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16일 교직원예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사람이 태어나서 잠깐 살다가 죽습니다. 그 인간의 수명의 길이의 차이가 우리가 보기에는 대단한 것 같지만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한점에 불과합니다. 저는 태어나서 꼭 한번 치과에 가고 여섯 살 때 가고 아직까지 치과를 한 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비교적 치아가 튼튼한 편입니다. 거기에는 특별히 제 나름대로 비결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가글을 아주 자주 합니다. 그것도 여러분들이 마트에서 사는 그런 가글은 제 성에 안차서 치과에서 쓰는 그 가글 아주 독한 것을 사용을 해야지만 저는 마음이 편합니다. 근데 가글할 때마다 늘 느끼는 거죠. 가글액을 입에 집어넣고 깨끗이 정리를 해서 쏟아내면 기분이 참 상쾌합니다. 근데 불과 한 시간도 안 되어서 다시 그 입안이 텁텁해지니까 그 안에 이제 미생물들이 생겨나는 거죠. 다시 가글을 하면 미생물들이 모두 죽고 정리가 됩니다. 난 가글을 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해요. 미생물의 일생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한 시간이로구나. 태어나서 한 시간만에 폭풍과 같은 죽음이 밀려오고 하수도로 쏟아져 내려가는데 시간이라는 개념자체가 존재에 따라서 다 틀려지는 겁니다. 미생물들에게는 일생아니예요, 일생. 그런데 하루에도 일곱 여덟번씩 그런 일들이 일어나잖아요. 인생도 그렇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오래 사는 것 같아도, 또 짧게 사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는 모두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실재로서의 인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미로서의 인생이예요.. 의미로서의 인생을 어떻게 사는냐. 의미로서의 인생은 먹고, 마시고, 쉬고, 놀러가고, 행복하고 이런 것들은 의미로서의 인생에 있어서는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의미로서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사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정말 불쌍한 사람은 자기가 왜 사는지 모르는 사람, 그리고 자기가 왜 사는지는 막연히 알지만 그 사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예요. 모든 게으름과 삶의 태만이 거기에서 오는 거죠. 거기에서 오는 거요. 글쎄 이건 나만 그런가, 다들 마찬가지 아닐까? 긴장이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아름답지 않아요? 약간 긴장해 있는 사람들이. 군인의 차려 자세 같은 것은 별로 재미없지만은 약간의 긴장이 있는 것이 사람을 아름답게 하지 않아요? 특히 자매들의 경우에는 더 심하죠. 퍼져도 아름다운 자매는 없어. 퍼져서 많이 먹어서 살이 퍼지고 마음이 퍼지고, 아무 옷이나 편한 것 입어서 옷이 퍼지고, 그 다음에 살이 쪄서 얼굴이 퍼져서 굴곡이 사라지고, 머리도 퍼지고 폭탄 맞은 것처럼. 그랬을 때 예쁜 사람은 없어요. 긴장이 있어야지요. 긴장이. 그 때에 거기에서 아름다움이 나오는 거요
하나님 앞에서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 보면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는 거죠. 근데 그 사명을 이루는 모습이 베드로가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거를 보여주셔요. 그게 뭐냐면은 젊어서는 네가 원하는 데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사람들이 너를 띠 띠워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이거는 세상 누구나 보더라도 이거는 순교를 예고하는 거거든요. 그게 사명에 대한 예수님의 예고였어요. 그 사명 하나를 간직하고 이제 주님을 위해 살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그런 사명을 안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 사명을 모두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사명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세 번 태어난다 그러죠. 육신의 출생을 하고 영혼의 출생을 하고 그래서 거듭나고 그 다음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면서 사명을 향하여서 다시 태어나요. 한 인간의 가치는 인간존재의 가치는 선한 의지에 달렸다고 내가 새벽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선한 의지에 달렸는데 그 선한 의지가 무얼 찾아가는 선한 의지냐 이거죠. 의지를 하려면 의지가 행사되기 위한 목표가 있어야 되잖아요. 자기의 그 욕망에 따라서 자기를 위해서 일어나는 거의 충동과 같은 의지의 행사는 의미가 없는 거죠. 가치론적인 측면에서 어떤 목표가 있고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가려고 하는 의지를 행사할 수 있게끔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을 때 그 사람이 가치 있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거꾸로 이야기 하면 그런 가치를 못 가진 사람들은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예요. 아무리 좋은 화장품을 쓰고 얼굴을 뿌셔서 고치고 이렇게 외모적으로 그렇게 예쁘고 깔끔하게 다듬어진 그런 외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정신 자체가 무언가 높은 가치를 추구하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에 모든 것들을 정렬시킬 수 있는 그런 푯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그 사람은 벌써 삶의 양태 자체가 틀려요. 틀립니다. 그리고 향기가 없어요. 향기가. 태만과 나태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정욕적인 삶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죠. 참 나쁜 삶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모두 하나님을 섬기며 일하는 그것이 사명을 이루면서 가는 것이냐? 그렇지는 않아요.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일 앞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거죠. 그러니까 일 앞에만 서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명감과 상관이 없이 그냥 일하는 사람이죠. 계속 일하면서 그 길로 그냥 가는 거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선 사람들만이 그 사명을 느낄 수 있는 거죠.
그럼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사명을 주시느냐? 오늘 그 앞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렇게 여러 번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와서 한 가지 질문을 하셔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는 거죠. 그러니까 이 모든 사명을 향해 태어나는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왜 그러냐하면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무언가 하나님의 목적에 관계된 일과 연결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하나님을 위해 하여야 할 일이 보이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하여 할 일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면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 할 일 많은 이 세상에 일꾼을 보내달라는 기도가 나오는 것이죠. 사랑이 없으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느껴지지 않아요. 근데 사랑이 있으면 그게 느껴지는 것이죠. 사랑이 있으면 그게 느껴져요. 그래서 모든 사람을 보면서 이런 사랑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에게 고요하게 주어지는 사명이 눈에 띄는 거죠. 그때 그 사람의 인생이 긴장감이 있고 아주 빛나는 인생이 되는 거요.
옛날에 우리 교회에 간사 하나가 있었어요. 너무 시집을 가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내가 책임을 지고 너를 시집 보내주마. 아, 고맙습니다. 목사님. 그 대신 세 가지를 네가 해야 된다. 세 가지만 하면 내가 꼭 보내주마. 우선 첫째는 기도를 많이 하고, 두 번째는 모든 사람에게 상냥하게 대하고, 마지막 세 번째는 편한 복장으로 교회 오지 말거라. 항상 누가 보든지 안보든지 예쁘게 옷을 입고 나와라. 근데 그 약속을 지키기가 참 힘들죠. 내가 이렇게 여러분들 간사들 제복을 만들게 된 동기가 무어냐 하면은 하옇튼 편한 것을 그렇게 좋아할 수 없어요. 복장 자율화 했더니 청바지에 티셔츠, 그 다음에 운동화 구겨 신고 점점 더 편해지기를 원해. 편한 것 따지면 몸빼가 제일 편한데. 몸빼로 할까? 몸빼? 몸빼에다가 박스 티셔츠 하나 입으면 아마 최고로 편할 거요, 그죠? 그렇게 보기 싫을 수가 없어요. 근데 자기를 가꿀 줄 아는 여성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아요.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요. 그러니까 옷차림새도 규모가 있고 좋은 옷을 사 입는 것이 아니라 규모가 있고 자기 자신을 가꿀 줄 알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죠. 이처럼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사명을 발견하게 되면은 긴장이 깃들게 되는 거죠. 긴장이 깃들게 되는 거죠. 거기에서 삶의 그 모든 향기가 나기 시작하는 것이죠. 근데 그런 사명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시체로서 살아간다는 거요. 정말 재미가 없죠. 오늘 계속 자매들 얘기를 해서 좀 미안한데 하나 더 할께요. 옛날에 김기성 실장이 있을 때 간사 수련회를 갔어요. 아침에 다들 새벽 예배 모이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다들 그냥 쭈욱 모였잖아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내 옆구리를 찌르면서 ‘목사님 저기 모여 있는 저 아줌마들 누구예요?’ 그것 봐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머리를 곱게 빗고, 구루무라도 바르고, 화장을 하면 사람이 딴 사람으로 보이는 거요. 내가 실은 김 간사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고 나도 깜짝 놀랐어요. 몇 사람은. 아주 얼굴이 완전히 틀려 보여요. 난 또 더군다나 눈까지 나쁘니까 잘못 들어온 사람이 아닌가? 옛날에 우리 김유성 사모가 간사였는데 한참 쳐다보면서 저 사람이 누군가? 그렇게 틀려지는 거요.
근데 그것이 바로 사명이 주는 향기야. 사명이 주는 향기야. 그거를 발견을 해야 돼. 그것을 찾지 못하면 인생이 너무 재미없는 거요. 영성이 깃들 수가 없어요. 밥을 먹을 때나, 예배당 한 구석에 엎드려 기도할 때나, 예배를 드릴 때나, 한가한 시간이 있어서 상념에 잠길 때나, 길을 걸어 갈 때나 늘 떠오르는 나의 사명, 그래서 나의 마음에 꽂혀서 설움이 된 그 어떤 목표, 그리고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시시한 인생이 될까 하는 가슴 저밈, 그런 것들이 있는 것, 그게 인생이예요. 그게 인생이예요. 그래서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명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종이로 만든 꽃과 같은 인생이예요. Paper rose. 종이꽃 인생이예요 아무 향기가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무엇인가 내가 이룰 어떤 목표가 있어서 그것이 늘 기도 속에 떠오르고, 눈을 감고 생각해도 그것이 가슴에 사랑이 되어서 사라지지 않는 그것은 한편으로는 굉장히 귀한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많이 아픔이 되요. 아픔이 되요. 중국에 가면 소주에 가면 담수 조개를 기르는 밭이 있어요. 저 지평선까지 그 논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조개를 기르는 거요. 조개가 막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다발로 엮어져서 미역줄기처럼 그렇게 쏟아져 나오게끔 만들어요. 근데 그거를 집어 넣을 때 조개를 벌리고 그 속에다가 무얼 집어넣는다고 그래. 그래서 조개의 살을 파고 들어가. 그러면서 그것이 이제 자기의 살을 보호하기 위해 액을 내는 거요. 그것이 뭉쳐져서 그래서 그러한 조개가 되는 거요. 그러한 것들을 품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값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거요. 때로는 너무 고통스러운 거죠. 근데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고통은 싫고, 기쁨을 얻고 싶어 하는 존재이거든요. 그런 존재예요. 그래서 그 기쁨을 얻고 싶어 하는 존재예요. 그러니 당연히 고통이 있으면 그 고통을 싫어하게 되는 거죠. 근데 그 고통을 사랑하게 될려면은 오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 하는 질문에 아멘하고 대답할 수 있어야 되요. 그때에야만이 그 고통을 사랑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자기 사랑은 주님을 위한 고통을 싫어하고 주님을 위한 사랑은 자기를 위한 기쁨을 거절하는 거요.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사명을 따라서 살아가게 되는 거요. 그게 향기로운 인생이예요. 그렇게 살다가 보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요. 복을 주셔요. 견딜 수 있을 때에는 견딜 수 있어서 견뎠고, 견딜 수 없을 때에는 견뎌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견디면서 자기의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갈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거요. 금년 한해를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