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자의 손해
“미움을 감추는 자는 거짓된 입술을 가진 자요 중상하는 자는 마련한 자이니라”(잠 10:18)
녹취자 : 송미옥
‘서까래’ 라고 하는 것은 건물 중심으로 보가 지나가고 양쪽의 빗살처럼 걸쳐있는 작은 받침목들을 ‘서까래’ 라고 합니다. 보가 무너지면 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보는 무너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서까래는 원래 굵지 않은 나무를 사용하기 때문에 늘 썩게 마련이고, 늘 상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수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시 농가의 집들은 나무, 진흙 그리고 나뭇가지 심지어는 갈대 이런 것들을 건축자재로 삼았기 때문에 보수해야 할 일이 지금의 건축물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가장이 되어 집에 있으면 눈뜨면 하는 일이 집안을 끊임없이 살피면서, 보수해야 합니다. 여기에 ‘내려앉는다’고 했는데 원래 원어로는 ‘썩는다’고 나옵니다. 썩으면 내려앉으니까 그것이 그것일 수 있습니다.
결국은 삶이 게으르니까 자신의 집안을 거의 돌보지 않는 것입니다. 서까래가 세월이 지나면서 썩습니다. 썩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게 지붕을 받치고 있으니까 지붕이 내려앉습니다. 지붕이 판판하게 경사져 있어야지 비가 오면 빗물이 흘러내리고 집이 언제나 보송보송할텐데, 서까래가 꺾이고 지붕이 주저앉으면 물이 고입니다. 그래서 바로 뒤에 보면 집이 새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게으른 자의 집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일평생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즉각적 구원이 집을 짓는 것이라면 성화는 그 집을 끊임없이 보수하고 수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집을 일평생 지어가는 것입니다. 누구 집에 들어갔는데, 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천막에다가 막대기 하나 세워놓고 기어들어가야 겨우 다리를 뻗고 누울 수 있는 것. 그것은 무엇입니까? 삶의 신앙 혹은 철학, 사상이 없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의 집에 들어갔더니 큰 집인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방배동에 있는 집을 팔고, 교회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거기가 90평이었습니다. 나중에 부목사님이 오셔서 나누어 주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김영래 목사가 초등학교 때 학교에 가서 자랑을 했습니다. 친구들에게 집 평수를 이야기 하니까 친구들이 거짓말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집에 몰려왔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서 90평은 맞는 것 같은데 집이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이방에서 저 방으로 넘어가려면 문이 없어서 창틀로 넘어 다녔습니다. 4년 정도였습니다. 마루만 엄청 큰데 이용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는 가구도 별로 안 샀습니다. 그런 집은 신앙은 있고 사상은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삶을 가꾸는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삶을 아름답게 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밥을 먹는다. 그것은 기둥만 있고 실내 장식이 없는 집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사료 먹듯이 단백질 한 봉지 비타민c 한 봉지 가져다 놓고 가루를 퍼 먹어도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인생을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시시한 일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살기 위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옷을 입는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재미없겠습니까?
이게 인생에 있어서 지혜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의 인생은 사상적으로 골격이 튼튼하고 건축이 잘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인생을 가다듬고 장식하고 수리합니다. 그래서 사상의 집을 지었습니다. 책을 읽고 공부해보니까 이 사상에 허점이 있습니다. 올라가서 대대적인 수리를 하고 서까래를 끌어내리면서 가장 좋은 나무를 가져다가 잘 썩지도 않는다는 먼 지방에서 온 나무를 가져다가 서까래를 고칩니다. 그렇게 하면서 탄탄하고 빛나는 인생을 사람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죽습니다. 사라져 갑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영원히 산다면 대충 살아도 됩니다. 왜입니까? 내일이라는 기회가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죽습니다. 그래서 어제 오늘 내일의 공식은 어느 날 깨집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어제는 있었지만 오늘은 있었지만 내일은 없고, 어제는 있었지만 오늘은 없는 날이 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일종의 거룩한 긴장감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집을 짓는 것처럼 그 집을 관리하는 것처럼 인생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만 내 집에 살아서 즐거운 것이 아니라 내 집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을 때 쉼을 얻게 만들어 주는 내 인격으로 내 지식으로 내 사랑으로 나의 섬김으로 그렇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게으른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사상적으로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지식을 얻는 일에 게으른 사람이 그런 사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게으른 사람에게 남을 위한 봉사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게으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게으른 사람에게 내가 가꿔서 나와 다른 사람에게 만족을 주는 그런 삶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불끈불끈 솟아나는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지만 다 허무하고, 헛짓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게으름의 중요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딴 짓하며 사는 것이 게으른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침상에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딴 짓하며 사는 것이 게으른 것입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충성된 사람은 쉬는 시간이 없습니다. 게으른 사람도 쉬는 시간이 없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딴 짓하느라고 쉬는 시간이 없고, 그래서 우리말에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다 바쁩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해 바쁩니까? 무엇을 위해 바쁩니까? 라는 것입니다. 내가 조금 더 부지런 했다면, 조금 더 학문을 갈고 닦았다면, 내가 조금 더 인격을 갈고 닦았다면, 내가 조금 더 거짓과 부지런히 싸웠다면, 내가 조금 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섬겼다면,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내가 섬겨서 내 밖에 있는 것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변화되어 갑니다. 자기를 위해서 게으르게 산 사람이 이렇게 죽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정말 후회 없이 살았다. 정말 감사하다. 아멘 주 예수여 내가 가나이다. 절대 이렇게 죽을 수는 없습니다. 뷸가능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서까래가 썩으면 꺾어집니다. 나무가 썩으면 부러지듯이 꺾어집니다. 왜냐하면 지붕이 누르기 때문입니다. 받치고 있었는데 누르니까 더 꺾어집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끊임없이 핑계를 댑니다. 나무가 없어서, 사다리가 없어서, 그리고 도와 줄 사람이 없어서 라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 집안에 꺽어진 서까래와 새고 있는 지붕은 결국 본인의 게으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설령 피할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 할지라도 자신은 자신의 집을 보면서 항상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