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음을 내게 주며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 23:26)
녹취자:이경순
지혜자가 아들에게 남긴 훈계입니다. 여기에서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했을 때 그 나는 하나님을 진실로 경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마음으로 아들에게 주는 교훈이니 아들이 마음을 아버지인 자신에게 주면 아버지의 마음에는 하나님밖에 없으니 그게 곧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마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원래 사람은 정신으로 홀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감각을 통해서 생각하는 것이 훨씬 쉽게 이해되도록 그렇게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한 사람 한 사람 창조하지 않고 생육적 번식에 의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난 아이들이 그 부모의 사랑을 받고 그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면서 사물을 보는 관점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 그리고 이웃을 바라보는 시야 같은 것을 배우고 무엇보다도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배우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 구절을 집은 이유는 하나의 명재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사랑이다 이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누군가가 자기보다는 훨씬 열심히 살아가고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왜 그런지 감동이 되지 않는 경우 여러분들은 경험했을 것입니다. 어디서 오는 심리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접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요새 삼위일체를 읽고 있다는 것은 여러분들 다 알고 있는데 이른 봄부터 읽기 시작해서 지금 거의 다 읽어가고 한 40페이지 정도 남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받은 은혜는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인데 그중에 어제 읽은 한 구절이 아주 굉장히 커다란 감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이미 알고 있던 것이지만 그림처럼 묘사하는 내용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다. 사유와 언어가 나뉩니다. 그런데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면 사유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언어라는 것이 생겨날 수 없고 또 언어가 없으면 사유가 더 이상 발전을 안 합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하는 말이 그리스에서 그렇게 철학이 발전했던 이유는 에이나이라고 하는 투 부정사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에서 에이나이는 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 독특한 단어 때문에 철학적 사유가 발전을 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선사시대 때 사람들이 꽤 문명을 이루면서 살았지만 그러나 사상이라는 것이 발달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상이라는 것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생각을 회화나 그림, 글 같은 것으로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사상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고 그것들이 체계화되고 그것들이 교육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냐면 하나님에게는 언어가 곧 사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것 같은 말을 사용해서 말을 쓰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혹시 하나님께로부터 말을 들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이 진짜로 히브리말을 배우거나 중국어를 배우거나 한국말을 배워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 사람에게 그렇게 자신의 언어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들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말씀하셨을 때 주위의 사람들은 천둥소리 같은 것을 들었을 뿐인데 사도바울의 마음에는 아주 또렷한 당시의 히브리어로 들렸던 것입니다. 자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은 하나님은 논리적으로 볼 때 언어와 사유가 하나인 분이시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와 사유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심리학에서 우리들이 무엇인가를 보고 확 하고 어떤 인상이 밀려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펄셉션, 지각이라고 부릅니다. 그 지각이 이전에 있었던 기억을 사용해서 그 지각이 떡 덩어리라면 지각이 예전의 기억을 사용해서 하나씩 하나씩 빚어내기 시작합니다. 그 빚어내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결국 언어화되어서 그것이 더 구체적인 생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논리의 틀을 만들고 질서 정연하게 자리 잡으면서 자기의 뚜렷한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는데 그분을 가리켜서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여러 주에 걸쳐서 말씀이 육신이 되사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게 사유와 일체가 된 언어가 있는데 더 쉽게 이야기하면 언어가 사유가 나눠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언어가 있는데 그것은 곧 사유인데 그것은 어떠하든지 다른 지성적 피조물과 소통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타고 그 말씀이 바깥으로 보내어진 것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이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냐면 우리가 무엇인가 사건을 경험합니다. 그러면 그 사건을 경험하고 나면 굉장히 많은 인상이 들어옵니다. 그 사건이 흔하지 않은 사건일 때는 강한 인상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확 하고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지각이 되고 지각이 기억을 사용해서 생각을 빚어내면서 언어화됩니다. 언어화 되고 나면 말하지 않고 배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느 일이 더 어려운지 생각해보세요.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것도 어렵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을 못하는 것은 너무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로서 말에 실수가 많은 사람들이 그 통제가 잘 안 되어 있을 때 물 쏟아지듯이 언어가 통제 안 되고 쏟아져 나오는데 그것은 굉장한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대화하다가 꼭 말해야할 내용을 말을 못하면서 남과 대화를 해야 하는 경우 대게 사람들이 허공을 쳐다보거나 딴생각을 합니다. 내가 얘기하는 것이 이 사람들에게 받아지나 그것이 언어가 가지는 힘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지각이 파도가 일어나게 되면 기억은 기다렸다는 듯이 덤벼들어서 그 반죽 덩어리 같은 지각을 뜯어내서 언어를 만들어 냅니다. 언어가 일단 만들어지고 나면 여기까지 꽉 차서 이것을 쏟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상황이 됩니다. 마치 여자가 달이 차면 아이를 해산할 때가 되는데 오늘 날까? 날씨도 그러니까 한 열흘 있다 날까 그게 마음대로 안 되고 어느 한순간에 애가 나오려고 확 힘을 주게 됩니다. 양수가 터지고 아이가 나오는 것입니다. 언어도 똑같습니다. 일단 언어로 조직화 되고 나면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것을 사람이 말을 하게 됩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임성우씨가 여기 있습니다. 나하고 이야기합니다. 마스크 다 벗었다고 치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데 이 사람은 김남준을 이렇게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는 것만이 말이 아니라 온몸 전체가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랬거든 그런데 와 굉장했어! 전부다 표정, 눈썹의 움직임, 반짝이는 눈 그다음 손짓과 발짓 그 표정 그러다가 그 사람이 죽었잖아 하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것까지 다 언어가 되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감각이 없고 귀만 들리는 사람이 듣는 언어와 볼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듣는 언어는 완전히 다른 언어입니다. 아니 여러분도 드라마를 보더라도 라디오드라마와 TV 드라마 하고 어느 것이 더 실감납니까? 연극하고 어느 것이 더 실감이 납니까? 아니면 2D하고 3D하고 4D하고 어느 것이 더 실감납니까?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자체가 언어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간 결론을 내리면 인간이 무엇인가를 느꼈을 때 지각이 되고 지각은 기억을 이용해서 언어가 되고 언어가 되었을 때 인간은 그것을 감각으로 표현하는데 이 모든 살과 뼈와 표정과 모든 물질적인 것들을 사용해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온 언어는 물질을 울리면서 저 사람의 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소리를 듣는 이유는 공기의 파장이 일어나기 때문에 듣는 것입니다. 당연히 340m 떨어진 사람은 1초 후에 듣는 것입니다. 천둥이 쾅 치고 나서 셉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아 이게 3.4km 밖에서 부딪혔구나. 그래서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말씀이 내가 가지고 있는 말이 이 사람에게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삼위일체에 대입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언어가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사유가 있고 사유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사유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사유이고 하나님은 빈 껍데기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사유이시기 때문에 아들도 사유인 것입니다. 그 사유이신 예수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사유와 언어가 분리가 안 됩니다. 그 사유가 인간을 향해서 우리의 마음에 지각이 언어화될 때 사람들에게 소통하기 위해서 전달될 때 이 마음에 있는 것들은 정신적인 것이지만 떨리면서 모든 게 이제부터는 물질적인 도구들을 사용해서 저 사람의 귀에까지 전달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분이 우리에게 당신을 떠나서 전달될 때는 똑같이 감각적인 것들을 잊고 이 세상에 오셨어야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그분이 하나님이 말씀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말이면 그냥 눈 감고 말로 들으면 되는데 왜 그것과는 달리 똑바로 쳐다보고 이 사람의 모든 움직임을 보면서 듣는 언어가 호소력이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왜 그렇게 되는 걸까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언어의 목적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언어로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마음의 생각이 우리의 몸이라는 물질을 사용해서 소리를 발하여 공기를 떨리게 하면서 사람에게 전달될 때까지 어떠한 경우도 물질을 사용하지 않고는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물질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언어의 목적성과 관련이 되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내가 임성우씨에게 말을 쭉 합니다. 그러면 표정은 눈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혹은 눈물이 났다 아니면 웃었다라고 하는 표정이 있고 언어는 공기를 때리면서 높낮이를 가지고 장단을 가지고 이 사람의 귀에 들립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지금 그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 말의 의미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었어. 흐흐 하는 것과 사람이 죽었어. 흑흑 하며 우는 것 사이에는 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화자인 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엄청난 격차가 있는 것입니다. 전자는 그 자식 죽었어. 정말 나는 행복해 그 이야기이고 후자는 어떻게 그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때 집중하는 이유는 그 언어를 그냥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 언어가 마음으로부터 나와서 마음에 있는 사유는 훨씬 더 크기가 큰 것이고 언어는 그것에 국한된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주 독특한 느낌을 표현할 수가 있을까요? 제가 그런 경험을 한 번 했는데 너무너무 싫은 경험을 하는데 그렇다고 싸울 경험은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엄청난 피해를 입은 그런 경험은 아닌데 너무너무 싫은 것입니다. 집에 와서 식구들한테 표현해야 하는데 이것을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 딱 떠올랐습니다. 그 이야기 들을 때 어떤 기분이였어요, 그랬을 때 비빔냉면에 씻지 않은 생고등어를 함께 무쳐 먹는 기분이었습니다. 머릿속에 상상을 해보세요. 맛있는 비빔냉면이 있는데 어물전에서 궤짝에 있는 고등어를 한두 마리 갖다 놓고 같이 비벼먹는 상상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런 언어가 물질적인 것을 타야지만 언어가 되어서 들리는 언어가 되고 보는 언어가 되어서 쌓였는데 다 도구가 물질적인 된 것입니다. 호흡의 장단까지 모두 그것을 사용해서 이 사람에게 들리는 것입니다. 들릴 때 이 사람은 그 음의 높낮이 이것에만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확하게 관찰하므로 서 마지막 도달하고 싶은 것은 뭐냐면 내 마음속에 있는 사유에 도달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때 이 사유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을 때 아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언더스텐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하는 이야기는 기껏 해봐야 인간의 생사에 관련된 이야기이고 혹은 그냥 재미로 하는 이야기고 혹은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또 그렇게 지어내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언어와 사유인 그것이 인간에게 전달될 때는 이것은 인간의 생사와 화복이 걸려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농담하시는 것 봤습니까? 성경에서 몇 줄쯤 빼버려야 되는 말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인간의 운명 생사 세계의 미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말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논리를 가지고 그대로 이동을 하면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사유이자 언어인 그것이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로 전달된 것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깨닫는 것이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사유이자 언어인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이 하나님의 사유이자 언어입니다. 그것을 감각적인 것을 정신적인 것보다 더 잘 파악하는 인간을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혀서 이 세상에 보내셔서 예수님은 무한하시고 영이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존재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존재뿐 아니라 그 존재를 가지고 했던 행위 그담에 언어 그분의 인격 모든 것이 인간에게 전달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도 이야기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러면 결국 무슨 뜻이냐면 예수그리스도께서 해주신 많은 사람을 굶주린 사람을 먹이신 착한 일 병든 자를 고쳐주신 일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주신 일, 그분의 온화하고 근엄한 인격 이 모든 것들은 거기에서 사유가 멈추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사다리처럼 타고 들어가서 예수 안에 있었던 사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길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없으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절실한 구원자로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시는 언어활동 자체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분의 마음속에 있는 언어를 아는 사람은 결국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언어를 안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아무리 많이 예배당에 나오고 설교를 듣고 심지어는 봉사를 합니다. 그것으로 사람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은 그것은 모두 도구일 뿐이고 그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그때에 우리들이 임성우씨와 나와의 이야기를 예로 든 것처럼 마지막으로 이 언어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내가 그 사람 마음속에 들어가고 그 사람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이 언어활동입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를 이 사람에게 알게 할 때 머릿속에서는 아주 진지한 투쟁이 시작됩니다. 수많은 언어 중 가장 적합한 언어 그리고 그 적합한 언어를 어느 배열로 나열해야지만 이 사람에게 가장 잘 전달될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을 이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몸에 익어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언변에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웅변 같은 것을 꼭 배워야 되었습니다. 문법도 그렇고 수사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 ,문법, 수사학 세 가지는 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똑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는 목적 자체가 하나님의 사유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그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에 멈추지 않고 그 말씀을 더듬어 더듬어 그 표정 하나하나에 나타 있는 것까지 느끼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설명을 하자면 왜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사유이자 언어이신 그분을 우리에게 보내시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할 때 그것은 원인을 사랑에서 찾는 것입니다. 이 안에 당신의 사랑이 있고 내가 이 말씀을 보내지 않으면 저들이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끌어 오르는 사랑 때문에 당신의 언어인 예수그리스도를 육신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셔서 높은 정신적인 세계에 속한 위대한 것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없는 인간에게 모두 볼 수 있는 감각을 이용해서 그들에게 다가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육신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두 가지 적용을 함께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으로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는 말이 자신의 사유 속에서 나오는 말이 되기를 힘써야 됩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설교의 준비는 설교하지 않을 수 없는 심령을 갖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엄마가 시장 보러 갈 때 이미 맛있는 식탁을 차릴 것인가 못 차릴 것인가는 결정이 납니다. 엄마가 마음이 열리고 돈이 있어서 최고급 한우 집에서
최고급 고기를 끊고 최고의 물이 좋은 생선 집에서 생선을 사고 최고의 싱싱한 유기농 야채 집에서 야채를 사고 있으면 맛이 있을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좋은 A++한우는 뭘 버무려서 맛있는 게 아니라 그냥 소금만 뿌리면서 구워먹으면 초고고 최고 생선도 그렇게 좋은 생선은 조리는 것은 생선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그대로 석쇠에 불을 이용해서 맛있게 구워서 금방 잡아온 생선을 먹으면 설탕을 뿌린 것처럼 답니다. 그런데 엄마가 돈이 없어서 혹은 애정이 없어서 유통기간 지난 통조림을 찾고 고기 중에서 무조건 싼 것을 달라고 그러고 냉장고에서 변색된 고기를 사고 이렇게 되면 맛있을 가능성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훌륭한 설교자는 항상 청취자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훌륭한 설교 청취자가 아닌 설교자, 개인기도 안하는 기도인도자, 교회 치리에 복종한 적이 없는 당회장 이런 사람들은 인정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대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그 언어를 통해서 더듬어서 하나님의 마음까지 들어가는 복을 누렸던 사람은 마음속에서 설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설교자들인데 내 질문에 대답을 해보세요. 최근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너무 감동을 받아서 눈물 흘린 적이 언제입니까?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그 사람이 설교할 때는 사람들에게 눈물 흘리기를 원하면서 설교를 한다면 위선입니다. 그럴 기대가 없이 설교한다면 그는 설교할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받은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엘로힘 이게 모든 선지자들의 소명의 공통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 그렇게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그런 식으로 받을 때 비로소 이 안에 나의 사유는 언어화되어서 사람들에게 전달이 된다.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경건 그게 뭔데요 사람보기에 반듯하게 살고 신문지상에 오르내리지 않고 그게 경건입니까? 그런 종류의 경건은 바리새인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경건은 사랑입니다. 눈물입니다. 경건은 연애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이외의 이성이 없습니다. 그게 경건입니다. 그것은 사역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순이 뭔지 아십니까? 자기는 경건 생활안하면서 성도들을 경건하게 훈련을 시킨다. 소가 웃을 일입니다. 결국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이사람 설교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 무엇이 그 사유가 언어가 되어서 나와서 자신의 모든 감각적인 것을 가지고 심지어 삶까지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표출되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마지막으로 듣는 사람에게 적용합니다. 설교를 듣습니다. 성경을 읽습니다. 얼마나 많이 읽느냐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느냐 감동을 받았느냐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 말씀이 감각이 되어서 감각적인 수단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그것을 더듬어가서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도달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가 아들아 네 마음을 나에게 주며 아버지가 자기가 갖겠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충만하게 계시니 네가 나에게 마음을 주면 곧 내가 섬겼던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네 눈으로는 내 길을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참 훌륭하게 살았지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이게 아니라 마음을 아버지께 드렸고 그 아버지의 마음은 하나님께 있었으니까 그렇게 드리고 나면 내가 어떻게 아버지처럼 살 수 있을까? 내가 못 살겠지만 흉내라도 내보리라 하는 마음이 자식에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듣는 사람은 훌륭한 청취자가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은 감각적인 도구일뿐이고 그 도구를 계속 더듬어서 마지막에 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설교자 속에 있는 설교자의 마음이 아니라 설교자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 거기에서 진정한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게 결국은 하나님의 마음이 언어로 꽉 차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두 가지 경우에 언어가 마음에 빈 공간이 없도록 꽉 찹니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할 때와 지겹도록 미워할 때 그때 언어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득 채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곧 하나님의 마음에 가득 찬 사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러한 영혼과 언어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살아야될 삶은 일평생 동안에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하신 말씀 중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이고 그리고 하나님 이외에 창조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입니다. 그래서 이 자연의 세계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유의 표현입니다. 또 다른 종류의 언어입니다. 그래서 툴리우스 키케로 같은 사람이 지혜를 정의하면서 지혜는 신들과 인간들의 일에 관한 앎이다 이렇게 보면서 그럼 가장 아름다운 삶은 하나님이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 그 말씀의 확장이신 성경 성경의 확장인 설교자의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 그 담에 그것의 확장인 저술된 수많은 책들 이런 것들을 통해서 감각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마음의 사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더 넓게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삼라만상을 보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언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생각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이런 사람들은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그것들이 언어로 인식이 되어서 주님의 영광이 온 세계에 가득 찬 것을 느끼고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 속으로 사유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유에 대해서 알게 하시기 위해서 사유이자 언어이신 그분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