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6일 교직원예배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21:22).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 하고 세 번을 물으신 후에 주신 말씀은 큰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 대신에 젊어서는 네가 띠 띠우고 네 원하는 곳으로 다녔으나 늙어서는 사람들이 너를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끌고 가리라. 이는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미리 말씀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말이야 빙빙 돌렸지만 결국 핵심은 베드로는 죽는다, 순교 한다 그거였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품안의 제자 요한의 운명이 궁금해졌습니다. “저는 그렇게 예수님을 위해 살다가 순교의 길을 가게 되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오늘 본문입니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이 사람을 살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게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어디를 따라오라는 것일 가요? 예수님이 지금은 부활하신 몸입니다. 따르라고 하는 것은, 앞으로 날 따라오라고 해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갈 수 없습니다. 앞으로 갈 길은 승천하시는 건데 어떻게 베드로가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갈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이것은 하나의 과거에 일어난 일을 지금 미래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십자가를 지고 죽은 그 죽음의 길을 너는 따라 오너라” 그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자신의 십자가가 정말 커 보이고 그리고 나의 이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살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대부분 지금 내가 걸어가는 이 길에 만족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핵심은 그게 아니고 다른 데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우리들이 그 길을 걸어가는 동기와 모든 관심사가 주님이면 더 이상의 관심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살고 싶은 삶도 많았고 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하나님이 뜻이 계셔서 나를 여기 보내셨고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지 모르지만 지금 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예측할 수 없는 아주 신기하고 헤아릴 수 없이 오묘한 섭리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여기에 데려오셨고 앞으로도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셔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따라서 섬기며 가게 하실 것이라는 그 신앙을 가지고 살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는 것과의 비교 같은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사역을 크게 하고 있는 순서가 하나님 앞에 큰 그릇이라는 순서 아니고, 더욱이 하나님의 일을 크게 하고 있는 그것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순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정말 우리보다 더 작은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명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이면 비교도 하고 내가 저 사람의 위치에 있으면 좋을 텐데, 내 상황이, 내게 주어진 사명이 이게 아니라 딴것이었으면 좋을 텐, 또 내가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가 여기가 아니고 딴 곳이었으면 좋을 텐데, 등등의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일단 하나님께서 맡겨 주셔서 거기에 서있으면 거기가 나의 사명지입니다. 그것으로서 충분 합니다. 오늘 보십시오. 예수님은 요한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베드로의 질문을 사실상 싫어 하셨습니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는 그에게 맡겨진 십자가와 갈 길이 있고 너는 너에게 맡겨진 십자가와 갈 길이 있다. 그냥 걸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올 해로서 세어 본적은 없지만, 제가 83년도부터 전도사 생활을 했으니까 꼭 24년을 한 것 같습니다. 한 번도 계획을 세우고 사역을 해 본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 기도 많이 해서 너 이교회에 가라 그러시면 아멘 하고 가서 자리가 주어지면 아무 계획이 없습니다. 몇 년 사역 하다가 여기서 떠나야 되겠다든지 하는 계획이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1년이나 2년 사역하다가 휙 사표 던지고 나가는 사람들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안 듭니다. 하나님이 보내셨으니까 그냥 지냅니다. 몇 년이 될지 그건 모릅니다. 한 교회에서 햇수로 8년, 한 교회에서 햇수로 7년 그렇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내일 일은 난 모른다는 마음을 가지고 비교 의식도 없이 그냥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최선을 다해서 헌신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살아온 인생의 마디를 다음 인생의 마디와 기가 막히게 연결을 시켜 주십니다. 나는 이것을 징검다리 신앙 이라고 부릅니다. 시골에 가난하던 시절에 다리가 없으니까 동네 어른들이 징검다리를 놓습니다. 거기를 건너 갈 때는 멀리 보면 물에 빠집니다. 그냥 한걸음 딛고는 그다음 돌멩이에 발 디딜 곳을 찾고 또 발 디딜 곳을 찾고 이렇게 하다 보면 어느덧 개울을 건너게 됩니다. 지금 저도 여기에 이렇게 있지만 15년 전만 해도 여기 이렇게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10년 전에는 교회에 있었지만 여기 와서 이런 사람들과 함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런 마음과 이런 처지에서 내가 있으리라는 것도 예측이 안됐습니다. 살아오면서 언제나 10년 후가 궁금했습니다. 지금도 10년 후가 너무나 궁금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여주시지 않으십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다른 사람의 사명, 다른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요한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던 동기가 요한이 정말 하나님 앞에 사명을 감당해 나가고 신실하게 살고 그래서 물어 본 것이었을까요? 그게 아니었습니다. 나는 죽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입니다. 자기와의 비교를 염두에 둔 호기심입니다. 끝까지 남는다고 하면 혹시 예수님이 요한을 더 사랑하셔서 살려 두시고 나는 좀 별로라서 죽어버리라고 하시는 것은 아닌가! 또 반대로 요한은 죽고 넌 산다고 하면 예수님이 나만 소외시키시는 구나라고 생각 하게 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모두 쓸데없는 질문 이라는 거죠! 그래서 사명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고요히 정말 한동안 많이 부르던 찬송이 있었습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루하루를 주님 사랑하고 사명을 따라서 바르게 살면 지금은 여기 왜 있는지 모르지만 뒤를 돌아보면 어떻게 해서 여기 있게 됐는지는 아는 것처럼 또 세월이 흘러가면 ‘여기 있어야 될 수밖에 없는 필연이 무엇이었다.’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교 하지 말고 나보다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교만해 지지도 말고 또 나보다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도 말고 지금 우리는 내일은 모르지만 오늘은 하나님이 여기에 있는 것이 좋아보이셔서 우리를 여기에 두셔서 그래서 감당해 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서 오직 그거 하나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면 신기하게 하나님이 대나무 마디 하나하나가 연결이 되어서 하나의 나무를 이루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이끄십니다. 지금은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