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죽음에 감화됨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요 19:3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이후에 일어난 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요셉은 공회 의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문제를 결정하는 가장 권위 있는 70인의 산해드린공의회였습니다. 예전에는 백성들에 대한 생사여탈권까지 가지고 있었지만, 로마가 그 권한을 박탈하기는 했습니다. 그 뛰어난 사람들이 모이는 공의회의 의원이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50절에 의하면 그는 선하고 의(義)로운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또 아리마대 지방 출신의 부자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제자였다고 마태복음 27장 57절이 보도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판결과 처형에 찬성하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51절에서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두려워하는 예수의 제자였습니다(요 19:38).
II. 두려워하는 예수의 제자
오늘 성경은 이 사람을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원래 그리스어 성경에서 ‘제자’(mathetes)라는 말은 ‘마데테스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크게 세 가지 범주의 사람들을 지시합니다. 가장 좁은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12명의 제자를 가리켰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좀 넓게 쓰면 예수님을 믿고 전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켰습니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는 사도행전 이후에 많이 쓰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모든 신자들을 의미하였습니다. 여기에서는 무슨 의미로 쓰였을까요? 아마도 두 번째와 세 번째 중간 정도의 의미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어쨌든지 요한복음의 기록자가 그를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라고 불렀으니 그는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요셉은) 제자가 될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분의 복음의 이치를 터득했고, 또 그분의 삶의 교훈들을 받아들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제자라는 자신의 정체(正體)를 감추었습니다. 그래서 38절에 보면 이렇게 보도됩니다.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겼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였지만 자신의 정체를 감추었고, 그것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명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의 신분이 최고의 종교 지도자들인 산해드린공의회에 의원이었으니 자신의 신분을 예수의 제자라고 노출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산해드린공의회의 최고장은 대제사장 출신들이 맡았고, 위원들은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부터 유대인 종교 지도자의 길을 걷던 성직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단적인 가르침으로 알려졌던 예수를 좇는 추종자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의 지위와 재산 그리고 명예와 신상의 위협, 여러 가지 때문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III. 십자가 죽음에 감화됨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었을까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감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그에게 끼친 영향이었습니다. 그는 공의회의 의원이었으니 예수의 체포와 심문, 처형에 이르는 전 과정을 매우 가까이서 모두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커다란 감화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와 예수 그리스도를 등 뒤의 팔로 감싸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을 하고, 장엄하게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모두 지켜보면서 그는 그분의 죽음 이전의 아리마대 요셉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A. 용기
이것을 성경은 크게 세 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용기(勇氣)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실 때도 이 사람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요셉은 담대하게 빌라도를 찾아가 그분의 시체를 요구했습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요 19:38) 우리말 성경에 “이 일 후에”라고 되어 있는데 그리스어 성경에 “메타 데 타오타”(meta de taula)라고 나옵니다. “그 일들 후에”입니다. 이것은 이미 히브리어 성경에서도 널리 쓰는 표현입니다. 시간은 짧았으나 많은 일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단정할 수 없지만 어쩌면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광경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빌라도의 뜰에서 심판을 받으시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에 끌려가 매를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오는 광경으로부터 십자가에서 남기신 일곱 마디의 유언과 같은 말씀, 거기서 일어났던 태양이 빛을 잃는 자연적인 기적과 마지막에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일들까지를 경험하고, 백부장의 고백과 같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한 그 고백까지 들었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많은 일이 있고난 후에 아리마대 요셉은 그의 두려움이 변하여 용기가 되었습니다. 이 많은 일들을 보고 겪으면서 예수의 제자였지만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있던 그의 신앙(信仰)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누가복음 23장 51절에 의하면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지라” 예수의 체포와 심문과 처형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유대교를 옹호한 자 중에도 이런 행위를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때 그리스도의 복음이 능력있게 선포되고,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회개와 믿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자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을 체포하여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때 바리새인이었지만 존경받던 가마리엘(Gamaliel)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만약에 저들의 가르침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스스로 무너질 것이요 이렇게 타이르면서 사도행전 5장 33절에서 악한 일에 손을 대지 말라고 타일러 잠잠케 하였습니다.
요셉은 그 사람의 인격을 뛰어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올곧은 사람이었지만 예수를 믿고도 두려운 것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예수를 믿고 신앙을 고백했지만 잃어버릴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모든 환경을 지켜보면서 그는 일생에 없던 커다란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모든 진리의 말씀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을 붙들어 주신다는 그리스도께서 잔인한 배신과 가혹한 형벌로 죽어가시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일체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으로 당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를 뵈오며, 그는 교훈의 가치를 보았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이 그의 마음에 커다란 사랑의 감화가 되자 그는 더이상 두려운 것이 없는 용기가 생겨났습니다.
한번 당시의 문맥으로 돌아가서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의 시신을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종교지도자들이 왜 그냥 예수를 죽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백성들을 충동하여 반드시 십자가에 죽이도록 그렇게 사주했는지 아십니까? 그게 바로 나무에 매달아 죽임을 당한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수천 년을 내려오는 종교적인 확신을 이용한 계획적인 플롯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예수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여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쇄기를 박고자 하는 종교적인 고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70인의 공의회를 비롯해서 당시 유대교에 충성하던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를 찾아가서 그 시신을 달라고 하고, 그 시신을 자신의 좋은 무덤에 안치시켰다는 사실이 유대인들에게 알려질 때 종교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생명은 끝나는 것입니다.
(찬양)
새벽닭 울 때 난 괴로웠어.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 텐데
이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은혜(恩惠)가 되어 재연될 때 그때 우리는 거룩한 용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비열한 보복과 잔인한 폭력으로 물든 잔혹한 용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감싸 안고 그 현실을 헤쳐 나가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주님을 사랑하며 오늘을 살아낼 용기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만나는 역경과 시련이 크다고 할지라도 현실을 이겨낼 용기가 있다면 우리는 능히 오늘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이 고난의 주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분의 사랑의 죽음 속에서 용기를 얻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헌신
두 번째는 헌신(獻身)입니다. 예수의 시신을 요구하여 받아왔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유대인들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분을 당신이 동산으로 모셨습니다. 아무도 장사지낸 적이 없는 자기 소유의 새 무덤에 예수의 시신을 모셨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9절에서 60절이 이렇게 보도합니다.“...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에게 복음을 가르쳐 주신 예수 그리스도, 유대인 종교 지도자로서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랐으나 만날 수 없었던 진리를 만나게 하시고, 채울 수 없던 자신의 마음을 채워주셨던 그분. 그러나 잃어버릴 것이 너무 두려워 그분을 인정하지 않고 정체를 감추고 있었던 자신. 십자가에서 당신의 가르침대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다가 십자가에서 그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그분의 시신을 깨끗이 씻기고, 세마포로 싸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에 찔린 흔적이 가득했을 것이고, 온몸에는 채찍에 맞은 흔적, 그리고 옆구리에는 물과 피를 쏟은 자국의 선명하였을 것입니다.
이 일에는 일찍이 거듭남에 관하여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던 니고데모(Nicodemo)도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19절에서 4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고 하였습니다. 리트라는 로마의 중량 단위로서 약 327g이었으니 약 33kg의 향품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여기서 침향은 알로에(aloe)입니다. 이것을 몰약 나무에 진액, 송진 같은 것과 섞어서 향품으로 사용했는데 매우 매우 비싼 물건이었습니다. 이것으로서 예수의 시신에 넣어드리고 발라드리기 위해서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제자로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서 사람들에게 정체를 감췄던 이 사람이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를 위해 헌신(獻身)하게 되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받은 감화가 그를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예수가 살아계실 때 받았던 그 진리(眞理)의 말씀이,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 사람에게 커다란 용기와 예수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좋을 헌신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세상 때문에 복을 얻으려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에 감화(感化)를 받아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편리한 시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불변하는 진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사건을 내 마음속에 경험하며 그 사랑의 힘으로 자신을 드리며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받은 사랑의 감화는 결국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대망(待望)으로 이어집니다. 누가복음 23장 51절에서 요셉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려 죽으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자신을 바치신 헌신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감화 속에서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신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헌신의 생활이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C. 사랑
마지막 세 번째는 사랑(love)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이 사실을 숨겨야 했던 연약한 요셉이 보여준 변화의 핵심은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으나 예수의 제자인 것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한 것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겁 많고 예수도 갖고 싶고, 세상에 권력도 갖고 싶었던 이 사람은 변화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어떻게 당신의 가르치심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지를 뵈오며 그는 그 사랑의 감화 때문에 자기를 온전히 버렸습니다. 그 사랑이 담대함을 주었고, 그 사랑이 이미 죽으신 예수를 위해 헌신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실 때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서 말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이 가까운 것을 아셨을 때에 마음을 다해 생각한 것은 당신의 죽음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고요하고 진지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그분이 하나님이 아들이신 것과 그리고 그분의 죽음이 자신의 죄 때문에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예수 살아계실 때 말씀을 들었으나 미처 몰랐던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알게 되었고, 이것이 그에게 용기와 헌신을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아무리 엄중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 감화를 받아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간다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열두 제자 속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몰랐으니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온 인류가 대속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몰랐을 것입니다. 당연히 이렇게 예수 죽으시고 나면 사흘 후에 부활(復活)하셔서 하늘에 오르사 이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통치자가 되실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마치 누가복음 23장 27절에서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예수를 따라가던 여인들처럼 그 모든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순수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그 위대한 구원 역사에서 어떻게 비밀을 보여줄 것인지를 미처 알지 못했으나 요셉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사 죽으셨고, 당신은 하나님 앞에 죄가 없으셨지만 우리 모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함으로 죽으셨다는 그 사실이 이 사람의 마음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의 감화가 이 사람에게 이 사랑을 남겨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제자들도 버리고 간 예수의 시신을 자기 홀로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죽으신 그 시신에 세마포 옷을 입히고 정성껏 모셔 예수를 눕혔습니다. 사랑이 그 일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고난 주간에 이 복음에 대한 가장 훌륭한 믿음의 반응은 그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분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것에 감화를 받으며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의 감화는 오늘도 우리 안에서 반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信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현재적인 감화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의 생명(生命)으로 말미암는 부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기독교의 중심(中心)은 변하지 않으니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불꽃 같은 사랑을 알고,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깨달으며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은 십자가를 만난 사랑이었습니다. 이 고난 주간을 맞이해서 처음 그 십자가 사랑으로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