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변신』독서 토론회
녹취자 : 오희열
오늘 카프카의 “변신”을 읽은 것에 대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카프카의 “변신”은 제가 열여덟이나 열아홉 쯤에 읽었고, 정리는 안 됐지만 많은 깨달음을 갖게 했고 그러다가 40년의 세월이 지나고 지난주에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것들이 다가오고 그때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조금 명료해졌습니다. 여러분만할 때 제가 읽었으니까 그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오늘 토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개떡같이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쨌든 일단 이것이 길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선 사람들이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극단적인 방황을 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물론 더 심한 방황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이 선택받은 백성이고 또 어찌 보면 나는 여러분이 가보지 않은 길을 가봤기 때문에,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고등학교 때 제가 극단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여러분이 가보지 않은 방황의 길을 내가 더 많이 걷고 매일매일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인생을 지나면서 받은 복음이었기 때문에 그 복음이 값졌는데 그것이 나의 그런 고민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회심이 저절로 가르쳐주질 않았습니다. 정말 긴 세월이 지난 후에야 공부를 하면서 이것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을 먼저 얘기하자면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마지막 시간에 뽑기를 할 것입니다. 그 뽑기의 번호와 저 책의 번호, 저 책은 모두 제가 쓴 책입니다. 그 번호를 맞춰서 각자 가져가는데 제일 비싼 것은 가장 최근에 나온 4만 5천원짜리 책부터 5천원짜리, 아니 한 만원짜리 책까지 골고루, 옛날에 쓴 책, 지금 쓴 책 다양하게 있는데 당첨이 되면 이게 그냥 하나님의 뜻이려니 하고, 끝까지 읽어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하나님께서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을 발견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제일 두꺼운 책에 걸리는 사람이 제일 불리할 것입니다. 650페이지를 읽어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래도 뽑기는 좋은 것입니다.
오늘 제가 선택해 보니까 이찬희? 이찬회? 안 왔습니까? 이런 일이? 그럼 이요세. 이요세와 이찬회의 질문이 거의 같은 한 묶음의 질문입니다. 질문을 듣고 답변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 그레고르가 사람에서 벌레로 변신하게 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찬회가 안 와서 제가 대신 질문을 읽었고, 이요세는 자기가 질문을 해 보십시오.
질문 ) 그레고르는 자기가 벌레가 되는 말도 안 되는 변화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였습니까? 그의 가족들은 아들과 엄마의 죽음을 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까?
답변 ) 여러분은 이 카프카의 “변신”을 어떻게 읽었습니까? 여러분이 받은 느낌을 한두 줄로 표현을 해 보십시오. 그 옆에 있는 학생, 읽었습니까?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그 소설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자기는 누구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레고르라고 생각했습니까? 본인이 그레고르가 된다고 생각하니까 어떤 마음이 들었습니까?
(……)
자라면서 집에서 벌레같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았습니까? 엄마 아빠가 너무 화나면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이 벌레같은 놈, 벌레만도 못한 놈, 그레고르만도 못한 놈. 이렇게 말입니다. 그 옆에 학생은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가족들에게까지 버림받았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안타깝긴한데 그레고르를 보면서 평소에 하지 않던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까? 이런 생각을 해보진 않았습니까? ‘내가 그레고르처럼 벌레가 된다면 우리 가족도 이럴껄?’ 하는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
(해 봤습니다.)
그때의 기분이 어땠습니까?
(그런 상황을 겪고 싶지 않고 피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네, 그 뒤에 자매, 선생님입니까? 학생입니까? 비슷해서 물어본 것입니다. 만약에 자신이 그 벌레가 된다면, 그래서 가족들에게 그런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습니까? 혹시 벌레가 안 되었는데도 그레고르처럼 취급을 받고 있다고, 가족들을 이간질시키려는 것은 아니고, 그런 느낌을 받지는 않았습니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자매가 그레고르가 되면 가족들이 어떻게 해 줄 것 같습니까? 자매가 그레고르처럼 벌레로 변했다면 가족들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그레고르처럼 가둬놓고 키울 것 같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그 벌레가 죽었을 때 그 가족들이 좋게 느끼셨습니까? 아니면 벌레로라도 살았으면 하고 느끼겠습니까?
(그래도 살았으면…)
아, 그래도 살았으면 했을 것이다? 건강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이정도로 정리하고 제 얘기를 하겠습니다.
카프카는 기본적으로 니체의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니체의 영향은 철학계에서 거의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근대까지 계속되어왔던 사상을 해체시키고 인류를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나아가게 하는 포문을 연 사람입니다.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19세기 이후의 모든 철학자들은 니체의 영향 아래 있다, 혹은 그 영향을 받아서 따라갔거나 거기에 저항을 했을지 모르지만 니체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니체를 철학자라고 생각하는데,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가 쓴 작품들은 사실 철학과에서 읽지 않고 문학으로 읽습니다. 그런데 그 문학 속에 누구도 예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폭탄적인 사고를 가지고 문학작품을 써 내려 간 것입니다. 니체가 그렇게 아무도 완전히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했느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미 아주 옛날처럼 니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있었지만 니체는 그 모든 것을 집대성해서 그것보다 훨씬 더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하기 시작하면서 소위 이야기하는 “신은 죽었다”로 표현되는 작품들을 수없이 써 내려갑니다. 10대 때에 이 작품에 깊이 심취해서, 잘은 모르지만 니체의 작품은 거의 다 읽었을 것입니다. 26권으로 되어있는 니체 전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니체에 따르면 과연 인간에게 주체가 있는가에 회의를 갖게 만듭니다. 이야기를 하자면 무지하게 기니까 간략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그레고르가 어느 날 짐승으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벌레로 변하게 됩니다. 발이 여러 개 달린 커다란 풍뎅이 같은 것으로 변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풍뎅이로 변한 후에 가족들의 태도입니다. 아빠가 가족들을 위해서 충실하게 돈을 벌고 가족의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서 미친 듯이 헌신하는데 알고 보니까 아빠가 딴 주머니를 차고 있었던 것입니다. 돈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으로 시작해서 끝까지 자기를 생각했던 사람이 엄마와 누이였는데 마지막에는 가족들이 모두 “이것은 그레고르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길 원하고, 그레고르는 미친듯이 자기가 그레고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고, 그런데 가족들이 서서히 외면하면서 마지막에는 죽게 되고 그가 죽고 나자 가족들은 사뿐하게 야유회를 가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이 납니다.
이 소설을 여러분 나이 때에 읽고 나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이게 인간이구나! 지금 가족이니 친구니 하는 많은 것들이 있어서 서로 얽히고설키며 살지만 내가 어느 정도 조건이 맞으니까 그런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지, 내가 그런 상황이 된다면 이 관계를 계속 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 자체는 정말 나 밖에는 없는 외로운 존재구나, 나는 진짜 홀로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이 사람이 그려낸 것입니다. 알베르 까뮤의 “이방인”같은 작품도 대부분 그런 것이고, “성채” 혹은 “성의”라고 번역된 카프카의 다른 작품도 역시 그런 인간의 완전한 소외와 고독의 실존을 그려낸 것입니다. 여기서 가족들이 오빠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묻는데, 카프카에 의하면 그게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이다, 부자간에 끊을 수 없는 정이다, 사제 간의 정이다, 친구다, 남녀 간의 뜨거운 애정이고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나발 같은 것들은 거지 발싸개 같은 것들이고 이런 것들은 허상이고 인간이 자신의 소망을 투영해서 만들거나 누군가가 그렇게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자기 이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만들어 놓은 가치 세계 속으로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구겨서 밀어 넣은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이면서 사는 것을 니체는 “Last man”, “마지막 인간”이라고 본 것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존재라고 봤습니다. 이해받을 수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는 것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서 내가 나라고 하는 주체가 결국은 허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환영과 환상 속에서 만들어 낸 가공의 개념을 주체라는 개념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니까 엄청난 도전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그레고르와 같이 “형제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엄마 아빠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혹은 나를 그렇게 사랑하고 귀여워해 준 선생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하는 기본적인 인간의 단절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존철학자들이 볼 때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그 자체를 그냥 운명처럼 받아들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이런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인간의 고립감, 온 우주에 자기 하나밖에 없는 것 같은 고립감. 여러분에게 내 이야기를 했습니까? 선생님들만 알고 모를 것입니다.
나는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엄마 아빠는 예수를 안 믿으셨고 같이 사는 고모들이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래서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열네 살 2개월 되었을 때 주일날 교회를 가는 길이었습니다. 변두리에 살았기 때문에 논둑길을 쭉 걸어서 25분, 30분을 가야 했습니다. 거기에 엎드려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집이 가난했지만 가난해서 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존재가 나에게 너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알고 보니까 이런 카프카같은 사람들이 그런 인간의 고민을 극대화 시켜서 직면하면서 그 문제점을 까발린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너의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열네 살밖에 안 되었지만 죽는 것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는 게 너무 무서웠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두려움이 확 엄습하는데 내게 불행한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그런 불안감이 아니라, 그런 불안감은 생에 애착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고, ‘오늘 하루를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였습니다. 교회에 그렇게 다녔는데 교회에서 아무 도움도 받지 못했고 오히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나이 많은 어른들도 열네 살 먹은 나만큼 인생에 대해서 고뇌를 한다고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계는 무엇인가?’ 이 세계가 내 앞에 펼쳐져 있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마지막 네 번째는 ‘신은 정말 있는가? 없다면 주일마다 내가 헛짓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통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한참 울다가 일어나서 결심을 했습니다. 무신론자로 살기로 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신론자라기보다는 무신론자를 넘어서서 반신론자이었습니다. 무신론자는 신의 존재가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이 없다고 추정하는 게 무신론이고 반신론자는 신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있으려면 있어라 나는 나대로 산다고 말입니다. 당신이 지구에 무슨 관할권이 있느냐? 당신은 지구를 떠나라. 안 떠나면 난 당신이 떠난 것처럼 살겠다. 지금 생각하면 무신론과 반신론이 섞인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나 자신을 찾는 탐구가 시작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목사님은 워낙 조숙했으니까 그렇죠, 우리 애들은 핸드폰으로 게임이나 보고 만화나 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깊은 속에 나와 똑같은 통곡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때에는 그걸 덮고 있는 덮개가 얇아서 누가 조금만 퍼주면 금방 드러나서 통곡을 할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너무 두껍게 덮어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고민을 일깨워주는 선생님도 없고 책을 안 읽습니다. 읽어도 그런 것들을 고민하게 만들어주는 책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핸드폰에 거의 빠져서 그렇게 삽니다. 그 빛과 함께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삽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목숨이 붙어있는 것이지 산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좇아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깊은 단절성을 인정하게 될 때 니체가 제시하는 인간의 선택지는 딱 두 개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Übermensch”, 독일어로 “Über”는 “초월한”, “mensch”는 “인간”, 그래서 “초인”이라고 번역하는데 “초인”이 아니라 “현실을 극복한 극복인”입니다. 그 극복인으로 사는 방법이 있지만 그것은 아주 소수의 사람만 그것이 가능하고, 그 사람은 여태까지 있었던 모든 도덕이고 나발이고 이런 것들이 “나”라고 하는 존재를 규정했는데,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부부끼리는 신의를 지키고 등등 하는데 그것을 싹 지워버리고 자기가 스스로 도덕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도”라는 것 자체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인간이 끊임없이 여기에 합치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그게 힘이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영혼과 정신의 힘입니다. 그것을 “덕”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이것은 당연히 “선”일 것입니다. “도”가 나쁜 짓을 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을테니 말입니다. 이 두 개가 합쳐져서 “도덕”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도”는 객관적인 기준이고 “덕”은 주관적인 힘입니다. 두 개가 합쳐질 때 도덕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에게는 도덕이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후에 이런 사상들이 사르트르나 하이데거 같은 사람에 의해서 계승이 되는데 사르트는 베르그송을 읽은 후에 자신은 일생의 사명을 진리라고 부르는 것들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마지막 남은 하나까지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소위 이야기하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백지상태로 놓고 자신이 아무 기준도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런 의미를 부여하면서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살 것이다.” 라고 제시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게 “Übermensch”, “극복인”의 일이고 대부분의 사람은 마지막 인간의 삶을 삽니다. “마지막 인간”이라는 표현이 우리로 말하자면 “가치 없는 삶”, “last”에 그런 뜻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막장인간”입니다. 그냥 생각을 빼고, 좋은 대학 나와야만 밥을 먹고 사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수능보고 대학가고 열심히 남보다 학점을 많이 따야 좋은 회사 들어가고 예쁜 자매, 멋있는 형제 만나서 결혼하니까 그렇게 하고 아들 딸 낳고 남보다 연봉 많이 받고 살다고 죽는 것입니다. 그게 “Last man”의 삶입니다. 둘 중에 어떤 삶을 살 것이냐, 후자의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노예의 삶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도록 설정한 것은 그레고르가 돈을 많이 벌었고 끊임없이 헌신적으로 가족들을 위해서 노동을 해서 그 돈으로 빚을 갚고 아빠는 딴 주머니를 차서 돈을 모으고 그 돈을 안 풀어도 아들이 계속 갚아주니까 좋고, 오빠가 그렇게 하면서 음악공부의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니까 오빠가 있는 게 도움이 되고 엄마도 마찬가지이고, 이런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니까 이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은 영원한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게 아니라는 답변이 어떻게 나옵니까? 벌레로 딱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레고르가 그 벌레라는 것을 모든 가족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벌레이지만 그래도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었는데도 그레고르가 벌레가 된 게 아니고 그레고르는 어디 다른 곳에 있고 이 벌레가 죽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레고르에 대해, 우리 가족에 대해서 나쁜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고 합리화하면서 결국 마지막에 우리가 끈끈하다고 생각하는 관계, 나라는 인간을 규정하는 관계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독한 인간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설정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문제 제기를 하고 결론은 나중에 내겠습니다. 그 다음 윤명환, 질문하십시오.
질문) 그레고르의 아버지는 그레고르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왜 죽이려고 했습니까?
답변) 왜 그랬겠습니까? 여러분이 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왜 아버지는 그레고르인지를 알면서도 죽이려고 했겠습니까? 사과를 던집니다. 풍뎅이 같은 것이 뻥 뚫고 들어와서 박히고 그것이 치명적인 상처가 되어서 결국은 죽습니다. 그 던진 사과가 뭘 의미하느냐는 것은 공상이고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각자 자기가 생각할 것입니다. 왜 재떨이를 안 던지고 사과를 던졌는가? 그런 것은 나도 모르겠습니다. 사과를 던지고 그것이 뚫고 들어가서 죽게 됩니다. 아버지가 왜 그런 행동을 했겠습니까? (… …) 그렇습니다. 부인하는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아들이 벌레가 된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 내가 지금 설명하는 의미로 자매가 얘기했을 것입니다. 아들이 벌레가 되었다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맞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던진 것입니다. ‘저 새끼를 죽여 버려야겠다!’ 이런 게 아니라 그 현실을 너무너무 인정하기 싫어서 분노 때문에 사과를 던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것이 그레고르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던지면서 어디를 맞춰야 저 벌레가 죽을까 하면서 던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왜 죽이려고 했겠습니까? 죽이려고 했던 것 이유, 최소한 죽기를 바랐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제 쓸모가 없다고 생각해서) 만약 니체에게 이것을 해석하라고 하면 “서로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니까”라고 답을 할 것입니다. 서로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니까 말입니다.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에콰도르에서 지진이 나서 수천, 수만 명이 죽었다고 하면 ‘아, 어떡하나?’ 생각은 하지만 한 사람이 길 가다가 교통사고 나서 치어서 죽었다고 하면 그냥 지나갑니다. 왜 그럽니까?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엄마가 내 눈 앞에서 그렇게 되었다면 ‘왜 죽었지?’ 하지는 않습니다. 왜? 나는 엄마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극단적인 설정으로 몰고 가보니까 그 관계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7번, 8번이 같은 문제입니다. 고2 한종현 질문하십시오.
질문) 벌레가 되어서도 말을 할 수 있었던 그레고르가 나중에는 처음처럼 말을 하지 않고 … 도망만 다니다가 슬픈 결과를 맞이한다. 왜 그는 자신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윤명환, 질문하십시오.
질문) 그레고르가 스스로 죽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그것은 왜 그랬는지 소설에 설명이 나오지 않아서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하는데 그것이 정상적인 그레고르의 말로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말이 들리기는 하는데 벌레 소리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그 소리를 싫어했을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계속해서 자기의 의사를 피력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자기가 그렇게 표현하는 것을 듣고 가족들이 “아, 그랬구나! 그레고르. 풍뎅이 같은 못된 괴물이 너였구나! 네 외형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너를 뜨겁게 사랑해!”하지 않으니까 계속 얘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선생님이 상담하자고 불러서 선생님이 몇 마디 했는데 아무 관심도 없고 핸드폰이나 보고 있고 다리나 덜덜 떨고 있고 시계나 자꾸 보면서 “친구 만나기로 했는데..” 하고 있으면 얘기하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그 속에서 저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함으로써 자신이 무슨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내 해석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얘기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레고르가 죽어야겠다고 생각을 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절망입니다. 완전한 단절에서 오는 절망. 사람이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여러분 만할 때 단 하루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웃기는 얘기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도 여러 번을 죽고 싶었습니다. 고3때도 말입니다. 그런데 죽을 수 없게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게 가족이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우리 엄마가 얼마나 슬퍼할까?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습니다. 오히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무덤에 와서 한 시간 이상 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실존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상당 물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백 번 양보해서 그 사람들이 그렇게 울어준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목사님은 아무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했구나.’ 생각하실텐데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할머니는 나를 정말 뜨겁게 사랑해주셨고 나중에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매일 죽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영어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나를 살아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2학년 말쯤에는 국내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영어 참고서를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런던 타임즈, 캐나다 토론토 타임즈, 이런 신문들이 한 3일정도의 간격을 두고 종로서적에 들어옵니다. 그럼 그것은 돈 주고 사서 쭉 읽고 2학년 때는 코리아 헤럴드를 쭉 구독했고 고3 2학기에는 자유롭게 뉴욕 타임즈를 읽었습니다. 요즘은 잘 안 읽히는데 그때는 읽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때 그 영어 실력을 가지고 다른 철학자들의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베르그송이나 문학가들의 책을 읽고 영어로 쓰여진 사상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너무 재미가 있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재밌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말은 잘 못했지만 그것을 고등학교 때 읽으면서 나는 완전히 별다른 세계 속에서 살면서 수업시간에도 그런 책을 펴 놓고 읽었습니다. 수학을 앞에서 가르쳐주는데 저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했습니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영어 선생님이 나를 기억하시고 한 30여년 만에 인터넷을 수소문해서 찾아서 극적인 해후를 하고 즐거워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연관관계가 다 끊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죽음을 생각했는데 죽음의 직전에 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절망이 극대화되면 미워하는 사람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도 없는, 그야말로 어떤 종교적인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다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죽음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죽음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 어마어마한 용기라기보다는 절망의 극대화로 그것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레고르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은 삶을 지탱해갈 수 있는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믿었던 것들이 다 아닌 것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니체 같은 사람에 의하면 이것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하는 불안의 경험입니다. 그것을 이기지 못하면서 그레고르가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익명의 질문입니다.
질문) 기독교는 실존주의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합니까? 실존주의와 기독교의 일치점은 무엇이고 대치점은 무엇입니까?
답변) 여러분이 실존주의를 아십니까? 이 사람은 어디서 실존주의의 이야기를 듣고 썼는데 여러분이 평생 잊어버리지 않게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시험공부하면서 이런 얘기를 들어봤을 것입니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들어보셨습니까? 요즘은 그런 것을 아예 안 가르칩니까? 안 들어봤습니까?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실존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세 가지 단어를 가르쳐 드릴텐데 모두 어려운 단어입니다. 본질, 실재, 실존 입니다. 본질은 어떤 사물이 있다고 합시다. 이렇게 생긴 펜이 있고 요렇게 붓처럼 생긴 펜이 있습니다. 그리고 깃털로 된 펜이 있고, 이상하게 이렇게 생긴 지우개 달린 펜이 있다고 합시다. 이렇게 다양한 펜이 있다고 합시다. 이렇게 양상이 여러 가지로 다양하지만 이것들이 모두 우연적인 것, 우연적이라는 것은 플라스틱과 무엇과 무엇이 만나서 이런 형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형태가 된 것이 우연적이라는 것입니다. 꼭 그렇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태어나거나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연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모든 것들은 우연적인 것입니다. 플라스틱으로 이것을 만들어서 이 물건이 되었지, 이걸 여러 개를 합쳐서 둥근 모양을 만들었으면 물 퍼 담는 바가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넓적하게 만들면 슬리퍼가 되었을 것이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연적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우연적인 것들을 모두 탈각시켜버리고, 빼 버리고 마지막에 공통되어있어서 이것을 빼 놓고는 이것이 될 수 없는 그 무엇을 본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것이 본질입니다.
그리고 실재는, 이것은 진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있을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실제는 존재하는 사물은 아닐 수 있지만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동물”, “동물”이라는 사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있는 것은 곰, 사자, 돼지, 원숭이,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동물”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 속에서 어떤 카테고리, 범주가 딱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 동물이라고 하는 사물은 없는데 이런 “유”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포유류라고 할 때의 “류”(類)입니다. 이것이 실재입니다.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존은,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 얘기를 하려고 여태까지 이야기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A펜, B펜, C펜, D펜, E펜이 있습니다. 이런 본질을 가지고 여러 가지 우연적인 사물들을 조합시키니까, A, B, C, D, E제품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물들을, 이 본질을 어떤 물질과 결합시켜서 A라는 것이 나왔다고 합시다. 이 A를 A되게 지탱시켜주는 그 무엇, 그것은 당연히 B를 B라고 지탱시켜주는 그 무엇과는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다릅니다. 이것을 실존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제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는 본질이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펜이니까 실재도 하나입니다. 그런데 실존은 다섯 개인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실존이라고 하면, 모든 인간은 인간성을 공유하고 있지만 “나”는 “네”가 아닌 것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인류가 1천억 명 쯤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태까지 태어난 그 사람들도 나와는 다르고 앞으로 태어날 사람도 나와는 다릅니다. 네가 나보다 예쁠 수도 있고 네가 나보다 공부를 잘 할 수도 있습니다. 네가 노래를 잘 할 수도 있고 네 아버지 때문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네가 아닙니다. 나는 나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나를, 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나를 나로서 지탱시켜주는 이 빨간 점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실존입니다. 그 실존은 아까 얘기한 이 “본질”보다 선행한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실존주의가 있기 전까지 고대와 중세, 중세와 르네상스의 근대를 거칠 때, 물론 여기 르네상스가 들어오고 르네상스에도 사상의 층차가 많지만 표준적으로 이야기할 때 이것을 근대라고 합니다. 근대는 modern 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런 것 설명하자면 시간이 많이 갑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기본적으로 관심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 인간이 그렇게 살면 안 돼!” 이 말은 “너”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인 너는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인간성으로서의 그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너를 네가 되게 만드는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재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존은 매일매일 무시해야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까지 쌓아올린 탑이고 이것이 다 허깨비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도 아니고 남의 삶도 아닌 이상한 인생을 살면서,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으로서 태어나서 한 번도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한, 그런 인간으로서 짓밟히는데 이 짓밟는 힘이 사회, 도덕, 이 세상의 사고방식, 부모에게 물려받은 전통, 국가의 무슨 정신, 이런 나발들이 인간을 계속 짓밟아서 떡을 만드는 폭력적인 도구로 이용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 실존이 본질보다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선행한다는 것은 선행, 앞선다는 뜻입니다. 먼저 발생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것은 인간의 생각 속에서, 사념 속에서 만들어 낸 것이고 이것은 매일매일 살면서 우리가 매순간 직면해야할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 실존이 현실을 대면하는 주체이고 각자 너는 나와 다르고 너는 그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실존을 가지고 현실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데 본질이 그것을 살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실존의 문제가 그것을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현재 이런 삶의 상황, 이런 사회에 태어나서 이런 삶의 문제를 대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은 너무나 너무나 엄연하고 너무나 너무나 엄중하기 때문에 옛날의 전통이니 도덕이니 나발이니 하는, 사실 있지도 않은 거지발싸개 같은 것들이 어마어마한 허깨비가 되어서 우리에게 이걸 해라, 저걸 해라 하면서 밀고 들어오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현재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현실을 내가 대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 중요한 숙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 자체가 여태까지의 인간의 전통과 종교와 철학, 사고방식 자체를 다 뒤집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소위 말하는 “해체주의”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저렇게 얽혀져있는 모든 것을 다 해체시켜서 인간을 고립된 존재로 놓고 나와 너는 서로 소통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각자의 단자처럼 느껴지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실존주의자들이 아무나 막 죽이고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이익을 주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사회 속에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르트르가 시옴드 보바리와 함께 계약 결혼을 했는데 당시 60년대에는 충격이었습니다. 둘이 같이 살기로 계약을 한 것입니다. 지금 프랑스에서 그것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습니다. 둘이 동거생활 한다고 한 장 쓰면 같이 사는 것입니다. 둘 중에 한 사람이 동사무소에 가서 그만하겠다고 한 장 쓰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 2번,
질문 ) 인간은 언젠가 죽기 때문에 가치있는 삶을 살기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간다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요즘 삶의 의욕이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어서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유도 알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굉장히 좋은 질문입니다. 다음 3번 김유정,
질문) (잘 안 들립니다.)
윤태관 선생님,
질문 )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셨을 때의 아름다움을 잊은 채 하나님을 떠나 저마다의 ..이 되어 살아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크리스찬으로 어떻게 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가축과 같은 존재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의 독특성을 잃지 않으며 정직하고 순결하게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답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범생이고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머리를 쪼개서 파이프를 꽂아도 이런 질문은 안 나옵니다. 2번, 3번이 굉장히 현실적인 질문입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고는 잘 산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물건을 보면 “참 좋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여학생이 립스틱을 하나 샀습니다. 발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울을 봅니다. “야, 좋다!”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몇 가지 뜻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이 색깔이 자기 얼굴에 잘 어울린다는 의미에서 좋다고 하고, 또 하나는 바를 때 잘 발라지고 바르고 난 느낌이 입술에 왁스를 바른 느낌이 들지 않고 느낌이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색깔도 싸구려를 사서 바르면 싼 티가 났는데 이것은 굉장히 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족스러울 때 여러분은 “이 립스틱 진짜 좋다.” 합니다. 그런데 이게 쌉니다. 500원, 그러니까 “대박!”이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7만원!” 하면 “아, 역시 비싼 게 좋구나.”합니다. 그러면 “좋다”는 이야기는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정이 있어야 하고 이게 무엇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인가를 생각해야만 좋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립스틱을 갖다 놓았는데 뭐가 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이를 펴 놓고 크레용처럼 써봅니다. 그렇게 종이에 그려보면 좋다고 하겠습니까? 안 좋다고 하겠습니까? 안 좋다고 할 것입니다. 입술에 칠 하라고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종이에 그려서 크레용으로는 낼 수 없는 특수한 효과를 내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에게는 좋은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아닌 것입니다.
제가 잘 쓰는 비유인데, 우주선에는 약 100만개 이상의 부품으로 만들어진답니다. 그런데 그 부품 하나를 빼내서 여러분 앞에 딱 갖다 놓으면서 “이거 예쁘니 안 예쁘니?” 하고 물어보거나, “이 제품 좋니 안 좋니?”하고 물으면 여러분은 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답을 합니까? 그런데 그것으로 호두를 깨 보니까 잘 깨져서, “야, 진짜 좋네!” 하면 그것이 그 부속품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것은 우주로 날아갈 우주선에 장착을 하고 우주선을 띄워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백 번을 발사해서 귀환을 했는데 다른 부속은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는데 이 부속은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때서야 우리는 “그 부속은 참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참 좋다’라는 평가는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좋고 그 좋은 것을 인간이 경험할 때 좋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립스틱으로 예를 들었지만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립스틱이 정말 좋고 프랑스의 어떤 회사에서 만들었고 모든 여성들이 갖고 싶어 하는 70만원짜리 립스틱이라고 해 봅시다. 그것을 내가 발랐는데 내가 특이체질이어서 입술에 물집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좋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싫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좋다고 할 때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면 두 개가 같이 결합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것이 좋고, 그 좋은 것이 경험될 때를 우리는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내가 누군가?”라는 질문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궁금할 것입니다. 아까 내가 여러분에게 그레고르의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상당히 공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런 공감을 아주 일찍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공감을 하면서 내가 누군지를 다른 사람이 나에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는 것, 그레고르는 아빠의 자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기는 뼈 빠지게 돈을 벌어서 집안의 빚을 갚으려고 했는데 아빠가 딴 주머니를 차고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딴 주머니를 차고 상당한 돈을 모은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생각했는데 그 관계 자체가 신뢰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엄마도 마찬가지였고 동생도 야유회를 가서 “이야, 드디어 오빠가 죽었어!” 하고 기지개를 펴면서 새로운 희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누이 동생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설정하는 것을 신뢰할 수 없던 것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다시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그럼 나는 누구입니까?” 대답은 “설정할 수 없다”입니다.
그러면 이제 카프카가 “변신”이라는 책 속에서 인간의 절대적 고독성, 우리말로 이야기하면 “홀로 있음”입니다. 마지막에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주장하는 것은 “주체”라는 것은 망상이라는 것입니다. 허상. 주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사회적인 경험과 사회가 설정해 놓은 폭력적인 가치관의 부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라는 주체를 어떻게 찾느냐? 주체는 없습니다. 주체는 없고 실존만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A라는 현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것을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실존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만 남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 낼 것인가? “홀로 있음”이라는 인간이 이런 모든 연관을 다 끊어내면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동성애가 왜 나쁘냐?”, “인간은 원래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그게 뭐냐? 누가 그렇게 만들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왔고…”, “그 오랫동안이 왜 나에게 권위 있는 것이 되느냐?, 또 역사를 보면 그 오랫동안 이라는 것을 깬 사람들의 시대가 열리는데 그것은 뭐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동성애는 이미 넘어섰습니다. 그런 것을, 도덕이라는 것이 있다거나 여태까지 지켜온 전통이라는 것이 있다고 이야기 할 때 그런 가치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지, 이런 것 자체가 이미 극복해야할 근거 없는 권위라고 설정을 할 때에는 못 넘어서는 사람이 미성숙이고 넘어서는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이데거가 이야기합니다. “이런 모든 것을 부정한 다음에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은 절대 자유이다.”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는 무시무시한 자유입니다. 왜냐하면 온 우주와의 연관이 모두 끊어진 고립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으로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스승도 없는 이 길을 자기 자신이 이 실존에 충실하면서 살아야가야 합니다. 어떠한 룰도, 누구에 의해 강요받는 규칙도, 누구를 강요할 또 다른 규칙도 없이 가야하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살았던 모든 인류의 지혜, 경험, 이런 것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내 인생의 족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다 뿌리치고 단독 자아로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무시무시한 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공포와 불안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Last man, 마지막 인간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굴러 떨어지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이라는 것을 놓고 설명할 때, “나는 누구인가?”, 심지어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에는 유물론자들은 사람을 다 태우고 나면 돈 천원짜리 되는 비료로 남는 존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유신론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영혼이 있다고 할 것이고 영혼론자들은 육신과 영혼이 있다고 우리처럼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누군가?”라고 물을 때, 이것 하나만을 놓고는 답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실존주의자들은 이렇게 고립된 자기 자신을 누구라고 규정했겠습니까? 그런 규정 자체가 필요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가한 이야기이고 지금 더 급한 것은 내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내가 이 현실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더 현실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 여기에 답할 수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나는 누군가?”라는 답을 어디서 찾느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엄마 아빠 가족관계, 무슨 연결, 이런 점에서 찾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말입니다. 여기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의존하면서 자가기 누군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면 선생님을 해야 하고 집에 가면 아빠 노릇을 해야하고, 엄마 노릇을 해야 하고, 등등등 보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 자체가 완전하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단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아까 이야기 한 자매, 우리 엄마는 내가 벌레로 변해도 절대로 그럴 일이 없다, 엄마는 나를 매일 끌어안고 사랑하며 지금과 전혀 다른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할 때,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늘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환상이 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자들의 이야기로 말입니다. 그런 믿음이 그레고르처럼 박살이 나게 되었을 때, 그레고르도 자매처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박살이 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존재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레고르는 죽음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존주의자들은 뭐라고 하느냐,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그 힘은 네 안에 있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관계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는 실존주의자들의 생각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이것에 의해서 인간의 의미가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 떠나고 나면 이런 관계가 다 상대적이고 내 기대를 저버리고 모든 것들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여기에 “신”이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기독교에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고 믿고, 이 관계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 아래에서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존재의 의미가 규정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왔고 이 분이 지으셨고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고, 이분이 나같은 인간, 공부도 못하고 얼굴도 못생기고 기타 등등등등… 내가 생각해도 내가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나를 여기 있게 하신 것입니다. 없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나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면 각자 각자에게는 지문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 의미를 묻지 않으니까, 우리는 기껏해야 너는 공부 잘 하고 너는 SKY 대학에 가고 나는 전문대도 못가서 마트에서 알바나 하고, 하면서 인간의 층차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이런 관계를 가지고 본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삶을 가지고 본 것입니다. 인간을 그런 식으로 규정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열네 살 된 그 나이에도 가난이 너무 불편하고 힘들기는 했지만 나는 그게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 나이에 말입니다. 나는 이 “나는 누구인가?” 의 문제에 대답만 얻을 수 있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그것과 너무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에 의해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비로소 의미를 규정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의미를 규정해야지만 “왜 태어났나? 얼굴도 못 생긴 게”, 생일축하 할 때 노래 부르지 않습니까?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제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엄마에게, “엄마, 내 친구들은 이상해.”, “왜?”, “자기네 아빠가 직업이 후지다고 창피하대. 자기네 집은 가난해서 불행하대, 그리고 어떤 애는 공부를 못 해서 자기 인생이 너무 불행하대, 엄마 그런 게 왜 불행한거야? 난 진짜 이해할 수가 없어”, 이런 얘기를 들은 엄마가 가슴이 너무 뿌듯했습니다. ‘아, 우리 딸이 이렇게 성숙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딸이, “아빠의 직업이 어떻든 뭐가 어떻든 그런 게 왜 불행해? 진짜 불행한 것은 따로 있어. 엄마.”, “그게 뭔데?”, “못 생기게 태어난 거.”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농담으로 한 것이 아니라 아주 진지하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의미를 그럴듯한 신랑 만나고 많은 사람들에게 프러포즈 받으며 까불면서 인생을 사는 것이 인생의 의미의 거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진심으로 생일 축하 노래를 아까처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말입니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얼굴도 못 생긴 게 왜 태어났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그것을 맞춰 보려고 칼을 대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을 대는 것입니다. 그 뒤에는 이런 거대한 가치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다리 의사를 만나서 멍이 들고 고름이 생기기 시작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로서 당당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별로 큰 감동없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이 인간의 의미라는 것을 규정하고 깨닫게 되었을 때, 정말 말할 수 없이 인생을 새로 보는 것 같았습니다. “아,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리고 “나” 라는 존재는 근거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답을 하지 못합니다. 내가 결정적으로 니체라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게 된 것은 마지막 죽는 광경이 너무 비참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이 실존주의자를 기다리고 있는 삶이라면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기 여제자가 있었고 그 여제자를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여제자가 사상의 스승으로서는 그를 좋아했지만 연인으로서는 그를 싫어해서 버림을 받습니다. 마지막에 토리노 광장에서 노숙자가 되어서 거기서 객사합니다. 이런 삶이 정말 과연 극복이 있는 삶일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물을 것입니다. “이걸 뭘로 증명합니까?” 그것은 신앙입니다. 그것은 논리를 뛰어넘는, 주님을 만나는 신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신앙이 가르쳐줍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여기에 이렇게 콘센트가 있고, 여기에 전기가 쭉 연결이 됩니다. 여기에 온갖 것들, 전열기구, 조명기구들이 매달립니다. 그리고 여기에 스위치가 있습니다. “딸깍” 하고 전기를 넣습니다. 기구들이 모두 켜지면서 빛이 들어옵니다. 여기에 엄마가 있고 아빠가 있고 여기에 나 라는 존재가 있고 여기에 선생님이 있습니다. 친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레고르처럼 벌레가 되었더니 엄마가 나를 지금처럼 예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인생은 없다.”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여기 자매들이 많이 있으니까 일생에 잊혀지지 않을 결정적인 팁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앞으로 연애를 할 것 아닙니까? 지금도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과는 절대로 사귀지 마십시오. “너 없으면 나 죽을지도 몰라. 너는 내 생명의 전부야. 너 없는 세상이라면 난 안 살 거야.”하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절대 그런 사람과 사귀지 마십시오. 이런 사람은 많은 여자들의 로망입니다. “내가 너와 사귀도록 허락할래? 아니면 내가 심장을 도려낼까?” 이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dream이잖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과는 사귀지 마십시오. 오히려 쿨하게 “우리 모든 게 다 맞는 것 같다. 한 번 사귀어 볼래?” 그런 사람, “싫으면 말구.” 이런 사람. 그리고 인격적으로 사랑이 이미 펄펄 붙는 불덩이를 가져와서 누군가에게 다 태워버리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위험합니다. 그런 사람이 불타는 그것을 여러 사람에게 선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여러분 앞에 나타나기 전에 여러번 그랬던 사람일 수 있습니다. 카프카도 여성병력이 많았습니다. 약혼과 파혼을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그리고 아주 짧은 동거를 하고 41세 될 때에 죽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결국 여러분과 같은 방황을 모두 겪고 마지막에 도달하는 결론입니다. 죽을 때까지 흔들리지 않을 결론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느 인간도, 물건이나 물질은 물론 말할 필요도 없고, 어떤 인간도 내 삶에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내 삶의 뿌리까지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무 너무 사랑하는 우리 아빠가 나를 배신해도 내가 하나님 다음으로,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할 거라고 믿었던 엄마가, 내가 커다란 풍뎅이 변하니까 문을 꽉 잠그고 밥을 안 줘서 굶겨 죽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확인이 되어도 그레고르처럼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외에는 그렇게 나의 존재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야 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시지 우리를 그렇게 흔드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시편에서 하나님을 노래했던 중요한 찬송제목 가운데 하나가 히브리말로 “추루”()인데 이것은 “바위”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바위요 나의 반석이시요” 하나님의 그렇게 삶의 근본을 흔들어 놓으십니다. 우리가 잘못된 근본에 발을 두면 하나님이 흔드십니다. 그런데 올바른 근원에 당신의 존재를 딱 세웠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사실은 나는 없단다. 여태까지는 모두 거짓말이었어. 속았지?” 하시며 우리의 근본을 흔드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말입니다. 인간은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나는 나다.”, “나는 나로서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엄숙한 의무입니다. 물론 헤르만 헤세 같은 사람은 비상구를 이야기합니다. 살다가 너무 힘들면 문을 열고 뛰어 내릴 수 있습니다. “자살”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사람이 여기 서 있습니다. 대학도 못가고 고등학교 졸업해서 롯데마트도 못 들어가서 구멍가게에 겨우 취직해서 한 시간에 4천원짜리 알바를 하면서 과일껍질을 주워서 쓰레기통에 담는 삶을 삽니다. 그게 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알바를 하느냐, 아니면 최순실 딸같은 신세가 되어서 몇 억짜리 말을 타고 학칙까지 바꾸면서 내가 원하는 학교 다 들어가서 떵떵거리고 살며 모든 인간들을 자기 발아래에 두고 짓밟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느냐는 삶에 있어서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같은 나이에는 안락하고 좋은 것, 그런 것에 눈 뜨면 안 됩니다. 나이가 든 다음에는 눈 떠도 됩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너무 집착하면 안 됩니다. 나이가 들면 생명의 기운이 빠집니다. 두 시간을 버스타고 다니고 나면 여러분은 좀 피곤하다고 하겠지만 노인들은 가서 드러누워야 합니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눈을 뜨면 안 됩니다. 소비에 눈을 뜨면 안 됩니다. 지금 소비에 눈을 뜨고 소비가 정말 재밌다는 것에 눈을 뜨게 되면 인생은 어두운 계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소비를 위해서 여러분은 더 많은 돈이 필요하고 그것을 벌기 위해서 애씁니다. 그걸 못 버는 집안에서 태어난 것을 후회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몸부림치면서 얼굴이 칼이라도 대서 돈 있는 남자를 만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좋은 대학에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인생입니까? 껍질인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S대에 들어갈 사람도 있고 K대에 들어갈 사람도 있고 나처럼 대학에 못 들어갈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노력을 해야 합니다. 회의만 품지 말고 어떻게 살 것인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인생 전체의 계획 속에서 내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해야 합니다. 도달하지 않으면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양상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시집가느냐, 안 가느냐. 장가가느냐 안 가느냐. 회사원으로 살까 아니면 사업을 할까. 이것은 우연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결국은 이런 속에서 나 라는 존재가 하나님께 넘치는 사랑을 받습니다. 그때 나 라는 존재가 진정한 자존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 나는 정말 소중한 존재구나!”
(찬양)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고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 그것을 사람에게 산정하게 되면 상처투성이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 사랑을 하나님에게로 대입시켜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기대에 넘치도록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 것만큼 사랑을 느낍니다. 그 사랑을 가지고 이 모든 사람들을 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이용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내가 사랑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아빠가 나한테 쥐뿔이라도 해 준 것이 뭐가 있나? 엄마가 내 고등학교 3년 동안 밥을 제대로 해 준 적이 있어? 오빠, 네가 뭐했어? 나한테 등록금 대준 적 있어?” 그렇게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부모와 동기간, 선생님을 만나서 그렇게 사람답게 사는 사람들을 만나서 혜택을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 혜택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혜택이 끊어지면? 그럼 나는 안 살 것입니까? 그 사랑을 받아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이렇게 주님께로부터 받은 말할 수 없는 큰 사랑, 그 사랑을 생각하면서 나 자신이 바로 이렇게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그 속에서 나와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로, 학력이나 얼굴, 외모, 집안, 이런 것을 다 탈각시키고, 다 뜯어내 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한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아주 소중히 여기며 그들과의 관계를 귀하게 여기고 나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이 사람을 사랑해서 내가 이 사람 곁에 없었더라면 이 사람이 얻지 못했을 그 무엇을 그렇게 주면서 그렇게 도움을 주면서 사는 삶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만 이러는 것이 아니라, 이 엄마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라는 존재가 있고 이렇게 관계를 맺은 사람들 중에 하나가 아들이고 자기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참된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이런 것들을 다 무시해버리면서 살면 그냥 삽니다. 공부하고 스마트폰 보고 놀고 노래방도 가고 새로 나온 립스틱도 바라보고 머리도 한 번 새로 해보고 하면서 그냥 삽니다. 그런데 딱히 내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를 찾으며 살아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에이씨! 왜 나는 이런 집안에 태어난 것이야? 우리 아빠는 왜 이렇게 무능해? 내 친구들은 왜 이렇게 못 됐어?”하면서 인생을 사는데 그게 자기 인생인데 남의 인생인 것처럼 말하며 사는 것입니다. 살고 나서 돌아보면 내 인생인데 내 것도 아닌 것 같고 어떤 때에는 내 것 같기도 하고, 한 번도 내가 임자가 되어서 내 인생을 살아본 적은 없는 것입니다. 주체가 되어서 살아본 적은 없는 것입니다. 참된 주체성의 근거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는데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한대의 에너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빠가 있습니다. 내가 마음을 고쳐서 아빠를 사랑하고 효도를 합니다. 아빠가 감격해서 “우리 딸 같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에 욕을 하고 그 앞에서 엄마를 발길로 차고 알콜중독에 걸리고 돈을 뺏어다가 노름에 탕진하고 그런 쓰레기 같은 인생을 계속 사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뺏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고 싶어집니까? 그 아빠가 벌레가 된 것이고 그레고르처럼 죽어버렸으면 좋겠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리 제거해도 끝나지 않습니다. 왜? 자기도 이 세상에서 누구에게 그렇게 완전한 만족을 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 끊고 혼자 산다고 해도 그게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끊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사랑, 그 힘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연필 가져왔습니까? 핸드폰 가져왔습니까?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을 쓰십시오. 오늘의 결론입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것은 누구의 명언이 아니라 나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헤아릴 수없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지만,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그는 행복하다.” 끝입니다. 이것이 오늘이 결론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런 아버지를 만나며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어? 그런데 저 사람을 치료하라고, 저 망가진 인간을 참 사람이 되게 하려고 나를 그 집안의 딸로, 아들로 태어나게 하셨구나. 나는 그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주체는 내가 아닙니다. 당신이 나에게 올바름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그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을 주십시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도 웃었습니다. 한 40년 만에 읽으면서 “거짓말”, 우리는 내가 그레고르처럼 되었을 때 엄마가 나를 버릴까? 어디까지 참을까? 그래도 방문을 열고 와서 엄마만큼은 나를 끌어 안고 매일 같이 자고 내 벌레 같은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겠지? 그럴까? 안 그럴까? 그런 것에 관심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의 근본을 흔들어 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나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지만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엄마가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아빠, 온 가족이 그럴 수도 있고 그레고르는 상당히 많은 날 동안 가족들이 견뎠지만 우리 가족은 오늘 낮에 내가 변했는데 내일 아침에 마음을 정리하고 죽여 버리자고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No problem, 그런 것이 나의 인생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나는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변해도 내 인생은 흔들리지 않는다. 온 세계, 저 북극에 혼자 던져지고, 우주 공간에 나 혼자 내동댕이처진 존재가 될지라도 거기서 내가 하나님을 붙들 수 있다면 나는 나다. 살고 죽는 것, 부자가 되고 가난하게 사는 것, No problem, 그것은 그렇게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내가 가난을 예찬하거나 밑바닥의 인생을 사는 것을 예찬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도 우리의 자녀들이 좋은 직장에서 좋은 남자 만나서 편안하고 품위 있는 삶을 살기를 바라지 그렇게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먹을 것을 찾는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삶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연적인 문제입니다. 그 의를 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인생입니다. 오늘의 결론, “카프카는 인간을 잘못 봤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