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몸값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 1:14-16)
녹취자: 황인준
Ⅰ. 본문해설
가롯 유다가 예수를 종교지도자들에게 넘겨주기로 뒷거래를 했습니다. 당연히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예수를 체포하여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늘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계셨기 때문에 예수를 쉽게 체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의 입장에서는 예수는 빈 껍데기였습니다. 아마 이 사람은 예수가 일으키는 기적의 행적들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 가졌던 정치적 메시아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즉, 예수가 큰 능력으로 하나님이 보낸 해방자로 오셔서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그때에 새 나라가 이루어지면 한 자리씩 차지할 터인데 그러면 당연히 예수 가까운 곳에서 재정까지 맡으며 수고했던 자신에게 중요한 자리가 주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님의 주변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과 특별히 예수님의 태도는 유다가 기대하는 바와는 정반대로 흘러갔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키시되 더 큰 기적을 일으키셔야할 때가 가까이 올수록 오히려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 어느 제자도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고하는 말씀의 의미를 알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그릇된 유대교 메시아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의 빛이 바늘만큼도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단단한 사상의 껍데기가 깨뜨려 진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이후에나 일어날 일이었으니 심지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보며 통곡하며 슬피 울었던 여자들도 그 죽음의 의미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니 가롯 유다가 나쁜 사람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모르기는 매한가지였고 다만 모르는 무지위에 가롯 유다는 탐욕을 더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배반하고 대가로 받을 금액을 흥정했는데 정말 찌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정말 터무니없는 가격이었습니다). 겨우 은 삼십이였습니다. 여기서 은 삼십이라고 하는 말은 뒤에 세겔이라는 말이 빠진 것입니다. 당시에는 세 가지 돈이 함께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돈, 그리스인들의 돈, 로마인들의 돈. 이 세 가지 돈이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은 30세겔이라고 하는 것은 출애굽기 21장에 그 가치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소가 남의 집 노예에게 (해를 끼쳤습니다. 이로 인해 노예의 주인은 노동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배상으로 소 주인은 노예 주인에게 30세겔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금액이 (예수의 몸값으로) 정해진 이유를 확증할 수 없지만 예수의 몸값을 더 쳐주기 싫었던 것입니다. 이 금액에는 어떠한 정치적, 종교적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유다가 넘긴 예수는 유대인의 왕도 아니고 메시아도 아닌 문제를 일으키는 한 사람일 뿐, 그의 가격은 노예 한 명의 가격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 나쁜 것은 그것을 동의한 유다였습니다. 결국 은 30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본인 스스로도 비참한 사람이 되었으며 예수도 자신에게 그 가치가 노예 한 명의 몸값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인정해 버림 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성경에서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신앙의 가치는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가치 있는 분인지를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저에게 있어 요즘 관심사는 인문학적인 고민을 끌어않는 신학적인 결론입니다. 근데 재밌는 것은 그렇게 인문학에서 고민하지만 최종적인 답은 안 나옵니다. 그리고 답이 나와도 그것을 답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혹여 그 답이 나오더라도 그것을 답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일제의 봉기가 일어난 것은 1968년도 프랑스 학생혁명 이후의 현대 철학입니다. 그러나 인문학의 중요성은 공감하지만 인문학의 분명한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정말 인간이 고민해야 될 것이 무엇인지를 인문학은 우리에게 보여주지만 그들의 답은 인간을 중심으로 내리는 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은 하지만 확고한 답은 내리지 못합니다. 인문학적인 질문과 고민을 포섭하며 하고 마지막 결론을 내릴 때에는 인문학을 모두 끌어않고 우리의 신앙을 따라서 신학적인 답을 내리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답을 모든 인문주의자들이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사정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에서 고민해서 내린 모든 답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요즘의 저의 고민입니다.
요즘 저는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읽고 있습니다. 4 챕터를 읽고 있습니다. 근데 놀라운 것은 이런 인문학적인 고민을 포섭하면서 신학적인 결론을 찾아가면 찾아갈수록 정말 인간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사건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결국 구속의 사건을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존귀한 분이신가?’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존귀하신 분이실까요? 그것은 바로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속죄의 제물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물이 되셨던 그분이 동시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온 우주를 통치하는 전능하신 통치주가 영원히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예수가 별것 아닌 그리스도인은, 별것 아닌 신자입니다. 예수가 존귀해 보이는 그리스도인은 정말 중요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V.I.P는 그리스도가 얼마나 존귀한 분이신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분 하나를 향하여 구속의 역사가 달려오고 그분을 통하여 구속의 역사가 전개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 사건을 중심으로 찬란한 빛이 비추고 거기에서 멀어진 저 멀리 창조 쪽은 빛이 어둡고 저 멀리 앞으로 벌어질 종말 쪽도 빛이 어둡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출발을 어두운데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밝은데서부터 가장 잘 알 수 있는 곳에서부터 출발해서 잘 알 수 없는 곳으로 뻗어나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는 그는 하나님은 물론이고 인간과 세계도 올바르게 알 수 없다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학문이 인간을 결코 행복하게 하진 않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고민은 더 깊습니다. 그리고 고민 없이 공부를 잘 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자기 기술을 팔아서 밥 먹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공부를 많이 했는데 어리석은 소위 이야기하는 박식한 무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너무 공부는 많이 했지만 그러나 인생은 전혀 보람 있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모든 지식을 지식되게 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 지식이 자신의 인생을 붙들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고 존귀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의 가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가치라고 하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오늘 기운이 없으면 (물건을) 이것을 하나 들었을 때, 너무 무겁게 느껴지고 우리 집사람이 몸이 한창 안 좋을 때 보니깐 성경을 들고 교회를 가기가 어려웠습니다. 핸드폰 들 기운조차도 없다고 합니다. 평생 그런 적이 없던 사람이 그냥 빈손으로 교회를 가는 겁니다. 핸드폰 들 기운이 없어서... 그런가하면 내가 스테미너가 넘치면 이런 거 하나 드는 거 일도 아닙니다. 그래서 각각 내 몸의 상태에 따라 무게는 다르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가치라고 하는 것은 그런 주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기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는 은30의 가치라고 종교지도자들과 가롯 유다 사이의 합의를 보았는데 그렇다면 내 몸값은 얼마나 되는 것인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그것을 정확하게 생각하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질문에 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가치가 얼마나 될까? 첫째, 아무 가치가 없다. 그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은 오히려 없었으면 좋을 존재다 .하나님의 세계에 해를 입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형상을 파괴하는 일에 앞장서고 이 세계를 조화롭게 만드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자연을 파괴하며 반역하는 행동을 하는 인간이 하물며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무가치하다고 하는 것은 좋은 평가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있어서는 안될 것 같은 말하자면 존재의 말종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 그려내는 모습입니다. 예루살램이 왜 멸망하였을까요? 유다가 왜 멸망했을까요? 소돔과 고모라가 왜 불비를 맞으며 심판을 당해야만 했습니까? 땅에 뭐라고 하던가요? 그 위에 서있는 나무와 풀들이 뭐라고 하던가요? 거기에 서있는 산과 하늘과 구름이 무슨 짓을 했습니까? 거기에 사는 사람이 악하니까 하나님이 그 악을 보다 못해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가 사해 밑바닥 속으로 들어가기까지 멸망한 것입니다. 하나는 예루살램도 반복해서 결국은 예루살램이 망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때문에 멸망한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30세겔도 아니고 없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그런 존재로 성경은 인간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자기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그가 당하신 그 끔찍한 고난을 보면서 자기의 존재의 진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아! 나는 차라리 있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그런 무가치한 존재이고 정말 해로운 벌레 같은 존재이다.’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비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 한 가지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누가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자기와 원수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을까? 명쾌한 답은 예수보다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즉,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어 육신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더라도 모든 구원받을 자기 백성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에겐 더 하고 싶으셨을 일이기 때문에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두고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디엘 무디(D. L. 무디 Dwight Lyman Moody)가 한창 인기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무디가 영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무디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습니다. 열광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전통신학에 어긋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어쨌든 당시는 무디의 시대였으니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무디의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때 무디 선생을 만나겠다고 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무디에게 만나자고하니 무디는 만나줬습니다. 자기를 강단에 서게 하면서 말씀 안에서 교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하는 말이 ‘내가 미국에 가서 무디선생이 사역하는 교회에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무디가 ‘두고 봅시다’ 진짜 찾아왔습니다. 불과 6개월 뒤에 그 청년이 시카고로 찾아왔습니다. 무디를 만난 그 청년은 이렇게 말 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 교회에 가서 설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그때 나한테 그렇게 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에 무디는 곤혹스러웠습니다. 무디는 그 청년에게 한 번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이름이 무어 하우스였습니다. 17세 소년이었습니다. 청년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청년(에 해당하는 나이였습니다.) 이었습니다. (강단에) 올라가더니 요한복음 3장 16절이었습니다. 근데 무디가 성경에 눈이 번쩍 떠질 정도로 그 17살 청년의 설교에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즉석에서 더 설교를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7번을 연속해서 설교를 했는데 모두 요한복음 3장 16절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무디는 이 청년을 얕잡아 보았던 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고 스스로 고백하기를 그 설교를 들으면서 성경을 보는 자신의 눈이 열렸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눈이 열린 것일까요?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 성경의 핵심과 같은 3장 16절을 다루는 설교의 방식에 은혜를 받고 자신이 변화됐다고 한 것입니다. 사실은 성경에 모든 내용이 요한복음 3장 16절에 응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근데 이 무가치함을 안 가르쳐주고 존귀함을 가르쳐 주면 교만하기 쉽고, 존귀함을 가르쳐주지 않고 무가치함만 가르쳐주면 인간은 좌절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율법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보이고 복음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존귀한 가치가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지는 예수가 노예의 몸값에 팔림으로서 우리는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기준으로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내가 그렇게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는데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것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라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육신으로 죽어가는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는 아픔보다는 그를 믿고 구원받을 우리를 바라보는 기쁨이 더 크셨기 때문에 기꺼이 우리를 위해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묻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의 몸값은 얼마입니까? 그리고 은30에 팔린, 노예의 몸값에 팔린,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분이 죽으신 것을 보며 나는 은30이 아니라 그만도 못한, 없었더라면 좋았을, 그런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과 주께서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동시에 느끼는 사람.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을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