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하였기에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민 12:6-8)
녹취자 : 김세나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한번 구약성경 본문을 사본 비평하는 것을 한번 시범을 보여 주겠다고 하였는데, 시간이 안 되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한가하지도 않고, 그런데 오늘 아침에 와서 말씀을 준비하다가 이것은 한번 들려주면 좋겠다, 이것은 아무 데서나 못 들어볼 이야기이니까 한번 들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짧게 사본 비평을 통해서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메시지를 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신대원 다닐 때 옆에다가 써 놓은 것입니다. 추억의 성경입니다. 더 이상 안 커지는 것 같습니다. 이정도로 해 놓겠습니다.
:אוּהֽ ןמָ֥אֱנֶֽ יתִ֖יבֵּ־לכָבְּ השֶׁ֑מ ידִּ֣בְעַ ןכֵ֖־אלֹ (7절)
7절 אלֹ(로) 이것은 ‘아니다’라는 뜻이고, ןכֵ֖(캔) ‘그렇다’는 뜻입니다. ‘not so’ 의 의미입니다. ידִּ֣בְעַ(아브디) 이것은 ‘에베드’라는 종에다가 1인칭 서픽스를 붙여서 ‘나의 종’입니다. השֶׁ֑מ(모세). ‘나의 종 모세와는’ 이것은 탈격으로 쓰이면 이러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았단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너희 중 선지자가 있으면 이러이러한 식으로 환상도 보이고 하였는데,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לכָבְּ(베콜) יתִ֖יב(베티)라고 했습니다. ‘베’는 ‘~안에’, 그리고 ‘콜’은 ‘all’. ‘베티’는 ‘베트’에 1인칭 서픽스가 붙여서 ‘나의 집’이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나오는 ‘베트’가 그것입니다. ‘집’입니다. 해석을 해 보면, “나의 콜, 모든 집 안에서”. :אוּהֽ(후), 맨 뒤에 ‘후’ 그것은 ‘he’입니다. ‘그가’, ןמָ֥אֱנֶֽ(네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분사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되는데, 하나는 ‘지금 현재 충성하고 있다.’는 진행형입니다. 그렇게 해석도 되고, 다음은 ‘옛날에 충성하고 있었다.’라고도 해석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해석은 무엇 같습니까? 현재 진행형이겠습니다. 정리해보면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스럽다. (혹은 충성하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설명해보면 길지만 다음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השֶֽׁמֹבְ ידִּ֥בְעַבְּ רבֵּ֖דַלְ םתֶ֔ארֵיְ אלֹ֣ עַ֙וּדּ֙מַוּ טיבִּ֑יַ הוָ֖היְ תנַ֥מֻתְוּ תדֹ֔יחִבְ אלֹ֣וְ ה֙אֶרְמַוּ ובֹּ֗־רבֶּדַאֲ הפֶּ֞־לאֶ הפֶּ֣ (8절)ְ
הפֶּ֞־לאֶ הפֶּ֣ : הפֶּ֣(페) הפֶּ֞־לא(엘페), ‘페’는 ‘얼굴’입니다. 얼굴은 원래 파닌, 복수로 쓰는데, 여기서는 단수로 나왔습니다. ‘페 엘페’, 이것은 ‘얼굴이 얼굴에 대하여’라는 뜻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면서”. ובֹּ֗־רבֶּדַא(아따벨), ‘다바르-말하다’입니다. ‘아따벨-나는 말한다.’ 현재형입니다. וב(보), ‘그 남자 속으로’입니다. 두 번째에 이제 문제가 되는 단어가 나오는데, ה֙אֶרְמַוּ(우마르에)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번역이 되지 않습니다. ‘마르에’는 뭐냐 하면 용모입니다. “용모가 준수하였더라.”할 때의 ‘용모’입니다. 생김새. 그러면 번역을 하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나는 그에게 (혹은 그 사람 마음속으로) 말한다. 그리고 용모”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빨간 표시한 곳에 a라고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논쟁이 된다’는 뜻입니다. 사실은 저러한 것을 다룰 수 있어야지만 히브리어 본문을 확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밑에 ‘아파라티쿠스’로 넘어갑니다. 요새 이것을 해 주는 사람 없습니다. 내가 특별히 교역자들에게 서비스 해 주는 것입니다. 8a 이 밑에를 비평 장치라고 합니다. 비평장치는 이 학자들이 활용 가능한 수백 개, 수천 개의 사본들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접근도 불가능합니다. 그 사본들과 역본들을 놓고 저 구절 하나를 기본적으로 여기의 텍스트가 된 메인 텍스트는 12세기 레닌그라드 사본 b 29 a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형태가 두루마리 형태가 있었고, 코덱스라고 하는 책으로 만든 형태가 있었는데 그 코덱스 성경은 종합적입니다. 성경 전체를 묶었으니까 말입니다. 그것이 가장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그 텍스를 메인 텍스트(베이스 텍스트)로 쓰고 그것이 신뢰할만하다고 놓고 보고 다른 사본들을 쭉 놓고 단어 하나하나를 비교하면서 이것이 진짜 100% 맞는 것인가 논쟁을 하는 것이 바로 이 비평장치입니다.
그러다가 1940년대에 알레포의 회당에서 구약 전체가 온전히 있는 사본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알레포 사본입니다. 계산을 해 보니까 11세기입니다. 사본의 역사에서 1세기가 앞섰다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진보입니다. 그 텍스트를 사진을 좀 찍자고 했더니 알레포 회당에서 절대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사진을 찍으면 사본이 상하니까, 조상 대대로 간직한 것인데 절대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불이 났습니다. 그래서 일부가 타버렸습니다. 그때서야 부랴부랴 사진을 찍었고, 그 텍스트를 메인으로 하여 발간되고 있는 것이 1960대부터 100년 계획으로 구약성경을 발간하고 있는 “Hebrew University Bible”, “HUB”라고 하는 프로젝트인데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들어가는데, 나와 학자들의 생각이 100년에 절대 못 끝낸다고 봅니다. 지금 60년 정도 흘렀는데, 한 10권 정도도 채 못 나왔습니다. 첫 번째 책 이사야 일부가 나오는데 20년이 걸렸습니다. 그 대신 밑에 나오는 ‘아파라티쿠스’, 저 장치가 저것보다 한 세 배 내지 다섯 배가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탁 읽으면서 ‘예수님 오시는 날까지 이 이상의 성경은 안 나오겠구나.’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8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a는 표시이고, pc는 뭐냐 하면 파우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드물게 나타난다’라고 해석합니다. 모두 라틴어 약자입니다. Mss는 뭐냐 하면 ‘manuscript(메뉴스크립트)’입니다. 많은 메뉴스크립트, 손으로 쓴 사본에 드물게 나타난다. 어디에? 처음에 나오는 것은 소라표시가 있습니다. 소라고동은 ‘Septuaginta(셉투아진트) ; 70인역’입니다. 주전 250년 경 알렉산더대제 때 전 제국에 헬라어를 공용화시키기 위해서 유대인 학자를 지파별로 6명씩 파송시켜서 알렉산드리아에 모여서 정부의 전적인 후원 아래 구약 그리스어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이렇게 표시가 됩니다. 이 밑에 있는 것은 시리아역입니다. 시리아역은 당연히 시리아 어로 번역된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주후 1세기경쯤이 될 것이라 추측을 합니다. 그 다음에 그 밑에 있는 t자 같이 되어 있는 것은 ‘탈굼’입니다. 탈굼은 언어가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로 되어 있습니다. 아람어는 원래 유목민족 시절 때 쓰던 언어인데 베니키아어와 서로 연관이 되면서 메소포타미아 지역 전체를 지배하는 언어가 되고, 그 이후에 외교 공용어가 될 정도로 보편화가 되고 예수님 시대에도 사람들이 아람어를 썼습니다. 예루살렘이 파멸되고 디아스포라들이 다 흩어졌을 때 그 사람들이 아람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아람어와 히브리어는 전혀 다르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사뭇 다릅니다. 문법도 따로 해야 하고, 단어도 문법도 조금씩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 구약성경에서는 창세기의 한 구절, 에스라서 4장-6장, 그리고 다니엘서 7장 28절부터 후반부까지가 아람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 아람어는 굉장히 오래되었습니다. 그러한 데에 보면 드물게 뭐라고 나타나는가 하면, ‘베’-이표시 이것은 뭐냐 하면 생략한 것입니다. 뒤에는 똑같고 앞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해석이 참 잘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입니다. 갑자기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형상.”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아까 그 비평 줄을 따르면 이것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형상 안에서 혹은 모습 안에서”라고 번역이 됩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드물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다가 답답하니까 이상하게 말이 안 되니까, 아마도 ‘우’를 ‘베’로 싹 바꿔 놓은 것입니다. 그것을 다 비교하면서 원래 원본이 무엇이었을까 작업해 내는 그 과정을 통해서 원래 본문을 확정하고 그 다음에 번역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골 아픈 것입니다.
다시 한번 해보겠습니다. “나의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나의 온 집에 충성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며 나는 그에게 (혹은 그 속으로) 말하였고 그리고…” ה֙אֶרְמ(마르에)라고 나오는데, 우리말 성경에서는 뭐라고 번역을 하였습니까? “명백히”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구약학자들 입장에서 보면 참 그렇습니다. 재미있는 것이 뭐냐 하면, 다음을 보십시오. 아주 재미있습니다. 여기로 넘어갑니다. 여기에 꽈배기 모양이 나옵니다. 요새 꽈배기 붐입니다. 꽈배기 모양이 나오는데, 꽈배기 모양이 뭐냐 하면 사마리아 오경입니다. 이것은 북왕국 사람들이 나라가 망한 다음에 사마리아 사람들을 안 쳐주니까 못 내려오게 합니다. 피를 더럽힌 족속이라고 하며 못 내려오게 합니다. 그 사람들이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 배경이 요한복음 4장에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 나옵니다. 그것이 아마 주전 4세기경쯤 될 것이라 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마리아 오경이 만들어집니다. 사마리아 오경은 히브리어이기는 하지만, 해석학적인 것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말하자면 유대인들에게 무시당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해석을 막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저것은 성경으로서의 가치보다는 무엇인가 그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이 어떤 콤플렉스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려 하였는지에 대한 것을 잘 보여 줍니다. 굉장히 유용한 자료입니다.
그 다음을 보겠습니다. 여기에 미묘한 것이 나옵니다. 여기 사마리아 오경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뭐라고 읽어야 하는지 보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것이 빠져나가고 이것은 똑같은데 이것이 이렇게 된 것이 하나 더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모음 표시를 안 하였는데, 이것을 딱 보면 ‘마므레’라고 나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관련해서 나오는 상수리가 있는 마므레가 여러 번 나옵니다. 그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것은 장소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북쪽 지방입니다. 그러니까 아,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하셨을 때 유대가 아니라 마므레에서 말씀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할 때 의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 밑에 prp라고 나오는데 프로테아제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한 사람이 다 한 것이 아니라 창세기 누구누구 했는데, 대부분 이제는 다 죽었습니다. 그 사람은 생각하기를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이렇게 제안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하면서 ‘베 오멜라’라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르’ 동사의 1인칭입니다. “나는 말한다.”고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올라가 보면… 복잡하지 않습니까?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멜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잘 보십시오.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나는 그에게 말하고…” 이 ‘다발’은 같은 ‘말하다’인데, 이것은 음파가 울리면서 소리가 나는 말입니다. 내가 지금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밑에 나오는 것처럼 이것이 만일 ‘아멜라’가 된다면 예를 들어서 이것입니다. “강팀장!”하면서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문을 열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은 ‘아마르’입니다. 혼자서 고요히 생각하는 것 또한 ‘아마르’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혼자 계시는데 누구에게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때 쓰여진 단어가 바로 ‘다바르’가 아니라 ‘아마르’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식 속에서 홀로 대화하시는 것도 그렇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의미가 아주 분명해집니다. 뭐라고 할 수 있는가 하면,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나는 소리나게 그에게 말하였고 또한 생각으로도 말하였느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것을 받아들이겠는가 하는 것은 자신이 종합적으로 판단을 하면서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위험한 것입니다. 정확하게 학문적으로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조금 지루합니까? 이제 끝나갑니다.
다음에 dl 이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델렌둠’이라는 라틴어의 약자입니다. ‘본문이 훼손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훼손되었는데, 그런데 괄호에 gl ad라고 적혀 있습니다. gl은 뭐냐 하면 glossarium(글로사리움)입니다. 말하자면, 단어의 형태들을 모아놓은 단어집 상으로 볼 때, ad 이것을 표시하려고 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우태무나’라고 나옵니다. ‘태무나’는 형상입니다. 그래서 결국 본문이 지워져 있지만, 그러나 아마도 ‘마르에’가 아니라 ‘태무나’일거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석이 변하는가 하면 이렇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나는 그에게 말로 하였고 그리고 형상”이라고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마르에’와 ‘태무나’의 차이가 있지만 뒤에 ‘태무나’가 또 나옵니다. 그래서 ‘마르에’는 훨씬 물리적인 모양이고, ‘태무나’는 정신적인 특성을 많이 가리킵니다.
다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하면 끝납니다. cf b 라고 되어 있습니다. b를 참고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cf(confer, 컨퍼) b가 뭐냐 하면 여기에 보면, b가 나옵니다. 셉투아진트, 그리스 성경입니다. 이것은 시리아어. 시리아어를 그리스어로 해석하였을 때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καί τήν δόξαν(카이 텐 독산)”이렇게 실려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이라고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cf(confer-컨퍼), 참고하라. 탈굼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고 표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면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해석을 해 보겠습니다. “나의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였나니 왜냐하면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하였음이라.” 왜 ‘온’이라는 말이 들어가겠습니까? 사역을 할 때 자기가 좋아하는 사역이 있고, 자기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사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을 유익하게 하는 모든 것을 위해서 충성하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그 다음에 홍해를 건너게 하십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세례받은 것으로 묘사를 하고, 또한 한 반석에서 물을 먹은 것을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공로를 힘입은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면 홍해를 건너면서 한 세례를 받으면서 하나님은 그림 같은 생생한 방식으로 그들을 모두 하나의 가족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한 번 더 구체적인 형태로 가족의 연대로 묶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길갈에서 행한 할례의 장면입니다. 홍해를 건넌 것은 단순히 애굽에서 탈출해서 도망을 친 것이 아니라 물속을 지나게 하시면서 그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묶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어떠했겠습니까? 출애굽기 12장 32절에 보면 ‘에레블레브’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많은 종족들’입니다. 이스라엘 족속들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족들입니다. 그들 중에 흑인도 있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족들이 따라 나온 것입니다. 왜 입니까? 그들이 여호와의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믿음이 생겨서 따라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탈출할 때 보면 굉장히 무모하였습니다. 가야할 목적지도 없고, 무조건 도망치는 것인데 사실 애굽의 생활이 훨씬 더 안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따라 나왔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종족들이 있었는가 하면, 바로가 히브리 사람만 데려다가 애굽에서 노예를 삼은 것이 아니라 하여튼 전쟁에서 이기고 잡아온 놈들은 모두 데려다가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모두 데려다가 노예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종족이 당연히 같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옛날에 서구 사람들이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할 때, 아프리카도 한 종족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얼굴을 볼 땐 얼굴이 다 까맣기는 하지만 생김새가 다 다르고 종족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특정 종족만 잡아오겠습니까? 그냥 다 무조건 잡아다가 노예로 데려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만 많은 것이 아니라 여러 종족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이야기 하면, 그 종족들이 ‘아, 여기 힘드니까 얘네들 따라가면 쉽겠구나.’ 하면서 따라온 것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왜 입니까? 아무 비전도 없고 전망도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으니까 우리는 간다!” “우리는 약속의 땅으로 간다!” 어디입니까? 가나안이다. 가나안 어디? 그 사람들 중에 가나안을 가본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학자들이 내리는 평균적 해석은 그냥 우루루 따라간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내리는 열 번의 재앙을 보면서 서로 피부 색깔도 다르고 종족도 다른 이 사람들 속에 ‘야훼만이 참 신이구나!’라고 하는 믿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고 하는 것은 이야말로 세기를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복음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을 모두 한 세례를 받게 하셔서 그래서 거기를 통과한 다음에는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집으로 취급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 안에서 한 식구로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증거가 뭐냐 하면, 얼마 있다가 한두달 쯤 있다가 갖고 나온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때에 식탁을 베푸십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 있는 사람은 차별이 없이 누구든지 새벽에 나가서 만나를 먹게 하신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트’가 함의하고 있는 의미입니다. 굉장히 그림이 아주 크게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에서 나오는 하나의 단어를 가볍게 보지 말고 깊이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냥 깊이 하자, 깊이 하자 하면 이상한 상상이 나와서 교주가 되기 싶습니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그러한 단어의 의미들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단어 스터디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러한 작업을 한번 해달라고 스터디들에서 엄청 많이 졸랐습니다. 5년 동안 한 번도 못했습니다. 오늘 제가 해 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베트’라는 발이 나왔습니다. “나의 온 집에 충성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아직도 할말은 무지하게 많습니다. 내가 4주를 해도 이 텍스트를 다 하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ןמָ֥אֱנֶֽ(네에만)’이라는 단어만 설명을 해도 30분을 설명해야 합니다. 저 텍스트를 놓고 나는 설교를 한다면 6주 내지 8주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저 한 구절을 보고 나면 구약 역사 전체가 확 열리면서 하나님의 집의 개념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을 걸쳐서 그리스도의 교회, 천국 집에 모두 모이는 가족들의 귀향까지 보괄하는 엄청난 신학적인 개념들이 저 안에 묻어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냥 맛만 보여 드린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더 이상 하지 않겠습니다. 하면 한이 없습니다. 제가 오늘 이것을 끄고 말씀을 드리려고 하면, 성경이 오늘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모세를 대적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이 말하였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주동자가 되어서, 사실은 모세 입장에서 보면 그 두 사람은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미리암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리고 아론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자신이 어떻게 백성들을 설득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둘 다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모세에게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더냐?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셨더냐? 우리도 선지자다. 이와 같이 대든 것입니다. 그런데 대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기억납니까? 모세가 구스여자를 취하여 결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구스는 에티오피아입니다. 100% 흑인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미리암과 아론은 그렇게 헌신하였으면서도 이 ‘베트’의 의미를 몰랐던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왜 장가를 갔는데도 왜 또 가는가 하는 윤리학적인 문제가 되지만,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지시하지는 않으셨어도, 두 번 장가가라 세 번 가라 하지 않으셨어도 아마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이었을 거라 보는 것입니다. 인구가 너무 작은 그 속에서 근친결혼이라든지 이러한 것들이 허락이 된 하나의 임시적인 윤리라 보는 것입니다. 어쨌든 모세가 보기에는 같이 물 가운데 통과하였고 한 베트의 사람들이 되었으니 피부색은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오류를 가지고 그렇게 편견을 가지고 이 문제를 가지고 모세의 리더십에 대항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않았으니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그와 말하였고…” 하나님에게 얼굴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굳이 아까 그것을 해석하면 ‘우마르에’를 “그리고 모양으로써”라고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앞에 나오는 “말하였고”가 생략되었다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해석이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그것은 뒤에 형상도 보았다고 나오는데, 다 종합해서 퉁 쳐서 말하면, 너희에게도 환상을 보였고 꿈에도 나타났지만 그러나 어차피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지만 그래서 모세에게는 하나님이 나타났다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 나타나 보여지는 형상도 단계가 있는데 훨씬 더 높고 신령한 단계의 모양으로 ‘테무나-모양으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실체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시간과 장소 안에 거기 계시다는 사실을 피조물들을 움직여서 나타내 보여주시는데, 그 수준이 미리암과 아론을 비롯한 선지자들이 소통하는 수준과 모세가 소통하는 수준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마지막입니다.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선 첫째는 “충성하였음이라.”입니다.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오늘은 여기에서 마칩니다. ‘ןמָ֥אֱנֶֽ’(네에만). 원래 이 말은 분사인데, ‘아만’에서 왔습니다. ‘아만’은 뭐냐 하면, ‘아멘’도 거기에서 왔습니다. ‘아만’은 ‘든든하게 하다. 굳건하게 하다.’라는 의미인데, 거기에서 ‘오므나’라는 여성 분사가 나오는데 ‘젖 먹이는 유모’입니다. 왜 ‘아만’ 동사와 관련 있는가 하면, 유모가 아이를 끌어안고 젖을 먹임으로써 이 아이가 튼튼하게 자란다는 그 뜻입니다. 그래서 ‘든든하다’라는 말에서 ‘아멘’이 오는 것입니다. certainly, 확실히 반드시 그러하게라는 부사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ןמָ֥אֱנֶֽ(네에만)이라고 하는 것은 ‘충성하되 견고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가끔 자기가 필요할 때 나에게 선물을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비서실에 이야기 합니다. 충성도 가끔 하면 아부가 되고 아부도 시종일관 수십 년을 계속하면 충성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나을 지는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서 결국 충성되다라는 말이 여러 단어가 있는데, 그 단어를 쓴 이유는 흔들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인간에게 왜 감정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왜 괴로운 때가 없겠습니까. 기쁜 때가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고통스러운 때가 왜 없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담임목사인 나도 몇 번을 그만하고 싶은 때가 있었는데 여러분은 왜 안 그랬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만 둡니다. 그런데 모세는 안 그랬는가 하면, 뭘 안 그랬습니까. 오죽하면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 내가 이 사람들의 오므나 입니까?”라고 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낳았습니까?” “내가 이 사람들의 유모입니까? 왜 나에게만 그러십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뭐라고 합니까? “절 죽여 주십시오. 충분히 살았나이다.”라고 합니다. 그 위대한 사람조차도 그렇게 괴롭고 견딜 수 없었던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러한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저 너무 힘듭니다.”라는 이야기와 힘들다는 이야기 일체 없이 힘든지 물어도 “아니요” 하면서 슬슬 고무신 거꾸로 신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힘들어 죽겠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계속 하는 것은 변함이 없는데 힘이 든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웃기는 말로 번역하자면, “모세는 생각으로라도 고무신 거꾸로 신을 생각을 한 적이 없느니라.”고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때가 되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모세를 퇴장시키십니다.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시고, “거기는 네가 갈 데가 아니다. 너는 내게로 와라.” 그래서 죽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사람은 생각으로라도 고무신을 거꾸로 신을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모세는 하나님 앞에 확실하게 인정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사람은 여러분들이 충성하는데도 사람들이 몰라줄 수도 있고, 심지어는 심각하게 오해할 수도 있고, 평가를 잘못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직장 다니면서 항상 최고 평가를 받았습니다. 근무평점에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동료보다도 일찍 승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에 손을 얹고 한번도 아부하지 않았습니다. 밥한번 누굴 사주지 않았습니다. 승진한 다음에는 내가 사줬습니다. 그런데 주위에서 자기한테 직장생활하면서 제일 어려워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자기가 올바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농땡이, 저 무능한 놈, 맨날 가서 자기 상사 밥 사주고, 구두 닦아주고, 차 사주고, 온갖 딱가리 다 해주고 점수 잘 받는 사람들 보면서 분통이 터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도 역시 인간들이니까 그렇게 사람들이 올바르게 평가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니까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하고 표정이라도 밝게 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이야기 하고 싶지, 항상 뭐가 심통이 난 것처럼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과 마주하고 싶겠습니까? 인간의 정이라는 게 그러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얼마든지 오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모세는 사람들 때문에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소명 때문에 ‘ןמָ֥אֱנֶֽ(네에만)’이라고 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네에만. 그래서 요동치지 않는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 때문에 거기에 꼿꼿이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어떤 식으로 충성했는가 하면, 하나님의 집에 한 부분에 충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하였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 얼굴 나타내는 일, 칭찬받는 일, 영광 받는 일, 달콤한 유익이 있는 일, 그 일에만 헌신한 것이 아니라 목적 자체가 하나님의 집 전체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그렇게 백성들을 재판하는 일에 공들였던 일도 그것이었습니다. “내 백성들 가운데 누구도 불공평한 판결로 찌그러지거나 고통 받거나 상처를 받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그것을 끌어안고 그 모두를 끌어안고 가는 것입니다. 지도자로서 중요한 것이 그것입니다. 당연히 내 편과 다른 사람 편이 있겠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는 그 모든 사람을 자신의 품 안에 끌어안고 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집에, 나의 온 집에 충성하였느니라.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 모든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부분입니다. 목회, 미디어, 행정, 안내, 청소, 건물관리, 안전관리…. 다 쪼개져 있습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일부를 하면서도 관심 자체가 하나님의 집 전체가 유익을 얻는 쪽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일했으나 결국 하나님의 집 전체가 자신의 섬김을 통해서 유익을 얻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그렇게 충성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무엇을 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난관에 처했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이스라엘 온 백성이 부르짖으면서 불평하는 그 큰 목소리보다는 모세가 신음하면서 기도하는 그 가녀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특별히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백성들을 이끌어 가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 이외에 자신의 편이 없습니다. 항상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 그 하나님이 내가 당신의 집에 온전히 충성할 때 그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최고의 상급은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나에게 들리는 음성으로 말씀하시고 당신의 마음으로써 말씀하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시는 것과 비교되지 않는 신령한 은혜의 경험 속에서 나에게 말씀해 주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때에 그 신령한 교제 속에서 한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나오는 말씀이 아닌 것들은 결국 다 종이로 만든 화려한 꽃과 같아서 보기에는 진짜 꽃보다 더 예쁘지만, 일체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향기도 없습니다. 시들어 가는 그러한 부패도 없지만, 그러나 생명 그 자체도 없습니다. 그러한 속에는 사람의 심령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근본적인 말씀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원고를 적을 때, 그 원고는 피와 골수와 진액을 모두 섞어서 그 사람의 손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8절과 9절을 10분의 1정도 해설을 하였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