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빛이 아니요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라(요 1:8)
녹취자:이경순
설교자가 명심해야 하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빛에 대해서 증거하지만 자신이 빛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라 그랬습니다. 이 빛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치는 빛이 있었는데 그분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은 그 빛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 빛은 결국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그리스도를 이 빛으로 묘사했을까? 우선 빛이라고 하는 표현은 구약성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오르입니다. 성경에서 이 빛은 자연적으로는 빛을 가리키지만 도덕적으로는 진리를 가리치고 신학적으로는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 전통에 따라서 요한은 실질적인 마지막 선지자로서 빛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빛은 당연히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럼 왜 그리스도를 이 빛으로 묘사했을까? 이런 것입니다. 자 빛이 하나도 없고 캄캄합니다. 그러고 아마 우리는 일체의 빛이 없을 때 이 공간에 들어온다면 조심스럽게 팔과 발을 저으면서 뭔가 부딪히는 것이 있는 것을 보면서 공간을 확보하려고 할 것입니다. 군대에서 완전 어둠 속에서 어떻게 발걸음을 옮기는지 훈련하는 것처럼 그렇게 더듬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빛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그 빛을 통해서 이 공간의 크기가 얼마큼 되고 내가 어디에 있고 또 나와 관계가 있는 사물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해주듯이 똑같은 방식으로 진리는 우리 모든 것을 비추어서 자신을 알고 다른 것들을 알게 해주는 것이 빛입니다. 그래서 이 빛은 광원이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 광원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게 금 진리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이 빛 혹은 그의 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명심해야 할 것은 자신이 아무리 많은 감동을 받아서 빛에 대하여 말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빛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사실은 그가 빛처럼 여김을 받는 것을 거절해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조금 감동하면 설교자를 주목하지만 진짜 큰 은혜를 받으면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조금 하나님을 만나면 그 설교자에게 박수를 치고 싶지만 진짜 은혜를 많이 받으면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위험한 선은 진리에 대해서 자신 있게 감동적으로 많이 말하면서 자신도 은혜가 될 때 그때에는 자신이 마치 그 빛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설교자가 아주 쉽게 빠질 수 있는 위험입니다. 그래서 항상 설교하면서 아무리 감동적으로 유창하게 마음 중심으로 쏟아져 나온다고 하더라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는 이 진리를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같은 종류의 존재가 아니라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저 회중들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설교하는 매 순간 자신에게 상기 시켜야 할 사실입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역사문학의 서술 방식 가운데 춘추필법이 있습니다. 거기서 얘기하는 춘추라고 하는 것은 봄/가을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춘추 그러면 우리는 흔히 올해 나이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듯이 세월을 이야기합니다. 춘추필법이라고 합니다. 그 역사를 보면 그렇게 나무랄 것이 없이 훌륭한 사람들이 춘추필법적 사고에 빠집니다. 이것은 빛이신 예수그리스도와 자신이 같았다 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데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이나 성경 신학에 나온 어떤 위대한 인물을 설정하고 자기가 그 인물의 화신인 것처럼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걸출한 하나님의 종들이 이런 춘추필법적 사고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영웅이라고 불리었던 존 낙스입니다. 존 낙스는 비록 칼빈 밑에서 공부를 했지만 칼빈 밑에서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아니었고 칼빈을 존경해서 칼빈 가까이 자주 접촉을 하면서 가르침을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사를 넘나드는 종교개혁에 대한 헌신은 아주 유명합니다. 종교개혁을 할 것인가 가톨릭으로 넘어갈 것인가 사이에서 자기 정치적인 득실을 따라서 요리조리 방향을 바꾸는 여왕에게 면전에서 마담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담력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굉장한 사람이었습니다. 갑자기 존 낙스 옆에서 여왕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자기의 진심을 알아달라고 할 정도까지였다고 하니까 대단한 사람은 틀림없습니다. 미셔트의 저자였고 헤밍턴의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배 밑창에 노 젓는 노예로까지 살았으니까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춘추필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레미야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역사 속에서 아주 많이 나타납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런 춘추필법적 사고는 잘못된 것입니다. 설교할 때 자신이 당연히 이 빛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동시에 성경에 나오는 어떤 위대한 인물 속으로 자신을 투사시키는 것도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시대의 인물이고 역사를 해석하면서 예레미야 시대에 일어났던 그 역사적인 한 패러다임은 그대로 이쪽하고 비교하면서 이 일이 일어났으니까 이렇게 되고 이런 식으로 연결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주관적인 사고방식이고 그냥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 그런 춘추필법적인 사고를 아주 심하진 않았지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인물 중의 하나가 세례요한이었습니다. 낙스처럼 지나친 것은 아니지만 의식 속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존경심 때문에 한편으로는 그렇게 살고 싶다는 어떤 거룩함의 열망 때문입니다. 결국, 알고 보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설교에까지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설교하는 자세에는 영향을 얼마든지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냐 그냥 나는 나의 시대에 나로서 설교하는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그 시대에 설교하다가 죽었고 예레미야는 그 시대에 설교하다 죽었고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이 남겨놓은 성경 말씀만이 나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훌륭한 삶은 내가 본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춘추필법화 할 관계가 아닙니다. 나는 예레미야 시대와 아무 상관 없이 그리고 세례요한이 살았던 시대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나는 여기서 김남준으로서 그들이 만나지 않았던 나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사라져갈 것이고 그리고 이후로도 나 같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 그들은 나와 똑같은 시대에 똑같은 사람들에게 똑같이 설교하지 않습니다. 15년 뒤에 누군가가 와서 나의 후임으로 와서 설교한다고 하더라도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그 사람으로서 설교하는 것이고 나는 나로서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런 춘추필법적 사고도 결국 알고 보면 그는 이 빛이 아니요 라는 사실에 마음이 사무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칭찬하면 온몸에 벌레가 다니는 것처럼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루스트라에 가게 됩니다. 거기에서 복음을 전할 때 발을 못 쓰는 사람을 고쳐서 낫게 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거기 있던 무리가 소리를 치며 이 사람들은 신이다.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신 것이다. 그래서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부르고 바울은 그들 중에서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헤르메스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해석의 신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볼 때는 바나바가 훨씬 더 대단한 사람으로 보였나 봅니다. 그러면서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들이 드디어 우리가 늘 마음에 섬기는 제우스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구나. 이 큰 능력을 행하는 것 보니까 그 신이다 하고 제물로 소를 가지고 화환을 가지고 와서 그들 앞에 와서 제사를 하려고 할 때였습니다. 그때 바나바와 바울이 한 행동은 우리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옷을 찢고 소리를 치며 우리는 신이 아니라 여러분과 꼭 같은 인간일 뿐이라고 외쳤습니다. 옷을 찢었다고 하는 것은 구약의 전통을 따라서 통렬한 마음의 고통과 분노와 회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옷을 찢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리얼플레이입니다. 옷을 확 찢으면서 자신의 마음의 본심을 볼 수 있게 금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언젠가는 대가가 될 것입니다. 대가는 아니더라도 대가 비슷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그 빛이 아니다 벌써 아직 젊었을 때 자기 칭찬하는 소리나 듣기 좋아하고, 거기에 심취하고 심지어는 춘추필법적인 사고나 가지고 살아가면 우리는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아주 많이 변해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나는 빛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서 주목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달을 보라고 손가락을 내밀면 달을 봐야지 손을 보면서 어쩜 손이 저렇게 예쁘게 생겼을까? 손가락 끝은 누구 허락을 받고 저렇게 예쁜 것일까? 그리고 저 손톱에는 뭐가 발라져 있는 것일까?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은 손가락을 가리킨 본의가 아닙니다. 달을 보라는 것입니다. 달을 보라 그러면 사람들이 달을 보고 달에 대하여 생각을 많이 하게 해야지 손가락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존재가 바로 설교자입니다. 설교자는 매우 매우 위대한 의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존경받는 목회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내려놓으십시오. 훌륭한 스승이 되어 후학들에게 신망을 받아야 되겠다는 마음도 내려놓으십시오. 자신 존재의 가치는 자기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믿게 되는 것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빛이 아닙니다. 그러면 뭐 하기 위해서 온 사람일까요?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