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듣는 자세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 대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22, 33)
녹취자: 김경애
자, 어깨를 한번 펴보십시오. 등을 의자에 딱 붙이십시오.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리십시오. 눈은 내리지 말고 저를 보십시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것은 설교를 어떤 자세로 들을 것인가 입니다. 열린 교회는 개척교회였습니다. 이쪽으로 이사를 와서도 교회가 너무 가난해서 담임목사 사례비를 170만원, 180만원 밖에 못 받을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능력 있는 간사들이 많이 와서 일을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대학을 나온 젊은 여자 청년들 중에 드림이 열린 교회 간사가 되어서 유니폼을 입어보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을 뽑으면 4대 1, 5대 1이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돈을 많이 주어서가 아닙니다. 간사가 된 지체들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보면서 생각이 바뀐 것입니다. 교역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는 밖에서 사람을 쓰지 않았습니다. 왜?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밖의 사람들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그리고 많은 말씀들을 듣고 그렇게 치열하게 말씀과 함께 은혜를 받아온 성도들의 눈에 밖에서 온 교역자들이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은혜 받은 형제들을 신학교를 보내서 검증받은 형제들을 교역자로 썼습니다. 여러분보다 나쁜 학교를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여러분보다 더 훌륭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보다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미숙했습니다. 뜨거웠습니다. 잊히지도 않습니다. 2003년도 2004년도 간사 초임월급은 50만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좋은 직장을 다 버려두고 교회에 와서 일했습니다. 퇴근시간도 없었습니다. 제가 퇴근하지 말라고 시켰느냐 하면 아닙니다. 스스로 일했습니다. 정말 원 없이 미친 듯이 일하면서 그러면서 주님의 교회를 섬겼고 관리파트에 있는 직원들은 일주일 내내 먼지를 뒤집어쓰고 살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친구 목사님이 열린 교회에 와서 ‘아니 목사님 교회는 올 때 마다 공사입니까?’ 크고 작은 공사였습니다. 새로 오는 성도들이 더 좋은 교육을 받고 은혜를 받을 수 있으니까 그랬던 것입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녀보면 말씀 듣는 태도가 제일 불량한 사람이 교역자입니다. 두 번째가 교역자부인들입니다. 세 번째가 직원들입니다. 네 번째가 장로들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제대로 될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갔을 때 여기서 살았던 모든 삶은 회사 다닌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섬겼던 삶으로 계산될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상급을 주시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부끄러울 것입니다.
베드로가 기도 시간이 되어서 기도를 했습니다. 식사 때도 가까이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 보자기에는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날아다니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소리가 났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거기는 율법에서 금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먹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들을 먹지 아니하였습니다.’ 두 번째 소리가 나서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왜 속되다고 하느냐?’ 세 번 이 일이 있은 후 그릇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베드로는 환상을 보았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고넬료라는 이달리야 부대의 백 명의 군인을 거느린 집단의 우두머리가 있었습니다. 이방인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같은 시간에 기도하는데 환상이 보였습니다. 그랬더니 천사가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는 시몬을 청하여라.’ 그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는데 해몽이 있다고 약도까지 상세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기도 시간에 영적으로 하나님이 똑같은 계시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넬료가 사람을 보냈습니다. 정말 그 집에 찾아가니까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 사람들을 보고 ‘내가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그랬더니 이 백부장의 단순한 부하가 아니라 백부장을 신앙적으로 깊이 존경하는 부하들이 고넬료를 이 베드로에게 소개하는 장면입니다.
생전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기의 상관인 백부장 고넬료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첫째로 고넬료는 의인입니다. 이렇게 하기 쉬운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의롭다는 말은 그 사람의 말하는 문맥에서 보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복잡한 이신칭의의 교리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Upright하다는 것입니다. 똑바르고 올곧고 하나님의 말씀과 이 세상의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보아도 저렇게 올바른 삶을 사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인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이방신을 섬긴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두 번째 특징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 경외함이 의인이 된 원인이었고 뒤에 이야기하는 세 가지 아름다운 칭찬의 핵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랬습니다. 여기서 유대 온 족속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사람은 가이사랴에 있는 이달리야 군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방인이지만 행정적으로 유대인과 많이 접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유대주의에서 이방인들에 대해서 당시 무슨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이방인들은 지옥의 땔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선민사상입니다. 그리고 아주 훌륭한 사람이 있다면 천국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몸종이 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유대 온 족속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왜? 당시 로마가 군대를 통해 나라를 다스렸으니까 그 지역에서 덕으로써 유대인들을 다스려서 유대 온 족속이 이방인인 이 고넬료를 존경할 정도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문맥에서 보면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게 칭찬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아주 엄혹한 일제 강점기 때에 한국 사람의 무한한 존경을 받던 일본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정도라고 보면 됩니다. 네 번째는 이 사람은 탁월한 영적인 세계를 가진 사람입니다. - 여기를 보십시오. 설교시간에 기본적인 자세가 설교자를 보는 것입니다. 잠깐씩 메모할 수는 있습니다. 설교자를 바라보지 않는 것은 설교자에 대한 무례입니다. 모든 좋은 깨달음은 집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요새 예배드리는 것을 보면 마음이 상합니다. 한눈에 다 들어옵니다. 여기 직원, 저기 교역자, 저기 교역자의 아내. 다 들어옵니다.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정말 말씀이 마음에 들어가고 있는 것인가? 비가 쏟아지는 날 뚜껑을 덮어놓고 그릇을 밖에 내놓은 것 같습니다. 스며들어갑니까? - 고넬료는 영적으로 천사와 교통할 정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네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첫째 의인이요, 경외하는 자요, 칭찬받는 자요, 천사와 교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인의 프라이드가 과연 인생의 가르침이나 종교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 따위를 불러서 무엇을 배우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베드로는 사도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이방인 로마사람이 보기에는 고기잡이 출신의 지극히 평범한 그 이하의 사람이었고 자신은 이달리야 군대의 엘리트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고 합니다.’ 겸손했습니다. 이런 다섯 가지 덕목을 가진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것이었습니다.
설교를 제일 지리멸멸하게 듣는 사람이 교역자들입니다. 직원들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기독교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영혼은 매우 위험합니다. 책을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그 책의 지식과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기독교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책을 만질 때 책 내용이 머리로 들어가서 손으로 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가슴으로 들어가서 자기를 후벼 파고 원고지 앞에 얼굴을 묻고 우는 사람이 기독교 출판사에서 얼마나 되겠습니까? 생명의말씀사 직원이 있었습니다. 출판사 직원이 와서 ‘목사님 원고를 많이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출판사 직원들이 스펄전의 시편 설교 10권을 만들다가 모두 펑펑 울며 부흥회를 했습니다. 극히 드문 일입니다. 그것을 보고 여러분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설교시간에 설교 듣는 자세는 부동자세입니다. 뭐가 그렇게 산란합니까? 설교를 하다가 제가 자꾸 말을 더듬고 종을 칩니다. 누구 한두 사람 때문에 방해를 받는 것입니다. 열 번을 치면 그중의 두 번은 직원 아니면 교역자입니다. 솔직히 이야기합니다. 이름을 말하라면 말할 수 있습니다. 왜 목회자의 마음을 그 중요한 예배시간에 상하게 합니까? 저는 지금 여러분들을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씀생활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교를 듣는 사람이 집에 가서 무릎을 꿇고 성경을 읽습니까? 정말입니까? 정말 그런가 한번 보겠습니다. 그러니 영적으로 변화를 받겠습니까? 정말 주님을 만나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자세의 여러분들은 교회의 직원과 교역자로서 여기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그 자체가 옆에 있는 모든 교인의 메시지입니다. ‘아 하나님의 말씀을 저렇게 듣는구나!’ 그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구속사의 물결에 한 변곡점에 서게 됩니다. 구속사에서 사도행전 10장은 사도행전 2장만큼 중요한 장입니다. 왜냐하면 2장에서는 성령이 강림하시는데 2장부터 9장까지는 이스라엘 안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세계 전체를 몸이라고 하면 배꼽정도의 크기도 안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렇게 전 세계를 복음으로 불태우는 사건이 시작되는 것이 사도행전 10장입니다. 고넬료의 집안사람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면서 유대주의의 편견이 깨지고 하나님이 모든 이방인들에게까지 성령을 주시기를 계획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충격적인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불길처럼 번져서 유럽 전체를 불태운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때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이 돈 많은 사람이나 권세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이방인,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기꺼이 유대주의의 편견에서 벗어날 각오가 된 베드로, 이 두 사람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속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33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씀 듣는 태도를 4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는 ‘이제 우리는 주께서’ 라고 말합니다. 즉 ‘당신 설교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여기서 말을 하면 움직이면 좀 어떻습니까? 듣다가 벌떡 일어나서 나가면 좀 어떻습니까? 너무 힘들어서 드러누우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지 사람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발 예배의 태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변화되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깊이 만날 생각을 하십시오.
지하실 교회에서의 일이었습니다. 형제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눈물이 글썽거립니다. ‘왜 그러냐?’ ‘제가 오랫동안 사귀던 자매가 있었는데 헤어지자고 합니다.’ ‘왜 그런데?’ ‘똑같이 예수 안 믿고 살았는데 어느 날 제가 열린 교회에 와서 회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같이 교회를 다니자고 했더니 몇 번 따라 나오더니 헤어지겠다고 합니다.’ 그때는 저도 열렬할 때니까 자매를 불렀습니다. 물론 등록도 하지 않았습니다. 핵심을 물었습니다. ‘그 형제를 사랑 하냐? 사랑하지 않느냐?’ 사랑한답니다. ‘그런데 왜 헤어지느냐?’ 치사해서 헤어지자고 했답니다. ‘무엇이 치사하냐?’ 어느 날부터 교회에 빠져서 그 당시는 토요일도 휴무가 아니었습니다. 일요일밖에는 쉬는 날이 없는데 못 만난다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교회에 가서 밤이 되어야 끝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만나려면 열린 교회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왔더니 오전예배, 점심 먹고 전도 나가고, 오후예배를 드리고 밤이 되어서 끝나는데 너무 지겨워서 자꾸 조니까 자기를 툭툭 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이 사람하고 결혼해야 하나? 다 그만두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가 따뜻하게 타일렀습니다. ‘자매야!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야! 그 사람이 잘못해서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헤어지지 말거라. 너도 예수를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니까 자기도 안답니다. 그래도 그만두고 싶답니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했습니다. ‘4번만 열린 교회에 나와서 주일예배를 드려라. 그리고 아무 일도 없으면 내가 말려서라도 너희를 헤어지게 해주마.’ 형제를 불렀습니다. 둘을 앉혀놓고 ‘너는 이제부터 한 달 동안 이 자매에게 교회에 나오든지 말든지, 예배를 뒤에서 드리든지 앞에서 드리든지 무엇을 하든지 너는 제발 같이 붙어 앉지 말고 떨어져 앉아라. 그리고 믿든지 말든지 자유롭게 내버려두라.’ 그리고 자매에게 약속했습니다. ‘수요예배까지 나오던데 관두고 주일예배만 나와라. 정 가운데 세 번째 줄에 앉아라.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고 약속하고 설교듣기를 추리소설 읽는 것처럼 듣겠다고 약속해라.’ 두주 만에 펑펑 울면서 회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어디 있느냐고요? 우리교회 집사의 이야기입니다. 결혼했습니다.
여러분들 아무리 오래 설교를 듣고 녹취 본을 만지고 책을 만들고 공과를 가르칩니까? 아니 뚜껑을 닫고 쏟아 붓는 물이 항아리에 들어갑니까? 뚜껑을 덮고 햇볕에 내놓은 고추장 항아리에 그것에 햇볕이 들어가서 발효가 됩니까? 그것이 이 예배를 주께서 받으신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확신합니다. 여러분들이 대통령에 대해서 극찬하는 사람도 있고 욕을 욕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저는 가보지도 않았지만 그 대통령이 있는 어마어마한 청와대에 들어가면 자신이 작아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화려한 방 앞에 독대하고 앉았다면 혼자서 핸드폰을 만지고 그렇게 하겠습니까? 주께서 예배를 받으십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듣기 위해서 모인 것이 예배입니다.
두 번째는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에게 말씀해 주시고 그리고 그 설교자는 주께로 받은 모든 것을 전하는 시간이 설교시간입니다. 그래서 설교자의 설교준비는 사실은 일평생입니다. 스펄전이 설교를 하다가 내려오는 때에 어떤 교인이 와서 너무 은혜를 받았다고 얼마나 설교를 준비하셨느냐고 하니까 스펄전이 대답한 말이 있습니다. ‘평생 걸렸습니다.’ 오죽했으면 한 땀 한 땀 설교를 준비해서 설교를 했는데 교인들이 듣지 않으니까 너무 실망스러운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정성스러운 설교를 들을 자격이 있을까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마음속으로 웃을 것입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열린 교회에 와서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겠는데 2009년도쯤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고린도전서 13장을 야심차게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33번 설교했습니다. 중간에 왔는데 얼마나 교인들이 교만해지는지 예배를 드리는 태도가 개판입니다. 목회의 위기를 느꼈습니다. 어느 날 선언했습니다. ‘당신들은 이 유장한 설교를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오늘부터 새 시리즈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시작한 시리즈가 ‘배교적 예배에서 떠나라.’ 시리즈입니다. 피를 토하듯이 설교했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그 시리즈를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 설교를 하다가 교인들이 나를 떠나라고 하면 나는 이 교회를 떠난다. 다른데 가서 설교하겠다는 마음으로 설교했습니다. 아주 강력한 표현들이 수없이 나옵니다. 그중의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을 어떤 사람이 초대했습니다. 우아하게 초대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슴 벅차서 예쁜 정장을 차려입고 그 집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저 한옥 마당부터 하인들이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와서 두 손으로 안내를 하면서 안방으로 안내했고 엄청나게 큰 거실에는 거대한 크기의 식탁이 놓여있고 밥상이 차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작은 예쁜 그릇부터 시작해서 큰 그릇에 이르기까지 수백 개의 음식 그릇이 놓여 있었고 진귀한 일본 도자기, 명나라에서 수입한 그릇들, 신라시대 때도 서역에서 온 유리그릇들이 있었는데 유리그릇들, 그렇게 차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 영광은 처음입니다. 너무 감탄했습니다. ‘이제 정성껏 차렸으니 드시오. 손수 열고 드시고 싶은 것을 드시오.’ 뚜껑을 하나하나 열어보니 다 똥입니다. 어린아이의 설사 똥부터 시작해서 노인들이 싼 된똥까지입니다. 그때 여러분의 느낌은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드리지 않는데 그것이 무슨 예배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설교자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설교자만의 몫이 아닙니다. 6개월만 설교자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이 끊어지면 교회는 병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것을 기대하면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것이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아무 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배시간에만 이루어집니다. 왜?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손가락으로 아이패드를 넘기면서 자기가 듣고 싶은 것을 검색하면서 듣다가 마음에 안내키면 넘어가는 그것은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채집하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해서 변화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1년, 2년, 3년 하면 경력이 쌓일 것입니다. 행정을 하는 사람은 좀 더 유능해질 것이고,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은 요령이 생길 것이고, 카페에서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은 음식을 잘 만들게 될 것이고,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좀 더 원고를 잘 만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출판사에 취직도 할 것입니다. 열린 교회에서 행정을 하다보면 목사들도 실력이 향상되어서 큰 교회 어디서 오라고 하면 갈 수 있고 또 거기에 가도 거기에서 쫓겨나지 않을 정도로 기본은 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교회에서 해봤으니까 말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그것은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소명을 받지 않은 사람도 그 자리에 놓고 가르치면 다 합니다. 그까짓 거 왜 못하겠습니까? 주어진 일을 하는데 무슨 소명이 필요합니까? 그 대가로 돈을 받는데 무슨 소명이 필요합니까? 아무나 갖다놓아도 다 합니다. 그래서 머리 나쁜 교역자보다는 똑똑한 평신도가 그 자리에 갖다 놓으면 더 잘합니다. 불을 토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설교자를 통해서 지금 이 시간에 이 시점에 당신이 원하는 바를 교회에 전달하십니다. 그런데 함께 힘을 합쳐서 일하는 코어멤버들이 그 정신이 안 들어갑니다. ‘특별기도기간이라는데 빨리 광고 올리자!, 영상 예쁘게 만들어 올려야해!’ 그런데 본인에게는 특별기도기간이라는 인식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당신에게 하신 모든 것이 어느 시점에서 주어지는데 그것이 그 사람 마음속에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일로 남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영혼은 말라깽이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여러분들이 한 교역자가 아니라 한 직원이 아니라 예배자로서 여러분 앉는 자리가 주일에 대부분 앉는 자리일 것입니다. 눈물 흘려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배가 모두 끝나서 다 갔는데 그 말씀 때문에 가슴을 쥐어뜯어본 적이 있습니까? 옛날에 그런 직원들 많았습니다. 밖에서 인사를 하면 눈이 새빨개져서 도망치듯이 나오는 직원들이 많았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평생 같이 있겠습니까? 내년이라도 여러분과 저는 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가서 살든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열린 교회에 있었던 기간이 인생을 허비한 시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설교자에게 명한 모든 것을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전달하시니 좋은 예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듣고자 하여’ 이었습니다. ‘아쿠오’ 라는 단어인데 동치어가 히브리어의 ‘샤마’입니다. 내적 복종의 자세를 가지고 말씀만 하면 순종할 의향으로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을 시켜보면 압니다. 어떤 사람은 일을 시키기 전에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해야겠다는 내적인 수용성이 가득 있는 사람이 있고 내적인 거부감이 가득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전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것을 듣고자 하여’ 라고 하는 것은 ‘순종하고자 하여’ 라는 뜻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설교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용서합니다.
제가 설교를 최근에 준비하면서 참 많이 울었던 부분이 그것입니다. 다윗은 윤리적인 수준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평균도 안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했더니 우리 집사람이 평균은 무슨 개뿔 평균이냐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누가 그렇게 간음하고 살인죄까지 저지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십분의 일 수준도 안 됩니다. 십분의 일이면 이스라엘 백성 중 열 명 중 한 사람이 살인자가 되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 사회가 신정사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윤리적인 수준으로 이야기하면 바닥을 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절대 위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그 쓰레기 같은 다윗을 그렇게 독점적으로 예뻐하셨습니까? 왜 그러셨습니까? 저는 아직까지 찾은 답은 하나입니다. 그것이 그런 믿음을 구약의 인물 중 아무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었어도 아주 일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일평생 그런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품을 파고드는 간절한 사모함입니다.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 앞에서 울었고 징계를 받아도 하나님의 옷깃을 붙들고 통곡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런 믿음을 가진 모든 죄인들을 응답하시는 복음의 등장을 미리 바라보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장로님이 한분 계십니다. 오 목사님은 알 것입니다. 김봉순 장로님입니다. 92세 때 제가 전도사할 때인데 새파란 전도사입니다. 이제 신대원 3학년이니까 새파란 전도사입니다. 수련회에 따라오십니다. 애들이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 노인이 새파란 전도사의 설교를 무릎을 꿇고 들으면서 펑펑 울면서 그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왜 그랬습니까?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는데 많은 예배드리는 사람의 자세를 보면 내가 하나님보고 거기에 오시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거기에 하나님 안 계십니다. 헛일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태도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내적인 순종의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순종할 수 있을 때에든지 할 수 없을 때에든지 최소한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안 후에는 그분의 품을 파고들 것이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다’입니다. 거기에 있는 고넬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모두, 고넬료로부터 집안의 식구들 종들에 이르기까지 거기에 있는 모든 권속들이 다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이 고넬료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 하나만 예수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설교를 개떡같이 듣든지 여러분들이 저를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설교를 듣든지 상관없습니다. 제가 양심의 부끄러움이 없이 충성스럽게 설교준비를 하고 피를 토하듯이 설교를 하고 죽으면 아니 열린 교회를 떠나면 하나님이 나에게 상 주실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칭찬받기 싫습니다. 모두 다 칭찬받고 싶습니다. ‘설교를 한 너만 충성스러웠던 것이 아니라 그 설교를 통해 내 말씀을 들었던 모든 교인들이 한결같이 충성스러웠다.’ 그렇게 인정받고 싶습니다. 리처드 백스터가 그랬습니다. 천국에 갔는데 거기서 여러분들을 볼 수 없다면 그리고 주님이 너의 형제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을 때 자기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천국에 눈물이 없으니까 그 사람의 묘사는 과장입니다. 그러나 심정입니다. 집착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실력을 쌓으시고 많이 배우신 후 훨훨 날아서 더 좋은 사역지를 찾으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 가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여러분 혼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시간이 바로 그것입니다. 설교자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시간이 설교를 하찮게 듣는 사람은 하나님을 하찮게 듣는 사람입니다. 설교를 농담처럼 듣는 사람은 하나님을 농담쟁이처럼 여기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의 삼분의 일도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사십시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일한다고 절대 여러분들의 영혼이 안전하지 않습니다. 교회만큼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이 울타리가 여러분들을 보호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드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열린 교회에 있는 동안 아니 살아있는 동안 최고의 예배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