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랑 속에 선 사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1-25)
녹취자 : 박나리
인생을 살다가보면 원하지 않는 큰 어려운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사람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과 함께 살고 있어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캄보디아 프놈펜에 놀이 공원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 당시에는 고가 교차로가 처음 생겼다고 온 시민이 고가 교차로에 밟고 환호성을 친 적도 있었습니다. 그 놀이공원은 우리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놀이 원은 아니었고, 넓은 벌판에 동전 넣고 돌리는 오락기와 옛날 동네에 아저씨들이 싣고 오던 바이킹카 같은 것이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는 처음이었습니다. 그 놀이공원은 섬에 있어서 사람들이 건너갈 수 있도록 다리도 하나 생겼습니다. 개장을 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수없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빠져나오다가 470명이 밟혀 죽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한 사람이 넘어져 깔려 비명을 지르니,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난 줄로 착각하고 서로 나가려고 하다가 470명이나 깔려 죽게 된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사고였습니다. 다리가 무너지거나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사람이 어려운 일을 만나서 불안할 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옆에 있는 모든 사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장면에서 사도바울은 황제 앞에서 최종심문을 받기 위해 이탈리아로 호송되는 중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뱃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중간 기착지에서 머무르지 않으면 많은 화물을 잃어버리고 사람도 생명을 잃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끌려가는 죄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항해 전문가도 아닌 사람의 이야기를 믿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믿으며 더 편안한 항구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갔다가 커다란 봉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풍랑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당연히 선장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양법에서도 선장은 선원을 가둘 권리가 있습니다. 배마다 사람을 가두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사람을 넣고 문을 잠글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선상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그와 같은 권한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막강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 당연히 항해하는 일정 중에서는 최고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환란을 만나 큰 풍랑이 일어나면서 뒤바뀌게 됩니다. 그렇게 온 화물을 버리는 어려움 속에서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안심하라고 전하며 배는 망가질 것이나 너희 중에 아무도 생명에는 손상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사람들이 믿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바울은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그렇게 말씀해주셨다고 하면서 배 전체의 리더십이 끌려가던 죄수에게로 옵니다.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면서 (열린교회가)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열린교회를 목회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1,370명이 모인 적은 없습니다. 교인의 60%가 교회를 못 나왔습니다. 메르스나 사스가 일어났을 때도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웠고, 전날은 새벽 2시 반까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목회를 잘 못했는지, 이런 시기에 온 교인에게 순교의 각오를 외치는 것은 좋은 설교인지 등 여러 가지 시름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위기는 그 사람이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회입니다. 늘 이야기했지만 어두움을 경험할 때는 빛을 보여줄 기회이고, 혼란과 오류를 경험하고 있을 때는 진리를 보여줄 기회입니다. 범죄와 타락이 보편화되었을 때는 순결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리고 미움과 갈등이 소용돌이 치고 있을 때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걱정할 때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평화로운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훨씬 더 대국적인 견지에서 국가적으로 당한 어려움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것을 상대의 죄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고난에 직면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할 태도가 아닙니다.
모세를 생각해보십시오. 끔찍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우상숭배의 일이 벌어졌을 때 당신 때문이라고 했습니까. 그는 자신이 장막 앞에 나아가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에스라도 온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서 부도덕하게 생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주모자를 찾아 죄를 탓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조용히 성전 문 앞에서 엎드려 통곡하며 아파하니,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절대 중국을 원망하거나, 나라의 특정한 사람들에 대해 원한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시민의식을 가지고 정당하게 판단을 내리고 비판할 수 있으나, 그리스도인은 성숙하게 생각하며 모든 것을 대해야 합니다.
13세기 페스트로 인해 유럽인구의 1/4이 사망했습니다. 사랑 없는 지식과 지식 없는 사랑이 모두 문제가 되었습니다. 전염성이 강한 페스트는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언제든지 발병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페스트가 발병했을 때 사람들은 기도를 한다고 다 모였고, 페스트는 교회를 중심으로 창궐했습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의 결과입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도 있습니다. 연약하고 면역력이 없는 어린 아이들을 모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 위험으로 예배를 기각하고 포기할 정도가 되면, 매우 장기화될 때는 인터넷으로 예배드리는 것으로 끝날 것인가 입니다. 이 세상에 욕먹지 않기 위해서라는 슬로건이 1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사랑과 지식을 조화시켜 가야합니다. 내일이라도 확진 환자가 나오면 교회가 문을 닫아야하는 것이 법이며, 즉시 따라야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기 전까지는 최대한 지혜롭게 면역력이 약한 이들을 배제하고 집에서 예배드리게 하고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나와야 합니다. 열심히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로마 시대 때에는 세례를 받은 뒤, 세례식이 끝나길 기다리는 로마군인들에게 체포되어 형장에서 사라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에 대응하는 유연성과 함께 정신 속에 신앙에 대한 원칙이 분명하게 서있어야 합니다. 순교의 마음을 가지고 이 상황을 지식 없는 사랑으로 극복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누가 그것을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각 사람의 마음속에 이것이 뚜렷하게 세워져서 철저하게 자신을 준비하며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풍랑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자신이 비록 죄수이나 어떻게 하면 이 배에서 한번 지도력을 가져볼까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하나님과 소통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머물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이 굳이 떠났습니다. 바울의 생명은 주님의 손에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계속 기도했습니다. 죽을까봐 불안해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죽어도 괜찮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불안하지도 않고, 그러나 방심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를 믿으라고 하셨던 예수님 말씀처럼 믿으니 하나님을 붙잡고 의지하며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체가 혼란스러운 사람에게는 빛이 됩니다. 이러한 시련과 어쩔 줄 모르는 두려움이 있어도 변함없이 서 있는 의연함과 고요함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도들과 구역원들에게 그런 존재입니다.
(찬양)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이런 시기에 이 마음이 나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폭풍 속에서 사람들은 돛대가 부서지고 배가 쪼개지는 소리, 파도 소리를 들었는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차이입니다. 배로 치자면 20대의 교역자들은 이제 막 송진을 칠 해 배를 끌고 항구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수십 년을 이 바다 저 바다를 헤매고 다닌 사람들입니다. 배가 삐그덕 거려서 망가질 때가 다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바다를 다녔습니다. 신자의 일생이라는 것 자체,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일생이라는 것 자체는 환경적인 평안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목적을 향해 가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물론 마음먹고 흑산도나 발리 외딴 곳에 가서 1-2주일 정도 아무 접촉 없이 휴가를 지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향해 가는 배는 끊임없는 물결과 원하지 않는 대로 부는 바람을 만납니다. 몹시 출렁거립니다. 비행기도 맞바람을 맞습니다. 예전에 비행기에 맞바람이 (몰아)쳤는데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있던 사람이 1미터 공중에 떠서 목이 부러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목표를 찾아가는 삶입니다. 끊임없이 평안하지 않은 일이 일어납니다. 평안은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소통하는 데에서 옵니다.
요새는 근심과 함께 하나님이 정말 놀라우신 분이라고 하는 생각, 이 두 가지가 같이 섞여서 내 마음속에 흐릅니다. 수없이 신천지가 잘못하고 있다고 수없이 발표하고 성명을 내도 일인시위를 하고 가족들을 잃어버렸다고 울고불고 법원에 가서 경찰서에 가서 매달리고 국회에 가서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놀라운 기회에 그것들을 다루십니다. 어디에서 그런 질병이 생겨났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국에 있는 그리고 우한에 있는 모든 지체들도 지금은 나아졌습니다. 엄청난 두려움으로 고통을 받고 교회가 핍박을 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못 모이게 폐쇠령이 떨어졌습니다. 목회자들은 멘붕 상태가 되고, 한 번도 이 상황을 경험해 본 적 없는 교인들은 어떻게 할 바를 모랐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거는 그 과정을 통해서 훌륭하게 서로 인터넷으로 교통하면서 서로 돌보는 기술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거꾸로 우리를 염려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자만할 것이 없고, 누구도 원망하지 말고, 모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회적인 위기와 개인적인 위기는 하나님이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세워주시는 기회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평안하고 너그러우면서도 예리하게 살아있어서 판단하고,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끌어안을 수 있는 그럼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