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마5:14)
녹취자 : 김경애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을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습니다. 나는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선한 일을 위해서 지으신바 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 목적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으며 살아가야지 행복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나온 말씀 가운데 아마 가장 유명한 말씀중 하나일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하나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이냐 하면 확실히 우리가 본래의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 돌아가지 않고는 결코 자기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고 또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무엇을 위해 지은바 되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선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 선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세상이 악하고 혼란스러운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고 결론을 짓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왜 모든 것이 질서 있고 선해야 하는 것입니까? 선보다는 악이 현실적인데 왜 그런 현실적인 것들이 되면 신이 없는 것이 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이는 선이 가득 차야지만 신이 있는 증거라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그 선이 그만큼 도달하기 어려운 상태라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만나게 됩니다. 즉 우리가 사람이었는데 사람 아닌 것들로 우리가 가득 차게 되고 그런 사람을 다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재창조입니다. 그리고 이전에 하나님이 흙으로 빚으사 사람을 만드신 것은 원래의 창조입니다. 두 창조의 행위가 하나는 원창조 하나는 재창조입니다. 원창조의 목적이나 재창조의 목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목적은 구속의 목적과 동일합니다. 또 문제는 이렇게 재창조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삶이 어떠한가 하는 것은 그가 어떠한 사람이냐 하는 질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원래의 창조로 돌아가 봅시다. 원창조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완전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완전하기는 했지만 불안전한 완전이었습니다. 결국 자신이 의지를 어떻게 행사하느냐에 따라서 악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처음 사람을 결코 불변하는 콘크리트 막대기처럼 만든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으로 만드셨으니 혼자 판단할 수 있는 지성과 자기 혼자 느낄 수 있는 정서와 자기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재창조도 원창조를 닮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서 재창조된 사람도 자기의 자아를 상실한 채 재창조되는 것 아니라 자신의 자아를 가진 채 재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똑같이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지정의로 존재로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하게 창조되었던 처음 창조된 아담이 악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동일하게 재창조된 인간도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 하나 차이가 있다면 첫 창조에서는 타락을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져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면 재창조에서는 그럴 수는 없고 타락해도 한번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은 사라지지 않는 그런 사람으로 재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표현에 보면 영혼은 구원을 받고 몸은 사단에게 내어준바 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구원은 받았지만 짐승처럼 세상을 살다가 죽을 수 있는 사람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나옵니다.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여러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신자는 끊임없이 성화의 도상에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이 있겠습니까? 많은 비유를 할 수 있겠지만 지루하도록 긴 이야기이고 딱 잘라서 두 종류로 나누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있을 것이고 또 하나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 있을 것입니다. 아예 믿음을 배반하고 신앙의 껍질조차 내팽개친 사람들은 그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으니까 제해놓고 그래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주 교회에 나오고 크게 신앙을 배반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둘로 나눌 때 한 종류의 사람은 부단히 분투하면서 살아가는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이고 또 한 종류의 사람은 껍질만 그리스도인인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혹은 어떤 사람은 그것을 성경적인 그리스도인과 문화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나누는데 저는 그런 분류가 썩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문화를 경시하거나 무시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유를 한다면 진실한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분투하는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라는 껍질로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후자의 사람들은 신문에 나올만한 죄를 저지른다든지 혹은 어느 날 갑자기 예배가 다 필요 없다고 선언한다든지 동성애가 좋다고 선언한다든지 그러지는 않습니다. 그 모든 기독교인으로서의 껍질에 대해서 굳이 항거하지는 않고 그냥 살아갑니다. 그런데 거기까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바로 그 앞에서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에 쓰리요.’ 하십니다. 비유를 하자면 그런 그리스도인은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맛을 잃은 소금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소금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원래 이 당시의 소금은 암염이었습니다. 즉 광산에서 캐는 소금이었습니다. 바닷물이 함께 묻히면서 염분만 남고 빠져나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해 쪽이나 아니면 팔레스타인을 여행하다 보면 돌멩이처럼 생겼는데 돌멩이는 아니고 속에 전구를 놓고 비추면 핑크빛도 있고 푸르스름한 빛도 있고 있는데 그것이 암염덩어리입니다. 그것을 갈아서 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암염이 습기가 많습니다. 습기가 많으면 나트륨은 습기와 만나면 녹아내립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 소금인 성분과 소금이 아닌 성분이 당연히 광석이니까 섞여 있는데 습기를 만나서 소금기가 다 빠져나오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광물질 성분밖에 안 남는 것입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짠맛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소금도 아니지만 그러나 소금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니까 소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으로 돌아가서 그리스도인을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이미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품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것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느끼면서 분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안에 자기를 얼마나 불쌍하게 여기는가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난 사람들만이 그런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는 사랑을 모르는 이들을 보고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사람만이 그런 은혜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엾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이미 자기 안에 하나님의 충만한 통치를 경험했고 지금도 그것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고 또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지 않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나라가 되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종교에서뿐만 아니라 종교, 정치, 문화, 사회, 경제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 사랑과 자비를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성경적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지 않은 후자의 사람인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기회주의적입니다. 자기가 애써서 그리스도인이라는 껍질을 파괴할 뜻까지는 없으나 자신의 이익에 큰 손해가 가지 않는 범위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마음에 문화적으로는 그리스도적인 문화는 받아들였지만 그렇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받았을 수도 있고 안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늘 죄에 패배하는 삶에 익숙해진 인간인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는 불신자의 삶과 겉모양이나 내면의 세계나 별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엔가는 남아있고 그 사랑 때문에 그가 모종의 갈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나 죄에 대해 패배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결국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진실한 삶의 가치는 부정하고 그 대신 기껏해야 세상의 윤리를 좇아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살아가면 어떤 결과가 펼쳐지게 됩니까?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분의 통치가 임하여 가슴 벅찬 감격이나 기쁨 같은 것들은 이쪽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경험해 본 적도 없고 경험해 보았다고 할지라도 굳이 그것을 재연하면서 살고 싶은 욕구의 싹도 이미 잘라진 상태입니다.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문제가 옵니까? 우리가 맨 처음에 출발한 것은 도대체 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미친 듯이 우리가 달려가는데 이것이 맞는 것인가? 그러다가 잠시 멈추어 서서 성찰해 보자고 제안했고 성찰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생각하다 보니까 결국 이 질문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세 설교를 생각해 보면서 이 마지막 네 번째 설교를 한번 연결 지어 보십시오.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요 선을 위해 만드신 바라고 했는데 그 이야기가 하늘에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성경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까? ‘내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왜?’ ‘그분께로부터 모든 만물이 생겨났고 그분 안에 이미 의미를 가지고 그분 안에서 의미를 가지고 창조되었으니까 그분을 알면 결국 나와 그분과의 관계를 알고 의미를 알게 되겠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았다고 칩시다.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내가 원래는 선하고 완전하고 아름다운 인간이었고 세계와 마찬가지로 이미 완전성과 아름다움과 선함을 부여받았고 또 내가 계속 살아가면 증진될 선함과 아름다움과 완전함이 아직 남아있구나! 내가 그렇게 살아가야겠구나!’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런 도기가 있어서 국보급에 올랐다고 칩시다. 선과 모양으로 볼 때 매우 탁월하다고 칩시다. 이것은 5년 뒤에도 10년 뒤에서 천년 뒤에서 망가져서 없어지지 않는 한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만든 그 작품만 걸작인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걸작이 되도록 창조하신 것입니다. 살아가는 삶 자체가 작품이 되도록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걸작으로 태어나서 걸작에 알맞은 삶을 살아갈 때 존재와 삶 자체가 작품이 되어서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고 그만큼 인간이 행복을 누리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어떻게 걸작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미 걸작이 아닌 것들이 내 안에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것들을 없애 버려야 합니다. 그것들을 내 본성에서 사라지게 하거나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 성화를 통해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 다음에 그런 사람으로서 삶 자체가 작품이 되도록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서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화된 것만큼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빛은 결국 긴 설명을 이미 책에서 이야기했지만 이 빛은 자연적인 빛이나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빛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한편으로는 진리를 보여주고 또 한편으로는 악을 행하며 사는 것은 어두움이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은 빛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궁창의 별과 같이 빛납니다. 왜? 의인이 악을 행할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결국 우리는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까?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우리가 문화만 받아들이면서 신앙의 내용을 양보하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참 나로 돌아가는 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만이 참된 나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결국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참다운 인간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 스스로는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으로 우리를 구속해 주시고 그 피로 우리를 씻어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자율적인 인간입니다. 심지어는 그 성령을 거부할 수도 있는 그런 힘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사람만이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에 대해서 불순종하고 그분의 뜻에 대해 복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런 말이 성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엿가락을 꺾는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의지를 꺾어서 새사람을 만드시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그러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결론을 맺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신자 안에는 이 진리의 빛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면 아무리 죄를 짓고 나쁘게 살아도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떤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있다는 것을 밝혀주면 그 사람들은 회개합니다. 아주 흉악한 죄인도 회개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의 신앙교육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어느 날 권사님들이 모여서 밤에 기도회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강도가 복면을 하고 뛰어들었습니다. ‘너희들 다 돈 내놓아!’ 그 당시만 해도 가난한 시절이었으니까 그랬습니다. 권사님들도 있었고 집사님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현장에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이 아무도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더니 ‘젊은이 거기 앉아보게.’ 이 사람은 빨리 돈을 챙겨서 가고 싶은데 ‘잔소리 말고 빨리 돈 내놔’ ‘돈 줄 테니까 앉아보게’ 그 젊은이가 앉았습니다. ‘우리 돈을 거둡시다.’ 돈이 많지는 않았겠지만 권사님들이니까 돈을 몇 푼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권사님이신 사모님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대에게 줄 것인데 어쩌다가 이런 일을 하게 되었나?’ ‘잔소리 말고 빨리 내놓으란 말이야!’ 그러면서 시간을 끌었습니다. 당연히 누가 신고하지는 않았습니다. 권사님들 누구도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타일렀습니다. ‘기껏해야 삶이 이것밖에 없나? 젊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야지! 그래야지 이런 삶에서 벗어나지!’ 타일렀습니다. 이 강도가 칼을 놓고 회개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복면을 벗고 하는 이야기가 ‘나도 사실은 어렸을 적에 주일학교를 다녔었는데 이렇게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살면서 나도 너무 괴로웠습니다.’ 전도를 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꼭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다짐하고 돈을 더 거두어서 주면서 어깨를 두드리고 안수기도를 해서 돌려보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빛이 있습니다. 개판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빛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분에 의해 지은바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 그것이 마음속에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하나님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죄를 짓고 그렇게 악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뭐냐 하면 그냥 문화나 받아들이고 껍질만 그리스도인인 것을 택한다면 예수를 믿는 것은 결코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혼란스럽게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짓지 않는 죄가 무엇이 있습니까? 매일 매일 신문지상에 나오는 횡령, 사기, 폭행, 심지어는 십계명을 범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수없이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애슐리 메디슨 데이터 유출 사건이 일어나고 400명의 교회지도자들이 폭로되었습니다. 그때 애슐리 메디슨의 담당자의 이야기가 의미심장합니다. 종교, 기독교, 가톨릭, 이슬람 그 사람들이 하루에 한 번을 기도하든 세 번을 기도하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이 문제와 종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종교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그 사람이 증언해준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결국은 형식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가지고는 인생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반드시 이 세상의 빛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진리를 가지고 있어서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가질 뿐만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말없이 그의 삶 전체가 모든 사람에게 자기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지런히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자신이 욕망을 죽이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극기의 길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 삶이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그는 사람이 아닌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가 그 안에 있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고 미친 기운이 있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너무 행복하고 달콤하면 달콤할수록 그가 정말 참 자기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고 그런 사람들은 내일 죽어도 후회가 없습니다.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살 준비가 된 사람들만이 죽을 준비가 되어있지, 참 사람으로 살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은 언제 죽음이 와도 그때는 뜻밖의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민은 그것입니다. 어디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성찰이 필요합니다. 성찰하고 나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을 성찰하자면 결국 마지막에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하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무리 찾아도 나 혼자서는 그 결론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문화나 세상의 평판, 대대도 예수를 믿는 집안이라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신앙의 진수에 도달해서 하나님이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내가 그분의 사랑 안에서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의 온 마음으로 경험하고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현재적인 경험으로 살아갈 때 거기에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혀지게 되고 이후에 설교될 돈, 가정, 명예, 여가, 그리고 모든 살아가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관심사에 대한 의미를 명백히 알게 되고 그러면서 자신의 삶의 질서를 올바르게 하는 가운데 그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