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할 때 들으시는 하나님
(2015년 가을말씀사경회 저녁설교)
설교기간|2015년 10월 10일 - 10월 22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5년 11월 12일
목 차
1. 가까이 계신 하나님(신 4:7) 2015.10.1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
2. 은혜 받은 자이기에(시 32:6) 2015.10.2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0
3. 응답을 구하는 기도(시 39:12) 2015.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20
4. 경건한 기도가 막힐 때(막 11:25) 2015.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30
5. 기도의 집이 되게 하라(사 56:7) 2015.10.23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41
기도할 때 들으시는 하나님 1 (2015.10.1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2 (2015.10.2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3 (2015.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기도할 때 들으시는 하나님 4 (2015.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5 (2015.10.23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1 10. 19(월)저녁집회
< 가까이 계신 하나님 >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신 4:7)
I. 본문해설
- 가나안 정복 앞둔 때의 유언적 설교
- 가나안에서 율법따라 살도록 촉구함
- 이스라엘의 본성 알고 미래를 경고함
- 특히 우상숭배의 위험을 각성시킴
II. 이스라엘: 선택과 소명
-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
- 모든 민족들에게 보여줄 사명: 지혜+지식+삶
-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명: 구별됨+행복
- 다른 삶>다른 사상>다른 사랑>God
- 성취, 그 소명이 쉽지 않음: 지혜+지식+사랑
- 끊임없는 지식과 은혜를 통한 생명이 필요
-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III. 가까이 계신 하나님
- “가까이 하심과 같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4:9)
- a. 큰 나라Is b. 큰 나라도 c. 위대한Is
A. 친교를 나누심
- “가깝다” a. 친교 b. 응답: 주의 도움
- elohim의 해석 “신들이” vs “하나님께서”
- 마찬가지 결론: 이방신들과 야훼
- 언제나 우리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 불순종과 죄는 거리감과 낯섦 도입
- 인생의 문제들 때문에 멀리 느껴지는 것이 아님
- 인간의 마음과 의식 속에서 친밀함이 사라진 것임
- 자아보다 더 가까이 함께 계시는 분
- 회개와 회복의 경험 통해 친밀함을 회복함
B. 기도에 응답하심
- 하나님 백성의 가장 큰 특권은 기도임
- 기독교의 기도관은 신관과 관련됨
- 탐욕의 중동신들과 도덕적인 야훼
- “고아같이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요14:18)
- 사랑의 나타남: 친교와 도움으로써
- 이방신: 섬김 대상, 도움 능력 부족
- 기도로 하나님 의존함: 사랑+능력
- 응답 통해 당신과의 관계 알게 하심
- 궁극적으로 주 뜻 성취와 관계 심화
- 기도 통해 사랑 심화함(시116:1)
C. 언약 관계로 부르심
- 선택하신 은혜: 아브라함의 언약
- 피로 맺어진 관계: 율법과 은혜로
- 인간의 파기와 야훼의 주권적 은혜
- “십자가의 피로 화평 이루사”(골1:20)
- 기도할 수 없음도 주님과 친교의 필요룰 보여줌
- 자신이 아닌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그분께 나감
-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을 허무심”(엡 2:14)
-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한 주님과 간격을 메움
- 죽은 자 방불한 삶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 살아 있는 기도로 넘지 못할 사태는 없다
IV. 적용과 결론
- 광야의 고난 길 헤쳐 온 노인의 고백
- 죽음의 문 앞에서도 감격스런 이유
-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위로 받음
- 이제 무릎으로 일어나야 할 때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2 10. 20(화)저녁집회
< 은혜 받은 자이기에 >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시 32:6)
I. 본문해설
- 다윗이 자신의 범죄에 대해 참회하는 시
- 51편이 다급한 기도라면, 32편은 통찰과 회고
- 성도의 복: 용서+구원+지혜←기도를 통해 옴
II. 홍수가 범람할 때
- Heb."많은 물들의 일어남에도∼만지지 못하리라"
- “많은 물들 범람” 감당키 어려운 시련을 의미
- 환경적 깊음과 영혼의 깊음이 겹치는 때
- 삶 흔드심으로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
- 나단의 지적+우리아+아기의 죽음(삼하 12장)
- 온 환경이 우리를 삼킬 듯 일어날 때가 있음
- 하나님의 설득하심과 강하게 품에 안으심
- 큰물이 범람하는 위기의 때에 주님을 찾으라
III. 기도하게 하심
A. 자녀를 부르심
- hasid: 성도의 정체 "사랑 받은 자"
- 시인들의 최대 찬송 제목은 주의 선하심과 인자
- 하나님의 법과 선함과 인자함 입증
- 언약백성은 하나님의 선택적 은총을 입은 자
- "자기 아들 아끼지 않고 내어주심" (롬 8:32)
- 이미 무한한 사랑을 받은 자임을 잊지 말라
B. 기도하게 하심
- Heb. "모든 경건한 자가 기도하게 되길"
- 하나님이 기도하게끔 은혜를 주심
- 기도하려 하는 자를 할 수 있게 하심
-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한 조화
- 장작 나무의 결과 장작을 패는 사람
- 선한 일 주 은혜 없이 불가, 악한 일은 가능함
- 두려워 하라: 그릇된 독립과 잘못된 의존
- 자신을 개선하려 말고 있는 모습 rmeoo로 주께 나아감
- "이 모습 이대로 나를 받아주소서"
C. 회개하심 하심
- al zot "이것에 대해, 이 때문에"(6절)
- 은혜 받은 자가 기도하게 되기를 빌고 있음
- 그들이 기도하지 않고는 회개할 수 없기에
- 시인의 경험: 신음 속에 자복 통해 용서받음(5절)
- 기도의 문을 막는 것은 죄와 불순종
-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을 쳐∼기도가 막힘
- 시련과 침체를 통해 은혜의 삶을 갈망함
- 어떤 경우도 복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의 차이를 생각함
- 은혜로 설복하시는 하나님
IV. 적용과 결론
- 시련과 폭풍의 날에 하나님을 찾으라
- 핍절한 삶, 끊어진 하나님과 관계를 확인하라
- 어디서 떨어졌는지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3 10. 21(수)저녁집회
< 응답을 구하는 기도 >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시 39:12)
I. 본문해설
- 다윗이 말년에 지은 회고와 참회의 시
- 이미 받은 용서의 회고와 현재 자기에 대한 성찰
- 인생의 하찮음과 세상 번영 무가치
- 세상과 유한한 인생메 대해 자각함
II. 인생의 의미를 직시함
- “나그네”( ), 떠돌던 조상 회고
- 유목 민족으로서 실제로 이동 생활을 했음
- 따라서 어느 곳에 머물든지 임시 거처였음
- 그들의 진정한 고향은 약속의 땅이었음
- “더 나은 본향 사모함” 가나안 땅과 천국
- 세상에서 완전한 만족을 기대하지 말라
- “주와 함께 있는”()
- 신자는 더 나은 본향을 찾는 나그네임
III. 기도 들으시는 하나님
- 나그네 길의 큰 위로는 기도생활임
- 시편이 우리 삶 윤택하게 한 이유임
A. 부르짖는 기도
- 울부짖음의 안타까운 심정을 동반함
- a. 심적 고통 b. 마음 집중 c. 구원 갈망
- 고통 느낄때 마음의 방향이 중요함
- 인간을 항할 때 그릇된 기대와 실망
- 인생 질서의 궁극적 원인이 하나님이심
- 물이 모여서 한 곳으로 흐르는 격류처럼
- 하나님 위해 바람직한 처지에 인식을 집중함
- 당위와 현실 격차 앞에 무능함 인식
- 답답한 마음 없이 간절히 기도할 수 없음
- 마음을 모아 더 간절히 부르짖으라
B. 눈물 있는 기도
- “눈물 흘릴 때” 하나님 앞에서의 흘림
- 고통 받을 때 사람 앞에서 울지 말라
- 신앙은 사람과 세상에 강하고 주께 약하라
- 눈물: 진심의 표현, 진리에 합치하라
- 용서의 기억과 자기 죄를 아는 시인 눈물
- 범죄를 통해 진실한 신앙의 힘을 알게 됨
- 용서를 통해 하나님 사랑의 깊이를 경험하였음
- 많은 신자들이 눈물로 시련을 이겼음: 기도
IV. 적용과 결론
- 모든 삶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
-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간절한 기도로 나타냄
- 불변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
- 하나님께 내맡기기에 너무 큰 짐은 없음
- 세속으로부터 떠나 조용히 침잠해 자신에게 돌아오라
- 간절히 마음을 모아 전심으로 기도하라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4 10. 22(목)저녁집회
< 경건한 기도가 막힐 때 >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막 11:25)
I. 본문해설
- 무화과 나무가 마른 것 확인한 제자들
- 베드로에 답하며 믿음을 강조하심
- 감람산과 사해 바다를 가리킨 듯함
- 믿음의 강조 끝에 덧붙이신 교훈임
II. 경건한 기도가 막힐 때
- “서서 기도할 때” 경건한 기도 뜻함
- 자세: 땅에 엎드림, 무릎을 꿇음 등
A. 혐의가 있을 때
- “εἴ τι ἔχετε κατά τινος”
- “누군가에 대항해서 어떤 것 갖고 있다면”
- 누군가에 대항해 미움을 지속할 때
- 명백한 죄로서 기도를 할 수 없게 함
- 마음의 뜨거운 사랑과 기도의 열렬함
- 큰 믿음으로도 미움을 가지고는 기도하지 못함
- 믿음: 소극적, 용서와 사랑: 적극적
B. 그를 용서하라
- “아무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 기도의 공동체적 성격: 목표 & 과정
- 교회와 성도의 교통: 생명과 사랑의 흐름
- 이러한 연결이 전 인류에게도 있다
- 영원에 대한 무관심, 이기심, 교만이 원인
- 사랑과 생명 흐름인 성령 근심케 함
- 막힌 담은 세상에 흘러들 사랑 막음
- 용서를 통해 다시 흐르게 하신 주님
-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가능케 함
- 기도의 경험을 통해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감
- 간절한 기도 없이 자기 반성도 없음
III. 적용과 결론
- 기도는 마음의 작용이기에 은혜가 필요함
- 경건한 기도도 온전한 사랑을 대신하지 못함
- 용서와 사랑으로 기도의 문을 열라!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5 10. 23(금)저녁집회
<기도의 집이 되게 하라>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사 56:7)
I. 본문해설
- 유다왕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때의 선지자
- 주전 740년 경 소명을 받아서 예언 활동을 함
-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과 회복을 말씀하심
- 하나님의 영광과 우주적 구원 회복을 다룸
II. 이스라엘의 회복
- 1장~39장까지 이스라엘의 죄악과 심판
- 40장~66장까지 하나님 위로와 이스라엘의 회복
-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시작함: 세례요한
- 53장에서 메시야 예언 통한 구원의 계획을 보임
- 하나님은 택한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음
- 책망과 징계조차 사랑의 다른 표현임
III. 영적 회복의 때에
- 역사를 바라보는 선지자의 두 전망
a.국지적 성취 b.우주적 종말론적 성취
- 은총과 이스라엘의 회복, 하나님나라
-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과 연합함
A. 성산으로 인도하심
-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 장소를 상징
-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임
- 하나님의 선택과 독점적 은총을 상징함
-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표현
- 신약의 교회가 받을 영적인 복을 가리킴
- 당신의 집에서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
- 그 때 성전은 “기도하는 내 집” 일컬어짐
- 영적 회복은 그리스도를 통해: 진리와 생명
-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 영적 부흥 주심
B. 기도의 집이 됨
- “만민 위한 기도의 집”이라 일컫음을 받음
- 예수께서 성전 정결 사건 후 인용함(마21장, 눅1장, 요2장)
- 하나님의 나라 이루어 갈 교회의 특징임
- 기도를 개인적으로만 이해하는 경향 있음
- 기도: 교회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임을 잘 보여 줌
- 교회는 그리스도의 분신처럼 함께 살고 기도함
- 부흥은 교회의 기도를 통해 임했음
- 17세기 아일랜드 올드스톤의 제임스 그렌드닝
- 1626년 엔트림 기도회 다운 지역까지
- 기도의 집이 됨과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것의 상관성
- 한 사람 한 사람의 복음 신앙의 깊이와 기도의 진실성
- 선교운동과 행정 계획보다 중요한 것은 영적 생명임
III. 적용과 결론
- 먼저 말씀 앞에 진실하게 자신 돌아보라
- 마음을 모아 가까운 지체들과 기도로 연합하라
- 교회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께 간절히 빌라
기도할 때 들으시는 하나님 1 (2015.10.1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2 (2015.10.2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기도할 때 들으시는 하나님 1 (2015.10.19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3 (2015.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기도할 때 들으시는 하나님 4 (2015.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5 (2015.10.23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가까이 계신 하나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7)
녹취자 : 장주은
I. 본문해설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모세가 남긴 유언적인 설교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고 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이미 주신 율법을 따라 살도록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 때에 이미 나이 많아 늙은 사람이 되었고 또 이스라엘 백성을 평생 체험했기 때문에 그들의 본성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형통하게 될 때에 그들이 부패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는 심각하게 경고하였습니다.
II. 이스라엘: 선택과 소명
무엇보다도 특히 우상숭배의 위험을 아주 준엄하게 각성시켰습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우리가 읽은 본문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이스라엘의 선택과 소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 행하라고 신신당부 하면서 너희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서 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 많은 민족들이 너희를 보고 ‘이 사람들은 정말 지혜로운 민족이다, 지식이 있는 민족이구나, 이렇게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하나님 앞에 복받는 사람들이구나.’ 이렇게 칭찬을 하게 될 텐데 그것이 바로 너희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선택과 소명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은 거기에 가서 당시의 문명이 아주 발달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지혜와 지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인지를 보여줌으로서 그들을 통해서 그들과 관계 맺고 있는 하나님을 알게 하려고 하는 것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명은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많은 번영한 민족들과는 구별되는 거룩함, 그리고 그렇게 거룩한 백성들로서 죄 짓고 악을 행하지 않으면서도 방탕하지 않으면서도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 위대한 본문을 해설하기에 앞서서 이것은 이세상의 행복에 대한 충격적인 관점의 변화를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나 자신의 힘으로 이 세상에서 이런 것들을 얻고 이런 지위에 오르고 이런 물질들을 얻고 이러한 것들을 누리며 살아야지 내가 행복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내 힘으로 아무리 해도 안 됩니다. 이번에는 교회에 와서 예수님 힘으로 한번 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의 행복을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살던 그 인생의 판을 똑같이 가져와서 이 판을 예수 힘으로 한번 이루어 보려고 하는 것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하나님의 백성의 소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우리에게 가난해지라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부자가 되라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백성들과 구별됨, 내가 구별되고 싶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다보니까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안에서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선교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의 행복의 원인이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더 많은 쾌락을 누리고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누리면서 삶으로서 우리들이 행복을 느끼는 것이 전부라고 한다면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우리들이 자기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 신문을 보면서 무슨 아파트가 한 평에 7300만원입니다. 가만히 계산을 해보았습니다. 7000만원을 가지고 가면 3.3평입니다. 10평이면 7억이고 100평이면 70억인데 그 한 평에 7300만원짜리 아파트가 163대 1입니다. 바다 보이고 강 보이는 곳에 사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우울증의 원인입니다. 신경정신과 의사들이 나이든 사람들은 돌려 앉아서 산을 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러면 선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에 자신이 그 속에서 어떤 아우라를 느낍니다. 다른 곳에서 전혀 느낄 수 없는 아우라를 느낍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한 소명입니다. 그 소명을 우리도 계승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의 문제는 예수 믿기 전에 그 행복에 대한 관점, 그 판을 가지고 우리의 행복을 재려고 하니까 너무 불만이 많고 예수를 믿어도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뭐라고 하냐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보면 예수 믿는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열 다섯 살 나이에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삶을 사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매일 매일 하나님의 지식과 은혜를 통해서 영적인 생명이 우리 안에 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으면 하나도 그런 것이 부럽지 않습니다. 정말 세상이 이해해 줄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행복을 경험합니다. 그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 사랑을 체험합니다.
III. 가까이 계신 하나님
그러면서 죽음을 눈앞에 둔 이 불새출의 지도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말 잊혀지지 않을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계시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가까이 하심과 같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몇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우선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할 때에 큰 나라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옛날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의 시대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가족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하면서 이 사람들이 엄청나게 커다란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그것을 생각해서 이스라엘을 큰 나라라고 불렀을 수 있고,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큰 나라도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는 것 같이 그런 복을 받은 나라가 없다는 뜻이고, 또 하나의 가능성은 여기서 ‘크다’라는 말이 규모가 아니라 위대한 나라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주신 하나님의 큰 특권이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A. 친교를 나누심
그 첫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친교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친교를 나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깝다는 크게 세 가지인데 친교를 나누신다, 친한 사이이다, 특별히 사무가 없어도 매우 친밀한 사이이다, 만나면 기쁘고 즐거운 친교가 있는 사이다, 라는 뜻이고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요청할 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세 번째는 이스라엘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그런 친교에 하나님이 오셔서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크게 세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그 나라가 어디 있느냐, 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신이라고 번역된 그것이 히브리어로 엘로힘입니다. 그래서 해석가들은 이것을 둘로 이야기하는데 우리말 성경처럼 신이라고 번역한다면 복수이기 때문에 ‘신들’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아니면 ‘하나님’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과 아주 가까이 해주셨는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여호와가 신이시고 이방 사람들에게는 이방 신이 있다, 그런데 이방 신들이 그 이방 신을 섬기는 민족을 이렇게 가까이 해주는 신이 있느냐,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까이 해주는 것과 이방 사람들도 신을 섬기지만 그 신은 그렇게 친밀하게 사랑하는 신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이것이 올바른 해석 같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둘 다 여호와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매우 가까이 계셔서 친밀하게 대해 주셨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대해주신 민족이 어디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결론에 가서는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해석은 비슷합니다.
결국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방 사람들에게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신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신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에게 이런 친교를 나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친교를 나누는 것은 신앙 다음으로 우리의 인생에 활력을 줍니다. 슬프고 괴로울 때 누군가 이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있다는 것,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자기 일같이 한없이 기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시련 속에 있을 때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들은 인생에 있어서 신앙 다음으로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을 줍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사실 하나님 이외에 우리의 인생에 힘과 위로를 준 것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사람이 대부분 목숨을 끊을 때는 동물 때문에 목숨을 끊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개 사람 때문에 목숨을 끊습니다. 그러니까 이 친교가 얼마나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가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고 친교를 나눌 사람이 있으면 거기로부터 엄청난 위로와 용기와 힘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그렇게 당신과 깊은 친교 속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안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인생에 문제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하나님이 멀리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의 마음과 의식 속에서 하나님의 친밀함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친밀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들이 사라지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정신 이 모든 상태와 틀들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에 적합하지 않은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우리의 마음의 불결함과 죄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우리들이 소외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아보다 더 가까이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자아를 떠나서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우리가 우리를 떠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날 수 없음은 우리가 우리를 떠날 수 없음과 똑같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 안에 자의식의 분열이 생겨서 나도 내가 누군지를 알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자아보다 우리 더 가까이 계십니다.
이런 때에 결국은 이렇게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친교를 회복하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가장 중요한 길이 무엇이냐 하면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그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에게 관계의 회복을 허락하시고 스스로 그 마음을 고쳐 당신을 향하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친교입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친교가 아주 깊을 때에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 우리가 상처를 입어도 그 상처는 말할 수 없는 환희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31편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이 환난을 당할 때에 당신의 장막의 그늘 아래 그들을 숨기시고 그 곳에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피하는 사람을 위해 예비하신 비밀스러운 은혜를 그들에게 베풀어 주셔서 고난 받는 것이 나에게 유익이라, 라고 말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신앙의 힘이 아닐까요?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살다가 보면 우리의 마음대로 안됩니다. 그런 시련과 역경을 만났을 때 신앙의 힘으로 그 인생의 의미를 다시 해석하고 모든 사람들이 고통스럽고 쓴 물을 머금어야 하는 그 상황 속에서 오히려 그 속에서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당신과의 친교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그것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왜? 사랑의 힘으로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당신의 자녀들에게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가장 가까이 계셔서 언제든지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자기를 부르는 사람들에게 찾아와 다시 친교를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기도에 응답하심
두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는 특권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셨다’ 누가? 하나님이. 가까이 하신 것은 그냥 우리에게 느낌만 가까이 계신 것처럼 해 주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서 우리의 삶에 깊이 관여하시고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친히 도우시고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만날 때에는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예비해 주시고 시험 속에서 미혹을 받을 때에는 그것을 물리치고 이길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큰 특권은 기도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에게 응답해 주셔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는 믿음,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입니다.
기독교의 기도관은 신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당시 중동에 있는 많은 민족들이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 우상들을 섬기면서 살았지만 그 신들은 결코 도덕적인 신들이 아니었습니다. 탐욕으로 가득 차고 떼거지로 몰려다니면서 제사 음식이나 탐하는 그런 아주 육욕적인 신들이었습니다. 인간은 그 신들 앞에서 언제 저 신이 심술을 부릴지 몰라서 전전긍긍하고 가식으로라도 그를 섬겨야지만 삶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제사를 잘 차려서 하나님 앞에 드려도 하나님이 거들떠보시지도 않는 제사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제사를 드린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러면 그 제사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하나님에게는 모욕처럼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제물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상한 마음, 당신을 향해 깨뜨려진 순수한 사랑의 마음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결코 버리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친교와 기도에 대한 응답, 도우심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족적인 어려움을 만났을 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간절히 매달리면 하나님은 어느 민족에게도 베푸신 적이 없는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온 공동체가 함께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하나님을 향해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헌신했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다루어 가시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 어떤 어려움을 만나면 왜 하나님이 나를 돕지 않고 이렇게 나를 이런 일들을 당하게 내버려두시나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내가 당한 이 일은 나로 하여금 형통하고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될 때에 더러워진 나의 마음과 자만해진 나의 심령을 깨뜨려 당신께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구나 생각해야 합니다. 설령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칩시다. 그래도 하나님은 복수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초등학교 아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고를 쳤습니다. 여러분에게 부탁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제발 여러분의 자녀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지 말고 개념 있는 아이로 자라게 해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아이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장군이 될 수도 있고 장사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업가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구멍가게 슈퍼 아저씨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장군이 된 사람은 정치가일 필요가 없고 정치가가 된 사람이라면 장사꾼일 필요가 없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 아이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원한다고 해서 여러분의 자식들이 다 원하는 대로 되면 우리나라 대부분이 다 대통령이고 국민은 일부분이어야 합니다. 또 요새는 아이들이 전부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어보면 요리사가 되겠다고 합니다. 요리사가 사먹는 사람보다 더 많게 생겼습니다. 모든 요리사가 다 그렇게 뜹니까? 텔레비전에 나오는 얼굴 예쁘게 생긴 몇 명만 그렇게 뜨는 거지. 뭐 그렇게 판박이 하듯이 자라느냐는 말입니다. 거기다가 왜 벽돌을 던지냐는 말입니다. 사람이 맞았습니다. 죽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슨 얘기 하다가 벽돌 얘기까지.
살다가 어려움을 만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 칩시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설령 징계를 하신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지 복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그 부모는 얼마나 난감하겠습니까. 형사 처벌은 안 받는데 그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 유족들이 배상을 청구하면 다 물어내야 합니다. 민사상 책임은 있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집안을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때리겠지요. 그런데 복수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복수하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길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면서 혹시 잘못해서 하나님께 책망을 듣는다고 칩시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고 칩시다. 어차피 그것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런 훌륭한 자세를 다윗에게서 배웁니다. 고난을 당할 때 저 나쁜 놈들, 이렇게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돌아보고 정직하게 내가 이렇게 이렇게 잘못했고 나는 이런 시련을 만날만한 일을 한 사람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것이 신앙에 대한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까? 그래서 결국은 시련을 당하지 않았을 때에는 한번 내 힘으로 번영해보고 성공해보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환난과 시련을 만나면서 그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조용히 무릎을 꿇고 마음을 하나님께 쏟으며 용서해 달라고 잘못했다고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의 친교와 도움을 다시 호소합니다.
이방 신들은 실제로 능력이 모자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은 우상숭배 때문에 유대가 망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서 우상을 지극히 섬겼는데 바벨론에게 짓밟혀 끌려갈 때 그 우상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해준 것이 뭐가 있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가까이 하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들과 친교를 나누셨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그들의 간구하는 바에 응답하셨습니다. 시인들이 이런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나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에 응답해주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주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착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께로부터 받은 도움의 간증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도저히 인생의 벼랑 끝에서 자기의 힘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서 은혜를 주셔서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 이기게 하시는 그런 경험들을 수없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간증입니다.
예전에도 여러분이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간증도 하고 하나님 만난 자랑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때만 그러신 분이고 오늘은 여러분을 돕지 않는 분이실까요?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그분은 멀리 떠나는 곳도 언제나 우리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이 끊어지는 것 같이 생각되게 만드는 것도 우리 자신입니다. 결국 우리의 도움은 하나님이시라,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언약 관계로 부르심
마지막으로 이렇게 하나님이 다른 모든 민족들보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까이 하시고 그들이 부르짖을 때에 속히 응답하셔서 그들을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건져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나라 사람과 무엇이 다를까요? 언약관계입니다.
왜 하필이면 다른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인지 그것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한 사람 아브라함을 당신과의 언약 속으로 불러 들이셨습니다. 그 이전에도 물론 언약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한 민족으로서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제일 먼저 주시고 그래서 그 아브라함의 언약을 따라서 그의 후손들이 종살이 할 때 하나님이 구해주셨습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시내산에서 피로 맺어진 언약을 성취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당신의 뜻을 따라서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기하고 주님께로부터 멀리 떠나려고 했고 마땅히 하나님은 이런 백성들을 징벌하셔서 지면에서 쓸어버리셔도 하나님은 정당하시지만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당신 자신의 사랑의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은혜로서 그들을 녹여 돌아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2 (2015.10.20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 관계가 오늘 우리에게는 더 완전한 형태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 성경은 말하기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의 육체로 헐어 버리시고, 라고 노래했습니다.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모든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단절됐던 관계를 그 담장을 허물어 다시 화평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공로나 우리의 어떤 유익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그리고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과 우리와의 관계를 열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많은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머리속으로는 알면서 기도할 수 없는 때를 지납니다. 그리고 갑자기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뜨거웠던 복음의 감격들이 차갑게 식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기도할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할지에 대해서 고통을 받습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기도할 수 없는 상황도 주님과의 친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하나님이 우리와 당신 사이에 막힌 담장을 허물어 하나가 되게 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누구든지 자신이 마음을 다하여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친밀한 교제와 당신의 도우심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서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둘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는 이렇게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셔서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원하신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피력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간격을 메웁니다. 그래서 기도가 안될 때마다 우리는 마음 깊이 하나님을 우러르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를 당신의 품으로 부르신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죽은 자와 방불한 영혼으로 우리가 어떻게 산자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와 방불한 영혼으로 어떻게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소금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아우라가 있는 삶을 살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살면서 어떠한 난관과 시련을 만나도 기도로 넘지 못할 삶의 사태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광야와 같은 우리의 인생길에서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교만해지고 높아질 때 우리가 처음 가지고 있었던 마음의 순수함을 상실할 때 쯤 주님은 종종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의 친밀한 친교를 누리며 살기에는 불결한 자신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무엇으로도 자기 자신을 씻을 수 없으니 마치 표범이 비누로 아무리 가죽을 문질러 씻어도 그 무늬를 없앨 수 없음과 같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때 우리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우리가 이것 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주님 앞에 고백하며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기다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보혈의 핏 길을 우리 인간의 모든 의의 신발을 벗어버리고 맨발로 그 길을 걷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찢으신 휘장을 지나 보좌에 이릅니다. 우리는 그 보좌를 떠나 멀리 갔지만 주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해 당신께 나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거기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용서를 빌면 언제나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정말 우리와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주님을 가까이 하고 그 하나님의 친교로서 삶의 모든 시련들을 이겨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 받은 자이기에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시32:6)
녹취자: 백지영
I. 본문해설
시편 32편은 다윗의 시의 분류에 있어서 참회시에 해당됩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참회시는 시편 51편입니다. 시편 51편이 다급한 기도를 담고 있다면, 32편은 통찰과 그리고 자신의 회개의 경험에 대한 회고를 담고 있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의 무한한 죄를 당신과의 언약관계 안에서, 특별히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완전한 공로에 의해서 특권으로 부여 받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실로 뉘우칠 때 하나님은 그 용서해 준 사실을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앞에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고 그 친교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또 하나의 복은 은혜입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자 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모자라기 때문에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혹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주님의 은혜로부터 떠났기 때문이지 주님의 은혜의 자리에 있는 사람을 그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못하게끔 내버려두시지는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시편을 보면 이 시인은 그러한 범죄로부터의 회개, 그것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 다시 부으시는 은혜의 경험들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지혜는 과거의 자신의 잘못을 통해서 깨닫게 된 지혜이지만, 지금 현재 그로 하여금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고 또 많은 사람을 지혜의 길로 인도하게 해 주는 그러한 하나님의 커다란 은총이었습니다. 시인은 이 모든 성도의 복을 간절한 기도 속에서 받았다는 사실을 오늘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II. 홍수가 범람할 때
그러면서 시인은 오래 전에 있었던 자신의 생애의 위기와 시련을 회고하면서, 커다란 홍수와 같이 붉은 물탕이 그저 산처럼 파도치면서 거기에 자신의 인생을 삼킬 듯이 고통 하였던 그 인생의 시련의 날들을 오늘 말하기를 "홍수가 범람하던 때"라고 묘사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많은 물들의 일어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많은 고요하던 물들이 양이 많아지고 그 홍수의 흙탕물 같은 물들이 물결치면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집과 농토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한 홍수가 범람하는 시련의 사태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물이 "미치지 못할 것이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만지지 못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물이 아무리 파도치면서 출렁거리며 삼킬 듯이 돌진해도 결코 어떤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가와서 건드리지도 못하게끔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홍수"라고 말했습니다만, "많은 물" 그리고 "그 물들의 일어남" 이 모든 것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아주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것은 우리의 환경이 아무리 요동치고 아무리 커다란 풍랑이 일어도 마음속에서 시험이 들지 않고 완전한 평화를 누리면 그것은 환란이지 시험은 아닙니다. 저는 우리 교회 교인들 중에도 이미 하늘나라에 가셨지만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도 완전한 평화를 누리시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인생의 기반 자체가 흔들릴 텐데 오히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괴로워해도 힘들어해도 본인은 초연합니다. 그리고 완전한 기쁨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그것은 시험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정말 위험한 시험은 환경이 요동치고 흔들릴 뿐만 아니라 그 시험의 물결이 자신의 마음속에도 일어나서 환경의 요동치는 위험과 영혼의 시험된 위험이 함께 일어나는 것이 가장 위험한 시험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신데 왜 우리로 하여금 시험을 겪도록 놓아두시는 것일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충만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라면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막아주실 수는 왜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삶을 흔들어 놓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 우리의 삶을 흔들어서 우리가 불행해 지고 우리가 정말 환경의 어려움 속에서 고통 받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그러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은 마음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흔들리는 사람들은 삶은 흔들지 않으십니다. 또 혹시 삶에 어떤 변동이 있다고 할지라도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흔들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환경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도 그것 때문에 요동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 말씀에 어떤 깨달음이 옵니다. 하나님이 나의 사업을 뒤집어 놓으시거나 병원에 가서 사형선고를 받게 하시거나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환란이 내 주위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평안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마음을 뒤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살아도 되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생각해 보라.”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날마다 그 완전하신 하나님에 비해서 한없이 부족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자기를 위해 베풀어 주신 십자가의 그 은혜를 한량없이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이 이것밖에 안 되는 것, 그리고 그런 많은 은혜, 그런 많은 진리의 빛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존재밖에 안 되는 것이 한없이 죄송해서 잠깐 스쳐간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흐느낍니다.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참회합니다. 그리고 눈물을 씻은 후에는 다시 한 번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항상 살리라
이렇게 결심합니다. 하나님이 환경을 흔들어 놓으실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남이 시련을 당하면 “저 놈이 안 보이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죄를 졌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기가 환란을 당하면 아주 담대하게 욥의 화신인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환경을 흔들어 놓으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이 진리를 향하는 사람은 진리가 흔들 때 움직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가 아무리 흔들어도 그 마음이 진리에 붙어있지 않기 때문에 꼼짝도 안합니다. 그가 붙들고 있는 세상을 흔들어야지만 그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그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까? 무슨 변화시키는 능력이 세상에 있습니까? 그러면 왜 그렇게 흔드는 것일까요? 그렇게 흔들어서 결국은 이 세상을 붙들고 사는 것이 나의 인생에 안전하지 않다는 그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재물이 나에게 자원이 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안락한 삶이 내 영혼의 보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어놓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이 세상에 붙었던 마음이 찢어지기 시작합니다.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균열이 생기고 고통 받는 것만큼 추억에 잠기게 됩니다. 그 옛날 내가 하나님의 집에서 은혜를 받을 때, 그 말씀 앞에 내가 깨뜨려지고 그 사랑에 내 마음이 녹을 때 나는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그리고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그리고 그 행복은 얼마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행복이었는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에 매달렸던 그 마음이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찬양)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다윗이 자기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2장에서 나단 선지자가 옵니다. 그리고 준엄한 어조로 비유를 들어가며 아주 나쁜 죄인에 대해 지적합니다. 다윗이 노하여 나단에게 말합니다.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러자 나단이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다윗은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자복하며 중심을 쏟아놓으며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회개는 하였지만 그것으로 상황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 전에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서 우리아를 살해했고 그 후에는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이가 죽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인정한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니지만 다윗이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이가 죽습니다. 큰 슬픔이었겠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영혼의 깊음 뿐만 아니라 환경을 흔들어 놓으심으로 다윗이 강성한 나라를 이루고 하나님의 한없이 많은 복을 받음으로 교만과 그리고 방탕에 흐른 그 마음을 하나님이 세상으로부터 뜯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마치 이 온 세상이, 나의 주위에 있는 모든 환경이 나의 적군인 것처럼 검은 흙탕물을 출렁거리며 기둥처럼 일어서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당신의 자녀들에게 복수하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단은 우리에게 송사해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한 일들을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 내지는 하나님의 복수라고 해석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사단이 우리의 믿음 없는 양심의 작용과 함께 화합하면서 그 양심이 의식하는 바를 잘못 적용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결국은 죄와 사단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완전히 이간질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하나님으로 낙인찍도록, 그래서 마음이 더 강철같이 굳어져서 하나님을 향해 아주 패역한 사람이 되도록 사단이 그렇게 우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수없이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어떠한 인생의 시련의 상황에 빠져도 두 가지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인데, 그 하나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니 우리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설령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이지 우리가 죄 지어서 가슴 아팠던 것에 대한 복수심으로 우리를 죽이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그렇게 해도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언제나 당신의 말씀으로 당신의 이러한 마음을 전하셔서 우리 스스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도록 만드십니다. 이상한 방법으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결정적인 순간에 신비주의를 쫓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인격적으로 회개하기 싫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자기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주님께 불순종했으면 인격적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고치시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마음을 고치려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인격 앞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그래서 그 말씀의 뜻을 지성적으로 깨달으면서 인격적인 반성과 함께 자신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한 신앙입니다. 그 이상의 신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게 온 환경이 풍랑이 되어서 우리를 삼킬 듯이 기둥처럼 일어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고요히 그 엄청난 풍랑 속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러면 거기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설득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간절히 우리가 당신의 품으로 피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인생에 큰물이 일어서는 것과 같은 환란과 위기의 때에 우리 주님을 찾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기도하게 하심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것 때문에 모든 은혜를 받은 자가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하기를 바라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원을 뜻하는 문장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런 홍수가 범람할 때에 당신의 자녀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아서 그들로 하여금 세상에 붙었던 욕심을 끊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십니다.
A. 자녀를 부르심
그전에 우선 제일 먼저 살펴 볼 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부르십니다. 여기에 보면 ‘경건한 자’라고 되어 있는데 옛날 성경에는 ‘성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시드’라는 단어입니다. ‘헤세드’, 하나님의 인자, 하나님의 인자하심, 그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 이런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정체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넘치는 사랑으로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그 사랑을 입은 사람이 바로 성도의 정체입니다. 그리고 이 정체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그 사랑을 입은 사람,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인간을 향해 베푸시는 그 무한한 인자하심의 덕을 입어서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도 된 것이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헤세드, 그분의 인자 때문이고 그분의 사랑 때문이라고 고백하여야 하는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시인들의 최대의 찬송의 제목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인자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에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법을 굳게 붙들고 모든 사람을 그 법아래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끊임없이 그 법을 떠난 사람들을 당신의 자비로 불러서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것이 자신의 삶의 비극이요 고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하신 은혜 받은 그 백성들에게 그들을 선택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선택받은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그 은혜를 입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만들어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은사로 주신 하나님이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시기를 자기의 외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셔서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사랑해 주셨으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뭔가 우리를 위해 아까운 것이 있어서 우리를 돕지 않으시는 분은 아니시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기 어렵고 혹은 하나님을 너무나 멀리 떠났기 때문에 기도할 수 없다고 느낄 때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은 사실을 생각하고 믿음으로 그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무한한 사랑을 붙드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 한량없는 무한한 사랑은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로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이 세상에서의 도움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것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신학교 다니거나 혹은 전도사 생활하면서 가난하게 살 때 누군가를 통해 조금만 도움을 받아도 그렇게 가슴이 저미도록 감격하고 눈물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날 도와준 사람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도구일 뿐이고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도움이 나에게 요긴하기는 하지만 없다고 죽겠습니까마는 그런데 하나님이 시시때때로 그런 도움을 받을 때에 내 마음에 쇄신이 일어나게 하셔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도대체 이렇게 목회를 해서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무슨 면목으로 주님을 뵈올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도 말을 안 합니다만 아주 낙심이 됩니다. 원래 저의 기질 자체가 아주 대범하고 그러지를 못한 성격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별로 안 좋은 환경과 싸우면서 저도 모르게 사람이 많이 강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성이 어디 가겠습니까? 한없이 영적인 우울함에 빠져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아주 가끔 하나님께서 내가 여전히 너를 사용한다는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책을 읽은 어느 교인으로부터 아주 간곡히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바뀌었는지에 대한 편지가 옵니다. 그런 고백을 성도들로부터 듣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는 위로가 됩니다. 교만하지 않을 정도로 위로가 됩니다. “그래, 그렇게 정말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또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쓰셔서 일을 하시는구나.” 그리고 마음이 다시 균형을 잡습니다. 그러면서 덮었던 책도 다시 펴고 설교사역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떨어질 만하면 주님이 세우시고 교만해질 만하면 하나님이 내리치시고, 이렇게 하면서 죽는 날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데 항상 한 가지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한한 사랑으로 이미 사랑하신 사람들이다.” 그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양심의 송사나 율법의 정죄나 마귀의 절망하게 하는 궤계들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B. 기도하게 하심
두 번째는 하나님이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자비를 입은 자들이 기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나님을 향해 간절한 마음의 소원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기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수 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장악하고 있는 때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장악하고 있는 때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우리를 끊임없이 감화시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가 정말 막혔던 기도를 다시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되찾기 위해서는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시는 일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입장에서는 어떤 공식을 취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간절한 기도가 쏟아져 나오게 하는 공식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원리를 제공합니다. 결국은 우리가 기도에 관한 한은 한없이 우리의 마음을 낮추어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간절한 목마름, 주님의 은혜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과 애타는 마음,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갖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간절히 주님을 찾는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화) 한 25년쯤 있었던 일인데 저는 지금도 잊히지를 않습니다. 신학교 교수로 있을 때인데, 성남에 있는 어느 조그만 교회에 설교를 해 달라고 불러서 갔습니다. 수요예배인가 주일 저녁 예배인가 교인은 한 오육십 명 모였고 담임목사님은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그 목사님을 왜 그렇게 박해하느냐고 했더니 시끄럽다고, 그래서 수없이 유리창을 부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거의 깡패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때가 동네 주민들하고 사이가 가장 나빴을 때인데, 예배에 참석하기만 하면 가만 안 놔둔다고 하니까 목사님이 도망을 간 것입니다. 내가 말씀을 전하니까 교인들이 은혜를 받고 같이 기도를 했습니다. 맨 바닥에 앉아서 방석도 없이 그렇게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는데, 첫째 줄인가 둘째 줄에 하도 가난해서 그런지 못 먹어서 배짝 마른 중학생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한 2학년 학생쯤 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키가 초등학교 한 4학년정도밖에 안 돼 보였습니다. 까까머리에 군대 혁대를 확 동여맸는데 진짜 허리도 주먹만 했습니다.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중학교 아이가 무릎을 꿇고 주님을 부르면서 '아멘', '아멘' 하면서 설교를 듣고는 기도하는데,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애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많이 못 보았습니다. 인간으로서는 그렇게 더 애절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 아이를 보면서 "내가 신학교 선생이지만 도대체 일 년에 몇 번이나 저렇게 기도를 할까?" "하나님이 저 아이를 얼마나 예뻐하실까?" 생각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한창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면서 게임이나 하고 있을 나이에, 그 핍박받는 교회, 고통 받는 교회의 아픔을 끌어안고 그렇게 목에 핏줄을 세우며 한없는 눈물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어디서나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기도의 문을 열어주시고 또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고 또 기도가 능력 있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기도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기도하려는 사람을 기도하게 하시지 기도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기도하게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다 형언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놀라운 조화를 이루면서, 결국은 기도의 문이 열려 마음을 쏟으며 기도했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주신 사람이고, 은혜를 주신 사람은 모두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려고 몸부림쳤던 사람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기도하게 하시겠지 이런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려고 몸부림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이것은 지식의 유무나 신앙생활의 경력 유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전도사 생활할 때 고등부의 한 가족이 상의 드릴 게 있다고 찾아왔습니다. “아무개가 있는데 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얘가 기도를 너무 많이 합니다. 큰일 났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이 하느냐고 하니까 하루에 한 두 시간씩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공부보다 훨씬 열심히 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공부는 재미가 없고 기도는 이제 재미가 붙었으니까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당신도 그리스도인인데 은혜를 많이 받아서 그 아이가 맑은 영혼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붙들고 사는데 안 해서 염려지 해서 염려이겠습니까? 그러면 그 아이를 위해 가족들이 기도하면 가족들이 말해도 안 듣는 이야기를 주님이 말씀하시면 듣겠네요." 그리고 넘어갔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려는 사람들을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 당시에는 체력이 하늘을 찔렀으니까 뭐든지 해야 된다고 맘먹으면 무한한 힘이 뼈 사이에서 솟아났습니다. 제가 거의 40시간 가까이 한 번도 눈을 안 붙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은혜도 많이 주셨으니까 목숨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토요일마다 혼자 조용히 앉아서 기도를 하는데 한참 기도하다 뒤를 돌아보면 몇 녀석이 와서 같이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더 오고, 더 오고, 나중에는 광고도 안 했는데 한 30명씩 모여서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 다 같이 간절히 기도합시다.” 밤 11시 반쯤 시작을 해서 한참을 기도한 후에 “두시쯤 됐겠다. 좀 자야지. 주일예배드릴 텐데.” 그리고 살며시 눈을 떠보면 해가 훤하게 밝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다섯 시, 다섯 시 반이 되도록 그 조그만 애들이 그렇게 기도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저 정말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잘 안 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가 활활 타오르는 것이 커다란 산더미처럼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지른 것이라면 한 번에 그게 되겠습니까? 처음에 지푸라기 몇 개 모아놓고 무릎을 땅바닥에 대고 두 손을 펴고 얼굴을 지면에 대고 불면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꺼질까봐 손으로는 에워싸면서. 그러다가 타면 성냥개비 같은 작은 나뭇가지를 그것도 마른 것을 골라서 얹어놓고, 얹어놓고, 얹어놓고, 얹어놓고. 그래서 불이 붙고 나면 그 다음에 젖은 장작을 한 아름 갖다가 위에다 쏟아 부어도 소리를 내고 수증기를 내면서 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요히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하늘을 열고 자신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도록, 그리고 이미 나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고 그리고 내 양심이 무엇을 송사하든지 사단이 나에게 무엇을 훼방하든지 주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리고 설령 내가 잘못했다고 하더라고 하나님은 앙심을 품고 복수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아주 작은 불꽃을 지피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 너무 기도가 안 된다는 사람보고 내가 이야기합니다. “너무 기도하려고 애쓰지 말고 은혜가 되는 책을 읽거나 설교를 듣거나 혹은 찬양을 부르거라. 그러면 마음이 따뜻해 질 때가 온다. 그때 하나님 앞에 짧게라도 간절히 기도하거라. 마음이 사라지면 다시 찬송하고 말씀을 듣고 책을 읽고, 마음이 덥혀지는 때가 오면 다시 기도하거라." 그러면서 하나님을 계속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C. 회개하게 하심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남이 우리를 회개하게 하심으로써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은혜를 입은 자들은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하기를 바라나이다” ‘이로 말미암아’라는 게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내 죄를 아뢰고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그러니까 시인 자신이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신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혹은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나는 다음과 같이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때를 얻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그렇게 그 사람들을 만들어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신음 속에서 자복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도의 문이 다시 열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의 은혜를 잃어 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서서히, 서서히 잠식되듯이 우리의 기도의 생활을 잃어버릴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고 하나님을 느낄 수 없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에 위로받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든 일들이 우리 원하는 뜻대로 되면 절제하고 겸손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일을 형통하게 해 주시면 그것 때문에 교만하고 타락하게 됩니다. 혹은 삶의 상황이 뜻대로 안 되고 그러면 고통이 옵니다. 은혜가 있고 하나님의 생명이 있을 때는 이 고통을 끊임없이 신앙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오늘 새벽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 고통을 통해 예수와 함께 죽는 기회로 삼아서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생명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으니까 이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시련과 어려움을 당하게끔 내버려두시면 그것 때문에 영혼은 자꾸 핍절하고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님께로부터 그 은혜와 생명을 계속 누리면서 살지 못할 때, 좋은 일도 나쁜 일이 되고 나쁜 일도 나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제일 먼저 해결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이제 분명해 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나의 이 변론에 대해서 추호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잘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우리 모두 다 경험했습니다. 승승장구하고 모든 게 맘먹은 대로 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절제하고, 하나님 앞에 넘어질까 조심하고, 겸손하고, 주님이 나에게 이 모든 것들을 잘 되게 해 주시는 소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그를 계속 깨닫게 할 때 그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하나님을 체험한 다윗도 그걸 못했는데 여러분이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그래서 매순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그 사랑, 그 진리의 빛, 그 은혜를 하나님 앞에 요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삶입니다. 오늘도 강의하고 왔는데 내가 쓴 강의안에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거스틴의 어록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빛으로 멀어지기만 하면 우리는 육체와 영혼 중 육체만을 편애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 위대한 성인도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점에서 겸손해 져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잘 안 되면 당연히 고통이 옵니다. 그러면 그 고통을 해석해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고통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선을 이룰 것이라고 하는, 증거는 안 보이지만 눈에 보이는 상황을 점프해서 생생하게 교제하는 하나님께로부터 그것을 확신을 얻어야 하는데 그것은 믿음의 행동이지 이성의 행동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시련과 고통 속에서 그 주님을 붙들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통하게 맘대로 잘 되도 결국은 성공과 번영을 버틸 수가 없고 그리고 안 되고 어려움이 와도 그것을 지탱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고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것은 그냥 순간의 마취제 같은 것이지 그게 결국은 영원한 해결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경회가 끝나도 충분히 답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 시인은 오늘 자신이 그렇게 많은 물들이 기둥처럼 일어나서 자기를 삼킬 것 같은 시련을 온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때 다윗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나의 생명이 충분합니다.” 그 고백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에서 하나님이 그 영혼의 어두움을 헤치고 나오게 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면서 거기서 빛을 찾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련과 침체를 통해 은혜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실하게 경험하면서 그러면서 주님의 은혜에 목마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간절한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른 체험을 하면서 자기의 눈앞에 있는 그 기도의 은혜를 잃어 버리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절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그 생명의 은혜로써 살게 되기를 하나님 앞에 빌었던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우리의 인생에 의미가 없는 사건은 없습니다. 큰 풍파가 일어날 때 거기에 왜 의미가 없겠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일들이 순풍에 돛 단 것같이 승승장구하며 모든 일들이 잘 될 때 왜 거기에 의미가 없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싫증을 느끼고, 진리의 말씀의 빛으로부터 떠나고, 우리의 육체가 게으름에 빠져서 그것들의 의미를 찾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그런 시련과 물들이 모두 일어서는 것 같은 시련의 때에 폭풍과 같은 시험의 때를 만났다면,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위의 모든 환경이 평화롭다면, 하나님이 왜 여러분에게 그런 평안한 환경을 주셨을지 모든 것들을 만족스럽게 인도하고 계신 지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그 마음이 정확히 붙어 있도록, 여러분에게 주시는 축복들을 많은 복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사람들이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깊이 깨닫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찬란한 진리의 빛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떨어진 지점을 발견하고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 앞에 생명에 넘치는 사랑의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응답을 구하는 기도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3 (2015.10.21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시 39:12)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해설
이 시 역시 다윗이 말년에 지은 시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그 옛날 하나님 앞에 참회하였던 신앙의 경험과 또 현재적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간구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 받았던 용서의 은혜를 회고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현재 자기 자신의 마음과 삶에 대해 성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과거의 사실들을 회상하면서 자기의 죄악 된 마음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용서해주셨던 기억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인생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이고 그리고 이 세상의 번영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과 유한한 인생에 대해서 한없이 깊이 자각하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Ⅱ. 인생의 의미를 직시함
이 시는 근본적으로 인생의 의미를 직시하는 시인의 시각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나그네라고 고백을 합니다. 여기서 나그네라는 것은 히브리말로 ‘게르’인데 이것은 어디엔가 가서 잠시 머무는 것을 ‘구르’라고 하는데 거기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오늘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회고하고 성찰하면서 떠돌던 조상들을 회고했습니다.
조상들은 대대로 유목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대로 짐승을 치기 때문에 좋은 목초지를 따라서 끊임없이 이동했고 그러면서 때로는 물건을 팔기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곳에 머물든 지간에 오늘 머무는 곳은 영원한 고향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그곳은 임시거처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이래 그들의 땅은 그들이 정말 가야할 마음속의 고향은 진정한 자신들의 집은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을 논증하면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많은 양떼와 짐승의 떼를 치면서 많은 소득을 거두고 재물이 쌓인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아직 고향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집이 아닌 사람들은 영원히 거기에 살 것처럼 어리석게 하지 않습니다. 사글세를 살거나 혹은 숙박업소에 잠깐 머물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집을 위해서 공사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왜? 어차피 잠시 후면 떠나갈 집이기 때문에 그렇게 그 집에 애착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을 그리워하며 사모하며 살 때 그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한 땅이고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갈 수 없고 소유할 수 없는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그 땅에 대한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한 약속으로 실현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서 안식을 누리던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안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그러나 거기 예수 안에 있는 진정한 안식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곳도 여기가 아닙니다. 여기는 그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 예수의 품안에 있는 행복을 미리 선취적으로 맛보는 곳일 뿐입니다. 그리고는 그 모든 것들이 미래로 유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을 바라던 간절한 신앙은 오늘 우리에게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승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은 분명히 이중적입니다. 하나는 현재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바 사명을 따라서 정말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라. 그렇지만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미래를 향한 천국을 향한 소망을 굳건히 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이 두 가지 긴장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매일 매일 살아가는 현재적인 삶이 ‘그래서 오늘 내가 여기에 살아있어서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나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셔서 나 같은 사람을 통해서 이런 일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나를 사용하시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 그런 고백이 그리스도인의 심령 안에 매일 매일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는 사람의 삶은 자기가 주체가 된 삶이 아닙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남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남들에게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혹은 이 세상에서 남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해서 그들이 사는 삶을 똑같이 흉내 내고 어떤 때는 그것이 진정으로 자기가 옳은지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삶은 그들이 나의 주인이 된 것이지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아주 참답고 아주 명료한 진리에 대해서는 우리는 양보하지 말아야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놔두어야합니다. 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는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매순간 살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는 사람들이 가끔가다 ‘이까짓 것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면 무엇 하나? 어차피 이 세상은 다 지나가는 것이고 사람들은 죽을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어떤 일을 해서 교회당을 지었다고 칩시다. 우리는 짓지도 않고 수리를 했지만 지었다고 칩시다. 교회당이 영원하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허물어 버릴 수도 있고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지 교회의 교인이 줄어들어서 결국은 건물을 유지하지 못해서 쇼핑센터에 팔리고 이러는 것이 유럽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가 여기서 그런 일들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할 때 그 섬김은 이 세상에 있는 건물이나 사람을 위한 섬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섬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섬기고 사라져도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안에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순간 그런 고백이 있고 그 다음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이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하늘나라가 있고 거기에서 우리들의 완전한 자유와 행복이 주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들이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 세상에서 완전한 만족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사실은 행복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을 느끼는 이것이 둘이 균형을 이루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쓰는 표현으로는 점적인 행복과 선적인 행복입니다. 선적인 행복은 뭐냐 하면 지금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을 계속 살고 노력하면 나중에 언젠가는 이렇게 살지 않는 것보다 훨씬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고 미래를 위해서 오늘 그 행복을 위해서 살아갈 때 우리 인간의 삶속에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저금입니다. 매일 매일 없는 살림에 조금 떼어서 적금을 부으려면 조금 힘듭니다. 그러나 타는 날은 좋습니다. 적금을 타는 날은 좋습니다. ‘야, 그래도 한 달에 삼십만 원씩 10년을 계속 모았더니 돈이 꽤 되는구나! 삼, 사천만원이 되겠구나.’ 계속해서 적금을 부으면서 통장에 찍히는 것을 보면서 ‘이것을 언제 타는가! 했더니 2년 남았구나! 1년 남았구나! 5개월 남았구나!’ 하면서 삼십칠만 원 정도씩 부으면 10년 후에는 오천만원을 탑니다. 세금도 내지 않습니다. 그 전날은 어떻겠습니까? 잠이 오지 않습니다. 오천만원을 어떻게 만집니까? 삼십만 원을 힘겹게 부었던 사람이 오천만원을 어디서 만져보겠습니까? 꿈같은 돈입니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좋습니다. 삼십만 원을 저금하지 않고 좀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좀 더 편하게 썼으면 그런 기쁨이 없을 텐데 그런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들이 매일 매일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님 앞에 좀 더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힘쓰고 삽니다. 그러면 신앙이 없이 인생을 방황하면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미래가 우리를 위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삶은 내 마음대로 못하고 자기를 죽여야 하고 저녁때도 집에 파자마나 입고 소파에 뒹굴면서 드라마나 볼 시간인데 나와야합니다. 여기에 못나오는 사람은 인터넷으로 tv를 끄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쌓이면서 나 자신이 변화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미래의 삶은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그런 것들이 없으면 너무 시시하고 재미없습니다. 그런 꿈을 꾸면서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삶입니까? 그것밖에 없다고 할 때 매일 매일의 삶이 마지막 적금 타는 날까지는 매일 매일의 삶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점적인 행복도 우리들이 느끼면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나의 소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차피 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해라. 그리고 기대감을 가지고 해라. 얼마나 좋습니까? 어차피 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면 해야 합니다. 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 즐거움을 희생시키면서 할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하는 매 순간 고통과 불만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말고 ‘아, 하게 되었구나! 어차피 할 수밖에 없는 일이구나! 이일이 나에게 오지 않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텐데 나에게 왔구나! 그러면 하자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니까 하자. 그러면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하자.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잘할까? 이 일을 하면서 누구를 섬길 수 있을까? 이 일을 하면서 사람들과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 사람들과는 어떻게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그러면서 기쁜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시간 자체를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순간순간 우리에게 의미 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위로를 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위로를 드립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고방식에 익숙해져있지 않기 때문에 항상 불만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많이 쓰시면 힘들어 죽겠다고 불평을 하고 하나님이 아무것도 시켜주지 않으면 교회에서 나를 소외시켰다고 합니다. 내버려두면 팽개쳤다고 하고 계속 붙들면 괴롭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도 그 비위를 맞출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매일 매일 삽니다. 여러 가지 근심스러운 일들이 내년에도 있고 다음 달에도 있고 다음 주에 있어도 ‘오늘 참 좋다.’ 그런 일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런 일이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참 좋다.’ 그런 순간순간을 즐거워하면서 살수있어야합니다. 그런 삶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느냐하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내가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삶이 계속 연장될 때 그 미래는 지금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이 세상과는 비교될 수 없는 어떤 영광이 그날에 우리를 기다릴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현재를 보니까 조금 어렵고 힘든 일이 일어나도 ‘어차피 이 세상은 영원한 본향이 아니니까’ 라고 생각하고 웃으면서 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던 때를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은 징계가 아니더라도 이 시인이 엄청나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던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다윗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정승 집에 개가 죽으면 문상을 가도 정승이 죽으면 안갑니다. 권력이 있고 힘이 있을 때 사람들이 모이고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지 혜택을 받는 것도 없고 쫄딱 망해서 쫓겨나고 새로운 권력들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에 그때에 그것을 가서 기사 충성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역사상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는 했지만 사실 그럴 정도의 범죄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워낙 훌륭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범죄가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 징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성품을 보여주셨습니다. 다윗이 그런 범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징계를 받고 고통을 받을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있지도 않은 수많은 말들로 다윗을 모함하고 욕을 했습니다. 그러면 사울의 집안이 다윗 때문에 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다윗은 정치적인 야심이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그가 당신의 마음에 합해서 왕으로 삼기로 하신 것이지 다윗이 정치적인 야망을 가지고 블레셋의 군대와 싸우고 골리앗의 목을 벤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권력의 위협을 느끼던 사울은 그 다윗이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객을 풀어져 집요하게 죽이고 싶어 합니다. 결국은 기가 막히게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왔는데도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옷을 살짝 베어오고 물병을 훔쳐 가지고 옵니다. 보여주면서 말합니다. ‘당신을 죽일 수 있는데……. 당신을 죽였을 텐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은 사람을 내가 이렇게 욕보였다는 것으로 회개합니다. 사실은 욕을 보인 것도 아닌데 그렇게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다윗과 같이 정말 현명하게 나라를 다스리고 어진 임금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어디에 그만한 임금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모함하고 무슨 귀신이 쓰인 것처럼 그렇게 집요하게 모독을 가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속에 그런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엮어져있으니까 있는 것이지 어느 한 순간 고삐가 풀리고 나면 개만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는 인간에게 크게 손해를 끼치지 않지만 늑대만도 못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입에 재갈을 물리겠습니다.’ 말을 안 한 것입니다. 수많은 비난들이 파도칠 때에 그것을 향해서 사실 나는 그것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말들이 말을 만들어내면서 요동치는 파도는 큰 풍랑으로 변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조용히 입에 재갈을 물리고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심지어 좋은 말도 하지 않겠다며 일체 침묵했습니다. 39편의 내용이 어떻습니까? 침묵했더니 다윗의 마음속에 불붙는 것 같아서 괴로움이 갑절이나 배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에 소위 이야기하는 떼라피스 심리 치료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가장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때는 친구들이라도 만나서 그것을 다 쏟아놓고 억울한 사정을 토해놓고 술이라도 퍼마시고 안 되면 계하는 친구들이라도 모아놓고 밥이라도 사주면서 그 억울한 사정을 쏟아 놓아야합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모여서 함께 시어머니 흉을 누가 더 잘 보나 경연대회도 하고 그럽니다. 시어머니들은 이해해야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돌아와서 공손한 며느리가 되는 것입니다. 왜요? 어차피 이 사람 정도의 신앙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가서 폭발할 정도가 됩니다. 가서 하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고 녹화할 것도 아니니까 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소리가 들릴 때 이것을 속으로 싸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정신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불붙는 것과 같았습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 말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무쳐서 내가 이것을 말하지 않으니까 열병이 나서 죽을 것 같은 것을 경험해보았습니까? 별로 없습니다. 누가 예레미야의 경지에 도달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속에서 울화가 치밀면 예레미야의 골수에 사무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신령하냐? 육욕적이냐의 차이지 똑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집안 식구 누구와 이야기하다가 마음 상하는 일이 생겨서 집에 가서 눕습니다. 그러면 수많은 언어가 생각납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이렇게 말 할 거야.’ 자기 혼자 둘이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언니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그러면 내가 한번 이야기해볼까?’ 그러면서 이 속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새벽 두시가 되어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골수까지는 사무치지 않아도 이것이 마음에까지는 살짝 스치고 지나가니까 그렇게 많은 언어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골수에 사무쳐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윗이 그것을 배운 것입니다. 정말 이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것을 다 속으로 새기면서 그러면서 그 마음속에 일어나는 불길들을 스스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다 태우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시간에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저쪽 파키스탄 가까운 곳에서 전도를 했는데 그분의 말이 어떤 분을 92세에 주님을 영접시켰답니다. 100세가 다된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오래 사시니까 좋은 것이 있으세요?’ ‘그럼 있지!’ ‘내 마지막 원수가 작년에 죽어버렸어.’ 대만에 가서 지도자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했더니 다 뒤집어지면서 포복절도를 합니다. 그중에 출판사에서 나온 자매 하나가 있었습니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모노가 있습니다. 스테레오가 아닌 모노가 있습니다. ‘목사님!’ ‘왜?’ ‘그래도 원수까지 사랑해야지요!’ ‘그래 나는 평신도고 네가 목사다.’ 어디가든지 모노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깨닫느냐하면 ‘아 진짜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노년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야,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러면서 자기와 맞서고 악을 행하고 집요하게 자기의 왕위를 노렸던 사람들이 죽어가고 혹은 늙어가고 사라져가는 것을 보았을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보면서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를 생각했습니다. 저항시인 김지하 씨가 있습니다. 한때 젊은이들의 우상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의 자전적 고백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한테 얼마나 독을 품었겠습니까? 사형선고를 받지 않았습니까? 잘 모르겠는데 옥살이를 하면서 옥에 있을 때 박정희대통령이 궁정동의 안가에서 김재규의 총에 맞아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에 뭐라고 고백했느냐하면 다 용서가 되더랍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가져야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가끔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1층에 있습니다. 1층에 있으니까 너나 내가 키가 비슷합니다. 매일 토닥거리면서 싸웁니다. 그러고 나서 한번 헤어져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8층 높이에서 내려다보면 철학자 사르트르가 말했던 것처럼 개미인생들입니다. 개미같이 조그만 인생들이 걸어 다닙니다. 갑자기 1층에서 주차 때문에 대판거리로 싸우다가 올라온 것이 그렇게 창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까짓 차가 뭐라고 주차 때문에 그렇게 멱살을 잡고 싸웠나하는 허무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시인이 나이가 들면서 그것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는 나그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길은 허무한 것투성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이 뭐라고 하느냐하면 ‘그런데 나는 당신과 함께 있는 나그네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주와 함께 있는 것인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당신과 함께 있는 나그네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 인생의 의미를 직시해야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기도할 수 없이 어떤 시험과 걱정으로 싸여있다면 한번 잠잠히 침잠하면서 생각해보십시오.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자신의 삶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한번 생각해보고 그렇게 안 되더라도 집에 가서 최면이라도 걸듯이 지금 내가 하는 말을 계속 반복해보십시오. ‘인간이 그럴 수도 있지! 인생이 그럴 수도 있지!’ 산책을 하면서 2시간을 산책하면서 천 번만 외워보십시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진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에 내려놓아야합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오늘 집에 가서 조용히 잠자리에 들기 전 무릎을 꿇고 하나님! 이슬과 같은 인생입니다. 잠시 지내는 나그네와 같은 우리들입니다. 내가 나그네의 길에서 큰 집을 지으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이 나그네의 길에서 정착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면 쓸모없는 땅을 그리워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나의 욕망을 거둬주시고 인생을 직시할 수 있도록 기도하심시오. 그리고 반복하십시오.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인생이 그럴 수도 있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다시 주님을 찾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Ⅲ. 기도 들으시는 하나님
그런데 오늘 성경은 다윗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그네와 같은 이 시인의 인생길의 큰 위로는 기도였습니다. 옛날에 제가 모시던 담임목사님이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인생에 시편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힘든 인생이었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그러면서 시편을 많이 읽으셨습니다. 어느 때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제가 이번 주에 시편을 400번을 읽었습니다.’ 그러셨습니다. 저는 그 실력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거의 매일 시편을 빼놓지 않고 읽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편이 정말 은혜가 되는 이유는 대부분이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진실이 객관적이지 않고 주관적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호소하는 바가 굉장히 큽니다. 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하고 있거나 어디서 배운 이야기를 옮기는 내용들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생하게 주님을 만나서 어떻게 자기의 마음이 움직이고 어떻게 자신의 마음이 깨뜨려지고 어떻게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게 되었는지 어둡던 자신의 인생길에 어떻게 다시금 찬란한 빛이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1인칭의 언어로 간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속에는 항상 자신의 침이 묻어 있고 땀이 묻어 있고 피가 묻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것을 읽을 때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감동이 다른 성경과 남다르게 우리의 가슴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A. 부르짖는 기도
이것을 통해서 이 시인은 무엇을 배우느냐하면 자신의 인생의 어려운 시기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르짖는다는 것은 히브리말의 뜻은 영어로 'cry'입니다. 우리는 그냥 부르짖는다는 것은 그냥 두런두런 속삭이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에게 이 소리를 들리게 하기 위하여 부르짖는 것을 의미하고 때로는 내적으로 자신의 소리를 발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내적인 강력한 충동을 느끼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토하고 그것을 간절히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지금은 우리 예배당을 옮겼지만 72미터나 되지 않습니까? 옆에서 누가 기도해도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큰 소리로 기도하고 싶으면 저 뒤에서 혼자 중얼거리든지 아니면 소리를 내서 기도하든지 기도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이 비켜주면 되니까 괜찮은데 옛날 개척교회 때는 요만합니다. 이곳의 반도 안 되는 곳입니다. 굉장히 어렵습니다. 새벽에 나가서 기도하는데 한쪽에서는 은혜를 받아서 억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 같이 기도합시다.’ 그러면 소리를 지르면서 기도를 하고 펑펑 울면서 기도를 하는데 저쪽에 있는 사람은 조용히 묵상을 하면서 기도하는 형입니다. 이 사람은 계속 새벽에 나와서 옆에 있는 이 사람의 기도가 들리지 않을 수 없을까하여 나중에는 귀까지 막고 기도를 합니다. 나중에는 새벽에 오죽했으면 그랬겠습니까? 하나님 저 사람 좀 큰소리 좀 나지 않게 기도하게 해달라고 했답니다. 번번이 그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도가 그렇게 간절히 나오는데 성령님이 시키시는 것 아닙니까?’ 그러는데 ‘성령님이 시키셔도 다른 사람이 기도를 못한다면 좀 지혜롭게 하라고 해라.’ 그 다음부터는 커다란 세수수건을 하나씩 가지고 와라. 큰 수건을 가지고 있다가 터져 나오면 입을 막고 하라고 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때 슬기로운 사람들은 항상 세수수건을 가방에 넣고 새벽기도를 왔습니다. 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이것은 터놓고 기도할 수 없는 처지이구나! 주님은 아시겠지! 귀마개를 하나씩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일반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지금은 비행기를 타면 주는 귀마개를 하나씩 가져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사실 그런 갈등이 별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도 또 씁쓸한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이것은 어떤 심적인 고통 그리고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온전히 집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갈망이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의 마음에 어떤 어려움을 만나서 인간을 향하게 될 때 우리는 그릇된 기대를 갖게 되고 여기서 많은 실망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서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시련을 만날 때 마치 많은 물들이 산에 쏟아진 비가 빗방울 하나하나가 모여서 잎사귀를 타고 땅에 떨어져 모이고 땅에 떨어진 물들이 모여서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산을 허물어버리고 나무를 쓸어버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물이 힘이 되어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이런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서 평평했던 우리의 마음이 넓게 이렇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쪽으로 물기를 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런 시련과 어려움을 처음에는 인간의 힘으로 한번 막아보려고 자기의 자원을 활용하고 자신의 지혜를 활용하고 때로는 남들의 자원까지 끌어들여서 그런 일을 한번 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하다가 안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이런 시련과 고난과 어려운 역경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은혜의 도움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모든 물이 모여서 한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집중된 마음에서 억제할 수 없는 심적인 깊은 고통과 하나님께 집중된 마음 구원에 대한 사모함이 생겨나게 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한 마음이 부르짖음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자, 우리 모두 부르짖읍시다.’ 이런 식의 기도는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억제할 수 없는 성령의 감동과 은혜가 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소리가 되어서 터져 나올 때에는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억제할 수 없는 정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토하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자신을 쏟는 마음보다 고귀한 마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마음속에서 열렬한 기도가 나오고 그런 마음속에서 이 세상의 모든 욕망을 파괴하는 그런 자기 개혁의 놀라운 기도가 나옵니다. 그런 기도가 바로 영혼을 뒤흔들어놓고 우리의 심령을 일깨워서 하나님 앞에 바른길을 가도록 만들어주는 놀라운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들이 생길 때 하나님이 이런 기적을 통해서 연약해진 우리의 영혼에 힘을 더하시고 그리고 냉랭해진 우리의 가슴에 다시 한 번 은혜의 불을 붙이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 하나를 기도해도 좀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의 사모함을 가지고 간절히 마음을 모아서 주께 부르짖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눈물 있는 기도
마지막 두 번째는 눈물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주옵소서 내가 눈물을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이 눈물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그의 생애를 한번 회고해보십시오. 왕이 되기 전 사울에게 집요하게 추격을 당하며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도망을 다닙니다. 그는 수많은 고독과 슬픔의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언제나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울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당하고 왕궁에서 그렇게 도망을 쳐야하는 망명생활, 가족관계가 깨뜨려지는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 시인은 울부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눈물은 하나님을 향해서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고통 받을 때에 사람 앞에서 울지 마십시오.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왜 좋지 않습니까? 자신의 영혼을 잠잠히 하며 하나님 한분께로 부터만 도움이 온다고 믿는 사람들은 비굴하게 사람 앞에서 울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 앞에서 잘 우는 사람들이 기도 시간에는 울지 않습니다. 기도 시간에 하나님 앞에 자신의 설움과 모든 고통을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고 간절히 눈물 흘리는 사람들은 사람 앞에서 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인생의 모든 주권이 사나 죽으나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고 사람이 그것을 대신해줄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남에 대해서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 있을까? 거지같은 인간!’ 그러면서 분노를 쏟아내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화 낼 줄을 모릅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왜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일까? 정말 화가 난다. 부끄럽다.’ 그렇게 해서 자신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자기중심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통 받을 때 사람 앞에서 울지 마십시오. 우리가 마음 중심을 쏟아놓고 눈물을 흘린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물론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우리의 인생의 주권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시련과 어려움을 만날 때 사람 앞에서 울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을 쏟고 눈물을 흘리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인의 이 눈물은 어떤 의미였습니까?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에 대한 괴로움에서 나오는 눈물이기도 하였겠지만 사실 회개할 때 이 눈물은 진리와 자신이 합치 되지못한 현실에 대한 눈물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자신이 얼마나 악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 죄가 생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습니다.’ 이것은 엄마가 나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 속에 뼛속 깊이 사무치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고 하나님이 그렇게 높여주시고 하나님이 그렇게 놀라운 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 없이 자신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깊은 죄의 뿌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고백합니까?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시는 신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제사장들이 들으면 기절할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체험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정말 받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여기서 ‘상하다’ 는 말이 뭐냐 하면 ‘낙하’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낙하’는 조폭 같은 사람들이 사람을 두드려 패는 것이 ‘낙하’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정신없이 두들겨 맞았다면 살점이 흐물흐물해지도록 뼈가 으스러지고 구타를 당해서 멍든 모습일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된 사람들의 그 마음이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제사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삼천년 후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깨닫지 못하는 복음의 진수에 가까이 다가간 고백입니다. 정말 위대한 발견입니다. 그러면서 그 눈물의 표현이 무엇이냐 하면 그 진리에 합치되지 못한 자신의 진심의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정말 가치 있는 눈물은 그 진리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흘리는 눈물입니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받으심 직한 눈물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 그리고 자신이 이런 인간밖에 되지 않는다는 자기인식에서 오는 눈물을 범죄를 통해서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신앙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이 세상에는 아무리 기독교 신앙이 침체기에 접어들었다고 하더라고 아직도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은밀한 곳에서 눈물로 시련을 이기며 사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만 눈에 띄지 않을 뿐이지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진리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그 모든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고통들 때문에 사람을 향해 그 쓰레기 같은 망설들을 쏟아놓아서 삶의 질서들을 어지럽히고 이웃과 자신의 마음에 먹칠을 하는 그런 일을 하는 대신 모든 비난과 모욕을 그대로 삼키고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운 때를 눈물의 기도로 지내는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사람들은 기억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아주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고통 받는 그를 위로하시고 외로운 그와 함께 친교를 나누시고 아무 돌볼 사람이 없이 저는 홀로 버려졌다는 생각되는 그 시점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를 도우셔서 깊은 웅덩이에서 그를 건져내시고 그의 손에 깃발을 들려주어 주님을 위해서 그 깃발을 달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주님이 섭리로써 자신에게 응답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보다는 인간을 향해 망설을 쏟아내어 영혼을 더럽힙니다.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그 시련과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으며 자기의 부족한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대신 그는 복수의 칼을 갈며 다른 사람들을 괴롭힐 궁리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말이 많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때로는 침묵을 금보다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만을 바라보며 시련을 이기고 고난의 불길을 통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찬양)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은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입을 닫고 시험에 들었을 때에 반드시 인간은 입술로 죄를 짓습니다. 자기에게 악을 행한 사람이 나쁘기는 하지만 그것을 말하기 시작할 때 그 사실보다 훨씬 나쁘게 그 사람을 욕보이게 마련입니다. 그 죄는 자신의 마음을 더럽혀서 기도할 수 없었던 그를 더 기도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 용서가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다 내려놓아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나의 도움이 그에게서 나옴이로다.’ 주님께 눈물 흘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합시다.
경건한 기도가 막힐 때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25)
기도할 때 들으시는 하나님 4 (2015.10.22 가을말씀사경회 저녁)
녹취자 : 조원정
I. 본문해설
예수님이 길가에 지나가시다가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잎사귀가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되었을까 하고 가서 보셨더니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고 무화과나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이튿날이었는지 며칠 더 지났는지 모르지만 오늘 성경에 보면 날이 저물고 성 밖에 나가더라고 했으니 이튿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다 말라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베드로가 보십시오.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다 말랐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이 같은 발언에 답하시면서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속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특히 기도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믿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깨우쳐 주셨던 것입니다. 24절 까지는 예수님이 이 놀라운 믿음의 능력을 기도와 연관시키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니라. 기도에 있어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성적인 믿음이 있고 은밀하게 말하면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무엇인가를 계산했기 때문에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성적인 믿음이라고 생각한다면 또 하나는 믿음이 있다고 스스로 끊임없이 암시함으로서 믿음을 자신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심리적인 믿음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예화) 오래전에 설교시간에 제가 그런 예화를 들었습니다. 저는 중국에 갔을 때 실제로 보았습니다. 300미터 되는 계고 위를 쇠밧줄이 가로 지르고 있고 그 위에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다닙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떨어지기 어렵게끔 묶어서 다니는 거라고 합니다. 저도 직접 본 것이 아니고 어느 설교자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미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계곡 사이에 줄을 매어 놓고 아주 좁은 줄처럼 보이는 것을 놓고 그 위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쪽으로 가면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모자에다 돈을 던져주는데 그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내가 여기에서 몇 년 동안 이 일을 했습니다. 당신은 내가 이번에도 이 자전거를 타고 이 위험한 줄 위를 운전해서 건너편 계곡까지 도달할 것이라고 믿으십니까? 우리는 확실히 믿습니다. 여러분 중에 내 뒤에 타고 같이 한번 건너볼 사람 있으십니까? 탔겠습니까? 안탔겠습니까?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 되는 사실에 자신의 인생을 의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할 때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마음만 먹으면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에 자신의 삶을 얹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청교도 신학자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능력뿐만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성품을 보여주시는데 그런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 같은 것들을 깨닫게 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던져서 순종해 보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 말씀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리고 전도 열심히 나와서 전도도 하시지만 개척 교회 때부터 정말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토요일이면 멀리 사는 지체들이 나와서 동네에 풀어 놓은 개한테 물려가면서도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그렇게 전하다가 사람들에게 구박을 당하고 박해를 당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너희가 핍박을 받을 때에 기뻐하라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고 사도들이 핍박을 받고 제자들이 핍박을 받았을 때에 복음을 위해 핍박을 받기 합당한 자로 여겨주심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했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그 말씀 위에 무게 있게 얹어보기 전까지는 그 말씀의 참된 맛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제 기억의 맨 마지막 끝은 동생이 시골에 있는 집에서 수박을 굴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지금도 사진처럼 아주 또렷합니다. 눈동자까지 수박 장판지까지 그리고 한 2년 이상 건너뜁니다. 그 기억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내가 많이 되어야 한 다섯 살 정도, 동생은 두 살 정도 되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 살 더 아래로 내려가서 네 살, 동생은 한 살쯤 되었을 때 일입니다. 수박을 붙들고 계속 윗목으로 수박과 함께 밀고 갔던 생각이 납니다. 동생이 그 수박을 열심히 핥아먹던 그림이 뚜렷하게 찍혀 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수박입니다. 옛날에 메론이었는데 요즘은 메론 잘 안 먹습니다. 어떤 때는 혼자 가만히 앉아 반통씩 먹습니다. 그것도 언제가 제일 맛있는가 하면 수박이 들어갈 끝물에 정말 맛있습니다. 물이 풍부한 것을 먹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혓바닥으로 파란 수박의 겉을 핥은들 수박의 맛에 근접도 못합니다. 설령 그 껍데기를 좀 벗어냈다고 칩시다. 파란 껍데기 부분을, 겉껍질 표피 부분을 거기에서 이빨을 대고 무슨 국물을 좀 빨아 먹었다고 쳐도 그것은 수박의 참맛이 아닙니다. 수박은 딱 잘라서 칼을 대자마자 쫙 소리가 나서 찢어지고 속에 하얀 줄무늬들이 나있는 그 수박을 한번 큰 숟갈로 푹 퍼서 한입 넣고 꽉 깨물었을 때 입에 번지는 시원한 과즙의 맛이 목 줄기를 타고 흘러내려가서 체온과 다른 액체가 목 줄기를 타고 위로 내려가는 그 느낌을 받을 때 오감이 막 깨어납니다. 우리는 수박을 만드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광주에 한번 내려갔을 때 광주에 무등산 수박이 유명합니다. 상세히 물어봤습니다. 수박이 그렇게 맛있느냐? 목사님 말하지 마십시오. 그 수박은 세계에서 최고입니다. 먹는 방법이 어떠하냐고 했더니 협동조합에 전화를 하면 부쳐주는데 나오는 시기가 9월 초에서 9월 중순 사이에 나온답니다. 가격을 알고 기절을 했습니다. 제일 비싼 게 한통에 오십 만원이랍니다. 이십 만원에서 오십 만원이랍니다. 오십 만원은 거의 40키로 될 정도로 도저히 혼자서 못들 정도랍니다. 얘기만 듣고 왔습니다.
깨고 들어가서 먹어 본 그것과 껍질을 핥아본 것과 다릅니다. 문제는 삶을 얹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이성적으로 설득되어서 아 그렇구나 하는 동의나 혹은 심리적으로 내가 믿어야 해, 나는 믿을 거야 하는 그런 식으로 하는 심리적인 암시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믿음 속에는 어떤 동의하고 찬동하는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 속에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어떤 지식 때문에 그분을 깊이 신뢰하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그 말씀에 의탁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화) 대학에 초창기에 교수로 있을 때 제가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유아교육과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교회 다니는 애들이었고 진짜 믿음이 좋은 애들이 있었습니다. 기도 모임에 나와서 같이 기도하고 토요일이면 역전앞에 가서 찬송도 부르고 전도도 하고 심지어는 광화문 한복판까지 가서 광화문 지하차도에서, 정말 그 애들 찬송 잘합니다. 가다가 사람들이 막 쳐다보면서 아 이럴 정도로, 화음을 넣어서 찬송을 잘 부르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경찰에게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자매인데 자기가 취업할 때가 되니까 하나님 앞에 좋은 유치원 가게 해 달라고 40일 동안 작정을 하고 기도를 했답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20일쯤 되어서 기가 막힌 유치원에서 프러포즈가 온 것입니다. 좋은 유치원에 들어가기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애들이 막 기도에 응답되었다고 애들이 너무 은혜를 받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얘 대답이 너무 단순합니다. 아직 40일이 안 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다. 난 40일을 채울 거야 하면서 그 환상적인 프러포즈를 거절했습니다. 40일 딱 채운 다음에 불과 며칠 있다가 프러포즈가 왔는데 처음 받은 프러포즈도 기가 막힌 유치원이었는데 그 유치원하고도 비교도 안 되는, 정말 그 학교 나와서는 죽어도 못 들어가는 그런 유치원에서 프러포즈가 왔습니다. 물론 어느 유치원에 가느냐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매 속에 있는 하나님이 내가 전심으로 기도하면 내 인생을 인도할 것이다. 나는 그분을 신뢰한다. 그런 마음을 내가 이야기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얹을 때 우리는 형식적으로 들리던 수많은 이야기들 성경에 겨우 수사처럼 들리던 그런 많은 언어와 많은 말들의 의미가 아주 새로운 옷을 입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직도 모르십니까? 한번 쓰라리게 시련을 당해서 죽고 싶어서 밤거리를 헤매다가 유행가를 들어보십시오. 눈물이 펑펑 쏟아집니다. 내가 회심하고 나서 한동안 그 얘기를 했습니다. 유행가를 듣고 한잔 술을 마시며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사람들은 인생의 맛을 모른다. 유행가가 얼마나 대단한 노래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정서는 비록 약간 수준이 낮을지 모르지만 그 속에는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애환의 정서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경험이라고 하는 요소가 신앙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은 믿으면 믿고 안 믿으면 안 믿는 것이지 중간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우리가 맨 처음에 교회를 개척하고 심방을 가서 심방 받는 사람들이 제일 황당해 하는 담임목사의 질문이 그거였습니다. 언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났습니까? 대답을 못합니다. 구원받았습니까? 하고 물어보면 아주 쉽게 대답을 하겠는데 인격적으로 주님을 언제 만났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런 적은 별로 없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은 인격 대 인격의 만남입니다. 주님을 인격으로 만난 것이 아니면 그런 식의 만남은 우상 숭배하던 사람도 다해본 경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지 않고는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경험의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움직이는 토대가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때 그 말씀을 비틀고 꺾어서 자신의 삶에다가 맞추려고 하면 수없이 오래 예수를 믿어도 말씀에 의해서 자신이 바뀌었다고 하는 경험은 없는 것입니다. 살아온 인생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묘하게 비틀면서 살아온 역사입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겠느냐 입니다. 거기에 은혜가 있겠느냐 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그 말씀 위에 얹는 것입니다. 몸을 던지듯이 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던지는 것입니다. 던지는 것이 모험심이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 나를 사랑하시되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 하나님을 내가 신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분께 자기 자신을 던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예전에는 전혀 체험할 수 없었던 정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설교를 듣습니다. 일생 설교를 들어도 여기에서 설교를 할 때 설교자의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여러분 모릅니다. 조금 아까도 음악을 듣다가 왔습니다. 조성진이라는 21세가 쇼팽 세계적인 3대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연주 전곡을 듣고 왔습니다. 우리같이 막된 귀가 듣기에도 유리 위를 굴러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을 악보도 아예 놓지 않고 눈을 감고치는 것입니다. 유명한 비평가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 생애 있어서 쇼팽의 완벽한 연주를 오늘 들었노라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쭉 빨려 들어가면서 그 연주가 뿜어내는 아우라가 있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우린 들으면서 너무 놀라는데 거기서 치는 사람이 어떤 감흥이 이 안에서 일어나는지를 모릅니다. 우리가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해도 어마어마한 오케스트라 속에 들어가서 연주할 때 느끼는 감동은 평생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놀라운 경험입니다.
어떤 것이 더 음악 속에 혹은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미학적인 요소에 있어서 우위를 갖느냐를 말씀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만큼 예술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이든지간에 결국 그 안에서 경험되는 것들은 아주 놀라운 것인데 그것은 반드시 그 속에 깃들여 있는 어떤 진리의 요소와 만나는 것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최종적인 진리이고 음악이 우리에게 막 아름답게 들리는 것은 그 안에서 어떤 놀라운 하나님이 그 음 안에 이미 부여하신 감각하는 인간의 인식 세계 안에 부여하신 어떤 규칙을 어떻게 기가 막히게 찾아내고 그것을 조합시키나에 따라서 그 음이 아름답게도 보이고 화려하게도 보이고 아니면 우울하게도 보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끼기도 하고 들으면 들을수록 짜증이 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헤겔이 음악을 가리켜서 느끼는 진리라고 이야기한 이유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경험해야 하는데 그 경험을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그 말씀 위에 얹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가 있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무엇으로도 믿음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딱 못을 박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벅찼겠습니까?
왜 믿음이 하나님을 그렇게 기쁘게 합니까? 그것은 이성적인 설득이나 찬동, 그것이 만약에 단순한 어떤 심리적인 믿음이라면 하나님은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이야기는 사랑한다는 이야기이고 그 신뢰 속에서 자기 자신을 주님께 얹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어떠한 행위나 행실보다는 더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 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이야기 끝에 예수님이 덧붙이신 말씀이 있습니다. 부록처럼 그런데 하고 덧붙이신 말씀이 있는데 25절을 보십시오. 서서 기도할 때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사하여 주시니라 하니라. 이건 무슨 말씀인가 하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하신가를 말씀하시면서 단서를 붙이시는 것입니다. 그 단서를 잘 살펴보면 예수님이 앞에 말을 뒤집으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기도에 있어서 너무 너무 중요한 조건이고 믿으면 능치 못할 일이 없도록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음 경우에는 해당이 안 되느니라.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뒤에 꼭지를 하나 딱 붙이시는 것입니다. 24절 까지 읽을 때에는 믿음의 힘이 이렇게 대단한 것이구나. 그럼 한번 믿어보자. 믿음은 역시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주님의 말씀에 던지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게끔 하시는 하나님이시구나. 정말 위대하고 놀라운 일이구나. 예수님이 뭐라고까지 말씀하시는가 하면 이 산더러 들려서 바다에 던져지라고 하면 그렇게 될 거다. 그 산이 감람산이었다고 주석가는 보고 바다는 앞에 펼쳐진 사해바다입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이 서있던 산과 바다가 산이 또 옮겨져서 바다에 던져진다고 하니까 인간의 상식과 역사 속에는 사람이 경험해 본적이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너희에게는 어떠한 상식을 동원해도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까지 될 수 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믿음은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예화) 제가 참 좋아하는 지금은 은퇴하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 목사님은 저보고 한번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굉장히 목회를 잘하신, 이름만 대면 여러분 다 아는 목사님이십니다. 김목사님 정말 하나님은 좋으셔. 왜요? 내가 말이야. 어떤 때는 기도를 안 하고 마음만 먹어도 하나님이 기도했다고 치시고 응답을 해주셔. 강대로 올라가시면서 강대가 다 낡았고 이제는 좀 아닌 것 같다. 내가 그랬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전혀 필요 없습니다. 그러고 내려와서 앉아서 새벽기도를 하고 있는데 저 뒤에 있는 성도 한 사람이 오더니 목사님 이거요 하면서 봉투를 내어 놓더니 목사님 저 강대를 볼 때마다 아닌 것 같은데 이것으로 하나 좀 바꾸어 주세요. 그래 놓고 가더랍니다. 강대가 산 것이라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믿음이 있는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좀 결함이 있어도 믿음이 있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을 예수님이 강조하시고 제자들의 마음속에 충분히 새겨졌습니다. 그런데 다음 경우에는 믿음이 있어도 안 된다고 꼭지를 딱 붙이십니다.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뒤에 나오는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게 되고 두 번째는 믿음이 충만한 사람도 그 꼭지에 들어 있는 내용에 걸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말씀을 하신 것 아닙니까? 만약에 믿음만 있는 사람이 믿음만 있으면 절대로 그런 문제에 안 걸린다면 예수님이 그런 단서를 붙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만 가지면 저절로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에 있어서 믿음은 너무 중요하다. 너희들이 제대로만 믿어봐라. 산더러 명하여 바다에 던져지라 해도 그대로 된다. 그렇게 큰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소용이 없는 경우가 있단다. 하며 꼭지를 붙이십니다. 그것은 기도가 막히는 것입니다. 경건한 기도가 막히는 것입니다.
II. 경건한 기도가 막힐 때
여기에 보면 서서 기도할 때 했는데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서 기도하는 자세가 여러 나옵니다. 우선 땅에 엎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무가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엎드린다고 하는 것은 경배도 되지만 땅에다가, 인간의 몸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어디인 것 같습니까? 그렇게 묻는 질문 자체가 웃길지 모르지만 히브리 사람은 이 면상을 인간의 가장 존엄성이 깃들여 있는 부위라고 보았습니다. 얼굴을 때리거나 침을 뱉거나 하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고의 모욕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땅에 대는 것입니다. 그 얘기는 땅은 여러 가지 신학적인 의미가 있지만 그 위에 있는 흙은 무가치를 의미합니다. 아파르라고 하는데 거기에 엎드려서 자기가 일체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당연히 그 엎드린 것은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 앞에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신의 무가치에 대한 고백입니다. 거기에 재를 무릎 쓸 경우에는 거기에 반드시 회개가 동반됩니다.
다음에 무릎을 꿇은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완전한 복종을 의미합니다. 서서 하는 기도는 경건의 표현입니다. 서서 특히 손을 들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표현입니다. 이렇게 서서 기도할 때 이런 경건한 기도인데도 그 기도가 막힐 때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A. 혐의가 있을 때
오늘 성경은 혐의가 있을 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굉장히 번역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말은 어떤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을 때 혐의가 있다고 할 때 이 말을 씁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에이트 에케테 카나디누스 라는 구절인데 직역을 하면 만약 누군가에 대항하여, 영어로 말하면 어게인스트입니다. 누군가에 대치하는 그 무엇을 누군가를 배척하고 대항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 지속적으로 계속 붙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용서해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누군가에 대항해서 그를 대척하고 그가 저지르는 죄나 어떤 잘못을 미워하는 것은 괜찮은데,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데 그 사람 자체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배척을 하면서 뭔가를 그에게 맞서고 있는 미움이 계속 너에게 있다면 기도가 막힌다고 아주 간단하게 정리합니다.
성경에서 남편들에게 아내와 평화롭게 지내라고 사랑하라고 얘기하면서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함이라. 아내와 다투고 하도 답답해서 문을 뻥 차고 밖에 나왔는데 옛날 같으면 대포 집에 가서 술이라도 한잔 먹고 게걸거려 보겠는데 안 됩니다. 한참 골목을 배회하다가 교회를 찾아갑니다. 교회에 와가지고 조용히 문을 두드리고 기도를 해 보려고 하는데 그게 기도가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교회 와서 비로소 확인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안 되는구나. 확인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화해를 하는 것입니다. 누구 얘기를 하는 것 같습니까? 옛날입니다. 우리는 말로 다툰 적도 20년이 지났으니까 옛날 옛날입니다. 부부사이에 좀 안 좋은 일 있고 하는 것이 잠깐인데 그런데도 기도가 안 되는데 어떤 사람은 지속적으로 미워할 때 기도가 되겠느냐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사단이 한 사람 한사람 신앙적으로 뛰어난 공동체를 허무는 아주 너무나 오래된 구식의 전략이 있습니다. 한 사람 한사람을 쓰러트리기가 너무 힘듭니다. 워낙 헌신되어 있고 기도 많이 하고 워낙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때 훌륭한 방법이 뭔가 하면 다투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쩜 그렇게 사람들이 찢어지는지 놀랍습니다. 누가 찢어지는가 하면 집 팔고 땅 팔고 자기 인생 다해 섬겼던 사람들이 피터지게 싸우는 것입니다. 그게 흔히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기도가 안 될수 있다고 하는 딱지를 붙이시는데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미워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아주 명백한 우리 안에 있는 죄이기 때문에 기도를 할 수 없게 됩니다. 기도하기에 가장 좋은 마음은 주님의 사랑으로 달구어진 마음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깊이 미워하고 있고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에케테, 소유하다고 에코 동사입니다. 영어 NIV성경에서 홀드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막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대항하고 있는 마음의 자세를 안 놓고 꽉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위에서 설득을 합니다. 그 사람이 너한테 말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니었어. 그 사람이 원래 바탕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야. 하고 이야기를 해도 꽉 붙들고 있는 것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붙들고 있을 때에는 그렇게 약하던 손이 그런 확신을 붙들 때에는 핏발이 서면서 꽉 붙드는 것입니다. 거의 신앙처럼 붙듭니다. 그런 마음에서 기도가 나오느냐 입니다. 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기도가 항상 허공을 맴돌다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어렵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늘 져야 합니다. 진다는 이야기는 진리에 있어서 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리가 아닌 것에 있어서 양보해야 합니다. 부부가 다툽니다. 누가 잘못했다고 비는지 아십니까? 옛날에는 여자가 지금은 어림도 없습니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합니까? 요새는 아침에 눈 뜰 때도 허락 받고 뜨는 세상인데 그렇게 좋습니까? 신랑이 허락 받아야 눈뜬다니까 그렇게 행복합니까? 은혜 받은 사람이 먼저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미안해, 잘못해 하면서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 인간이 존경스러워서 무릎 꿇습니까? 그 인간이 사랑스러워서 무릎을 꿇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시니까 저 인간은 날 고집이 있어서 절대로 안 꿇으니까 하나님이 기도할 때마다 내 마음을 움직여서 무릎을 꿇고 내가 잘못했어.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고 또 사는 것입니다.
마음에 이런 뜨거운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을 때 기도는 아주 열렬해집니다. 가능해집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뜨겁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순종할 수 있는 사람들만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보기에 그렇게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중에 안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만큼은 지어낸 것입니다. 분별하지 못하는 여러분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닙니다.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미움을 가지고는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는 우리의 마음의 작용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대상에 대한 실제적인 신뢰, 주님께 자기 자신을 다 던질 수 있고 그분께 자기 자신을 맡길 수 있는 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면 미움과 양립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믿음과 사랑을 말하는데 믿음이 기도에 있어서 소극적인 요소라면 끊임없이 용서하는 사랑은 적극적입니다. 그 일은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 누가 자기를 꺾는 일이 신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손녀가 딱 돌이 지났는데 아이를 보면서 칼빈주의가 진리라는 것을 배웁니다. 14개월 밖에 안 된 것이 지 뜻대로 안되면 다리를 쫙 뻗고 우앙 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자기 원하는 질서에 맞춰주는 것을 얘가 벌써 학습이 된 것입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태어 난지 14개월 밖에 안 된 아이도 자기를 꺾는 것이 싫습니다. 자라면서 여러분 정도 되면 신이 아닌 이상 못 꺾습니다. 누가 꺾습니까? 하나님이 아니면 못 꺾습니다. 물론 가끔 꺾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진짜 마음속에서 사랑의 감화를 받아서 꺾인 것이 아니라 아이고 내가 안 꺾이면 더 일이 복잡하게 되고 더 힘드니까 이쯤에서 내가 참는 것이 오히려 더 이익이지 하는 생각으로 꺾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꺾임이 아닙니다. 누가 그것을 하겠습니까?
재산의 일부분을 떼어서 누구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저절로 미움이 가는 사람을 도려내어서 미워하지 않는 것을 지나쳐서 미워하지 않는 것이 힘들고 그 사람을 사랑하기까지 가는 것은 마음속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힘든 일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가슴에 맺히도록 미워하던 사람을 지금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여러분 중에 몇 명이나 됩니까?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물론 무관심하던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별로 친하지 않던 사람을 친해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뼛속 깊이 원한을 남긴 사람을 지금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여러분 중에 누가 있습니까?
사람을 미워하고자 하는 마음을 예배시간에 와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말씀의 진리의 빛이 구석구석을 비췄습니다.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고 수많은 기도회를 드렸습니다. 수많은 세월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면서 흐느끼며 회개했지만 모든 치열한 물살에도 그 불길에도 죽지 않고 버티고 남아있는 미움의 본성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신앙이 아무리 뛰어나도 빠질 수 있는 위험이기 때문에 이 믿음에 강조한 말씀 끝에 딱지처럼 한 꼭지 붙여 놓은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쭉 편지를 쓰시고 거기에다 빨간 메모지 하나를 딱 붙이신 것입니다.
나는 살아오면서 너무나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이 지점에서 걸려 넘어지면서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한 순간에 타락해서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은 소수이지만 이것은 죽 떠먹은 자리 표도 안 난다고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이것이 정말 큰 죄구나 하며 회개하는 일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마음에 깊이 화살촉처럼 박히도록 누군가를 미워하게 될 때까지는 그 사람이 충분히 원인 제공을 한 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안에서 이미 이성적으로도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설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더 어려운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B. 그를 용서하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치유책이 그를 용서하라 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서로에게 베풀 수 있는 두 가지 선행이 있습니다. 자선이 있는데 나누어 주는 것과 용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에서 이미 배웠습니다. 쉐어링은 육체를 위해서는 물질을 나누는 것이고 정신을 위해서는 진리를 나누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명심해야 할 것이 자신에게 하나님이 주신 소득을 항상 나누면서 사는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의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위탁하셨다. 다른 사람에게 물질이 들어갔더라면 거기에서 고이다가 썩어서 그 사람도 부패시키고 물질은 남도 부패시킵니다.
이번에 조희팔인가 희대의 사기꾼을 보면서 그 돈 먹은 뿌리가 어디까지 갔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죽었다고 화장시켰다는 사람을 엊그제도 만났다는 사람이 있으니까 귀신같은 인간입니다. 그런 사람을 수사한 사람이 그 사람 오른팔입니다. 한사람이 돈을 가지고 잘못 행사할 때 수많은 사람이 덫에 걸려서 부패하고 타락하니까 망가진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박연차 게이트도 그런 것입니다. 그런 사람 안 만났더라면 휘말려 들지 않고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전부다 휘말려 들면서 인생을 망가뜨립니다. 항상 물질을 생각할 때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다 없애버리고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고 남에게 손을 벌리고 그런 식의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물질에 대한 관점 자체가 나는 이것을 주님이 나에게 맡기셨기 때문에 골고루 퍼트려서 뭔가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개인도 가져야 하고 교회도 가져야 합니다.
이 돈은 우리 교인이 헌금한 돈이니까 우리끼리 써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물질들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제일 먼저 실천하는 장이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살면서 육체를 위해서는 물질적으로 헌신하면서 그의 육체의 궁핍한 것들을 채웁니다. 정신적으로 어려운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눕니다.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서 그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이 일은 목회자 한사람에게만 부여된 일이 아니라 그 일에 모든 성도들이 함께 참여하는 교회가 신약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진리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십시오. 교회 갔더니 내가 생활이 너무 어렵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1년 내내 도움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10년 동안 지체들이 보태주는 돈으로 먹고 쓰고 입고 전기세 내고 10년 동안을 산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내가 이래도 되나 하는 마음을 갖지 않습니까? 똑같은 마음을 영적으로도 가져야 합니다. 목회자로부터 설교를 듣고 목사로부터 전도사님으로부터 말씀을 받고 생활하고 구역장이 그렇게 섬기면서 어떡하든지 먹을 거라도 갖다 주고 하면서 이사 가면 이삿짐 까지 날라주면서 봉사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주십니다. 그렇게 신세만 지고 10년을 산 것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부끄러운 교인은 내가 별로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은 다음에는 성장을 해서 그것을 자신이 그렇게 섬김을 받았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영적인 말씀을 나누어주어서 사람을 바르게 세우는 그 일에 이바지하면서 사는 것이 진정한 교인입니다. 그게 바로 나눔입니다.
다음에 용서입니다. 용서는 이러한 나눔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계속 흐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뭐든지 주고 싶고 나누어 주고 싶고 그 사람이 진리의 말씀 안에 살 때는 기쁘고 어둠 속에 있을 때 진리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을 끊어버리는 것이 관계가 깨지는 것입니다. 미움과 원망, 시기, 질투 이런 것들로 관계가 깨어집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지를 못합니다. 단절이 생깁니다. 우리의 몸속에 어마어마한 길이의 핏줄과 신경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이 속에서 체액들이 돕니다. 뇌로 올라가는 혈관 하나가 살짝 막혀서 유통이 안 됩니다. 뇌졸중입니다. 심장에 팔딱팔딱하는데 흘러 들어가는 핏줄 하나가 막혀서 안 됩니다. 협심증이나 관상동맥 같은 것이 하나 막히면서 불과 잠깐 안에 심장의 기능이 멎으면서 죽는 것입니다. 그 속에 사랑이 계속 흘러야 합니다.
누가 그런 삶을 삽니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보면 어떤 때는 그 사람의 도움을 받고 살지만 어떤 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저 사람이 부자가 되고 내가 더 가난해지고 어려워서 물질의 도움을 받는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출렁거리면서 인생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용서의 문제도 우리가 편을 갈라서 이쪽 팀은 항상 잘못하는 팀이고 여기는 항상 잘하는 팀이어서 끊임없이 이쪽에서는 계속 용서만 해주는 그런 공동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떤 때는 이 사람이 잘못해서 용서를 받고 어떤 때는 이 사람이 잘못해서 이 사람의 용서를 받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 될 수 있으나 용서하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나 혼자 무인도에 살고 있다면 용서할 사람이 없습니다. 어차피 무인도에서 풀뿌리 캐먹고 혼자 사는데 누구를 용서합니까? 용서라고 하는 것은 공동체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개인적인 믿음이 기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그 기도의 위대한 능력을 좌우하는 관건이 되지만 그 기도의 위대한 능력도 기도하는 그 사람이 공동체의 지체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것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모두 교회와 성도의 영적인 교통을 반영하는 것이고 이 교통을 통해서 생명과 사랑이 아주 강력하게 흐릅니다. 이러한 연결이 교회를 넘어서 모든 인류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잠깐 주일날 설교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가지시고 우리도 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인성과 우리 인류의 인성 사이에 어떤 교통이 있는가?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께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할 때는 예수 잘 믿는 그런 지체들만 포함된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오늘로 말하자면 불신자들도 포함되고 심지어는 우리와는 다른 종교를 가진 이교도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도 주님의 형상을 닮은 예수님의 인성에 참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교회 안에서 넘치고 이것들이 세상에 끊임없이 흘러들어가서 이 세상을 변화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용서를 통해서 이런 막혔던 담들이 허물어지면서 이런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교회 안에서 구석구석 흘러들어가고 단절되었던 것들이 풀려지고 스며들어가면서 많은 사람들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반드시 거기에는 누군가가 희생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끊임없는 희생 속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교회의 일치를 이루어 가는 것인데 예수님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이런 뜻입니다. 기도하러 나와서 위대하신 능력의 응답을 바란다면 믿음을 가져라. 그런데 너희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네가 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나에게 보여라. 그게 바로 예수님이 마지막 꼭지처럼 붙여 놓으신 경고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서 드리는 간절한 기도이고 이 간절한 기도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데 간절한 기도 없이는 자기반성도 없습니다. 결국 기도에서 끊임없이 뒤로 물러가고 나면 마지막에는 기도라고 하는 은혜의 수단 자체를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실천적인 무신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과연 생명이 있겠느냐 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기도는 마음의 활발한 작용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로 하고 경건한 기도도 온전한 사람을 대신하지 못한다. 어떠한 열정과 어떠한 경건한 모습도 온전한 사랑을 대신하지는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기도의 문이 많이 막혀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며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무조건 기도의 열정만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말고 오늘 가슴에 손을 조용히 얹고 생각해야 합니다. 공동체 속에서 혹은 가족 속에서 여러분이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할 때 그는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 하나님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짊어지고 기도하러 나온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 맺은 관계가 올바르지 못할 때에는 그것을 진심으로 내려놓고 그것을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진실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진실은 어떠한 열정이나 헌신보다도 우월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진리에 부합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떠난 사람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된다면 그것은 재앙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분들은 여러분이 한번 깊이 생각해 보고 내가 이렇게 영적으로 무기력한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면서 용서와 사랑으로 다시한번 기도의 문을 열고 마음에 얽매인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주님을 붙들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의 집이 되게 하라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녹취자 : 오희열
I. 본문해설
때는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때에 예언하던 선지자의 시대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약 740년경에 선지자로 소명을 받아서 오랜 기간 동안 예언 활동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그리고 나아가서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해서 심판하셔서 그들이 큰 고난을 받을 것과 하나님이 결국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회복시키실 것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주권을 다루고 있습니다.
II. 이스라엘의 회복
제일 먼저 이사야서 후반부를 보면서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입니다. 1장에서부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현재의 영적인 상태와 신앙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보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비관적입니다. 1장부터 39장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허다한 죄악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이루어질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40장에 들어서면 어조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39장까지가 준엄한 아버지의 책망이었다면 40장부터는 인자한 어머니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독이시고 그 백성들을 위로하고 다시 회복시키시는 영광스러운 부흥의 광경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후반부의 위대한 영적인 회복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낙관적인 전망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시작을 합니다.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스라엘 백성은 풀이요, 그 모든 육체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도다.”라는 선포가 이루어지고 이것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영적인 회복이 예언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이 세상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는 앞길을 이스라엘의 마음에 예비할 때, 바로 그 사람이 광야의 사람이었습니다. 이후에 53장에 와서는 그 유명한 고난 받는 종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나오고 이것을 통해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적인 이스라엘의 대속이 이루어질 것이며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육적인 이스라엘의 껍질을 깨고 새로운 영적인 백성들이 신약이 교회를 이루실 장엄한 예언들이 울려 퍼지기 시작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 모든 구원사적인 전개의 과정을 통해서 당신의 한 성품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아가서 온 인류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하나님은 결코 당신 자신이 택한 백성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영광스러운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약의 교회에 증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이사야서 후반부가 없다고 가정하고 전반부만 본다면 우리는 율법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정죄하고 그 모든 백성들을 마치 손끝에 붙은 벌레처럼 더럽게 여기셔서 털어버리고 발로 밟아버리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밖에는 느끼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66장까지의 모든 전망을 가지고 전반부를 바라보면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까지도 사실은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순전하게 보전하여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영광스런 구원의 계획을 이루고자하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은 비록 타락하고 지극히 부패하여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 이방인들에게 포로로 끌려가야할 비참한 처지에 놓여있지만,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영광스러운 때가 온다고 하는 것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III. 영적 회복의 때에
그것은 바로 영적인 회복의 때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선지서에서 혹은 예언서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선지자의 두 전망이 교차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예언하시고 역사 속에서 국지적으로 그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 한 가지 전망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그러한 국지적인 성취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러한 육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경륜들이 이제 우주적인 전망을 가지고 종말론적으로, 영적으로 성취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항상 이 두 가지의 전망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교차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울부짖으며 종살이에서 고통받는 것을 애굽에서 들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리라.” 하나님이 그 약속을 따라서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강력한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십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게 하십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광야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놀라운 구원의 역사는 우주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성취되는데 그것은 바로의 지배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폭압을 받고 고통을 받았던 것처럼, 이제 신약시대의 백성들이 사단 의 권세 아래 눌려서 고통을 받고 억압을 받으며 괴롭힘을 당하던 그들을 도저히 인간의 지혜로는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들을 그 죄에서 건져 해방시키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세례 받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마치 홍해를 건넌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례를 통해 구원하십니다. 그들을 광야에서 안전하게 인도하여 가나안에 들여보낼 것이라는 그 약속은 국지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서 가나안을 정복한 것으로 성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종말론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온갖 시련과 고난을 이기고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러 영광스러운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으로 종말의 드라마가 이루어집니다. 개인적인 이런 드라마는 우주적인 완성을 지향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살아있는 자를 거룩하게 하심으로 이제 흔들리지 않고 결코 쇄하지 아니하고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세우는데, 이것이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이 바라보았던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전망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중적인 전망을 가지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은총과 이스라엘의 회복,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언젠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들이 일어날 텐데,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과 연합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56장에서 여호와께 연합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특별히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차별받지 않는 날들이 온다는 것, 심지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고자라도 백성들 중에서 율법을 따라 끊어지지 아니하고 율법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이 모두 이스라엘의 품속에서 보호와 사랑을 받으며, 모든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우주적인 하나 된 교회가 되는 시대가 열릴 것을 전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회복의 때에 두 가지 일들이 일어나겠다고 성경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A. 성산으로 인도하심
첫째는 하나님이 그들을 ‘성산’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산’, ‘거룩한 산’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의 처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거룩한 땅, 거룩한 산지라고 불리는 ‘시온 산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른 땅’, 혹은 ‘요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시온’은 비록 자연적인 말의 뜻으로는 특별히 호감을 주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시온’이라는 말의 영적인 의미가 신학적으로 덧붙여졌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있어서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축복의 땅’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거기에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왕권이 행사되고 여호와의 위대한 통치가 이 시온을 통해, 예루살렘을 통해 온 세상에 전파된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중심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나 신약 시대에나 어디든지 계시는 분입니다. 아무 사람도, 어떠한 사물도, 어떠한 우주 공간의 무한한 넓이도 하나님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처소에서 동일하게 경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한 성소를 택하십니다. 그곳을 모든 땅과 구별하여 거룩하게 선택하십니다. 왜냐하면 거기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광야에 이동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심적인 정신적 지주와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막이었습니다. 그 재료는 물돼지 가죽과 사람들이 흔히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옷감, 실, 금 등을 가지고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천막이 그토록 거룩하게 여겨졌던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이 어디에 가든지 그 성막위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그들은 그 성막을 가지고 움직였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바를 따라 멈출 때는 거기에 거룩한 성막을 치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그 성막을 중심으로 주위에 진을 치며 하나님의 인도가 있을 때까지 머물며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소 사상이었습니다. 이제 이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온 후에는 하나님이 일정한 장소를 지정하시고 결국은 궁극적으로 예루살렘으로 그 장소가 고정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약시대처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항상 머물러 계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인 율법을 주셔서 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의 가르침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규율하게 만드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규율 받는 질서 잡힌 선한 삶은 이방인들에게 표징이 되어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복한 삶을 보여주게끔 경륜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원리적으로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항상 제사를 드려 그들의 죄를 용서 받게 하시고 그들이 그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은혜를 공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과 제도와 나라와 그 모든 백성들을 다스릴 영적이고 종교적인 지도자들을 주셔서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회의 제도는 이 세상 나라처럼 그 나라의 군대나 정치적인 권력 하나 위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 그리고 그 언약에 충성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리고 당신의 언약에 헌신하시는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연합 속에서 이스라엘 왕국은 번영하면 번영할수록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경륜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어떤 것이 좋은 삶이냐고 한다면 우리가 우선순위를 정한다면 가장 좋지 않은 것은 하나님도 욕보이고 자신도 비참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좀 더 나은 삶은, 비천하게 살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못하다고 할 수없는 삶은 자신도 존귀한 사람으로 살고, 자신도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품위를 인정받고 모든 사람에게 존중을 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재물이 많고 사회적인 지위가 올라가고 권력을 손에 넣게 되면 하도 사람들이 부패하니까 그렇게 부패한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놓고 본다면, 잠언에서 지혜자가 기도했던 것처럼 “부자도 되지 말고 가난한 자도 되지 말아서 그냥 평범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하는 기도가 적합할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번영이 우위에 있는지, 신앙이 우위에 있는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우선순위에 오는지,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사는 것이 우선순위에 오는지를 물을 때에는 우리가 대답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한 많은 복을 주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온 세상에서 존귀한 나라, 존귀한 민족, 그래서 여호와의 율법이 예루살렘을 통하여 온 세상에 강물처럼 흐르는 것을 보여주는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그 위대한 통치를 이 모든 열방 나라도 다스리시지만 당신의 그 위대한 통치, 거룩한 임재의 영광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나타내 보시이시고 시온에서 당신의 위대한 왕권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택과 독점적인 은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의 표현이고, 그래서 그 예루살렘에서 종종 영광가운데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의 발자취를 배우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비록 수로는 아주 적은 민족이요, 가지고 있는 땅 덩어리의 크기로 보면 당시의 애굽이나 그 당시의 위대한 나라에 비할 데 없는 아주 하찮은 나라였지만, 온 땅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자신들과 특별한 언약관계에 있는 아버지시라는 사실에 대해서 그들은 깊이 감격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할 소명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선택과 독점적인 은총을 상징하는 것인 동시에, 신약의 교회가 어떠한 복을 받게 될 것인가를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사하실 때에 그렇게 하나님이 당신의 성호가 있는 예루살렘과,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왕권이 통치하던 시온을 중심으로 역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 세상 그 어느 장소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충만한 생명으로 계시고 이제 모두 구원을 얻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지는 자 마다 그 하나님의 신령한 시온의 임재가 그 사람에게까지 미치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누리고 있는 성령의 내주하심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언제나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하고 그분의 임재 안에서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빈부나 귀천이 없이 예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런 놀라운 임재를 거의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소에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이 특별히 은총을 베푸시는 그때에 그 사람들이 이런 놀라운 임재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누구이든지, 우리 중에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인 사람들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 모두 이방인이요, 구약의 율법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외인이요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과의 연합 안으로 우리를 불러들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신 그분 위에, 그분 안에, 그분과 함께 우리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고, 우리가 그분께 영적으로 접붙여지자 하나님은 우리 무지렁이 같은 인간들에게 언제든지 말씀 안에서 성령 안에서 우리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자, 우리가 지금은 비록 신앙이 식고 기도가 막히고, 영적으로 둔해져있고, 혹은 우리가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허물이 있어서 주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잠시 막힘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회개하고 영적으로 다시 회복되어져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다시 은혜를 되찾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우리 앞에 말씀의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의 심령을 일깨워 보십시오. 우리의 심령에 다시금 하나님의 성령의 불이,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주님의 신령한 임재와 놀라운 역사가 우리의 심령 속에 일어납니다. 죽었던 심령이 살아나고 어두웠던 이 세상의 절망의 그림자들이 물러나가고 삶의 목적이 없이 무미건조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불타는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할 인생의 목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은 걸어 다니는 예루살렘이요, 움직이는 시온이라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들을 성산을 인도하신 후에 당신의 집에 있게 하시겠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집에서 그들에게 기쁨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서부터 우리는 늘 주님을 섬기며 살아야할 소명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소명이 없다면 그는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갈 길을 잃은, 불쌍한 길 잃은 양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가 인생의 어떤 목표를 발견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의무감만을 가지고 그것을 하는 것은 그 일을 영구히 할 수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을 제가 늘 체험하는 것은 식생활입니다. 사람들이 체중을 줄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억지로 먹고 싶은 것을 안 먹고, 먹기 싫은 것을 먹는 방법, 그리고 하기 싫은 운동을 억지로 하는 것을 통해서는 지속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기’가 역사하는 동안에만 가능합니다. TV를 보거나 잡지를 보면서 ‘나도 저 여자처럼 날씬해져야지.’ 생각 하면서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불만족하고 오기를 품습니다. 그리고 다이어트에 돌입합니다. 이런 다이어트가 늘 실패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그리고 애꿎은 다이어트 약이나 식품을 잔뜩 구입해서 그 회사들만 배불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몸에 좋은 것이 자신에게도 좋아지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먹고 싶은 것을 참아야겠다고 수도하듯이 해서는 어느 순간에 정신 줄이 끊어질 때, 그동안 못 먹었던 한을 풀듯이 퍼먹게 됩니다. 그리고는 실패하는 것입니다.
제가 빵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언젠가 TV에서 엘비스 프레슬리가 불우한 삶을 살았는데 그 사람의 유모가 만들어주었던 음식 중에서 거의 중독처럼 좋아하던 토스트가 있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나서 그것이 너무 먹고 싶었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도 계속 들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쇼 호스트가 누가 나타나서 판매를 하느냐에 따라서 매출이 오르듯이 성경을 맛깔나게 설명하는 구역장을 만나면 성경도 읽게 되고 책도 읽게 되고 공부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진짜 자기도 지겹게 먹기 싫은데 건강을 위해서 한 번 먹어보라고 강매하듯이 파는, 일당을 채우려고 하는 영업사원처럼 말씀을 가르치는 구역장을 만나면 그 해에 굉장히 힘들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구역장인지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도톰하고 조직이 치밀한 빵 하나에 버터를 발라서 양쪽을 노릇노릇하게 굽습니다. 그리고 또 한 장을 노릇노릇하게 굽습니다. 버터를 충분히 넣으셔야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땅콩버터를 푹 퍼서 충분히 펴 바릅니다. 그 위에 바나나를 슬라이스해서 도톰하게 깝니다. 그리고 그 위에 모짜렐라 치즈를 살짝 얹어서 프라이팬에 데워서 녹입니다. 그 위에 슈거 파우더를 충분히 뿌리고 다른 빵을 덮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티슈로 싸서 먹는 것입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이게 몇 칼로리쯤 될 것 같습니까? 1820kcal입니다. 하나만 먹으면 여성의 하루섭취 열량이 됩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만들어 놓으면 하나만 먹고 나서 충분하다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양이 적은 사람은 반 개를 더 먹고 우리 같은 사람은 한 개를 더 먹어야 합니다. 그러면 3600kcal가 넘어갑니다. 먹성이 좋아서 하나를 더 먹으면 5500kcal 에 가깝게 됩니다.
결국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좋아하는 취향이 육체적으로는 건강에 부합하지 않는 취향이 많고, 영적으로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건강한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취향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다가 어려서부터 엄격한 절제 속에서 잘 살던 사람은 괜찮지만 그게 잘 안 되어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불쑥불쑥 욕망이 솟구치면서 어느 한 순간에 욕망은 있고 성향은 안 바뀌었는데 그것을 해야 된다고 할 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다가 정신줄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미친 듯이 복수하듯이 퍼먹는 것입니다. 누구를 향한 복수인지는 우리는 모릅니다. 그래서 안 됩니다. 좋은 방법은 고기나 앞서 말씀드린 그런 불량식품 같은 토스트보다 몸에 좋은 것을 먹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이 참 맛있다는 느낌이 들도록 자기 정신을 훈련해야합니다. 그러면 진짜 그 속에서 맛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일이 너무 즐거워져야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되지. 내가 오늘은 걸어야지.’하면서 7~8km를 걷는데 살을 빼기위해서 걷는다고 하면 고역이 됩니다. 그것 때문이 아니라 걸어갈 때 코끝에 부딪히는 가을바람, 그리고 풀벌레소리들, 물 흐르는 소리들, 오가며 스쳐가는 가을의 향기, 저녁 들판에 피어있는 국화꽃의 흔들거림을 보는 것이 즐겁다고 생각하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그 시간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성향까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또는 해야 하기 때문에 의무감으로 기도한다고 하면 그것을 얼마나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우리는 종종 깊은 기도의 사람, 그리고 정말 기도에 헌신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 사람들은 괴로움을 이기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라는 간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도가 노동이 아니고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들에게는 굉장한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 한 사람이 있었는데, 너무 기도하고 싶었는데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을 한 것입니다. 문병을 갔더니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을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쁜 회사에 가지 않고 병원에 조용히 앉아서 마음껏 기도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성향이 변화되어가야 우리의 삶이 아름답고 하나님 앞에 즐거운 것입니다. 자식들 교육시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자기 자식이 막 자라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자녀들을 억압하고 금지하고 징벌을 내리는 것만으로는 자녀들의 삶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교회 교인 중에 어떤 대학교수님이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대생들이 수업시간 혼전동거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데 많은 학생들이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너도나도 발표를 했답니다.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나오더니 “내가 해 봤는데 괜찮다. 너희가 모르는 좋은 점도 많이 있다.”고 발표를 하는데 앞에 발표한 학생들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 아우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이 교수님도 상상할 수 없었던 아주 모범적이고 공부도 잘하고 얌전하게 보이는 학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 대해서 그런 방식을 가지고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 가장 훌륭한 보험은 이 자녀들이 깊이 회심해서 주님의 사랑에 매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잘못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이 아플 때, 어렸을 때 부모에게 맞는 회초리가 더 아팠습니까, 주님 앞에서 회개하며 느끼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까?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감시를 피해서 잘못된 삶을 살려고 마음을 먹으면 부모가 그것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에 회심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리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 사랑에 매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해서 기도시간에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느끼고 그 말씀 앞에서 자기를 돌이킬 수 있는 자기복원력이 있는 은혜의 주권에 좌우되는 사람으로 길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 앞에 살아야할 삶이, 그 아이에게 성향이 되도록 기도하고 그러한 환경을 조성하고 그런 가운데 아이가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당신의 집에서 기쁨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바로 성전이 “내 집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적인 회복의 때에 두 번째로 나타날 현상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기도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B. 기도의 집이 됨
성경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히브리어 성경에 “이것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만민이 기도한다.”는 것으로 만민을 주격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또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민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해석이라도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저는 문맥으로 볼 때에 여기 등장하는 이방인의 이야기와, 혈통적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심지어는 고자까지도 모두 모여서, 또 이스라엘만이 아닌 모든 열방의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라고 해석하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결국 혈통적인 이스라엘의 껍질을 깨고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천하 모든 만민들에게 전해질 종말론적인 위대한 복음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는 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라.”는 이사야 56장 7절이 두 군데에서 인용이 되는데 마태복은 21장과 누가복음 19장입니다. 모두 성전을 정결하게 하시는 사건, 마태복음 21장, 누가복음 19장, 요한복음 2장에 이어서 나오는데, 요한복음에는 이 인용문이 나오지 않고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사건만이 나옵니다.
성전 정결 사건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보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돈을 바꾸고 비둘기를 팔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거기서 왜 비둘기를 파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원래 맨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이 바칠 제물을 스스로 가지고 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동거리가 멀 때에는 이 짐승들을 가져오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짐승을 먹여야 하고 배설물들을 처리해야했고, 오다가 그 짐승들이 다치거나 병이 들면 흠이 있는 제물이 되면 제사에 드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그 제물들을 사서 바치기 시작했고, 마치 지금으로 말하자면 구내매점처럼 즉석에서 사서 제사를 드리는 형태가 된 것입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은 그 당시에 히브리 돈, 헬라 돈, 로마 돈 이렇게 세 가지 돈으로 거래를 했습니다. 그런데 헬라 돈(그리스 제국 때 쓰이던 돈)과 로마돈은 명목가치가 실질가치보다 컸습니다. 이것을 경제학에서는 악화라고 하는데, 동전에는 1만원이라고 쓰여 있는데, 그 금속을 녹이면 1만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 돈 세겔은 명목가치와 실질가치가 일치하는 화폐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명목가치와 실질가치가 일치하지 않는 로마 돈과 헬라 돈을 가증하다고 보았고, 사회생활에서는 그 돈으로 통용을 하지만 제사에서는 바칠 수가 없어서 히브리의 세겔로 바꾸어서 드린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돈벌이로 삼은 탐욕적인 사업의 하나라고 해석하지만, F. F. 브루스라는 성경학자는 이것에 대해서 그런 해석에 대한 명백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도 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사건은 종교지도자들이 그것을 통해서 어마어마한 돈벌이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건 하나는 그렇게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비둘기를 팔거나 돈을 바꾸는 이 모든 일들은 성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는 무엇인가 잘못된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평소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다가 아주 강력하게,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폭력적으로 돌변하셔서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자들을 내어 쫓으셨다고 하신 대로 당신의 진노를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에서 그렇게 과격하게 행동하신 적이 없으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그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시면서 얼마나 비통해하셨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결 사건 이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왜냐하면 나의 집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성경을 정결하게 하신 것과 기도의 집이 되는 것 사이에 뭔가 상관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시대에 적용을 해 보십시오. 첫 번째는 하나님의 교회에 적용해보고, 두 번째는 우리 개인의 삶에 적용해보십시오. 교회에 적용한다면, 단순히 교회에 매점이 있느냐 없느냐를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어차피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여러분이 질병을 치료하기위해 가는 병원이, 오히려 병을 옮아오기에 가장 쉬운 곳이라는 사실을 얼마 전의 메르스 사태로 입증이 되었습니다. 병원 근처에도 가지 않은 사람은 메르스에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원에 가서 메르스에 감염되었습니다. 이번에도 눈을 수술한 사람이 패혈증으로 사망했는데, 보통 이런 경우는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알고 보니 수술을 위해서 써야하는 약의 재고가 없어서 쓰레기통을 뒤져 오래된 약을 모아다가 주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 약은 콩으로부터 생산되는 것이라서 몇 시간 안에 사용하지 않으면 변질되는 것인데 오래된 것을 모아 사용해서 사람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들께는 죄송합니다만, 이렇게 가장 비 의학적인 일들이 병원에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병원은 건강한 사람들이 오는 곳이 아니고 온갖 병자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원은 위생관리를 철저하게 해서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더 내야한다고 말씀하시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고 보험공단과 의논해보시고, 우리는 그렇게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은혜로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점에서는 거룩한 곳이지만 진짜 이 세상에서 예수 없이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은 세상에 다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 문제가 많은 사람들, 혼자서 자신의 인생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그들이 참 좋은 사람들이지만 은혜가 떨어졌을 때 보면, 그가 왜 예수께로 나올 수밖에 없는지 진면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 시점의 차이는 있지만, 몇 번씩은 우리의 정체를 드러내며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그러려니 하고 생각해야합니다. 죄와 불순종과 잘못들을 그냥 접고 넘어가라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의 바탕이 원래 그럴 수밖에 없다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지만 모든 진정한 교회의 회원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그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새로워진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고 나의 영혼을 깨끗하게 씻어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우리의 마음에 어떤 신령한 기쁨이 가득 차는지도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항상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그런 사람들이 모인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도록 공동체적으로 노력해야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탐욕의 요소들과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요소들, 그리고 교회 속에서 일어나는 올바르지 않은 관행과 같은 일들을 우리가 계속 해왔다는 이유 때문에 그대로 방치하지 말고 그것들을 계속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온전하게 하고, 우리 개인이 온전하게 되는 것처럼 교회가 온전하게 되어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공동체가 완전한 공동체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교회를 하나의 거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다면 그 사람이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돌아보고 번영할수록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춰보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사람일 것입니다. 교회도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성찰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자신 홀로 교회가 아니라 여러분이 보기에는 이 건물에 모든 여러분이 교회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나누어지지 않는 당신의 몸과 이루고 있는 연합 안에서 온 교회는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주신 하늘과 이 땅의 자원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베풀고, 여러분의 기도와 섬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재능을 통해서 어디엔가 구겨져 있던 교회들이 펼쳐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이바지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로 세워지는 것, 이것이 하나님 자녀의 행복입니다. 여러분가운데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헌금해서 우리끼리 쓰면 된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재앙에 가까운 사고방식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 돈을 많이 벌고, 자기의 것이라고 여기고 분에 넘치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다면 그의 신령한 신앙을 여러분이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 웨슬레가 말했습니다. “당신의 지갑이 회개하지 않는 한, 나는 여러분의 회개를 믿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신자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끊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하늘 자원과 육적인 이 세상의 자원들을 사용해서, 이것들이 악한 사람에게 흘러들어갔다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에게 흘러들어갔다면 쓰였을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것들이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 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 자체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탐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만약 우리 개인에게 적용해본다면, 우리의 마음속에 이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비록 그것이 탐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닐지라도, 브루스라는 학자가 말한 것처럼 탐욕 때문에 그런 제도가 생긴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성전인 우리의 몸에서 그런 이익을 추구하는, 말하자면 잠시 후면 이슬처럼 사라질 자신의 이익에 매달려서 신앙의 정절을 버리고 탐욕으로 자신의 마음을 더럽히는 그 속에서는 기도가 울려 퍼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그 기도자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 모두를 짊어지고 나가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 삶을 넘어선 기도도 없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기도도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전심으로 성령의 감화를 받아서 인격적으로 자신을 물처럼 다 쏟으며 기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 놓아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강하신 분이었지만 기도하실 때에는 이세상의 어떤 인간보다도 연약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기도에는 늘 눈물이 있었고,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기도 하시는 듯이 온 몸의 땀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그 땀이 피가 되기까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고, 환경과 싸우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쏟아 부으시는 간구의 소원을 하나님께 올리셨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대부분 개인의 번영, 소원의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를 바라보는 성경의 관점과는 다릅니다. 성경의 관점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믿은 사람, 그래서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새롭게 설정한 사람들이 주님의 마음 안에 있는 이 세계를 향한 경륜, 그 경륜을 이루는 한 부분으로서의 그 사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이것을 자신의 인생관으로 받아들고, 그것을 자신의 인생의 목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보니까 눈물 나는 사연이었는데, 뱃속의 아이를 하나 남겨두고 남편이 6.25때 행방불명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인이 그 아이를 65년 동안 키웠습니다. 평생을 수절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편을 만나서 한 이야기가, “65년 동안 내가 이렇게 아이를 길러 놓았으니 벌금이라도 내셔야지요.” 했답니다. 이런 부인이 아이를 낳아서 아빠도 없이 그 핏덩이를 기를 때에 아이를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아이가 65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때는 자식이 가지고 있는 소원이 그 엄마의 소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일치가 가져다주는 의지의 합치입니다. 사랑은 의지를 합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꿈이 없습니다. 그 아들이 잘 되는 것이 자기의 꿈입니다. 그것과 맞서거나 상관이 없는 꿈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자식이 무슨 꿈을 갖든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죽든지 살든지 자기가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인 것입니다. 사랑은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위대한 구원의 경륜, 그 경륜에 이바지하기위해 살아가야 하는 우리 개인의 삶이 하나의 아주 고귀한, 우리의 목숨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고귀한 가치가 되어서 우리의 마음속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 소명을 따라서 사는 것이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리스도인은 행복할 수 없고, 혹시 그가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은 가짜 행복일 것입니다. Paper Rose, 종이로 만든 장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향기가 나지 않고 생명이 없습니다. 수없이 물을 주고 비료를 주어도 그것은 시들지도 않지만 꽃피는 법도 없습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개인적인 소원을 이루는 수단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기도를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성숙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면서는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교회가 그리스도안의 연합임을 보여주는 수단이 기도인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 안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있습니다. 우린 서로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지만 생각은 수없이 많습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겠다고 하면서 움직이지만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해야겠다고 하지만 유복자로 낳은 아이가 아프다는 소식이 들리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그 아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것이 어미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러한 뜻들을 이루어 드려야 한다, 우리가 이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할 때에 모아지지 않는 교회는, 쉽게 말하자면 마음이 흐트러져서 정신줄이 똑바르게 하나님을 향해 고정되어있지 않은 산만한, 정신과 영혼의 아름다운 조율이 흐트러져버린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상태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에서 띠를 두르고 깃발을 높이 들면서 사람을 충동질해서 하나의 마음으로 묶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5시만 되면 온 운동장과 거리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길 가던 사람들이 제자리에 멈춰서 왼쪽 가슴에 손을 대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유치한 일이었습니다. 한 나라라고 하는 것은 백성에게 무한한 복종과 종교에 가까운 헌신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백성들이 ‘이 나라를 위해서는 내가 기꺼이 봉사할 가치가 있구나, 참 자랑스럽구나.’라는 생각을 백성들에게 안겨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상이 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인 사상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그런 나라가 되기 위해서 더 투명하고 정의롭고 자비심이 있고 공정한 세상이 되도록 노력해서 태어나는 후손들이 정말 우리나라가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해야 합니다. 자랑스럽지도 않은 것을 자랑스럽다고 강요하고 때려서 자랑스럽다고 말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어떤 운동이나 누군가의 지시와 강요로 인해서 꾸며진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자발적으로 느끼면서 하나님이 한 사람 한사람의 영혼을 어루만지시고 교제하시는 성령의 감동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지금 우리 공동체 전체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통일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깨달았다고 하고 달려가면서 “나를 따르라!”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예민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주님의 심정이 어떤 심정인지 우리가 느낄 수 있어서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준엄한 경고가 없어도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 하나님을 그렇게 아프게 해드렸다는 사실 때문에 아파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결국 그리스도의 분신처럼 함께 살고 그리스도께서 아파하셨던 것처럼 똑같이 아파하고 그리스도께서 분노하셨던 것처럼 또 함께 분노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용서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그리스도의 분신처럼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도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이런 모든 위대한 부흥은, 부흥이 오기 전에 항상 하나님은 그 조짐을 보이셨습니다. 그 조짐은 주님의 마음이 부은바 되어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던 사람들을 결집시키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간절히 기도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던 고넬료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던 베드로의 기도의 만나면서 이방 선교의 위대한 장이 열리게 됩니다. 이 위대한 이방선교의 장을 바울이 연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혼자 연 것이 아니라, 기도하던 또 다른 사람 고넬료와 함께 하나님의 위대한 이방인의 부흥의 시대를 여는 도구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17세기 아일랜드의 올드스톤이라는 지방의 부흥은 유명합니다. 제임스 그렌드닝이라는 병약한 사람이 그 아일랜드의 부흥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각성하고 각성된 사람들이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기 시작할 때, 그 유명한 올드스톤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얼스터에서 일어난 위대한 부흥, 1620년에 있었던 엔트리밋 기도회 같은 것들은 엄청나게 많은 지역에까지 하나님의 부흥을 실어 나르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사소한 선교의 역사는 재능 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지축을 뒤흔드는 동토의 땅을 녹이고, 강철같이 얼어붙은 심령에 불을 지르는 위대한 선교의 역사는, 그리고 굳게 닫힌 빗장을 부수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강물처럼 밀려들어가는, 획을 긋는 위대한 역사는 재주꾼이나 그냥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실한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주님의 분신처럼 자신을 쏟아 부으며 기도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기도하는 집, 기도하는 것이 특징이 되는 것과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것은 밀접한 상관성이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사람의 복음신앙의 깊이는 그의 기도의 깊이를 좌우하고 기도의 진실성의 토대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서 점령된 마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에 젖은 사람들만이 예수의 분신처럼 정화된 동기로서 하나님 앞에 매달릴 수 있습니다. 선교운동과 행정의 계획보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생명입니다. 모든 것을 아주 기가 막히게 정리하고, 아주 탁월한 행정의 계획에 따라서 효율적인 교회를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죽은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은 마치 결코 물이 흐를 수 없는 땅에 세워진 댐과 같은 것입니다. 물이 없는데 그 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나는 오늘 사경회를 마치며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먼저 말씀 안에서 자신을 진실하게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고요히 하나님과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마음을 모아 먼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그 마음 안에 있는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것들을 내어 쫓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온전히 바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하는 지체들과 기도의 연합을 이루십시오. 교회의 영광을 위해, 그 교회를 통해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의 지극히 큰 영광을 위해서 주님께 간절히 빌어, 이 교회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교회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