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랑 속에 평안을 전하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2-25)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바울이 가이사의 법정에 호소하기 위해 죄수로서 호송되던 때의 일을 적고 있습니다.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과정에서 항해 중에 일어난 풍랑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잔잔하던 바다에 풍랑이 일어 항해하던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도 예기치 않은 환란이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람은 큰 폭풍으로 인해 풍랑이 일어날 때 오히려 모든 것이 평화로울 때보다도 하나님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폭풍 속에서 절망하며 두려움 속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평안을 전해 주었습니다. 폭풍 속에서 평안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Ⅱ. 폭풍 속에 평안을 전하라
A. 폭풍 속에 절망함
제일 먼저 폭풍 속에서 절망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드라뭇데노에서 시작해서 베닉스를 거쳐 로마로 가기로 하였으나 폭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항해한지 사흘 쯤 되었을 때 성경에는 선원들이 배의 기구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고 19절에 나옵니다. 당연히 이 배의 기구는 항해하는 데 필요한 기구입니다. 따라서 이 기구를 버리기 전 이미 실었던 많은 물건들을 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이번 항해가 화물과 배뿐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고 말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배에는 많은 화물이 실려있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마지막에 배의 기구들까지 버려야 했으니 이 기구들로 인해서 배가 무거워져 풍랑으로 요동칠 때 침몰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낮인데도 해가 없고 밤인데도 별이 없는 폭풍 속에서도 구원의 여망을 상실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발달한 과학기구가 없던 시대에 별빛은 이들의 항해를 안내하는 중요한 길잡이였습니다. 더욱이 33절에 보면 바울이 말하기를 그들이 14일 동안이나 못 먹고 굶주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풍랑 속에서 이 사람들이 느꼈을 절망이 얼마나 컸겠는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 풍랑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아끼셨던 사도바울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절에 따라 일어나는 유라굴로라고 하는 이 풍랑은 예외 없이 발생했고 다른 사람과 함께 그 역시 죽음의 위협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바로 이렇게 폭풍으로 인해 배가 침몰할 절망 속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당신을 이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B. 평안을 전한 사람
1. 죄수의 평안
이 기회를 사용해서 사도바울은 평안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죄수의 평안이었습니다. 지금 이 때는 바울이 혐의를 받는 죄수로서 군인들에 의해 압송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누가 그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관심이나 가졌겠습니까. 그러나 평안할 때에는 안중에도 없었던 사람이었지만 폭풍 속에서 모든 절망을 경험하고 살 소망까지 끊어질 그때에 그의 존재는 빛났습니다. 이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신앙(信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여러 날 굶주려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들 가운데 서서 유일하게 의미 있는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었습니다. 20절에 의하면 그때도 여전히 큰 풍랑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보기에 좋을 만한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는 외치듯이 그들에게 27장 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만약에 바울이 폭풍 속에서 그들과 똑같이 낙심하고 자기 살길이나 찾았더라면 과연 그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 그러한 아우라가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바울은 죄수의 몸이었지만 폭풍 속에서 그들과 생사를 함께 하여야 했습니다. 미항이라는 곳에서 출항할 당시 무엇에 근거했는지 알 수 없으나 바울은 옳게 판단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바울의 의견을 무시한 채 무리한 항해를 강행했습니다. 그때 예고하여 사도바울이 27장 10절에서 말하기를 “이번 항해가 화물과 배 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에도 파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의 말을 듣지 않았더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화물과 배의 기구들까지 잃어버렸으니 물질적 손해는 얼마나 막대하였으며, 더욱이 침몰의 위험까지 느끼며 폭풍 속에서 두려움과 절망 속에 떨었던 그 선언들과 배에 탄 군인들의 고통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옳았고 그 사람들의 판단이 틀렸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의 대략이 그러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하였을 뿐입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고, 그 풍랑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누구인지 요나의 배에 함께 탔던 사람들처럼 제비를 뽑아서 찾아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사도가 한 일은 오히려 두려움과 절망으로 마음이 갈갈이 찢어진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고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안심하라”고 두 번이나 당부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허언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습니다. 깊은 확신과 폭풍도 무너뜨리지 못하는 어떤 평안 속에서 우러나온 말이었습니다.
2. 평안의 비밀
그러면 대체 그 평안의 비밀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죽음을 상기시키는 그 무서운 폭풍 속에서 보여준 담대함과 평안은 어디에서 왔겠습니까? 여러분 중 대부분은 상상으로만 그것이 무서웠을 것이라 알지 실감하시는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예화)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배를 타고 섬에 가서 방학 때 한 달을 머물면서 공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데 배가 뜰 것 같지 않았습니다. 물결이 일어나는 게 심상치 않은데 배가 온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오는가 했더니 주의보만 떨어지지 않는다면 배가 계획대로 온다고 했는데 과연 왔습니다. 시간이 많이 늦게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탔습니다. 정말 무서웠지만 간다고 하니까 탔습니다. 인천 중간까지 왔는데 풍랑주의보가 떨어졌으니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저녁때 즈음 인천에 도착해야 하는데 뱃머리를 돌렸을 때에는 이미 어두움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태어나서 그렇게 무서운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파도가 뱃머리 왼쪽을 때리니까 오른쪽 포물선을 그리면서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배 밑창에 내려와 구명조끼를 입고 이리저리 구르면서 토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린 마음에 ‘아, 여기에서 죽으면 아무도 못 찾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캄캄한 밤중이 되도록 배는 항해를 한다기보다는 파도 위를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제자리에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이 유라굴로라는 폭풍은 계절풍 때문에 일어나는 아주 정기적인 태풍이었습니다. 유명한 태풍이었습니다. 그 풍랑이 일어났을 때 지금과 같이 선박 제작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니까 더 많이 요동치고 무서웠을 것입니다. 그러한 속에 있었는데 그것은 죽음의 폭풍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은 자신은 그 상황과 상관이 없는 것처럼 담대하게 “안심하라”고 두 번이나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담대함과 놀라운 평안은 스스로 마음을 추슬러 만들어낸 평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지각 위에 뛰어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었습니다.
환란은 믿음을 측정하는 시금석입니다. 자신도 자신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훌륭한 믿음인데 자신의 믿음이 매우 적다고 과소평가하기보다는 반대로 믿음이 정말 별로 없는데 자신은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환란을 통해 큰 두려움과 어려움을 겪게 하심으로써 예전에 보지 못하였던 자신의 믿음을 측정하는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시련을 통해서 우리 자신과 마주 보며 “네 모습을 보아라!”하시는 것입니다. 사도의 이 놀라운 평안은 그의 평소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죽음이 두렵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실제로 이 사람이 하나님과 더불어 현재적으로 누리고 있는 은혜의 은혜의 교통(交通)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실제로 그 폭풍 속에서 하나님이 그를 붙들어 주셨고 자신 또한 그 하나님께 붙잡혀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데서 오는 평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심하라고 외친 이 말은 공허한 울림이 아니었습니다. 평생을 바다에서 잔뼈가 굵었으나 이제 자신의 능력을 초월하는 풍랑을 만남으로 절망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침몰의 위험 속에 떨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는 고요히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과연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4절과 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들을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뱃사람들과 함께 죽을 수 없었고 또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항해하던 모든 사람들을 살리셨던 것입니다.
포박되어 압송되고 있는 죄수였을 그가 자유로운 뱃사람들에게 안심하도록 타일렀으니 이것은 세상에 있는 권력이나 기술이나 능력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데서 온 것이었습니다. 신앙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역사와 자기 생명까지도 그분의 수중에 있다고 신뢰하는 데서 온 평안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말을 듣지 않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한 일은 폭풍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은 이렇게 평안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뱃사람들은 폭풍 속에서 지극한 평안을 누리며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안심하라고 위로하는 그의 평안을 통해서 과연 자신들에게는 없는 하나님이 그에게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폭풍 속에서 그는 남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재능으로 능숙하게 배의 키를 넘겨받아 운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처럼 뱃머리에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기도하며 풍랑을 잠잠하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냥 그 죽음의 위협 속에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이 파도를 널뛰는 그 배에서 그냥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이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죽은 자도 살려내던 바울이었으니 폭풍쯤 잔잔하게 하는 것이 일이었겠습니까. 이상하게 하나님이 그러한 식으로 바울을 이 시점에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보여준 것입니다. 모든 뱃사람들이 압송되어 가던 포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하게끔 하였으니 이는 바울이 증거하는 하나님을 그들의 마음속에서 생각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님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이 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무서운 풍랑 속에서 잔뼈가 굵은 뱃사람도 아닌 선생의 길을 걷던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폭풍 속에서 하나님 때문에 고요한 평안을 누렸으니 그 마음에 생사를 초월한 평안은 큰 배를 하늘로 치솟게 했다 바다에 내리꽂을 풍랑도 움직일 수 없는 평안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 절망에 빠진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나쁜 일이 많이 일어날 때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알릴 수 있는 기회이고, 극심한 불안의 상태 속에서 사람들은 신앙의 평안을 알게 될 기회입니다. 시련과 고통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때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과 평안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Ⅲ.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많은 혼란스러운 상황도 일의 원인이 있고 끝이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또한 누구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이러한 경과를 밟게 되었는지 결말이 어떻게 나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에 대해서 또한 누가 책임져야 할지에 대해서도 가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를 원망하고 미워할 때가 아닙니다. 더욱이 특정한 집단의 사람들, 특정한 지역의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특정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비난을 퍼붓고, 모든 책임이 그들에게 있는 것처럼 미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원망과 미움 대신 지금 이러한 사태를 맞이하여 고통을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현재의 상태를 가엽게 여기고 어떻게 하든지 그들에게 도움이 되려고 하는 마음이 신자가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경솔하게 누구의 죄 때문에 이러한 일이 생겼다고 말하지도 말아야 하고 또한 이러한 일이 우리의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이 시련과 환란을 통해 나의 믿음을 이 시련의 시금석에 갈아보고 나의 믿음의 참 위치가 어디까지 와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 뼛속까지 하나님과 은혜의 관계를 누리고 있는 사람인지 점검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아직도 가난하던 시기에는 부스러진 낱알까지 알뜰하게 챙겨서 먹어야 했습니다. 겨가 잔뜩 섞여 있는 쌀을 키 위에 올려놓고 키질을 합니다. 높이 던져 키질을 하면 바람이 일어나서 겨는 날아가고 쌀알은 떨어지는데 이러한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결국 겨는 날아가고 조각난 쌀알들이 남게 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시련과 환란은 믿는 자를 더욱 견고하게 하고, 믿는 자의 모양은 있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털어내는 역할을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불안을 더하거나 원망에 미움을 더하는 일은 지금 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소란에 동요를 보태고 이 일로 지역의 감정을 자극하고 선교지의 사람들을 비난하는 일들은 우리가 시련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마음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정한 평안을 잃어버린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밖에 일어나고 있는 시련의 풍랑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 출렁거리고 있는 미움과 원망, 분노와 절망이 더 큰 두려움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이나 사랑이 없는 지식 때문에 상황을 악화시키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움이 없어서 더 큰 어려움을 가져오거나 두려움 때문에 너무나 움츠려들어서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껏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났던 모든 어려움이 그러했듯이 시간이 흐를 것이고 결국 이 일도 또한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더 많은 희생자들이 나오지 않도록 국가적인 위기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원망하며 나라를 찢고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놓고 거기에 정치인들이 편승하여 더 많은 백성들의 마음에 골을 깊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모든 일이 결국은 지나갈 것이라고 하는 것은 체념함으로 시간의 흐름을 그냥 기다리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붙들고 계셔서 결국 우리 때문에 당신의 일을 이루시려고 우리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 때문에 용기를 갖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련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믿음에 대해 반성할 시간을 어떻게 또 가질 수 있겠습니까. 착각에 빠지기 쉬운 우리를 하나님이 이러한 시련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믿음이 얼마만큼 주님 앞에 와 있는지를 측정해 보시는 것입니다. 또 나는 나의 주위에서 시련과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깊이 점검해 볼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지극히 작은 바이러스 때문에 이렇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것, 무시무시한 공포를 느끼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 평화롭고 은혜롭게 우리를 지켜주시던 때에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없이 나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처럼 여겼는지를 반성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회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깊이 성찰하셔야 합니다. 절대로 마음에 사람들을 향한 분노와 미움이 이러한 기회에 우리의 마음속에 크게 자리를 잡는 것은 우리가 당하게 된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실타래처럼 얽힌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은 가지런하게 당신의 뜻을 펼쳐가십니다. 혼란스러운 것 같지만 이 혼란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이 하셔야 할 큰일들을 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사람이 가족을 잃어버렸다고 많은 고통을 겪는다고 말을 해도 귀를 기울이지 않던 사회가 이제 그들의 외침의 진정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보호하고 그릇된 가르침들을 물리치시는 위대한 섭리를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모든 고통을 당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신천지라는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뼛속 깊이 미워해야 하고 결코 그 거짓된 가르침이 더 이상 사람들을 미혹하지 않도록 우리는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질병을 겪은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두고 행여나 너무 잘됐다고 생각하거나 망해버리라는 식의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결국은 그 어두운 가르침들을 떨치고 신앙의 빛으로 다시 나아왔던 많은 구원받은 사람들처럼 그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 모든 사태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겸비해지는 것입니다. 누구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기 전 하나님 앞에 고요히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자기를 돌아보며 이웃이 겪는 아니 이 세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인류 동포로서 겪고 있는 이 두려움과 고통을 함께 느끼며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원의 은혜를 빌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큰 풍랑 속에서 압송되어 가던 한 이름 없는 죄수를 통해서 죽음과 절망에 새파랗게 질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어느 지역 출신인지 그들이 어느 인종인지 사도는 거기에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절망에 빠진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고 싶어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죄수로 호송되어 가고 있었기에 14일 동안 굶주린 사람에게 떡 한 덩어리 쥐어 줄 수 없었고 고무 튜브 하나 그들에게 구호 물품으로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도 더 귀한 희망을 그들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를 누리며 그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지혜로우십시오. 그러나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움이 밀려올 때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들을 다스릴 것이고, 여러분들은 믿음으로 살 것이며 그 자체가 오늘 이 불안과 두려움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선교가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