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사랑하는 것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1)
녹취자: 이 솔
요한에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 요한이 보인 반응은 근심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으신다는 것 때문에 근심했을 수도 있고 혹은 어쨌든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 말씀 물음이 근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많은 문제의 교회가 에워 쌓여 있지만 사실 목회자로부터 성도들까지 모두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근심이 된다면 대부분의 문제들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자기 사랑을 버리고 또 하나님에 사랑을 따라서 사는 데서 기쁨을 느끼고 한다면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결국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신앙 아닙니까? 저절로 그렇게 않되기 때문에 성경이 필요하고 전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목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랑하게 만들어 주고 한번 사랑한 사람은 변심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 사랑하는데 머물러 있도록 해주는 것이 목양입니다. 성화가 무엇입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부패성이 내 안에 일어나는 것과 싸우면서 계속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게 성화입니다. 그래서 성화된 사람들은 그 특징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셨습니다.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만약에 그것으로 만족한 사랑이었으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사랑이시기에 삼위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시지만 그 사랑의 성품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영원한 지혜와 사랑으로 세계를 창조하시고 자기만 못한 모든 피조물과 관계를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인간은 당신 닮은 영혼을 주셔서 당신과 영적인 교제가 가능하도록 한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즉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이심은 나뉘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에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정의라는 미명하에 폭력을 행하고 상대방에 대해서 극도의 미운 감정을 가지고 덤벼드는 이런 폭력적인 정의는 결코 정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정의는 사랑으로 완성되는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의 그 자체가 사랑의 결의입니다. 왜 남에 물건을 훔쳐간 사람을 정죄하는 이유가 뭡니까?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면 그렇게 다른 사람의 물건 훔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사랑의 결의입니다. 그리고 정의는 그 결의의 반영일 뿐입니다.
칼빈은 이 문제를 스콜라주의를 이용하면서 보다 정교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 하나인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 개념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은 하나님을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하나님을 많이 닮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얘기입니다.
다 정신 나간 이야기긴 하지만 아시안 게임 때 북한 젊은이들이 예쁜 차림을 하고 300여 명이 한국을 내려왔습니다. 북한에 가서 이야기를 들으니까 북한이 최근에 결정한 것 중에 제일 후회한 결정이 그거였다고 합니다. 아시아 경기 대회 평양에 있는 대학생들을 아시아 경기 유니버시아드 대회인가 300명을 참석시키기로 했다고 합니다. 얘네들은 남녀를 데려다 산속에다 놓고 6개월 동안 훈련을 시켰습니다. 남한에 가면 어떻게 해야 되나. 그리고 키 크고 예쁜 애들을 골라서 6개월 동안 산속에다 눕혀놓고 매일 마사지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려오는데 보니까 부잣집 딸들처럼 하고 내려온 것입니다. 남자애들도 얼굴이 하얘가지고 강남 상류층 애들처럼 하고 내려왔습니다. 내려와서 서울을 보고 당연히 갈 때 보안 각서 다 쓰고 돌아와서 일체 남한에서 본 것 얘기하면 안된다고 올라갔는데 그 20대 그 입이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공개 석상에서 못하지만 친구 둘이 앉자 있어서 말 하는 걸 어떻게 막습니까? 두루두루 퍼지는去夜것입니다.. 남한에 대한 이야기가. 그걸 얘기 하려고 그런 게 아니고 내려와서 길을 걷다 얘들이 펑펑 웁니다. 우리 김정일 장군님 현수막이 비를 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렇게 둘 수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뭐예요? 사상적으로 어쨌든 지간에 김정일을 사랑하도록 존경하도록 교육을 받고 나니까 그의 얼굴이 새겨진 현수막이 비를 맞는 것도 그렇게 가슴 아프게 느껴지더라 그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에 이름이 존경을 받으면 기분이 좋고 욕을 먹으면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그런 감정이 없다면 그 사람은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어떻게 설명하냐면 결국은 어느 인간을 아니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되고 그 형상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데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상에 대한 사랑은 일치한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산다고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은 그 사랑의 고백이 거짓이다.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오늘 여기서도 이야기하기를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주신 계명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형제를 사랑하느니라. 좁게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형제, 자매가 형제고 넓게 보면 이 온 인류가 다 형제예요.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몸소 그분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어떻게 모든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모든 걸 다 해봅니다. 설교도 한번 잘 준비해서 해 보고 그 목양의 방법도 잘 만들어서 한번 실시를 해보고 또 어디 가서 잘 배워서 교회 조직도 새롭게 하고 그리고 문화도 잘 터득을 해서 교인들에게 강의도 합니다. 뭘 해도 특별한 하자도 없는데 무엇인가 불꽃이 그런 방법으로 목회에 불꽃이 붙여지지 않는 것 같은 한계를 경험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 한 가지를 돌아보면 됩니다. 그것이 뭐냐면 내 안에 그 양때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는가? 그것을 먼저 돌아 봐야 할 시점입니다. 그래서 먼저 그 사랑을 자신 안에 충만히 채워서 그래서 설교를 하던 강의를 하던 신방을 하던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 마음으로 영혼들을 섬기려고 할 때 그 안에서 놀라온 일이 일어납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이 세월까지 교회를 섬겨오면서 어떨 때는 이렇게 팔다리에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은 그런 때가 있습니다. 들리는 이야기가 모두 나에 목회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 누가 또 교회를 떠났다더라. 누가 설교가 듣기 싫다고 이제 신방을 안 받는다더라. 그런 얘기부터 시작을 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들리고 심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때로는 우왕자왕하기도 하고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하고 때로는 낙심이 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남이 한 말에 귀를 닫으면 바보고 남이 하는 모든 말에 귀를 열면 그건 더 바보야. 아무 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철벽처럼 교만해지지도 말고 맘을 개방해서 한 두 사람의 이야기들이 가슴을 휘집으면서 평화를 잃어버리게도 말아야 됩니다.
수영로 교회를 목회하시던 정필도 목사님이 직접 한 번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하여튼 한참 부흥하던 시절에 그분도 나처럼 교회 사택에서 한동안 사셨나 봅니다. 사택에서 살 방이 이렇게 있고 이제 당신은 여기서 설교 준비를 하고 옆에 애들이 있고 안방이 있는데 꼭 교인들이 토요일 밤에 전화를 하더랍니다. 토요일 저녁 때. 이제 마지막 설교 준비에 마무리를 하려고 하는데 막 몰두를 하는데 전화를 해서 목사님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또 왜 그러십니까? 세상에 목사님. 아무개 권사하고 아무개 집사 아시지요? 알지요. 억수로 목사님 씹고 돌아다니는 걸 제가 오늘 오후에 봤습니다. 뭘 잘못한다고 합니까? 매 토요일마다 그런 전화가 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끊고 나서 심경이 괴롭고 심하면 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 왜 안 드시겠습니까? 인간이니까. 끝나고 나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당신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하신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면 조용히 모든 걸 덮고 엎드리십니다.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저런 일들이 나의 미욱함을 가르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까 아니면 근거가 없는 것 입니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귀영 목사님이 부임을 해서 부임을 해보니까 2층에 목사님 그 서재가 있고 기도방이 따로 있더랍니다 거기를 쑥 들어가 봤는데 뜬금없이 수건걸이 같은 게 이렇게 세 개가 있었습니다. 3단으로. 하나는 50센치 70센치 정도였고 그다음에 1미터였고 그다음에 1미터 30센티 정도 있고 이상하다. 화장실도 아닌 빈방에다 수건걸이 저렇게 달아 놓으셨을까 하는데 수건걸이 치고는 너무 튼튼하더랍니다. 철봉같이 생겨서. 아무리 봐도 운동 기구는 아니고 뭐 하나 했더니 그게 목사님이 기도할 때 붙잡는 봉이랍니다. 이제 연세가 드시니까 자꾸 힘이 들고 그 다음에 알다시피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 하다 보면 상체에 힘이 들어갑니다. 뭔가 엎드리든지 뭘 해야 되는데 그런데 이분은 봉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봉을 붙잡다가 기도를 하다가 무릎이 아프시면 그 다음에 이렇게 허리를 일으켜서 그 다음 두 번째 봉을 붙들고 그것도 너무 다리 아프면 일어서서 세 번째 봉을 붙들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로 그 모든 것들을 다 녹여내면서 그러면서 자신이 승화시키면서 나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 위험한 일이 자기가 하는 것이 다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둘러싸인 사람은 자기가 하는 것이 다 틀렸다고 둘러싸인 사람보다 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사람은 아예 아무 것도 못 합니다. 근데 첫 번째 사람은 많은 일을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결국은 목회자는 그 모든 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힘을 다 하고 젊음을 바치고 심지어는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 바치고 심지어는 희생하고 모든 걸 걸었는데 근데 너무 힘든 일이 반복이 됩니다. 그 때 결국은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사랑으로 그것을 모두 극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주님의 일꾼으로 부르신 사람이 교인이나 혹은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주의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을 내가 사랑한다고 했더니 양무리를 맡기셨지 양무리를 사랑한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나를 당신 사랑해도 좋다고 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관건은 무엇일까요? 어떡하면 내가 이 사랑 속에서 온전히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것인가? 그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그걸 극복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혈기나 무슨 그런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타락했고 나부터도 이미 자기 사랑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수없는 상처를 받으면 살게 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을 천국과 혼돈하면 안됩니다. 늘 괴로운 일이 있고 어제까지 나를 존경하던 사람이 오늘은 나를 아주 역겨운 사람으로 바라보고 어제까지는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그렇게 은혜를 받았던 사람이 오늘은 교만하게 돌아서서 일체의 목양을 거부하는 일 그 정도가 아닙니다. 삿대질을 하며 이 새끼 저 새끼하는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목회자 혹은 영혼을 섬기는 사람들이 가는 길입니다. 그걸 이길 수 있는 길은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맨 처음 자기를 거룩한 소명으로 불러주셨던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나를 위해서 자기를 어떻게 버리셨는가를 생각해서 이것이 목양의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역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대우해 주고 인정해 줄 때면 기분 좋게 목양을 한다고 그러다가 좀 이해 받지 못하고 그리고 누가 구역원들이 그렇게 구역장을 대단하게 대접을 해줍니까? 그런 시기가 되려면 그가 진짜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고 교인들에게 같은 교인이지만 존경을 받을 정도가 돼야지 이제 손에 들어옵니다. 아실 때까지는. 그때까지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왜 참을 수가 없을까? 결국은 자기가 무엇 때문에 그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많이 자기를 낮추고 희생하고 종처럼 살고 그래야 되는지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면 지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누구나 다 높음을 받고 싶어 하고 대접을 받고 싶어 하고 그 다음에 첫째라 칭함을 받고 싶어 하고 꼬리가 되기보다는 머리가 되길 원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심정인데 이걸 왜 하겠어요? 그 일을 지탱하게 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어떤 사랑으로 날 부르셔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바로 이양 무리들을 나에게 맡기셨을 때에 나에게 주셨던 말씀이 양 무리를 사랑하느냐 이게 아니라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죽을 때까지 너의 섬김의 도구가 섬김에 동기가 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되게 하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라.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영혼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목회자들도 그 사람이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학식이 많고 너무 훌륭해도 어려움이 좀 있다고 목회 사역을 가볍게 그만두는 사람은 그 무게만큼 하나님 앞에 가벼운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어디를 돌아다녀도 자기를 떠받들어 주는 목회자는 없습니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도 온 교인들이 그렇게 그 딸이 그 광경을 다 봤는데 그 가족들이 상처를 받을 정도로 그렇게 손양원 목사님을 씹었습니다. 모이면 수근거리고 욕하고 비난하고 말입니다. 누구를 데려다 주면 그렇게 한없이 존경하고 한없이 사랑하고 그런 사람들이 있겠어요? 그런 일이 있었다면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유다에게 왜 배신을 당하셨겠으며 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잡자며 몰려왔겠어요? 그런 그런 목회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한 목회자가 교회에서 괴롭힘을 당한다 라고 생각할 때 모든 목회자가 잘못했다 이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원인이 없는 고난은 없으니 모든 교인들이 잘못됐다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건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결점이 있는 사람인데 사랑이 많으면 그것을 덮어 주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주고 사랑이 없으면 아주 티끌 같은 그 결함을 누구에게도 있는 그런 결함을 그것을 결국은 과장시켜서 그 사람을 아주 몹쓸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사람이나 만든 사람이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두 사라져서 공중에 먼지로 흩어지는 사람입니다.
어느 길가를 지나가는데 교회 앞에 다 어느 교인이 써 붙었겠지요. 목사가 직접 써 붙이지는 않았겠죠. 우리 교회로 오십시요. 우리 교회 담임 목사님은 일체 도덕적인 결함이 없으신 온전한 크리스찬입니다. 우리 교회 와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쳐다보면서 진짜 저게 결함이다. 내가 그랬습니다. 저게 결함이다. 어떻게 그걸 수없이 사람들이 보고 차가 지나다니는 길에 다가 대문짝만하게 써서 우리 목사님은 도덕적 결함이 없으신 분이니 우리 교회로 오십시요. 내가 그랬습니다. 저게 도덕적 결함이다. 하나님을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 맨 정신을 가지고 나는 결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어요? 그리고 누가 그렇게 이야기를 해준들 그걸 못하게 해야지 그게 모하는 짓입니까? 생각이 있는 모든 사람은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희는 도덕적인 결함이 없는 사람이 되어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진짜 베드로보다 나은 사람이겠네. 그 사람은 도덕적인 결함이 있었으니까.
목회는 그리스도만 자신의 마음을 꽉 채워서 자신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내가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거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비난을 받을 때나 때로는 격려를 받을 때나 어느 경우도 마음에 깊이 두지 말고 사람의 말에 힘을 얻고 사람의 말에 낙심하고 이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항상 공명정대하게 내가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입니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 모든 사람은 나에게 박수를 보내도 주님이 아니다 하면 나는 아닌 사람이 되어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의 문이 열려져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자신의 마음을 쏟아 놓고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되요. 수많은 배신자들과 모함하는 사람들에게 에워 쌓여 있었던 다니엘을 생각해보세요. 그는 결국 곧 죽을 운명이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날도 예루살렘으로 향해야 난 동쪽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 앞에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마음을 쏟아 넣으면서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이 없는 것입니다. 허둥대지 말고 하나님 앞에 기도 많이 하는 목자 되기를 바랍니다.
남에 눈에 보일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냥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마음을 깊이 쏟아 놓고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여기 있고 여기서 내가 영혼을 섬기고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에게 말씀해 주신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하나님한테 자기를 쏟으면서 기도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 하시고 싶은 일을 여러분의 마음에 마음껏 불어 넣으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도구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