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자의 교만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6)
녹취자 : 김세나
여기에서 게으름의 친구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앞의 두 친구는 핑계와 나태였습니다. 나태는 ‘페카타세툼모탈리아’, 직역을 하면 죽음에 이르는 일곱 대죄가 됩니다. 그 자체가 죄이지만, 그 것들이 많은 죄를 생산하고 새끼를 치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삶을 죽음으로 데리고 가는 일곱 대죄가 있는데, 놀랍게 살인은 그 속에 안 들어가도 나태는 그 안에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핑계와 나태가 게으름의 친구고, 또 다른 두 친구를 소개하는데 그 중 하나를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열정 없음’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열정이 없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서 뿐만 아니라 사람을 향해서도 열정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의 삶은 정말 재미가 없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재미라는 것이 느끼는 것 아니겠습니까? 불의한 일을 만나면 정의감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분하게 느끼고, 슬픈 일을 만나면 자비심 때문에 너무 가슴 아파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 때문에 가슴이 뛰고, 이러한 것이 삶의 재미입니다. 이것들이 가치 있는 사슬에 잘 연결되어서 삶이 전개될 때에 거기에서 삶의 아름다운 가치와 보람이 생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없습니다. 열정이 없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말씀 드렸듯이 25년 전에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에는 빗나간 열정을 질타하는 데에 제 저작의 상당부분을 할애하였습니다. 지금은 빗나간 열정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정도로 아주 냉담한 시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감각적인 것에 우리의 마음이 쏠리니까 거룩한 열정이 솟아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심지어 그러한 열정을 가지고 사는 것 자체가 다 쓸데없는 삶이라고 그렇게 말하자면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미 자기가 승리한 사람이고,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오늘 네 번째로 살펴 볼 것은 이 게으름의 마지막 네 번째 친구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교만’입니다. 교만.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여기에서 일곱은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완전수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문맥에 맞게 기가 막히게 번역을 하자면, “모든 사람이 그것이 맞다고 만장일치로 통과시켜도 게으른 자는 그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일곱보다 자기가 훨씬 지혜롭다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의 특징은 누구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듣지 않는다는 말, 이 뜻이 주관이 뚜렷하기 때문에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판단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한번 논리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왜 게으른 사람은 이렇게 판단력이 뚝 떨어져 결국 쥐꼬리만큼도 교만할 것이 없는데 그렇게 자기의 판단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교만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사람들이 잠언을 참 잘못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처세술을 위한 요령을 담아 놓은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안 되고, 이 책 자체가 구원론적인 의미를 함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들으면 그럴 것입니다. ‘잠언에 무슨 구원론적인 함의가??’ 아닙니다. 구원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영혼이 될 때, 그들에 의해 전개될 삶이 어떤 삶일까 하는 것을 하나님이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각도에서 이 잠언에 나오는 모든 지혜로운 삶의 태도를 구원론 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행하면 구원을 받는다, 이 뜻이 아니라 구원론에 있어서 성화론 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구원 받고 성화된 사람, 구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게으르게 살 수가 없습니다. 살 수 있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도대체 왜 게으른 사람은 결국 이렇게 판단에 있어서도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교만해지는가? 이것이 결국 실제로 이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 일곱 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에 교만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판단을 잘못하였기 때문에 교만한 것 아니겠습니까? 왜 이러한 판단의 오류가 나오는가? 그것은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지혜가 없겠습니까? 잠언 1장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인간은 지혜롭게 됩니다. 정신이 상승해서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고, 거기에서 다시 하강하면서 그 모든 것을 판단할 때, 정확하게 판단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는 지혜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로운 사람 일곱이 만장일치로 대답을 해도 그것보다 자신이 훨씬 더 낫다고 하는 그릇된 주관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교만으로 나타나는데, 라틴어로 ‘수페르비아’(supérbĭa)라는 단어입니다. 그리스어로는 ‘휘브리스’(ύβρις)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들은 설명을 들어서 이미 알겠지만, 죄의 두 뿌리가 있습니다. 가장 큰 두 뿌리는 자기 사랑과 교만입니다. 자기 사랑은 의지와 관련이 되고, 교만은 지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교만해지면 결국 지성적인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교만하여 결국, 하나님이 무엇을 우리에게 명령하시면 그것보다는 나의 판단이 훨씬 더 낫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자기를 따르는 것이 곧 교만입니다.
그래서 보면 이것을 입증하는 사건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시고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와가 두 가지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첫째는 자기 사랑입니다. 욕망을 가지고 보니까, 보암직하고 먹음직 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자기 사랑이라면, 하나님이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먹어도 죽지 않고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하는 사단의 꼬임을 받아들인 것은 그 자신이 내린 판단이 하나님 판단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교만입니다. 결국 그 이후로 이 두 가지, 교만과 자기 사랑이 끊임없이 인간 속에 전수되어 내려오면서 인간이 결국 그 두 가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만난 게으른 모든 사람에게는 아주 아름다운 충고가 쓸모가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충고를 해 주어도 그는 자신의 생각을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해서 좀처럼 굴복하지 않습니다. 물론 부지런한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미련한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게으른 사람은 쉽게 다른 사람과 소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법도 별로 없고, 감동을 받는 적도 별로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게으른 사람의 정체입니다. 놀랍습니다. 태생이 게으른 사람은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어떤 신앙적인 삶에 대해서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려도, 게으른 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그런 삶을 살고 싶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삶이 자신의 인생의 이상도 아니기 때문이고, 무엇을 보든지 비판하면서 다른 면들을 부각시키는 것이 게으른 사람의 특징입니다. 누군가의 아름다운 삶을 보면서 가책을 느끼는 사람은 모두 그 아름다운 삶의 의미를 터득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공동생활의 형제단의 창시자인 루이스부로에크(Ruysbroeck)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는 자가 아는 자다.” 당연히 게으른 사람에게는 눈물이 많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자신에 대한 뼈저린 후회, 반성, 이러한 것들은 모두 부지런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구원의 의미를 알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합니다. 게으른 것은 잘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면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잘 가르쳐 주면 부지런해 질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게으름은 그것보다는 자신의 본성 속에 깊이 베인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은 눈치가 없습니다. 그리고 게으른 사람은 쓸모가 없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열을 가르쳐 줘도 한 둘 밖에 기억을 하지 못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기본적으로 목표에 마음이 불타는 열정이 없습니다. 게으른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 보십시오. 닮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가서 물어 보십시오. 사업을 하는 게으른 사람에게 찾아가 “당신이 뼈저리게 존경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물어 보십시오. 없을 것입니다. 공부하는 게으른 사람에게 “너는 누구처럼 되고 싶은 갈망하는 학자가 있습니까?” 물어 보십시오. 없을 것입니다. 게으른 목회자가 되는 사람에게 “어떤 목회자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물어 보십시오. 아마 없을 것입니다. 닮고 싶고, 하고 싶고, 그리고 무엇의 희생의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렇게 되고 싶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예화) 어제 총신 학생들과 수업을 하였습니다. 여러분도 들었을 것입니다. 야구 선수로서 이것을 수술을 해서 2cm인가 잘라서 손가락이 마디가 짧은 사람이니까, 잘라서 자유롭게 볼을 던질 수 있도록, 특히 포크볼이나 커브볼은 이 손가락 길이가 굉장히 좌우합니다. 이것이 충분하면 볼을 스핀을 먹일 수 있는 길이가 길어집니다. 그런데 짜리몽땅하면 변화구가 안 나옵니다. 이것을 자르고 그렇게 기뻐했다는 이야기를 강론 속에서 하였습니다. 자매 한 명이 자기 그 예화를 들으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정말 자기 자신에게 하나님을 위해서 2cm를 성형수술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다르게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자매 학생이 울었다는 이야기는 ‘너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생각하였습니다. 진짜 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이야기를 들을 때에 그러한 감동을 못 받습니다. 보십시오. 제가 이름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김 씨입니다. 우리나라 굉장히 투수의 역사를 쓴 사람입니다. 김 씨입니다. 그런데 심지어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기한 마구를 계발을 해서 공이 날아오는데 배트를 치면 공이 배트 위에 뜨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동안 타자들이 그 공을 연구하느라…, 그래서 그 공을 치면 배트와 닿을 때쯤 되어서 위로 붕 뜨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참 동안 타자들이 그 공을 연구하느라 노심초사 하였던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것입니다. 목표를 위해 불타는 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화) 우리 교회 있었던 자매인데, 이름은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잘 해서 연세대학교를 들어갔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몇 달을 입원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서울대 들어갔을 것입니다. 연대를 들어갔습니다. 동생 이야기 하는데, 동생이 6등을 했다고 했습니다. 6등을 하였어도 잘 한 것 아닙니까? 우리들은 아직까지 6등까지 가본 적도 없는데 말입니다. 동생이 6등인가, 7등인가 했다고 하니까 동생에게 하는 말이 “야, 너 앞에 너 보다 잘 하는 애들이 6명이 있다고 하는 것이 끔찍하지도 않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게으른 사람에게는 그러한 것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이 한 순간을 누가 나 안 괴롭히고 편안하게 지내면, “That’s ok.”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그리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기회가 주어져도 기회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발전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고 모든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신령한 능력으로 준비되지 않았더라면, 왕이 그것을 발표할 기회를 준들 그래서 못 나갔거나 아니면 처형을 받았거나 하였을 것입니다. 준비된 사람들에게 오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기본적으로 교만합니다. 정확하게 자기 자신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물건을 강탈하고 폭행하고 누군가를 미워한 죄에 대해서는 회개를 종종합니다. 그러나 게으른 죄를 회개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진짜 주님을 만나고 그리고 내 인생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마지막에 도달하는 결론은 내 인생의 가장 커다란 대죄는 한정된 시간을 낭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대게 주님 안에서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 소통도 잘합니다. 그래서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을 상대화합니다. 그리고 다른 시각에서 봅니다. 그래서 인생을 입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방향이 마련되게 됩니다.
(예화) 이건희 회장이 이러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영화를 3년 동안에 1300편을 보았다고 하니까, 매일 한편씩을 본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재미로 봅니다. 그게 아니라 하루는 감독의 입장에서 보고, 또 한편은 주연의 입장에서 보고, 또 한편은 엑스트라의 입장에서 보면서 입체적인 사고의 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쓸모없는 사람 셋을 지목하였다고 합니다. 첫째는 배우려고 하지 않는 자, 버려라. 배우려고 하지 않는 자, 버려라. 두 번째, 버릇없는 자, 버려라. 세 번째, 배알 없는 자, 버려라. 세 부류의 사람을 제일 싫어하였다고 합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발전합니다. 왜 입니까? 누군가에 의해서 자기가 설득되고, 그것이 자기 생각보다 훨씬 더 낫다고 생각될 때 내가 졌는데, 너무 기쁩니다. 왜 입니까? 설득되면서 자신이 업그레이드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발전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에서 어떤 사람에게 좋은 교훈을 줍니다. 혹은 일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이 게을러서 그것을 한 번, 두 번, 이야기 하고 받아 넘기면 더 이상 그에게 가르침을 주지 않습니다. 주위의 동료도 윗사람도 심지어 아랫사람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담임목사에게 한 번, 두 번 이야기를 했는데 발로 차 버리고 쳐다도 안 본다고 하면 그 다음서부터는 건의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주고, 나의 논리에 귀를 기울여주고, 설복되어 주고, 혹은 내가 잘못되었을 수 있지만 더 뛰어난 논리로 나를 설복해서 ‘아, 그것보다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것이구나!’ 이렇게 할 때, 결국 소통이 증진되는 것이지 그렇기 때문에 게으른 사람은 제갈공명을 옆에 두고도 절대로 발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끊임없이 그 사랑 안에서 깨닫는 것은 ‘의존의 마음’입니다. 교만이 정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없이도 내가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내가 살 수 없습니다. 아는 것부터 행하는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라고 하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열 개를 가르쳐 줘도 그 열 개를 가슴에 간직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이 발전하고, 한 개의 가르침이라도 마음에 담지 않는 사람은 소용이 없습니다.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결코 인생에 있어서 승리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것으로서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