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편 강해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녹취자: 김경애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한 시인이 2절부터는 왜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논증하는 방식으로 글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분명한 논리적인 순서가 있는데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지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5절에서는 더 넘치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신 것을 고백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토막의 첫 번째 절인 이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이것은 의미상으로는 전혀 잘못된 번역이었고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우리 인간에는 풀밭이 아주 운동하는 곳이나 낭만이 있는 곳입니다. 잔디를 밟을 때는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나라는 가는 곳마다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데 사실 잔디는 좀 밟아야합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영국에 갔더니 대학의 잔디밭에 못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교수는 들어가도 됩니다. 신기합니다. 그런 것이 어떻게 되느냐하면 멋스러움입니다. ‘들어가지 마시오. 고수는 제외’ 라고 되어있습니다. 교수는 제외입니다. 교수는 들어가도 됩니다. 교수들이 그것을 밟으면서 특권을 느낄 것입니다. 아무튼 풀밭이 너무 좋아서 저도 교회에 풀밭을 만들었습니다. 양잔디를 깔아서 평생의 스승으로 알고 있는 어거스틴인데 라틴어 이름으로는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스승인데 아까 목사님과 나오기 전에도 『영원 안에서 나를 찾다』라는 책 이야기를 했는데 그 고백록을 최소한 100번 읽었고 아마 150번 정도는 읽었을 것입니다. 눈을 감고 고백록을 거의 외웠습니다. 그러면서 그 책을 썼는데 그래서 그를 기념하는 풀밭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정원이름이 어거스틴 파크입니다. 그것을 만들었는데 아침에 올라가서 이슬에 젖은 그 잔디를 밟을 때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이 여기에 들어오지 못하고 나만 밟는다는 생각이 들 때 기분이 더 좋습니다.
우리에게는 잔디가 그런 것이지만 양떼들에게는 푸른 풀밭이 도시락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 눈으로 보면 안 되고 목동들이 보는 풀밭도 우리가 보는 풀밭의 느낌과는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밟고 보기위해서 그것을 좋아하지만 목동들이 볼 때에는 양떼들을 위한 꼴을 그곳에서 공급하니까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하면 팔레스타인은 광야지역이 많기 때문에 어디에 가든지 푸른 풀밭이 가득해서 양떼들을 끌고 가면서 풀을 먹일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아닙니다.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하면 양들이 꼴을 먹고 있을 때 선한 목자는 그저 텐트치고 그늘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이 양들이 이것을 먹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이 양들을 어디로 데리고 가야할지를 높은 언덕에 올라서 사면을 두루 살피며 다음 목초지를 찾는 것입니다. 양들은 근심할 필요가 없고 그냥 그 목자의 인도를 따라가면 그 다음의 아주 좋은 풀밭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2절이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바입니다.
시인이 일생을 살아오면서 그렇게 하나님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알다시피 다윗은 왕이 되겠다고 스스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 그는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이 그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살던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한 목동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의 임금을 삼고자 결심을 하시고 그를 기름 부으신 그날부터 다윗은 예전에는 가본 적이 없는 시련의 광야를 지나게 됩니다. 아마 조용히 아버지도 이름을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런 목동으로서의 삶을 살았더라면 아마 그는 가난하지만 평화롭게 인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에 소명됩니다. 그 후로부터는 수많은 대적들이 생기고 고난과 시련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일생입니다. 특히 사울에게 쫓겨서 도망 다니던 때에 그는 수없는 배고픔과 굶주림을 경험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제사장이외에는 먹을 수 없는 진설병을 먹고 그 배고픔에서 벗어나던 기억까지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이 자기를 푸른 풀밭에 인도하신다는 것 자체가 말하자면 하나님이 자신의 육신을 위해 필요한 많은 양식들을 그때마다 공급해서 살게 하셨다는 초기의 고통스러웠던 자기 인생에 대한 고백이 여기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결국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받는 것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만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과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의식하고 사느냐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 굶주려본 사람들은 한 끼의 식사가 자기 앞에 놓일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같은 인간이 주님의 은혜로 이렇게 먹고 사는 것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끊임없는 영적인 침체는 우리의 염려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우리들이 겪는 염려와 많은 근심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믿음의 결핍에서 발생되는 문제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느 권사님이 꿈을 꿨답니다. 꿈을 꿨는데 여러분은 잘 모를 것입니다. 망태를 아십니까? 애들보고 그럽니다. ‘울지 마라 망태할아버지 오신다.’ 그 망태가 무엇이냐 하면 지금은 없는데 아주 가벼운 싸리가지 같은 것으로 만들었는데 어느 정도로 큰가하면 어른이 망태를 메면 아구리가 목까지 오고 끝은 종아리까지 올 정도로 엄청 큽니다. 사람을 댓 명 집어넣어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것입니다. 그런 망태가 왜 필요하냐하면 그것을 가지고 휴지를 줍는 것입니다. 지금은 물자가 풍부해서 휴지를 주워가도 1킬로에 20원인가 30원을 주니까 돈이 되지 않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밤중에 와서 박스를 줍는 것을 어제도 보면서 주머니에 만원을 주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속이 쓰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계를 이어갑니다. 그 당시에는 박스 같은 것은 보기가 거의 힘들었고 휴지만 되어도 마른휴지는 기다란 집게도 집어서 넣고, 착하지 않은 사람들은 지나가다가 분명히 버리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도 개 밥그릇 같은 것도 양은으로 만들었으니까 찌그러뜨리면 돈이 되니까 웬만한 것은 훔쳐가기도 하고, 가득 싣고 그리고 고물상에 가면 그것을 달아서 주면 돈을 받고 다시 주우러 갑니다. 아무거나 가지고가니까 망태할아버지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아이가 울면 너 그 할아버지가 잡아서 자기 망태에 던져버리면 엄마 아빠가 없는 곳으로 끌려간다는 뜻으로 망태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이 꿈속에서 망태할머니가 되어서 망태를 메고 어느 길을 가더라는 것입니다. 저 앞에 시커먼 옷을 입은 놈이 아마 마귀일 것입니다. 계속해서 길거리에 무엇을 던지더라는 것입니다. 시커먼 보자기를 길거리에 던지는데 자기는 그것을 미친 듯이 주워서 계속 망태에 담는데 망태가 차고 넘치는데도 계속 던지는 것입니다. 자기는 계속 주워 담다가 나중에는 무게에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망태에 눌려서 쓰러져버렸다는 것입니다. 쓰러져서 망태가 자기를 눌러서 숨을 못 쉬어서 죽을 지경인데 여전히 손으로는 까만 보자기를 갖다가 계속 던지는데 그러다가 깼다고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은 끊임없이 마귀는 염려를 던지고 그 권사님은 열심히 그 염려를 주워서 마음에 담으니까 도저히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무게가 되었는데도 그 염려를 못 떨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이야기하는 독일어로 앙크스트 라는 불안의 문제가 초기 실전주의 철학자들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키에르 케고르 같은 사람도 자기의 ‘죽음에 이르는 병’ 속에서 인간을 끊임없이 불안한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는 불안이 아니면 인간의 자기 존재의 의식을 불안을 통해서 발견하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까지 합니다. 모든 것들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사르트르가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자기는 ‘러셀을 읽으면서 모든 진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마지막 남은 모든 진리들을 땅에 떨어뜨리기 위해서 일생을 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바로 오늘날의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의 중간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더 올라가지만 그러면서 모든 가치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은밀히 숨어서 하던 일들을 이제는 백주대낮에 과감히 할 수 있는 이유가 단순히 사람들이 악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상적으로 절대적인 가치기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런 것들이 단순히 도덕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음악, 예술, 도시미학, 심지어는 건축과 조경에 이르기까지 그런 모든 분야에서 다 파괴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벌써 이 사람들이 알고 있었고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데 ‘모든 것을 거부하고 나면 인간은 완전한 자유다. 그렇지만 무시무시한 자유다.’ 자유롭기는 한데 무시무시한 자유랍니다. 온 우주에 자기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거도 없고 무시무시한 자유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나의 정의에 의하면 자유가 아니라 속박이라고 합니다.
제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개강을 하자마자 제일 먼저 비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스마트폰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버리고 책으로 돌아가라. 인생이 바뀔 것이다.’ 그런데 지금 20대 아이들이 그것을 기꺼이 버리려고 하는 아이들이 나옵니다. 놀랍습니다. 학생들이 참 착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가르치고 책도 열심히 읽게 하는데 사생결단을 하고 해보겠다는 학생들이 많이 나옵니다. 못살 것 같습니까? 통계가 나왔는데 2시간 40분을 스마트폰에 얼굴을 묻고 보낸답니다. 못살 것 같지만 저를 보십시오. 잘삽니다. 저는 카톡도 없습니다. 페이스 북은 물론이고 이메일도 거의 보지 않습니다. 이변이 일어나서 ‘목사님 이메일 보냈는데 꼭 읽어주십시오.’ 그러면 열어봅니다. 그리고 나는 비밀이 별로 없습니다. 비서실로 이메일을 보내면 다 나에게 올라옵니다. 나는 이메일을 몇 달에 한번 열어볼까 말까이지만 비서실은 하루에도 열댓 번씩 열어보니까 그쪽으로 보내라. 아무도 보지 말아야 할 무시무시한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보낼 것이 무엇이 있느냐? 살아가는데 추호의 불편이 없습니다. 핸드폰은 필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화통화도 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이 핸드폰을 가지고 300페이지짜리 4권을 썼습니다. 어떻게 쓰느냐하면 작년에 4시간 반을 수술했습니다. 심장과 폐 사이의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이었습니다.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이것을 가지고 주를 다 달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퇴원하고 집에 꼬박 앉아서 4주 동안 어디도 가지 못하고 누워있었는데 그 속에서 한 달 만에 『인간과 잘사는 것』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러면 되었습니다. 외국에 가도 통화가 되고 그리고 자기들이 꼭 만나고 싶으면 다 연락이 옵니다.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여유가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어린아이들에게 절대로 핸드폰이나 텔레비전 만화영화 같은 것을 많이 보여주면 큰일 납니다. 사고기능이 죽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것은 희랍어로 ‘수스케마티조’라는 단어인데 붕어빵처럼 찍어내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다 통일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고유성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것이 자기 인생이 아닙니다. 자기 인생이 아니라 누군지도 모르는 사회에 의해서 이렇게 살아가라고 던져지는 그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자기 인생을 살아가야지 그래서 저는 진짜 인터넷과 이런 모든 것이 없는 아날로그 세상에서 살고 싶은 사람입니다. 물론 그것으로부터 받는 유익도 큽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찾고자하는 모든 자료를 전 세계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박사논문을 읽으면 각주에 나오는 모든 자료들을 나는 우리 연구실에서 95%에서 97%까지 모두 찾아낼 수 있습니다. 오리지널 소스를 못 찾는 경우는 없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못 찾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것이 인터넷의 도움이 없이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뿐이지 그것이 우리를 빚어가고 형성하도록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여기에 푸른 초장,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할 때 이 눕는다는 것은 안식입니다. 단순히 도시락을 먹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안식입니다. 어느 아이에게 학교에서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었는데 아이가 숙제를 해왔습니다. 그 아이는 그림을 하나 그려왔는데 종이에 네모난 사각형 밑에다가 다리를 두 개 달았습니다. 선생님이 깜짝 놀라서 ‘너는 이것이 무엇이냐? 가족들 그림을 그려오라고 했더니 네모에다가 다리 두 개를 그려오면 이것이 무엇이냐?’ ‘아니에요 선생님 그 그림은 우리 아빠에요.’ ‘아니 너희 아빠는 왜 그렇게 네모나냐?’ ‘거기보세요. “아빠의 일요일: 우리아빠는 다리 두 개만 내놓고 이불 덮고 자요. 엄마가 어디를 가자고 그래도 계속 잠만 자요.” 그렇게 안식이 없습니다. 오늘 밤에 가서 남편이 잠들었을 때 얼굴을 들여다보십시오. 추합니다. 세상 근심과 피로에 절어있는 모습을 부인들이 앉아서 1시간만 들여다보십시오. 그냥 자는 것이 아닙니다. 수없이 잠꼬대를 합니다. 그리고는 마음이 상한 일이 있었는지 찡그리고 잠꼬대를 하고, 무슨 원한 맺힌 일이 있는지 이를 갈고, 코도 골고, 휴식이 없습니다. 아내들도 남편들이 가서 애 둘이나 셋쯤 낳고 누워있는 아내를 보십시오. 내려다보면 불쌍합니다. 그 잠잘 때도 고왔던 얼굴은 어디에 가고 피곤에 절어서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위에서 보십시오. 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두 살, 세 살까지는 잘 때 천진난만합니다. 그렇게 평화로워 보일 수 없습니다. 새근새근 얼굴이 활짝 피었습니다. 왜? 이 아이들은 근심이 없습니다. 그냥 엄마 젖을 먹고 만족스럽게 한손으로 엄마 젖꼭지를 만지면서 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얘네들이 초등학교만 들어가서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아도 안 예쁩니다. 벌써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쉼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쉼을 주시는 분입니다. 어거스틴이 고백록 1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주님의 품에 돌아오기까지는 나의 영혼에 안식이 없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생애를 읽어보면 그럴만합니다. 어거스틴은 아주 열정적인 연애지상주의자, 마니교에 빠진 사람, 기가 막힌 글 솜씨를 가지고 있고, 당대 철학을 꿰뚫은 아주 비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여태까지 어려서부터 여태까지 많은 책을 읽었지만 어떤 책을 읽고 단 한 사람도 이 사람이 천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목사님이나 나나 칼빈주의를 배웠지만 칼빈을 읽으면서도 나는 탁월하다고는 생각했지 천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을 존경하지만 존 오웬 목사님도 아주 탁월하다고 생각했지 천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책을 두 권 읽으면서 조용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무릎이 하나님 앞에 꿇은 무릎이라기보다는 한 인간 지성의 위대함 앞에서 진짜 자존심 상했지만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드디어 천재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래서 엊그제 미국의 학자가 한사람 와서 함께 교제를 하는데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에 여태까지 신학을 했는데 당신이 죽는데 어느 신학자 품에 안겨서 죽고 싶다면 누구 품에 안겨서 죽고 싶냐?’ 했더니 더듬더듬하고 말을 못하더니 ‘목사님은 누구 품에 안겨서 죽고 싶으세요?’ ‘나는 변함없이 한사람 아우구스티누스다.’ 라고 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흠모했고 무릎을 꿇으면서 고백한 것이 생애 처음이었습니다. ‘하나님 부인할 수 없이 이 사람은 천재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천재이면 무엇 합니까? 안식이 없습니다. 여러분 천재들이 대부분 정신병으로 인생을 불우하게 마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정신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격동하는 힘을 자기가 감당할 능력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재는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것이고 그런 속에서 아주 외롭게 살다가 죽는 사람들이 천재들입니다. 사실은 그런 천재들은 천재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그것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노력을 합니다. 그것이 천재입니다. 그러나 그 둘만 가지고는 한 시대에 두각을 나타내는 천재가 될 수 없습니다. 세 번째가 뭐냐 하면 혹독한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에서 한 시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천재가 나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천재성은 없는데 고생만 많이 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냥 고달픈 것입니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합니까? 그냥 고달픈 것입니다. 고달픈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고백합니다. ‘주님의 품에 안기기전까지는 내 인생의 안식이 없었습니다.’
제가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예수를 믿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전도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렇지만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가족들에 이끌려서 다녔는데 15살이 되던 만으로는 14살 2개월, 그리고 우리 나이로는 15살이 되던 중학교 2학년 겨울 2월 어느 날 교회를 가고 있었습니다. 교회를 가다가 논둑에 엎드려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한없이 울었던 것이 물론 그때도 가난했지만 먹을 것이 없고 여자 친구가 없고 그래서 운 것이 아니라 통곡을 하면서 울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왜 내가 원하지도 않는 인생을 살아야하나? 그리고 나와 마주하고 있는 이 세계는 도대체 나의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은 과연 존재하고 있는가?’ 그러면서 통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교회를 다니고 설교를 들었지만 이런 나의 가슴 저리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도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제가 보기에는 거의 생각이 없는 사람들 같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왜 저 사람들이 종교를 가져야하는지 종교를 가질 수밖에 없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의심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믿고 저 사람은 저렇게 믿기 때문입니다. 통곡을 하고 한참을 울고 굉장히 추운 겨울이었는데 15살 소년이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날 때 결심했습니다.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니 인생의 날이 얼마나 불행했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저는 학교 공부를 되게 못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제가 지진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학교 가는 날이 단 하루도 행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깡패처럼 노는 것을 좋아했느냐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주 착실한 학생이었고 학생들이 술을 먹고 춤을 추고 까불고 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신물이 나도록 싫어했습니다. 학생들이 춤을 추고 그럴 때 ‘춤을 출래? 맞을래?’ 그러면 나는 그냥 맞는다고 했습니다. ‘어디 그렇게 경망스럽게 몸을 흔들고 그래도 선비의 길을 갈 사람인데…….’ 그랬습니다. 그리고는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읽는 것이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문학작품들을 읽었습니다. 위로가 되었던 것이 그런 식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많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참을 읽는데 고민들은 기가 막히게 설을 푸는데 아무도 결론에 도달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한참을 읽다가보니까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상가 철학자의 책으로 점프하는 것입니다. 읽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답을 찾는 것입니다. 그때가 아마 70년대입니다. 제가 71년도에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니까 그때가 실존주의 철학들이 거의 휩쓸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마지막에 도달한 결론은 문제는 그런 사상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행복해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깨닫게 되는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그 피곤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식이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안식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요일이었는데 전도하는 사람 없이 나 스스로 걸어서 교회에 갔습니다. 이곳의 1/3도 안 되는 조그마한 교회에 한 30명이 방석을 깔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장작난로를 피우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이런 피아노가 아니고 끼꺽끼꺽 풍금을 밟으면서 찬송가가 나오는데
(찬양)
돌아 와와 돌아 와와 맘이 곤한 이여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예배당에서 안식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일이 제가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안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우리를 그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는 분입니다. 가끔 목회를 하다가 오만 군데를 돌아다니다가 완전히 지쳐서 오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다 그렇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 교회에서 무엇을 할까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라. 너무 피곤하게 인생을 살아왔으니까 당분간 쉬어라. 영혼의 안식을 누려라. 봉사를 안 해도 좋으니까 말씀을 듣고 눈물로 기도하고 돌아가서 또 하나님의 은혜를 새기고 그러면서 먼저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어라.” 그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시인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그렇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영혼의 쉼을 주셨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염려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십시오. 로마서 8장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선물로 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그래서 정말 결핍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염려에 의해서 마음이 조급해져서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왜 없겠습니까! 그때마다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신뢰가 부족하면 그것이 자신의 영혼에 깊은 침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일생이 주님의 손에 있다는 것과 이제껏 산 것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제가 항상 부르면서 이런 문제에 있어서 위로를 받던 찬송이 있었습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우리의 인생이 주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경제적으로 고통 받으면 주님은 더 아프실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면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깊이 의지하면서 ‘이제껏 살아온 것이 주님의 돌보심과 은혜로 살았기 때문이고 앞으로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런 고백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런 모든 영적침체로부터 벗어나서 우리 주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제껏 여러분을 결핍한 땅에서 입히고 먹이고 마시며 살아오게 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 아니고 누구십니까? 여러분의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