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있는 섬김 기도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7-28)
녹취자 : 장미연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습니다. 구경하러 따라온 사람들은 그냥 따라갔는데 진짜 예수님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여자의 큰 무리들’ 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가만히 보면 참 여성 사역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당시에 사람들의 사고에 여자는 - 하나님은 원래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는데 - 유대인들이 기본적으로 생각해요. 사람을 헤아릴 때 숫자로 치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히브리어에서 여자 99명하고 남자 1명이 섞여서 동작을 하잖아요. 남성 복수로 사용해요. 숫자로 치질 않아요. 그렇게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이었으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셨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울면서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 십자가에 죽음의 의미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잘 가르쳐 주셨지만 십자가에 매달리면 ‘우리가 구속받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주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생각 안 했습니다. 죽으면 그냥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게 통곡하면서 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주 냉정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브라이드리온에서 그 수많은 채찍에 맞고 자기 십자가도 못 지고 가실 정도로 그렇게 힘이 없으신데 그 예수님이 뒤를 돌아다보시면서 피투성이가 되어서 뭔가를 여자들에게 이야기한다고 하는게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무슨 얘기냐면 너무너무 유언처럼 하시고 싶었던 말씀입니다. 안하면 안될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돌이켜 서서 십자가 지고 가시면서 남기신 유일한 말씀입니다. 그러고 돌이켜 서서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냉정하게 들립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어라”
눈길을 끄는 것은 “예루살렘의 딸”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네 집안의 딸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딸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뭡니까? 하나님의 신적 왕권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중심지였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지상의 심장부였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너희는 나를 위하여 이렇게 통곡하고 우는데 기억하거라. 너희는 내 딸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딸이다.” 이게 엄청난 신학적인 항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에 이루어질 예수 구속의 사건에 종결의 빛으로 보면 이거는 뭘 의미하냐면 “하나님의 나라의 딸들아”.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언약 백성의 딸들아. 너희는 잊지 마라. 너희가 나를 그렇게 사랑하지만 너희가 사랑하는 나는 나의 육신이 아니냐. 그런데 나의 육신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죽는다. 이제 너희가 사랑하던 나의 육신은 없다. 내가 죽어 이 예루살렘이 육적인 왕국이 영적인 새 예루살렘이 되는 거다. 너희들은 예루살렘의 딸이다.” 그걸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실질적으로 당신 자신을 향한 사랑을 육신적인 사랑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딸들아. 그러면서 부탁하시는 말씀이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어라.” 하시면서 말씀하시는데 이게 AD 70년에 있습니다. 디도 장군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의 날을 예고하는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모든 주석가들이 일치합니다. 그 때에 디도 장군이 쳐들어왔을 때에 최후의 날이 요세푸스의 Antiquities 같은 데 보면 다 나옵니다. 그걸 다 묘사할 수는 없지만은 분명한 사실은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 너희와 먹고 자고 함께 사랑하며 살았지. 그런데 나의 육신은 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간다. 슬프지? 그런데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보다 전혀 슬픈 것이 아니란다. 다음에 일어나는 것에 비하면 내가 이렇게 죽는 것은 오히려 기뻐해야 될 일이다. 왜? 내가 죽지 않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안 오신다. 내가 가는 것은 너희에게 나보다 더 큰 선물을 보내기 위해서 내가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는 이게 슬픈게 아니다. 진짜 슬픈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후에 로마가 쳐들어온다. 너희의 자손들이 도륙을 당하고 이 화려했던 예루살렘이 쑥대밭이 되고 피바다가 된다. 기록에 나옵니다. 유대인들의 피가 도시에 도랑을 이루면서 흘렀다고 합니다. 그때가 온다. 그러니까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 ‘울다’라는 단어가 흐느끼는 단어가 아니라 통곡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경건주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루이스 블랭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는 자가 아는 자다. 우는 자가 깨달은 자다.” 울지 않은 자가 아니라 우는 자가 깨달은 자다. 울면 깨닫는게 아니라 깨달은 자는 운다. 내가 오늘 말하고자 하는게 그것입니다. 양 떼를 위해 울 수 있는 교역자가 되라. 양 떼를 위해 언제든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교역자가 되라. 이 교회 저 교회를 옮기고 이런 대우를 받고 저런 대우를 받고 교역전도사에서 전임으로 전임에서 부목사로 담임목사로. 이것은 형태일 뿐입니다.
전도사 때, 교사일 때 양들을 위해서 눈물을 많이 흘렸던 사람들은 전도사 되어도 눈물이 있는 목양을 합니다. 잊혀지지도 않습니다. 말썽꾸러기 청년이 있었는데 하도 뺀질거려요. 주일 학교를 하는데 걔라도 있어야 되겠어요. 선생이 없어서. 그래서 꼬셨어요. 내가 총각 집사 때 제발 성경학교 좀 와라. 전도사님도 안 계시고 내가 지도하는데 은혜를 받았어요. 그러고 나서는 이 말썽꾸러기가 열렬하게 전도를 하는 거예요. 골목에 전도를 나갔다가 애들이 선생님이 막 전도하니까 애들이 신나가지고 나도 교회갈래. 아이들이 막 따라오는 겁니다. 그런데 골목에서 엄마 몇 사람이 나와 가지고 막 욕을 하고 소리지르면서 자기 애들을 뺏어가는 거예요. 그때 애들이 한둘이 아니라 한 집에 셋씩, 넷씩 보통 그렇고 최소한 둘, 둘씩은 있을 때였어요. 우루루루 데려가는 거예요. 이 뺀질이. 예배도 잘 안 나오던 뺀질이가 비질비질 울면서 들어오는 거예요. 교회당 문이 이렇게 길거리에서 두 쪽으로 열리는 문이였는데 넘고 바로 들어오면 현관이고 현관을 열면 바로 예배당인데. 들어오는데 으악∼그러고 막 통곡을 하면서 들어오는 겁니다. 난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폭력이나 무슨 일이 있는줄 알았습니다. 그러더니 큰 소리로 소리지르면서 선 채로 막 하늘을 쳐다보면서 우는 거예요. “왜 그래?” 그러더니 나를 꽉 붙들고 그때 집사님이었으니까. “집사님 어떻게 하면 좋아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쟤네들이 예수를 믿으러 교회에 오는데 엄마들이 못 오게 했어요.” 그러고는 주저앉아서 통곡을 하면서 우는 거예요. 내가 인간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을까?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놀라운 거구나.
레스턴 교회에 있었을 때 일이에요. 대학부 집회를 갔어요. 내가 진짜 기도 많이 할 때고. 나는 목숨을 걸고 그 집회를 갔는데 그것도 가고 싶어서 갔나? 레스턴 교회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대학부에 여름수련회 강사를 세우는 줄 아세요? 구하다가 구하다가 못 구한 거예요. 그러니까 코앞에 닥쳐 가지고 아이들이 모여서 리더들이 회의를 해서 우리 수련회 어떻게 할거냐? 그냥 하나님 의지하고 전도사님이 우리 강사가 되어서 가시오. 자기 대학부 전도사한테 부탁을 한 거예요. 대학 전도사가 나는 도저히 못 하겠다. 그런데 리더 중 저쪽 구석에 있는 사람이 고등부 김남준 전도사님이 요새 한창 뜨겁게 설교하시는데 우리 전도사님 강사로 모시고 갑시다. 전례가 없는 일이지요. 옛날에 이동원 목사님이나 옥한흠 목사님이나 정근두 목사님. 최고의 강사들을 모시고 가다가 같은 교회 전도사를 데려간다고 그러니까 썰렁하겠지요. 목숨을 걸고 나는 갔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확실하게 대학부에 대해서 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진짜 가슴 아파하면서 우리 고등부 교사들이 정말 가슴을 치면서 매주 토요일마다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 집회에 가게해 달라는 그런 기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왔는데 담임목사님도 허락을 했다는 겁니다. 목숨 걸고 올라갔는데 이러고 앉아있는 거예요. ‘꼬래저 고등부 전도사 주제에 감히 여기가 어딘데’ 이런 눈빛입니다. 아니 설교를 하면 정신차리고 들어야 되잖아요? 고개 푹 숙이고 성경 넘기고 노트 만지작거리고.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든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하고 드디어 이제 기도 시간이 되었습니다. “기도합시다.” 그랬더니 절반 정도는 엄청나게 회개를 하는 겁니다. 절반 정도는 반감으로 꽉 차 있는 겁니다. 이쪽에선 통곡하고 이쪽에선 기도도 아니고 입 꽉 다물고 묵묵부답인 태도로 버티는 겁니다. 그래서 내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친구들이 절대로 이기지 말게 해달라고. 만약에 저 친구들 그냥 돌아가면 하나님 지시는 거라고. 저 녀석들 무참하게 한 번 하나님이 던져서 깨트려버려달라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어라? 벌떡 일어나더니 웬 녀석이 걸어오는 겁니다. 나한테 항의를 하러 오나? 별것들이 다 있으니까. 올라와 봐라. 내가 하나님의 사람인데 올라와봐라. 이런 덩치입니다. 더벅더벅 걸어옵니다. 내 앞에 탁 서는 겁니다. 아마 뭐 빨리 끝내달라든지, 왜 집회를 이런식으로 하냐든지, 우리 대학부 정서하고 안 맞는다든지. 그런다고 그러나? 어깨를 들썩들썩 거리더니 무릎을 털썩 꿇는 겁니다. 그러더니 내 바지가랑이를 꽉 붙드는 겁니다. 그러더니 울면서 전도사님 날 위해 기도해주세요. 죽을 것 같아요. 그러는 겁니다. 기도하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셔서 얘가 막 엄청난 회개를 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게 신호탄이 되가지고 쭉 줄을 서는 겁니다. 기도해달라고. 그러더니 그 줄 사이를 누가 새치기를 하고 들어와요. 대학부 교역자였습니다. 전도사님 날 위해 기도해달라고.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사랑을 많이 하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것은 이미 회개가 그 사람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의 단계를 넘어서 이 사랑의 단계로 접어든 것입니다. 그 열매가 통곡하는 기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그 충격적인 광경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전에 고등부에 큰 부흥이 있고 은혜를 받았는데 고등부 때 교역자로서 당시 내가 교수였으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볼 때 교사 17명, 학생 85명. 교사, 학생하고 전부 다 100명 정도 출석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60%는 회심 근처에도 안 간 사람들.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것도 아주 넉넉하게 쳐서 60%는 내가 교역자로 양심에 손을 얹고 그리스도인이 되본 적도 없는 애들입니다. 전혀 기독교인 아닙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게요. 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도 17명 정도 있었는데 그중에서 4, 5명은 구원하고 별로 상관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몇 사람은 의심이 되고. 영적 침체가 아닙니다. 복음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기독교 운동권 비슷하게 의식화된 사람들입니다. 애들이 그 모양이니 예배를 제대로 드릴 턱이 있습니까? 오죽했으면 예배시간에 비행기를 날립니다. 설교를 하는데 애들 떠드는 소리에 설교자의 언어가 저 뒤에까지 전달되지 않아요. 나는 목회를 안 하면 안 했지. 그렇게는 안 하거든요. 쳐다보지 않은 사람한테 나 연설 안 하고 듣지 않는 사람에게 설교 안 합니다. 처음에 가면 애들한테 잘 보여야 되는데 처음 올라가서 그 광경을 보면서 반쯤 잡았습니다. “너네 여기 하나님 없다. 이 개떡같이 드리는 예배에 하나님 오신다면 내가 말리겠다. 절대 너희들 여기서 하나님 못 만난다.” 그랬습니다. 전임자는 좀 마음이 상했을지 모르지요. 나는 사실대로 얘기했습니다. 이게 무슨 예배냐? 하나님 조롱하는거지. 그다음 워낙 전도사가 쎄게 나오고 나이도 많으니까 이러고 있는 거지요. 대들지는 못하고 그러고 있는데 얘네들이 제일 지겨운 게 설교시간이고 두 번째 지겨운게 공과 공부 시간입니다. 선생님이 수시로 안 나옵니다. 토요일에 술 먹고 안 나오는 친구들도 있고. 안 나오면 애들이 좋다고. 총무 선생이 광고를 합니다. 김아무개 선생님 편찮으신지 못 나오셨습니다. 애들이 막 환호성을 지르는 거예요. 집에 간다고. 그러더니 하나님이 한 번 쓸고 지나가셨어요. 들어보세요. 그때는 핸드폰이 없으니까 노트를 들고 공과 공부하는 반을 제가 다 다녀요. 거기다 다 적어요. 공과 분위기와 태도, 그다음에 공과 공부 방식이나 이런 것들에 지적할만한 것들을 이제 다 적어요. 적고서 기록을 하는데 선생님이 안 온 반인데 잊어버리지도 않아요. 고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반이었습니다. 한 8명 정도. 아무도 안갔어요. 그리고 모여 앉아서 다른 애들 공과 공부하고 자기네들이 기도회를 하는 거예요. 기도회를 누가 인도하는 게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기도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중 한 아이가 혜수라는 애가 있었는데 하얀 티셔츠를 입고 단발 머리를 하고 덩치가 좀 있었던 자매였었는데 뒤에 서 있었어요. 아이들은 눈 감고 기도하는데.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기도 처음 들었어요. 울먹이면서 기도하는데 “하나님, 우리 선생님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제발 우리 선생님이 예수님 만나 새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세요.” 애들 눈에 자기 선생님이 예수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눈치를 챈 거예요. 구원이 필요하다고는 말은 못하지만 그 의미를 기도하는데 애들이 다 흐느끼는 거예요.
내가 말씀드리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교역자가 울지 않으면 그 교역자는 양 떼들이 울면서 기도해주어야 될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 교역자는 영적인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비록 어리나 내가 영혼의 목자다. 그리고 이 영혼들을 위해 내가 목자로 부름을 받았다. 내가 이 영혼들을 끌어안고 주처럼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다시 산다. 그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목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