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녹취자: 박나리
I. 본문해설
한 사람의 기도가 진실하고 간절하다면 그 사람의 기도는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오늘날 교회가 정말 예수가 세우시려고 했던 교회인가를 고민하는데 그것을 고민하려면 주기도문을 보면 됩니다. 신약성경은 복음서로 축소되고, 복음서는 더 축소하면 예수의 생애로, 예수의 생애를 더 축약하면 주기도문으로 보여줍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사셨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당신을 통해 구속될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 될 지 소망을 보여줍니다. 사도바울이 편지를 쓸 때에는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였고,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죄수의 위치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쓴 편지이지만 빌립보 교회만을 위해 쓴 것은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와의 교류를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감옥 속에서 인생의 황혼에 순교의 종소리가 들릴 때, 마음을 다해 주 앞에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바울의 비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목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과 일치를 이룹니다.
여러분 목회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신학생들 중에서 아무도 목회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너무 광범위합니다. 목사들도 모아놓고 목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을 하면 다 다릅니다. 사람들은 다 말은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어떤 사람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그네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일부이지 사랑 전체는 아닙니다. 교회 짓는 것부터 시작해서 심방하고 설교하는 것 등 어느 하나도 목회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그 자체가 목회는 아닙니다.
II. 목회란 무엇인가
바울이 그것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입니다. 목회란 이미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고 전도는 없는 사랑이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존경하는 스승 중 한 사람이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는 전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전도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너희 ‘사랑’은 그리스어로 ‘아가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신의 무한한 자비심 때문에 나오는 사랑입니다. 그 신의 사랑에는 대가가 필요 없습니다. 자신이 사랑이 넘치기 때문에 그 박애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해 줄테니 너는 나에게 순종하라’거나 거래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신학을 이해해야 합니다. 맨 처음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고 삽니다. 그런데 살만 하면 절대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모태 신앙인 사람도 언젠가 회심을 했다면 도대체 살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인생을 도저히 나의 힘으로 살 수 없다고 할 때 복음을 듣게 됩니다.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있습니다. 그 사랑의 핵심은 ‘예수가 날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날 위해’라는 것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 나를 대신해서, 나를 대표해서’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더 이상 축약할 수 없는 요약입니다. 영어로도 네 단어이고, 한국어로도 네 단어입니다. ‘예수께서 날 위해 죽으셨다.’ ‘Jesus died for us.’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왜 감동으로 다가오는가는 하나님 앞에 멸망할 수밖에 없는 나의 이익을 위해, 나를 대신해서, 모든 인류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느 순간에 밀려옵니다. 그 사랑이 밀려오면 당연히 우리 마음속에는 그 사랑에 대한 반응이 생겨납니다. 당연히 그것은 믿음이고 그 믿음의 결과로서 사랑이 생겨납니다.
마틴 루터가 레오 10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교황이여, 사랑은 결코 믿음을 불러오지 못하지만 믿음은 사랑을 불러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선행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한 사람 안에 진정한 믿음이 생긴 것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받고 그 아가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생긴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왔지만 그 사랑을 행하는 주체라는 점에서 하나님은 하나고 우리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서방신학자들은 이것을 아가페 사랑과 나누어 라틴어로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아가페는 하나님 자신의 인간을 향한 사랑이고, 까리따스는 그 사랑에 감화를 받아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인데 그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도 해당됩니다. 라틴어로는 ‘아마레 데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마레 데오’, 하나님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으로 하나님께로 상승하며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하나님뿐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쪼개질 수 없는 형태로, 까리따스의 형태로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이 편지를 쓸 때는 불신자가 아니라 빌립보의 신실한 신자들에게 쓴 것입니다. 그 목회의 목표는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며(μᾶλλον καὶ μᾶλλον)라고 해서 점층적 증대입니다. 그래서 ‘풍성하여’진다는 것인데(περισσεύω), 이 말은 경계가 있는 항아리에 물을 부었을 때 꽉 차면 ‘페리’라는 경계를 넘쳐서 흐르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목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사람들 속에 사랑이 점점 더 넘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목회의 노력은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거나 적게 사랑하는 사람을 설득해서 그 사랑이 생겨나고 성장해서 넘쳐나고 한계 없이 넘쳐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인 우리에게 주는 실천적 적용점은 목회자의 자격이란 신학을 얼마나 공부했는가, 인격이 훌륭한가, 목회의 기술이 뛰어난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미’는 BTS 팬클럽 이름인데, 전 세계 아미가 약 280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 아미는 실시간으로 소통합니다. 아미는 BTS를 너무 좋아합니다. 사람들에게 BTS를 선전하고 춤을 보여줍니다. BTS를 좋아하는 사람은 신이 나고 서로 통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아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내가 목회자로서의 자격이 있는가를 보려면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사람, 적게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슬픈지를 보는 것입니다. 슬프지 않으면 소명이 아니거나 영적인 깊은 침체에 빠져있는 경우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변함이 없으면, 여러분이 신학을 계속 공부한다고 할 경우 적어도 목회의 세계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인생일 것입니다. 성공한 목회자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그렇게 안 될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성공하건 못했건 살아있는 동안에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목회의 허위가 무엇입니까? 자기는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설교하고 심방하는 것입니다.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밤에 내가 오랫동안 좋아하던 자매에게 가서 고백을 했습니다. ‘결혼을 전제로 나와 깊이 사귀겠습니까?’라고 합니다. 아무리 이렇게 물어도 대답을 안 할 것 같은데 용기를 내었습니다. 이 말을 안 하면 계속 썸을 탈 수 있을 거 같은데 용기를 낸 것입니다. 고백을 통해 이어지던지 아니던지 결단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yes’라고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남자가 돌아오는 길이 어제의 그 길이겠습니까? 모든 세상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일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사랑하게끔 해주는 게 목회의 본질입니다. 목회를 잘하는 사람은 매일 하나님과 연애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역자를 뽑을 때 첫 번째 기준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것만 보고 아무것도 안 보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있으면 그를 가르칠 수 있고 그는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으면 안 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목회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III. 사랑이 풍성해지는 길
두 번째는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사랑하게 할 수 있는지의 문제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모든’이라는 단어는 범위가 아니라 깊이를 이야기합니다. 또 ‘에이스’(εἰς)라는 단어가 있는데 ‘수단’이라는 의미입니다.
A. 지식(ἐπίγνωσις)
첫 번째 지식입니다. 지식이란 무엇입니까. 그리스어로 ‘에피그노시스’(epignosis)입니다. 저는 신약에서 그리스어 단어로 가장 심오한 의미를 가진 단어 10개 중에 하나로 ‘그노시스’를 말하고 싶습니다. 지식이라는 단어로 ‘기노스코’(ginosko)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이것의 히브리어 배경이 ‘야다’라는 단어입니다. 저는 히브리어 단어로 가장 심오한 의미를 가진 단어 50개 중에 하나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원래 ‘알다’라는 뜻인데 형태는 그리스어이나 사상의 배경은 히브리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사용하던 ‘기노스코’보다 심원한 히브리 사상을 배경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그노시스’라는 단어는 ‘야다’의 명사형인 ‘다아트’인데 호세아 4장에 나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겠으며’할 때 그 ‘지식’이라는 단어가 ‘다아트’입니다. ‘야다’의 명사형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가인이더라’할 때 동침하다는 말이 ‘야다’입니다. 그래서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know’라는 단어에 ‘성교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킹제임스 버전으로 번역이 되면서 그 의미가 영어로 들어왔습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옮길 수 있는 단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에 가서 여자가 ‘저 남자를 잘 안다’고 하면 큰 일 납니다. 자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하고 여길 것입니다. 마리아가 천사가 왔을 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라고 합니다. 그것이 결국은 동침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에피’(ἐπί)는 ‘관하여’라는 것인데, ‘에피그노시스’는 어떤 사물에 대한 철저한 지식입니다. ‘에피그노시스’를 수단으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시간적으로 말고 논리적으로 세계가 창조된 것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세계 창조에 대하여 하나님이 생각한 것이 먼저입니까? 생각한 것이 먼저입니다. 아퀴나스가 이야기 한 것처럼 창조되기 전에 이미 창조세계에 대한 관념이 하나님의 지성 안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느 순간에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면서 창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기에 홀이 있습니다. 설계할 때부터 목적이 강의를 듣거나 영화를 보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있는 바닥을 돌이 아니라 카펫으로 한 것은 음이 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기둥이 없는 것은 화면을 잘 보고 강의의 집중도를 위한 것입니다. 사물 하나하나는 이 공간의 사용 목적에 이바지하는 방식으로 여기에 존재합니다. 여기에 역행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설계를 잘못했거나 관리를 잘못한 것입니다. 빨리 제거해야지만 공간의 고유 목적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는 만물 하나하나만을 완전한 지식 속에서 창조한 것이 아니라 만물 간에 어떤 관계가 있을지를 아셨습니다. ‘H’ 두 분자와 ‘O’ 한 분자가 결합하면 물이 된다는 것까지 하나님은 당연히 아셨습니다. 모든 만물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죄가 들어온 후로는 그 계시들이 흐려졌습니다. 사물 그 자체와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관계, 그에 대한 철저힌 지식이 희미해졌습니다. 그것을 밝히는 것이 학문입니다. 사물 간의 법칙을 밝히는 것이 물리학이고, 사람에 관해 연구하는 것이 인간학입니다. 집단으로서의 사회가 어떻게 개인과 영향을 주고받는 지가 ‘인류학’ 또는 ‘사회학’, 그것을 정치현상에 국한시켜 인과관계를 연구하는 것은 ‘정치학’입니다. 문제가 일어날 때 가장 먼저 참고해야 할 사람은 그 분야를 전공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모르는 인과관계를 알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모든 지성의 어두운 그림자가 지워지고 사물 하나하나를 지금보다 훨씬 정확하게 알 수 있다면 모든 사물들은 하나님을 증거할 것입니다. 학문의 기원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이 유일합니다. 거기로부터 모든 사물들이 나오고 인간은 그 사물들을 보며 지식을 탐구합니다. 신학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성경으로부터 신학이 나오면서 다른 학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더 많이 하면 할수록 신학을 더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토대가 생겨납니다. ‘에피그노시스’를 목회와 신학으로 좁혀서 생각해본다면, 하나님, 예수, 구원, 죄, 은혜, 사랑, 미움, 질서, 이렇게 우리들이 많이 쓰는 단어를 철저하게 아는 지식으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증명을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는데 이 사람이 그것을 모릅니다. 엄청난 재난을 만났습니다. 자신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만, 신앙을 가지고 나서 내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부르셨는지를 파악하며 연관관계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밀려드는 감동을 느낍니다. 구원의 의미를 잘 듣고 나니까 어마어마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에 있는 사건이나 사실을 정확하고 완전하게 설명하는 데에서 그것들을 수단으로 하나님께서 사랑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교부들, 중세 신학자들입니다. 중세에 복잡하게 갈라졌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다시 돌아오는데, 지성사와 신앙에 있어 감정이냐 지식이냐 문제가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합니다.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 시대에 와서 잃어버렸던 성경적 신앙관을 발견합니다. 마르틴 루터와 얀 후스 또는 위클리프와 같은 종교 개혁 이전에 있었던 개혁가들이 고민을 했습니다. 바로 지식과 사랑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지식과 사랑의 결혼입니다. 그것을 학교 표어에 ‘피에타스 엣 아카데미아(Pietas et Academia)’라고 썼는데 원래 저 말은 칼빈이 ‘피에타스 엣 스키엔티아(Pietas et Scientia)’라고 제네바에서 썼던 문장 아래에 나오는 말입니다. ‘피에타스’는 경건 또는 사랑이고, 스키엔티아는 지식 혹은 확장시켜 학문을 의미합니다. 사람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이 안수기도, 심방, 교제일까요? 물론 하나님이 그들 중 일부를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묻어 있는 지식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지식의 요소가 너무 적을 경우에는 아주 많이 그와 접촉해도 인간적으로 통할지 모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는 별개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목회자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모두 선한 목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식이 없는 사람이 선한 목자가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가장 큰 죄는 공부를 안 하는 것입니다. 낚시 나갈 사람이 도구를 챙기지 않는 것이고, 배를 몰 사람이 배의 위치를 확인하지 않은 것입니다. 탱크 전투를 나갈 사람이 탱크가 발동이 걸리는 지를 확인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쓰시고 있다면 기적인 줄 알고 감사하고, 공부를 더했다면 더 크게 쓰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난 세월을 부끄러워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은 어디서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 준다고 하면 맨발로 서울까지 올라갈 의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영어든 독일어든 한문이든, 못 읽고 지식을 습득하지 않는 이유를 대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만약에 대구에서 유명한 투기꾼이라면 땅에 많은 관심이 있을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여러분이 1학년에 학교에 들어와 이제 3학년이 되어서 신학책을 몇 권 읽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레포트를 쓰라고 해서 중간 중간 읽은 것을 제외하고 진짜로 책을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생각한 책이 몇 권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여러분보다도 못한 야간 신학교 출신입니다. 직장을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열심히 했습니다. 여러분은 출발 자체가 서울대 학생들과 다릅니다. 머리도 그만큼 안 되고 학문의 폭도 좁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 많이 공부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 같으면 방학 때 15시간씩 공부해야 합니다. 교회 섬기고 있다면 꼭 필요한 시간을 섬기고 돌아와 도서관에 앉아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를 못하는 것 때문에 가슴을 쥐어뜯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에 감동이 안 되면 소명이 아닙니다. 책읽기가 싫으면 아마 소명이 아닐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의 중요한 사명은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의 관심 없이 설교하는 것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하루치 분량입니다. 그것은 제가 쓴 ‘신학 공부 난 이렇게 해왔다’ 1권을 찾아보십시오. 제일 먼저 성경을 중심으로 열심히 읽고 두 번째는 신학책을 읽으십시오. 신약, 구약,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등 철저히 읽으면서 여유가 있으면 역사, 철학, 문학, 과학 교양서를 읽으면서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합니다.
B. 총명(αἴσθησις)
그 다음에는 모든 총명이라고 했습니다. 총명은 그리스어 성경에 ‘아이스테시스(aisthesis)’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이스타노마이(aistanomai)’라는 ‘놀라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온 명사입니다. 현대 그리스어 성경에는 ‘노이시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지성’이라는 뜻이고 희랍 철학에서 유명한 ‘노스’라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노스’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뜻합니다. 아이스테시스란 이성적으로 A니까 B, B니까 C, 그러므로 A는 C라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꿰뚫어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중간 지대가 없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 다가옵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중간 단계가 없습니다. 사랑은 자기도 모르게 쌓여서 어떤 남자가 없으면 못살 것처럼 되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슴 속으로 훅 들어오는 것입니다. 어제까지는 이웃집 남자였는데 오늘 아침에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 사이에는 중간이 없습니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는 중간이 없습니다.
이론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은 에피그노시스라면,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초월적인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이스테시스를 통해서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대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스테시스를 정리하면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초월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근심이 너무 많습니다. 이성적으로는 돈이 없고, 나이는 많고, 결혼을 못했고, 개척도 못했고, 도와주는 부모도 없고, 기도 많이 하는 권사님도 없고 등등 입니다. 갑자기 하나님이 놀라운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목회의 자리를 주셨습니다. 그 때 평안이 확 밀려올 때 왜 평안이 오는지 알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확실한 하나님의 인도라는 것을 간파하는 것이 아이스테시스입니다. 중세의 신학자들, 특히 안셀 무스 같은 사람은 그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여, 제가 이렇게 제가 알고자 하는 것은 단지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기 위해서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성으로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더 잘 믿기 위합니다. 이성의 탐구에 의해서 믿음이 대체될 수 없습니다. 에피그노시스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에 의해 아이스테시스가 대체될 수 없습니다. 교수님이 계셔서 너무 죄송하지만, 그렇게 보면 학문의 분량이 항상 성경을 펼 때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공부를 적게 하면 은혜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펴서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 에피그노시스로 설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성령의 역사로서 아이스테시스가 사람들 사이에서 주어질 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번뜩하고 들어옵니다. 이것을 초월적 빛, 지식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목회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지는 두 가지입니다.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테시스입니다. 이 두 가지를 묶어서 하나의 그림을 그려드리겠습니다. 불길이 계속 타오릅니다. 두 개의 장작이 놓여있습니다. 그 장작이 계속 공급되기 때문에 불길이 타오릅니다. 장작불보다 더 무섭게 타오르는 불은 볏짚을 태우는 불입니다. 그런데 한 트럭을 가져와 불을 붙이면 10분 정도 밖에 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목회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데, 한 번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 성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점점 커져서 죽을 때 가장 커지게 하는 것이 목회의 목표입니다. 그것이 계속 타오르려면 두 개의 장작이 필요합니다.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테시스가 필요한 것입니다. 계속 공부하면서 발전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새롭게 깨닫는 신령한 것들이 계속해서 성도들에게 제시가 될 때, 성령이 역사하실 때 아가페가 타오릅니다. 라틴어로는 까리따스입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세 개의 사랑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원래 에로스는 남녀 간의 사랑인데 그 모든 이기적인 사랑을 아울러서 말합니다. 에로스를 하다가 아가페를 만나고 까리따스로 돌아갑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완전한 하나님과의 화해와 기쁨을 누리면서 삽니다.
끊임없는 에피그노시스가 필요합니다. 결국 목사는 계속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신학교 때에 그 틀을 잡아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어떤 난관 속에서도 혼자 책 읽고 공부하는 틀을 잡는 것이 신학교 시절입니다. 나는 신학교 3년 그리고 신대원 3년 동안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할 수 있습니다. 다시 그 때로 되돌려 보내주셔도 그 이상은 못합니다. 여러분도 양심을 걸고 공부해야 합니다. 잘 것 다 자고, 가고 싶은 곳 다 가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쉬고 싶은 것 다 쉬면서 성공할 수 있는 직업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고물장수도 그렇게 해서는 못합니다. 인터넷 서비스 판매업도, 보험업도 그렇게 해서 성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그렇게 사는 것은 자기가 책임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모자라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목숨을 건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제 큰 단락은 끝이 났습니다. 그래서 도전을 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 팁을 드리겠습니다. 제 이야기를 따라하면 10년 후에 저에게 와서 무릎 끓고 고맙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따라하는 사람은 많이 못 봤습니다. 어느 신학생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첫 시간에 선생님이 신학이라는 것은 이 책 저 책 읽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목회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자기가 존경할 만한 위대한 저자 한 사람을 선택하고 끝까지 그 사람을 파면 20년 후에 훌륭한 목회자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강의를 들으면서 어마어마하게 감동을 받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그 많은 기독교의 신학자들 중 조나단 에드워즈를 선택합니다. 참고로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 26권을 20년 동안 서너 권 빼고 모두 읽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보다도 더 열심히 조나단 에드워즈를 팠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신학자인 동시에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존 파이퍼입니다. 저는 제 나이 스물일곱에 야간 신학대학을 시작했으니 햇수로 치면 약 38년 동안 신학을 한 셈입니다. 그 시간 중 청교도에 10년을 바쳤고, 39세에 교회를 개척했으며 40세 이후 25년 동안 4명의 선생님에게 바쳤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4명 중에서 1명은 신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바쳤고 3명의 저자에게 바쳤습니다.
첫 번째 만난 사람이 17세기 복음주의의 시작이라고 불리는 존 오웬입니다. 그 분은 아마 저에 의해서 한국에 소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존 오웬은 약 1만 4천 페이지 정도의 저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주석만 700페이지로 8권을 쓰셨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제가 그것을 완독하지 못했습니다. 나머지는 거의 설교집 한 두 권 빼고는 완독을 했는데 2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저는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세 사람을 존 파이퍼가 했던 방식으로 공부했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준 유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처럼 설교를 하고, 목회를 하고, 신학을 할 수 있었던 저 나름대로의 독자적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해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한국교회에 표절 문제가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제가 결심한 것이 있습니다. 100년 이내의 설교집은 의도적으로 읽지 않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표절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이 그런 훈련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영어를 읽으려면 영어의 벽을 넘어야 하고, 독일어를 읽으려면 독일어의 벽을 넘어야 합니다. 그것은 힘드니까 한글로라도 읽으십시오. 그 누구라도 선택을 하십시오. 예를 들면 스펄전, 마틴 로이드 존스, 안톤 후크마도 있고, 많습니다. 그 대신 여러분들이 목회도 하고 있다면 목회도 하고 신학도 잘 했던 사람 중에서 택하십시오. 그리고 약 3년의 세월을 바쳐서 그 사람과 함께 먹고 자고 그 사람 책만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처럼 생각하고 그 사람처럼 성경을 읽게 됩니다.
IV. 목회의 목표
그 다음으로 넘어가면 그렇게 교인을 길러내는 목적, 목표가 세 가지 나옵니다. 첫째, 성경에서는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 둘째는 진실한 것, 마지막은 허물이 없는 것입니다.
A.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함
첫 번째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한다고 했는데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그리스어 성경에는 ‘디아페로타’(διαφέροντα)라고 되어 있는데, ‘다른 것’이라는 뜻입니다. 정확하게 번역을 하자면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며’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은 다 가치가 있어 보여서 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일이 중간고사인데 오늘 컴퓨터게임을 하는 이유는 이것을 하는 것이 시험공부를 하는 것보다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회라는 것 아래서 해서는 안 될 일은 별로 없습니다. 교인하고 밥을 먹고 심방하고 설교준비하고 돈을 얻거나 땅을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저의 경험에 의하면 모르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제대로 된 것인지를 평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부터 시작해서 교회의 디자인, 설계, 건축, 안전 등 모든 것들에 대해서 전문가처럼 알고 있어서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다 필요하지만, 다 필요한 것이 모두 다 똑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두 없이 살 수 없습니다. 핸드폰 없이도 못 삽니다. 한 번 쓰고 나면 너무 편해서 놓고 못 살겠습니다. 이름만 부르면 바로 전화가 걸립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은 하나도 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10개만 남기고 나머지 내려놓으라고 하면 덜 필요한 것부터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끝까지 내려놓지 않는 것은 옷일 것입니다. 똑같이 사람보기에 다 중요해 보이는데,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해서 덜 가치 있는 것을 더 가치 있는 것 위에 세우지 않는 판단력을 갖게 만드는 것이 지식과 총명으로 목회를 하는 이유입니다. 모든 것을 목회자가 정해줘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교인을 잘 가르치면 상담의 필요성이 그만큼 줄어듭니다. 자기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납니다. 그게 ‘디아페로타’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분별한다는 것은 희랍어 성경에서 도키마조(δοκιμάζω)로, ‘시험해본다’라는 뜻이다. 즉 어떤 물건에 작용을 가해서 그 물건이 가지고 있는 성질이 밖으로 드러나도록 조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분별하다”의 의미입니다.)
B. 진실함
두 번째는 ‘진실하여’라고 했습니다. 희랍어로 ‘진실하다’는 단어는 ‘에일리크리네스’(εἰλικρινής)라는 단어입니다. 에일리스리네스는 그리스어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 두 가지 의미 중에 어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첫째는 ‘채로 친’이라는 뜻입니다. 빵을 만들고 싶으면 절구로 곡식을 빻고 가느다란 채에 칩니다. 그러면 가는 것은 떨어지고 굵은 것은 남습니다. 굵은 것은 버리던지 다시 빻아서 채를 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루가 남은 빵이 되어서 품질이 떨어집니다. 두 번째는 ‘햇빛에 비춰본’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요즘 복사기가 너무 좋아서 복사한 5만원 지폐인지 진짜 지폐인지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빛에 비춰보면 홀로그램이 나타납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홀로그램 기능이 없었습니다. 누군가 서명을 하고 지웠거나, 그림에 덧칠을 했을 때 햇빛에 비춰보면 숨길 수 없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진실이라는 뜻입니다.
진실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베루스’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베리타스’와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라는 뜻입니다. 진실의 정의는 진리에 합치된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동을 포함합니다. 사람이 진실하다면 그 사람 속에 진리라는 도덕률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에 ‘도덕’이라는 단어는 중국어로 ‘따오더’라고 하는데 ‘따오’(道)는 객관적인 진리이고 ‘더’(德)는 그것의 화합하는 인간의 정신과 마음입니다. 객관적인 진리에 인간의 화합하는 마음이 일치된 것을 도덕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결국 진실하다는 것은 그 진리에 합치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고민은 사람들이 자기가 잘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전도 잘하는 목사는 전도 안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말하고, 심지어 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기도 많이 하는 목사는 기도가 없으면 전도도 허위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번영을 주장하는 데에서는 당신이 예수 믿고 복 받고 부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 앞에 잘못 믿었다는 것이라고 가르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다 일리는 있는데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진리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전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진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러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면 그것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데 이것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이 사랑은 갈 곳을 잃습니다. 이것이 형이상학적으로 악에 대한 설명입니다. 마땅히 가치가 없는 것을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 악입니다. 그러면 결국 목회의 목표는 사람들을 진리에 합치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신실한 신학생은 반드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강의를 들었을 때 자기가 공부를 못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는 마음을 가진 학생이 진실한 학생입니다. 기도 많이 하는 목사님이 와서 이야기하면 똑같이 무슨 진리에 합치되면 되지 저렇게까지 기도를 해야 하냐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기도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제가 야간신학교 다닐 때 감사했던 것은 매일 채플을 드리는데 매일 하루도 회개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매일 그랬습니다. 전체적으로 항상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 신학에 굉장한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설교 내용은 별거 없었습니다. 비록 공부는 충분하지 않았고 목회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교회를 한 분들은 아니었지만 진실성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었습니다. 신학교에서 강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채플입니다. 매일 드리는 채플이 눈물바다가 되면 신학이 거대한 변화를 이룹니다. 목회자가 모두를 돌볼 수 없지만 말씀을 잘 가르쳐서 진리를 터득하고 그 진리 때문에 고뇌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 보다 완전한 사람으로 계속해서 만들어 가십니다. 그런데 이 진리의 중심이 없으면 목회자가 되어도 모든 인간 중 거의 누구도 안할 일도 하는 것이 목회자입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악을 다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목회자라는 타이틀 자체가 어마어마한 방패막이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진리와 성령으로 무장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갑옷을 입지 않으면, 그는 화살과 창이 날아오는 전쟁터에 속옷 바람으로 던져진 사람입니다. 갑옷을 입었으면 칼 한 번 맞아도 끄떡없지만, 다 벗었으면 화살 하나만 스치고 지나가도 죽습니다. 여러분들이 목회자로서 정말 자질이 있는가 보려면 여러분의 설교와 가르침을 받으면서 돌보는 양떼들이 판단력이 성장했는가, 그리고 보다 더 진실해졌는가, 그것을 보십시오. 숫자를 보지 마십시오. 크게 목회하는 사람들이 전도사 때부터 원래 크게 하던 사람은 몇 안 됩니다. 이름은 대지 않겠지만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모 목회자는 장로교 신학교의 예과를 나와서 시골교회에서 오랜 세월을 이름 없이 지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쫓겨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문제는 될 사람은 지금부터 다릅니다. 무순과 무는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순을 입에 넣고 씹어보면 신기하게 무의 매운 맛이 납니다. 종자가 똑같습니다. 제대로 된 목회를 할 사람들은 지금부터 규모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미 종자 자체가 다르게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종자 속에 속하는 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지금 이렇게 학교 같이 다니니 서로 잘 모릅니다. 20년 후에는 진짜 목회에 하나님의 복이 있는 사람과 목회를 고통 속에서 하는 사람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둘이 서로 만나지 못합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야 하는 시간입니다.
C. 허물 없음
그 다음은 ‘허물이 없이’입니다. ‘아프로스코포스’(ἀπρόσκοπος)라는 단어입니다. ‘아’는 없다는 뜻이고, ‘프로스코포스’는 흠집이라는 뜻입니다. 신학적인 흠집과 윤리적인 흠집입니다. 가르침을 펼쳐서 영향력이 큰데 신학적으로 결함이 있습니다. 그 결함을 모든 양떼들이 신학적으로 물려받습니다. 그래서 결함 있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들이 볼 때 잘 모를지 모르나, 나중에 중대한 오류를 만들어냅니다. 그 오류가 역사 속에서 판명이 됩니다. 다음은 윤리적인 흠입니다. 교육을 받고 가르침을 받아서 지식과 총명으로 온전하게 된 사람들은 티끌만큼이라도 제대로 살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작품 가운데 ‘A Narrative of Surprising Conversions’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입니다. 에드워즈 시대 때 부흥의 기록을 증인들이 함께 남긴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에드워즈가 1740-1741년 때, 즉 한창 부흥이 일어날 때 피비 바틀넷이라는 4년 2개월 된 남자 아이의 회심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4년 2개월밖에 안된 아이, 즉 대여섯 살 된 아이가 정기적으로 같은 시간이 되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너무 궁금해서 추적해봤더니 헛간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를 만나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당시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월요일부터 엄마에게 주일이 언제냐고 물었습니다. 엄마가 왜 묻는지 물어보니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를 빨리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아이가 그 설교의 본질을 이해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아이의 비명소리가 헛간에서 들렸습니다. 거기에서 회심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 뒤 놀라운 일이 생겼는데, 일체의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옆집에서 넘어 온 과일나무에서 과일이 자기 마당으로 떨어져 주워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엄마에게 혼이 났습니다. 우리 집으로 왔지만 그것은 남의 과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울면서 옆에 있던 누나를 원망했습니다. 누나는 왜 그것이 죄라고 나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냐고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아프로스코포스’가 되고 싶어합니다. 어떤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은 절대적인 것이 됩니다. 나 정도면 너에게 잘해주는 것이고 요즘 나 같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생각하면 그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장로님이 자기가 아내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를 길게 설명해서 제가 한 마디를 했습니다. 진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서 아내에게 잘 해준 사람은 그것을 잊는다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그런 것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무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이 그동안 자신에게 잘해줘서 고맙다고 해도, 자신이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V. 결론과 적용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목회의 최종적인 목적이 나옵니다. 그것은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한 시간 정도의 긴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디카이오쉬네(의)’에 대한 설명과 ‘글로리(영광)’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아티아 크리스투(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설명이 다시 요구됩니다. 그러나 너무 길기 때문에 여기에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지식을 많이 가르치면 교인들이 머리가 커지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어느 교회가 머리가 큰 교회인가, 어느 교회가 지식이 너무 많아서 문제를 일으킨 교회인지, 성도들이 신학 지식이 너무 풍부해서 문제가 된 교회가 어디인지를 되묻습니다. 있지도 않은 가설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똑똑해서 문제를 일으켰으면 똑똑하기 때문이 아니라 똑똑한 것을 잘못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모든 사람은 아무 문제가 없이 잘 삽니까? 어떤 여자가 얼굴이 너무 예뻐서 문제를 일으켰으면 예쁜 것이 죄입니까? 그 사람이 못생겼으면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목회자는 흐르는 강물입니다. 강물은 흘러가면서 자신이 어느 땅에 얼마나 주었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막에 강이 흐르면, 물이 땅에 흘러들어가며 잎이 피고 풀이 돋아나고 벌레가 생기고 새들이 생기고 짐승이 생기고 나무들이 자랍니다. 가끔 산에 보면 새의 배설물을 통해 생뚱맞게 벚나무가 자라있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생태계가 생깁니다. 사도 바울이 예전에 한 일을 돌아보지 않고 앞에 있는 푯대만을 향해서 간다고 했습니다. 강물처럼 목회자의 일생은 흘러갑니다. 업적을 계산하는 일은 할 일이 없어서입니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는데, 사람이 계산한다고 그것이 정확한 계산이겠습니까. 수 천 명이 모여도 그가 다 참신자입니까. 떠난 이는 신앙 없이 떠났겠습니까. 아닙니다. 어디에선가 그 신앙을 가지고 목회를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지구촌 한 구석 나도 모르는 곳에서 그것을 부여안고 이렇게 에피그노시스와 아이스떼시스를 가지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만족하고 하나님 앞에 흘러갑니다. 나는 단 한 번도 내년에 교인이 몇 명 모이는 것이 목표라고 정한 적이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안 할 것입니다. 나의 기억으로는 수가 적다고 목회자를 쫓아낸 적은 없습니다. 태도 때문에 나가라고 한 적은 있지만, 그런 적도 많지 않습니다. 각자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최종적인 열매는 우리 보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맺는 열매입니다.
죽을 때까지 안 바뀔 수도 있고 이 강의를 듣고 오늘 밤에 바뀔 수도 있습니다. 장대한 세월이 흘러야지만 인간이 바뀔 수 있다지만, 모두 그 원칙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10년을 같은 사무실에 있었는데 한 번도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스치듯 만났는데 그날 밤부터 미치도록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에피그노시스가 있고 아이스떼시스가 있습니다. 그것을 소재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합니다. 사람을 설득합니다. 에피그노시스를 늘어놓고 아이스떼시스를 간증처럼 해도 그것으로 자기자랑으로 끝나는 사람이 있고, 스쳐지나가듯 한 마디 했는데 그것이 마음에 꽂혀서 회심에 이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준비하지만 불은 하늘로부터 떨어집니다. 그러나 갈멜산에 장작을 벌여놓지 않았으면 불이 떨어졌어도 모래만 태우고 끝났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공부 많이 한다고 반드시 쓰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공부를 안 한다고 쓰임 받는 것은 더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러니 공부를 많이 하면서도 공부를 의지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쓰시도록 눈물로 매달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