을 열어주시고 기도할 새 힘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관심의 초점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제껏 우리의 살아온 날들도 그랬고 또 지금 우리의 삶의 환경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환경적인 이유 때문에 기도할 수 없다면 환경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길 때가 언제쯤 될까요? 모든 것 끝나고 퇴직을 하거나 정리해고 되었을 때일까요? 사업이 모두 거덜나고 실업자가 되었을 때쯤에는 기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날까요?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다음에는 좀더 나은 여건이 있어서 영적인 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하는 식의 기대를 하면서 이제껏 살아왔고 이런 식으로 계속 환경에 의해서 속으면서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 들은 설교인데 ‘차차 마귀’를 조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어려우니까 차차’ 하는 생각이 모두 우리로 하여금 신앙적인 양보를 하게끔 만드는 타협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마귀이다는 뜻의 설명입니다. 마귀라고 까지 말하지 않아도 우리 자신의 영혼에 무리한 부담을 주어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자신이 그 고통을 짊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싫으니까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는 하되 ‘앞으로 상황이 나아지면’ 등등의 토를 달면서 오늘 하나님 앞에 마땅히 해야할 기도의 의무에 해이한 것을 합리화시키면서 위안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들이 기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깊은 후회와 뉘우침이 있다면 우리의 삶이 바뀌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신기하게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자기를 쏟아 붓는 기도의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회개하지를 않습니다. 명백한 돌이킴이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수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성령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놓여있는 삶의 문제를 비춰주시기만 하면 우리는 머리를 들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잠든 영혼에 대해서 말씀의 빛으로 비추며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 사랑 받은 자녀의 삶이냐고 물으시면 우리는 머리를 들 수가 없습니다. 가정의 달이 다가오지 않습니까? 너희의 자녀들을 위해서 울고있느냐고 물으실 때 우리는 머리를 들 수 없습니다. 너희 자녀가 이제 장성해 가는데 정말 저렇게 살아가면 네 자녀가 후에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 수 있겠느냐 하시면 머리를 들 수 없습니다. 너희 자녀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냐고 물으실 때에는 더더욱 몸둘 바를 모르는 정도가 됩니다. 조각나고 부서진 우리의 가정들,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의 영혼을 주님께서 물으시면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의 세속적인 삶은 물론이고 죄에 대해서 늘 지는 우리의 삶,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맡겨진 주의 일들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느냐고 물어볼 때 사실은 우리가 일을 감당한 다기보다는 교회의 일이, 하나님의 일이 우리를 감당하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정말 기도하고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될까요? ‘이런 부분은 이렇게 부족하지만 그러나 정말 제가 힘써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부분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보다 더 시급한 이 기도의 생활을 뒤로 한 채 이런 저런 이유와 핑계로 하루하루 막다뜨린 우리의 삶에 자신을 소진시키면서 이 세상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일보다는 바쁘고 급한 일들을 처리하느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게을리 하고 기도에 소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아닙니까?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우리 육신의 유혹에 굴복하기를 훨씬 쉽게 선택하고 그렇게 해서 수없이 결심하면서도 실패하는 새벽기도 생활의 경험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보십시오. 주님께서 새벽까지 병자들을 고치고 자기를 다 소진하신 후에 이른 새벽의 어두움을 가르시며 홀로 조용히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셔서 이슬을 맞으시며 아버지 앞에 기도하신 그 모습을 보십시오. 단지 연약한 육신을 가지신 그분이었습니다. 육신의 힘으로서는 탁월할 것이 없는 그런 가난한 청년이셨습니다. 30에 50은 먹어 보인다는 소리를 들으셨어야 할 정도로 인생의 많은 슬픔과 고통, 결핍과 연약함을 맛보신 그분이 그런 육신을 가지고 주님 앞에 기도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감당할 수 없는 그 환경을 감당하신 것은, 그 빈틈을 충성과 헌신으로 채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그 새벽에 푹 주무시기를 원하셨을 것이고 예수님도 그 새벽에 쉬는 것이 좋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부족한 기도생활을 하나님을 향한 헌신으로 채우시면서 연약한 육신을 충성된 마음으로 보태시면서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환경의 어려움을 물리치시고 기도로 가득 찬 삶을 사셨습니다. 새벽시간에 이슬을 맞으며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분의 영혼 속에는 하루 동안 우리와 같이 연약한 육신을 가진 비참한 인간들이 먹고 마실 수 있는 영혼의 양식을 깊이 공급받는 시간이셨습니다. 물과 젖과 양식을 그 새벽의 기도의 시간을 통해 자신 속에 가득 채우시고 이른 새벽부터 깊은 밤에 이르기까지 핍절한 영혼들을 찾아내시며 가슴을 풀어 어린아이의 젖을 물리시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무엇인가 자신 속에 있는 것을 쏟아 부으시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자기도 할 수 있는, 자기도 좋아서, 자기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충분히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충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충성은 그 충성이 없었으면 할 수 없었던 일을 고통이 있으면서도 충성하는 기쁨 때문에 극복하며 환경의 어려움을 희생으로 이기면서 감당할 때, 그것이 충성입니다.
(예화) 몇 해전 집회 중 새벽에 너무 일어나기 힘들어서 ‘이렇게 고단한데 좀 더 자고 아침에 활 기차게 기도하고 생활하면 하나님께 더 보탬이 되겠지’했더니 그런 날이 점점 더 늘어났 다.
그래서 어느 날 눈을 뜨자마자 예수님의 이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충성스러우신 모습,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고 쉼이 없는 생애를 사셨으면서도 이 새벽의 시간에 하나님 앞에 나와 자기를 쏟아 부으며 죄 가운데 고통 하는 영혼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신 주님의 그 기도생활은 바로 나같이 이렇게 연약한 육신을 가지신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분은 하셨고 나는 못한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 ‘그분은 주님이시고 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고 대답하면 안됩니다. ‘그분은 충성되셨기 때문에 했고 나는 충성되지 못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충성’하며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힘이 생겼습니다. 그 생활은 너무 힘듭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정말 힘듭니다. 그런데 충성된 마음은 그것을 극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충성’하고 일어나면서 너무 힘이 드니까 ‘하나님, 오늘 졸아도 이해하세요’하며 나옵니다. 정말 너무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부른 찬송이 가슴에 닿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예화) 대한 신학교를 설립하시고 총신에서 구약학 교수를 하시던 김치선 목사님의 힘든 가운데 에서 하시던 기도생활.
이 길이 쉬운 길 같으면 왜 우리 차례가 왔겠습니까? 죄악이 관영하고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더러운 욕망들이 우리의 영혼을 삼킬 듯이 넘실거리는, 나그네와 행인 같은 육체가 우리를 거스르는 이 환경 속에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힘을 간직한 채 그분과의 교제 속에서 일평생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희생 없이 되겠습니까? 소중한 것 치고 쉽게 얻어지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기도생활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십자가 지는 정신이 곡 필요한 것입니다. 환경이 여러분들을 놓아주어서 기도하기를 격려하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럴 때는 일평생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기 힘들 때마다 항상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자기의 연약함을 충성으로 이기시고 자신을 쏟아 부으며 기도에 자기를 바치시고 우리를 위해서 헌신하시더니 결국은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십자가의 정신이 사실은 예수님이 일생동안 기도해 오시던 그 기도의 정신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었다고 말해도 전혀 지나침이 없습니다.
희생 없이 어떻게 이 기도생활의 견고함을 유지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희생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기도생활의 견고함 여부를 보면 그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많은 핑계를 대지만 기도하지 않는 것은 환경 때문이라기 보다는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을 향한 사랑의 뜨거운 충성심이 환경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 환경에 붙들려서 기도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눈물 흘려야 할 기도의 제목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사람도 나의 중보기도를 기다리고 저런 상황도 우리의 헌신적인 기도가 있기 전까지는 개선이 될 것처럼 보이지를 않습니다. 강퍅하고 돌아설 줄 모르는 가족들의 영혼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눈물의 기도로 저들의 영혼을 흠뻑 적시기까지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할 수 없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의 양심이 증거 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렇게 수많은 기도의 제목들 속에 둘러싸여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 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화) 기도를 생각할 때마다 기와집 추녀 끝의 제비집이 생각난다.
우리가 기도라고 하는 모이를 물고 오기를 기다리는 노란 주둥이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넘치는 힘,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기까지 열렬한 기도로 한번의 모든 기도를 필요로 하는 모든 상황의 입들을 모두 틀어막고 변화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부족해도 하나님 앞에 꾸준히 기도하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의지하면서 기도하고, 기도 제목 하나 하나를 위해서 기도하지 못하는 것을 뉘우치면서 조금씩이라도 우리가 더 많이 희생해서 기도의 영력을 넓혀 가는 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피곤하고 힘들고 상황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상황이 어려울 때에 좀처럼 기도하기 어려운 그런 상황에서 기도하기를 결심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우리의 신앙의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마음적으로나 상황적으로 무엇으로 보든지 기도하기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래도 ‘주님께 의지하는 것 말고 내게 무슨 희망이 있으랴’고 매달릴 때에 주님이 주신 은혜가 특별했던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라도 충성되게 살아서 우리의 육신의 연약한 부분들 때문에 주님이 손해를 보시지 않고 우리의 영혼에 손해가 나지 않고 그러한 헌신과 충성심으로 우리의 희생을 통해서 채워지고 보태져야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부산에 집회 갔을 때 한 장로님은 교회 가까이에 살 처지가 못 되어서 매일 택시를 타고 새벽기도를 나가신다고 했다.
희생이 없이는 그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이 교회의 영혼들을 돌보고 그 영혼들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일꾼으로서 여기에 와서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영혼들을 돌보겠습니까? 그런 정도까지는 여러분께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새벽기도든지 저녁기도든지 여러분만의 기도의 시간이 있느냐고 저는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총체적인 경험으로 미뤄볼 때 최소한 삼십 분도 기도생활하지 않고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이길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삶을 사시면서 이 새벽의 시간을 기도에 바쳐서 승리를 지키시면서 사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게 기도하신 그분에게 하나님을 섬길 일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의 필요, 하나님을 섬기는 섬김의 필요 속에서도 기도의 세계를 잃지 않으신 그분이 이 일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 많은 희생을 경험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의 생애 초기의 이 장면을 이렇게 상세하게 여기에 실은 것은 여러분들도 바로 이러한 어려움 속에 있을 때에라도 주님의 이 충성스러운 모본을 따라서 십자가의 정신으로 기도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환경과 더불어 싸워서 기도로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예수님의 기도생활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6:12)”
예수님의 생애에 많은 기도를 하셨겠지만 성경이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에 대해서 기록한 부분들은 그 중의 일부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보이는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 역시 그러한 일부의 기록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일상적인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데 이 때도 역시 예수님이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신 기록이 나옵니다만 두 가지 점에서 이 기록은 좀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산으로 가신 것까지는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데 밤이 마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고 하는 시간적인 길이와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신 정황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정황이 무엇이냐면 하나는 예수님께서 비난받으시던 상황이었고, 또 하나는 큰 일을 앞에 두신 정황이었습니다. 그 앞부분에 보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에 대한 논쟁, 또 안식일에 밀을 비벼먹은 일- 그 사람들의 유전에 의하면 안식일을 범하는 노동이라고 생각함-이 방아를 찧는 의미로 보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안식일의 규례를 걸어서 주님을 안식일을 범한 사람으로 몬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보기에도 말도 안 되는 시비인데 완전하신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변론하실만한 가치도 없는 공허한 비난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로 부르시는 사건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예수님의 기도생활의 교훈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올라가신 상황이 먼저 비난받으실 때였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일단 논쟁의 정신이 들어오게 되면, 변론과 시비에 휘말리게 되면, 우리의 영적 생활에 유익이 될 리가 없습니다. 피치 못하게 자신의 입장을 변론해야 될 때도 있지만 그러나 일단 악의에 가득 찬 변론에 휘말리게 되면 우리의 영적 생활이 흔들리고 균형이 깨트려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점에 있어서 우리들이 영적 생활을 생산적으로 이어가는 비결을 터득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깁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의 명예에 흠집을 내고 예수님이 하시는 그 일이 참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서 예수님이 메시아이기는커녕-그들은 그렇게 생각지도 않았고- 단지 예수님이 백성들 가운데 선지자로 인정받는 것도 못마땅해서 그 사람이 이렇게 율법의 규례를 어기는 것을 볼 때 그가 아무리 감화력 있는 교훈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진리를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참된 선지자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독설이 가득 찬 변론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거기에 대해서 별 반응을 보이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보이신 반응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나있는 ‘이 때에’라고 하는 부사구가 물론 희랍어에서는 반드시 특정한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 문맥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신 이 사건은 바로 이 비난과 관련된 그 때와 같은 문맥 속에서 일어난 때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 때에는 바로 비난받는 그 시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지 몰라도 그 때의 정황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세우시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어떻든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렇게 예수님께서 비난받으시는 장면이 나오고 이어서 ‘이 때에’라고 하는 부사구가 나오면서 기도하시러 가는 모습이 나오는데 결국 시간적으로 직접 연결이 되지 안는다고 할지라도 뭔가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그런 모습을 누가가 그려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누가는 특별히 기도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기록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비난받으시는 장면들을 묘사하면서 거기에 대한 궁극적인 반응으로서 예수님은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시는 모습을 그려냄으로서, 예수님을 향해 퍼붓는 많은 종교지도자들의 반론과 비난이 이 땅에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홀연히 기도하러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교제하시면서 자신의 사역을 이어가셨다고 하는 것을 그림처럼 묘사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근거 없는 비난을 받게 될 때, 혹은 오해로 여러분 자신들의 처지를 잘못 이해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때에 여러분들은 무엇을 하십니까? 여러분들을 비난하는 글이나 비난하는 직설적인 이야기나 누가 여러분들을 비판했다고 하는 소식들이 사람 사람의 입을 통해서 전해져서 여러분들에게 들어올 때, 여러분들이 보이는 반응은 무엇입니까?
비난이 타당성 있고 근거가 있을 때에는 그래도 한편으로 수긍이 가는데 전혀 알지도 못하고 타당성도 없는 이유 때문에 비난을 받을 때 우리의 마음은 참 많이 상하게 됩니다. 더욱이 내가 진리를 따라 행하고 빛 가운데로 걸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혹은 지체들이 나를 옳지 않다고 비난하고 그 비난의 타당성이 결핍되었을 때, 그리고 그 비난 속에 뭔가 나를 섬김으로서 나의 가는 길에 그 비난을 통해서 도움을 주려고 한다기 보다는 무엇인가 악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나를 비난하고 비판하고, 나를 세워주기 보다는 나를 깎아 내고 나를 부서뜨려 보려고 악한 비난을 퍼부을 때 우리는 몹시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그 때 대부분 우리는 마음으로 사람을 미워하든지 아니면 순간적으로 절제력을 잃어버리고 그 사람과 똑같은 행동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보십시오. 비난받으실 때 조용히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또 기도하러 가시던 때가 있었습니다. 칭찬 받으실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의 능력을 주목하면서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할 때 예수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과 헤어지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들은 비난받을 때에나 칭찬 받을 때에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때에나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을 때에나 변함없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시고 싶어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제가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비결에 대해서 가르쳐 드리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때에 흔들리지 않는 실제적인 방법을 가르쳐 드린 일이 있습니다. 실천하고 계십니까?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때 어리석은 사람들은 단지 그것이 자기를 깎아 내리는 비난이라는 것 때문에만 강력하게 인격적으로 반발합니다. 조금 지혜로운 사람은 남이 비난하면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좀더 지혜로운 방법은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미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난에 뭔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면 비난을 하도록 놔두고 듣고 있는 동안에 ‘이 말이 사람의 말인지 사단의 말인지 하나님이 널 시켜서 말씀하시는지 내가 하나님께 여쭈어 보리라’하며 다 듣고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누구로부터 이런 비난을 받았는데,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할 때 하나님께서 “맞다. 너는 좀 그렇다. 네가 하도 말을 안 들어서 내가 너의 잘못을 지적하도록 시켰다”하시면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하고, 그 사람을 만나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 날은 내가 너무 가슴 아파서 너의 말을 다 들어주기가 힘들었는데 듣고 나서 기도하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네 말이 맞다”고 이야기하면, 그 말을 듣자마자 “그래 맞아, 너는 어쩜 나를 그렇게 잘 봤니”하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신뢰합니다.
그리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잘못 알았다”하시면 “감사합니다. 그들이 잘 모르는 것을 용서해주십시오”하고 그냥 살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성격적으로 무덤덤하고 목석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한 행동을 하였다고 한다면, 견디지를 못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작은 일이 하나 일어나면 온 몸과 마음에 평정이 다 뒤흔들리고 심하면 드러눕게 됩니다. 그런데 꽤 오래 전에 ‘이런 모습을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칭찬을 받았을 때는 뛸 듯이 좋아하고 누군가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누군가가 시비를 걸때에 괴로워하면서 순간적으로 마음의 평강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모습을 좋아하실까를 생각해보니, 하나님 때문에는 그렇게 흔들린 적이 많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실 때에는 ‘바람이 지나가나 보다’하다가 조그만 소자가 와서 “그렇게 살면 돼?” 하면 쓰고 드러눕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 지간에 어떻든 그런 식으로 감정적으로 요동하는 것은 성령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는 그렇게 흔들려야 합니다. “너 그렇게 살아도 돼?”하면 하나님께 기도하러 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말씀을 깨닫는데 하나님께서 “너 그렇게 살면 되겠니?”하실 때 잘못했다고 회개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도 움직일 수 없는 그 사람이 사람들의 비난에는 아주 쉽게 움직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견고한 삶을 살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견고하고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커다란 대적은 평정이 흐트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분도 잊어버리고 일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하는 계기 판이 다 고장이 나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을 때의 가치체계들이 다 뒤집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비결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본을 보이신 것처럼 비난받을 때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비난받을 때 기도하면 두 가지 이점이 있는데, 더 이상 범죄하지 못하도록 불을 꺼줍니다. 대개 비난받으면 범죄 합니다. 순간적으로 비난을 받으면서 마음이 확 격동하게 될 때 통제력을 잃어버리기가 십상입니다.
(예화)천여 명의 목사님 장로님들이 모여서 총회를 하다가 한 사람이 개인에게 공격성 발언을 할 때 총회장이 앞에 있는 것을 집어 들고 욕을 하려고 하였다.
비난받을 때에 기도는 첫째 더 이상 범죄하지 않도록 브레이크 역할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안전 장치입니다. 두 번째 유익은 정말 꼭 필요할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을 배우게 합니다. 어려움 속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한참 지난 다음 이야기지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웬만큼 기도 속에 산 사람이 아니면 자신의 힘으로서 문제들을 해결해보려고 하는 인간적인 방법들을 자꾸 간구하게 됩니다. 그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비난받을 때에 깊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것들을 배우게 만들어 줍니다.
시편 31편 17절에 보면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로 벙어리 되게 하소서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 지요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다윗의 경험입니다. 다윗이 자기를 완악한 말로 비난하는 그 인생 앞에서 그들과 함께 침을 튀기며 싸우는 대신에 주께 피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이런 비난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할 때 하나님이 그를 위해서 예배하신 은총의 장막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비난을 퍼붓는 그 때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놀라운 피난처를 마련하셔서 거기에 피하게 만드시는데 거기 피하여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많이 깨닫도록,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만들어 주십니다. “주께 피하는 자들을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크신 지요” 즉 다윗이 사람들로부터 대적을 당하고 비난을 받을 때에 견디다 못해서 그들과 대응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피하며 주의 날개 그늘 아래 숨었더니 거기에는 악인들로부터 받은 상처보다 훨씬 큰 위로와 용서의 은혜가, 치료의 은혜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환경으로부터 자신이 약간 소외당하고 버림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에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난해지는 훌륭한 역할들을 합니다. 가난한 마음이 될 때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중요한 비결 중 하나인데- 그 정황을 가만히 살펴보면 뭔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실망시킬 때, 그리고 믿고 기대했던 사람들이 자기를 떠나고 자기가 외톨박이라고 생각될 때, 그 때 비로소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 피하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집중됩니다.
괴로운 날이나 기쁜 때나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언제나 주는 날 사랑 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 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처음 은혜 받을 시절에 이 찬송을 부르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한이 맺혀있다든지 실망시킨 사람들에 대해 복수심에 불타있다든지 세상에 대해서 염세적인 마음이 된다든지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마음과 비관적인 마음은 다릅니다. 세상을 소홀히 생각하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모아지면서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안에서 살고자 하는, 하나님 자신과의 교제를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의 갈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것이 가난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로 피하는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쓸데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칭찬을 받을 때에는 우쭐대는 마음으로, 그릇된 희망으로 가득 차고, 고난받을 때는 그릇된 절망감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을 온전히 향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로 향하는 가난한 마음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로 피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만이 생사간에, 괴로울 때나 기쁠 때나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고 많은 은혜를 주시며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은총만을 소망하면서 사는 삶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남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때에 맞서 싸워서 자신을 더럽히고 평정을 깨트리는 것보다 얼마나 아름다운 비결입니까?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책망하셨을 지언정 사람들과 변론하시면서 논리로 사람들을 이기려고 애처롭게 몸부림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배워나가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을 때에 기도하지 않으면 반드시 범죄 하게 됩니다. 미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수심에 불타게 됩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괜찮다고 하시는데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면 실제적으로 사람들로부터 받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운 가운데 믿음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것들을 봅니다. 주님을 믿고 난 이후에도 우리 인생의 많은 시간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가에 대해서는 하찮게 생각하며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았어도 사람들이 우리에게 내리는 평가로 인해서는 마음이 상하고 평정을 잃고 혹은 우월감으로 들떠서 교만해진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들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평가에 붙잡힌 사람들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때 오히려 평정을 잃지 않는 기도의 비밀들을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이 상황은 예사로운 상황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신 이야기는 성경에 여러 번 나오지만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장면들은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도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다기 보다는 새벽까지 기도하시다가 체포되어 가시는 모습인데, 무슨 일을 앞두셨기에 이렇게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을까요?
그것을 대답하기 전에 우리들이 여기에서 먼저 깨닫는 것은 기도는 일상적인 기도가 있고 특별한 기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일을 앞에 두고 계셨기 때문에 특별한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누워서 쉬는 것이 창조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 때의 이야기이고 특별한 때가 되면 졸리우는데도 자지 말아야 하고 배가 고픈데도 먹지 말아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웃고 떠들고 놀고 싶은데도 놀지 말아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한 일들은 특별한 기도를 요합니다. 교회 역사에 나타났던 특별한 부흥들은 항상 그 앞에 부흥이 오는 조짐들이 나타났으니, 특별한 기도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자신 앞에 크고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할 때, 그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대는 가지고 있으면서 특별히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주님은 기도에 있어서도 우리를 일반적으로 훈련시키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특별한 훈련을 시키셔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의 세계에서 용사가 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군대의 특전사에 가면 강한 훈련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간 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특별 훈련이 있다
(예화) 교리 반에서의 훈련. 특별히 기도한다
이십 분씩 기도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도 특별기도가 있고 두세 시간씩 기도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으로부터 특별 기도를 요구받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평소에 기도생활을 안 하신 것이 아닙니다.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셔서 기도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일상적인 생활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헌신과 간절한 간구를 요했겠습니까? 그런데 이날은 밤을 새셨습니다. 왜냐하면 특별한 일이 있는 때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기도제목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특별하십니까? ‘하나님이 이루어주셔도 되고 안 이루어주셔도 됩니다’ ‘급한 기도부터 들어주시고 제 기도는 생각나시면 들어주시던 지 말든지 하십시오’ 하는 기도의 제목들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자기의 기도 제목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면서 기도는 일반적으로 하든지 아니면 일반적 이하로 하든지 합니다. 누가 그분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을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기도의 제목은 매우 특별한 기도의 제목이고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매우 특별한 상황이기 때문에 “하나님, 다른 것보다도 나의 처지에 눈길을 주셔야 합니다”라고 주님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는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예화) 대표기도 하는 시간에 사람들을 깨우치려고 하면 안 된다-그래서 강단 방향을 보고 기도하 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는 기도는 청산유수와 같은 묘사, 문학적인 서술들이 깃들여져 있는 아름다운 말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는 기도는 특별할 때에 드리는 특별한 기도입니다. 상황은 특별한 상황을 맞이하였는데 기도가 일반적이라고 할 것 같으면 아직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 특별한 기도 제목을 향한 특별한 헌신의 마음이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벽마다 드리는 그 기도만으로도 예수님의 일생의 사역을 이어가시기에 충분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니 우리처럼 기도하는 동안에,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죄로 말미암아서 기도의 영이 산란해지시는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으니 건성으로 기도하셨을 리도 없고 우리처럼 기도하다 힘들면 졸다가 일어나는 일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언제나 살아 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신 분이었으니 그분의 기도의 시간은 전부 다 준비 운동 없이 하나님과의 교감 속에서 드리는 헌신적이고 열렬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달프기 짝이 없는 일과 속에서도 새벽의 시간을 그렇게 드리며 아버지 앞에 사셨으니 주님의 그 새벽의 기도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특별기도는 그만두고라도 우리들이 예수님의 그 일반적인 기도만이라도 본받으며 단 일년에 한 두 번이라도 예수님의 그 기도를 들을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바뀌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런 기도 속에 일생을 사신 분인데도 특별한 일이 있으니까 그분은 특별한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신 것입니다. 그 다음날 아침부터 또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그분은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화: 20대에는 하루 저녁을 새워도 자고 나면 생생했었다)
(예화: 해외에 집회 갈 때 비행기에서 잠을 거의 못 잔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예수님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 연약함을 다 가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분이 그날 밤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기도로 밝히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기도 속에서 사시기 위해서 자신의 육체의 안락함을 포기하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일반적인 기도생활도 별로 이거니와 일반적인 기도생활이 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뭔가 훈련시키기 위해서 좀 특별한 기도를 바라셔도 우리는 더 이상 특별한 기도를 하지 못하며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주신 기회들을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로 끝나게 되는 결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은 점점 더 능력 없는 삶,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놀라운 은혜의 기적들을 체념하고 살아가는 지도 모릅니다. 보십시오. 크고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특별한 일을 앞두고 특별한 기도를 드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특별한 일은 제자들 중 열둘을 택하여 사도로 세우시고 당신이 하실 그 일들을 이 사도를 통해서 대신 행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데 도구가 될 그 사람들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여기에서 세워진 열두 사도들이 거의 다 사도행전에서 성령강림사건의 증인들이 되고 예루살렘 교회의 초석을 놓는 역사들을 이루어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일은 바로 이 일이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오늘 특별한 일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교회 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의미가 있는 일일수도 있고, 혹은 그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여러분의 개인적인 일들일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여러분들 앞에 놓여있는, 일상적인 기도로는 극복될 수 없던, 일상적인 기도로는 하나님의 응답을 불러오기 어려웠던 그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혹시 그 일이 여러분들에게 특별 기도를 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특별한 기도의 제목이 있는 사람들은 일반적인 기도만으로는 안되고 특별한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시간과 길이, 장소의 문제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집중해서 그 기도의 제목에 몰입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시간들, 그런 마음, 그런 기도의 자세들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 앞에 놓여진 이렇게 특별한 기도의 제목들이 성취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특별한 기도의 헌신이라고 하는 열쇠로 주님의 그 응답의 창고를 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오늘 이 시간에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한번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꼭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그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특별한 기도의 제목으로 삼아 특별한 기도를 뜻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 드리심으로 그 뜻을 꼭 성취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5.무덤 앞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 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1:40-42)”
몇 주전에 예수님께서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 외딴 곳에서 기도하심으로서 하나님과 깊이 교통하시는 것으로서 자신의 영적 생활에 부요함을 공급받으시며 살아가신 기록들을 보면서 우리가 그렇게 일과 사람들과의 관계,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서 환경 적으로 홀로 있는 외로운 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할 필요를 깊이 느끼면서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본문의 상황은 그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한 복판에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기도하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나사로 죽음의 사건입니다.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지 않으시고 결국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아마 나사로와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이는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지만 부모들이 없이 자기들끼리 살아가는 가정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남자라고는 이 나사로 한 사람인데, 또 예수님께 간청했는데도 예수님이 안 계셨기 때문에 죽는 것을 보면서 많이 낙담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사로를 찾으시니까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안 죽으셨을 텐데”, 또 마리아의 경우 “죽었지만 마지막 날에는 부활 할 것이다”고 고백을 했지만 어느 고백도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 전체에서 예수님이 우셨다고 하는 세 번의 기록 가운데 한 번이 여기에 나오는데, 희랍어 성경에 의하면 ‘아다크루센’으로 소리를 내어 펑펑 우는 것이 아니라 흐느껴서 눈물이 흐르는 정적인 울음입니다. 이런 묘사가 나올 정도로 이 사건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고 또 예수님이 눈물을 보이신 사건이었습니다.
이 본문을 대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왜 우셨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여기에서 두 가지 이유를 같이 생각해야한다고 보는데, 하나는 나사로가 죽어있는 것을 보시면서 연민의 마음을 느끼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당신이 기도로서 나사로를 일으키시려고 마음을 먹으셨으니까, ‘나사로가 죽었으니 이들이 어떻게 살아갈까’하는 염려로 우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로의 죽음을 보시면서 우실 이유가 없으셨는데 왜 그랬을까요?
아마 예수님은 나사로를 깊이 사랑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들어 죽는 나사로를 보면서 당신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죽음이 왕노릇하고 있는 현실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피조물들이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오게 되었고 그런 죽음에 아직까지도 복속하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처지를 긍휼히 여기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을 수 있습니다. 어떻든 첫 번째 이유는 나사로와 나사로의 가정이 얽혀있는 연장선상에서 나사로와 나사로의 집안에 대한 알지 못할 긍휼, 그리고 인간의 비참함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자비한 마음, 이런 것들이 작용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현실적으로 더 큰 이유를 저는 두 번째에서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이 눈물의 이유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비롯해서 거기에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찾아왔던 유대인들의 불 신앙 때문에 흘리신 눈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증거로 그 앞에 예수님께서 통분이 여기시는 장면이 나오고 그 앞 편에는 민망히 여기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민망히’가 ‘긍휼히’라면 ‘통분이’는 ‘분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분노는 바로 사람들의 믿음 없음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이미 ,일찍부터 예수님을 안 사람이었고 여기에 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집처럼 묵으시는 집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들을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특별한 친교를 누리면서 누구보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신 긍휼에 넘치시는 사역, 그리고 번뜩번뜩 드러나는 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놀라운 치료와 능력의 역사를 모두 경험하면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생애를 지켜봤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을 마리아와 마르다-마르다는 성격이 분주하고 외향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마리아는 차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즐겨하던 사람이었는데- 이 두 사람마저도 예수님께서 이미 죽은 나사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하실 수가 없다고 하는 동일한 결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부활 때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실 것이라고 생각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이 만일 여기에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안 죽었겠지만 안 계셔서 결국은 죽었으니 죽어버린 다음에야 예수님이 이 나사로를 위해서 무슨 좋은 일을 하실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에는 커다란 고통이 되었고 통분이 여기시는 이유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해드리는 것이 무엇일까요? 물론 여러분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의 영역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아픔을 드리고 그분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 일들은 무궁무진하게 많습니다. 여러분들의 나태한 교회 생활을 예수님이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이곳 저곳 유리하면서도 정착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모습들도 예수님께서는 너무 마음 아파하시는 대목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범죄 하거나 불순종하는 일도 예수님의 마음에는 큰 고통이 되고,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었는데도 변화되지 않는 상태의 육신 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머물러 있는 여러분들의 모습도 예수님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요 아픔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은 부분적이고 그보다 더 뛰어나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그분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 다시 말하면 믿음 없음을 인해서 예수님께서 가장 슬퍼하신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 믿음 없음이 아까 말씀드린 잘못된 모든 삶을 살아가는 근본적인 원인이 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높였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벌벌 떨며 그 하나님에 대해서 공포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만큼 신약에서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신약에서 매우 강조됩니다. 그분에 대한 전적인 신뢰, 여기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무엇이든지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라고 하는 전적인 믿음, 이것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가장 커다란 고통이요 아픔이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당신을 향한 온전한 믿음이 없는 것으로 인해서 슬퍼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커다란 불순종과 범죄도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그럴 듯한 삶을 살아가면서 마음속으로는 그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이든지 당신이 원하시는 일들은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실 수 있다고 하는 그의 전능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 이것이 없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마음에 고통 그 자체인 것입니다.
불순종이 어디서부터 오는 지 생각해보십시오. 기회주의적인 신앙생활, 마음의 확정함이 없고 세상에 붙었다 교회에 붙었다, 이렇게 정처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궁극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 우리 주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의 부족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충분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불법과 탈법을 행하며 정도를 걸어가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내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협을 받을 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리라’고 하는 전적인 신뢰,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분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 자기를 능히 도우실 것이라는 전적인 의뢰의 마음, 이것이 없는 것이 곧 죄요 불순종이요 불 신앙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이미 당신과 매우 친밀하게 지내고 당신의 사랑을 맛보고 그 교제 속에서 살아가는 이 마리아와 마르다의 불 신앙,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온 유대인들의 불 신앙을 보면서 많이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믿음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말했으니 이는 곧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따라서 무엇이든지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이며, 그 능력에 있어서 한없는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전적인 의뢰, 그리고 그 능력으로 나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하는 이 믿음, 이 신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여주듯이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리고 이미 죽어서 나흘이나 지나 썩어서 냄새가 나는 열려진 무덤 앞에서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들으실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처해진 이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드리셨던 사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이렇게 모든 사람들 앞에 보이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이 이례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길가 어귀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들을 탄핵하신 것이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군가에게 보이는 기도에 대해서 옳지 않게 생각하셨는데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앞에 기도하심으로 마치 길가 어구에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기도했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흉내내는 것처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할 사실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그 기도를 문제 삼으신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문제 삼으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동기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기 위한 것임을 지적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형태에 있어서는 그들의 기도와 같았을 지 모르지만 동기 면에 있어서는 예수님은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이 기도를 하신 것이 아니고 이 기도의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이 당신을 향해 제공할 지도 모르는 좋은 평판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하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주위의 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언제든지 눈을 들면 하나님 아버지를 주목하고 기도의 문을 열면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그 상황에 매이지 아니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으로 영혼 깊은 곳에서 기도를 올리실 수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향해서 언제나 열려있고 살아있는 그런 기도의 영성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저는 영적인 순발력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 여러 가지 복잡한 일에 종사하다가도 딱 덮고 즉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면 순간에 밀려오는 기도의 은혜들, 그리고 생생하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영적인 놀라운 순발력, 이런 것들이 바로 깊은 기도 속에서 산 사람들 만이 소유할 수 있는 영적인 특성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를 우러르는 앙망의 정신이 강하셨기 때문에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일단 하늘을 향해 우러르실 때에 예수님에게는 그 주위의 사람들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들은 이처럼 자기가 놓여진 삶의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는 하나님과의 순발력이 있는 기도의 교통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넉넉하고 릴랙스해서 언제든지 자기가 원하는 때에 교회에 와서 기도할 수 있고 언제든지 기도를 위해서 하던 일을 접어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복잡하고 다단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그런 시간을 같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사회가 빨리 뛰니까 나도 빨리 뛰지 않으면 도저히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뛰면서 왜 뛰는지 왜 이렇게 허둥대는 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삶입니다. 한국에서는 사십대가 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과로사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때 사회적으로 책임감도 한창 증대되는 때입니다. 그리고 정상적으로 승진을 했을 경우에는 아랫사람에게 많이 위임할 수 있습니다.
(예화)직장 생활하는 사람 중 제일 스트레스를 받는 가를 통계 냈더니 중간 관리자였다.-그래서 이 때 과로사로 죽을 위험이 많다.
(예화) 유럽의 슬라비아가 생겨났다-천천히 생활하자.
요즘 직장생활을 하거나 사업하는 지체들을 보면 도대체 왜 사는 지 모르겠습니다. 밤 열 두시나 새벽 세시에 들어와 여덟시 반까지 출근하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의 기계입니다. 가족이 있어도 서로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식의 생활이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깊이 생각하고 과감하게 자기 자신의 삶의 스타일을 개혁해야합니다.
(예화) 젊은이들이 직장에 가려고 하면 인간적인 삶의 질을 보장해 주는가를 먼저 따져보라고 한 다. 월급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이렇게 힘겨운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속에서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기도에 있어서의 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 순발력의 정신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해진 시간에 간절히 기도하는 생활을 기초로 해서 변화 무쌍한 생활 속에서 주위에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 복잡한 도심을 통과하든지 복잡한 전철에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떠밀리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기도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즉시 기도할 수 있는 순발력, 주위에 누가 있든지 없든지 그런 것은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오늘 이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순발력 있는 기도생활은 고정된 기도의 시간을 갖도록 우리를 촉진할 것이며 고정된 기도의 시간을 같고 자신을 쏟아 붓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이런 순발력을 가진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물건을 팔다가 손님이 끊어졌을 때 손을 모으고 “주님, 오늘도 마음속에 오셔서 제가 주님의 은혜 안에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하는 기도로 순간적으로 기도의 은혜로 깊이 젖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우리들이 생활하면서 보면 우리들이 이렇게 순간순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친밀함을 가질 수 있다면, 환경에 매이지 않고 순발력 있게 기도할 수 있는 순간들이 정말 많습니다. 혼자 조용히 운전하는 시간은 기도하기에 십상인 시간입니다. 책을 읽으면서도 화장실에 가만히 앉아서도 전철에서도, 우리 내면 세계의 갈망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런 순발력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을 많이 하고 있을 때는 그런 일이 자주 생기지만 많이 못하고 있을 때에도 갑자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증이 확 생기면서 주님이 그리워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짧은 시간이라도 즉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의 은혜가 확 밀려와서 눈물이 펑펑 쏟아지면서 깊은 기도로 순식간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항상 우리가 아무도 없는 교회당에 조용히 앉아있는 때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런 것들이 밀려올 때 즉각적으로 순종하면서 주위의 환경과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지체는 이럴 경우 화장실에 간다고 했다- 회사가 아무리 바쁘고 인정이 없어도 화 장실 가는 것을 못하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주님과의 교제를 유지하며 사는 방법은 우리들이 갈증이 없기 때문이지 무궁무진합니다. 바쁜 직장 생활 속에서 그렇게 순간순간 하나님을 찾으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실 까요? 주님은 다 아십니다. 우리가 빤질대고 기도 안 하는 것인지 아니면 애를 쓰는데도 환경이 너무 어려운 것인지 다 아십니다. 할만한 상황을 주었는데도 기도 안 하는 사람은 혼나야 합니다. 그러나 할만한 상황을 주었을 때 많이 기도한 것보다는 때로는 기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순발력을 발휘해서 하나님 앞에 조금 기도한 것도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함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 순간 그런 걸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기도생활의 목표 자체는 고정된 시간에 기도를 흠뻑 쏟아 붓고 그 다음에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계속 기도의 은혜, 기도의 영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감사한 일이 생기면 감사하고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생각나면
이와 같은 때에 나 노래하네 사랑을 노래하네 주님께
이와 같은 때에 나 손을 들고 손 높이 드네 주님께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그런 교감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설거지를 하든지 세수를 하든지...
루이스 벨리라고 하는 청교도가 ‘경건의 실천’이라고 하는 고전적인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 보면 어떻게 하루의 일과를 기도의 은혜 속에서 사는 지를 썼습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제일 먼저 침상에서 기도하고 옷을 입으면서 ‘하나님, 오늘 하루도 이 옷과 같은 선한 행실로 벌거벗은 수치를 면하게 해주시옵소서’ 기도하고 세수할 때는 ‘간밤에 어디를 돌아다닌 것도 아닌데 내 피부에 더러운 기름기들이 많이 꼈습니다. 이렇게 깨끗이 닦아내어서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듯이 오늘 하나님, 나의 영혼의 침체 속에서 더러운 액체들로 더럽혀진 내 영혼의 얼굴을 이렇게 씻어주시옵소서’ 이렇게 계속 이어져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농경 사회를 배경으로 한 것이니까 전적으로 다 적용하는 것은 다소 힘들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정신은 탁월합니다. 그런 정신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은 부인할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순발력 있는 기도생활의 모본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정해진 시간을 기도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이렇게 순발력 있는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짤막짤막한 기도에 깊이 마음을 실어서 하나님 아뢰는 연습을 한번 해보십시오. 경건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유혹이 밀려올 때, ‘주님’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피하게 하고 누군가로부터 마음이 상하였을 때 즉시 복수심에 불타지 말고, 순간적으로 이렇게 주님을 부르면서 극복해 나갑니다. 예수님이 그런 모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기도 내용이 우리에게 깊은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믿음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벌써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는 다 아는데 어쩔 수 없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아시고 통분이 여기시면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신 기도였습니다. 믿음을 구하는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고난을 이기게 해달라고, 도 은혜를 주시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도록, 또 축복해 주시도록 기도를 많이 하지만 정작 믿음을 얼마나 구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 속에서 살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내가 할 수 없는 일, 그리고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들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수 있다고 하는 견고한 신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의뢰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전적인 신뢰, 그분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전능하심에 대한 온전한 의지, 이런 것들을 믿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얼마나 구하고 있는 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내가 간구하고 기도하면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예수님이 살리신 것이 아니라, 오늘 이 표현에 의하면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이 확고하게 믿으시면서 감사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어있는 상황 속에서 나흘이나 되어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이 상황에 서있게 된 것은 너무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내가 나사로를 사랑하는 것과 나사로가 죽어서 이미 희망이 없는 시체가 되었다는 것은 모두 알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주시면 저희들이 믿을 터이니 그렇게 믿을 기회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설교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통분이 여기시면서 눈물을 흘리신 이유와 연결이 됩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은 끝났지만 기도의 사역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천국의 보좌 우편에서 주님이 기도하시는 가운데 하나가 여러분들이 믿음 안에서 살기를 아버지께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변함없는 기쁨이요 주님이 무엇이든지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하실 수 있다는 믿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하는 것을 자신의 이익과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뢰,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 믿음, 이것이 주님이 오늘도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고 믿으시면서 기도하시는 제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충만한 믿음 속에서 살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사랑에 감격하면서 자기의 삶을 온전히 주님의 손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은혜,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그렇게 자기를 다 드리는 이 온전한 의탁의 정신, 그리고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하는 굳건한 신앙적인 확신 속에서 살아가기를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면에서 적용을 가져다줍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생애에서 이렇게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신 이 장면이 이 복음서에 기록된 것을 보면서 두 가지로 적용이 되는데, 첫째는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주님이 이런 것들을 기록에 남겨 놓으셨으니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간절한 소원은 우리가 먼저 그런 믿음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기도하셨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기도해야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애에 이처럼 간절히 사람들이 당신을 온전히 신뢰하고 믿도록 당신의 전능하심과 위대한 능력을 확신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것을 보면 역시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이런 믿음 있는 사람들이 되어서 이 믿음 안에서 살아가기를 기뻐하시는 것이고, 따라서 이런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믿음을 생각하면서 믿음이 없이는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쉼 없이, 이렇게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살려 주셔서 이렇게 놀라운 희망을 주신 것처럼 우리의 상황과 형편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고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의뢰의 마음으로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하는 믿음 속에서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우리가 그 믿음 속에서 계속 살기를 기도해야합니다.
(예화) 10여년 전 일본과 야구시합 중 우리가 일본에게 지고 있었는데 한 선수가 말루 홈런을 쳐 서 이기게 되었다- 그 한방의 홈런이 가져다 준 사회적 효과는 돈으로 계산이 안 된다는 사회학자의 말)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도 완전히 희망이 없다가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었으니 이 집안은 누가 부양하겠습니까? 남자도 없는 그 자매들을 사람들이 얼마나 무시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좋다고 죽어라고 좇아 다니더니 결국은 나사로가 죽었다’고 얘기 할 것 아닙니까? 아무 희망이 없던 상황에서 수의를 두른 채 걸어나올 것을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너희들이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이런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과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면서 예수님이 그렇게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셨는지 한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은 우리가 그런 믿음 속에서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절망적이라고 해서 좌절하지 마십시오.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소서
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신뢰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두 번째 적용 점은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을 위해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또한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위해 기도하여야 할 이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의 믿음을 위해서, 내가 돌보고 있는 영혼들의 믿음을 위해서, 내가 사랑하는 지체의 믿음을 위해서 이렇게 온전한 주님을 향한 신뢰, 절망 가운데에서도 낙망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전능하심과 그 은혜의 가능성을 굳게 믿으며 신뢰하면서 나아가는 그런 믿음을 나와 관련 있는 지체들이 갖도록, 내가 돌보는 영혼들이 그런 믿음 속에서 살도록 간절히 기도로 헌신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정말 그들이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또 헌신적인 기도는 사람들 속에 그런 믿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중보의 기도는 그런 면에서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를 위해 기도하면 큰 믿음을 갖게 만들어 주십니다. 불행과 좌절 속에서 평강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지체들에게 이런 깊은 은혜를 하나님이 주시기만 하면 그들에게 놀라운 믿음이 생겨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모든 흔들림과 정신적인 고통을 뛰어넘는 그 하나님의 평강을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늘 이렇게 기도하며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믿음과 우리 지체들의 믿음을 위해서 기도하며, 우리 모두 한사람 한사람이 믿음이 없어서 뒤로 물러서는 자들이 아니라 믿음 속에서 불행한 상황과 견디기 힘든 고통을 극복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 생활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입니다.
6.변화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9:28-29)”
예수님의 생애의 기도의 자취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실려있는 이 장면은 우리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용모가 변화되시는 광경입니다. 변화산이라는 말은 후에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용모가 놀랍게 변화되신 광경을 기억했던 제자들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일 것입니다. 아무튼 이 변화산에서의 사건이 예수님의 기도와 연관되어있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은 우리에게 또 하나 흥미로운 관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여기서 몇 가지 기도에 관한 중요한 교훈들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인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셨고 그 가르침이 있은 지 팔일 만에 기도하시러 변화산에 올라가신 것을 누가가 기록하고 있으니까 그 가르침은 상당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가르침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평소에 그러하듯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후일 변화산으로 명명된 이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런데 무슨 가르침이 있었기에 그 말씀을 하신 후 팔일이 지났을 때에 예수님께서 이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 앞에는 예수님께서 자기가 고난을 당하고 죽으셔야할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복음서 전체를 조화시켜놓고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하는 베드로의 고백이 있고 난 후부터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으니까, 이 장면도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역시 예수님 생애의 후기가 된다고 보는 편이 옳습니다.
그렇다고 볼 때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고난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예언과 이 변화산의 사건은 구속사적으로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더욱이 이 변화산에서 제자들은 놀랍게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수많은 인물 가운데 왜 하필이면 모세와 엘리야일까 하는 점에서 생각해보자면, 모세는 분명하게 율법을 하나님께로부터 수여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수여하심으로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국가의 개념을 이루셨습니다. 모세로 말미암아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국가가 이루어졌다고 할 것 같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신약시대의 교회가 이루어지게 하셨으니 구약시대에 율법을 수여 받은 모세와 신약에 있어서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이 대조는 아주 분명하고 의미 있는 대조가 될 것입니다. 결국 모세가 그 율법으로 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음으로 완성하신 것까지 고려한다면 그 중요한 변화산의 자리에 모세가 나타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우선은 엘리아가 활동하던 시기가 주는 의미입니다. 그는 아합 시대에 활동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타락하고 배역하고 불신앙적인 나라였던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선지자의 대명사로서 엘리야를 보내서 사역하게 하시고 고난을 받게 하셨다는 점에서 그 시대와 예수님께서 활동하고 계신 그 시대가 백성들이 완악하고 강퍅해서 하나님을 거스림에 있어서 비교되기에 좋을 만큼, 그런 시대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엘리아가 가지고 있는 전설적인 능력 때문입니다. 구약에 있어서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능력을 생각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엘리야 선지자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도 제자로서 많은 능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으나 그런 면에 있어서 엘리사에 비해 엘리야가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놀라운 능력을 받은 사람이라는 면에서 예수님이 이 엘리야와 함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후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이 놀라운 구원 사역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보여주실 위대한 능력을 암시하는 광경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모습들은 예수님께서 그 시대에 오셔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하실 위대한 일들에 관해서 보여줍니다. 엘리야는 놀라운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능력뿐만 아니라 놀라운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시고 또 하나님과의 관계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중보자가 되실 것을 보여주셨다는 점에서 이 변화산의 결정적인 사건에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났던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렇게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변화산에서 함께 모인 것은 최종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완성될 구속의 위대한 역사에 대해서 서로 나누기 위해서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해석을 배척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어떻든 구약의 이 걸출한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가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율법과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셨다고 하는 가능성에 대해서 우리들이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떻든 뜻깊은 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일어난 일은 예수님께서 놀랍게 변화되는 일이었습니다. 두 가지 일이 이 변화산에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용모가 놀랍게 변화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변화된 용모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용모를 생각할 때 우리들이 가능성 있게 생각하는 것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을 때에 놀랍게 변화된 그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와서 놀랍게 변화된 그 모세의 신령한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랐던 그러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만의 독특한 변화가 아니었겠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지 않으셨지만 예수님의 부활체의 모습 속에서 나타난 신비한 변화가 예수님의 생애에 먼저 경험됨으로 후일 부활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완전한 영광을 이 변화산에서 경험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이것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에 의한 놀라운 변화였고 단지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깊은 기도생활 속에서 맛보게 되는 신령한 영향이 주는 변화와는 다른 인체의 본질에 영향을 준 강력한 변화이고, 그 변화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잠시 물질의 세계를 초월하는 신적인 변화의 세계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모세와 엘리야와도 대면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변화의 광경은 그렇게 예수님을 자랑하기 좋아하는 제자들도 그 광경을 보고 어떤 두려움 속에서 가슴에 묻어두고 사람들에게 발설하지 못할 정도로 충격적인 광경이었고, 또 그런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염려 때문에 이들은 더욱더 변화산에서의 그 놀라운 광경을 세 사람만 가슴속에 깊이 묻어두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두고두고 이 사도들에게는 추억거리가 됩니다.
거기서 찬란하게 변화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 그리고 변화된 모습으로 함께 자리를 같이한 모세와 엘리야의 현림을 통해서 제자들은 이 예수님이 정녕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그 분이 단지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자신들이 예전에 생각하였던 바와 같이 걸출한 교사나 선지자 이상의 인물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깊은 경험들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초점은 놀라운 변화가 예수님에게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일어난 일은 다시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서 예수님을 인정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이는 나의 아들, 곧 나의 택함을 받은 자라”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광경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때의 광경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이렇게 변화되어서 모든 세 제자들이 커다란 충격을 받고 놀라고 있을 그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는데 이는 나의 택한 자라, 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인침이 분명히 있게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이 변화산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어떤 때에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놀라운 용모의 변화를 경험하셨지만 예수님은 신비한 경험을 통해서 변화되시려고 그 산에 올라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인정하시는 음성이 들려서 그 광경을 보면서 세 제자들이 졸도할 것과 같은 영혼의 커다란 충격을 받았지만, 그러나 또한 주님의 인정하시는 음성을 통해서 제자들을 놀라게 해주시려고 이 변화산상에 올라가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올라가신 목적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기도하시러”올라가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기도하러 올라가지만 변화산에 올라가기만 하면 이렇게 내 용모가 놀랍게 변화되고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서 따라갔던 이 제자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이 사건이 있으리라’고 예상하시지 못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습니다.
후일 변화산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산에 예수님께서 올라가신 목적은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시러 올라가신 그 목적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다락방의 긴 강화를 끝내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찬미하며, 그리고 습관을 따라서 기도하시기 위해서 산으로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셨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더 가까운 곳까지 데리고 올라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산으로 기도하러 가신 이것은 예수님의 습관이었습니다. 자연적으로 있는 기도생활의 일부분이었고 그 자연적으로 있는 일반적인 기도생활 속에서 에수님께서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되신 사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참 놀랍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것을 기대하고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기도를 작정하고 심지어는 금식을 하고 철야를 하고 기도해도 하나님을 못 만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냥 매일매일 나오는 새벽기도, 매일매일 드리는 저녁기도 매일매일 드리는 밤 기도인데도 별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기대 없이 매일매일의 습관을 따라서 아침에, 새벽에, 혹은 밤에, 낮에 기도하러 갔는데 기도를 하다가 예상치도 못했던 커다란 은혜를 그 기도 속에서 선물로 받는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그런 간증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제 생애 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성령을 깊이 경험한 여러 번이 있었지만 처음 강력하게 경험했던 것이 결혼하고 얼마 안되어서 기도할 때였습니다. 특별한 기도의 제목이 있기는 했지만 직장을 다니고 있었으니 매일 새벽기도를 가기는 했어도 특별히 더 기도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새벽은 제 생애에 있어서 잊혀지지 않는 새벽이었습니다. 매일매일 새벽기도에 나가니까 그날도 기도할 마음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날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하고 그냥 나갔습니다. 겨울이 다가오는 11월쯤으로 기억되는데 사람들은 다 가고 기도하다가 너무 안타까워서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엎드려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더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을까 하는 촌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교회당에 혼자 콘크리트 바닥에 내려앉았더니 습기가 차 올라오면서 무릎이 시렸습니다. 그리고 엎드려서 기도를 하는데 거기에서 불을 받는 경험을 처음으로 했습니다. 강단 한복판에서 불이 날아와서 쾅하고 부딪히며 온 몸이 불붙는 것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하더니 방언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습관을 따라서 그 새벽에 기도하러 나간 것이었습니다.
몇 달 동안 고민을 해도 도저히 해답을 찾을 수 없는,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미궁 속에 빠져 헤매다가 어느 날 새벽기도 시간에 늘 하던 새벽기도니까 나갔습니다. 새벽 기도 시간에 기도하면서 명백하게 응답해주셔서 여러 달 동안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모르던 문제에 대해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놀라운 용기도 갖게 된 적이 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그런 경험은 되풀이됩니다. 교회가 커다란 어려움에 처해서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교인들 전체에게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있고, 내가 마땅히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도 내 몸이 그렇게 움직여지지 않을 때 또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모를 때, 평안을 잃어버리고 심한 근심과 불안 속에 가슴이 휘몰아 칠 때 습관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데, 놀라운 평강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교회 이전을 계획하면서 그런 경험을 선명하게 했습니다. 상황을 보면 목회자로서 일주일이라도 금식기도를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두렵거나 무서워서가 아니라 강력하게 감동이 올 때 되는 것인데, 사람이 무디어서 그런 지는 몰라도 상황은 그렇게 급박한데 내 분깃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기도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예화: 기대에 못 미치게 헌금이 나오고 계획이 어떻게 될 지 흔들릴 때, 마귀의 시험이라고 생 각되는 목회 사역이 실패했을 지도 모른다는 송사와 교인들에 대한 한없는 서운함,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염려로 사흘간 고통 속에 있었다-엎드려도 기도도 안되고 눈물도 나지 않았었는데, 삼일 째 되는 날 견딜 수 없는 육체의 피곤함으로 특별한 기대도 없이 나왔는 데, 기도 중 순간에 마음이 녹으며 성도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흘러 들어왔다. 하나 님의 마음으로 성도들에게 연설하고 나니 일주일간 엉켜 붙어 있던 성도들의 마음이 확 열리게 되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었다)
깊이 회개하고 많이 울고 나니 마음의 요동함이 사라지고 근원을 알 수 없는 평강이 밀려왔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아무 기대감 없이 새벽기도에 나왔는데 그 새벽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결국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때가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개입하신 때라고 생각합니다.
(예화: 건축헌금을 해야한다는 광고가 나간 후 교회의 성장이 멈췄다. 그런데 제 마음의 변화 를 기점으로 더 많은 건축헌금이 들어오게 되었고, 성도들의 마음이 많이 풀어져서 기 도하게 되었고 교회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사 간다고 해도 등록하는 수가 늘어났 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깊이 느꼈고 교회가 정말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보통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니 주님께서 다 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기도하러 갔을 때 일어난 것입니다. 특별히 기도해서만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특별한 일이 있을 때 특별히 마음을 먹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늘 하는 기도는 특별 기도만큼이나 중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특별한 계획을 세울 때에 특별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일반적인 기도 속에서도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습관을 좇아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는데, 예수님이 생각지도 못하셨던 일들이 일어난 것처럼 우리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애가 보여주는 교훈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기도하러 가셨을 때 예수님의 용모가 놀랍게 변화되는 영광스러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용모가 변화되려고 올라가신 것이 아니고 기도하러 올라가셨는데 예상치도 못하게 예수님 자신의 모습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 예수님의 생애에 나타난 예수님의 놀랍고 온유하신 모습, 그리고 예수님의 거룩하신 모습, 어떠한 욕망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 의탁하셨던 그 인류 구속의 대업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한길로 달음질 치시시던 예수님의 생애의 모습을 뵈오면서 그렇게 사실 수 있던 원동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여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와 달리 죄가 전혀 없으셨던 분이셨기 때문에 그렇게 거룩하고 훌륭하실 수 있었지만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는 없으신 분이었지만 고난을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항상 거룩한 인격으로 이렇게 사실 수 있었던 놀라운 비결은 이러한 기도생활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우리 자신의 인격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혈기충만하고 다혈질 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하던 사람이 깊이 하나님을 만나고 깊은 기도생활 속에서 단련될 때, 그의 인격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경박함이 변하여 신중한 인격이 되고 이기적이던 사람의 인격이 변해서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정말 자기 밖에 몰랐던 사람들이 이제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격의 놀라운 변화가 기도생활 속에서 되는 것입니다. 회의 때 과격하게 나오는 사람은 더 많은 기도생활이 필요합니다. 충성에 관한 시리즈를 설교하면서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일수록 독단적이기 쉽고, 사랑이 부족해지기 쉽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을 완화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많이 기도하면서 그 기도의 깊은 은혜 속에서 사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예화: 많이 찌든 때는 고성능 세제를 풀어서 하루쯤 놔둔 후 보면 물이 새카맣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격 갈피 갈피에 있는 더러움,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과는 거리가 먼 아주 조잡한 인격, 야비한 마음, 세상 것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애착, 신령한 것들에 대한 낯선 마음, 이런 것들이 기도의 은혜에 푹 들어가서 오랫동안 삶아지고 나면 그 더러운 것들이 빠져 나옵니다. 때에 푹 절은 빨래를 단 시간에 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삶아도 안됩니다. 삶더라도 때를 다 빼내고 삶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성능 세제 물 속에 한참 있으면 때가 빠져나가듯이,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만나서 그 인격이 신중하고 훌륭하다 생각이 들면 그 사람을 칭찬하지 말고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하고 그를 바꿔놓으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기도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놀랍게 바꿔놓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대견해 하시는 것은 우리가 변화되어서 진실한 사람이 되고 사랑과 은혜에 넘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녀봐도 그것이 느껴집니다. 사랑이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인데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서 계속 다듬어졌기 때문에 성화 된 인격 속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이 있어서 사랑이 있는 교회가 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사랑이 있는 교회를 만들려고 애를 서서 그런 사랑을 흉내낸 분위기가 되어있는지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인격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항상 사람의 마음에 편안함을 줍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뭔가 자유를 줍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지어낸 것은 사람을 불안하게 합니다.
(예화: 백화점에 가면 잘 접어놓은 옷을 풀어 보여준다. 이런 지나친 친절은 부담스럽다)
사랑이라고 하는 자체가 어떤 행동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그런 주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인격적인 변화가 필요한데 기도 없이는 인격적인 변화가 안됩니다. 그러니까 가족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가운데 ‘나는 가족들에게 모두 노출되는 생활을 하는데, 인격적으로 잘 준비되었으면 가족들에게 감동을 줄텐데’ 하는 마음이 있으면 기도생활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신앙심을 보기 위해서는 그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모습만 믿지 말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 아뢰는 그 기도의 생활이 얼마나 긴밀하고 몸에 배어 있는가 하는 것을 봐야 합니다. 그런 기도생활이 확립되어있고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시간을 정해놓고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서 기도하셨던 것처럼- 일정한 기도생활이 정해져 있고 그 기도 속에서 더 깊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기도의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은 인격이 좀 덜 떨어진 것 같아도 그 사람들은 기도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인격이 빚어질 사람들입니다. 새롭게 되고 변화될 사람들입니다.
제가 극복할 수 없었던 어려움을 하나님이 극복할 수 있게 하셨고, 저는 보여줄 수 없는 관용을 하나님이 보여주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사람들은 정말 착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변화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자연적인 인간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연적인 심성이 좋다는 사람 치고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 못 봤습니다. 교회 와서 사람들 만나면 껄껄 웃고 너그러운 것 같은데 예배시간에는 늘 잡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거듭나고 주님이 매만지신 성품입니다. ‘그 사람 정말 너그럽고 괜찮은 사람이야’하며 호감을 갖고 보면 일을 할 때 흐리멍텅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만 마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한없이 너그러운 것입니다. 늘 ‘그럴 수도 있지’합니다.
자연적인 성품은 어느 하나가 뛰어나면 그것 때문에 반드시 찌그러진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계산이 분명하고 사리에 밝은데 융통성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보다 인격이 좋아야 한다고 충고하는데, 그 인격이 신앙으로 빚어진 인격일 때에만 의미 있는 것이고 그 신앙과 인격은 나눠지지가 않는 것이기에 다 쓸데없는 이야깁니다. 다만 하나 경계하는 것은 인격화되지 않은 신앙을 너무 값있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결정적인 문제는 기도생활입니다. 기도생활을 통해서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 신령한 은혜 속에서 가슴에 감동을 받아서 자기의 부족을 발견하는 자기 성찰의 삶이 계속될 때 기도가 끝나고 나면 하나님이 자기를 변화시키시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기도하러 올라갈 때는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해서 상황을 확 변화시켜야지’ ‘저 인간을 확 뒤집어 버려야지’ ‘예수 안 믿는 우리 식구들 이 기도로 단숨에 두드려 잡아야지’ ‘하나님도 내가 확 바꿔버릴꺼거야’하는데, 정말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기도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늘 제 가슴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께 많이 인용하는 얍복강 가에서의 야곱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흔히 그것을 믿음으로 천사와 씨름해서 이겼다고 하는데, 호세아서 12장을 종합해서 보면 결국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한 것은 인간적인 기질이었고 환도뼈를 치니까 주저앉으면서 울며 하나님께 매달렸다고 나옵니다. 깊은 통회의 기도가 하나님을 이기게 만든 것입니다. 성품의 변화와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시고 완전하고 거룩하신 분이시면서도 기도 속에서 이렇게 자신이 거룩해져 가셨다고 할 것 같으면 예수님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죄성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기도해야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많이 깊이 기도하지 못하고 일상적으로 늘 기도 속에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별로 큰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일주인 내내 기도생활을 못한 것에 대해서는 가책을 안 느끼는데 주일 예배 한번 빠진 것에 대해서는 가책을 느낍니다. 그런 식의 사고방식 자체가 바리새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는 마음이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설교하면서 ‘진실한 신자가 되자. 정말 성도다운 삶을 살자’고 할 때 적어도 성경에서 그려내고 있는 거룩한 성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제일 먼저 한 사람을 성경에서 진실한 신자로 그려낼 때는 그 사람이 무엇에 있어서 형식적인 신자와 구별될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첫째로 경건 생활에 있어서 형식적인 신자들과 가장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신자도 교회에 나오고 형식적인 신자도 교회에 나옵니다. 바리새인 같은 형식주의자들도 교회에서 집사도 되고 장로도 되고 교회에서 직분들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차이점은 형식적인 신자들은 일주일 동안 경건 생활이 거의 없이 살아갑니다. 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조차 형식적입니다. 진실한 신자들은 진실한 경건 생활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는 삶, 그리고 매일매일 자기를 죽이며 그 말씀을 붙들고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자녀답게 되고 주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애쓰면서 살아가는 생활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기도생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신앙생활은 깨트려지고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기도생활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이런 저런 훈련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그 속에서 열렬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생활이 확립되지 않은 사람들의 문제는 교회생활에 닳기는 닳는데 거룩해져 가지 않습니다. 변화되지 않습니다. 집사가 되고 심지어 교사가 되고 영혼들을 돌보면서도 아직까지도 기도의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그 기도생활이 자기의 삶의 일부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너무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언제까지 그런 식의 삶을 살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그 고난에 가득찬 순간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는데도, 그 신비를 알지 못하는 제자들을 뒤로하고 기도하러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와 더불어 산에 오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특별 기도도 중요하지만 늘 하는 일반 기도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의 변화가 일어나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으면서 새벽이면 새벽, 밤이면 밤, 낮이면 낮, 정해놓은 기도 시간에 하나님 앞에서 늘 기도하는 그 깊고 진실한 생활을 해야합니다.
“직장이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수도원으로 들어갈까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생활이 견고하게 서야 합니다. 고달프게 살고 바쁜 생활을 한다면 예수님보다 더 바쁘겠습니까? 몇 주전에 우리는 마가복음 1장을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새벽부터 밤 깊은 시간까지 고단하게 섬기시고 이튿날 새벽 미명에 기도하러 나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을 예로 들어보십시오.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주님을 닮은 인격으로 변화되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들의 인격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이 변화산에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올라가셨는데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친밀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인 치시는 사건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기도하지 않느냐면, 사람들은 좋은 것은 다 하게 되어있는데 하기 싫은 것은
안 하기 때문입니다.
(예화: 벌레는 넓은 잎의 잎맥만 남겨두고 연한 부분만 다 갉아먹는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좋으면 뭐든지 합니다.
(예화: 새벽에 자기 좋아서 땀을 흘리며 약수터에 간다)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도가 좋으면 합니다. 바쁘다는 것은 다 핑계이고 기도하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지지난 주에 기도의 영적 순발력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는데, 시간을 정한 긴 기도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기도의 은혜가 나를 감동할 때에 차안에서나 길을 걷거나 순간순간 기도의 감동이 밀려올 때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한 시간 두 시간 짜리 기도는 도저히 환경 때문에 못하더라도 수시로 기도의 은혜가 밀려옵니까? 직장에서 보고서 쓰는데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영혼들이 생각나고 그 보고서가 눈물로 얼룩지는 일들이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두 시간 세 시간 시간을 내어 기도할 수는 없지만 너무 기도하고 싶어서 버스를 타고 가는 순간이라도 눈을 감으면 기도가 쏟아져 나옵니까? 먹을 것 다 먹고 잘 것 다 자고 볼일 다 보고 자기 할 일 다 합니다. 할 수 없으니까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리가 기도를 버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도가 우리를 버립니다. 처음에는 기도가 하기 싫어서 내가 안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기도할 수가 없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떻든 기도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할 수 있으면 여러분들 모두 하나님 앞에 한번 서원 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평생 병상에 눕거나 신체의 중대한 위협이 찾아와서 의사의 적극적인 권고로 쉬도록 명령되지 않는 한 일평생 새벽기도를 하겠습니다’하는 각오를 가지고 하고, 젊은이들은 직장에 취직할 때 새벽기도 못할 직장에는 취직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려면 아주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제주도로 발령 났는데 직장에서 제주도까지 출퇴근 시켜줬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 방면에 있어서 탁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성실성을 덧붙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신앙에 대해서 요구할 수 있습니다.
기도 생활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대한 풍부한 감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이 책에서 이런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분의 아들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행복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고백하는 그 사랑을 우리는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것이 머리 속으로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유리 방황하는 아주 쓸모 없는 죄인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구속의 은혜를 주셨으니까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구나. 그 은혜 너무나 감사하다’하며 머리에서는 생각하는데 감격이 밀려오는 것은 은혜입니다.
예수님이심에도 예수님의 생애에 하나님의 인 쳐주심이 두 번 나타납니다.
우리들이 은혜 아래서 신앙 생활하면서 가장 우리의 심금을 울렸던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파트를 늘려주시는 것이 감격이었습니까? 성형수술 할 비용을 주신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감동이 되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나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위해서 형벌은 주님이 받으시고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니. 하나님 나라의 훌륭한 유업들을 내게 받게 하셨다니 내게 그런 축복이 가당하기나 한가’하는 감격이 관계의 감격에서 밀려오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이 안 되는 이유는 관계의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 된 것이 너무 행복해요’하며 자식들이 살아가는 한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문제가 없습니다. 같이 살아도 자식이 그 가족 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 정신적인 의미에서 그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단지 교회에 나온다는 것을 가지고 신앙의 다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그 당연한 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관계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까?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좋으신 주님, 귀하신 주님, 내 인생의 전부이신 주님, 내 삶의 이유이신 아버지, 주님만이 나의 행복이시며 내 기쁨이시며 나의 대치할 수 없는 가치이신 하나님’ 이런 모든 고백들은 관계에 대한 인 침이 있는 신앙생활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는 고아원 같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식이 없어서 모르기도 하지만- 또 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야 할지도 모르고 자기의 근본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가득 찹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된 것, 주님의 자녀 된 것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감격이 없이 살아가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기도생활의 부족입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런 경험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강력한 인 치심이 두 번 나타납니다. 요단강 변에서와 오늘 변화산에서 입니다. 그런데 모두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의 감격 속에서 살도록 만들어 주는 커다란 힘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어 행복하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깊은 기도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기도 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만이 그 관계를 놓치지 않습니다.
주님이 보이십니까? 주님이 만져지십니까? 우리가 주님을 파악할 수 가 있습니까? 그런 친밀함을 경험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생활이 기도생활입니다. 그 속에서 주님의 근심을 보면서 회개하고 주님의 아픔을 보면서 뉘우치고 주님의 열망을 보면서 충성할 결심을 하게 되고 주님의 지혜를 보면서 우리들이 지혜로워지게 됩니다. 어루만지시는 주님을 경험하면서 치료받게 됩니다. 기도생활 없이 되겠습니까?
이 예수님의 변화산에서의 경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보여주는 이 진리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관계에 대한 인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고 내가 주님의 아들이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고히 믿을 때, 기도가 끝난 후 일상생활에 돌아왔을 때 하나님을 많이 의지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를 붙들면서 살아갈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기도의 감화를 끼치신 예수님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11:1)”
그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나오는 장면이 누가복음 11장입니다.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이 기도의 복음서라고 불릴 정도로, 누가는 기도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도에 관한 장면들을 그림처럼 상세하게 그려간 사람이었습니다. 관심이 많다고 하는 것은 그 방면에 자기 자신도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해 나가는 방식을 보더라도 누가 자신이 얼마나 기도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진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마가복음 1장에도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특별한 상황이 벌어져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복음 11장에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이 장면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이 기도하시는 장면을 계기로 해서 주기도문이 가르쳐지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매우 인상 깊고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수없이 설교했을 것이고 여러분 중 어떤 분들도 예배시간에는 물론이고 세미나 같은 데에서 이 부분에 대한 해설을 자주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누가복음 11장 1절은 제 생애에서 잊혀지지 않게끔 영혼을 일깨우고 지나간 하나님의 말씀 중 하나였고, 저의 기도생활을 이만큼이나마 세워주는데 도움을 준 많은 성경구절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구절을 우리들이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기도의 생활, 그리고 기도의 생활에 있어서 모본의 중요성 문제를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오늘 누가복음 11장은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주기도문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에 깊이 감화를 받는 제자들이 있었고 그 이전에는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신 것은 변화를 받으려고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기 위해서 올라가셨는데 뜻하지 않게 변화를 경험하셨듯이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으셔서 기도하신 것은 아니었고 단지 매일매일 기도의 습관을 따라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상세한 묘사를 누가가 생략하고 있기 때문에 자세한 정황을 알 수 없지만 아마 십중팔구 저의 추측이 맞을 것입니다. 새벽 미명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나가셨을 것이고 제자들이 일어나 보았지만 예수님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외딴 곳에 주님이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국은 주님을 찾았는데 먼발치에서 보니까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셨고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아마 무료하게 예수님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급하게 찾아다닐 때에는 용무가 있었을 터인데 그 용무는 잊어버리고, 기도를 마치신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에 깊이 도취된 나머지 “예수님, 우리에게도 기도를 좀 가르쳐 주세요. 어떻게 하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 있을까요?”하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하시며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하는 일이 있기 전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도하시던 모습에 깊이 감화를 받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스승이 단지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서 기도하는 제자를 만들어 낸다고 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 그만큼 이 기도의 세계는 먼저 경험한 사람의 감화를 통해서 사람들이 깊이 도전을 받고 기도에 대해서 깊은 갈망을 갖게 되고 기도에 접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고 난 다음 하나님의 은혜가 아직 마음속에 임하기 전에는 신앙적인 모든 일이 어렵습니다. 주일이면 교회에 꼭 나오는 일도 아직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기 전에는 굉장히 힘든 일이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설교자의 설교에 집중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만지고 지나가기 전에는 아직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씩 계속되는 설교를 집중하면서 그 설교를 소화해 낸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그것만 힘든 것이 아닙니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교회에 와서 헌금 내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니고 바쁜데 봉사하러 나오라고 해서 그것을 따라 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을 만지고 지나가기 전에 신앙적이고 영적인 모든 일은 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그가 정말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이 기도하는 일 자체는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예화: 책을 많이 쓰던 때에, 생각이 논리를 가지고 떠오를 때 타이프가 느려서 타이프가 생각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썼다-녹음해 놓는 방법도 썼는데 사람 이 아닌 녹음기를 앞에 두고 사연을 담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러분도 잘 살아가고 계시지만 카메라 앞에서 연기해보라면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로 그 사람을 만지고 지나가시지 않으셨을 때에 제일 어려운 것은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데 그분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제가 시커먼 녹음기 앞에서 대화하는 것처럼 힘들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래도 기도할 수 있도록 놀랍게 변화를 주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생생한 기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옆에서 보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만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 실제를 그 사람과의 생생한 교제를 통해서 경험하게 될 때 그 때 그는 감화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영적인 기도의 유산들이 물려 내려오는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부모가 기도를 많이 해도 자식이 기도를 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에게 기도를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자녀들이 그 어머니 아버지가 기도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서 사는 기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실제로 자신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풍부한 기도 속에서 살아가는 모본이 있을 때에 그것을 보면서 기도에 대해서 생각하고 기도에 대해서 무엇인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제자들에게 이러한 모본을 끼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에만 감화를 주신 것이 아니라 행동하실 때에는 물론이거니와 그 분의 몸과 그분의 언행 전체가 제자들에게는 훌륭한 교재였습니다. 아무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고 사람들을 향하여서는 시선을 거두고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홀로 교제하시는 이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도 예수님께서는 가까이 있던 먼발치의 제자들에게 깊은 감화를 끼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교육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무엇인가 자기들에게 가르쳐주지만 말고 자기들에게 가르쳐주는 그 삶을 이미 살아가는 사람, 자기들에게 기대하는 그 교육의 내용을 이미 살고 있는 사람, 완벽하지는 못하다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그렇게 살려고 몸부림치고 그렇게 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을 통해서 배우는 사람들은 그 신앙의 실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어머니가 쓰러지시게 되어 병원에 모신 후,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오 아버지”한 마디를 통해서 배운 신앙의 교훈이 몇 년 동안 그 아버지가 타이르 시던 신앙적 훈계보다 더 컸다는 한 형제의 말)
하나님은 안 보여도 하나님과 생생하게 교통하는 사람이 보이면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에 있어서 감화의 원리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거의 기도하지 않는 것은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의 구역 식구들이 거의 기도생활하지 않는 것은 구역장들이 깊은 기도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교인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목회자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물론 목회자가 많이 기도해도 기도하지 않는 교인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기도의 감화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고 또 그 기도의 감화를 깊이 받은 이 제자들이 자신도 기도의 사람이 되어 가는 이런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 바로 신앙의 원리이고 신앙이 체험을 통해서 전수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의 기도생활은 여러분 자신들만의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그 기도생활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지켜보고 있는 여러분들의 가족, 여러분들이 전도해서 처음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는 사람, 여러분의 자녀, 여러분의 양떼들 모두 여러분이 기도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깊은 감화를 자신들에게 끼쳐서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기도의 세계 속으로 데려가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어떻게 기도하셨기에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에 제자들이 그렇게 깊은 감화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 깊은 감화를 받을 수 있었다면 예수님의 기도하시던 모습은 남다른 모습이었을 텐데 그러면 예수님의 그 기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우선 첫째는 예수님의 기도의 질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신 중에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영적인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깊은 침잠 속에서 하나님과 독대하며 그분 한 분만을 의식하며 들어가는 깊은 기도의 영성은 가까이 제자들이 왔지만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영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간절히 사모해야 할 것은 입에 발린 일상적인 기도가 아니라 깊은 기도입니다. 일상적인 수만 마디의 기도보다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에서 흘러나오는 한마디의 기도는 하늘의 보좌를 움직이는 힘이 있고 우리의 상황과 여건을 움직이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우리들이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기도생활이 깊어지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생활이 바로 그렇게 깊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그런 세계를 지니셨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 속에서 깊은 감화를 입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강물이나 우물에 돌을 던졌을 때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그 물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마친 가지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 속에서 흘러나오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주는 감화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 속에서 기도가 흘러나올 때도 그 기도가 자기를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 마음속에서 어떤 기도가 흘러나오면 그 기도는 단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중보하는 그 상황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중보기도 하고 있는 어떤 사람의 마음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그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 자신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입술에 바른 형식적인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전혀 움직이지 못합니다. 마음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저런 기도를 얼마든지 청산유수처럼 할 수 있습니다. 모두 깊은 기도가 아니라 얕은 기도입니다. 형식적인 기도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기도는 우리 자신을 움직이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기도할 때에 그 기도가 우리의 마음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라면 처음에는 의에 대해서 희미했던 우리의 마음을 구체화된 언어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그 의에 대해서 일깨우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결에 대해서 기도했다면 정결에 대해서 기도하는 동안 불결한 자신에 대해서 깊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흔들림을 받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기 전에 먼저 기도하는 사람 자신을 움직이는 놀라운 힘이 있고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 강력한 힘과 놀라운 힘이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것이 바로 깊이 있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곳 가까이 왔지만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느끼게 만든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은 깊은 기도 속에서 자기를 드린 기도였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 모습에 깊은 감화를 받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들이 이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마치시매”에서 ‘마치시매’라고 하는 단어가 희랍어로 ‘에파우싸토’인데 이것은 히브리말로 ‘샤바트’입니다. ‘쉬다’의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안식을 하시매’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예수님이 기도를 그치고 휴식하시는 시간이 되었을 때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는 상당히 장시간의 기도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짧은 기도는 대부분 경박한 기도입니다. 짧으면서도 깊이 있는 기도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깊은 기도의 세계 속에 들어간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지 기도의 초신자들에게는 그런 세계를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짧고 간단한 기도는 형식적인 기도에 이르는 지름길이며 짧고 간단한 기도는 내용이 마음에 실리지 않은 가벼운 기도의 가능성이 가장 많은 것입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임재를 느끼고 그 하나님의 현존하심 속에 들어간 사람들이 결코 그렇게 짧고 간단하게 경박하게 기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물론 장시간을 기도하면서도 거의 그 긴 시간을 기도에 바치지 못하거나 장시간을 기도함으로서 자기 자신이 긴 기도에 자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바리새적인 욕구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긴 기도가 모두 깊은 기도는 아니지만 깊은 기도는 모두 장시간의 기도를 동반한다고 하는 자연스러운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펼치면서 기도로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기는 일에 자기를 바쳤던 기도의 사람들의 기록들을 살펴보십시오. 탁월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기도에 헌신하며 기도를 통해서 하늘의 신령한 응답을 이 땅에 불러 내려서 나라를 건지기도 하고 민족을 위기 속에서 이끌어내기도 하고 교회에 다가오는 커다란 위협과 핍박들을 막아내기도 한 위대한 기도의 용사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들은 장시간 동안 기도의 헌신 속에서 평소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기도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기도의 영적인 깊이를 소유하게 되었고 기도의 깊은 세계 속에서 하나님과 대면하는 가운데 기도에 필요한 자신의 인격이 거룩하게 다듬어져 가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할 수가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현대인들을 보십시오. 뭐든지 쉽고 간단한 것을 좋아합니다.
(예화: 공중전화에서 통화가 너무 길다고 사람을 죽이는 사건)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조급해서 참지 못하고 조바심을 하면서 사는 것은 성경에서 예고된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빨리 움직이고 싶어하고 빠른 변화를 원하는 것도 바로 이런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장시간동안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주님 앞에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비생산적인 일처럼 보일지도 모르고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움직이는 그들의 바쁜 삶의 패턴이 그러한 긴밀한 기도생활을 허용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상황이 어떻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우리들이 명백히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이것이니 깊은 기도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기도의 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이 얼마나 껍질밖에 없는 삶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제 이러한 이야기를 깊이 받아들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기도 시간이 짧고 경박해지니까 그 다음에 일어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주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는 듣고 많이 말할 수는 있는데 그분을 느끼는 시간들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예화: 귀신이 들어왔던 사람의 간증-귀신이 다가오면 느껴진다)
귀신이 다가와도 느껴지는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터치를 그의 영혼 속에 느낄 수 없다면 그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껍질은 그대로 남아 있을 지 모르지만 내용은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영이신 하나님의 터치를 늘 경험하면서 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교사 리바이벌’이라는 책에서 교사는 하루에 두 번쯤은 펑펑 울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 것도 과장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진실입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위해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 때문에 -그것을 느끼지 않고는 펑펑 울 수 없다- 자기에게 맡겨진 영혼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그 영혼들을 느끼지 않고는 울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터치를 느끼는 것, 경험적인 요소가 신앙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백 명이라도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느끼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여러분 중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놀랍게 변화를 받고 삶이 송두리째 뒤집혀져서 그 많은 세월 동안을 펑펑 울고 설교 테이프도 많이 듣고 책도 수십 권을 읽어 그렇게 변화된 적이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나님의 터치를 매일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건조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고 깊은 기도에 자기를 드릴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런 신실하신 만져주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설령 하나님이 만져주신다고 할지라도 이런 깊고 긴 기도생활 속에 자기를 바치면서 신실하게 아버지 앞에 기도하면서 사는 그런 진실한 신앙생활 없이 하나님이 만져주셔도 그 만져주심을 느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을 주셔도 그 사랑을 느낄 수가 없으리 만치 우리의 마음의 각질이 굳어지는 것을 우리들이 경험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 기억해야 될 것은 장시간동안 하나님 앞에 기도로 바쳐야 된다는 것은 단지 기도의 응답과 관련된 것만은 아닙니다. 기도에는 하나님과 상황을 기도라고 하는 손을 통해서 빚어 가는 면도 있지만 반대로 그 기도라는 손을 통해서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바꾸어 가는 양면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깊은 기도 속에서 산 사람들은 반드시 세상의 영향보다는 하나님에 의해서 강한 영향을 받고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영향을 받는 사람의 모습을 닮아가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의 시간적인 길이가 길어질수록 그 기도는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고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자기가 빚어져 가는 놀라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장시간동안 무릎을 꿇으며 하나님 앞에 대면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단순히 의무라고 생각한다면 밖에 나가서 땅을 파는 것이 더 쉽습니다. 만나지도 않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대면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핵심적인 것은 단지 기도의 시간을 무조건 늘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깊이 있는 기도를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힘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이런 반론을 할지도 모릅니다. ‘요즘 우리들의 생활을 모르시기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새벽에 직장에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오는데 언제 그렇게 기도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렇게 바빠서 행복하십니까?” 그리고 되는 일이 많습니까?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보다 덜 바쁜 직장으로도 보내주실 텐데, 사업도 하게 하실 텐데,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상황을 바꿔주실 수 있는데 왜 삶의 여건, 상황의 핑계만 대고 실제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위해서 자기를 드리는 노력을 게을리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간단히 이야기해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즐거움을 모르기 때문에 그 기도의 시간을 그렇게 길게 하나님 앞에 사용할 수가 없고 인색해 진 것입니다.
기도는 하지 않을수록 점점 더 짧아지고 기도의 세계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더 긴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제가 문제로 삼고자 하는 것은 5분 10분만에 기도를 끝낼 결심을 하고 기도를 시작하는 여건이 정말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여건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3시간 4시간을 기도해야 된다면 물리적으로 우리의 시간을 사용함에 있어서 거의 불가능할 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지금 기도생활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순전한 시간적인 여건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주 가증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도 가만히 돌아보면,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 일을 시간이 없어서 안한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마음에 강력하게 이끌리는 일은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정말 자기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꼭 하고야 말았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문제는 하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려운 생활 여건과 맞물려서 적절한 변명의 돌파구를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기도의 욕구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우리의 기도의 욕구가 간절하면 그 간절한 기도의 욕구는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기도 시간을 하나님 앞에 무릎꿇어 드리게끔 만들어주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항상 이 문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무릎을 꿇어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앞에 비치는 모습,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정체입니다. 한 사람이 무릎을 꿇어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그를 한없이 기뻐하시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그는 정말 소중한 사람입니다. 다른 곳에서 아무리 여러분들이 깃발을 날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산다고 할지라도 기도 속에서 여러분들이 만일 거절당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하나님 앞에 거절당한 사람들이 아닐까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이 기도생활을 이어가지 않는 것이 정말 여건 때문인지 한번 정직하게 여러분의 양심에 물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깊은 밤 퇴근을 하고 돌아와서 새벽 미명이 되기 전에 조깅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건강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직장 일이 바쁘다고 하면서도 토요일 밤이면 가족들도 집에 팽개친 채 어김없이 낚시가방을 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화: 낚시 좋아하는 사람의 열심)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기도하는 시간이 정말 작고 기도 이외의 삶을 살아가는 시간은 많은데 이 기도 시간을 제외한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시간이 필연적으로 기도를 위해서 바쳐질 여유가 없기 때문에 기도 안하고 살아가느냐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교회에서 아무리 북을 치고 난리를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렇게 기도 안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성경을 바꿔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주어진 구속의 은혜 속에서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가장 중요한 통로 중의 하나가 기도생활인데 기도생활을 하지 않고도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승리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복을 느끼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동행하면서 살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희생이 없는 영적인 생활이 어디에 존재합니까?
아무리 현수막을 매달고 사람을 휘몰아서 부흥회를 하고 별 방법을 다해도 그렇게 기도 안 하면 뭐가 되겠습니까? 저는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곤고한 삶을 살면서 기도로 돌아와야 한다고 하는 성경의 명백한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 자칭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자기의 인생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모습은 이 시대의 바리새인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자기를 깨트리는 강력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이 종교적인 인습 속에서 굳어진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주님과 만나서 자기가 부서지면 바리새인을 하라고 해도 못합니다.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어떻게 그렇게 진실한 성도의 모델이 될 수 있었습니까? 예전에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리새인의 삶을 그렇게 미워하며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직면하고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분과의 만남 속에서 자기가 부서지는 자기 깨트려짐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생활을 통해서 그런 깨트려짐을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자기가 깨트려져서 자신의 마음이 찢어지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루에 단 십분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평생을 가도 마른 뼈와 같은 신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와 세상의 언저리에서, 교회에 와서는 세상에 애착을 느끼고 세상에서는 교회의 미련을 끊지 못하는 불쌍한 그리스도인들이 될 것입니다. 일평생 여러분들의 얼굴에 땀을 흘리고 손을 움켜쥐고 살아도 마지막 죽을 때 여러분들 손에 쥐고 가는 것은 바람 밖에는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도 우리는 긍휼히 여깁니다. 기도하는 사람만 하나님이 사랑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해 주십니다. 기도할 때만 주님이 살게 하시는 것 아니고 기도 안 해도 살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느냐 안 하시느냐만이 아니라, 우리가 그 사랑에 감동을 받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무리 많이 사랑해 주셔도 내가 그 사랑을 느낄 수 없으면 내 삶은 변화가 없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몇 년 전 대학생들 대상으로 낸 통계를 보았는데 60%이상 되는 크리스천이 하루에 10분도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따금 하나님의 말씀이 스쳐가고 교회 일을 하다가 뭔가 쿵하고 은혜를 받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불 끄고 반주만 있으면 10분 안에 여러분들을 울릴 수 있습니다. 감동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뭘 하겠습니까? 쿵하고 와 닿는 은혜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계속 은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 생활 없이는 안됩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포기한 사람은 하나님을 포기한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생명 없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을 감고 조용히 우리들의 기도의 제목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침에 기도하고 일어나면 가슴에 스쳐 가는 생각들은 부채의식입니다. 기도했지만 아직도 기도하지 못한 것이 떠오릅니다. 내 기도가 필요한 곤고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한참을 엎드려 기도하고 일어나도 내가 기도한 것은 기도해야 할 것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것을 늘 느낍니다. 그것이 기도하는 우리들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기도생활을 안 합니까? 은혜를 받고 기도생활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 거의 기도를 잊고 살아가는 분들을 향해서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판에 박은 듯이 주일 오전예배 드리고 점심 먹고 구역공부하고 오후예배 드리고 눈물 몇 방울 닦고 돌아가면-그것도 잘 하는 사람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졸다가 돌아가면- 마귀가 박수를 치면서 ‘너는 내 밥이다’하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한 시대를 뒤흔드는 설교가가 되겠느냐 아니면 한 시대의 가장 훌륭한 기도의 사람이 되겠느냐를 선택하라면 저는 10초도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택하겠습니다. 정말 위대한 설교자로서의 생애보다는 위대한 설교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의 생애를 살 수 있다면 저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받을 상급이 훨씬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더군다나 교역을 하고, 교사나 구역장으로서 영혼을 돌보고 교인들의 모본이 되어야할 사람들이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 것과 함께 자기가 돌보고 있는 영혼들에게 점점 죄 짓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단언하건대 풍성한 삶이 불가능합니다.
얼마 전 어느 지체 한 사람을 상담했습니다. 처음에는 한없이 은혜를 받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현격하게 그 은혜가 떨어지고 자기는 옛 생활로 돌아가는데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제가 대답하는 것은 항상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깨달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 계속 있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그것은 순종하면서 살려고 하는 몸부림과 기도 속에서 살려고 하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엔조이하는 것도 아니고 비스듬히 벽에 기대고 누워서 테이프나 틀어놓고 그렇게 해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으면 이 성경이 피 묻은 성경이 되지도 않습니다. 승리하고 고난을 받으면서 이긴 성도들의 간증 테이프나 들고 다니면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치 그림에 나온 아이스크림을 보면서 침을 흘리고 있는 사람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만난 하나님이지 그 사람이 경험한 간증이지, 자기는 단지 그것을 들을 뿐이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예전에는 몰라서 못산다고 변명했지만 이제는 알았습니다. 알았으니 순종하며 살려고 몸부림을 쳐야합니다. 완전한 삶을 살수는 없지만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절벽으로 밀어버릴 때 새끼가 살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힘살이 생겨나서 날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을 들은 다음에는 벼랑에서 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다 가르쳐 주었고 네 모습도 보여 줬고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보여줬다”하시며 살아보라고 떠미십니다. 그런데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힘 입어서 비로소 은혜의 세계로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이지 비스듬히 누워서 테이프나 들으면 되겠습니까? 그런 구도의 길이 어디 있습니까? 당장 그만 두십시오. 깨달음은 계속 있어도 순종하는 삶이 없고 기도도 하지 않으니까 영적인 공급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불순종을 통해서 죄악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다스린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더러운 오물을 묻히고 온 아이를 씻겨놓아도 다시 나가서 다시 묻히고 들어오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안됩니다.
기도 생활에 깊이 헌신하려고 애를 써야합니다. 그러면 시간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시간에 개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있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 나면 덜 좋아하는 것을 집어치우고 좋아하는 것으로 바꾸기 때문에 시간은 무한정 늘어나는 고무줄과 같습니다. 지금은 다 사랑하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더 사랑하는 것이 생겨보십시오. 그러면 덜 사랑하는 것들을 몰아내고 교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형제 자매를 소개 시켜 줬는데 서로 좋다고 하면서도 바빠서 한 달에 한번 만난다고 해서 그만 두라고 했다)
무슨 변명이 필요 있습니까? 주님이 어떻게 사셨는지 한 번 보십시오. 주님의 삶을 보면 이렇게 기도하실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고난에 넘치는 과중한 격무에 시달리시는 일생을 사신 분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이런 깊은 기도 속에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단지 메시아로서의 의무라고만 생각했더라면 그렇게 장시간을 기도에 드리는 헌신으로 사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단을 하십시오. 새벽기도에 나오십시오.
(예화: 12시 넘어서까지 심방하고 새벽에 일어나니 너무 힘들어서 새벽예배를 쉬려고하다가 ‘충성’하며 일어나라고 했던 설교가 생각나서 나왔다. 축도만 끝나면 들어와서 쉬려고 했 는데 기도가 잘 됐다)
일어날 때 힘들다고 해도 막상 일어나 보면 하나님이 깊이 기도를 시키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맛에 우리의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의 대 모험입니다. 그런 삶을 여러분들이 살아야 합니다.
인덕원 예배당이 형식적인 신자로 가득 찬다면 건축하는 것이 죄 짓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의 정말 간절한 소원은 새벽기도에 성도들이 가득 차서 돌아가는 모든 지체들이 눈물을 닦으면서 돌아가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기도생활 안 합니까? 제가 얼마나 마음이 아픈 지 모릅니다. 곤고하다고 해서 전화도 오고 인터넷에도 들어오는데 결국은 기도생활의 회복 없이는 누구의 몇 줄의 사연이나 어깨를 두드려주는 몇 마디의 말이나, 차갑게 마주앉아 밥이나 함께 먹는다고 해서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수단에 불과하고 자기가 은혜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하는 견고한 기도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일은 힘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길을 안 걸어가시면서 그 말씀을 했더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제가 기도하지 않으면서 여러분에게 왜 기도하지 않느냐고 닥다구리 한다면 신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직접 본받기에 너무 힘겹다고 느껴진다면 저라도 좀 본받으면서 살면 좋겠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주신 그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면서 그 십자가의 복음의 길을 제자로서 살아가겠노라고 늘 다짐하고 다짐하면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면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은 하나님께서 몇몇 지체들에게 은혜를 내리셔서 늦게까지 기도하는 지체들이 많습니다. 새벽에 나와서 출근하기 직전까지 몇 시간씩 기도하는 지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모이는 숫자에 비하면 그 사람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태반이 넘는 여러분들이 어제도 거의 단 오분의 기도도 없이 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러고도 풍성한 삶을 어떻게 감히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다’ ‘진실하다’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순간순간 자기를 죽이고 주님이 우리 안에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한 순간순간 자기의 평안과 이익을 포기하고 주님의 명예를 선택하는 것, 그 순간들이 모두 이어져서 한 사람의 삶을 진실 되게 하고 한 사람의 삶을 충성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는 것이 정말 한스러울 뿐입니다. 내가 만일 단 한번의 설교를 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의 마음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강력한 불꽃을 지필 수 있다면 그런 불꽃을 몇 번 지피고 자신이 사라진다고 해도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일까요?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깊은 기도의 사람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좀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사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향해서 우리들은 얼마나 너그럽습니까?
여러분들 중 어떤 사람들은 쓸데없이 찻집에 앉아서 몇 시간씩 보내는 사람이 너무나 많을 것이고 읽을 가치도 전혀 없는 잡지책을 뒤집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 지 한번 보십시오.
주님을 위한 시간을 내기에 우리는 얼마나 인색한 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기도를 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얻어내고자 하십니까? 우리 자신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하늘을 향해서 여러분들의 영혼의 문을 열고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신령한 은혜를 공급받으라고 여러분들에게 기도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자신이 충만해지고 그 은혜 속에서 사는 사람들 되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에게 기도의 생활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의 이 생애를 보십시오.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사역의 짐을 지시고도 어김없이 새벽이면 하나님 앞에 홀로 나아가서 제자들도 일어나지 못한 그 새벽에 하나님을 대면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로부터 그분만이 아는 하늘의 신령한 비밀들을 공급받았습니다. 죄 가운데 빠진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자기를 소진할 수 있는 헌신과 사람들에게 천국의 진리를 아름답고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가르침의 비결들, 병든 자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하늘의 신령한 힘들을 매일 하나님께로 비치는 기도의 햇살을 통해서 공급받으면서 사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기도 없이는 풍성한 삶이 없습니다. 문제는 문제대로 그대로 남을 것이고 고쳐지지 않은 여러분들은 세월이 흘러도 망가진 사람으로 계속 남을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주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시는지 내가 여러분들에게 보여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시간을 길게 드리는 기도의 헌신 속에서 사는 그런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8.예수님의 중보기도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2)”
예수님의 생애와 기도에서 이 부분은 예수님의 생애의 후반부로 접어 들어갑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중보기도 생활을 엿보게 만드는 대목이 나옵니다. 즉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청구했는데 그중 시몬을 위해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신 것을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보아서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기도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대목이니까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기록 가운데 아주 특이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맥은 이렇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는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제자 이름은 안나왔지만 서로 다투는 가운데 제자들 가운데 열혈남아였던 이 베드로가 한몫 빠졌을 리가 없습니다. 한가락하면서 자기의 우위를 강조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이러한 다툼을 보시면서 그들의 그러한 생각이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시면서 매우 슬퍼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는 너희 중 섬기는 자로 있노라”는 이 한마디로 제자들의 모든 변론들, 자기가 서로 높다고 주장하는 모든 변론들은 부끄러운 다툼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본문에 담긴 예수님의 생애와 기도에 관한 교훈을 살피기 전에 문맥 자체만으로 우리가 깊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실제로 이러한 광경을 보면서 우리 속에 그런 것들이 얼마나 깊이 들어오는 지 모릅니다.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어온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태도들, 그리고 남을 섬기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고도의 자만심, 심지어는 다른 사람에게 섬김을 강요하는 폭군적인 기질들, 강포한 기질들, 이런 것들이 우리 속에 얼마나 쉽게 파고 들어오는 지 모릅니다. 매일 매일 은혜의 불로 회개의 눈물로 우리의 마음의 거울을 닦아내서 선명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의 마음에 비치지 않으면 누구도 이러한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못 만난 사람들이었습니까?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주님의 그 아름다운 가르침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이 사람들이 무엇인가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까? 배도 그물도 사랑하는 처자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얼마든지 이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나 여러분이나 할 것 없이 매일 죽는 것밖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얼마나 우리들이 섬김을 받으려 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저는 하나님을 믿은 지 오랜 세월이 흘렀고 때가 묻을 대로 묻은 현역 목회자입니다. 그런 제 눈에도 거들먹거리며 살아가는, 교회에서 굳어질 대로 굳어져서 상전처럼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교인들을 볼 때에 역겨운데 정말 순수한 하나님의 사람, 이제 방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태어나서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결한 영혼들의 눈에 우리들이 어떻게 비칠 지 정말 두려운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누가 크냐고 서로 변론하는 제자들 사이에 서서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섬기는 자’라는 말이 ‘노예’입니다. “노예로서 종으로서 너희 중에 있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한 것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 제물로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다”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얼마나 굽을 대로 굽고 휠 대로 휘었는지 보십시오. 인격적으로 대접을 받고 섬김을 받지 못하면, 그런 섬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거칠고 강포한 인격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많이 받으면 그것에 익숙해져서 다른 사람들의 섬김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교만이 싹틉니다. 이렇게도 안되고 저렇게도 안됩니다. 그러니까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했지 않습니까?
저도 아이를 기르지만 정말 겸손해집니다. 넉넉하게 해준다고 해서 아이가 잘 자라는 것도 아니고 몽둥이로 다그친다고 해서 똑바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용돈을 넉넉히 준다고 바르게 되는 것도 아니고 안 준다고 해서 바르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을 많이 해준다고 바르게 되는 것도 아니고 안 해준다고 해서 바르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그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예수 믿는 부모로서 처신을 하며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아이를 돌볼 것인가의 관계이지만 결국은 우리의 교육으로 아이가 바르게 안 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에 붙잡혀서 하나님의 은혜로 만져주시는 역사가 있을 때에만 바르게 크는 것입니다.
어떻든 주님께서 지금 “내가 너희들 중에 섬기는 자로 있노라”하신 한 마디로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통회했어야 맞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 당신 자신을 가리켜서 노예라고 말씀하시는데 종으로서 우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비록 우리가 주님의 제자들이지만 누가 높은가를 따지는 것이 정말 가한 것인가’하며 깊이 통회하여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정적인 예수님의 자기 증언에도 불구하고 열혈남아인 이 베드로의 기는 꺾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큰 소리는 그 뒤에도 이어지는데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하는 이야기들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계속 늘어놓는 이 베드로를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같이 이렇게 누가 높은가를 따지면서 자신들의 입신 양명을 구하는 육신적인 교인들의 눈에는 볼 수 없는 영적인 실제를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사단에 관한 말씀이셨습니다. 사단이 그들을 청구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은 사단이 자꾸 넘겨 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예화: 키질하는 것-까부르는 것을 통해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낸다)
“그렇게 몹쓸 것으로 분류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도록 다 털어 내려고 사단이 너희를 청구했는데, 시몬아”라고 부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에는 이미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한 위대한 신앙의 고백이 있고 이제로부터는 시몬이 아니라 베드로라, 반석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신지 약 1년 후의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시몬이라는 이름은 예수님께서 버리시고 베드로라는 이름을 새사람 베드로에게 주신 이름인데, 다시 그 이름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갈릴리 해변에서 식사를 하신 후 베드로를 불러서 말씀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하시며 아버지의 이름까지 거론하십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당시에 얼마나 많은지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통해서 예수님은 “대 사도 베드로야”하지 않으시고 “시몬아”하심으로 ‘너는 별 볼일 없는 집안의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를 상기시키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보통사람으로서의 베드로임을 말하시는 것입니다. “보라”는 장엄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건을 도입할 때 쓰는 간투사입니다. ‘시몬아, 네 주제를 알아라. 너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다. 네가 지금 베드로라면 무엇으로 네가 베드로가 되었느냐’를 상기시켜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베드로가 되었는데 여기에서 주님이 부르시는 것은 그 위대한 사도의 이름이 아니라 요한의 아들 시몬의 이름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이런 실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사실은, 성도로서의 아름다운 명분, 성도로서의 고상한 지위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원래 자기가 누구였던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이 그를 대 사도요 의로운 사람이요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주셨어도 항상 자기를 죄인 중의 괴수요 핍박자요 포행자요 죄인이요 끊임없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 됨을, 현재적인 십자가의 경험 앞에서 현재적으로 자신이 죄인 됨을 경험하고자 했던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과 경건에 유익을 주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참모습을 확인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시몬아,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성도의 삶의 영적인 실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곧 넘어질까 조심하라. 자신이 견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이 무엇인가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곧 넘어질 사람들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케 되었다 함도 아니요 붙잡았다 함도 아니라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서 살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그런 겸비한 생각으로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를 붙드신 것을 기억하면서 그분을 붙들면서 살려고 하는 그런 진실한 신앙생활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한 때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서도 결국 딱딱하게 굳어지는 신자들을 보면서 은혜를 전혀 받지 못하고 처음부터 딱딱하게 굳어져서 나중에 인생을 마치는 것과 한번 은혜의 세계를 알고 경험한 다음에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 사이에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은혜의 세계를 알고 굳어진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더 많이 책망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차이밖에는 아마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영적 실제입니다. 귀신을 내어쫓고 병든 자를 고치는, 죽은 자를 살리는 놀라운 권세를 받았던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청구하였다면 여러분들은 그들에 비하면 얼마나 가벼운 사람들입니까? 아마 훨씬 더 많이 청구할 것이고 까부르면 그들은 똑바로 떨어질 지 몰라도 우리는 아마 바람에 훨훨 날아가 버릴 지 모르는 빈 껍질과 같은 존재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 우리가 그렇게 연약한 존재들이고 언제나 사단에 의해서 청구를 받는 힘없는 존재들인 줄 알고 우리가 우리 된 것은 주님의 은혜요 또 앞으로 우리가 주님이 원하는 신자가 되는 것도 또한 주님의 은혜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시시때때로 주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사는 것 말고 우리에게 무슨 영혼의 새로운 소망이 있을 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세월이 흘러서 같이 자란 친구들을 보면 이제 뭔가 사회를 움직이는 중심 자리에 서있거나 혹은 서기 직전의 사람들입니다. 한나라의 역사도 마찬가지고 가정도 마찬가지고 사회도 마찬가지고, 소위 말하는 중심적인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커 보였던 우리의 선배 우리의 스승들도 이렇게 나처럼 연약한 사람들이었겠구나’를 생각하며, 그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위대함보다는 ‘그들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로 하여금 그들 되게 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성취하고 싶으셨던 일들을 주님이 이루어 가셨구나’하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그런 은혜를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영적인 실제를 보여주시면서 “그런데 내가 너를 위해서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내가 기도하였나니 돌이킨 후에는 형제를 굳게 하라”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우리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해서 무엇을 가장 중심적인 목표로 삼고 기도하셨는지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시몬 베드로의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나니”
예수님은 완전하신 목자였고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분이 가르친 진리 중에는 허튼 것이 없었고 그분은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에 있어서 모르시는 것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능력에 있어서 모자라는 것이 없이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를 믿음으로 붙들어 주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었음을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능력 있는 목회자라고 할지라도 성도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단지 그들에게 믿음을 주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지 주님이 그를 도구로 사용하지 아니하시면 유창한 언어와 능변을 가지고도 누구의 마음속에도 믿음을 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마음에 믿음이 심겼다고 한다면 그것은 목회자의 덕이라기 보다는 그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고 여러분들이 누군가에게 말씀을 전해서 그들의 마음속에 신앙이 생겨나게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절대 자만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러분들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고 그 은혜를 인하여 찬송 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실 뿐입니다.
그래서 좋은 하나님의 사람일수록 영혼들을 열심히 섬기면서 그 영혼을 자기에게 묶으려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묶으려고 하는 열망을 갖습니다. 자기는 그의 마음속에 잊혀져도 그리스도가 생각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너희들 가운데 섬기는 자로 있노라”하신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이루어 가는 것이 영혼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베드로를 향해서 “내가 너를 위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나니”하신 것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엿보는데 하나는 믿음이라는 것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떨어질 듯 떨어질 듯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은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이제껏 신앙 생활해 온 경력으로 우리 스스로 잘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본이 갖추어지고 그 기본 위에서 우리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상위의 영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렇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늘 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곤궁한 형편에 있다고 할지라도 한때는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자만할 수 없는 것은 언젠가 곤궁하게 살았던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라고 할지라도 전혀 자만할 것이 없는 것은 불과 몇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짐승처럼 살았던 날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늘 떨어지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하는 이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여기에서 엿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믿음이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서 굳건히 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영혼들을 섬기고 돌보다 보면 무엇을 해도 그 영혼이 변화되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조직해서 앉혀 놓고 친절하게 온 마음을 다해서 가르쳐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 보다 그를 특별히 더 사랑해 주어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물질로 섬기거나 혹은 그의 어려워하는 점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마음을 써도 그 영혼의 어떤 변화도 경험하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비로소 영혼을 변화시키는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열심히 수종을 들지만 그러나 그 영혼의 변화의 장본인이 그 영혼을 섬기는 우리들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앉혀놓고 주의 말씀을 가르치고 무엇을 사다가 먹이고 물질로 도와주고 그를 위해서 온갖 섬김을 다해도 변화되지 않던 영혼들이 결국은 그 모든 섬김이 그 영혼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만 매달려 그 영혼을 변화시켜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그 많은 섬김으로도 변화되지 않던 영혼이 이렇게 떨어진 믿음에서 다시 회복이 되고 떨어질 위험에서 믿음을 굳게 붙드는 일들을 우리는 얼마든지 경험하게 됩니다. 영혼을 위한 이 기도는 영혼이 굳게 서는 데 이처럼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많은 시간을 기도 속에서 사셨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지지난 주에 살펴보았는데 그렇게 장시간을 기도 속에 바치며 사신 예수님의 기도의 대부분이 영혼들이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굳건히 붙들어 주기 위해서 헌신적인 기도로 그들을 위해서 중보하신 것이라고 믿어도 무방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기도 속에서 연약한 영혼들을 얼마나 만나나요? 다섯 사람쯤 만납니까? 열 사람쯤 만납니까? 혹은 백사람쯤 만납니까? 죤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일으킨 하나님의 훌륭한 도구가 되어서 오늘날 역사적인 장로교가 서게 하는 중요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스코틀랜드를 위해서 죤 낙스가 불굴의 투지를 가지고 그렇게 헌신적인 사역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 그의 뒤에서 그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기도하던 그의 장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흔히 죤 낙스의 기도로 알려진 ‘스코틀랜드가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사실은 낙스가 아니라 그의 장인이 하였던 기도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장인은 죤 낙스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우리 사위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십시오. 아니면 제게 죽음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생애에 관한 어떤 기록을 읽어보니까 하루에 삼천 명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영혼들의 무거운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잠자다가 부인이 눈을 떠보니 남편은 어느새 침대 아래서 가슴을 쓸어안고 흐느끼면서 영혼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여보 빨리 잡시다. 밤에는 자야할 것 아니요” 그 때 이 사람이 “여보 내가 하루에 삼천 명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것을 그대도 일지 않소. 내 기도가 아니면 쓰러질 것 같은 수많은 영혼들의 얼굴이 눈에 어른거리는데 어쩌란 말이요”
그런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애에 비춰보면 주님의 생애에 우리를 비춰볼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우리는 거의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루에 단 열 사람을 위해서 아니 단 오십 명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이 연약한 중보 기도의 모습들이 바로 지체들이 믿음 가운데 붙어있지 않고 수시로 떨어지는 가장 주된 원인이라고 지적을 한다면 성경의 지적이 너무나 가혹하게 들리십니까? 그러나 오늘 주님의 말씀에 비춰볼 때 그것은 사실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한 사람들에게는 믿음으로부터 떨어질 위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실 순간이 다가오는데 서로 자기가 높다고 다투는 제자들의 모습 자체가 이미 사단에 의해서 까불림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께서는 낙망하지 아니하고 그 영혼들의 떨어지지 않음을 위해 기도했고 특별히 베드로가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하나님께 열렬히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의 생애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던 중보기도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설교의 재능은 없고 배와 그물을 버려 둔 제자들처럼 사랑하는 가족과 조국을 등지고 선교의 장도에 오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섬기려고 해도 그 섬김이 요구하는 재능이 없어서 우리가 필요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누가 감히 재능이 없어서, 자격이 되지 않아서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재능이 있는 사람이나 재능이 없는 사람이나, 많이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오랜 신앙의 연조를 가진 사람이나 방금 믿기로 시작한 사람이나 빈부나 귀천이나 구별이 없이 누구든지 주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데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 앞에 나아가서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그 믿음 가운데 흔들리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믿음 가운데 굳게 서야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자기 기도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영적인 이기주의자들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역사 할 때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드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불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함께 주의 사랑을 받은 지체들이 너무나 소중해 보이는데, 우리가 그 영혼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베풀지 않고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추위에 떠는 지체들을 보고 ‘몸을 덮게 하라’는 말로 자기의 의무를 다할 수 있으며 굶주린 자들을 향해서 ‘너는 배 부르라’고 말함으로서 형제 사랑의 의무를 대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야고보 선생이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죽은 믿음인데, 사실은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표현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면 우리들이 영혼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베풀지 않고 배길 수 없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나눠주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주님의 마음,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조금 움직이면 우리를 위해 기도하지만,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크게 움직이면 우리는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지체를 위해서 간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원리이고 기도의 은혜의 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주님의 마음에는 제자들의 얼굴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기도생활의 대부분을 그렇게 핍절한 영혼들이 믿음 가운데 돌아오고 돌아온 그 영혼들이 믿음 안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그들을 위해 중보하고 기도하는 일로 자기의 시간을 채우면서 사셨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비춰보면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얼마나 부끄러운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혼들을 위한 기도를 게을리 하기 때문에 영혼들의 곤궁함을 보면서도 우리는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영혼들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지 않기 때문에 곤궁하고 쓰러지는 영혼들을 보면서 그 영혼들이 그렇게 넘어지는 것이 우리 때문이라고 하는 깊은 자책감이 없습니다. 쓰러지는 영혼들을 보면 그저 그들 자신이 강퍅하기 때문이고 못된 인간들이기 때문에 미끄러지고 쓰러진다는 원망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오니 이것이 오늘날 밀 까부르듯 하려고 청구하는 사단 앞에서 잠시 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베드로를 위해 중보기도 하셨던 예수님의 기도의 마음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마음입니까? 이 모두 우리에게 사랑 없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려주지 않는 것은 바쁘기 때문도 아니고, 시간이 없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의 육체가 피곤해서도 아니고, 그 대답은 오직 한 가지이니 우리의 사랑 없음을 인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느 때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강력한 경험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항상 두 가지가 한꺼번에 경험됩니다. 주님의 사랑 받음의 행복과 주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인간들에 대한 아픔, 고통을 한꺼번에 경험하게 됩니다.
(예화: 이북에서 필사의 탈출을 한 가족이 으리으리한 호텔에서 수십 가지의 반찬을 차렸는데 목 이 메어서 먹지를 못했다- 북에 남겨둔 가족들의 생각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니까 그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내가 견고한 신앙 가운데 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 견고하지 못해서 하나님 앞에 미끄러져서 축복을 잃어버리는 영혼들의 불쌍함이 생각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경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베드로의 영혼을 위해서 간절히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신 예수님의 이 기도 생활,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그 베드로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그 기도의 모본은 오늘 핍절해진 영혼들을 위해서 거의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의 태만한 중보기도의 생활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가진 것이 많이 없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거기에는 은퇴도 없고 현역과 오비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 기도를 통해서 영혼들을 섬기는 그 세계에서는 항상 현역이요 항상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중보할 때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려고 했던 바로 그 일이고 그 일을 뒤이은 우리를 보면서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6개월 동안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너무나 큽니다. 하나님께서 영혼을 섬기는 우리의 섬김에 복을 주셔서 정말 많은 영혼들을 보내주시고 그 영혼들을 주의 말씀으로 기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그래서 은혜 가운데 든든히 서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서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우리의 그러한 성취들을 인해서 조금도 교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많은 지체들이 주님을 만나고 생애 적인 은혜의 감격을 누리면서 열린 교회에 등록한 신자가 된 것을,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한없이 감사하지만 그러나 그런 은혜 받는 성도들 사이사이에 끼어서 가리워진 핍절한 영혼들을 봅니다.
그들이 단지 마음의 강퍅함으로 은혜의 세계에 못 들어온다고 단정해 버리기에는 우리의 기도생활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가 특이하고 주님이 영혼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한없이 커서 우리들의 이 태만함과 우리의 게으름에 비하면 주님의 은혜와 베풀어진 사랑이 한없이 크기 때문에 입이 열 개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만, 그러나 우리들이 더 많은 시간을 거미줄처럼 짜여서 연약한 지체들의 이름을 가슴에 끌어안고 기도하고, 그들이 일어설 수 없을 때 그들의 쓰러짐이 우리의 넘어짐인 것처럼 아파하며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 영혼들의 평안을 위해서 주님 앞에 빌고, 그들의 믿음이 떨어질 때 우리들 자신이 떨어지는 것처럼 안타까워하며 그들을 위해 충분히 기도로 섬겼다면, 지금은 어두움 속에 있는 여러 지체들이 빛 가운데서 주님을 찬송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 마음이 굳어져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 많은 지체들이 우리보다도 더 훌륭한 믿음으로 우리 주님을 섬기는 진실한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들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지만 우리가 그들을 위해 울지 아니함으로 그들은 고통을 당하게 되었고 우리의 눈에 그들을 위한 눈물이 마름으로 그들은 다시 세상에 흘러가 버리는 그러한 불행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 영혼들을 사랑하고 그 이름을 끌어안고 그들의 영혼이 내 영혼인 것처럼 슬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감히 그들의 미끄러짐을 그들만의 강퍅함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로 우리를 살려주셔서 우리에게 주님의 사랑을 보이신 것이 무엇 때문일까요? 그 사랑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보이고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마음에 있는 사랑의 빛과 그 은혜의 열기를 전해주도록 그렇게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의 사랑의 감화를 입은 사람, 그 은혜에 빚진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그분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분처럼 완벽하게 살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그분처럼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안전하게 지키는 길이고 우리가 그 믿음 안에서 사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눈에 아직도 우리 자신의 영혼의 곤궁함을 인해서 슬퍼 울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지금도 보좌우편에서 우리의 곤고함을 인해서 중보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그 기도의 생애를 기억하면서 흘리는 눈물이 아직도 남아있습니까? 그리고 정말 우리들이 영혼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 영혼들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인해서 비셨던 그 중보기도의 사역들을 계승해나가고 있습니까?
정말 우리는 주님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이런 거룩한 교훈을 공급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여러분 자신이 혼자 잘 서서 마음을 지키며 믿음의 길을 걸어온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의 눈물을 비료로 먹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흘리신 그 피를 비료로 삼아서 여러분들이 이제 지금 여러분들의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수많은 성도들이 연약한 여러분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울었고, 울고 있고 앞으로도 울 것입니다. 더더욱 주님께서는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끝나지 않은 당신의 중보기도의 사역을 이으시면서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며 이 험한 세상에서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믿음을 지키기를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사역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도 계승하여야할 사역입니다.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위하여 기도해줄 지체가 없다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이 멀리 계시다는 말과 거의 동의어입니다. 여러분,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죄도 없으신 그분이 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을까요? 세상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계시지도 않은 그분이 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을까요? 그것은 모두 우리를 위한 눈물이었고 우리를 위한 통곡이었고 우리를 위한 간구였습니다. 그래서 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 영혼에 대한 깊은 염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여러분을 염려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의 자식 군대갈 때는 ‘사내녀석이 군대간다고 우느냐. 요즘 군대는 사회보다 더 좋다더라’하는데 자기 아들 군대갈 때는 후방에 떨어졌다는데 늘 편하다는 데도 엄마는 늘 우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의 염려는 모두 물러가고 육신의 영달과 우리의 육신의 안일을 위한 모든 염려는 물러가고 영혼을 위한 염려, 내가 복음을 전해야할 영혼들에 대한 염려, 그리고 내가 인도한 영혼들에 대한 염려, 내게 맡겨주신 영혼들에 대한 깊은 염려, 이것이 늘 우리의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생애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직접 영혼을 맡은 사람들, 교역자들과 구역장들과 교사들, 어떻든 영혼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영혼들의 이름을 위해서 간구하지 않음으로, 그들의 영혼들의 이름을 잊어버리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는 주님의 이름이 잊혀집니다.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 흘리고 그 영혼들의 곤궁함을 인해서 아파하는 것이 목자 된 우리들의 본분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겠으며 모든 사람의 필요를 다 채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아니고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있으니 우리의 본분은 그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아버지의 손에 그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책임 맡은 우리의 눈에 영혼들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 마르면 우리의 마음에는 가시가 돋아나고 그 가시와 잇닿은 쓴 뿌리들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각양 욕심과 죄악 된 욕심들이 우리의 마음 밭을 더럽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도 결실 할 수 없는 악한 마음 밭이 되게 만듭니다. 처음에는 게을러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흐르면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고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성도라고 말할 수 있으며 주님을 사랑하고 인생을 살았노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합니다. 영혼들을 위해서 그런 의무를 질 수 없다고 생각되는 분들은 정직하게 자기의 직분을 내려놓으십시오. 특별히 구역장들에게 부탁하는데 그렇게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바에야 선한 목자에게 영혼들을 돌보고 양육할 수 있는 자리를 비워주십시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영혼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못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많이 눈물 흘리고 기도해도 그 영혼이 너무나 강퍅한 나머지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을 지도 모르며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영영 안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과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영혼들을 돌보도록 부름을 받았고 그 영혼들을 위한 부담을 우리에게 지워주셨으니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서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주의 도움을 구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하는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서라도 강퍅한 그 죄인들을 용서해주시고 은혜 안에 붙들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목자 된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크게 두 번째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기도와 직접 관련되지는 않지만 그렇게 기도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기대하시는 대목을 보면서 우리는 아주 커다란 복음의 진리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돌이킨 후에는 형제들을 굳게 하라” 이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세 번이나 당신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배신할 줄을 아셨습니다. 믿음에서 크게 미끄러져서 자기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저주하여 맹세하여 부인할 것을 예수님께서 아셨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당신을 배신할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직 배신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사명을 그에게 주셨는데 “돌이킨 후에는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사명이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래로 일평생 주님 한 분밖에 모르면서 외길을 걷다가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소수일까요? 아니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 또 우리의 신앙의 경험은 항상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늘 넘어지고 늘 쓰러집니다. 그리고 늘 깨트려지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용납하시고 다시 한번 그들이 자기의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원래 주어진 그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 실패하지 않고 -한걸음에 달음박질하면 더 말할 나위 없지만- 실수하지 않게 되는 것이 불가능할 때도 있습니다. 미끄러질 때도 있고 쓰러질 때도 있습니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다시 주워담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 우리를 불러서 주 앞에 세우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우리 예수님의 참 사랑을 우리들이 경험하고 다시 그분께로 돌아가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 이외에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영혼들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그만 미끄러졌습니다. 예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생명도 주님을 위해 바쳐야 했던 사랑 받는 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끄러졌습니다. 그가 그렇게 미끄러졌지만 예수님께서는 한번 미끄러진 것으로 영원히 퇴장시키시지 아니하시고 그를 다시 돌이키게 하셔서 다시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을 죽는데 까지 내어준 그 베드로가 잠시 후에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 등장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들을 위해 주님처럼 기도하고 주님처럼 중보하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그 사명을 감당해나가지 못했던 우리들이 이제는 돌이켜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잘못 살았지만 이제는 돌이켜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 그 영혼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고 그 일이 힘들 때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잠시 후에 당신을 배반해버릴 베드로를 어떻게 사랑하시면서, 그의 이름을 절친하게 부르시면서 그를 위해서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미끄러진 후에는 다시 돌아와서 형제들을 섬기는 그 섬김으로 인해서 오히려 기뻐하실 것을 보여주셨는 지를 생각하며 우리 주님의 모본을 따르는 무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랑을 베풀고 그 영혼을 위해서 마음껏 수고하면서도 우리는 그 영혼을 위해서 실망하지 않는 태도를 우리 주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생명처럼 사랑했던 제자, 그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맏이였던 제자 베드로가 잠시 후에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자기를 배신할 것을 알면서도 그를 위해서 기도하지 못하도록 예수님의 기도의 마음을 흐트러 놓지는 못했습니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오죽 심령이 강퍅하고 든 것이 없으면 사단이 너를 흔들겠느냐’고 말씀하시는 대신 그렇게 그 영혼이 위험하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더 많이 그들을 위해 기도로 섬겨야 한다고 하는 책임감에 불타는 마음으로 기도의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그 은혜를 받아서 지금도 예수님의 기도 덕택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이 아닙니까? 정말 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여러분 모두 이런 주님의 섬김의 빛 앞에서 우리를 정직하게 노출하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며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시기 위해서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를 배신하고 우리의 은혜를 모르고 심지어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영혼들의 이름까지라도 부르면서 그 영혼들이 돌이켜 주님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기도의 생애의 모본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발자취입니다.
9.습관을 좇아 기도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눅22:39)”
예수님의 기도생활에 대해서 주일 오후마다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의 중보기도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시몬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이 누가 더 큰가에 대해서 다툴 때에 예수님께서 “시몬아 시몬아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 하라”하신 것을 통해 중보기도의 신령한 의무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 대화의 장면이 끝나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의 유명한 결단의 기도를 드리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시간은 밤이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감람산으로 예수님께서 가셨는데, 밤 기도를 하러 가신 것입니다. 바쁜 사역 가운데서도 늘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시면서 그 시간들을 하나님 앞에 기도에 바치신 것이 예수님의 능력 있는 생애의 비결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기도생활에 있어서 습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감람산에 갔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밤에 제자들을 데리시고 기도하러 다니신 기록은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 때가 예수님께는 일생 일대의 매우 중요한 기도를 드리는 때였기 때문에 제자들과 동행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습관을 좇아 기도하러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 습관적인 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많은 폐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습관적이라는 말이 붙으면 다 안 좋은 것입니다. ‘습관적인 예배생활’ ‘습관적인 성수주일’ ‘습관적인 신앙생활’ 이런 것들은 모두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습관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다 쏟아 붓지 않아도 저절로 자기도 모르게 몸에 익숙해져서 저절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습관이 분명히 나쁘고 습관이 되어 익숙해진다고 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 안에 무엇인가 깃들여야 할 정작 중요한 것을 빠지게 만드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습관적이라고 하는 것은 늘 안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이 습관은 또한 동시에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꼭 필요한 기초들을 제공해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연습을 계속함으로서 도달되는 것이 습관입니다. 습관 그 자체가 신앙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아닌데 습관이 되면 언제든지 그것을 딛고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습관은 굉장히 좋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을 거의 읽지 않는 사람과 습관적이라도 성경을 매일 한두 장씩이라도 읽는 사람 중 누가 말씀을 읽다가 하나님을 만날 확률이 많습니까? 습관적으로 읽는 사람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매 예배시간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당신의 찬란한 영광을 보여주시는 부흥을 안 주신다고 해도 언젠가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큰 영광이 나타나서 우리의 온 영혼이 압도당하는 귀한 은혜를 부어주실 때 그 은혜에 참여할 사람은 습관적이든 억지로 끌려나왔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복을 받는 것입니다.
저는 주일학교 교사를 하다가 은혜를 받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인데 날랄이었습니다. 토요일은 술 먹고 늦잠 자고 싶은데 내가 아니면 주일 학교를 인도할 사람이 없어서 억지로 일어나서 다니던 육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게 했습니다. 내가 없으면 당장 주일 학교 예배를 못 드리는데 어떻게 나 편하자고 교회를 옮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앙이 아니라 목사님이 너무 불쌍해서, 인정에 끌려서 하다가 어느 날 하나님께서 변화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잘한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드려서 좋은 교사가 되었더라면 더 빨리 주님을 만나고 더 빨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었겠지요.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을 타고 숲 속을 산책하다가 하나님의 찬란한 임재를 보고 칼빈주의자가 되는 영적인 체험을 하는데, 그의 일기 속에 ‘습관을 따라서 건강을 위해서 말을 타고 숲 속에 들어가 산책을 했다. 그러다가 거기서 갑자기 하나님의 임재의 찬란한 영광 앞에 굴복하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적고 있습니다. 경건한 습관은 내용이 좀 모자란다고 하더라도 그 습관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습관이라고 하는 발판을 밟고 그 습관을 뛰어넘는 진정한 내용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시작하기만 하면 자려고 준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앉을 때도 수면에 방해받지 않는 자리를 택합니다. 그리고 설교가 시작되면 지적인 활동의 스위치를 끄는 것입니다. 그리고 깊은 수면 속으로 들어갑니다.
(예화: 집회 때 설교가 시작되자 눈을 지긋이 감고 고개를 끄떡이는 한 사람이 심오한세계 속으 로 들어가는 줄 알았더니 조는 것이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누가 무엇을 말하든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전자의 사람보다 변화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많은 것입니다. 물론 예배가 예배답지 못하고 말씀의 내용이 없으면 그렇게 정신 바짝 차리고 들어봐야 얻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 습관은 여전히 고귀한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그런 습관이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교육할 때, 교육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긴 시간동안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짧은 시간에 혼신의 힘으로 집중하는 자세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집중하지 않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흔들리는 물병에 주전자로 물을 부으려고 하는 것과 같이 어려운 것입니다. 어른이 이야기할 때는 똑바로 앉아서 정확히 들어야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기도에 있어서 이런 것들은 더더욱 필요합니다. 공적인 예배는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예화: 신도시에서 토요일에 예배드리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앞서간다고 하지만 자연스럽게 주일 성수를 안 할 수 있는 합법적인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예배는 그렇게 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기도생활은 표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기도 안 나왔다고 전화하는 경우도 없고, 기도생활은 개인적인 생활이니까 어디서든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은 언제든지 안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 하루 안 했다고 해서 갑자기 이변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정해놓고 기도해야할 필요가 점점 증대되는 것입니다.
(예화: 공부 못하는 아이에게 공부 좀 하라고 하면 하고 있다고 하는 경우와 다 했다고 하는 경 우 둘 중의 하나이다)
(예화: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언제 기도하느냐고 물으면 늘 기도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 다)
이것은 ‘기도해야 할텐데’하는 생각으로 차있는 것이지 실제로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 견고함이 없는 것입니다. 일정하지 않은 기도생활로는 기도생활이 뿌리가 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새벽미명에, 그리고 깊은 밤에 기도하신 것이 사역에 들어서시면서 사역을 피해서 새벽과 밤 시간에 기도하신 것이지만 예수님 자신이 순수한 인간의 육신을 지니신 참 사람이셨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예수님도 그런 철저한 고정화된 기도 시간, 그리고 그것에 대한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서 그 새벽기도의 습관과 밤 기도의 습관이 몸에 배어있어서 오늘 습관을 쫓아서 감람산으로 기도하시러 올라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몇 번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가 기도시간이냐고 물을 때 그 시간을 이야기 할 수 없는 사람은 90% 이상은 그 기도생활이 견고하지 않습니다. 할 때는 열심히 한다고 해도 기도생활이 인격과 삶 속에서 뿌리가 내리기 위해서는 정해진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이 있다는 것은 그 기도하는 시간에 대한 헌신과 집착이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것들을 정확하게 습관에 맞춰서 집어넣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이면 습관적으로 눈이 떠져서 약수터에 올라갔다 오지 않으면 하루 종일 몸이 찌뿌뜨뜨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루 이틀에 그런 습관이 된 것이 아니라 여러 날의 실천을 통해서 몸에 배고 그렇게 몸에 배이기 전에는 자꾸 그 시간을 다른 일들이 유린하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다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이런 기도의 모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해진 시간이 있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새벽이 제일 좋지만 그러나 꼭 새벽일 필요는 없습니다. 특수한 형편으로 도저히 새벽이 안 되는 사람은 밤이라도 괜찮습니다. 그것도 안 되는 사람은 직장에서 점심 시간이라도 좋고 퇴근할 때라도 좋습니다.
장소도 교회가 제일 좋지만 교회가 아니면 골방이든지 베란다에 기도 자리를 만들어 놓고 기도한다든지 직장 가까이에 있는 교회에 점심시간에 가서 기도한다든지 아니면 퇴근할 때에 교회에 들러서 기도한다든지 집에 있는 지하실에서 기도한다든지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해진 시간이 꼭 있어야지 만 몸에 배인 습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화: 외국에 집회 가서 시차가 생겨도 6시만 되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습관이 붙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처음 새벽기도를 시작한 사람보다는 그런 습관이 붙은 제가 훨씬 유리한 위치입니다. 몸이 힘들어도 눈이 떠졌을 때 '충성'하며 일어나면 되는데 그 사람은 자고 있으니 '충성'하며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습관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일에 대해서 무감각하고 신령한 기도생활에 대해서 헌신하기를 싫어하는 이 몸이 안 움직여 주니까 기도생활을 못하는 것입니다. 몸이 움직인다고 해서 신령한 기도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몸이 움직여야 시도라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부터 습관에 익숙해지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새벽기도 시간이면 눈이 떠지는 사람, 하루에 성경 네 장을 읽지 않으면 밤에 잠을 잘 수 없는 사람, 사람들에게 하루에 한번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빚진 것 같은 부담감이 들어서 슈퍼라도 달려가 무엇을 사면서 전해야 하는 사람, 이렇게 습관이 밴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그런 습관이 있으면 반은 이기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교회 근처에 살면서 새벽 6시에 습관적으로 깬다면 할 수없이 새벽기도에 나올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예화: 교회 개척 후 얼마 안되어서 듀플리케이터를 기증해달라는 광고를 열린 신문에서 본 부산 대학교 교수 부부가 설교를 듣는 중 “모든 것을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라는 부분이 반 복되는 것을 듣고 마음에 찔려 헌신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계속 자극을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매일매일 우리들이 일정한 기도시간을 지켜서 실천을 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반복된 자극이 되는 것입니다. 일정한 취미생활이나 고정적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습관을 빠트리면 자기 존재가 확인이 안 되는 혼돈에 빠집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계속 억압받으며 못하게 되면, 심하면 병이 나고 그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어서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습관이 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래서 새벽기도에 기도 한마디 안 해도 왔다가 가는 것은 여전히 의의가 있습니다. “주님 저 이제 처음 예수를 믿어서 기도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 한마디만 하고 가도 그 사람의 그 기도는 신앙이 깊은 사람의 청산 유수와 같은 일만 마디의 말보다 주님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습관이 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예화: 예전에 아침마다 우유를 소금에 타서 먹는 습관이 있었다-그러나 지금은 우유를 먹지 않 는데 그렇게 우유를 좋아하는 몸의 성향들이 오랫동안 그 습관을 실천하지 않으니까 다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습관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나쁜 습관이 들었다면 그것이 패역입니다. 자기 자신이 나빠서라기 보다도 자기 안에 있는 나쁜 습관과 성향들이 강력한 지배력을 가지고 계속해서 내 인생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예화: 놀음에 빠진 사람은 일주일에 몇 번이라도 하지 않으면 병이 난다)
그런데 이 기도의 습관이 우리 몸에 배면 얼마나 좋습니까? 사람이 우선 성결해 집니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하나님과 대면하고 싶은 것인데, 기도의 습관이 붙었다는 것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정해진 시간에 대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성향을 이 속에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한 습관입니까?
여러분들이 하루를 살면서 자기를 성찰하는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나를 대면해야 되니까 가장 강력한 성찰을 가져다줍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거룩하시며...”하고 부를 때 자신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지 않은 것을 깨닫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하고 기도할 때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거스르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내 재주, 내 돈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자기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그 과정 자체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는 성찰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매일 안하고는 못 배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가장 중요한 표지입니다. 그런 습관이 배어 있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훌륭하고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런 경건한 습관이 몸에 배겠습니까? 물론 “하나님 그런 습관이 내 몸에 밸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만 해서는 안됩니다. 습관화되기 위해서는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이 반복되어서 실천을 낳고 실천이 계속되면서 습관을 낳고 습관이 계속되면서 인격을 형성하고 성품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격과 성품에 영향을 미치면서 그 사람의 장래의 삶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성격이 불같고 아주 까다로우면 인생을 다 살지는 않았지만 험난한 세월을 보낼 것이 뻔합니다. 시집가면 시어머니와 들이받고 직장에서는 상사와 들이받고 동업하면 동업자와 대판 싸우고 세 들어 살면 주인과 싸우며 살텐데 그 사람의 인생이 파란만장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전문적으로 관상을 공부하지 않아도 간단합니다. 성격이 까다롭고 칼날같이 생긴 사람은 “참 험한 세월을 살아오셨군요”하면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앞으로도 험난한 세월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성품을 보면 다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 대해서 너그럽고 천성적으로 좋은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껏 까지 살아오면서 인덕이 참 많으시군요.”하면 “그것을 어떻게 아시느냐”고 하겠지만 사람의 성품이 좋으니까 누구와도 부딪히는 사람이 없고 그러니까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성품이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습관이 어떻게 성품을 결정하는 것인지 보십시오. 어떤 습관이 있으면 그 사람은 그 습관이 계속되면 될수록 습관과 성품 사이의 격차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꼼꼼하게 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일을 하는 동안 치밀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습관화되어가고 있는 어떤 습관을 통해서, 지금은 습관과 성품 사이에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습관과 성품이 같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충성되지 못한데 하나님이 일을 맡겨주신 것에 대해서 교육을 받고 주위에서 신앙의 권면을 받기를 ‘하나님의 일은 굉장히 거룩하고 중요하다 그리고 세상일보다 더 깔끔하게 완벽하게 잘해야 한다 그리고 일하면서 항상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고 훈련을 받았다면 아직은 성품 자체에 불같은 충성스러움은 없어도 하나 하나를 아무렇게나 하지 아니하고 마음과 뜻을 다해서 해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 일을 하나 하나 하나님께 하는 것처럼 하면서 습관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 사람의 성품이 충성된 성품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난 신년 사경회에서 신령한 사람이 되는 비결에 대해서 설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을 경험함으로서 신령한 사람이 되는데 그 의로운 삶을 살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에 매일매일 순종하는 실천을 통해서 그 사람이 점점 더 분투하는 가운데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되어간다고 하는 요지의 설교를 마지막날 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습관이 그 사람의 성품까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습관은 어떻게 형성되는냐면 반복되는 행동이 습관을 낳습니다. 어떤 실천이 반복되지 않고는 결코 습관이 되지 않습니다. 생각 속에서 멈춘 습관은 생각하는 습관만을 만들뿐입니다. 말하는데서 그친 습관은 말하는 습관을 결정할 뿐인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실천하는 습관은 계속 반복되는 행동이 있을 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예화: 처음에는 빚에 몰려서 돈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빚을 다 갚고도 드러눕기만 하 면 자동으로 돈에 대한 염려가 떠오르게 된다)
(예화: 선생님의 음성과 몸짓이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몇 번 따라하다 보니 그 선생님의 어조나 손짓을 닮게 되었다)
그 사람의 말만 옮기면 말만 닮는 것이고 생각만 계속하면 생각의 습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습관을 따라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것은 기도의 실천적인 행동하는 습관입니다. 실제로 움직이면서 행동하는 이 습관은 행동의 실천을 통해서만 형성되는 것이지 아무리 기도에 대해서 생각을 해도 그러한 것들이 기도의 습관을 형성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에게 누구의 말을 옮겨서 기도를 열심히 가르쳐준다고 할 때 여러분들의 말은 능란해질 수 있고 여러분들이 그런 것들을 잘 가르칠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또 하나의 습관이 생기게 되는데 여러분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사랑하는 구역식구들을 만나면 기도에 대해서 말하는 버릇은 생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입에서만 이루어지니까 거기까지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실천적인 습관은 행동에 의해서, 그것도 반복되는 행동에 의해서만이 형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강력하게 촉구하고 싶은 것은 기도하는 시간과 장소를 정하라는 것입니다. 6시 15분 새벽기도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동네 가까운 교회를 정해도 되고 베란다에 담요를 깔고 정해도 좋고 지하실이나 다락, 어디든지 정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이 실천할 수 있는 장소를 구하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예화: 남의 교회에 새벽기도를 나가기가 부담스러워 다락의 짐을 밀어놓고 몇 해 동안 새벽이면 그곳에서 기도했는데 잘 꾸며진 교회당보다 거기에서 기도하면 제일 좋았다)
이렇게 장소와 실천하는 행동의 습관이 밀착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소를 정하십시오. 그리고 시간도 정하십시오. 그러면 반성을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규범을 정해놓으면 그것을 이행하지 못했을 때는 ‘이러면 안 되는데’하는 가책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 설교를 들을 때 그렇게 기도하지 않아서 되겠느냐는 설교를 들으면 ‘나를 향하신 말씀이구나’하며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갈 지점이 있으십니까? 습관이 없는데 돌아갈 시점이 있습니까? 철칙처럼 생각하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꾸준히 나오는 사람, 어떤 사람들은 개 오줌 누이려고도 정해진 시간에 개 끌고 나가는데, 자기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등산도 하고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서 물이라도 떠가지고 오는데, 하나님 만나는 것이 오염된 산꼭대기의 한 방울의 물이나 강아지에 비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기 힘들면 집에 돌아가셔서 다락을 치우고 방석하나 갖다 두고 책상 하나 놓고 ‘만민을 위한 기도의 장소’라고 써 붙이십시오. 그리고 새벽마다 올라가서 기도해 보십시오. 장소가 결코 없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고 사역을 하고 나서 새벽기도를 쉰 적은 거의 없었지만 그러나 교회에 와서만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교수생활 할 때도 마땅히 나가서 새벽 기도할 교회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좀 알려지고 나서는 목회자들에게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 건넌방에 창문 열고 책상 위에 방석을 놓고 여러 해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장소적인 불편함은 거의 느끼지 못했습니다. 어디서든지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마음이 없어서 문제이지 우리가 마음을 고정시키고 주님께 기도하려고만 하면 시간과 장소를 왜 정할 수 없겠습니까?
생활이 불규칙하다고 하는데, 생활이 불규칙하니까 더더욱 기도생활은 규칙적이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바빠도 다니엘만큼 바쁩니까? 한 나라의 재상이 되었고 그 엄청난 땅덩어리를 다스리는 국무총리가 되었지만 습관을 좇아서 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난 창문을 열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고 되어있습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환경이 변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중하기 때문에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 그 의무의 실천들이 자신 속에 습관이 되고 인격이 되어서 주님과 대면하는 고상한 기도의 습관이 몸에 배어서 환경도 흔들어 놓을 수 없고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는 그런 것이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경건의 습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요즘 계속 기도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기도 안 하는 사람은 이 주일 오후에 예배드리는 맛이 맛이 아닐 것입니다. 계속 가책을 받을 것 아닙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시리즈는 아직 안 끝납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겨우 감람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아직 끝날 계획이 없습니다. 매주 저녁때마다 가책을 받아서 돌아갈 때는 ‘기도생활 해야지’하고 가서 월요일 화요일까지는 가책이 느껴지지만 풀어진 생활을 하다가 주일에는 또 뜨끔하고 갑니다. 그런 생활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생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정말 여호와를 온전히 따르는 생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영혼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때 가책을 느낄 수 없다면 그를 목양한 목회자가 그런 사람을 만들어 놓을 것을 인해서 가책을 느껴야 합니다.
기도할 일들이 얼마나 쌓여 있는 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몇 시간을 엎드려서 기도해도 우리의 기도의 제목들은 다시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처리하지 못한 일거리처럼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누군가가 기도해 주어야 할 지체들과 기도할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 지 모릅니다. 그런 것을 태만하게 살아가면 그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정하십시오. 이 시리즈 끝나기 전에 결단하십시오. 사람들이 뭔가에 목표를 가지면 별 방법이 다 나옵니다.
(예화: 어는 교회에서 타임 스위치를 만들고 전교인 기도카드를 만든 이야기)
얼마나 습관이 안 붙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특별 새벽기도’를 하는데 ‘특별 숨쉬기’라는 말도 있습니까? ‘사십일 숨 몰아쉬기 대회’ ‘일주일 새벽 숨쉬기 대회’를 하고 숨 한 번 쉬었다고 도장 찍고 가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오죽 실천을 안 하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못하는 이유를 한번 대 보십시오.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를 말해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변명해보십시오. 제가 교역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처럼 3시간을 기도하라고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10분이고 20분이고 자기의 형편이 닿는 대로 마음을 드려서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 앞에 목회자와 가정과 교회와 교회 예배당의 건축과 내게 붙여준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는데 못하는 합리적인 이유를 대보라는 것입니다.
입가에 뱅뱅 맴돌기는 하지만 가장 커다란 원인은 우리의 게으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부족입니다. 다른 단어로는 표현이 안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면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데 어떻게 고백하지 않고 살 수 있겠으며 애정을 느끼는데 어떻게 만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하고 매어 달리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부부가 믿으면 똑같으면 안됩니다. 누군가는 끌어줘야 합니다. “여보 가서 기도합시다. 당신이 열린 교회 일꾼인데 기도하지 않으면 되겠어?” “당신이 집사인데” “당신이 교사인데” 이렇게 서로를 권면하면서 서로 기도할 시간도 만들어 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는 것입니다.
시간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놓으면 그 기도의 시간을 꾸준히 지키면 거기에서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만나주시고 감동이 생기면 시간이 그렇게 없다고 하던 사람들도 계속 그 기도의 시간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늘어나는 만큼 쓸모 없는 일들을 다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급한 일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중요한 일이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왜 기도하지 않으십니까? 주일날 와서 예배시간에 몇 마디 기도하는 것을 가지고 때우려고 하는 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예배의 감격이 백번 있어봐야 기도하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평소에 기도생활 속에서 주님을 구하고 그 예배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예배에서 감격을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에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생활에 대해서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브레이크를 거시고 실망하게끔 만들어 버리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 바라보며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기도 안 하십니까?
우리 주님이 오늘 기도하러 나가시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힘들게 사역 하시면서도 그런 습관이 몸에 배셔서 그 밤중에 감람산에 올라가실 수 있었을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히브리서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이유 때문에 습관이 몸에 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와 싸우시면서 기도에 자기를 바치신 반복적인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습관이 몸에 배어서 그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습관을 좇아서 기도하러 나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서 기도하러 나아가실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까? 매일 매일의 실천이 없이 그렇게 되셨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의 실천을 많이 보았습니다. 새벽 미명에 일어나시는 것부터 시작해서 죽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매일 매일의 실천하는 삶이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기도하시기 위해서 감람산으로 가게끔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도 실천을 해야 합니다. 얼마나 긴 시간을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정하라는 것입니다. 장소를 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무릎을 꿇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이라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해야할 기도의 제목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시간과 건강과 여건이 허락하는 최소한의 기도의 생활이라도 영위하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을 지키지 못할 때는 가책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회개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마음을 가지고 다시 새롭게 그 실천에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죽을 때까지 우리의 신앙의 길은 무릎으로 걸어가는 길입니다.
설교에 있어서는 대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기도에 있어서는 대가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쏟아지는 은혜 속에서 깊은 교제를 하면서 살다가도 어느 날 들판에 버려진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영적인 곤궁한 상황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대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죽을 때까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매 순간 은혜 주시는 하나님의 기도의 은혜를 유지하면서 살도록 그렇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굳어진 신앙생활의 습관만으로 여러분들이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기도생활을 실천해서 그것이 여러분들의 몸에 배이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몸 속에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뵈옵기를 원하는 갈망이 항상 깃들도록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시간을 정하십시오. 생활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침범 받지 않고 가장 지속적으로 견지할 수 있는 시간이 언제인가? 가끔 어기더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정해야 합니다. 목표를 정해놓고 실제로 장소를 정해놓고 그리고 기도를 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님처럼 그 기도의 습관이 몸에 배어서 살아있는 날 동안 내내 헌신되게 기도에 충성하면서 주님과의 교통 속에서 사는 그런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여러분 안에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풍성히 가득히 계시는 길이고 그럴 때 여러분들이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도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주를 위해 살아가는 삶도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사람들 되시길 바랍니다.
10.간절히 기도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감람산에 간 것은 습관을 좇아서 가신 것이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기도하시러 가신 그 자체 행동은 습관에서 일어난 아주 평범하고 늘 있는 관습이었지만 그러나 그 관습 속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날 드려졌던 그 기도는 매우 특별한 기도였습니다. 거기에서는 성부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이 있었고 그리고 특별한 하나님의 역사를 강권적으로 체험하여 십자가를 지실 수 있는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하러 가는 행동은 습관적인 행동이었는데 그 습관 속에서 드린 그 기도는 매우 특별한 기도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하게 마음을 먹고 기도한다고 해서 반드시 특별한 응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일생을 살면서 몇 번쯤 결단하는 금식기도나 위기 앞에서의 기도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와 기도생활에 있어서 더 중요한 의의는 습관적으로 그가 기도생활이 몸에 배어서 어디에 있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 앞에 정해진 시간에 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익숙해진 기도생활은 행동 그 자체는 습관적으로 계속되게 만들지만 그 기도의 실천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도 습관적이 되지는 않습니다. 습관적인 기도생활이지만 그러나 그 행동은 습관적일지 모르나 그 기도의 실천하는 행동을 통해서 만나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누구도 습관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상적인 기도 속에서도 특별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휴가도 내고 아니면 인생 결단하고 기도원으로 올라가서 사십 일쯤 금식 기도를 해야지 만 특별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습관을 좇아서 기도하러 가셨는데 그날 기도는 특별한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도 속에서 특별히 예수님을 만나주셨고 이전에 쉽게 경험할 수 없었던 특별한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화란의 신학자 스킬더라고 하는 사람은 구속자적 설교로 널리 알려진 사람인데 예수님의 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은 그 누구도 살아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당하신 그 영혼의 고통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가 지옥에 내려가서 고통을 당해본다면 그 때 비로소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당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영적인 고난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말할 때 우리는 십자가에서 못 박히고 피 흘리신 육체의 고통을 말하지만 그러나 영혼의 진통은 훨씬 더 오래 전인 그 전날 밤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영적인 그 고통 속에서 십자가를 지는 영적 투쟁 속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이튿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도 승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매달아 못 박혀 고난을 당하신 것은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로 끌려가신 고난이었지만 -그 육체적인 고난은 예수님이 강제로 끌려가서 못 박히신 고난이었지만- 그 전날 밤에 있었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영혼의 고난은 누구도 강요하는 사람이 없지만 예수님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신의 영혼을 고통 속에 바치신 시간이었습니다.
그 이튿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히실 때에는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당한 고난이었지만 오늘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조차 멀리 떨어트려 놓고 홀로 아버지 앞에 매달리시는 이 기도의 고난, 영혼의 고난에는 누구도 목격자가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혼자서 이 십자가를, 이 영혼의 고난을 담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릴 준비를 하고 계신 광경을 우리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는 많은 메시지들을 담고 있지만 그러나 오늘 우리가 관심이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의미, 그곳에서 일어난 일, 그런 일 보다 다 건너뛰어서 예수님이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그 기도의 자세에 대해서 오늘 생각해 보면서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그 기도생활을 배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더욱 힘써 기도하시니 땀이 흘러서 피 방울 같이 되었다’고 성경 저자가 보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영혼의 깊은 고뇌를 가져온 견디기 힘든 고난이었지만 그러나 특별히 이러한 모든 광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이 기도가 매우 간절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보고자 하는 바는 기도에 있어서 간절함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만 특별히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언제나 간절한 기도였을 것이고 우리처럼 우리 속에 있는 본성적인 악함이나 죄의 방해로 인해서 우리의 기도생활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애매모호한 태도로 형식적으로 마음에는 없이 중언부언하는 그러한 기도생활을 하셨을 것이라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은 습관을 좇아 하는 기도 생활 속에서도 늘 간절한 기도생활이었을 것이고 예수님 자신이 간절한 기도생활로서 언제나 우리의 기도 생활에 있어서 모본을 보여주신 주님이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꼭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신 기도만 간절한 기도였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특별히 간절한 기도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깊은 고민에 휩싸이셨습니다.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주님이 -당신 자신도 인간의 성품을 지니신 분이었기 때문에- 더구나 죽음을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으신 생명이신 그분이 죽으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엄청나게 커다란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자기 목숨에 대한 아까움, 그리고 우리에 대한 사랑 없음을 인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이 십자가 죽음의 고난, 이것을 피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수 있다면 당신이 그것을 원한다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셨지만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 마음속에 있는 어떤 비겁함이나 혹은 고난을 회피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용기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정직하게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기도했고 결국은 세 번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자기의 뜻을 하나님께 온전히 순복하고 아버지의 뜻을 좇아서 그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기로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이 세 번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안 해 주셨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분명하게 하나님의 어떤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이었던지 아니면 예수님의 마음에 주신 비상한 확신이었든지 우리는 그것을 추측할 수 없지만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대해서 응답하셨을 것이고 그 응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자기의 생각을 꺾고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자기를 죽음에 바침으로 우리 인류를 구원하고자 그렇게 자기 자신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아마도 요한복음 17장에 나와있는 대제사장으로서 이 땅에 남겨두고 가는 자기의 양떼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였을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우리가 추측하는 것처럼 온전히 십자가를 안 지게 도와달라고 기도하면서 한밤을 새우실 정도로 예수님은 한가한 분도 아니었고 또 예수님이 그렇게 자기의 생명에 대해서 집착을 가지고 계신 분도 아니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십자가를 지는 것에 관해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는 시작에 잠시동안 이루어졌던 기도이고 이제 그것을 모두 정리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은 본격적인 기도를 하셨을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여기에서 땀이 떨어지는 핏방울처럼 되도록 기도하셨을 때에 이 기도는 십자가를 안 지도록 도와달라고 하는 기도이기보다는 이제 십자가를 지실 분으로서 그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분으로서 이 땅에 남겨두고 가는 우리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라고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피땀을 흘리시며 아버지 앞에 간절히 기도하셔서 결국은 우리를 위해 중보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까지 십자가를 지고 감당하셔서 부활 승천할 때까지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지고 세워진 그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런 좋은 교회들로 주 앞에 새롭게 세워질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고 그 기도는 응답이 되었다고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초점을 맞춰보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하신 그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졌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땀을 많이 흘리셨기 때문에 그 땀방울이 너무나 굵은 나머지 송알송알 솟아나는 땀이 아니라 뚝뚝 떨어지는 땀의 모습이 마치 사람이 피를 흘리는 모습 같았기 때문에 아마 문학적으로 이렇게 묘사를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땀이 예사로운 땀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그 땀에 피가 묻어 나와서 떨어지는 땀이 피처럼 보였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백합니다.
금식을 할 때 나흘쯤 되었을 때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면 피가 섞여 나옵니다. 기력이 쇠하고 자기의 온 힘을 쏟아 부어 기도할 때에 소변이나 땀에 피가 배어서 나오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도 자연스럽게 경험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육신에 있어서는 우리와 다를 것이 전혀 없는 평범한 육체를 가지셨던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자신의 온 힘과 온 마음을 다해서 쏟아 부으며 기도하셨을 때에 그 땀에 피가 섞여서 나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이 아니라 인체의 생리적인 구조로도 사실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엿보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하신 이 대목은 바로 예수님에게 있어서 얼마나 많은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집중과 노고를 요했을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제 잠시 후면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실 텐데 그런 정도 엄청난 사건을 앞두고 있으면 예수님이 사십일 정도 금식기도라도 하셔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전날까지도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고 또한 먹고 마시셨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금식을 하고 어떤 특별한 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에 있어서 집중도를 높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 그러한 기도의 실천이 없는 사람들의 금식은 그저 잠시 위의 활동을 쉬는 것뿐이지 무슨 신앙적인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간절한 집중된 마음,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데 도움을 주게 하기 위해서 금식도 하고 특별히 기간을 정하기도 하고 특별히 기도시간을 고장 시켜 놓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떻든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사실은 예수님의 이 기도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자기를 쏟아 부으시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성경에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부분은 희랍어 성경에서 '씨름하다'와 같은 어원입니다.
물을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려보내려면 무슨 수고도 필요 없습니다. 어떠한 동력이 없이도 미국까지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냥 계속해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산골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을 바다까지 가라고 미는 사람이 없어도 그냥 물은 흘러갑니다. 그러나 물을 위로 올려보내려고 마음을 먹으면 동력이 필요합니다.
(예화: 옥상의 물탱크에 있는 물은 뚜껑만 열어놓으면 흘러 내려와 쓸 수 있는데 지하에 있는 탱 크의 물을 위로 올리려면 큰 모터를 가동해야 쓸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조차도 기도하실 때에는 씨름하시는 것처럼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열린 관계 속에서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올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영향을 우리가 받는 이 아름다운 기도의 세계를 유지하는 것은 수시로 방해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설교의 대가는 어떤 의미에서 있을 수 있는데 기도의 대가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설교는 계속하며 지식이 많이 쌓이면 가슴에 불이 없어도 최소한 지식이라도 있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외칠 수 있고 자기 마음에 불이 없어도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시기만 하면 -그가 사용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나오는 말씀을 사용하셔서- 사람들을 변화시키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래 기도해서 청산유수와 같이 기도를 시적으로 묘사해서 기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황금으로 잘 만든 열쇠인데 맞지 않는 열쇠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강한 능력과 힘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동안 기도생활을 한 사람들은 물론 능란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많이 해서 능란함이 쌓이면 하나님이 그 사람 마음속에 은혜를 안 주셔도 설교의 내용만으로도 약간의 가치는 있는데, 기도를 오래해서 기도에 능숙해 졌는데 하나님이 안 잡아 주셔서 차가운 기도의 내용만 남았다고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목표가 사람들에게 지식을 깨우치고 감동을 주고 감화를 주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감동시켜드리고 그 하나님께 열납 되는 것이 목표이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의 기도를 받지 않으시는데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한 기도의 대가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씨름한다’는 말로 묘사되었는데, 자기의 뜻대로 모든 것이 될 수 있으면 씨름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뭔가 자기의 뜻을 거스르면서 항거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가고 싶은 길이 있는데 못 가게 하면 그때 씨름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의미는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신령한 교통을 갖고 그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 신령한 영향을 받는 어떤 통로와 관계들을 무엇인가가 막고 계속 위협하면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야되겠다는 예수님의 마음의 소원이 강력하니까 그런 위협이 들어올수록 더욱 강력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기도를 가로막는 것들을 물리치면서 기도하시는 것 때문에 강해지는 것입니다.
(예화: 커다랗고 부드러운 호스에 유리창이 터질 정도로 강한 물을 틀면 소방차에 실린 물이 1 분 20초 정도면 다 나간다. 그 물이 못나가게 막으면 장애물을 뿌리치면서 더 세차게 나 간다)
우리의 기도생활의 문제는 아예 처음부터 시작도 안 하는 것이 문제이고, 또 하나의 문제는 되면 되고 안되면 안되지 하는 사고방식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간절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기도의 간절함이 어떠합니까? 처음에는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 곤고하고 심령이 가난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 생깁니다. 그 갈망이 점점 커져서 하나님 앞에 나아오고 주께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매달립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그때 신기하게도 기도할수록 하나님께서 그 간절함을 더해주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여러 가지 복잡했던 관심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되면서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모종의 복을 주셔야 될 것이고 그래야 지만 자기가 이 어렵고 곤궁한 상황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고 매달립니다. 그러는 과정을 통해서 기도는 점점 더 세차게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강력한 힘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고 그렇게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기도를 거스르는 모든 것들을 뿌리치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 기도가 연약할 때에는 작은 방해에 쉽게 굴복합니다. 물이 졸졸 나올 때는 막으면 못나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줄기가 굵어지고 강해질수록 누르면 어디론가 터져서 쏟아져 나옵니다. 심하면 파이프를 터트리면서 동파 되면서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안 하면 안 할수록 간절함은 점점 사라지고 기도를 하면 할수록 이 간절함은 점점 더해지는데 간절함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기도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물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점점 더 작고 사소한 방해에도 기도생활을 계속할 수 없도록 방해를 받으면서 무릎을 꿇고 굴복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들에게 하고자 하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엄청난 죄로 몰고 가서 파탄을 시키거나 여러분들로 하여금 한순간에 집단적으로 배교하게 하는 일들은 사단도 자신에게 있어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여러분들에게 시도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것입니다. 귀순하도록 여러분들에게 종용하고 배교 하도록 여러분들을 유혹하기 이전에 그러한 것들을 방해하는 영혼의 무기들을 하나씩 무장해제 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깨달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혀서 유혹을 받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말씀으로 말미암는 영혼의 유익을 얻을 수 있는 통로를 가로막아버리고 그래서 그 영혼이 곤비해지게 만듭니다. 자연스럽게 그의 기도생활을 끊임없이 방해해서 그로 하여금 열렬하던 기도생활의 불을 서서히 끄게 만들고 그래서 그 어떠한 죄와 유혹에도 항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그를 점령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 흐르게 되면 이미 알았던 아주 명백하고 분명한 기독교의 교훈에 관한 생각도 혼돈을 가져오게 됩니다.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사고도 혼돈스러워지게 됩니다. 혼돈스러운 사고는 예전에 우리가 주님을 믿기 전에 경험했던 사고의 체계입니다. 그 속에서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없게 만들고 하나님의 뜻과 자기의 뜻을 분별하기 힘들게 만들고 자기의 욕심대로 사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는 것 사이에 구별을 애매모호하게 함으로서 그로 하여금 아주 쉽게 넘어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이 흔히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사단이 언제나 고전적으로 사용하는 수법이요 고전적으로 하는 일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수시로 사단은 우리의 기도생활을 무장 해제시키고자 끊임없이 분투하면 노력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기도생활이 형식 속에 굳어지는 것은 간절함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새벽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기도는 시작하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과의 교통을 누리는데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기도할 시간이 되면 기도해야 되겠다는 결단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피곤하고 고단하다보면 기도하다 졸 수도 있고 잘 수도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개인의 의지가 매우 필요합니다. 금요기도회 같은 때 직장에서 끝나고 교회에 나와서 간단히 요기하고 기도회에 참석했으면 ‘오늘은 내가 여기서 반드시 기도하고 돌아가리라. 기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돌아가리라’하는 자기의 결심과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의 세계가 깊어지는 것과 간절해지는 것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형식적인 기도생활은 짧은 기도생활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짧은 기도생활도 건성으로 드리는 기도생활입니다.
기도를 했지만 기도의 제목조차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기도할 때 그 기도의 내용이 삶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기도생활의 이 허구성은 간절함의 결핍에 달린 것입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마음, 그 마음은 기도 후에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사용해야할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찾는 기도 속에서 간절함이 없었기 때문에 기도는 했지만 기도 속에서 아무 내용도 가슴에 심겨진 적이 없고 심겨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빈 마음을 가지고 생활을 시작했을 때 기도한 사람과 안 한 사람 사이에 현저한 차이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간절함이 없는 기도생활의 위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더욱 이런 기도가 익숙해지고 이런 기도가 일상화되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속에서 자신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중대한 봉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지나는 어구에서 손을 높이 들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했던 바리새인들의 후예의 길을 걷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얼마만큼 기도하던지 간에 우리들이 중요한 것은 간절함이 기도의 문을 연다는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열고 쏟아 부어지는 성령의 은혜 속에서 자기도 어찌할 수 없도록 주의 손에 강권적으로 붙들려서 기도의 도구가 되는 이 일들은 우리들이 선택을 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일들이 아닙니다. 오늘 저녁에 그리고 지금 당장 내가 그 기도를 하리라고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그런 불붙는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가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강권적으로 사로잡으시면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느낌을 받기보다는 주님이 뚫고 내 속에 들어오셔서 내 육체를 사용하셔서 당신 하고싶으신 기도를 실컷 하시고 다시 빠져나가신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끝나고 나면 내가 기도했는지 내 안에 주님이 기도하셨는지 분간이 안갑니다. 그리고 단지 남은 것은 기분 좋은 달콤한 피로감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할 때 인상을 쓰고 울고 주먹을 쥐고 목에 힘줄을 세우고 신음 소리를 내면서 기도하고 나면 스트레스 받지 않느냐고 하는데 스트레스가 아닙니다. 신령한 사람, 신령한 은혜의 세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그 긴장은 우리의 육신의 해로운 스트레스가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 의학 박사가 건강하려면 스트레스를 받으라는 종류의 책을 썼습니다. ‘돈을 벌어야지’ ‘이일이 안되면 어떻게 하나’하며 자기의 야망이나 강렬한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경험하는 긴장은 우리의 육체를 상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모든 노는 것 중에 스트레스 안 받으면서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골프 치는 사람은 얼마나 스트레스 받겠습니까? ‘넣어야 될 텐데’ ‘바람은 왜 이렇게 부나’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잘하지’ 합니다.
(예화: 사격을 좋아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그렇게 자기에게 좋은 것, 그리고 자기가 진심으로 원하고 하기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갖는 긴장은 오히려 긴장을 푸는 재료로 사용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 주님을 간절히 구하면서 살아야 될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리의 행복의 근원이시고 우리의 삶에 목표와 이유가 되시는 지존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그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얼굴을 구하면서 하는 그 긴장이 우리에게 스트레스가 된다면 천당에는 모두 스트레스 환자들만 모여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스트레스 안 받고 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왜 본토 친척을 떠나서 남의 땅에 가서 그 스트레스를 받습니까? 애굽의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로 가만히 있지 왜 팽개치고 도망을 가서 수배자가 되어서 스트레스를 받습니까? 그리고 왜 애굽의 왕궁으로 가서 사람 대접도 못 받고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고 백성들 데리고 광야를 돌면서 목회를 하면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겠습니까? 입다, 삼손,...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스트레스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들이 경박하게 스트레스라고 말하지 않고 거룩한 긴장 속에서 산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그들을 믿음의 사람되게 한 것입니다. 긴장감이 없는 사람들은 아름다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편안하게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무슨 아름다움이 있습니까? 무엇인가 온전하게 되고 바르게 되려고 노력하는 긴장과 몸부림, 그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가치를 지닌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얼마나 많은 가치를 갖게 되겠습니까? 그것을 우리들이 깊이 기억해야 됩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정신적으로 그 사람이 아줌마가 되었는지는 고무줄 넣은 바지를좋아하는 것과 전철에서 앉을 자리 찾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글을 썼다)
아직 우리의 인생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직까지도 긴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매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사랑의 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눈을 들어서 한번 우리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어떻게 보면 기도 생활에 있어서 우리 우군은 없습니다. 물론 목회자도 우리의 동료들도 우리의 신앙의 동지들도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고 지원 사격을 해 주지만 그러나 때로는 그러한 지원사격만을 가지고는 우리의 기도의 세계를 대신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세력들이 우리를 에워쌉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를 향해 도전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그런 모든 상황들을 거슬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려고 하는 거룩한 욕망을 포기하고 물이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흘러 내려가듯이 그냥 육체의 원하는 대로 살고자 작심하기만 하면 더 이상 우리에게는 갈등은 없습니다.
죄인들의 마음속에서 경험되는 평화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죄와 더불어 싸워서 승리하면서 경험하는 평화이고 또 하나는 죄와 더불어 타협하고 굴복함으로 맛보는 평화입니다. 간절함, 이것이 우리의 기도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것입니다.
어느 순간 하늘을 열고 쏟아 부어지는 폭풍과 같은 그 기도, 자기가 기도하는지 자기 안에 주님이 기도하시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과 혼연일체가 된 가운데 자기를 불사르는 기도는 자기의 힘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기도의 경험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렇게 쏟아져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기도의 경험을 온 산을 태우며 번지는 산불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러한 산불이 있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마치 눅눅한 날 젖은 성냥곽에 불을 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기도생활에 게을렀기 때문에 기도를 하려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자연스럽게 강력한 기도가 속에서 쏟아져 나오지를 않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언제 그렇게 강력한 기도를 할 수 있을 때가 오겠지’하는데 물론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이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몰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간절해지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모으고 다급하면 무릎을 꿇기도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부르짖으면서 가슴을 치면서 기도하기도 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한의 간절함으로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아뢰고 주님을 뵈옵기를 원하는 우리의 갈망을 표하고 하나님과 작정한 기도의 시간을 지키면서 아버지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사는 그러한 기도생활, 기도의 실천, 그것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 가운데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이 있고 다른 사람이 도저히 도와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기도에 있어서 간절함을 통해 하나님이 힘주시는 대로 나아가는 이 경험은 다른 사람이 도와줄 수 있는 경험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의 중보의 기도, ‘저 사람으로 하여금 열렬히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는 수 천명의 중보기도를 받으면서 간절해지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사람보다는 아무도 중보기도 해주는 사람이 없어도 홀로 하나님 앞에 ‘나는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고 그 간절함의 소원을 기도의 실천 속에서 표하는 그 사람이 훨씬 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빨리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기도의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일정 시간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건조한 기도 생활로 의무적인 태도로 기도의 시간을 채우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것으로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을 보십시오.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를 위해서 영혼 깊이 차고 들어온 지옥의 고통을 한 몸으로 느끼시면서도 그분은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자기를 집중하고 그 하나님 앞에 자기를 쏟아 붓는 기도의 열정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와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역사 하셔서 그 영혼의 십자가를 지게 하셨고 이튿날 승리를 미리 담보해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단지 기도의 시간을 정해놓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기왕에 그 시간을 정해놓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기왕이면 그 시간을 간절한 기도로 채운다면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나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면을 두루 살피셔서 어디 자기를 간절히 찾는 자가 있는가가 살피시며 그 하나님 앞에 그렇게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의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가 죄인이면 그 죄를 사하십니다. 그가 곤궁한 가운데 빠진 사람이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를 먼저 도와주십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해서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말씀으로 그 갈 바를 보이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만들어 주셔서 자신의 능력의 부족으로 인하여서 불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힘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땀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시면서 자신의 온 힘을 소진하셔서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실 수 있는 육신적인 힘이 남아있지 않을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예수님의 기도에 힘을 더하심으로 우리를 위한 중보의 남은 기도를 성공적으로 마치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의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특별한 힘주심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예수님이 경험한 특별한 힘주심, 기도 속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가 우리에게 힘이 되어서 지쳤던 우리의 영혼에 소생함을 주고 쇠약했던 우리의 육신에 강력한 힘을 공급해서 예상을 깨고 아버지 앞에 매달리게 만드는 기이한 은혜의 경험을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힘을 다 써야지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간절함 기도로 힘이 다 떨어져야지, 하나님이 도와주고 싶으셔도 아직 힘이 많이 남아있고 빤질대며 그 힘을 안 쓰는데 어떻게 도와주시겠습니까?
설교와 기도가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육신적으로 너무나 지쳐서 도저히 설교를 감당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하며 ‘20분간만 농축해서 간결하게 요점을 찌르면서 설교를 하고 내려와야지’하고 올라갔는데 설교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그러면 평소보다 훨씬 더 장시간의 설교를 하고 내려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숨을 쉴 기운조차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 기도의 제목은 산더미처럼 쌓이고 힘은 없습니다. 특별히 몸이 질병상태에 있을 때에는 마음도 상하고 하나님 앞에 너무 힘겹습니다. 그 때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눈물밖에 안 나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하며 그 말에 위로를 받으면서 엎드려서 눈물만 흘리며 하나님을 바라보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예상을 깨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경험하신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든지 경험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가슴을 불붙게 만듭니다. 순간 우리의 육체에 힘이 들어오고 우리의 영혼에 활기가 북돋아지면서 아버지 앞에 폭포수와 같은 기도를 쏟아놓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변수가 언제든지 있는 것입니다.
(예화: 새벽에 일어나면 안될 상황인 한 형제가 새벽기도에 나오라고 하는 말씀을 순종 했더니 새벽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주시는 영혼의 은혜 때문에 새벽에 잠을 자지 않 아도 능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새벽에 잠을 자야만 한다는 계산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특별히 주시는 영혼의 은혜와 힘주심을 계산에 넣지 않았을 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핑계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하러 나가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끔 기도하러 나와도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무리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육신을 혹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간절함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무기입니다. 진실하지 않고는 간절할 수 없습니다.
(예화: 신학교 채플실에서 한 학생이 ‘마태복음 몇 장 몇 절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기도했다)
세게 기도하면 하나님도 꺾을 수 있다는 식입니다. 이것은 진실함이 결여된 간절함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영혼이 압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감출 것이 무엇입니까? 안 믿어지면 안 믿어진다고 말씀드리면 되는 것이고 진실하지 못하면 ‘내가 진실하지 못하니 진실해지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만큼은 모든 것이 정직하고 솔직해야 합니다. 그렇게 진실한 사람에게 있어서 간절함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진실하고 간절한 사람은 그 사람이 설령 죄를 범하고 희망이 없는 악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의 시선을 끄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죄 많은 세리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시선을 그의 기도가 붙잡았습니다. 이유는 기도가 수려해서가 아닙니다. 사실상 바리새인보다는 그 사람이 죄가 많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호기심이 갈만한 어마어마한 서원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모습에 정직해졌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정말 희망이 없는 죄인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으면 자기는 희망이 없는 죄인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함으로 매달린 것입니다.
(예화: 편지를 보내오는 사람 중 가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이 무엇을 도와달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리새인보다 그 사람을 더 의롭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동족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치부하며 살아온 사람이 어떻게 의로울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로 말미암는 의가 자기가 잘 살아서 쌓아온 그 의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간절하기만 하면 죄 있는 사람은 용서해주시고 갈길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보여주십니다. 힘이 없는 사람에게는 힘을 주십니다. 그런 간절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의 기도의 시간이 정해져 있다면 우리가 그 기도의 시간을 간절함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항상 게을러지고 형식적인 기도생활로 이어가려고 하는 유혹이 들어올 때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그 기도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간절해지셨습니까? 자기의 죄의 용서를 위해서 그렇게 간절해 지셨나요? 이 겟세마네동산에서의 기도,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주님이 무슨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간절해지셨나요? 아닙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주님이 간절해지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중보의 기도 때문에 그 기도를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실까 봐 간절해지셨습니다.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여건과 대항하고 싸우시느라고 간절해지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쏟아 부으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처럼 순결한 사람들도 아니고 주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많이 기도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에게서 왔고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악한 것에 점령을 당하고 하나님께 바쳐질 것이 없다면 우리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모든 책임은 하나님과 환경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책임입니다. 주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우리의 마음을 우리가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주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과 은혜를 따라서 온전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유린당하고 빼앗겼습니다.
간절한 기도를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수 없는 사람으로까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할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이고 다시 찾아야 하는 것은 다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춥습니까? 하나님 이외에 온기라고는 느낄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추운 벌판에 바람이 몰아치고 여러분과 여러분의 어린 자녀들은 동사 직전에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는 커다란 나무단과 잘 마른 지푸라기들이 놓여 있는데 불씨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단 하나 부싯돌이 들려져 있습니다. 열심히 두드려서 반짝거리고 빛은 나지만 그것이 떨어져서 불이 될 것 같은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마른 잎을 곱게 갈아서 그릇에 집어넣고 온 식구들에게 에워싸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으라고 지시하면서 부지런히 한 번만 한 번만 하며 불똥을 튀기도록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그 부싯돌을 두드리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 다음날 아침에 모든 가족들이 동사된 시체로 발견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상상을 하면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벽기도에 나왔는데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주님을 거스르며 산 날이 많았기 때문에 오늘 당장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폭포수와 같은 은혜를 쏟아 부어주시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한번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와서 또 두드리고 또 두드리면 언젠가 그 불똥이 곱게 간 나뭇잎에 떨어져서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그 불꽃에 불을 붙여서 쌓여진 마른 장작을 잘 때고 온 가족이 언 몸을 녹이고 그 숯불에 음식들을 끓여먹으면서 다시 몇 일 동안 살 수 있는 삶의 원기를 얻을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 떨어지는 하나의 불꽃은 우리의 생명과도 같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신령하고 능력 있는 기도의 사람으로 살다가 죽는 것과 전 세계에서 유명한 설교자로 살다가 죽는 것,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저는 단 십분도 망설이지 않고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을 택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기억하고 알아주는 것, 수많은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은 천국의 상을 잃어버리는 일들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 속에서 자기를 바치면서 산 사람들은 얼마나 아름답게 그의 생애가 기록되겠습니까?
저는 처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며 설교자의 길로 들어설 때, 1800년대 중반 미국 두 번째 대각성 운동에 쓰임 받은 챨스 피니라고 하는 열렬하고 뜨거운 전도자로서의 삶을 산 사람의 기록을 보며 많이 울었습니다. 그 사람의 설교의 성공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1850년에 있었던 로체스터 시의 부흥회는 굉장해서 시 전체의 연인원 10만 명이 집회에 참석했다고 하니 지금부터 150년 전의 그런 광경은 기이한 것입니다. 그가 확실하게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든 사람이 50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 선교학자들이 추산하는데 그는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지금도 계속 있습니다.
그러나 아벨클러리라고 하는 사람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벨클러리는 챨스 피니를 통해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이 그에게 사명을 주셨는데 챨스 피니를 위한 기도의 사람이 되라고 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하루 14시간씩 챨스 피니의 사역을 위해서 기도했다고 하니 대단한 것입니다. 14시간씩 기도하고 나머지 4시간은 굽어진 무릎을 펴기 위해서 누워있어야 했다고 하니 그의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그 기도의 사역이 얼마나 대단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의 자기의 생명을 내놓은 것처럼 기도하던 그런 기도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4시간 중에 14시간 기도하고 열 시간으로 잠자고 먹고 마시고 성경 읽고 봉사하는 일상적인 삶을 산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아벨클러리를 기억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아벨클러리의 상이 널리 알려져서 수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았던 챨스 피니의 상보다 작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이고 법칙입니다. 간절한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의 기도가 열렬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의 영적인 건강의 가장 중요한 바로메타입니다. 그래서 죠지 윗필드도 제일 먼저 하루의 생활을 점검할 때 ‘나는 오늘도 열렬히 기도했는가’로 자신의 영혼의 건강함을 입증했습니다.
죄를 죽이고 승리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성도의 결정적인 특징은 영적 순발력과 열렬함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무엇인가 증거 받으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어떤 증언을 들으면 그 영광을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이 불붙습니다. 그래서 그는 풍부한 정서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죄가 쌓이고 심령이 굳어지게 되면 열렬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간절함이라고 하는 것이 여러분 속에서 쏟아져 나오지 않는다면 그 영혼이 건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위험신호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것을 대항하는 것은 그런 굳어진 마음과 열렬하게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상황들을 대적하면서 그 열렬함을 회복하려고 하는, 부싯돌로 불을 붙이는 것과 같은 간절한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간절하게 살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그런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잃어버렸던 열렬함들을 회복하게 해주셔서 언제나 간절한 기도로 순발력 있는 기도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축복을 받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1.십자가에서 남긴 첫 기도①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34上)”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기까지 기도하신 예수님은 드디어 십자가를 지고 당신의 오신 목적을 수행하시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기 전에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시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체포는 가롯유다가 배신을 하여 대적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사랑하는 제자의 입맞춤을 암호로 해서 예수님께서는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 유대병정들에게 체포되셨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끌려가신 곳이 가야바의 뜰이었습니다. 당시 제사장의 뜰이었습니다. 거기에 가서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문제로 인해서 재판을 받으시는 이른바 종교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견해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형을 당해야 하나님의 법에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종교적으로 예수님을 재판할 권리는 있었지만 예수님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법적으로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시 유대 총독으로 있던 빌라도에게로 가서 '이 예수는 우리 종교의 규율을 어기고 이단자가 되어 우리 종교적인 규례에 의하여 재판을 받았고 사형언도를 받았으니 로마의 법으로 이 예수를 사형시키게 해달라'고 흥정을 했습니다.
당시 정치적인 상황으로 보면 이 세상에서 제일 골치 아픈 자리가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유대 총독이었답니다. 갈리리는 촌동네니 고분고분 말을 잘 들어도 유대지방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고,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아주 강력한 반대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조정에서도 임지가 유대로 발령 나면 삼가 조의를 표했을 정도로 골치 아픈 땅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법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유대인들은 워낙 독특한 민족이니까 유대인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자생적으로 생겨난 지도자들을 잘 구슬려서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서 다스려야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는 굉장히 관대한 종교정책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세금을 잘 내고, 로마 황제가 신이라고만 고백하면 봐줬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세금도 잘 안내지만 특별히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고 나머지는 다 필요 없다고 나가는 독특한 민족이었기 때문에 화해 점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이 수시로 일어나는 상황에서 이 종교지도자들, 당시 실세들의 요구를 빌라도가 거절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사람 예수를 건져줄만한 사회적인 배경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사형시키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거기에 휘말릴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교활한 빌라도가 예수님이 원래 자라신 갈릴리 담당에게 가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예루살렘에 갈릴리 총독이던 헤롯이 와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끌로 헤롯에게로 갔더니 헤롯은 전에부터 예수님이 보고 싶었기 때문에 너무 좋아했습니다. 물위를 걸었다느니,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였다느니,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느니 하는 소문을 들었기에 그 예수를 한번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앞에서는 그러한 요술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헤롯은 자기는 갈릴리 총독인데 유대에서 일어난 일에 개입해서 예수를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빌라도에게 오게 되었는데 새벽 시간쯤 되었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빌라도는 자기가 재판할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빌라도는 이 재판을 놓고 아주 고민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전적으로 동조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옳은 사람이 분명한데 이렇게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어떻게든 예수님을 살려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두 가지로 노력했는데 하나는 자기 손을 씻으면서 ‘만일 이 재판이 잘못 되었으면 나는 책임지지 않겠다’고 하자 유대인들은 ‘그 죄 값을 우리에게 돌리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사형해야 한다고 치자. 그러나 명절이면 죄수 하나씩을 풀어주는데 그 때 누구를 풀어주랴’ 빌라도는 진짜로 살인을 하고 민란을 일으킨 바라바와 예수님이 있는데 '사람들이 설마 바라바를 선택하랴'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라바를 선택하고 예수를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결국은 사형 언도를 받고 끌려가신 곳이 브라이도리온이라고 하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아주 심한 매질을 당하시고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거기에서 옷을 다 찢고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고 왕처럼 가시관을 씌워서 끌고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전날 다락방에서 밤에 말씀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서 혼신의 힘을 쏟아 붓는 기도를 하시고 빌라도에게로 헤롯에게로 다시 빌라도에게로 끌려 다니시면서 모진 고초와 욕을 당하시고 마지막에는 브라이도리온에서 그렇게 처참한 능욕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시다가 결국은 당신 자신이 십자가를 질 수 없는 것을 보고 로마 군병들이 구레네 시몬에게 그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예수님을 따라오게 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기도가 하나 등장한 것입니다. 소위 얘기하는 가상 제 일언, 십자가에서 남기신 일곱마디 말씀 가운데 첫 번째 말씀,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가상 칠언 중 첫 번째가 기도였다고 하는 사실이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원래 로마 민족이 변방의 야만족인 시절에 만들어 놓은, 사람을 형벌로 죽이는 방법이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인간을 잔혹하게 죽이는 방법이 수없이 많이 나오는데 인간들이 사람을 가장 처참하게 죽이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사형 집행 방법 가운데 가장 악랄한 것이 이 십자가 사형입니다.
사실 총살이나 전기사 같은 경우는 몇 초만 참으면 됩니다. 물 속에 수장된다 하더라도 십분쯤 지나면 의식이 없어지니까 의식이 없으면 고통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을 십자가에서 나무에 매달아서 살아있는 동안에는 최대한의 고통을 받게 하는 방법입니다. 얼마나 악랄한 방법입니까? 그러니까 이 십자가에서의 사형은 흔하게 채택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매우 특별한 범죄, 요즘으로 말하자면 반국가적인 혁명을 기도했다든지, 왕을 죽이려고 했다든지, 민란을 일으켜서 폭동의 수괴가 되었다든지, 처참한 가정 파괴 범이라든지 하는 중대한 범죄자를 정리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자기들이 만들었지만 자기 로마 민족은 어떠한 죄를 지어도 이 십자가사형에 처하지를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방법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십자가가 있지만 예수님이 매달렸던 십자가는 T형 십자가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T형 십자가는 세로 막대를 하나 땅에 세워놓고 가로 막대에 사람을 못 박은 다음에 도르레를 이용해서 높이 끌어 올려서 가로 막대에 끼우는 방법입니다.
이 십자가 형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규례가 있었는데 십자가를 지고 가기 전에 매를 맞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그 채찍에 맞아서 절명하는 사람도 많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규례는 자기가 질 십자가를 자기가 스스로 지고 사형장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형제도를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시고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교훈이 우리에게는 지금 감동적이지만 당시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제자들에게는 아주 섬뜩한 이야기였습니다.
(예화: 옛날 육실할 놈이라는 욕-어마어마하게 무서운 형벌이다)
요즘말로 등가 번역해 본다면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육신을 당할 각오를 하여라”하는 것인데 조선시대쯤으로 올라가 본다면 진저리가 쳐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기록에 보면 로마 사람들은 ‘십자가’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는 것을 아주 금기시하고 기분 나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나를 좇을지니라’라고 이야기하실 때 우리들은 도저히 느낄 수 없는 뉘앙스를 가지고 당대의 청중들에게는 가슴을 파고 들어가는 충격적인 초청이었습니다. 마음이 약한 사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초청이었습니다.
가로막대를 놓고 사람을 그 위에 눕히고 못을 박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 못은 기차 레일에 박혀있는 못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대장장이들이 무쇠를 두드려서 만든 것을 커다란 해머 같은 것으로 박는 것입니다. 손바닥 한가운데 박으면 몸무게로 찢어지기 때문에 손목에 박았습니다. 동맥을 건드리지 않고는 박을 수 없는데 손이 들려있으니까 피가 쉽게 출혈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몸은 늘어지고 뼈와 살 사이에 박힌 못에 의해서 몸무게가 지탱될 대 그 통증이 어땠을 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다리에도 못을 박고 못 세 개로 한 장정의 몸을 지탱한다는 것이 힘드니까 나중에는 발 밑에 발판을 하나 박아서 적당히 무게를 지탱하게 한 채로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 광경이 얼마나 처참합니까?
그런데 문제는 금방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섯 시간 걸렸습니다. 피를 많이 흘리고 태양볕 아래 있게 되면 찾아오는 인체의 현상은 타는 듯한 목마름과 찢어지는 듯한 두통 그리고 못박은 자리의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몸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 몸이 불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서서히 죽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형방법입니다.
잠언에 나와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당시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어 가는 죄인들을 향해서 긍휼을 베푸는 표시로서 신 포도주를 해면에 찍어서 갈대에 꿰어 높이 들어서, 매달린 사람이 신포도주를 받아먹으면서 목의 갈증을 면하고 마취제 역할을 해서 몸의 통증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십자가에서 형벌을 당하는 죄인들에게 베풀어야 할 선민의 마지막 긍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 포도주를 예수님에게 먹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어 가신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오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가운데 첫 번 말씀이 기도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가라사대’는 무엇을 위한 가라사대였습니까? 기도를 위한 가라사대였습니다. 누구를 가르치시고 교훈 하시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당신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하시는 기도를 도입하는 가라사대였습니다. 이 사실 자체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우리가 기도 못하는 것이 우리의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환경도 우리에게 적절한 영향을 늘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수 없도록 만드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할 의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시간도 나고 환경도 조성된다면 아마 그는 더 열렬하게 기도할 것이고 그의 간절한 기도는 점점 뜨겁게 불타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할 의욕과 욕망을 가지고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기도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은 타는 불에 가금씩 집어던지는 마른 볏짚과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말 못해서 안 한다기 보다는 안 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우리가 게으르고 나태할 때에는 기도가 되도 너무 피곤하고 바쁘니까 기도를 잘 안 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우리가 기도를 버리지만 나중에는 기도를 찾아가도 기도가 우리를 버립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는 게을러서 기도를 안 했는데 그 다음에는 부지런해서 기도를 하려고 해도 기도가 되지를 않으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환경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 영향도 우리가 절대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환경보다 강하기만 하면 우리는 반드시 기도하고야 맙니다.
(예화: 지하실 교회를 몇 년 하다보니 알게 된 것이 많다-물이 새는 것을 근본적으로해결하지 않고 막으면 다른 곳에서 새기 마련이다)
물이 집안으로 스며들려고 하는데 막으면 돌아가서 나오고 막은 것이 높으면 다 차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넘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자 하는 강렬한 소원이 있으면 환경은 극복됩니다. 우리들이 극복할 수 없다고 하는 환경은 사실은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서너 시간씩은 기도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십분이라도 열렬히 기도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의 영을 유지하고 예수님처럼 간절한 기도 속에서 살지 못하는 것을 적절하게 환경의 탓이라고 얼버무리는 데에 사용되는 핑계들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기도하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고통 속에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가라사대’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마음속으로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입 밖으로 말씀하셨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그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장면에 보면 큰 소리로 기도하셨다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러니 여기에서도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우리가 환경과 더불어 싸우면서 기도하려고 애를 썼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우리 주님처럼 애쓰신 그 모본에 비하면 우리의 애씀은 너무 초라하고 부끄러운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먹고 마시는 일에는 열심을 내었지만 주님처럼 영혼을 향한 마음의 고통을 간직하고 아무도 없는 외로움 속에 내동댕이쳐져서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환경으로부터 오는 수많은 압박을 이기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살아오지 못한 우리의 이 기도하지 않는 삶은 우리의 태만 이외에 다른 것으로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주 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십자가를 대하면서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이렇게 힘들고 게으른데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기도하실 수 없는 그 상황에서 -자신의 육신이 박살나는 그 상황에서- 거기에 매달리셔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당신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당신을 못 박는 죄인들을 향하여 원수 갚아달라고 하는 원한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정말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정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예수님이 걸어가신 발자취를 보면 결국 우리가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주님을 따라가면서 안일함과 명예, 안락함과 영화를 누리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가는 이 길이 고달파 보이고 너무 힘겨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목적이 축복이나 존귀, 영광, 이 세상에서의 번영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 위해 죽으시고 십자가에서 자기를 찢어 구속의 길을 여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격 때문에 그분의 종처럼 그 분의 사랑을 많이 입은 용서받은 죄인처럼 그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걸어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우리처럼 행복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안 주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구원의 생명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싸워서 늘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보이셨습니다. 또 그것을 누리며 살게 해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믿어지지 않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안에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못 받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 주님과 동행하며 그 주님이 이 세상에 아직도 살아 계셨더라면 반드시 걸어가셨어야 할 그 길, 하시고 싶어 하셨을 그 일을 주님을 대신해서 우리들이 해드리면서 걸어간다고 생각되면 사실 우리는 큰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길을 걸으셨는데, 주님이 그런 길을 걸어가셔서 우리에게 구속의 은혜를 주셨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지만, 오늘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어떻게 적당하게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재미나고 하나님 보다 나를 더 잘 섬기고 그래서 즐기는 인생을 살다가 마칠 수 있을까, 세상의 소금이 되기보다는 설탕 같은 존재가 되어서, 세상과 더불어 싸우고 거스르기보다는 시류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환경의 탓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정신이 우리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의 기도생활을 회피하고 기도하지 못하면서 사는 것을 스스로 그럴 수도 있다고 위로를 하면서 자기를 격려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영적 생활을 이렇게 가난하고 곤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도하셨던 주님의 모습을 뵈오면서 우리도 환경 탓만 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놓이든지 뼈가 으스러지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그 어려운 형편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기도의 말문을 여신 처음 단어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여”입니다. 여기에 쓰여진 단어는 ‘파테르’라는 단어인데,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할 때의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히브리말로 번역하면 ‘아브’가 되고 아람어로 번역하면 ‘아바’입니다. 이것은 가족관계에서 불려지는 아버지에 대한 아주 친근한 호칭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파테르’의 정확한 번역은 ‘아빠’라고 합니다. 격이 없는 친밀함이 담긴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에 대한 호칭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특이한 인상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 하늘에서 축복이 쏟아지고 기적이 일어나고 당신을 추종하는 수많은 무리들이 생겨나고 사람들이 자기를 왕같이 떠받드는 상황이라면 그런 영화와 영광을 주신 분이 아버지이시니까 ‘아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친밀하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간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 버림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들에게 붙잡혀서 못 박히고 십자가에 매달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채찍에 맞으시고 감당할 수 없는 비난을 한 몸에 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단절의 상황입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예수를 당신의 아들로 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구원하고자 하는 백성들의 죄를 모두 짊어진 죄인으로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 화목 제물로 삼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못 박혀 지금 죽어 가시면서도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한가지 사실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으면서도, 죄인들을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며 죽어 가는 그 순간에도,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한 가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친밀함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으로서 기도할 수 없는 상황을 예수님께서 이겨나가고 계신 것입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힘겹게 우리를 향해 밀려오는 고통으로 가득 찬 시련을 이기게 하는 큰 힘은 성령의 큰 능력,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은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주 놀라운 지식,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것이 이기게 해줍니다.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과 풍조를 거슬러서 바른 길을 걸어가려고 몸부림치면서 순종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개혁하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외톨이가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이 이미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넓은 길은 대중적이어서 동지가 많고 외롭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좁은 길은 길이 협착하고 험해서 찾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그 길로 걸어가면 가치는 있을 지 모르지만 동지는 별로 없고 편하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많은 어려움 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은혜 받으면 외로워지는 것을 아십니까? 사람들이 내 마음을 너무 모르고, 얘기하면 ‘신비주의에 빠진 것 아니냐?’ ‘너 그러다 너무 빠지는 것 아니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받는 위로는 자기처럼 빠진 사람들을 만나면 너무 행복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힘겨운 개혁을 경험해나가면서 그런 정신적인 외로움과 힘듦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교통의 위로를 통해서, 그 친교를 통해서 극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경험도 똑같습니다. 그 시대를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면서 겹겹이 원수들에게 에워싸입니다. 그러면서 외로움을 당하고 고난과 시련을 굉장히 많이 당합니다. 그런 속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다가도 그들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떤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지 않으면 아마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고 그들이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시종일관 그 열정을 유지하며 살수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있을 때는 핍박을 받지만 그 옳은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놀라운 위로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친교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그것을 느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이 산산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그 고통을 능가하는, 열심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실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 십자가의 고통이 예수님의 육신을 찢어 놓았고 잠시 후에는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킬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된 친교의 관계를 단절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삶의 이 문제가 생활의 문제입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당하고 있는 이 문제가 정말 생활의 문제이고 삶의 문제입니까? 그 뿌리를 캐들어가보면 결국은 삶에 있어서 흔들리고 좌절하는 그 궁극적인 이유가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성경을 비롯해서 믿음으로 인생을 살다간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불 가운데를 지났습니까? 그들이 물 가운데를 지나고 원수들의 수많은 칼날과 박해를 피하며 노래를 부르며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는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을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그런 특이한 능력을 준 것이 아니고, 어떤 환경이 그들에게 그런 특이한 힘을 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런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친교의 은혜,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마치 징벌을 받아서 죽어 가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친교, 그 속에서 산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인 속사도 교부 중 폴리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순교자입니다. 그리고 로마 당국에 의해서 체포당했습니다.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 이 폴리갑 선생이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지 86년이 흘렀습니다. 86년 동안 그분은 단 한번도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이 늙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86년 동안 한번도 나를 부인하신 적이 없는 그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하고 목숨을 건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과의 친교가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의 풍조에 굴복하는 것은 ‘구조 악이다’ ‘세상의 풍조가 그렇다’고 쉽게 얘기하는데 우리 안에 실제로 하나님과의 생생한 친교가 살아있다면 우리는 결코 그렇게 굴복할 수도 없고 굴복하지도 않습니다. 굴복하는 이유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쉽게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로부터 오는 그 친교는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을 이길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명확하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들에게도 나 여호와는 지금 아버지이냐?’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힘이라고 하는 그 상황에서도 나를 친밀한 아빠로 불렀는데 너희들도 나에 대해서 그렇게 친밀 하느뇨?’ 하나님이 묻고 계십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모든 열렬한 기도생활, 진실한 부르짖음의 간구의 삶은 하나님과의 친교로부터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원하는 마음과 하나님 자신을 경험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동일합니다. 여러분이 가끔 저를 만나면 ‘주님 만나고 싶습니다’ 하는데 기도 안 하면 그 고백이 거짓말입니다. 진짜 주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데 그 얼굴을 구하는 것은 간절한 하나님과의 친교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신 데 하나님의 얼굴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만져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그런데 기도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아주 중요한 방편입니다. 말씀 속에서 은혜를 받아도 그 은혜 받은 마음이 기도생활로 이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감격적인 만남이 순간의 경험으로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비무장지대의 공터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마치 6.25 때의 양측의 군대가 격돌하던 휴전 직전의 격전지와 같습니다.
(예화: 6.25 때 철원의 어느 고지 하나가 36시간 동안 세 번 주인이 바뀌었다는 6.25에 참전 했던 아버님의 말씀)
금방 하나님의 은혜가 점령했는가하면 시간이 흐르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를 뛰어넘어서 죄 된 욕망이 지배합니다. 그런 격전지와 같습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을 때 샬렘해졌던 그 온전한 마음을 기도를 통해서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으니까 한 순간 말씀을 들으면서 ‘참 좋다’하지만 삶이 변하지 않는데 좋아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다음 주일에 와서 그 좋은 것 한번 경험할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몇 번은 허락하실 지 모르지만 그는 결국 그 마음의 감동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그런 친교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머릿속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될텐데’ ‘이렇게 혼란스럽게 살면 안 되는데’ ‘하나님을 만나야 될 텐데. 뭔가 나도 변화되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생각에서만 만나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이 바뀌기 위해서는 그런 생각 가지고는 안됩니다. 우리가 인격적으로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온 영혼이 그분을 만나고 그분에 의해서 압도되어야 합니다.
백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계속 ‘주님을 만나야 할텐데’ ‘나도 기도생활 열렬히 했으면’ 하고 설교를 듣는 동안 머리가 계속 움직이지만 집에 돌아가서 바쁜 사업으로 일터를 돌아 치면서 세상에 묻혀서 생활하면 스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녹이 잔뜩 끼어서 주일날 다시 오는 것입니다. 한참 털어 내면 그제야 ‘그래 만나기는 만나야 될텐데. 어떻하나. 변화가 되었으면 좋겠는데’하고 세상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천사가 ‘천국에 갔으면 좋을 텐데’하고 지옥으로 보낼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하나님을 구하는 그 마음과 기도하는 마음이 동일합니다.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 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그런 고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기타 치며 노래만 부르는 사람은 안 만나고 싶은 것입니다. 군대 안가고 람보 보는 사람과 똑같은 것입니다. 군대 가라고 하니까 컴퓨터로 전쟁 게임 하는 사람과 똑같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기도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의 친교를 확보하고 계셨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니 우리 주님이 사셨던 그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었을까요? 그야말로 사도 바울이 고백한 바와 같이 “환난이나 적신 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하는 끊어질 수 없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친교 속에서 예수님께서 사셨기 때문에, 주님께 진노를 당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시는 그 순간에도,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지 않아도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아빠 되심을 느끼면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이렇게 정겹게 부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기도하십시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열심히 기도해서 유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굴 까요? 제가 지금 뭘 기도하라는 것입니까? 교회가 빨리 지어져야 하니까 교회 지어지는 수단으로 여러분들에게 기도하라고 합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간절히 원하는 것은 여러분들 자신의 영혼의 곤궁함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노회에 갔더니 ‘몸은 나와 있어도 마음은 성전 건축에 있지요?’라고 질문했다. 아 니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이 잘 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교회당은 하나님께서 잘 해주실 것이니 하나님께 맡기고 제 마음속에 오히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생각은 여러분들이 참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대로 목양을 받고 진실한 사람이 되어서 곤고한 영혼들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찬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당은 잘 지어졌는데 하나님 없는 사람이 그 교회당을 가득 채운다면 그 교회당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슨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그 교회당을 그렇게 지어서 값이 오르면 팔아서 나중에 나눠서 흩어지겠습니까? 목회자의 큰 영광인 것처럼 얘기하는데 정말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한 공간일 뿐입니다.
(예화: 집사님 몇 분이 교회를 위해서 왜 특별히 기도하도록 하지 않느냐고 질문해 왔 다)
제 솔직한 심정은 예배당 짓는 것이 급하고 그것은 꼭 이루어져야 하고 이 책임을 맡은 일꾼들이 밤잠을 설치면서 온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당을 짓고 이사를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지만, 심지어 예배당을 위해서 마음을 너무 많이 빼앗기다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정직한 영혼의 상태를 헤아리지 못한 일 조차도 저는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저도 사람들 내모는데 재주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배당은 꼭 지어져야 합니다. 우리 더 많이 기도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맡아서 수고하는 사람들이 성령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예배당이 지어지면서 세상과 타협하는 추호의 불의도 없이 깨끗하게 지어져야 합니다. 모든 우리 후손들이 보기에 일종의 탈법이나 편법 하나 없이 정직하게 지어졌을 때 비로소 그 헌당이 헌당이 되는 것이지 은행 빚만 갚는다고 헌당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데 지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안 지어지면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지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니 그 일꾼들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좋은 신자가 되도록 여러분들의 영혼의 진실한 변화가 찾아오는 것보다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보십시오. 오늘 우리들이 이제껏 살핀 두 가지 진리를 다시 한번 상기하고 싶습니다. 도저히 기도하실 수 없는 상황에서 주님은 기도의 말문을 여셨습니다. 우리는 주님보다는 낫습니다. 상황의 핑계를 대지 말고, 환경의 핑계를 대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극한 고통 속에서도 주님이 잃어버리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와의 친밀함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했고 또 기도생활 속에서 그런 친밀함 들을 유지하셨기에 십자가를 지고 승리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사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2.십자가에서 남긴 첫 기도②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上)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첫 번째 말씀이 기도였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상기하면서 지난주에 두 가지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는 “예수께서 가라사대”를 통해 기도하실 수 없는 십자가에 매달린 상황 속에서 기도하신 사실을 살펴보았고 “아버지여”라고 하는 대목에서 상황이 끊어놓을 수 없는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서 사셨던 예수님의 내면의 세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본격적인 기도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남기신 그 첫 번째 말씀이 기도였고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은 저희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아버지를 향한 탄원이었습니다.
이것은 크게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전해주는데, 첫째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죄에 대한 용서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두 번째는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비는 기도 속에서 우리가 서로 용서하며 살아야 할 교훈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로 예수님께서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는 이 기도를 드리셨을 때에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간악한 병정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형장에까지 끌고 갔고 그리고 그들과 함께 결탁한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에게 사주를 받은 수많은 어리석은 백성들이 합작을 해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는 데에 내어주게 되었고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였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은 개인적으로 매달리신 것이 아니라 메시아로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릴 때에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에 대한 대속주로서 십자가에 매달리고 계신 것입니다.
지난주에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 당하신 그 견디기 힘든 많은 고난과 견디기 힘든 그 통증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체험한 바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금 십자가에서 경험하고 있는 그 죽음의 형벌은 바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죄 용서를 받지 못할 때에 당하게 될 고난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이신데 생명이신 그분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그런 깊은 고난의 형벌을 당하시면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 많은 죄인들이 만약에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이 끔찍한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을 아셨기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고난에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죄 용서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형벌 아래로 들어가게 될 죄인들을 위해 중보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런 기도를 남김으로 말미암아 후세의 사람들에게 교훈과 모본을 끼쳐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커다란 관심이 바로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미래에 당하게 될 그 형벌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며 중보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최대의 관심은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그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에 우리가 태어난 그 사실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비록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그가 이 세상에서 온갖 소유를 누리고, 많은 권위를 손에 쥐고 있고,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죄 용서함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와 이 세상에 잠시 있다가 사라져 가는 버러지와 같은 미물들과의 차이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이후로 하나님의 형상을 거의 모두 잃어버렸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의 짐승과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할 수도 없고 창조주 하나님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짐승과 다름없는 본성 속에서 살게 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창조주의 영광을 이 세상의 썩어질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꾼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벌 아래 있게 되었고 진노 아래서 태어나서 형벌 속에 살아져갈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 인간들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죄의 용서를 받는 문제였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용서를 받는 그것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이 때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실 상 구원은 실은 그들의 눈에 가려져 있었고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밝히 드러났던 드러나지 않았던 그들은 이미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형벌 아래 있는 후손으로서 하나님 앞에 당할 형벌을 보장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당하게 될 고난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거절한 오늘날의 많은 죄인들이 당하게 될 고난에 방불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지옥의 고통을 맛보셨으며 그 고통이 자신의 몸 속에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 바로 십자가에 매달린 이 정사의 사건입니다. 이 십자가에 매달리는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영혼 깊은 곳에서 지옥의 고통이 무엇인가를 혁혁히 경험하게 되셨고 그 고통이 바로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 구원받기를 기대해야 할 그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죄 용서를 받지 못한다면 당하게 될 고난과 방불하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깊이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계시는 동안에 너무나 여러 차례 이 지상에 있는 우리들의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하셨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갈망하며 우리를 위해 중보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에서 우리들이 당하게 될 형벌을 생생하게 당하시면서 기도할 때만큼 생생하게 우리의 고난과 그리고 하나님의 형벌의 의미를 생생하게 느끼시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 적은 없으셨을 것입니다.
죄인들이 당하게 될 고난을 몸소 십자가에 당하시면서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죄 사함을 받는 것만이 당신이 대신 당하고 있는 이 고통스러운 형벌을 면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때에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그 무엇보다도 심각하게 밀려드는 커다란 명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죄 사함을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펴기만 하면 성경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용서받았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형벌을 당하시면 서도, 우리가 당해야 할 형벌을 한 몸에 당하시며 모질고 쓰라린 고난 가운데 죽어 가시면서도, 당신의 육신의 고난을 아랑곳하지 않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으면 당하게 될 우리가 받을 형편을 인해서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지 않으실 수 없었던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는 이유였습니다.
사랑이 아니면 누가 그 형벌을 느낄 수 있겠으며 사랑이 아니면 누가 당신의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직 우리에게 찾아오지도 않은 죽음을 인해서 우리를 염려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극명하게 드러난 가장 아름답고 선명한 표증이요 보증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안 사람들이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모든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자기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을 느껴본 사람들이 아니면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한갓 피상적인 증거에 불과 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나타났고 하나님 자신도 십자가 말고 다른 것으로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묻는 자들에게 우리는 십자가의 진리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묻는 죄인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옥체가 부서지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분의 마음속에 있었던 가장 커다란 관심은 우리들이 당하게 될 십자가의 형벌을 인한 고통이었다’고 우리는 말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십자가에서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 받지 못한다면 당하게 될 엄중한 심판을 한 몸 한 마음에 느끼셨기 때문에 바로 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중보하시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 각자가 그것을 느끼든지 느끼지 못하든지 그것은 개개인의 영적인 상태와 영혼의 문제이고 실상에 있어서는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이런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을 때 그렇게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했던 대상은 누구였을까요? 적용에 따르는 이차적인 대상은 우리들일 수 있겠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구하며 저들은 자기의 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고 변명도 되지 않는 변명을 하나님 앞에 하시면서 까지 저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자극하시려고 했던 그 일차적인 대상은 바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채 아직까지도 양손에 못과 망치를 들고 있는 그 군병들이었으며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빌라도의 뜰에서 소리치며 주먹을 불끈 쥐었던 수많은 무리들이었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죄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면 누가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전해주는 이가 없어서 아직 십자가 앞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아직까지도 누군가가 그에게 우리는 죄인이며 우리의 인생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하나님의 죄 용서를 받는 것이며 그 사죄함을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자가 없어서 아직까지도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며 주의 용서의 은혜를 구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이 얼마나 많이 넘쳤을까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자기를 위해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그것은 전혀 부당한 것이었으며 사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들이며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십자가의 모진 못 박힘의 고난은 자신들이 당하여야 했던 고난이라는 사실을 안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고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구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본 사람들, 자기의 아들조차도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을 때에 그 아들을 깨트려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진노를 그 십자가에서 경험한 사람들, 그렇게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형벌 당하게 하심으로 실상은 그 십자가를 지고 죽었어야 할 우리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인가 다른 인생의 목표가 있어야 하고 인생을 바라보는 또 다른 변화된 시야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용서라고 하는 시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형벌을 당하고 죽으신 것은 결국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의 다리를 놓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 십자가의 은혜로 죄인들을 구원하시지만 그러나 죄인들은 우리들이 전해주지 않으면 그리스도 예수께로 돌아올 수 없고 자신들의 모든 인생의 불행과 고통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 범죄 한 결과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누군가가 죄와 어둠 속에서 무디어진 그의 영혼의 하나님의 형상에 감각들을 일깨우고, 누군가가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운명을 보여 주어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대상들이기 때문에 속히 하나님께로 돌아가 죄의 용서를 받지 아니하면 그들의 인생에 있어서 참된 기쁨과 보람이 없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이 깨트려지시면 서도 용서받지 못하면 이러한 형벌 가운데 죽을 우리들을 위해 중보하신 십자가의 그 사랑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산다고 해도 그 십자가의 사랑의 빚을 갚을 수 없지만 그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의 형벌이 우리에게 주는 부채 의식은 오직 하나, 이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하는 것과 그리스도 예수 그분께서 그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니 이제는 그 공로를 믿고 받아들임으로 죄 사함을 받으라고 외치는 것만이 십자가의 사랑을 안 우리들이 숨질 때까지 해야할 고백이요 간증이고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이웃들, 우리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용서받지 못한 상태를 인해서 하나님 앞에 주님처럼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실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고난으로 인해서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 자신의 육체의 안일을 돌보지 아니하시고 오직 당신께 와서 죄 용서를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 앞에 형벌 받을 그 백성들을 인해 마음 아파 기도하며 사셨던 예수님의 이 생애의 마지막 모습처럼 우리들이 이 세상에 얼마를 살든지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보십시오. 우리 주위에는 자신이 이러한 형벌 아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이러한 십자가 아래서 구원받지 아니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하신 그 진노의 고난이 자신의 몫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삶의 진실을 알려주고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아야할 필요를 일깨워줄 수 있는 사람들은, 죄 사함을 경험한 우리들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의 사랑을 안 모든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은혜를 증거 하는 사람 되도록 우리를 새롭게 부르셨습니다. 구원받은 모든 자녀는 복음 전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해도 좋을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입을 열어서 그들이 형벌 아래 있다고 하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받아들이고 죄의 용서를 경험하는 것 이외에 아무런 소망이 그들에게 없다고 전해도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우리들이 전하는 그 복음을 멸시하고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어느 때든지 익은 곡식은 있게 마련이고 언제 어느 때든지 주님의 복음이 스치기만 하면 후루루 이삭이 떨어지듯이 복음의 세계 속으로 추수될 영혼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마지막에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서 기도하심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마름 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쳐 줄 때에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제껏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알지 못했던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십자가의 (...?).
우리들이 남보다 유식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 항복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그 복음을 사용하셔서 영혼들에게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고자 하는 열심 때문에 우리들이 그렇게 죄 사함과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아직까지 전혀 하나님을 받아들일 리가 없을 것 같은 강퍅한 죄인들과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신앙에 대해서 무감각한 것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들도 사실은 영혼 속에서 정직하고 진실한 이 용서의 복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 예수께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 속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고 하는 엄중한 진리를 가르쳐줄 사람을 그들의 영혼이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 지 모릅니다.
시대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냉담하지만, 그러나 가장 복음에 대해서 냉담한 시대에조차도 그 시대 한구석 어디에선가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수많은 영혼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아직까지도 주님께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서 자기의 죄 값을 담당하고 죽을 그 고난의 광경을 생각하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남기신 이 유언적인 모본을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유언처럼 받아들이며 이 복음을 전하면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 용서를 전하며 살아야 할 우리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남기신 용서를 비는 이 기도는 우리에게 많은 감명을 줍니다. 특별히 사람들은 예수님 자신을 브라이도리온에서 채찍질하고 침 뱉고 심문하고 욕보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채찍질하며 골고다 언덕까지 끌고 온 간악한 병정들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십자가에 못 박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실제적으로 피멍이 들도록 육체의 고통을 준 장본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잠시 후에 창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옆구리에 넣어서 허파를 지나 심장을 터트리게 하여 물과 피가 쏟아지도록 만들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아서 거기서 그리스도 예수를 능욕하고 모욕하는 말을 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능욕하고 욕보인 그 죄인들을 위해서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약에 그들이 당신을 못 박음으로 말미암아 당하게 될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용서해주시도록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고 할 것 같으면 예수님은 자기를 향해 십자가에 못 박고 능욕한 당신 자신을 향한 그들의 범죄는 이미 용서하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십자가에서 남긴 그리스도 예수의 첫 마디의 말씀, 특별히 예수님의 생애의 가장 치열했던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 앞에 타올랐던 한마디의 이 기도를 통해서 작렬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자기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빈 것도 아니었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간악한 행동에 대해서 후회하는 마음을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고 조롱하고 있었으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구경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마치 흥밋거리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들의 용서를 하나님께 탄원하는 기도는 과장을 하자면 “하나님 이들이 회개하지 않을 지라도 용서를 해주십시오”라고 하는 기도처럼 들립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이렇게 십자가에서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라고 하는 평소의 교훈대로 실천하시면서 자기를 욕보이고 능욕한 이 사람들을 그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 용서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큰 십자가의 사랑, 비할 데 없는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맺힌 것을 풀고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옹졸함과 비겁함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참 사랑을 아는 자 다운 삶의 태도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인이 아니요 단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죄인들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러줄지라도 사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 당하신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해야할 사람들입니다.
설령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이 우리를 우습게 보고 우리를 능멸하기 위해서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죄 밖에 지은 것이 없는 인간들인 우리들이 사람들에게 받는 능멸과 사람들에게 받는 고통을 인해서 분노하는 것이 어찌 가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안 사람들은 단지 이 세상에서 목숨만 붙어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속죄의 길을 여셔서 다시 한번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 자체가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이렇게 당신을 욕보인 죄인들을 십자가에서 용서하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에게 죄 지은 저들의 허물을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탄원함으로서 당신 자신이 용서의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대속자가 되어주셨던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서 배워야 할 기도의 제목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이 심판을 통해서 저희를 멸하심으로 영광을 받지 마시고 저희들을 돌이키게 하시고 저희들을 용서하심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구하는 이외에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사랑과 그 은혜의 아름다움을 안 사람들은 이처럼 숨질 때까지 수많은 사람을 용서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우리를 향한 죄과를 보고 그들의 우리를 향한 악함을 보면 우리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고, 그들의 악한 행동들은 스스로 용서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의 가치 때문에 그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할 만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들이 우리를 향해 죄 짓고 우리를 향해 허물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단지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받은 용서를 기억할수록 우리들은 용서하며 살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강퍅한 시대입니다. 너무나 쉽게 분노하고 너무나 사소한 일에 원수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후로, 죄가 들어온 이후에 미움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사랑보다 크게 역사 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맺힌 것을 풀거나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진심으로 용서해주는 일들을 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이러한 아름다운 사랑을 실현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함이었으며 오늘 하나님 앞에 부족하기 짝이 없는 죄인들이 이처럼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영생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순종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전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를 능욕보이는 사람들의 죄를 고난 속에서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들이 예수님처럼은 용서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분처럼 용서하기를 흉내내는 사람들은 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을 닮고 그를 본받는 심성 속에서 사는 것은 무한한 그분을 본받는 처절한 몸짓 속에서 이루어진 결과인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때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고통이 우리에게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그 어찌 그리스도께서 용서받지 못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용서의 길을 여시고자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통에 비유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남기신 이 첫마디의 기도가 죄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당신이 용서를 비는 기도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 당신이 매달린 십자가를 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용서의 은혜에 빚진 자임을 알고 죄와 불순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욕망과 욕망이 충돌함으로 수없이 맺히는 것들이 많은 이 세상에서, 그 마음에 상처와 매듭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의 피로 풀어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가장 고난에 넘치는 이 희생의 순간에 용서를 위한 기도를 아버지께 드리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이 이러한 십자가의 교훈을 체험하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용서를 비셨던 것을 기억하며 십자가를 볼 때마다 당신의 용서를 통해서 우리와 하나님 속에 이루고 싶었던 그 진정한 화목을 우리들이 실제로 누리면서 살기를 힘쓰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기억하면서 또한 우리의 원수들을 용서하고 우리와 맺힌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하며 그들과 하나된 삶을 하나님 눈 앞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용서의 복음, 용서의 기도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기도의 뒤를 잇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13.십자가에서 남긴 둘째 기도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5-46)”
저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신 예수님의 기도에 이어서 나오는 두 번째 기도가 오늘 읽은 십자가에서 남기신 네 번째 말씀입니다. 첫 번째는 저희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였고 또 하나는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리고 세 번째는 “아들이니이다” 그런데 둘 다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네 번째 말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신 이 부르짖음은 기도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완벽한 히브리어입니다. 그래서 ‘엘’은 ‘하나님’ ‘이’는 ‘나의’ ‘사파크’는 ‘쏟아버리다’는 뜻이고, ‘타’는 ‘당신이’, ‘니’는 ‘나를’, 그러니까 ‘당신이 나를 버리셨습니다’가 됩니다. ‘라마’는 ‘왜(why)’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어찌하여, 왜, 무슨 연고로 당신은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하기 전에, 그렇다면 지난주와 지지난 주에 이루어졌던 설교와는 판이한 장면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지지난 시간에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를 설교 한 중에서 ‘저희’가 누구냐고 어느 분이 인터넷에 질문하셨는데,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저희라고 지칭하신 것은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참여했던 그 무리들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다보고 계신 그 무리들이고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지만 어떻게 보면 그들은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 아니했더라면 예수님이 죽지 않으시고도 인간의 죄를 구속하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준 자, 빌라도를 비롯해서 예수님을 직접 끌고가서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 또 그렇게 해달라고 빌라도에게 간청하며 외치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가장 가까이 근접해 있는 원인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직접 자신들의 손과 입을 빌어서 일차적으로 역사에 생존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데 직접적으로 기여했던 사람들의 죄는 실로 크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데 직접 기여한 사람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두려워하시면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셨으니 일차적인 예수님의 중보기도의 대상자는 자기를 직접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그 사람들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넓게 확대하면 이차적인 중보기도의 대상자들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들은 단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도구로 사용된 사람들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던 것은 단지 그들의 악한 계획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인류의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했다는 점에서 그 기도는 또한 당신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이렇게 매달려서 대속의 죽음을 죽지 않으시면 안되게 만든 모든 죄인들을 위한 용서를 비는 기도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용서를 비는 기도는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복음의 선포가 이루어짐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되는 광경을 통해서 성취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저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을 때에,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복음 선포의 와중에서 구원하시고 또한 어떤 사람은 구원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이 기도가 부분적으로 응답되었다, 부분적으로 응답되지 않았다는 식의 논리를 가지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간절히 도고하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할 때에는 이 죄 가운데 죽어 가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연민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그분의 기도는 구원받을 사람들을 향해서, 복음을 받아들일 사람들에 대해서 유효한 기도였다는 것은 우리들이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의 응답으로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답변입니다.
지지난 시간에 우리들이 그 문제를 다루면서 “아버지여”하는 구절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조차도 아버지와 하나된, 연합된 마음을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고 그 일체감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보면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기도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저 사람들을 버리십니까?”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여기에서는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합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읽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에 의해서 외면 당하고 버림받아서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된 고통을 느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식 어린 절규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지지난 주에 설교한 그 십자가의 사건과 어떻게 조화가 되겠습니까? 우리들이 여기에서 기억해야 될 것은 제가 설교에서도 여러 번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나님이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엄연한 사실인데, 실제로 죄 가운데 있는 죄인이 실제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죄는 미워하시지만 자기는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실제로 분리해서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죄인이 진정으로 회개해서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심을 받아서 용납되는 것을 본인 자신이 경험하기 전까지는 죄를 향한 진노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나누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라고 하는 시리즈를 한 적이 있는데, 하나님이 죄는 미워하시고 죄인은 사랑하신다고 우리는 흔히 말하지만, 실제로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의 경험 속에서는 그것이 분리되어서 느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진노는 곧 죄인인 자기에 대한 진노이지 그렇게 나누어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었습니다. 잘못 들으면 복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니냐고 하는데, 지금 설명 드리는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깊이 회개하고 그 죄의 용서를 경험할 때에는 그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용납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확실히 그 두 가지가 분리된다고 하는 사실을 압니다. 분리된다고 하지 않으면 논리가 안 맞습니다. 죄를 지은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그 죄도 사랑하신다고 해석하면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죄인이 죄로부터 깊이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면 그 죄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살았을 때는 그 죄가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회개를 경험하고 하나님과의 다바크의 연합 속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기가 오랫동안 사랑했던 그 죄가 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분리해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경험 자체가 그것을 그렇게 말해줍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고 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죄와 자신이 일체를 이룹니다. 나와 죄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죄가 내 안에 내가 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깊은 은혜 속으로 들어가 보면 자기와 죄가 분리됩니다. 그 때 죄는 자꾸 자기 속에서 겉돕니다. 그리고 객관적인 실체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때는 내가 주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둘 중의 하나입니다. 죄님 내 안에 나 죄 안에 있든지,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잘 정리해 두어야 합니다.
실제로 죄를 미워하고 죄인을 사랑하시는, 그렇게 분리해서 다루시는 것 같은 뚜렷한 경험은 회개를 하고 내가 주님과 연합되고 죄가 객관적인 실체처럼 느껴질 때에 비로소 죄에 대한 진노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누어져서 경험되는 것이지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여기에서 왜 필요하냐면 여기서 맛보는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철저한 분리, ‘사파크’ ‘버리다’는 어떤 강렬한 혐오감과 미움 때문에 떨쳐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예수님이 그것을 경험하시는 것인데 여기에서 경험하시는 죄로 말미암는 철저한 버림받으심은 애처롭게도 예수님 자신의 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특수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고난을 받고 주를 위해서 순교의 자리에 가도 예수님의 생애와 자신의 생애를 비교하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의 질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신 분이시지만 죄 없으신 분이고 하나님과의 불화를 모르시던 분이었기 때문에 그분이 당하시던 그 고난은 모릅니다. 그래서 어느 주석가가 ‘신자는 영원히 예수님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지옥에나 가면 이해를 하는데 신자가 지옥에 갈리는 없으니까 영원히 예수님의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고 징벌을 받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이 예수님은 사실 당신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은 죄를 모두 짊어지고 대속 제물로서 하나님께 죄를 짊어진 바 어린양이라고 간주되어서 형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죄에 대한 미움과 당신 자신에 대한 버림받음이 분리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 짊어지셨을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느꼈다고 할 것 같으면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은 그것을 얼마나 또렷이 느끼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때에 당신 자신은 순결하신 분이었는데 우리 자신의 죄를 다 짊어지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진 대속제물로, 어린양으로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이 왜 미우시겠습니까? 당신의 뜻을 이루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대속제물로서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형벌을 당하시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이 왜 미우시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그 죄를 향해서 하나님이 진노의 잔을 쏟아 부으시면서 그를 징벌하실 때에 예수님은 죄에 대한 형벌과 당신 자신에 대한 형벌을 분리해서 생각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구약의 제사를 보더라도 명백합니다. 어린양이 기도를 받고 죄짐진 어린양이 되어서 형벌을 당하고 성전 뜰에서 죽어갈 때 죽어 가는 제물이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었겠습니까? ‘내가 지금 당하는 이 형벌은 죄에 대한 것이고 사실 나는 사랑한다’고 느끼면서 피 흘리며 죽어가겠습니까? 우리들이 이것을 통해서 받게 되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기도하는 중보 기도의 세계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이렇게 죄를 짊어지시고 중보자로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는 이 독특한 기도는 예수님 이외에는 누구도 드릴 수 없는 기도였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상 그 전에도 그렇고 후에도 당신 자신이 제물이 되어서 그 죄짐을 짊어지고 그들을 위해서 중보하고 기도하실 수 있는 분이 예수님 한 분밖에 없으셨기 때문에 이렇게 동일하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들이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의 짐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예수님의 이 모습과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그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거나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그들의 신앙과 상관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불러올 수 있다는 믿음을 우리는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용서는 개인의 믿음을 통해서 오는 것이지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중보하는 기도를 통해서 용서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충분히 교리적으로 인정하면서, 우리의 기도의 경험은 이런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누군가의 죄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그 죄인을 위한 우리의 기도에 성령이 역사하시면 우리들이 기도할 때에 마치 그들이 지은 죄가 나의 죄인 것처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통회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죄를 위해서 눈물 흘리고 기도함으로 그가 저절로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진정한 중보기도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죄를 짓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그를 위해서 중보할 때에 그 죄가 마치 지금 자기가 하나님 앞에 짓고 있는 죄처럼 느껴지게 만들어서 자기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앙의 세계에 살면서 그 죄의 영향력이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애통해 하면서 회개하는 중보기도의 은혜를 하나님께서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경험되는 공통된 경험이 두 가지인데 일단 그 중보기도가 끝나고 나면 하나님과의 놀라운 친밀함, 평화를 기도하는 우리로서 하나님과의 우리 사이에 경험하지만, 그러나 그 기도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는 정작 죄를 지은 당사자도 느낄 수 없는 그 죄로 말미암는 깊은 고통을 중보기도하는 우리 자신이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를 마치 자기의 죄인 것처럼 깊이 애통하며 기도하게 하시고, 그런 중보기도를 통해서 정작 죄 지은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양심의 강렬한 가책을 받아서 회심에 이르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이렇게 하나님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가던 죄인들이 깊이 회개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는 강력한 회심의 역사가 있기 전에는 거의 대부분 그러한 회심의 역사를 위해서 열렬하게 중보하며 기도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봐도 그렇고 역사를 봐도 그렇고 죄인들을 회개하게 하는 이 강력한 회심의 역사는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원하실 때 그 일을 하시고 하나님이 그만두고 싶으실 때 그만두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항상 자기의 이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기 전에 그런 일들을 행하실 조짐들을 먼저 보여주시는데 그 조짐은 자기의 죄를 인해서도 별로 애통해하지 않던 영혼들을 일깨우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보고 주 앞에 뉘우친 다음에는, 죄 가운데 살아가는 많은 지체들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그들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눈물 흘리도록 만들어주는 중보기도의 강한 섬김을 있게 하시는 것이 바로 이러한 위대한 회심의 역사의 징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건강함은 그 사람이 얼마나 자기처럼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죄인들을 위해서 열렬하게 중보하며 기도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는 예수님의 이 기도는 의심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회의에서 오는 불 신앙의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시지만 육체에 있어서는 인성을 입으셨던 참사람이셨던 예수님의 연약성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그리고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다른 사람들의 죄와 자신들이 하나가 되어서 좋으신 하나님의 징벌 아래 있는 경험은 예수님이셨지만 이것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진노하시는, 그 죄를 짊어지신 것이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님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그 죄에 대한 진노를 당신 자신이 온몸으로 함께 느끼시는 것을 경험하시면서, 탄식을 하나님 앞에 토해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지금 지고 있는 십자가를 불평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순결한 육체를 입으신 참사람이신 예수님의 몸과 영혼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당신께서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구속하여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에 대한 진노를 한 몸에 감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향한 고통을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육체적으로 피 흘리고 죽으시는 것도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인데 그 위에 한번 더 보태어서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버림받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 당신은 하나님의 대적이 된 것 같은 형벌을 한 몸에 감당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희생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형벌을 흉내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주님을 위해서 일평생 흐트러지지 않는 결음으로 고난을 감당하며 믿음의 싸움을 다 싸운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감히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고난에 동참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분이 당하신 고난의 그 질과 그분의 희생적인 십자가의 죽으심에 감화를 입고 뒤따라가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이 고난은 질적인 차이가 그렇게 극심한 것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팍다니”하고 부르짖으신 이 처절한 버림받으신 주님의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 고난은 흉내낼 수 없어도 한 때 주님을 등지고 살아가던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해 이렇게 우리의 죄로 인해서 고통을 한 몸에 당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로 데려가셨던 것처럼 그 사랑을 입어 구속함을 받은 사람은 우리들이 또다시 아직까지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구속의 은혜를 모르고 주님을 거스르며 살아가고 있는 죄인들과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용서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의 사랑 사이에 또 다른 의미의 중보자가 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구속할 수 있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고 그 분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구속하는 유일한 중보자이시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중보자가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고, 그를 믿음으로서 너희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중보의 위대한 사실을 알려주는 또 다른 의미의 중보의 전파자로서 우리가 받아야 할 이 기도의 고난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믿은 하나님의 자녀의 눈에 이렇게 죄 가운데 살아가는 백성들을 향한 순전한 기도의 눈물이 흐르면 그 눈물은 모아져서 불신자들 가운데 타오르고 있는 지옥의 불길을 끄는 훌륭한 물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 이미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하고 바로 하나님을 거절하고 믿지 아니하는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우리들이 먼저 깊이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 중보하고 눈물 흘리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의 세계는 바싹 마른 들판과 같아서 한번 붙은 열망의 불길을 끌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가족들의 구원의 경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믿지 않는 집안에서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온갖 핍박과 오해 속에서 고난을 받으며 외롭게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이 오랜 세월이 흘러 온 가족이 함께 교회 나오게 될 때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여러 번 죽었다가 다신 살아난 사람입니다. 가족들의 영혼을 부둥켜안고 그들의 죄와 허물이 자기의 죄인 것처럼 그들이 당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자신의 몫인 것처럼 고통 가운데 몸부림치며 저희의 영혼을 구원해달라고 부르짖은 날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자기의 어머니,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하는 완전한 자기 버림의 자리에까지 내려간 사람들이 그중 대부분입니다. 복음을 전해서 많은 사람은 구해도 자기의 가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할 때에 이런 고통은 배나 더 크게 나타납니다.
흐르는 눈물 타는 목마름 피로 물든 십자가 위에
하늘을 향해 기도하시는 버림받은 주님의 영혼
오 나의 주님 용서하소서 죄인 위해 고난 당하셨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광경, “엘리 엘리 라마 사팍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해서 나를 버리십니까” 라고 하는 이 처절한 절규는 우리가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면서 남긴 이 기도는 우리가 이런 정신으로 아직까지도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구속의 길을 열었지만 이 복음을 듣지 못해서 마음을 강퍅하게 세움으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있는 이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왜 오늘날 현대 교회는 열심히 교인들을 조직하고 동력화해서 많이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도 많이 보내고 전도를 많이 하는데도 사람들이 왜 구원받지 못할까?’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러한 답들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복음의 전파가 이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이라고 복음의 내용을 가지고 문제를 삼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시대 사람들은 너무나 개화한 시대에 살기 때문에 원시적인 방법인 말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별로 어필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날에는 현란한 형상과 영상매체를 통해서 사람들이 매료되고 있기 때문에 이미 말을 통해서 보이지도 않는 언어의 추리를 통해서 어떤 진리를 전달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구닥다리이다. 이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담대한 사람들은 오늘 우리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의 복음 전파의 노력이 매우 효과가 낮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 성경에 예언한 바와 같이 이 시대의 사람들이 다른 어떤 시대의 사람들보다도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모두 어느 정도는 일리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이고 그 중의 어떤 것들은 성경의 근거를 또한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이것은 모두 마지막에 해야할 이야기입니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렇게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서 노력을 한다고 할지라도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은 단지 복음의 내용이 어리석기 때문이나 전달의 매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가 현명한 도였던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지혜로운 것이라고 이 세상 사람들이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들려졌을 때에 세상 사람들이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냐? 인간의 모든 지혜를 초월하는 놀랍게 지혜로운 복음이다’라고 하는 그런 인상을 사람들에게 받았던 적이 있습니까?
2천년 전에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는 어리석었습니다. 2천년으로부터 7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사야 선지자의 시대로 간다고 하더라도 “누가 우리의 전한 것을 믿었느뇨”하고 항상 한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시대가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했고 지혜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도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우리가 장본인 아닙니까? 예수님이 사대성인 중 한 사람이라고 하면 마음에는 안 들지만 ‘같은 동양 사람이니까 하나 넣어주지’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그분 없이는 우리의 인생도 없고 구원도 없다’고 했을 때는 너무 편협한 예수쟁이들이 편견이라고 생각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미련한 도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열심히 전파하고 이렇게 새로운 매체를 간구하고 수없이 복음을 전파하려고 애를 써도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마지막에나 말할 수 있는 이야깁니다-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십시오.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언제나 있었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심지어는 이미 오셔서 자기와 함께 하고 있는 성령의 역사만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이미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니까 우리는 이제 이기는 것밖에는 더 이상 볼일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고 우리와 성령이 함께 계셔서 놀라운 역사와 표증들을 보여주시는데도 그들은 더 많이 기도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해주실 것과 그리고 그들을 구원할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는 것과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안 자신들은 주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과 그 사랑을 모르고 무지하게 살아가는 백성들 사이에서 애통하며 중보하며 그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자기 고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항상 복음 선포에 놀라운 성령의 능력을 가져왔고 그 놀라운 능력이 사람들에게 변화의 역사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훈은 이것입니다. 그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우리들이 충분히 그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로 희생한 적도 없으면서, 또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쥐꼬리만큼 하고 간단하게 ‘저들이 복음을 듣지 않는 것은 저들 자신의 강퍅한 죄 때문이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강퍅하기로 말하면 지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 장본인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 그들을 위해서 변명하시면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자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용서의 은혜를 주시기를 아버지께 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생동안을 기도하시는 생애를 사시면서 우리를 위해 사시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까지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의 죄를 짊어지고 고통 하시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광경을 우리는 여기에서 만납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예수님의 이 고난을 흉내낼 수는 없지만 주님이 이러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미 열어놓은 하나님과의 화목의 길로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들,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 우리의 사랑하는 지체들, 복음을 열심히 전했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도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 그 영혼들이 바로 우리의 기도의 부족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들의 죄를 우리의 죄인 것처럼 짊어지고 그들을 위해 중보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당하는 고난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당연하게 받으면서 이 죄인들을 위해서 간구하고 기도하는 그런 삶을 사는 그런 사랑하는 지체들, 그런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4.십자가에서 남긴 셋째 기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中)”
예수님이 남기신 마지막의 기도는 동시에 십자가에서 남긴 마지막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말씀이었습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하는 아주 간단한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직전에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 후에 “예수께서 운명하시다”는 성경구절로 미루어 볼 때 마지막 남기신 여섯 번째 말씀,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과 여기에 기록되어있는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라는 이 기도는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예수님의 의미심장한 마지막 말씀을 가지고 우리 함께 은혜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말씀이 기도였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도전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일 먼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남기신 말씀은 아주 명백하게 기록되어있으니, 그것은 바로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합니다”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말씀이 기도였다고 하는 사실 자체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당신 자신의 생애를 기도로 마무리 하셨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성도의 삶에 비춰볼 때에도 자연스러운 귀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만일 단 5분 정도의 시간이 생애의 마지막에 주어진다면 그 시간에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보고싶은 사람을 만나도 죽음으로 갈라지는 작별의 설움을 달래기에 5분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각이 있는 모든 성도들은 마지막 5분이 자신에게 주어진다면 하나님 앞에 기도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하신 말씀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아니고 남겨두신 영혼들에 대한 부탁도 아니고 심지어는 당신 자신의 혈육을 향한 작별의 말씀도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기도였다고 하는 사실은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기도의 생애였기 때문에 이 기도에 의해서 당신 자신의 생애를 마무리하실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느 가문에서 태어나고 또 어떤 혈통을 받아서 태어났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삶의 여정입니다. 그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실제로 이 세상에 있을 때 어떻게 살았나 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산 것만큼 중요한 것은 죽을 때 그가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악한 왕들을 지칭할 때 아끼는 자 없이 죽었다는 구절이 역대기에 몇 차례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는 물론이요 사람에게 괴임을 받지 못해서 그가 죽었으나 그의 죽음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에서 임종을 맞이하였더라 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의 마지막을 기도로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신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죽으실 때에 기도로 죽으실 수 있었던 것은 사시는 동안에 기도 속에서 사셨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로 자신의 생애를 마감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인생의 마지막 짧은 순간이 주어졌을 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러나 그가 실제로 인생의 짧은 마지막 순간을 그렇게 기도로 마무리 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평소의 소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살아온 영적 생활의 여정과 관련된 것입니다.
(예화: 어느 신학교 구약학 교수가 큰 병에 걸려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는데, 무의식의 세계 속에 서 시편 1편을 히브리어로 낭송하였다는 이야기)
장구한 세월 동안을 그 습관 속에서 말씀의 감화를 받으면서 살았기 때문에 자기의 의식의 세계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까지도 모두 지배하는 것입니다.
(예화: 챨스 스펄전 목사가 너무 일이 많아 설교준비를 못하고 안타깝게 잠이 들었는데 잠꼬대로 시편을 설교하는 것을 그 아내가 받아 적었다는 내용)
의식의 세계 속에서 워낙 풍부하게 경험한 것이 무의식에까지 흘러 들어가서 무의식의 세계조차도 지배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뭔가에 몰두해서 그 속에서 일평생을 살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화: 한 피아니스트의 집에 불이 났는데 그가 피아노를 2층에서부터 들고 내려왔다는 이야기)
깊이 집중할 때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의 경우라면 혼절을 하면서 이 십자가에서 의식세계와 무의식 세계를 넘나들면서 죽어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처절하게 죽어 가는 극단적인 고통의 상황, 마지막에는 그 힘이 모두 진하여서 죽게 되는 절명 직전의 상황에서 애가 타게- 그것도 큰 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하고 돌아가실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그분이 기도의 생애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선택하시고 싶으십니까? 하나는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긴 세월을 하나님의 일을 정말 많이 하고 뛰어나게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고 놀랍게 쓰임을 받다가 마지막에 하나님께 거의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인생을 마치고 싶습니까? 두 번째로 살아있는 날 동안에 실수도 많고 실패도 많았지만 인생의 마지막 때에라도 주님을 깊이 만나서 더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주님의 깊은 축복과 사랑 가운데 미끄러지듯이 주님의 품으로 들어가고 싶으십니까? 더 좋은 것은 젊은 시절에 주님을 만나서 계속 주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마지막에 죽는 것일 것입니다.
(예화: 친구의 아버지가 군인으로 교회의 장로님이셨는데, 교회의 어려운 일들 속에 실족하셔서 말년에 신앙생활을 잘 못하시다가 불치의 병을 앓게 되셨는데 죽음이 임박했을 때 하나님 께서 그분을 만져주셨다. 병상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깊이 회개하고 가족들이 찬 송하고 예배하는 중 지극히 평화로운 얼굴로 자녀들에게 또렷하게 유언을 하셨다는 이야 기 -이 사건을 계기로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분이 진작 예수님을 만나고 일평생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기다가 영광 가운데 죽으신 것만은 못하지만, 마지막에 주님이 그렇게 만져주심을 경험하고 미끄러지듯이 인생을 마감할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은 우리 모두가 사모해야할 축복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은 일생을 공들여서 사는 것은 마지막 죽을 때 미끄러지듯이 주님의 품에 안겨 들어가는 이러한 영광스러운 죽음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기도 가운데 교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마지막 한 순간에 기도로서 당신 자신의 죽음을 마무리하시면서 까지, 그런 하나님과의 평화와 친교를 누리시는데 죽음의 위협과 사망의 고통조차도 그 친교를 방해할 수 없을 정도의 세계를 유지하시기까지 사셨던 그 험난한 기도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주 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예수님의 생애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방해와 고난에 시달린 생애였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예수님에 대한 유혹과 도전들, 핍박들은 훨씬 더 강렬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안락한 수도사적인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항상 문제가 없는 숲 속에 홀로 피신하신 것이 아니라 문제가 많은 사람들 속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의 힘을 다 소진하시며 섬기는 그야말로 분투하며 고생하신 생애였습니다. 세상의 환경과 여러 가지 여건들이 그분을 도와주지 않았어도 그분은 부단히, 열심히 자기를 하나님 앞에 바치는 기도의 헌신에 드렸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부수는, 열심히 기도에 바쳐진 생애를 사셨고 결국은 그 꿋꿋한 헌신, 그 연단 된 기도에 자기 자신을 드리는 기도의 헌신을 이 세상에 있는 환경들이 감당할 수 없었고, 그러한 불굴의 헌신의 삶을 사셨던 기도하시는 생애는 결국 마지막에 사망의 고통조차도 그분으로 하여금 기도를 멈추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생애 전체가 기도의 생애셨기 때문에 인생의 이 마지막에서도 그분은 기도하면서도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어줍지 않은 성경지식, 그리고 쓰레기 같은 자기 의를 붙들고 거들먹거리면서 신앙생활 하다가는 마지막에 ‘나의 영혼을 받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대신에 이를 갈고 슬피 울면서 죽음으로 끌려갈지도 모릅니다. 두려움으로 벌벌 떨며 사망 너머에 기다리시는 주님을 뵈옵기를 두려워하며 슬피 울면서 죽음 가운데로 끌려갈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죽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기도는 결국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가지셨던 그 관계의 친밀함이 어떤 정도인지를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평소에 주님께서 누리면서 사셨던 친교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예수님의 이 본을 배우면서,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을 이렇게 영광 가운데 마무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기도로 분투하면서 사신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본받아서 기도하는 생애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의 제목입니다. 예수님이 이제껏 까지 남기신 기도는 사실은 개인적인 기도보다는 공적인 기도였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는 기도나 나라이 임하게 해달라는 기도나 아니면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나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나 시험에서 우리를 구해달라는 기도나 모두 개인적인 기도라기 보다는 공동체적인 기도였고 공동체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영혼 하나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 예수님의 기도의 생애를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마지막 순간에도 예수님이 기도하셔야 할 제목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직까지도 요한을 제외하고는 도망간 그 제자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의 계획, 남겨둔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던 수많은 백성들, 그리고 남겨진 구원의 위대한 계획들, 모두 주님에게는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순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라고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신 시점이 바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직후였다는 사실을 미루어보면 결국은 예수님이 당신 자신의 사명을 모두 완수한 후에 남기신 기도가 개인적인 기도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이 지상에서 하실 일이 없으셨습니다. 일평생을 주님을 위해 사시고 영혼을 위해 사시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대속물로 주셔서 아버지와 그리고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 사이에 구속의 산길을 열어놓으셨고 그 징표로서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지면서 이제 대제사장밖에 들어갈 수 없는 그곳을 제사장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그 제사장들은 바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기에 이제 이 세상의 그 어떤 도움 없이도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보혈을 힘입어 죄인들이 살아 계신 거룩한 하나님의 존전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서 예수님의 이 지상생애의 모든 사명은 완수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님에게 남겨진 기도의 제목은 당신 자신의 영혼의 문제였습니다. “네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는 이 기도는 천당을 보내달라고 하는 기도는 아닐 것입니다. 지옥을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우러나오는 자기의 영혼의 구원을 위한 기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에 경험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경험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는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과 만나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충격이었고 비록 하나님이시지만 새로운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혼과 육체가 연합되어서 일평생을 사시다가 이제 다시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경험해야 했는데 이것도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도성인신의 사건만큼이나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런 경험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육체가 영혼으로부터 분리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분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아버지의 전적인 친교를 원했습니다. 이제 자기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이루신 일들을 다 완성하셔서 마지막에 이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이 취하게 하셨던 육신의 껍데기를 벗고,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실 때에 그 때 하나님이 허락하셨던 그 영혼 그대로 하나님께 돌아가오니 육신으로부터 분리되는 이 영혼을 긍휼히 여기셔서 특별한 친교와 사랑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연합되게 해달라고 하는 특별한 영적인 연합을 위한 간구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분 생애의 마지막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생명 있는 날 동안에 우리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많은 인연을 맺습니다. 그리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주님을 섬기고 일하면서 살아갑니다. 일생을 살면서 해놓은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어떤 때는 가슴에 찬바람이 부는 것 같은 공허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고 이렇게 젊은 시절이 지나가고 인간의 출생보다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세월이 되어 가는데 한 것이 뭐가 있는가’ 그래도 마지막에 있다면 하나님께서 생애 처음으로 교회를 세우게 하시고 여기서 여러분들을 만난 것이 제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사건이고 어떻게 보면 유일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살아있는 동안에 교회다운 교회를 한번 세우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고 살다가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죽으면 그만입니다. 죽으면 누가 저를 기억하겠습니까? 그저 몇 년은 기억하겠지만 다른 사람이 와서 목회하면서 교회는 영원히 설 것이고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집착하고 신앙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어서 그것에 연연해하면서 산다고 할지라도 이 순간 죽음이 방문하면 그 인연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리되어야 할 인연입니다. 죽음이 갈라놓을 수 없는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늘 나라에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 작별하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가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노심초사하고 상처 많은 가정이면 그 치료를 위해서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면서 마음 아려했지만 결국 죽으면 그 가족들과도 결별합니다. 내가 죽는데 누가 따라갈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연, 모든 집착, 모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한시적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만 의미가 있는 것이고 우리들이 이 세상에 숨쉬고 있는 동안에만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 후에까지 계속되어질 영원한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과의 관계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또 다른 영적인 인연 이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 두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사업이나 직장 생활을 위해서 노심초사하지만 그러나 죽음이 앞에 오면 그것도 작별입니다. 취미 생활이 너무 좋아서 주일도 까먹으면서 낚시질하러 가고 놀러 다니지만 그것도 다 살았을 때 하는 일입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면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 설 때에 마지막 남은 것은 영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죽음을 앞에 놓고 우리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그 영혼은 일생을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서 ‘죽음이 너무 두렵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내 생명을 연장시켜달라’고 말할 수도 있고 아니면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합니다’라고 기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마지막 순간에 자기의 사명을 모두 완수하셨기에 ‘오늘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하시며 죽음의 휘장을 넘어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탁월한 친교 속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가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평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면 그 일과는 결별하고 그 섬김과는 작별해도 그 섬김의 궁극적인 동기가 되었던 하나님과는 오히려 만나는 것입니다. 그 일과 작별하면서 그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사람은 섬길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그 죽음의 때에 붙들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 때문에 사귀었던 친구도 떠나고 가족들과도 죽음을 통해 결별하고, 자기가 좋아했던 일도 이제는 자기를 그렇게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건강을 잃어버리고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그 일이 좋아하지를 않습니다.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버림을 받을 상황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온 사람들은 두려워 떨어도 예수님처럼 일평생 주님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서 그것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죽음을 맞이하던지 간에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여 나의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주님 눈물로 기도했네
정결한 그 보배 피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그래서 뛰어난 하나님의 사람들은 마지막에 죽을 때에 뛰어난 죽음을 죽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기도의 영을 간직한 채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탁월한 친교의 핵심은 결국 그 기도의 영을 죽는 순간까지 간직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이 허위들을 모두 벗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주님 앞에서 주님을 섬기며 살았던 우리의 영혼 하나 달랑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우리들이 더할 나위 없는 친교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정말 내 영혼을 받아주시라’는 그런 친밀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 의지하며 살다가 죽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살아있는 날 동안에 하나님 열심히 섬기고 예수님처럼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할 수는 없을 지라도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으니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으리라”고 하는 확신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흐르는 물처럼 떠도는 구름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이 생명이 있고 기회가 있는 동안에 썩고 사라져버릴, 죽음의 위협 앞에서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없는 일시적인 것들을 위해서 살지 말고 죽음의 위협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죽음의 순간이 우리에게 현실로 닥쳐와도 조금도 두렵고 떨리지 않을 수 있도록 살아가는 그런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이 바로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도 제가 묻고 싶었습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지금 그만 오라고 부르신다면 ‘주님 감사합니다. 그래도 내가 이러이러한 것들은 주님 앞에 이루어 놓을 수 있고 죽습니다. 나를 이렇게 사용해 주셔서 내가 아니면 이룰 수 없었던 이러이러한 일들과 섬김을 다하게 해주셨으니 하나님 제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예화; 전에 다니던 교회에 20년 동안 심방만 하시며 사시던 장로님이 계셨는데, 다른 장로님이 그분께 ‘당신은 마지막에 죽으면 하나님 앞에 할말이 있지.“80평생 살면서 그중 4분의 1은 심방만 하면서 살았습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고 말 했다)
여러분에게도 비슷한 두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겼다고 기억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은 기억 못하실 수도 있고 우리는 기억이 안 되는데 주님은 기억하실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오는데 신기한 것은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훌륭하게 자기가 한 선행을 모두 기억하고 있고 선택받은 사람들은 “언제 우리가 주님을 섬겼습니까?”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어떤 위치에 있든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겼던 날들은 여러분들은 잊어버려도 하나님께는 기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들이 죽음의 휘장을 걷고 영생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주님과의 친밀한 친교를 느끼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여러 방면에서 여러 모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의의 길을 걸어가고 사업을 하면서도 인자와 공의를 사랑하고 성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유혹을 물리치면서 진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 애쓰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모든 것과 함께 여러분들에게 그런 소망을 품고 삽니다. 이 세상에는 유리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이 세상에는 흔들리고 고통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순종하려고 하지만 그럴 수 있는 힘이 없는 사람들, 또 순종할 마음은 있어도 그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여러분 자신이 모두 예외 없이 경험하였습니다.
이제 할 수 있으면 우리들이 남은 생애 동안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셔서 여러분들을 선교사로 목회자로 혹은 특별한 일꾼으로 보내실 수도 있겠지만- 정말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하고 교회다운 교회를 세워서 그 교회가 상처입고 절름발이 된 자 고통하고 쓰러져 엎드러진 사람들, 앉은뱅이 되어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눈멀고 귀 멀어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행로를 찾지 못하는 수많은 나그네와 행인과 같은 사람들을 깃들게 할 수 있는 피난처가 되게끔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데 무엇인가 기여하는 삶을 산다면 저와 여러분들의 생애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서 “네가 무엇을 하다 왔느냐?”고 물으실 때, “교회 하나 최선을 다해 섬기다가 왔습니다”고 말할 수 있는 생애를 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그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마지막 기도를 통해서 이처럼 사명을 다 감당하다가 마지막에 기도로 당신 생애를 마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 앞에 한 영혼이었습니다. 메시아도 아니고 위대한 기적을 이루셨던 큰 일꾼도 아니고 그냥 하나님의 한 아들로서 이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고 육체는 이 세상에 남겨둬 부활의 날을 기다리게 하고 자신의 영혼은 아버지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인식하면서 하나님께 자기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결국은 마지막에 이렇게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에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영혼으로 이름지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만을 남길텐데 그 때 주님 앞에 구김이 없이 서기까지 우리들은 전심으로 예수의 보혈을 의지하면서 거룩하고 정결하게 살기를 힘쓰고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힘에 지나도록 이루고 수고하면서 살아서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기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