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말라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마 14:24-3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알리던 사실상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이 순교한 장면이 본 장에 나옵니다. 이제 그리스도가 참으로 구세주이심을 만천하에 본격적으로 드러날 때가 왔음을 가르쳐 줍니다. 본문이 들어있는 14장에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두 가지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구약 광야 교회 시절의 만나의 기적을 보여주고, 풍랑 이는 물 위를 걸어오시는 장면은 홍해의 기적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오늘 이 풍랑 속에서 고생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기적을 보이신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II. 두려워하지 말라
벳새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시기 위해 남으셨고, 제자들을 배를 태워 보내셨습니다. “건너편”으로 배를 태워 보내셨다고 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거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습니다만 병행기사인 요한복음 6장 17절에 보면 거기가 가버나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벳새다와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윗 편에 거의 나란히 있는 지점이었기 때문에 바다를 건넜다기보다는 배로 한 장소에서 또 다른 장소로 이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A. 바다에 풍랑이 일 때
그런데 바다에 풍랑이 일었습니다. 제자들을 태운 배가 육지에서 꽤 멀리 떨어져 바다 한가운데 있을 때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으니 기후와 또 배를 운항하는 일에 있어서도 뛰어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기치 못한 태풍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풍랑이 일어나게 됐는지에 대한 설명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2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고 말입니다(마 14:24). 요한복음의 병행기사에도 그냥 “큰바람” 때문에 풍랑이 일어났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18절에 “큰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든 고난(苦難)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 특히 인간에게 찾아오는 많은 불행과 우한은 사람의 죄와 관련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에서는 그래서 병이 낫는 것과 신자가 죄를 고백하는 것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역대하 24장 24절에서는 적국이 침입하고 나라가 패전을 하게 된 것이 죄 때문이라고 밝힌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뜻밖의 풍랑을 만나 고난당하기까지 하였으나 왜 풍랑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풍랑은 누구의 죄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데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입증해 주는 또 다른 훌륭한 예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길을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태어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당시 유대인으로서 그런 상황을 만나면 당연히 했을 질문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저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는데 누구의 죄 때문에 저렇게 되었습니까?”라고 여쭌 것입니다. 살다가 맹인이 되었다면 죄를 지어서 맹인이 되었겠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나면서부터 맹인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가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길래 맹인이 되었을까?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틀림없이 부모의 죄 때문에 그 업보로 맹인으로 태어났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께 확인을 하듯 여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만의 특별한 생각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이 인간의 불행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공통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전혀 다른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죄(罪)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또 다른 뜻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로마서 9장 3절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진심을 담아 이 문제에 대해 답을 주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해석해 주셨던 것입니다(요 9:3).
아마 이 대답을 들었던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일반적인 관념에 사로잡혔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답변을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인간의 죄, 불행, 인간의 의, 행복이라는 이 두 개의 도식적인 구도로 인간 사회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풍랑이 누구의 죄 때문이었을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구의 죄 때문에 풍랑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풍랑은 그냥 일어났고, 예수님은 이 풍랑을 기회로 사용하셔서 제자들의 신앙의 상태와 믿음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기회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기적을 베푸시고 말씀을 전해주셨어도 믿을 수 없었던 한 가지 사실,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심으로 오직 그분만을 믿고 의지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권위를 인정해서 그분이 전해주시는 복음(福音)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그 백성으로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 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환란을 당할 때 신자가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정결한지를 스스로 묻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경건의 표입니다. 인간의 탁월한 점은 고난당할 때 의미(意味)를 생각하는 것이고, 신자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올바른지를 반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의 더 높은 경륜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더 큰 뜻을 생각하며 우리 인생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이런 뜻밖의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바다에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 풍랑을 통해서 기적을 본 제자들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를 그들 앞에 직접 보여주셨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가르쳐 주심으로 그분을 믿는 믿음을 견고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풍랑이 일어나는 상황을 바라겠습니까? 모두 평안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의 인생사에는 이런 예기치 못한 풍랑이 인생의 바다에 발생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누구의 죄 때문에 발생한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그 예기치 못한 상황을 통해서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일어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일어나게 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보호하시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은 평범하게 자신이 믿던 그 그리스도께서 이 온 우주와 세계의 주인이시며 나라와 우리의 인생에 주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심을 깨닫고, 그분을 의지하는 신앙을 견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풍랑 속에서 그런 주님을 만나고 더 깊은 신앙을 갖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예수님이 찾아오실 때
풍랑이 일어 제자들이 큰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것도 풍랑이 이는 깊은 밤 제 4경에 그 요동치는 바다 물결 위를 걸어서 오셨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에 직접 가보기 전까지는 마음에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리 작지는 않지만 결코 바다라고는 부르기 어려운 호수에 이렇게 배가 침몰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까지 풍랑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습니다. 대양도 아닌데 말입니다. 가보니 갈릴리 바다 양쪽에는 매우 높은 산맥이 형성되어 있었고, 거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격렬해서 때로는 2m 50cm에서 3m에 가까운 물결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보도되고 있는 이 광경은 과장된 것이 아니라 당시 흔히 갈릴리 바다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밤은 칠흑같이 어둡고, 더욱이 날은 흐려 별빛조차 없는 그 바다 위에서 그 큰 물결이 일어나고 있으니 작은 배에 의지하던 제자들은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더욱이 예수님이 그 어두운 밤바다에 풍랑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설마 예수님이 그렇게 풍랑 이는 바다 위를 걸어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시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 두려움은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26절이 말했습니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즉시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27절에서 말씀하셨으sl (제자들이) 무지와 믿음 없음으로 불안(不安)에 떠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조바심을 내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연약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닙니까? 현실은 심각하지만 이 모든 세계를 붙들고 계신 주님의 손안에 우리의 생사가 달렸으니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우리의 마음의 평안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몰랐고, 얼마나 큰 능력을 가지신 분이신지를 알지 못했으며 어떠한 사랑으로 자신들을 찾아오실지를 깨닫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팔을 벌리며 기뻐해야 할 그 순간에 두려움에 벌벌 떨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C. 믿음이 작아질 때
베드로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에 앞장서서 언제나 그러하듯이 풍랑 이는 바다 위를 걸어서 예수가 오신 것처럼 자기도 예수께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28절에 따르면 주님이 기뻐하시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풍랑 속에 걸어오시는 분이 예수이신 줄 알았을 때 그는 풍랑이 두렵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오라고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오라고 하셨고, 그는 요동치는 바다의 물결 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무섭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큰 믿음은 즉시 작아졌습니다. 그는 물 위를 걷다가 풍랑 이는 물결을 보았습니다. 30절이 말하기를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지라 소리를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베드로에게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없습니다. 믿음이 모두 사라지고 의심이 가득 들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풍랑 이는 물결에 마음이 흔들렸을 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이 있는 신자의 마음에는 의심이 없고 의심하는 신자의 마음에는 전혀 믿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실이 아닙니다. 신자의 마음에 믿음과 의심은 공존합니다. “오라 하소서” 이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무서워 빠져가는지라” 이는 의심이었습니다. 다시 “나를 구원하소서” 믿음이었습니다. 신자 안에는 어떤 경우도 믿음이 전무(全無)할 수 없고, 또 반대로 의심이 전무할 수도 없습니다. 믿음의 저자는 성령이십니다. 신자는 성령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믿음이 전혀 없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마음에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눈에 보이는 현실에 감각(感覺)만을 의존하게 될 때 한순간에 의심이 마음을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은혜 안에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5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평생 건강하게 살아온 아내가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기운이 하나도 없고, 숟가락을 들 수 있는 힘조차 잃어버렸습니다. 당연히 영양제를 여러 번 맞았습니다. 소용이 없었고, 입원해서 2박 3일 동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진했으나 이상 소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몸은 앉아있을 기운도 없이 낙엽처럼 시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도 이미 몸무게의 20kg을 잃어버릴 때였으니까 저 자신도 지탱하기 어려운 때였습니다. 밤마다 아침마다 누군가가 주물러 주지 않으면 숨조차 쉴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밤마다 (아내를) 주물러주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사이에 차도가 없자 드디어 아내는 밤마다 유언을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제 마음속에는 한 40%내지 50%쯤은 정말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마음에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기운도 없어서 새벽 혹은 밤에 잠이 깨면 제 방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린 것은 아니었지만 아주 또렷하게 내 마음에 확신이 왔는데 “가서 네 아내에게 안 죽는다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일 큰 변화는 아내에게 온 것이 아니라 제 마음에 왔습니다. 한순간 모든 염려가 사라지며 근원을 알 수 없는 평안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눈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쯤 아내에게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기도했는데 이제 더이상 유언하지 마라. 안 죽는다 그러시더라.”
(찬양)
새벽닭 울때 난 괴로웠어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따라 죽을 텐데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날 위해 바친 고귀한 사랑
주님과 함께 있고파서 사랑의 십자가를 내가 지네
결국 우리로 하여금 생사 간에 당신을 의지하게 하시려고 그런 시련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눈을 돌리고 출렁거리는 밤바다의 물결을 보자 무서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주님이 오라고 부르셨으나 자기를 붙들어 주실 것 같은 믿음이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을 잃어버리고 나니 남는 것은 풍랑 이는 바다와 그 폭풍 이는 바다 위에 홀로 남겨진 자신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두려움은 혼자 있다는 고립감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 모든 것이 있어도 그것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사랑이니 두려움은 이 믿음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은 감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었던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 4장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라도 두려움 없이 사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의 평화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이 생사 간에 그분의 수중에 있고,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을 아는 그 신앙에서 우리는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가 되어 의심한 것이 바로 베드로가 걸어가던 그 물결에서 미끄러져 빠져버린 이유였습니다. 결국 물에 빠진 그를 건져내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31절은 말하기를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여기서 준엄한 회초리를 든 책망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까? 주님은 당연히 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나 믿음이 작은 자들을 멸시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니 믿음이 작은 것까지 그분에게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묘목이 아니었던 거목은 없습니다. 작은 바람이 아니었던 태풍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을 보십니다.
물에 빠져 잠겨가는 베드로의 손을 붙들고 건져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자도 불쌍히 여기시며 구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결국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생사 간의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눈 앞에 펼쳐지는 상황만을 보면 우리의 믿음이 작아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묵상하지 않고 불행한 일들만 바라보다 보면 우리의 믿음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믿음을 간수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매 순간 은혜 안에 사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눈앞에 어려운 시련이 오고, 때로는 자신을 삼킬 것 같아도 이 모든 폭풍조차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예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주님이 이 시련을 주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것이 평안하고 내 뜻대로 될 때에는 소중하게 보이지 않던 예수님이 정말 소중한 분이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평화로울 때에는 감사한 줄을 모르던 많은 일이 얼마나 커다란 감사의 제목이었는지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예배당에 가득가득 모여서 목청껏 주님을 찬양하고, 마음껏 교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해서 그것도 하나님의 큰 은혜였음을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풍랑 이는 물결과 같은 세상의 상황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그 폭풍 가운데 걸어오시는 예수 붙드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매우 특별한 고난의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그리스도의 교회를 붙드시고 이 풍랑 속에서 오히려 우리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당신의 경륜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봅니다. 사람들은 참된 신앙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이단의 위험한 것에 대해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참 신앙의 열매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숙고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어려움이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많은 사람의 마음이 깨어날 수 있었을까요?
신앙은 한번 예수를 믿고 안주한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바침으로 그분을 신뢰하고 무슨 역사를 하시든지 믿음으로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어려움 속에 더욱 빛납니다. 풍랑 이는 바다를 지나는 것과 같은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원망하고, 불신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요히 이 시련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과 평안을 간직한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요동하는 자들을 사랑으로 품어 평안을 누리게 하고, 두려움이 변하여 우리 주님을 향한 믿음이 되도록 전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위해 우리의 마음을 드려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 시련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큰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물에 빠진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어 붙잡고 건져주셨습니다. 그리고 왜 의심했느냐고 타이르셨습니다. 아마 이때 베드로의 마음에는 큰 깨달음이 왔을 것입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함께 배를 타고 있던 모든 제자의 마음에 ‘예수님이 폭풍까지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우리가 그분을 전심으로 믿으며 살아야겠구나’하는 결심이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풍랑이 그쳐버렸습니다. 아무도 회개한 사람이 없는데 풍랑이 멎었습니다. 풍랑을 통해서 의도하셨던 바가 성취되었기 때문에 더이상 바다가 요동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주중에 내내 교회는 폐쇄되었지만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은혜 안에 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