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증언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요1:5-6)
녹취자:이경순
성경에서 어두움이라고 하는 것 호세크 라고 히브리어에서 하고 라틴어에서는 태네브레스 라고 하는데 이 어두움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연적인 어두움입니다. 두 번째는 지성적인 어두움입니다. 세 번째는 윤리적인 어두움입니다. 네 번째는 신학적인 어두움과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자연적인 어두움은 햇빛이 사라지는 것이 어두움입니다. 어두움을 위해서 뭘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빛만 없으면 어두움이 되는 것입니다. 사상적 어두움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없는 데서 비롯되는 어두움입니다.
이에 비해서 윤리적인 어두움은 삶이 하나님을 향하여 선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그런 윤리적인 도덕적인 악으로 말미암은 어두움입니다. 이것은 결국 사람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모든 의지가 수렴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윤리적인 어둠이라는 것도 결국 알고 보면 윤리적인 빛이 사라지면 윤리적인 어두움입니다. 사람을 악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생긴 대로 제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 두면 반드시 나쁜 사람이 됩니다. 이에 비해 선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정성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를 사랑으로 돌보아야 합니다. 개를 길러보면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견성을 가지고 다른 개들과 어울리면서 사이좋게 살아가는 개를 만들기 위해서는 견주의 부단한 훈련과 노력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개를 그냥 방치하면 거의 야생에 가까운 짐승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개를 시골에서 기르는데 아버님이 항상 돌봐주셨는데 아프셔서 그 집에 못 사시게 되었습니다. 개가 혼자 사는 것입니다. 동네 사람이 하루에 한 번씩 밥을 갖다주게 하고 그런데 이 개를 풀어 놓고 기르는데 동네 산을 돌아다니면서 일주일이면 서너 마리씩 고라니를 잡아서 목을 물고 집으로 끌고 온답니다. 거의 사람이 돌보지 않으니까 야수와 같이 변하는데 눈빛이 변합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인 어둠입니다.
신학적인 어둠은 이제 이 모든 것을 통합하는 개념인데 빛이신 그리스도처럼 결국은 어두움은 그 빛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어두움입니다. 자 보세요. 유대인들은 수없이 구약을 연구했고 공부를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가메리엘 문화에서 정치적으로는 로마니즘에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에 익숙했고 종교적으로는 주다이즘에 아주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철학도 알고 문화도 알고 종교도 알았지만 중심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다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되어서 그의 사상 전체에 빛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어둠에 대해서 자연적 어두움 지성적 어두움 윤리적인 어두움 신학적인 어두움이라고 제가 정리를 했고 이 모든 어두움의 가장 중심에 있는 가장 중요한 어두움이 신학적 어두움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철학은 끊임없이 지혜에 관해 탐구했습니다. 철학자들은 관심사가 지식이 아닙니다. 지식은 지혜에 도달하기 위한 한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을 하려면 철학은 진짜 똑똑한 사람들이 합니다. 우선 언어를 수없이 많은 언어를 해야 합니다. 한국어는 물론이고 영어, 불어, 독어, 심지어 이태리어 라틴어, 희랍어 그리고 심지어는 중국 쪽으로 넘어가면 한자 더 고대로 넘어가면 갑골문자까지 올라가고 인도 쪽으로 가면 팔리어 힌두어 산스크리트어까지 공부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그렇게 철학 하는 사람들이 엄청난 양의 어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하나의 언어가 가능할 때마다 펼쳐지는 지식의 지평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도 영어 하나만 웬만큼 해도 보이는 자료들이 장난 아니게 확장됩니다. 독일어 쪽 자료들은 독일어만 하면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자료들입니다. 불어를 하면 불어 쪽의 어마어마한 자료들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건드리지 않는 분야가 없기 위해서는 그 언어를 가지고 모든 문헌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부지런히 어학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지식을 찾지만, 그 지식은 지혜에 이르는 수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자잘한 철학자들은 그런 지식의 나부랭이를 가지고 먹고 살고 그리고 한 대가가 나오면 그 대가 덕분에 수천 수많은 사람이 논문을 쓰고 그 지식을 팔면서 생계를 이어갑니다. 그러나 대가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해서 궁극적으로 그 지식을 사용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에 비해서 종교는 그런 지식을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항상 관심사가 그 모든 것을 통합하는 높은 지식에 도달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도, 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끊임없이 찾는 것이 종교의 관심사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커다란 문제는 사실은 지식도 아니고 도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결국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생명의 문제는 결국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의 관계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1600년 전의 어거스틴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동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끼친 영향이 너무나 어마어마하기 때문입니다. 앤더슨 리그린 같은 신학자는 두꺼운 책 속에서 어거스틴의 까리따스의 개념을 비판하고 기독교의 참된 사랑의 가르침을 희랍철학으로 왜곡했다고 아주 혹독하게 비평하는 책을 써냈지만 저는 읽으면서 그 비평이 타당하다는 논거를 별로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래전에 설교 여행하던 끝에 마침 제 책을 읽고 나름대로 인상을 받은 어거스틴 전공하는 미국 교수를 만났습니다. 한국 분이었는데 대화를 나누면서 앤더슨 리그린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전적으로 폐책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반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철학사에서 어거스틴을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 철학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 문제를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나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로마사람들의 사상에는 결국은 모든 인간의 교육 문제는 지성의 문제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올바로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인간은 빗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역시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도 이런 논리를 피력해서 스콜라주의를 이루었습니다. 그렇지만 스콜라주의 안에서도 지성이 중요한 것인가 의지가 중요한 것인가 감정이 중요한 것인가, 특히 감정 이야기까지 끌어들여서 여러 가지 많은 논란이 되었고 그 후대까지 이어지고 지금도 모든 게 끝났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어거스틴때 까지는 지성 일변도의 말하자면 사상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기독교 안에서도 폭넓게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이 금서로 지목이 되어서 모두 축출되기는 했지만 역시 그의 가르침과 플라톤의 사상이 융합되어서 교회 전체를 지배하며 내려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럴 때 아무도 의지의 문제를 가지고는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선하게 올바르게 살지 못하는 것은 결국은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지식이 있는데도 못살 때 그 지식이 참지식이 아니라고 보았고 어쨌든 지성이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은 오류에 빠지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경험을 비추어보니까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그런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이 죄악에 빠져있는 경험을 했고 그것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아프리카로 돌아간 여자 아데오 다투스를 낳아준 그 여자와 헤어진 후에 귀족 집안의 규수와 약혼을 하고 결혼 정년 기에 이르기까지 2년을 기다리지 못해서 또 외도했던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한 거 같습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어거스틴은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인간이고 인간이 선을 행할 의지가 과연 있는가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물론 훨씬 더 복잡한 문제들이 있겠지만 어거스틴은 깊이 뼛속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결국은 어거스틴이 의지의 문제를 들고 왔고 그 의지의 문제는 결국은 사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을 알아도 도저히 그 아는 대로 선을 행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성경의 로마서 7장에서 사도바울이 탄식하며 고백하는 바와 같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리오! 라고 했는데 그런 고백들을 보더라도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선을 생각하기는 하고 또 선을 선택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행할 능력은 없다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고백을 하면서 거기서 은총론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은총이라고 하는 그라티아는 은총이라는 말이 은혜로 번역이 되었고 우리말의 뉘앙스는 은총과 은혜가 약간 다릅니다. 은총은 뭔가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이고 은혜는 무엇인가 우리가 개입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원래 성경에서는 같은 단어이고 라틴어로는 다 그라티아입니다. 그래서 은총이라는 이야기를 가톨릭에서 훨씬 더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는 점에서는 굉장히 유용한 표현의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같은 그라티아를 번역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어떤 측면을 말하는가에 따라서 은총과 은혜를 섞어 쓰면서 그때그때 번역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은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사랑의 감동입니다. 결국은 은총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의 감화, 사랑의 감동인데 그 사랑이 개입하는 곳이 인간의 의지입니다. 그래서 그 의지를 불끈 하나님이 불러일으켜서 행하게 될 때 지성의 고요가 찾아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에게 영적으로 헤매는 사람에게 권면하는 말이 가장 중요한 것은 뭘 아는 것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아는 범위 안에서 순종하라! 그러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그다음에 지성의 빛이 들어온다. 빛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 지식과 사랑이 결합을 이루면서 지난 구역 공부 시간에 삼위일체의 한 구절을 가르쳐준 것처럼 그렇게 일치를 이루면서 사랑과 지식의 증진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어거스틴이 보는 견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인간이 살 수 없다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주저앉아 있는 우리 자신의 의지를 일으켜 세워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입장에서는 구해야 할 가장 간절한 그것은 우리의 의지를 감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유의지론에서 이야기합니다. 명하는 것을 제게 먼저 주시옵소서! 그리고 원하시는 것을 명 하시옵소서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명하시는 것을 내게 주시옵소서. 너는 원수를 사랑하라! 그렇게 말씀하시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나에게 주시옵소서. 그 담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나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하십시오. 그럼 나는 행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원수를 사랑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게 어거스틴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신학사적으로 보면 주지주의 주의주의가 크게 두 개로 갈라지는데 어거스틴의 입장에서는 절충적 주의주의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함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의지를 불러일으켜야 하지만 악을 행함에서는 하나님의 개입 없이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의지는 악은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데 선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 못 한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의지론의 골자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냐면 결국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지탱하는 힘이고 발출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그 힘이 있음으로써 나 자신을 지탱하기뿐만 아니라 내게 주어진 일들을 수행함으로써 나의 삶을 전개해 가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은 철학에서도 별로 관심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종교에서도 관심 가진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훌륭한 철학적인 가르침이 주어져도 삶은 불행하고 높은 도가 가르쳐져도 그것을 즐거워할 뿐이지 내가 실지로 그렇게 살아갈 수 없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이 안에 나를 행복하게 하는 놀라운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한계를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국 나 자신이 바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로 생명이요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충만한 생명을 우리가 받는 것이 사실은 그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도가 무엇인지를 배우는 철학적인 노력과 그리고 종교적인 노력보다 훨씬 더 위에 있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진리가 전달되는 방식은 항상 생명과 함께 전달됩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놀라운 특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무지한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살게 했던 힘입니다.
영지주의 같은 경우에는 무지한 사람이 구원받을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마니교도 보통 공부하지 않고는 그들이 말하는 구원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저는 잘 알지 못하지만, 불교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깊고 심오합니다. 그러면 보세요. 그런데 기독교는 놀랍게 한 쪼가리의 복음 너희가 나무에 못 박아 죽인 예수가 사실 그리스도였느니라 할 때 수많은 사람이 통회하며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정말 무지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도 한 줄기의 빛이 그에게 아주 충만한 생명을 가져다주어서 살 수 없었던 삶을 영위해 나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놀라운 비밀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물론 진리를 추구하지만 지식을 가지고 철학과 논쟁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고 물론 도를 가르치지만 그 도는 언제나 생명과 함께 주어지는 도이고 그런 경험은 다른 종교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기독교를 변증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그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결국,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생명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지금 이렇게 설교합니다. 여러분들이 마스크를 썼지만, 얼굴을 보고 수많은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감정도 느낍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죽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쓰러져서 피를 흘리며 죽어서 숨이 멎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하는 모든 작용 중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의 몸은 아마 여러분들이 손잡고 이끄는 대로 팔은 올라가고 여러분들이 밀치는 대로 나는 땅바닥에 내 던져질 것입니다. 보십시오. 생명이 없으니까 자기 자신을 자력으로 지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내적으로 나를 생리적으로 지탱하게 하도록 숨이 붙어있게 할 뿐만 아니라 내가 의욕을 가지고 원하는 사물을 붙잡고 만지고 걸어가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생각들을 조합할 수 있는 모든 창조적인 에너지가 바로 살아있는 생명을 내가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을 갖고 있을 때 당연히 나는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잘생긴 사람 보면 아, 저 사람 멋있게 생겼다 느끼게 되고 예쁘게 생긴 사람을 보면 아, 예쁘다 느끼게 되고 나한테 호의를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는 참 좋다 느끼게 되지만 나에게 악의를 가지고 행하는 사람은 같이 있기 싫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내가 스스로 내 생명을 지탱한다고 하는 것은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에 대해서 무한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내가 생명이 있어서 시력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수많은 빛이 들어오고 반사되고 눈을 감아도 빛의 조도가 느껴질 수밖에 없듯이 시신경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이런 일들은 끊임없이 내게 일어나듯이 외부에 대한 끊임없는 접촉이 나에게 있고 그 접촉이 고스란히 나의 자아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위험한 상황에서는 나를 보호하고 기쁜 상황에서는 거기 계속 머무르려고 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는 도피하려고 하고 심심한 상황에서는 무엇인가 변화를 도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생명이 있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지탱할 뿐 아니라 자신 바깥으로 무엇인가 계속하는 것입니다.
애들 어렸을 때 보면 좀 진득이 앉아서 해라 해도 못 있습니다. 다리를 달달 떨고 학교에서도 앉아서도 막 움직입니다. 왜 그럽니까? 생명이 충만해서 그럽니다. 여러분 아이 서너 살 먹은 애 움직이는 대로 아침부터 어른이 그 동작을 따라 하면 며칠 동안 못 일어날 겁니다. 그런데 걔는 매일 합니다. 자고 나면 원기가 모두 회복되어서 또 발광하는 것입니다. 쫓아다니는 부모들은 무릎이 아파 죽겠는데 얘는 끊임없습니다. 오전에 그렇게 까불고 나서 잠깐 자고 나면 다시 원기가 완충되어서 또 까붑니다. 정신을 못 차리는 겁니다. 그 아이들도 늙으면 못합니다. 기운이 없어서 못 합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그러니 보세요. 얼마나 놀랍습니까?
결국은 예수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랬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들이 어둠 속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어둠과 대비되는 빛이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증명하듯이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랬습니다. 이게 니카오라는 단어인데 이기지 못하더라. 라고도 번역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은 무슨 뜻이냐면 니카오가 이기다고 거기에서 온 명사가 니케고 거기에서 나이키가 온 것입니다. 니케는 그리스신화 승리의 여신이기도 합니다. 결국, 빛이 어두움에 비쳤는데 그 어두움은 어떤 어둠인가요? 물리적인 어둠은 아닙니다. 지성적인 어두움, 윤리적인 어두움, 신학적인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육체적인 생명은 가지고 있지만, 그 생명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그 생명으로 어떻게 자신을 지탱하고 그 생명으로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가 어두움입니다.
오늘날 사회를 보면 그 어두움의 사회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슨 어마어마한 어두움의 신이 장악하고 무슨 판타지적인 그런 의미에서의 어두움 그런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어마어마하게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활이 굉장히 편리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것을 시각적인 것으로 해설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그런 것만큼 지성적으로도 어둡습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지식 같은 것들 저장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장된 지식이 없으니 스스로 자기를 반성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진리가 거울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추호도 반성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은 거울입니다. 그 거울은 지식입니다. 그것은 저장되어 있어야지 네이버 같은 CPU에 저장된 것으로서는 자기반성이 불가능합니다. 자기반성이 없습니다. 감각적으로 살아갑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기껏 생각해봐야 이익의 관점에서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생겨납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고립주의에 빠지게 되고 자기 자신이 혼자서 생활하고 혼자서 있는 것들을 즐기는 문화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중요한 기쁨을 상실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된 것이 바로 어두움인데 그 어두움에 빛이 비쳤습니다. 그래서 이 빛은 지성적인 빛이고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그리스도가 그분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고 너희는 그 하나님에 의해 지은 바 된 인간이다. 그리고 너희의 참 행복은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상태니까 삶이 윤리적일 리가 없습니다. 종교지도자들도 종교의 흉내만 내지 그러나 그것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지배하고 무지하게 몰고 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이 지금도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조차도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아는 신학적인 빛이 교회와 사람들의 마음속에 없는 것입니다. 그저 예수그리스도는 훌륭한 삶을 살았던 한 교사로 아니면 교회에서 한 상징으로 심지어는 인간의 자유를 짓밟는 사람으로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식되면서 무지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짐승과 같은 삶이 되고 결국 행복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참으로 감각적인 것 이외에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도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순간적인 만족일 뿐이지 그러나 거기에는 진리도 없고 신학적인 빛도 없기 때문에 사실은 아무리 누려도 다음이 없고 평화와 쉼과 그리고 안식과 기쁨 이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일시적인 행복이고 깨어나고 나면 더 자극적인 것을 찾아가고 자유를 찾아서 모든 비참과 불행의 원인이 자기를 속박하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이 속박의 틀들을 다 부숴버리고 심지어는 진리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까지 밟아버리고 자기 원하는 대로 자신을 펼쳐 보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옥죄이는 굴레는 자기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옥중의 성도들도 양심은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들에게 빛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쯔빙그리가 마지막 죽으면서 카페일 전투에서 남긴 유언은 더 유명합니다. 우리의 육체만을 죽일 뿐 우리의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자 그리고 숨을 거둡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 없는 삶이 아무리 자유를 추구하며 몸부림쳐도 그 자유로서 인간이 행복해 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빛이 어두움에 비추었는데 어두움이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어둠 속에서 사는 삶에 익숙해졌고 그것이 행복해졌고 그것이 자신이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을 지탱해 나가는 전체적인 삶의 일부였기 때문에 그것을 허물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많이 나아져서 철거할 때도 보상을 좀 제대로 해주고 안 해주면 지루한 소송이 이어지고 하지만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나라에서 헐값으로 뺏어갔습니다. 그러면 판자촌에 살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철거반원들과 몸싸움을 하다가 피가 뚝뚝 떨어지면서도 그 집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오랜 세월을 그 집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거처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을 가지는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직접 경험도 해 봤습니다. 퇴근하고 와보니 우리 집이 없어졌습니다. 그런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소명하실 때 하나님이 허물고 파괴하는 일을 먼저 사명으로 주셨고 그다음에 건설하고 세우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결국은 빛이 어두움에 비쳤지만 어두움이 그 빛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이것을 포기하실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무엇인가 진리를 전달해주어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사람이 보기에는 미약하기 짝이 없는 방법으로 당신 자신의 진리를 인간에게 보내어서 그 속박 받는 노예와 같은 사람들을 건져내셔서 결국은 그 생명과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그 놀라운 방법은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