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의 앎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요9:25)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앎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가 예수께 고침을 받아서 보게 되었는데 그 사람을 둘러싸고 바리새인과 있었던 일을 적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죄인이요 이단이라고 하고 싶었고 또 그래서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눈먼 자를 고쳐주신 것 까지도 안식일에 일을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도 죄를 지은 것이라고 정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만나서 이 맹인에게 취조를 했더니 맹인이 마지막에 한 말이 ‘나는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이 이야기는 하나의 면피성 발언입니다. 진짜 예수님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도 죄인이라고 몰아가려고 하니까 사실 그것은 내가 잘 모른다고 면피성 발언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라고 생각했다고 앞에서 이야기했으니까 결국 그렇게 했으니까 보면 죄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그것은 알지 못하는데 한 가지 아는 것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매우 분명하다는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한 가지 아는 것이 있으니’ 무슨 뜻입니까? 다른 것은 이야기할 수 없어도 이것만은 내가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예전에는 내가 맹인이었는데 지금은 보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해 보이는 여기에서 저는 앎에 관한 성경의 교훈을 끌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15권 12장 21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에게 알려지는 사물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육체의 감관을 통해서 정신이 포착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정신이 그 자체로 진실한 사물들을 아주 확고하게 파악하는 경우다. 쉽게 이야기하면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사물을 아는 것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육체의 감관을 통해서 아는 것이고 육체의 감관이라는 것은 다섯 개밖에 없습니다. 보고, 냄새 맡고, 듣고, 맛보고, 감촉을 느끼는 다섯 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관이라고 부릅니다. 이 오관을 통해서 밖에 있는 사물들을 접촉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정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오관을 통해서 밖에 있는 정보, 크기, 색깔, 모양, 움직이는 소리, 접촉하는 감촉, 입맛, 등등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될 때 그것들을 가지고 우리 속에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섯 가지 중에서 다른 것들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많은 정보를 우리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감각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입증이나 하듯이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이 없었던 시절에는 저녁때마다 틀어놓고 라디오 드라마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연속극을 듣습니다. 지금은 손안에 영상을 가지고 사람들을 잡아끄는데 이것은 조금 지나면 윤리는 사라질 것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망하지 않을 기업 중의 하나가 영상을 가지고 끊임없이 발전할 기업입니다. 왜냐하면 그보다 더 강력하게 인간에게 호소할 수 있는 감각의 수단은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눈으로 보는 것에 압도가 되면서 3D, 4D, 5D 하면서 함께 느끼려고 합니다. 보지 못하는데 영화관에 가서 의자가 흔들리고 바람이 불고 물이 쏟아지는 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호소력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엄청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타락도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보는데서 시작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보니까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게 보이는 시각으로 인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죄를 짓게 되는 것도 어디에서 비롯됩니까? 목욕하는 아녀자를 보는 시각에서부터 강력한 욕망을 끌고 들어오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죄를 짓게 되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돈을 보면서 마음이 끌리면서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뿐만 아니라 항상 고난 받는 시대에 낙심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요한을 통해서 계시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도 설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니’ 하면서 앞에 보는 것으로 압도하게 다가오면서 그것으로 현실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온 정보들을 이 안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크기, 물체의 색깔, 감촉 등 이런 것들이 들어오면 이미 내가 있던 경험을 가지고 이것들을 해석을 해서 정보들을 종합해서 처리를 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그것에 대해서 좋아하는 느낌, 싫어하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때의 감정은 아주 창조적인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보면 같은 커피를 마시는데 열린공간 마당에서 마시는 커피와 에게 해 앞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맛이 다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기 커피가 유난히 맛있습니까? 열린 교회 커피는 세계적인 커피 맛입니다. 어디를 다녀보아도 그만한 커피가 흔치않습니다. 물론 더 잘하는데도 있습니다. 그것은 비쌉니다. 이렇게 저렴한 가격에 편안하게 마실 수 있는 데가 없습니다. 다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눈의 감각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정동이나 느낌이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 어느 호텔에서 상품을 내놓았는데 6명이 식사를 하는데 1,500만원이랍니다. 그런데 물론 거기에는 고급의 포도주도 나오고 맛있는 음식도 나오지만 식사하는 장소가 기묘합니다. 유리로 컨테이너를 만들었습니다. 뼈대를 아주 얇게 해서 유리박스로 완벽하게 만들고 거기에 6명을 테이블에 앉혀서 100층 되는 곳에 크레인에 달아서 허공에 매달아서 밥을 먹이는 것입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짜증이 나겠습니까? 그래도 그 사람들이 돈을 내고 해보고 싶어서 줄을 섭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못 느껴본 정동들을 느껴보기 위해서 그럽니다.
말씀드리려는 요지에서 약간 빗나갔는데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물을 아는 첫 번째 것은 지각을 통해서 물질에 대한 지각과 감각을 통해서 물질적인 감각을 통해서 어떤 지식을 알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식을 얻는 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너무 잘 알고 있으니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첫 번째가 정신이 눈에 보이는 사물을 보고 그것을 지각함으로 해석을 해서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라면 두 번째는 정신이 직접 사물 자체를 파악해서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물이라는 것은 꼭 물질적 사물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도 사물에 들어갑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사물입니다. 그 사물 그 자체를 정신으로 보아서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들이 살아있습니다. 살아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설득해야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있을 수도 있지만 어마어마한 수술에 들어갔든지 사고가 났는데 ‘내가 살았나? 죽었나?’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자기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설득될 필요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나의 정신이 사물을 직접 보고 아는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해석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손이 움직이니까 살았다고 보아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굳이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사랑이 있다면 입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입증해야 할 때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입증하는 것이지 내가 그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입증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한 가지라고 했지만 사실은 두 가지입니다. 내가 예전에 맹인이었다는 사실, 지금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 이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 명백한 사실이고 그것은 나의 감각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 명백한 사실을 분명한 정신으로 직접 보고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예전에 맹인이었다가 지금은 보게 된다는 사실을 입증할 필요가 없이 자신 앞에 자명하게 드러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예를 들어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 때 이것은 바로 전자에 속한 것이 아니라 후자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신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보지 못한 사람은 그 사람을 누군가가 이성으로 하나님을 설명해서 그에게 하나님을 보게 해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고전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논증이 있는데 목적론적 논증부터 우주적 논증, 도덕적 논증 심지어 경계적 논증 등등이 있는데 개혁자들의 생각 특히 헤르만 바빙크 같은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쓰지 말라고 합니다. 예외적으로 꼭 써야할 때는 뭐냐 하면 너무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들이 기승을 부려서 그것이 너무 불길 같아서 그것을 어느 정도 끌 필요가 있을 때 사용하는 것이지 그것으로써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감각으로써 우리들이 사물을 이해하고 아는 것처럼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으로 그것을 직접 봄으로써 아는 것인데 감각으로 보고 아는 것은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사물을 많은 사람이 보아도 각기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다른 증언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정신이 직접 그 사물을 파악해서 아는 경우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너무나 명료하기 때문에 그것을 본 모든 사람들이 같은 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이렇게 사물을 물질적인 사물은 감각으로 보지만 이렇게 정신이 감각적이지 않은 사물을 보는 것 특히 하나님을 보는 수단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믿음 그 자체가 내가 보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 사람이 하나님을 포함해서 자기 밖이 있는 사물들을 잘 인식하고 인생의 의미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입니다. 감각을 통해서 보는 것들을 정확하게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그 다음에 믿음으로 하나님을 뵈옵고,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고,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 그래서 그 두 의미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연결해서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 이것이 참된 인생을 사는 가장 중요한 비결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잘 믿는 마음의 경영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극대화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많이 사랑할 때는 그 자체가 마음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경향이 있고 하나님을 잘 믿을 때 이런 초자연적인 영적인 사물이나 하나님에 관한 이해가 아주 뛰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을 정도로 너무나 분명하게 우리에게 다가와서 기다려보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모두 나중에 보이지 않지만 명확했던 것에 대해서 그것이 왜 그랬는지를 증명해 주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구조를 가지고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눈에는 아무 증거가 없고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은 상황 속에서 그렇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더 믿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것을 정신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증명할 필요 없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에 그 약속을 붙들고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약속을 한번 받고 항상 그렇게 열렬히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분명히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지 못하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는 내 앞에 완전 하라.’ 그 말씀을 들어야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찌하든지 이렇게 우리의 정신이 직접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포착하고 증명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그것이 나의 삶 전체를 주관하고 움직이는 하나의 골격이 되도록 그렇게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이유도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갖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해야 할 이유가 분명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요즘과 같이 어려울 때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인도하실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것이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