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들으신 기도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을 흐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꼐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시 39:12)
녹취자 : 오지윤
언제 이 시가 쓰였는지는 확정할 수는 없지만, 시인이 뭔가 깊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고 있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원래 영적인 침체라고 하는 것이 영혼의 깊음과 환경의 깊음이 함께 나타납니다. 환경적으로 많은 고난이 삶의 깊음이라면, 영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침체는 영혼의 깊음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만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한없이 무기력하고 절망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하나님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고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사실 행위로만 말하자면 다윗처럼 나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마 다윗을 비난하던 원수들도 다윗처럼 살지 않은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금하시던 인구조사를 해서 수많은 백성이 원욕으로 죽어 나갔고, 굳이 그 수 많은 비빈들 첩첩들 가운데 만족하지 않고, 우리아의 아내를 탐하여 범죄하게 되었으며, 그 범죄를 덮기 위해서 충성한 죄 밖에 없던 우리아를 간접 살인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여호와 보시기에 심히 악하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이 시인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 역사에서 모든 위대한 신학자들과 사상가들의 한 전범으로 남은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이, 자신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자기를 불쌍히 여기고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전범을 보고 사실 아우구스티누스가 회심하는 계기가 되었고, 브리큰리지 워필드도 이 다윗의 상하고 깨어지는 마음을 보면서, 그것이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임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믿음의 전제 아래서 그는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로, 그의 기도는 부르짖음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시편에서 기도는 침묵하며 잠잠히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부르짖는 기도, 이 두 가지를 대조합니다. 어느 기도가 더 우월하냐고 하는 것을 시편이 말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기도든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상하고 통애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신앙의 체험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표현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시편에 나오는 이 부르짖음의 기도, 카라티 라고 부르는 부르짖음의 기도는, 단지 소리를 내어 하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자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솟아오르는 거룩한 정서가 일상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 말씀에 내가 백 퍼센트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존 오웬 목사님이 살던 시대에는 이상한 신비주의 교리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넓게 보면 천교도들 속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율법적인 청교도, 알미니우스적인 청교도, 복음주의적인 청교도. 신비주의적인 청교도, 이렇게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 신비주의적인 청교도들 속에는 말은 청교도라고 하지만, 이상한 신비적 사상을 가진 사람이 많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손발을 덜덜 떨면서 기도를 한다든지, 앞에 있는 책상을 흔들면서 기도한다든지, 이렇게 자신의 간절함을 육체로 표현하는 것이 습관화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소리를 지르면서 하는 기도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위험성을 보면서 오웬 목사님은, 기도는 소리를 내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면서, 예외가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 속에 기도의 정을 억제할 수 없을 때는 소리를 내야 된다. 시편에 나오는 부르짖음이라고 하는 기도의 형태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압도하는 거룩한 정서, 압도하는 마음의 간절한 소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소리를 질러야 들으실 수 있도록 멀리 계신 분은 아니지만, 오히려 내 마음이 하나님께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에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것을 그 마음의 진실성과 관련해서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그 부르짖음이 네게 들린지라" 그렇게 거짓이 아니라, 진심으로 부르짖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 기도를 특별한 방식으로 주목하시게 만드는 한 방법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더 많은 의존과 더 큰 의뢰의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부르짖음이 있습니까? 나는, 이것은 지금 이 속에서 나오는 단지 소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기도가 한이 되었고, 나의 간구가 나에게 원통한 것이 되기까지, 내 뼛속까지 박혔으니,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 기도가 나에게 한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그렇게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느냐는 얘기입니다. 교회에서 일합니다. 누구나 잘하기를 원합니다. 교회에서 목회를 합니다. 누구나 커다란 실수 없이 잘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목회를 합니다. 내 목회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이 세상 누구든지 모두 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근데 그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하고 싶은 것, 다니엘이 평생을 이방의 임금을 섬겼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임을 이방의 왕도 알았듯이,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큰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런 절체절명의 간절한 바람이 있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가족의 구원? 매일 기도 제목에 올리는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자기 가족 아닙니까? 자기가 부르짖는 것입니다. 패스할 것입니까? 자기는 거의 기도하지 않고, 마음의 울부짖음도 없는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가족구원을 위해서 패스해주면, 그게 얼마나 응답이 되겠습니까? 당연히 우리 부서 목회 잘하게 해 달라고 이 사람 저 사람 기도 제목을 올리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근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목회 아닙니까? 자신이 울부짖어야 합니다. 자신이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 소원이 내가, 나 자신이 낮아지고 낮아지고 깨어지고 깨어져도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소원이 있다. 그것은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그래서 이 부르짖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음하는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신음하는 소리를 내는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것과 동일한 마음의 부르짖음입니다.
난 여러분들에게 오늘 묻고 싶습니다. 기도 제목이 정말로 기도 제목입니까? 그 기도 제목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삶입니까? 아니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삶입니까? 목회자 한 사람이 자신의 교회에 그렇게 자기를 다 던지면서,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나에게 상상하기도 싫은 현실입니다. 라고 할 때, 거기에서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평생 한 번도 그 진수를 맛보지 못하고 인생을 끝내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본인을 위해서도 매우 불행한 것입니다. 시편을 읽을 때 부르짖음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가슴이 덜컹하지 않습니까? 마치 길을 가다가 덜컹, 차가 무언가를 만나서 덜컹하는 것처럼, 이게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얼마나 애절하고 간절했으면, 하나님 앞에 그 정을 억제할 수가 없어서 큰 소리로 원한에 사 묻힌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길거리에서 큰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원통한 사정을 통하지 않습니까? 그 심정입니다. 그런 심정으로 기도하면서 귀를 기울여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뒤의 기도는 필요가 없습니다. 간절히 그렇게 부르짖기만 하면 하나님은 어디서든지 그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중심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것입니다.
어젯밤에도 기도하러 나왔더니 여러 명이 나와서 기도합니다. 자매 하나가 저쪽에서 그렇게 애달프게 울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셨으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부르짖는 여러분들의 기도의 제목이 부르짖음의 기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눈물 흘리는 기도였습니다. 내가 눈물 흘릴 때 잠잠하지 마옵소서였습니다. 이 눈물도 여러 종류입니다. 이 눈물은, 자신이 비참해서 오는 눈물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모든 눈물이 그 눈물이 아닙니다. 이 눈물은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입니다. 자기 연민의 눈물이 아니라, 어떡하든지 이 비참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한 눈물입니다. 러이스 브레이크라고 하는 화란의 제2 종교개혁, 데보치오 모데르나 운동에 지도자였습니다.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는 사람이야말로 깨달은 사람이다" 진리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고 난 다음에 옳거니 하고 무릎을 치는 사람은 진짜 깨달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를 객관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그 진리를 진실로 깨닫고 나면, 제일 먼저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편을 두둔을 해도, 자기는 그 진리에 어긋나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기에 러이스 브레이크는 "우는 자가 아는 자다"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이 시인이 이런 어려움을 만나서, 밖으로는 환경의 어려움, 안으로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협공을 받으면서 괴로울 때, 그는 마음 둘 곳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아무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시련을 통해 메시지를 주려고 하면 환경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 음성이 안 들리는 곳으로 도망을 가고 싶어 합니다. 그게 요나의 심정이었습니다. 니노에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명령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소위 이야기하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오는 지역주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들마다 테리토리가 정해져 있어서 그 직영 바깥을 벗어나면, 그 지역 신이 더 이상 자기를 주관하지 못하고, 다른 지역의 신의 관할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로컬갓 개념입니다.
선지자로 부름은 받았지만, 요나의 신앙의 출발이 얼마나 조잡했는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이, 풍랑이 일어날 때 네가 누구냐, 어디로부터 왔냐 그랬더니, 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도망가는 중입니다.
삼척동자에게 물어봐도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이 바보 같은 선지자는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거나 시련을 주시는 것은, 옛날에 잘못한 것에 대해서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그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은 당신의 손에 피를 묻히며 보복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묘사들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교훈하기 위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때, 당신이 원하는 뜻을 우리가 올바로 바르게 판단하지 못할 때, 때로는 하나님이 극단적으로 우리를 몰아붙이셔서, 자신이 이제껏 생각하던 상식과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스스로 모른다고 고백하게 만들어서 하나님 손에 자기를 맡기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끝까지 견디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돼야 되는데 아예 피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고생은 하지만, 고난은 못 당합니다. 고통은 겪지만,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을 못 만나면, 나머지 모든 일은 옛날 우리들이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주판 튀기고, 계산하고, 어느 쪽으로 가야지 내가 덜 고생할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갈 길을 모두 정하고 상식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생생한 신학 성경이 이야기하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에서 잠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원하십니까?
이 시인은 어떤 죄를 지었고, 이 시간에 어떤 가책을 받으면서 괴로워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 온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양심이 나는 떳떳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주는 나를 용서해주시옵소서 라고 하나님 앞에 빌어야 하는 비과굴인 구석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기도조차도 눈물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자신을 다 쏟아놓는 눈물의 기도였습니다. 그 눈물 속에는 죄를 짓는 자신에 대한 미움, 그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에 대한 용서를 비는 마음 모든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묻고 싶습니다. 신앙생활은 원래 그 자체가 마음을 지키는 삶입니다. 모든 정상적인 종교가 똑같습니다. 불교에서 수없이 나오는 참 선과 마음을 고요히 하는 마음 수련법, 모든 것들의 제목이 마음 챙김입니다. 심지어 그 종교적인 요법들을 활용해서 심리치료에조차도 자신의 마음을 보살피도록 만들고, 심지어는 생활 속에서 어떻게 출렁거리지 않는 마음으로 살 수 있을지 마음 돌보는 공식, 규칙까지 만들어냅니다. 이 얘기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돌 같던 마음에서 살 같던 마음으로 바뀌어서, 주님의 손에서 몰락몰락 움직이는 마음이 되는 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지 아십니까? 교회에 나와서 보면, 돌가슴 철마음 경연대회입니다. 누구 마음이 더 돌 같은지, 누구 마음이 더 쇳덩어리 같은지 한 번 내기해보자, 그 경연장이 교회입니다. 거기서 결코 순위를 뒤지지 않는 사람들이 목회자와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성찬식 중에 제일 건조하기 짝이 없는 성찬식이 목회자들이 모여서 하는 성찬식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굳어있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의 눈물이 없기 때문에 돌가슴 철마음 경연대회를 하는 것입니다. 영화 한 편을 보면서 감동을 받고, 가수들의 노래에 눈물을 글썽이고, 드라마에 감동적인 대사에 손수건을 얼굴에서 떼지를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서는 눈물을 흘린 적이 없고, 기도할 때 통곡하면서 하는 기도는 성경에나 나오는 남의 이야기처럼 되는 것입니다. 정상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이 그런 길을 걸어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정상이 아닌 것은 비정상이고, 비정상인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누구를 따라가야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홀시스 보너가 18세기에 부흥에 관한 기록을 정리하는 가운데, 청교도들을 평가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하던 그때, 그들은 눈물의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며, 예배할 자유를 목숨과 바꾸며 죽어갔습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깨어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눈물을 흘리는 기도가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는 나그네로서 자처했습니다.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이 왕이 되기 전에 쓴 시인지, 왕이 되고 나서 쓴 시인지 누가 단언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만약에 후자의 가능성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요단강 건너편으로, 트렌스요르단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던, 반역을 당한 그때를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왕궁도 잃어버리고, 나라도 잃어버리고, 남의 땅에 왔습니다. 그랬더니 묻는 것이, 너네 하나님은 어디에 있냐? 너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있다면 너희들이 왜 이렇게 그 나라를 빼앗기고 우리 땅에 와서 우거하는 나그네들이 되었느냐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찬양)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나그네입니다. 우리에게는 나그네 하면 낭만이 떠오를지 모르지만, 이스라엘 사람, 다윗의 핏속에서는 나그네라는 말은 한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잃은 민족의 설움, 겨우 36년 겪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어서 일본하고의 관계를 힘들어합니다. 이 사람들의 나그네에 대한 세월은 400여 년이 넘는 세월이었습니다. 그것을 남의 땅에서 우거하면서, 짐승들을 데리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살고, 식구가 죽어도 어디 묻을 수가 없어서 그 나라 사람하고 흥정해서 땅을 사야지만 겨우 시신을 묻을 수 있을 정도의 자기의 아무런 정착지가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 설움이 이해가 갑니까? 쇳방살이를 해보니까 이해가 됩니다. 못 하나 박으면 주인이 소리소리를 지르고, 그래서 계약 갱신 때가 되면 주인의 눈치를 봐야 되고, 얼마나 올려달라고 하나, 방을 빼라고 하지는 않나, 그러한 설움을 한 번 극단적으로 연장시켜보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셋방살이하는 사람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는 않지 않습니까? 이들은 우거할 곳이 없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수시로 느끼면서 살아야되는 사람들이었고, 원주민들에게는 어디를 가든지 침입자였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저는 나그네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 나는 외롭고 또 외로운 자니이다" 라는 고백입니다. 근데 그 외로움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릴 수 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위로를 주는 한 구절은, "나는 나그네입니다" 한없는 외로움과 불안을 보여주지만, 시인은 믿음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입니다.“
(찬양)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70년대에 금요일이면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모여서 눈물바다가 되면서 부르는 찬송이 이 찬송가였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주께로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께로 옵니다. 하면서 온 교회가 눈물바다가 됐습니다. 나그네는 나그네인데, 의지할 수 있도록 자신의 손을 붙잡아주고 계신 분이 딱 한 분 주님입니다. 거기서 그 손을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손을 꼭 붙들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고, 그것을 놓으면 죽는다는 절체절명의 정신으로 주님의 손을 붙들고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원수들이 다윗을 비난했지만, 대부분 다 진실이었습니다. 억울할 때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가 지은 죄, 심지어 살인죄에 대해서 무엇을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시인에게 손가락질하던 의로운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지 기억에서 사라지고, 그 손가락질을 받던 이 가련한 시인은 오늘도 살아서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죄를 지었으나 상한 마음 된 사람이었기에, 죄짓지 않고 돌덩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보다 이 사람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가 부르짖을 때 이 상황에도 범죄한 이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셨고, 그가 눈물 흘릴 때 뻔뻔한 녀석이라고 욕하는 대신 주님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라고 고백하는 이 시인을 가엽게 여기셨습니다. 그 시련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께 몸부림치며 부르짖었는지, 시인이 건강에 핍절하게 되었습니다. 죽을 것 같이 건강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자신이 떠나 없어져 버릴 것 같은 건강의 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오죽했으면, 하나님 나의 건강을 회복시켜주십시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나를 살려주십시오. 그리고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다시 한번 주님 앞에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달라고 비는 그러한 간절한 기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세 가지를 마음에 새깁시다. 어떠한 처지에 여러분이 있든지 한 가지 믿음을 가지길 바랍니다.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들으실 것이다. 그리고 세 가지, 부르짖음이 있는 기도, 눈물 흘림이 있는 기도, 나그네지만 주와 함께 있음을 믿는 기도, 이 기도로 주님께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