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기도가 열릴 때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3-5)
녹취자: 이새봄
시편 31편에도 이중의 어려움에 둘러싸여 있는 시인을 보여줍니다. 그 이중의 어려움이란 하나는 안에서 솟아나는 어려움이고 또 하나는 바깥에서 들어오는 어려움입니다. 안에서 들어오는 어려움은 10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이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서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엇인가 자기 안에 있는 큰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괴로워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깥으로부터, 바깥으로부터 오는 어려움은 사람들의 끊임없는 대적과 특히 비방이었습니다. 그래서 13절에 말하기를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뺏기로 꾀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모두 자신을 비방하는 것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진짜 그런 사람들은 아주 소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방을 들을 때 많은 괴로움을 겪습니다. 더욱이 바깥의 비방이 자신의 양심으로도 회피할 수 없는 근거를 가진 비방일 때에는 영혼은 더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것이 자신의 외모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12절에서 “내가 잊어버린 바들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 같이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잠시는 기억하지만 “누가 죽었다더래” “아 그랬어?”라고 말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모두 잊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때 그 유명했고 한때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 잊혀져 버린 것이 마치 죽은 지 오래된 사람과 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처지는 깨진 그릇과 같이 되었으니 이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외모까지도 사람들에게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것처럼 싫어버린 바 된 사람이 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때에 이 시인은 한 가지 한 일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안으로부터 시작되는 어려움과 밖으로부터 시작되는 고통, 그 사이에서 죽은 것 같은 고통스러운 일들을 겪고 거기에는 또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일체의 예의가 없이 거짓말로 자기를 괴롭히고 평판을 떨어뜨리는 고통스러운 상황도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라고 해서 사태가 시작될 때 즉시 모든 것을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랬다고 간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랬다면 그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시킨 것이고 태산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라도 작은 일이 일어나도 마음에 괴로움이 오고 마음에는 물결이 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때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첫째로 주께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해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의 산지를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은 유난히 높은 산에는 바위들이 많고 그 바위는 사람이 들어가서 자기 몸을 감추면 절대로 화살이 날아와도 창칼을 던져도 피할 수 있는 그런 안전한 바위입니다. 우리가 반석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추르(צור)’라고 하는 이 반석은 신학적으로 구원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반석이라고 그렇게 많은 곳에서 노래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바로 그 반석에 피하는 그림을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으로부터 오는 피살과, 비난의 화살과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와 많은 화살들이 쏟아질 때 그는 여호와께 피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만세 반석에 숨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 고통스러운 날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피할 때에는 예측도 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는데 바로 그 만세 반석 아래서 하나님이 시인을 위해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쌓아두신 은혜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적들의 공격이 심해지고 화살이 이리저리 날아오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때 그런 만세 반석을 찾았습니다. 거기에서 간신히 숨어서 전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보니까 누가 갖다 놨는지 과일과 방금 구워놓은 것 같은 떡이 잔뜩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물도 한 동이 놓여 있습니다. 그때 며칠을 굶주린 여러분의 기쁨은 어떻겠습니까? 거기서 물로 목을 축이고 따뜻한 떡으로 배를, 주린 배를 때우고 그리고 과일을 먹으면서 새 힘을 얻게 될 때 이제 비로소 마음의 불안이 가시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전쟁하는 것 같은 고난의 상황에서 만세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피한 사람들에게는 피난처만 제공되지 않습니다. 그 피난처 아래는 반드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누릴 것이 있습니다. 시인이 그렇게 주님께 피한 그 반석 아래서 그렇게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그것을 깊이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냥 은혜가 아니라 쌓아두신 은혜라고 했습니다. 한 둘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때 여러분 안달해 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오해할 때 분노해 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들은 인생 살다 보면 늘 있는 일이고, 여러분들은 잊었겠지만 여러분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했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오직 주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그런 때의 주께로 피합니다. 만세 반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품으로 피합니다. 피할 때는 큰 뜻 없이 너무 두려워서 환란이 무서워서 피했지만 피하고 보니 하나님이 필요한 것들을 많이 은혜로 쌓아두셨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그 은혜를 누리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시인은 또 한 가지 사실을 고백합니다.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서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이 인생은 시인 자신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뭔가 자연스럽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주님께 피했더니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라는 뜻입니다. 마치 시편 23편에 나오는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셨나이다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사람이 주를 위해서 낮아지는 때가 있습니다. 예수 위해 핍박받고 예수 위해 욕을 먹고 예수 때문에 비난을 받습니다. 그것이 정말 교회를 위한 일이고 그 일이 정말 옳다고 믿기 때문에 하려고 순수한 마음에 했는데 그걸 몰라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비난을 받고 구설수에 오르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마음의 가벼운 후회가 스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2등이나 했을 텐데 왜 그걸 굳이 하겠다고 고집을 해서 내가 사람들에게 이런 비난을 받는가, 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그 사람들 앞에서 보라는 듯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게 하나님이 자기를 두려워해서 당신에게 피하는 사람들을 위해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그건 아주 좋은 경우겠지만 또 나쁜 경우도 있겠습니다.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데 주께 피했습니다. 사람들이 비난하는 모든 게 사실입니다. 저 사기꾼, 저 도둑놈, 저 죄지은 자, 저 불충한 놈. 그렇게 욕하는 것이 사실인 걸 어떡합니까? 그래도 주님께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가 주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의와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무한한 의의 근거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걸 기억하며 살게 하기 위해서 종종 하나님은 양심이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사태에까지 직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도 주께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 앞에 “잘못했습니다”라고 주께는, 사람들에게는 변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주님께는 정직하게 그대로 토설하고 그리고 주님께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성을 들어주십니다. “그래 맞다. 너희들이 비난을 했는데 그게 사실이고 이 놈은 진짜 몹쓸 놈이란다. 옜다!”하고 집어던지면서 “너희들이 마음대로 짓밟거라” 엄마가 화가 나서 자기 자식은 볼기를 때려도 이웃 사람이 대신 그렇게 해주겠다고 와서 작대기로 자기 아이의 볼기를 후려 갈기면 가만히 내비두지 않습니다. 잘못했으면 하나님이 야단치시고 하나님이 용서하신 후에는 하나님이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야구나 축구를 보면은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고 누구를 벌 준 건 아닌데 잘못했다고 경고한 후에 리플레이를 시킵니다. 다시. 게임 어 게인. 나는 그것이 젊었을 때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라고 하는 어떤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여태까지 살아온 삶이 잘못되었, 좀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은 호루라기를 부십니다. 그리고 다시. 나한테 불리했던 경기를 다시 그 지점에서 다시 재기하라. 그리고 다시 호루라기를 붑니다. 이런 일들이 경기에서 수없이 일어나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안 넘어진 사람이 누가 있고 미끄러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고 약해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고 아프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에 있고 한 번쯤은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천국에서 눈 뜨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시아에서 그렇게 유명하고 어쨌튼 릴백 총장의 말에 의하면은 동양의 빌리 그레암이라고 불리운 스티븐 통 목사님도 이 자리에 와서 간증을 하시면서 자기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그 말을 하면서 울먹이는 것을 내가 봤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연약한 것입니다. 무슨 일은 안 당하겠습니까? 그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일을 만난 슬픔보다도 더 큰 은혜를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가 당신 자신에게는 얼마나 존귀한 자인가 하는 것을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보여주십니다.
저는 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신뢰하진 않습니다. 근데 신학대학원 3학년 때 진짜 인생이 벼랑 끝에 서 있었습니다. 그때야말로 정말. 사랑하는 할머니는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가정 안에는 경제적인 여유가 티끌도 없고 나는 영양실조로 학교에서 두 번 세 번 쓰러지고 이야기할 처지도 못되고 아이는 아파서 병원을 다니는데 돈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일은 공부하는 것 하고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수업도 마침 휴교령이 내려서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일 가서 간절히 기도하기를, 한 달이 좀 넘었나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길면 한 두어달 기도 했던 거 같습니다. 한 두 시간씩, 한 시간 반 아니면 길면 한 세 시간씩 기도를 했는데 그날 땀에 흠뻑 젖었습니다.
내가 막 기도하는데 내 말이 딱 막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주 또렷했습니다. 그래서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많이 기도했는데, 뭐 용서를 해주신다든지 아니면 여태까지 이렇게 고생하게 해서 미안하다든지 아니면은 뭐 너를 위한 무슨 엄청난 계획이 있다든지 뭐, 그때는 교수 같은 거 꿈도 꾸지 못할 테니까 이게 그렇게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는데 뭐 어떻게 누구를 보내주겠다든지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 짤막한 한 문장이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을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겠노라”
그리고 그 한마디 말씀에 마음은 완전히 꽃밭이 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와도 빼짝 마른 아내와 아파서 울고 있는 아이 이외에 빨리 이 집을 비워달라고 나가라고 하는 부동산업자,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그때는 내가 아내보다 기도를 훨씬 많이 할 때니까, “왜 그렇게 기뻐? 왜 그렇게 얼굴이 환해?” 한참 동안 말을 안 하다가 “응답받았어.” 뭐 응답받는 것은 우리 늘 있는 거잖습니까? 그 정도로 생각했겠죠. 그래서 뭐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신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하는 것을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겠노라” 그리고 정말 그 후로는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남김없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결국은 주님이 마지막에 해결해 주신 것이 은밀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셔서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의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다. 지난 성경에 ‘구설수’라고 그랬습니다. 구설, 구설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라. 시험의 때가 되면 마음상하는 일들이 세트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를 외롭게 하고 슬프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근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그런 곳에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래서 은밀한 곳에 숨긴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다른 사람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유리싸갈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숨겨졌다는 뜻입니다. 숨기니까 숨겨지는 거 아닙니까? 하나님이 못 보게끔 숨기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곳이고 숨김을 받는 자신도 그런 식으로 감추어져 본 적이 없는 그런 은밀한 곳에 우리를 숨기시는 것입니다. 거기다 하나 더 보태서 그 비밀스러운 장소에 다시 장막을 세우셔서 장막 속에 감추시니 이중으로 우리를 보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사람들은 촉새 같습니다. 마음에 있는 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그냥 떠들고 다닙니다. 그런 사람들의 정신 건강이 썩 좋지 않습니다. 근데 그게 잠깐입니다. 잠깐입니다. 그렇게 욕을 먹고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만 욕을 먹고 오해를 당하고 그래도 잠깐입니다. 사람들이 꾸며낸 일들, 거짓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뿌리 없이 허공에 서 있는 지푸라기와 같아서 얼마 지나고 나면 그저 그것은 바짝 마른, 마른 풀잎이 되어서 지푸라기로 흩어집니다.
진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붙들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종종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는 것을 어마어마한 일을 만난 것처럼 분노하는 그 자체가 자기 사랑과 정욕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 그렇게 쉽게 말했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내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나 너무나 싫은 것입니다. 이런 비밀들을 이 시인이 맛보았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 쌓아두신 은혜,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 비밀의 장막에 감추어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그런 은혜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아마 이러지 않았을까요? 내가 그 큰 환란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과연 이런 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 생각이 변하지 않았을까요? 시인이 그러면은 어떻게 했길래 주님이 보실 때에 주님이,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었을까요? 또 어떻게 했길래 주님이 보시기에 이 시인은 그냥 고난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께 피하는 자가 되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했길래 주님이 보실 때 이 양심의 고통을 받고 외적인 고통을 당하는 이 사람이, 주님이 자신을 숨겨주시리라고 하는 큰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졌을까요?
이것이 오늘의 결론입니다. 그에 대한 답이 22절에 나오지 않습니까?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먼저 그는 시련을 당했던 초기에 자신의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 술회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 나는 이제 주님의 목전에서 끊어졌구나.” 이것은 “주님의 목전에서 끊어졌다”라고 하는 것은 선택된 백성으로부터의 제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독특한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큰 특권, 특권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특권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것을 가리켜 말하기를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처럼,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이 친근히 하신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라고 반문할 정도로 이스라엘에게는 큰 특권이었습니다. 그것이 이 시인이 말하는 바였습니다.
근데 어, 그래서 결국은 “목전에서 끊어졌다”라고 하는 것은 “아 이제 혹은 나의 범죄로 인해서 혹은 나에 당한 이 큰 환란으로 인해서 나는 모든 희망이 사라졌구나. 결국 주께서 나를 잊으셨구나. 혹은 버리셨구나” 라는 절망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을 당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신자에게는 이 두 마음이 꽈배기처럼, 꽈배기처럼 싸우는 것입니다. 꽈배기가 이렇게 꼬여 있듯이 어느 날 어느 순간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더 간절히 기도해야 될 거 같아, 또 잠시 후에 생각하면 이제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아, 이제 모든 것을 그만두고 어디 편안한 곳에 가서 아무 압박도 받지 않는 상태에서 그냥 홀로 조용히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 것입니다.
근데 이 시인이 목전에서 끊어졌다 그렇게 내가 말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예이, 믿음이 없는 놈아. 그 따위 믿음 가지고 감히 믿음 가지고 감히 나를 만나려고 하느냐?” 이렇게 하지를 않으시고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부르짖을 데가 주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비명처럼 부르짖는데도 어쩌면 믿음이 충만한 기도가 아니라 절망감 속에서 부르짖는 기도인데도 하나님이 그것을 기도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가 못 살겠다고 신음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됩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충분한 기도는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목전에서 끊어졌다라고 했지만 그러나 부르짖을 곳은 오직 주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에 힘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부르짖는 비명 소리는 주님을 향한 구체적인 간구의 소리가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런 은혜가 많이 쌓여 있는 만세 반석 아래로 감추어 주셨고 인생 앞에서 그 은혜를 보여주셨으며 어떠한 대군들도 발견할 수 없도록 은밀한 곳에 숨기시고 비밀의 장막에 감추셔서 사람들의 다툼에서 피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시인이 마지막 도달한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나처럼 많은 시련을 당하는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거라. 여호와를 사랑하거라. 여호와는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느니라.” 이것이 결론이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 중에 시편이 우리의 가슴에 절절히 다가오는 이유는 연구실에서 쓴 시가 아니라 심지어 주님이 불러주신 거를 받아 쓴 것이 아니라 주님에 관한 수많은 경험들이 내 속에 용해되어서 그래서 그것이 피와 살이 되어서 되었던 것입니다. 뼈로 깎은 잉크병에 피를 잉크 삼아서 나의 지성을 펜촉으로 삼아 나의 수명이라고 하는 편지지에 기록을 한 것이 시편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이 아니고는 이 시편의 저자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결국 인생을 다 살고 나면 마지막에 뭐가 남겠습니까? 제가 몸이 아팠던 것을 대부분 보면은 과로했기 때문입니다. 쉬면 안 아픕니다. 그것들이 교회 일 때문이거나 아니면은 집필 때문입니다. 어제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저렇게 많이 쌓아둔 책을 누가 읽을까? 다 사라집니다. 그중에 몇 권이 남을지는 모르지만은. 그러나 지금도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데 이제 죽고 사라지고 더 이상 내 책을 돌보지 않을 때에 누가 그 책을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읽어 주겠습니까? 사라진다고 봅니다.
박윤선 박사님 살아계실 때 그 주석은 어떤 목회자의 서가에는 없는 사람이 없었고 교파를 막론했습니다. 오죽했으면 그 인세를 가지고 신학교를 돕는 일에 기증을 해 놓을 정도잖습니까? 지금 돌아가시자마자 현저히 덜 팔리기 시작하고 지금은 더 많은 좋은 책들이 나오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읽겠습니까? 인생 사는 게 다 그런 겁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그것입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유명한 신학자나 훌륭한 목회자나 사회적인 지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했던 한 사람, 여기에 잠들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 남은 묘비명입니다.
그 모든 환란과 시련의 역경을 거쳐오면서 시인이 내린 결론은 그렇게 우리를 만세 반석에 보호하시고 고난의 시절에 우리를 은밀한 장막에 감추셔서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는 여호와를 사랑하라. 괄호를 치고 설명을 붙이자면 딴 일은 모두 헛짓이니라. 그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정체가 뭡니까? 누구의 인생을 구합니까? 변함없이 기도하고 하나님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