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지식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것이요 (잠 2:10)
녹취자 : 김경애
저는 오늘 우리들이 늘 많이 쓰는 단어인 지혜와 지식에 대해서 명확하게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드리고 싶어서 이 본문을 선택했습니다. 지혜와 지식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흔히 막연히 생각하기를 지혜는 무엇인가 슬기롭게 하는 것이고 지식은 공부를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공부를 잘하는 사람 중에는 지혜가 매우 부족한 사람이 있고, 지혜는 있는 것 같은데 공부를 잘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적인 것은 이 둘 다를 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둘 다 가만히 있으면 어느 한순간에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얻기를 구해야 합니다. 얻으려고 애를 쓸 때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지혜와 지식은 무엇입니까? 결론부터 먼저 내면 지혜는 영원한 것들에 대한 오성적 인식이고, 지식은 시간적 사물에 대한 이성적 인식입니다. 한 번쯤은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제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어거스틴에 나오는 한 해설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는데 우선 하나하나 이야기해 봅니다.
그러면 지혜가 영원한 사물들에 대한 오성적 인식이라고 했는데 세 가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영원한 사물들은 무엇입니까? 영원한 사물들은 두 가지인데 하나님 자신이시거나 하나님이 영원히 있도록 지정하신 것, 그것이 영원한 것들의 정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자신은 이미 시작도 없으시고 끝도 없으시고 존재의 기원도 당신 자신이 가지고 계시니까 하나님은 영원하시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겠는데 그 다음 영원한 것은 무엇입니까? 천사들은 신학적으로 영원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어느 시점에서 천사들은 다 제거될 것이라고 보는데 그러면 영원한 것들은 그러고 보면 결국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과 인간을 영원히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이 상태로 영원한 것은 아니고 영혼이 창조된 시점은 있지만 그 영혼을 하나님이 결코 버리지 아니하심으로 영생불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우리의 육체가 영혼과 만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몸으로써 영원히 존재하게 되겠습니다. 후자는 전자 때문에 영원해지는 것이니까 결국 깨닫고 보면 영원한 사물이라는 것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 때문에 영원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사이에 하나 중요한 매개물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영혼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솔릴로꾸야’ 라는 독백록에서 이성과 영혼이 대화를 하면서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라고 할 때 ‘하나님과 영혼 이외에는 알고 싶은 것이 없습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과 영혼 이외에 알고 싶지 않다거나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물이 둘이 있는데 하나님과 인간의 영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것들이라는 것은 설명이 끝났습니다.
그러면 영원한 사물은 라틴어에서 ‘레스’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 즉 하나님까지 들어가는데 그래서 사물은 이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사물에 대한 오성적 인식’이라고 했습니다. 인식은 똑같은데 오성적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런 것입니다. 아이가 도덕적으로 훈련되는 것이 모든 것이 교육에 의해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아이가 한 번도 사람이 죽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 피를 흘리며 죽는 모습은 학습하지 않고도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고 죽는 것에 대해서 무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성적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포함해서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는 두 가지 기능이 있는데 하나는 오성이고 하나는 이성입니다. 이성은 시간 속으로 들어와서 이것을 때리면 소리가 납니다. 때리는 것은 원인이고 결과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결말은 마이크가 망가지는 것입니다. 모두 다 인과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유리는 왜 이것을 때리게 되었느냐 하면 내 손이 이것을 때리게 한 것입니다. 손은 왜 때리게 했을까? 손은 왜 그랬을까? 수전증 환자라면 상관없이 때렸겠지만 이 속에서 이것을 때려서 뭔가 시범을 보여주고 싶은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 속으로 들어와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아는 것이 이성인 데 비해서 오성은 하나님은 또 다른 능력을 주셨는데 이성으로 인간이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그 너머의 무엇을 어떤 사실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인간에게 주시지 않았더라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무리 알려주셔도 하나님을 알 수 없었을 것이고 두 번째는 통찰이나 직관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영혼이 주를 보네!’ 라고 했을 때 그 말은 내가 사과를 보는 의미와는 다른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우리 집사람이 생전 물을 무서워했습니다. 바다나 물 자체를 싫어했습니다. 항상 산을 좋아했는데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4살 때쯤이었는데 장모님이 동네 사람들과 모여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한순간에 굉장히 슬프고 불안한 감정이 확 들어오면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겠더랍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서 빨래를 하는데 한 아이가 뛰어서 ‘아줌마! 아줌마! 옥희가 우물에! 우물에!’ (어렸을 때 우리 집사람 이름이 옥희였답니다.) 미친 듯이 달려가 보니 벌써 저 깊은 우물에 빠져서 애가 푹 빠져서 머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 장모님이 어땠겠습니까? 거기서 그냥 줄이고 뭐고 필요 없이 그냥 옷을 입은 채로 우물 속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채를 끌어서 동네사람들이 다 나와서 간신히 끌어올렸는데 기절했다가 살아났습니다. 친구와 둘이서 우물 좀 본다고 기대고 있으니까 ‘잘 보여? 잘 보여? 내가 더 잘 보이게 해줄게.’ 그리고 다리를 덜렁 들어버리니 그냥 거꾸로 풍덩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물에 대한 지독한 공포가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론 그런 것이 내가 염려시리즈 때 맨 처음 이야기한 것처럼 불안한 감정이 확 들어오는데 아무것도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어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을 파악할 수 없는 그런 기재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감각들을 우리의 영적인 감각을 주신 것입니다. 나는 박사논문을 완성하지는 않았는데 그러나 박사논문을 쓴 사람 못지않게 나도 공부를 하고 책을 썼으니까 보면 사람들은 엄청나게 책을 미친 듯이 파야지만 좋은 책이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은 반만 맞습니다. 어떤 이야기냐 하면 논문이나 책을 쓸 때 어느 한순간에 확 전제가 스쳐 갑니다. ‘A는 B다.’ 라는 전제가 스쳐 갑니다. 그것이 아주 탄탄하게 수정처럼 맑은 어떤 하나의 인상이 스쳐 갑니다. 거기부터 사고가 내려오기 시작하면서 글이 써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증명하게 될 때에 탁월한 논문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남의 논문을 베끼고 논쟁을 붙여서 밥을 먹고사는 자료정리가들은 그런 것이 필요 없지만 저 위에서 새로운 학설을 발표하고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어떤 과학적인 결과를 내놓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오성적인 직관들이 엄청나게 필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인슈타인이 시간과 공간은 서로 엮여있다고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있고 빛이 휠 수도 있기 때문에 결국 시간도 상대적이라는 것을 실험해서 알았겠습니까? 뉴턴이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고 소리 지르는데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무엇인가 깊이 스쳐 갔을 때 그것을 이성적으로 생각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밤하늘의 우주를 보고 있었지만 그러나 어느 한순간에 오성으로써 그것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낮은 수준의 것이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믿게 만드는 것도 오성이라는 기능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지혜란 영원한 사물에 대한 오성적 인식입니다. 그 오성을 통해서 믿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생각해 보십시오. 죄짓기 전에 죄가 없었으니까 우리처럼 어두운 장막이 가려져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하나님이 보였겠습니까? 하나님이 동산에 거니셨다고 했지만 그것은 하나의 인간을 이해시키기 위한 눈높이 방법의 표현이고 아담이 하나님을 보았고 만났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그렇게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지혜라는 것은 영원한 사물을 오성이라는 기능으로 그것을 직관하고 관상하고 받아들이는 그렇게 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그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이에 비해서 지식은 시간적 사물입니다. 지식은 모두 시간 안에서 없어질 사물들이 앎의 대상입니다. 그러면 시간적으로 없어질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영혼을 빼고는 모두입니다. 이런 것은 영원합니다. 사랑, 하나님이 계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있는 한 사랑이라는 것은 불변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구체적인 실체적인 사물만이 아니라 어떤 추상적인 사물에 대한 것들도 역시 그것도 영원한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영원한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사물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고 학문을 사랑한다면 이것도 시간적인 것입니다. 하늘나라 가면 그곳에서 제일 멍청이 같은 사람도 여기서 가장 뛰어난 사람보다 뛰어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모든 시간 안에 있는 사물들에 대한 것이 그런 것입니다. 사물들이라는 것은 사라질 것들, 태어난 적이 있고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것에 대한 이성적인 인식입니다. 아까 설명했듯이 그 모든 것들은 법칙이 있어서 원인과 결과로 광범위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이성적으로 원인과 결과를 찾아서 그것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지식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지식과 지혜는 어느 것이 우리에게 더 필요한가? 이 지식과 지혜는 우리의 삶에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것을 우리들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을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먼저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육체는 지식을 필요로 합니다. 지식이 없으면 육체는 매우 고달픕니다. 심지어 자기의 생명을 지탱해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Danger’ 라고 써서 붙인 그렇게 써 붙인 쥐약이 있다고 칩시다. 그것이 단것인 줄 알고 물에 타서 주스처럼 마시면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아이를 낳았는데 밀가루와 분유를 구별 못해서 밀가루를 타서 아이에게 먹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지는 않겠지만 상당한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몸을 가지고 있는 한은 이 지식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보면 거의 똑같은 조건으로 태어났는데 몸에 대한 얼마나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건강을 잘 관리하는 사람도 있고 상관없이 막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이야기했습니다. 한 사람이 심각한 암이 걸렸습니다. 죽을 지경이 되어서 역학조사를 했습니다. 이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 두 개가 있는데 명란젓과 고등어구이입니다. 특히 고등어 껍질이 맛이 있는데 고등어 껍질을 살살 벗겨서 거기에 밥을 싸서 명란을 얹어서 먹는데 거의 매일 먹다시피 한 것입니다. 명란에는 아주 환경 친화적으로 만든 명란이 아니면 빨갛게 보이고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아질산나트륨이 들어갑니다. 그 아질산나트륨과 고등어껍질이 튀겨질 때 나오는 물질 이 두 개가 만나면 1급 발암물질이 되는데 그것을 알았겠습니까? 둘 사이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먹는 것을 보면서 기겁할 것입니다. 큰일 납니다. 그렇게 꾸역꾸역 먹고 걸리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거스틴에 의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우리의 육신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지식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이 없으면 육체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남는 것입니다.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들이 경제정책을 잘 못하면 국민 전체가 고통을 받는 것이 육신적으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홍콩이 부서지면서 수많은 기업들이 홍콩을 탈출하는 러시를 보이는데 한국으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의 싱가포르로 간다는 것입니다. 통계를 내놓았는데 지금 오겠다는 데는 뉴욕타임즈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니까 세금이나 근로시간제가 다른 나라 싱가포르에 비해서 굉장히 불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안 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겠지만 어쨌든 그런 모든 것들은 인간의 육체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바이오주를 산다는데 요즘 SK직원들이 사직서를 내는 사람들이 줄줄이 나온다는데 우리 사주를 받아서 차익이 16억이 난다는데 그것을 받아서 다른 것을 한다는 것입니다. 직장을 계속 다닐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들은 이성적 인식입니다. 우리의 육체를 잘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말레이시아에 2위의 재벌이 있는데 재산이 6조입니다. 재벌 2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물려받는 길을 포기하고 승려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보여줍니까? 행복이 그렇게 우리의 육체에 관련된 것만으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전혀 무시하고 살아서는 인간이 또 불행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고등어 껍질하고 명란젓을 실컷 먹은 사람이 주님이 일찍 부르시니까 나는 간다고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하면서 매일 찬송하면서 은혜 가운데 죽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일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육체가 무너지고 육체를 돌볼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지식들이 모자라거나 혹은 지식의 오류가 있어서 우리의 몸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할 때에는 불행해집니다. 마음도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육체와 영혼은 두 가지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납니다. 만나는 막이 바로 마음인데 마음이라는 막에서 만납니다. 두 개가 서로 교통하면서 흐릅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너무 침체되고 너무 싫습니다. 기도도 안 됩니다. 기도하라고 계속하는데 기도도 안 됩니다. 그런데 누가 찾아와서 ‘우리 같이 오랜만에 점심이라고 같이 먹자.’ ‘이 형이 웬일이야?’ 반은 내키고 반은 안 내켰는데 경치도 좋고 예쁜 식당에 데리고 가서 맛있게 밥도 사주고 그림 같은 찻집에서 차를 사주고 힘들지 않느냐고 하면서 웃기는 이야기도 하고 한 시간을 지냈습니다. 갑자기 몸과 마음이 편해지면서 세상은 살만하다는 마음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이렇게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나는 경험했습니다. 너무 기운이 없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한 끼만 기분 좋게 밥을 잘 먹어도 원기가 다시 솟아납니다. 반드시 좋은 음식만이 아니라 이렇게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영혼은 영원한 사물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사물들에 대한 오성적 인식이 없이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간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은 육체와 딱 붙어있습니다. 결코 헤어지지 않습니다. 잠시 헤어지지만 그 상태가 끝나고 나면 다시 육체와 만납니다. 그때는 지금과 같은 육체는 아니지만 어쨌든 만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시간적인 사물들에 대한 이성적인 인식을 필요로 합니다. 두 가지가 항상 같이 가는 것입니다. 결국 뭐냐 하면 나를 편안하게, 온화하게, 쉼이 있게, 이것은 물질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까지 쉬게 해줄 수는 없습니다. 지명수배를 받고, 자식이 비관해서 자살을 하고, 아내가 집을 나가고, 그런 상태에서 특급호텔에서 바라보는 몰디브의 풍경이나 마시는 모히토 한 잔과 영화의 장면 같은 해안가 그것이 그 사람에게 평화를 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정직하게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혜가 필요하고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라는 것은 결국은 지혜가 계속 영원한 사물들에 대한 오성적인 인식이 늘어난다는 것은 믿음이 생긴다는 말과 거의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나옵니다. 오늘도 잠언 2장에서 지혜자가 ‘지혜가 내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됩니까? ‘내 말을 들어라 아들아! 아빠 말을 들어라’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빠의 개똥철학을 이야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빠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다가 실패하기도 했고 경외하다가 행복해지기도 한 사람으로서 이제 너에게 유언처럼 남겨주는데 너는 내 말을 들어라.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란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지혜와 지식이 다른데 어떻게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것입니까? 그럽니다. 그래서 영원한 사물들에 대한 인식은 지혜이고 시간적인 사물들에 대한 인식은 지식인데 놀랍게도 이 지식이 우리에게 지혜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방식으로 가져다주느냐 하면 이런 것입니다. 뭐냐 하면 코로나 사태가 도래했습니다. 이 코로나 사태도 가만히 보면 학자들도 이 기원을 규명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 중 하나가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현재 빙하기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질학적으로 간빙기라고 부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6,800만 년 전에 유카탄반도에 지름 10㎏짜리 운석이라기보다는 작은 별 쪼가리가 떨어집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2년 안에 핵겨울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어쨌든 그렇게 떨어져서 부딪힌 파편들이 순식간에 지구의 중력을 초월하는 곳까지 튕겨 나갔다고 하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면서 핵겨울이 오고 짐승들이 다 죽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어땠느냐 하면 온난화가 이루어지는데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느냐 하면 화산이 폭발합니다. 화산이 폭발하니까 이산화탄소가 엄청 많이 나옵니다. 지금 우리들이 배기가스나 공장가스를 경험하는 똑같은 일입니다. 북극부터 남극까지 얼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풀 천지입니다. 그때에 생물의 대폭발이 일어납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생물들이 번식합니다. 생물의 대폭발이 일어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6,800만 년 전에 빙하기가 찾아옵니다. 짐승들이 그대로 묻힙니다. 짐승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엄청난 박테리아와 균들도 함께 발생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한 번에 겨울이 오면서 묻혀버리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얼음이 녹습니다. 녹으면서 사체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바이러스의 부활이 일어납니다. 부활할 뿐만 아니라 부활한 것들이 끼리끼리 만나서 변종을 일으킵니다. 그것이 가장 유력한 학설이라고 봅니다. 앞으로도 이런 상황은 계속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은 바이러스가 왜 일어났느냐고 물어볼 때 하나님의 진노라고 한 번에 해석하는 것은……. 그러면 제약회사에 다녀서 백신을 개발하고 대박이 터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안 그렇습니까? 나오면 당분간은 1인분에 326만 원이라는데 그런 식으로 한 면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면으로 보면 지식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분명히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간을 창조하듯이 바이러스를 창조해서 이 땅으로 보내서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카뮈의 페스트에서 하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페스트가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데 예배당에서 신부가 하나님이 진노하셨다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나는 안 믿겠습니다.’ 이런 갓난아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은 그렇게 죽는 것이 자연적으로는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찾아내지 못해서 그렇지 설명이 됩니다. 그러나 그 설명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계의 모든 역사와 우리의 인생을 붙들고 계신 데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사물들의 원인과 결과로만 그 일들이 일어난다면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불행한 원인을 제거하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에 죽도록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추앙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시간적 사물들에 대해서는 원인과 결과를 우리들이 이성으로 알지만 그러나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은 영원한 사물들에 대한 오성적인 인식인 지혜를 통해서 그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두 개가 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부지런히 백신도 발견하고 해야 합니다. 이제는 포스트 코로나라는 말은 불가능하답니다. 영원히 위드 코로나라고 보아야 한답니다. 우리가 감기와 함께 살듯이 코로나와 함께 사는 시대랍니다. 독감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독감에서 폐렴으로 변합니다.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치료제가 나와야 합니다.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독특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가 신앙적으로 너무 나태한 삶을 살았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각성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는구나!’ 그러면 역대하 7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악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겠다는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혜와 지식이 함께 만나면서 행복한 삶이라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기에서 보면 성경이 한 구절 한 구절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믿기만 해야 하는 말들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시며 그렇게 상 받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는 그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어디를 읽든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성경을 읽음으로써 영원한 사물들에 대한 오성적 인식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인데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보면 이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하나의 증언과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증언, 인간의 영혼에 대한 증언들이 하나하나가 상관없이 그냥 믿어야 할 신조처럼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배열하실 때 이성적으로 배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이렇게 깨달았지만 이것들을 이성적으로 연결할 때 이 지식은 우리에게 놀라운 지혜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신앙이 안 들어가는 사람도 이성적인 사람이 안 들어가고 신앙이 폭발적으로 굳건하게 성장하는 사람도 이성적인 사람이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이성적인 사람은 그 이성에 호소하다가 하나님을 안 믿을 우려도 있지만 그런 사람이 그것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을 믿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이성적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하는 그 성격이 이치를 공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신학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인도하는 금요기도회에 와서 고꾸라지고 데굴데굴 은혜를 받는데 공부는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 그 뜨거움이 며칠이나 가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은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즉시 ESV성경이라도 놓고 열심히 읽고 담임 목사 책이라도 줄을 쳐가면서 읽고 ‘아! 이런 것이었구나!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탐구하는 사람의 신앙이 견고해지겠습니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리를 하면 오늘 성경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인생의 관건은 바로 그것입니다. 지혜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는 것 이것은 의미심장한 구절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불쑥 주어지는 것처럼 성경이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지혜의 유용성은 마음이 그 지혜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우리의 수많은 삶을 만들어 내는 공장입니다. 그 공장에 엄청난 원료를 갖다 주었습니다. 공장이 기계를 돌리지 않고 아무것도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무엇 하겠습니까? 아무것도 안 만드는데 재료를 주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마음이 지혜를 받아들여서 마음이 그것을 계속 활용할 때 그 지혜 때문에 수많은 아름다운 행실과 삶, 판단, 신앙적인 봉사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에 결국은 지식은 그 사람의 영혼을 즐겁게 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물질적인 것이 우리의 몸에 꼭 필요하고 꼭 있어야하고 그것을 얼마나 잘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의 즐거움은 많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다섯 가지 재료가 들어가는 요리가 있는데 그 순서와 조합을 기가 막히게 아는 사람이 하는 요리와 분량과 조합, 순서도 모르는 사람이 뒤죽박죽으로 한 요리 둘의 차이는 사료와 고급요리의 차이 정도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아는 사람이 한 요리는 같은 요리인데도 기가 막힌 손맛이 나는 것입니다. 사실 손맛이 아니라 머리 맛입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큰 차이가 나겠습니까? 결국은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의미까지 확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는 방법을 알고, 아무리 예쁜 옷을 입는 방법을 알고, 아름다운 장소를 가서 즐거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움이 될 뿐입니다. 그것도 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이것이 도대체 우리의 인생에 무슨 의미인가?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젊고, 다시 늙고, 죽고, 소멸해가는 것 이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눈에 보이다가 사라지는 것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이렇게 쾌락이 난무하고 세상 사랑이 가득한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얻지 못하는 이곳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런 것은 영원한 사물들에 대한 오성적인 인식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염려가 되는 생각은 육신 쪽에 너무 많이 쏠려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인터넷이 들어가서 검색해 보면 전부 다 먹고, 입고, 놀러가고, 노래하고, 춤추고, 즐거움을 찾는 일인데 대부분 99.999%가 육체에 쏠려있는 것입니다. 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아주 희귀하게 가끔씩 그런 인간의 영혼의 문제와 영원한 사물들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를 하는데 사람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마음이 거기에 다 바쳐지는 것입니다. 마음 자체가 적당한 비율을 이루어서 육신에 대한 생각들이 이렇게 있고 그 지식을 찾고 안정적이고 행복한 삶을 안정적으로 살고 이 위에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이 통제를 하면서 이것들을 균형을 맞추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집안은 개꼴로 해놓고, 애들은 거의 방목하다시피 하고, 자기는 맨날 교회에 와서 기도나 하고, 전도나 하러 돌아다니고, 머리는 폭탄 맞은 것처럼 하고 그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두 가지가 같이 균형을 잘 이루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현저히 없는 것입니다. 그냥 먹는 것, 그냥 예뻐지는 것, 그냥 놀러 가는 것, 그냥 성공하는 것, 그냥 주식 대박 나는 비결, 어디에 알박기처럼 땅을 사서 돈을 벌 것인가? 어디에 투기를 하면 미래에 개발지인 그린벨트인가? 이런 것이 폭풍처럼 쓸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6조 원이면 아마 하루에 몇억씩 써도 못 쓸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은행에 예치해놓기만 하면 일 년에 2%면 1,200억 원이 매년 수입이 되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평생 그냥 은행에 내버려 두어도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모두 내버려 두고 승려가 되었을까요? 행복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성도가 세상의 것들로만 행복해질 수 있다면 영혼이 병든 것입니다. 무엇인가 허기진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 마음이 기도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찾게 만들고, 말씀의 은혜를 받게 만들고, 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가 지혜와 지식이 겸비한 상태에서 우리들이 온전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의 추구에 의해서 지혜가 허물어지지 않고 지혜를 따라서 살기 때문에 지식의 삶이 붕괴되지 않는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하고 만나도 세상적으로 그냥 직장생활에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치 억지로 교회를 떠나서 직장에 와 있는 사람처럼 살면 안 됩니다. 나는 직장 다니면서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승진에 관심 없고, 직원들하고 잘 어울리지도 않고, 외톨박이로 살고, 신우회 운동이나 하고, 항상 교회에 와서 주보나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너무 싫어합니다. 그렇게 살지 말고 육적인 영역에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의욕적으로 살고 그러면서도 그것 자체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안에서 즐거워하면서 그 의미를 시간적인 사물 안에서 영원한 의미를 물으면서 영원한 것들에 대한 사랑을 시간적인 삶의 질서 속에서 구현하는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행복을 누리면서 아무리 행복해도 하나님 때문에 항상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곳에 가고, 아름다운 것을 봐도 결국 하나님과의 결속이 항상 강화되는 그런 방식으로 영원과 시간 사이에 균형을 잡으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