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헌신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워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행 20:31)
녹취자: 박윤정
만약에 사도바울에게 당신이 목회하던 때 중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였냐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이때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 번 질문을 해봅니다. 제일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냐고 물어본다면 역시 이때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로 그는 오늘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아시아로 밀레도에서 장로들을 청해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모아왔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께 어떻게 행한 것을 여러분도 아는 바니..’라고 하면서 마지막 유언과 같은 설교를 남깁니다. 사실은 예루살렘으로 지금 올라가려고 했고 자기는 거기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그를 살려주셨습니다만, 어쨌든 심정적으로는 유언적인 설교였습니다. 왜 그러면 에베소에서 밀레도까지 거리가 꽤 됩니다만 왜 오라고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나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자기 마지막 가는 길이 될지 모르는 이때에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다시 한번 뭔가를 주고 싶었던 마음이 생겼기 때문에 무리하게 장로들을 청하여 오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밀레도는 유명한 철학자 탈레스의 고향이고 진짜 탈레스는 만물의 근본이 물이라고 했는데 거기 가보면 보이는 게 다 물밖에 없으니까 만물의 근본이 물이라고 할만하다고 느낄 정도입니다. 엄청난 인력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 장로들이 왔습니다. 사실 사도바울의 삶은 끊임없이 여행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곳에서 정착하면서 오랫동안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제자들로 사람들을 길러내는 그 일에 열심을 품고 진짜 목회다운 목회를 여기서 하게 됩니다.
에베소는 그 당시 로마에서 손꼽히는 엄청난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5만명 이상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하니까 그 크기가 거의 폼페이랑 맞먹는 도시입니다. 그러니까 제국 안에서도 손꼽을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인구를 가지고 발달한 도시이고 지금도 가보면 그 도시의 유적들을 보면서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엄청난 도시였다라고 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런 도시의 정신이 어떻겠습니까? 세속주의와 이교주의에 꽉 차고 인간의 이성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를 부정하려고 하는 그런 정신으로 가득 차 있는 대표적인 도시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고난을 많이 당하고 그렇게 교만했던 에베소라는 도시가 영적으로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에서 일어났던 대부흥입니다. 거기에서 마술했던 사람들이 회심하고, 그리고 이방의 종교들을 섬기던 사람들이 일시에 주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고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 가운데에서 에베소의 부흥은 손꼽을 정도의 혁혁한 복음의 승리를 거뒀던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긴 세월 동안 목회했던 이유는 단순히 구원받는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상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삶에 있어서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사람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든든하게 세우고 세운 사람들을 파송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교회를 붙들어서 더 훌륭한 사람들을 길러내도록 하는 그런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바쁜 선교 사역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3년이나 머물면서 목회를 했던 것입니다. 그건 서론이고, 그리고 떠나면서 하는 이야기가 그렇게 헌신하며 떠나는데 비관적인 이야기들로 이 장로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들에게 들어와서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여러분들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다.” 사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그 멀리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청해놓고 할 이야기는 아닙니다.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고. 해야 되는데 이렇게 어둡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했던 이유는 그 사실이 너무 명확 관할했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사실은 사도바울이 경고를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준 것입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것도 잠깐에 세워지는 것이고, 무너지는 것도 잠깐에 무너집니다. 그리고 교회가 다 죽어가다가도 한 사람이 들어와서 교회를 제대로 하게 되면 단박에 섭니다. 그리고 또 세워진 교회가 정말 대단하다 저 교회는 역사와 전통이 빛나고... 필요 없습니다. 단박에 와르르 무너지게 됩니다.
피터 마스터스라고 하는 영국의 목회자를 여러분들은 아마 아실 것입니다. 책도 한국에서 몇 권 나왔으니까 아마 보았을 것이고 설교 방송에서도 보니까 나오더라고요. 나는 그분의 신학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지금 스펄전이 목회하던 태버내클 처치에 목회자로서 봉사하고 있고, 여러 해 전에 제가 가서 직접 한 시간 동안 대화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근본주의자입니다. 그리고 말하자면 극단적인 근본주의자라고 저는 신학적인 판단을 내렸습니다. 모든 학문에 대해서 부정합니다. 심리학이라든지 상담학이라든지 이런 것에 대해 다 부정하고 그리고 다 필요 없다고 봅니다. 심지어 그 후에 나오는 책들을 보니까 그런 것들이 상당히 악마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기술한 것을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것이 핵심이 아니라 그분이 그 교회에서 40년 정도 목회하셨는데 그분이 부임하시기 전에 거기를 다녀온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데 교인이 스펄전이 목회하던 교회에 그 큰 성전에 예배당에 교인이 약 40명 정도 나왔더랍니다. 그래서 주일날 그 유명하던 교회에 갔더니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모였는데 모두 추리닝만 입고 나왔다고 합니다. 얼른 예배 빨리 드리고 테니스 친다고 그렇게 나왔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분이 와서 열렬하게 목회를 해서 어쨌든 내가 갔을 그때를 기준으로 장년 교인이 런던에서 900명, 주일학교 학생들이 600명 모이는 교회가 되었고, 근본주의니까 주일 문제에 대해서도 뭘 사 먹는다든지 아니면 교회에서 점심을 위해서 일한다든지 하는 것 같은 것은 전부 다 정죄입니다. 결국은 자신들이 모두 도시락을 각자가 싸가지고 와서 하루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말씀 들으면서 그렇게 하는데 어쨌든 그렇게 하는 게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배당이, 교회가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에야 은퇴하셨을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릴 요지는 렇게 다 죽어가는 교회도 한 사람이 와서 열렬하게 하면 단박에 살려냅니다. 그리고 떠나가면 또 단박에 무너집니다. 사도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렇게 능력있게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놓았는데 이제 양떼들을 아끼지 않고, 심지어 사도바울이 떠날 때까지 조용히 그 말씀에 은혜를 받던 사람들 중에서도 이상한 사람들이 생겨나서 양떼들을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이끄는 그런 이단적인 인물들이 나타나리라고 하는 것, 복음에 어그러지게 하는 말을 하게 하는 가르침을 전파할 것이라는 걸 예고할 정도였으니 결국은 이런 모든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는 한 시간도 하나님이 붙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장로들이나 교회 담임 목사나 이런 사람들을 믿으면 안 되고, 매 순간 하나님을 믿으면서 주님의 손에 붙잡혀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가 양떼들을 맡고 있을 때 그때에 뒤돌아보지 말고, 온전히 헌신해서 자기가 거기에 있는 동안에 자기의 할 모든 것을 쏟아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것만큼, 한 걸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하길 바랍니다. 그러니 눈에 뻔히 보이니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떠나면서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를 이미 예루살렘으로 부르셨습니다. 세상에 가야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남기는 말이 그것입니다.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그럽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리스어 성경에 보면 조금 다르게 나옵니다. 아주 굉장히 처음에 시작할 때 이렇게 나옵니다. “Therefore watch on your God.” 이렇게 나옵니다. 희랍어로 ‘일깨워‘라는 슬쩍 집어넣었는데 이게 아니라 “그러므로 정신 차려라.” 이렇게 나옵니다. 한 문장에 NIV에 느낌표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정신차려라’ 그렇게 하고 자기 말을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준 많은 말들을 너희들이 흘려보냈어도 정신을 바짝 차려라 내가 지금 하려는 이 말에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고, 내가 여러분들에게 이 일을 대비해서 마지막 유언처럼 한 말씀을 남기니 정신을 차려라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야기가 궁극적으로 뭐냐면 ‘기억하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어로 ‘정신이 머물다’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메노’라는 단어와 ‘누수’라는 단어를 합쳐서 ‘기억하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기억하라’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기억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말씀을 전해보면 기억할 것이 있는 사람들이 은혜를 받지, 기억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은혜를 받지 않습니다. 회심을 했다고요? 10명 중에 5명 이상은 이미 회심했던 사람들이 다시 회심하는 것입니다.
기억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자카르’라는 동사는 수없이 나옵니다. 아마 천번 이상 나오는 단어로 분류될 것입니다. 옛날엔 제가 개수까지 기억을 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이 나옵니다. 여러분들 기억해보십시오.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잊지 말라” “잊지말라” “잊지말라” “잊지말라” “잊지말라” “저희가 잊었노라” “잊었노라” “잊었노라” “다시 기억하노라” “기억하노라” 잊지 말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표가 잊지 않는 것입니다. 공동체적으로는 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시신앙 고백에 나와 있었던 아브라함의 선택부터 시작해서 출애굽부터 가나안을 유업으로 주셨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억하라 그러면 뭘 기억하라는 것이냐? 네가지입니다.
첫째는 이 사람의 사역은 훈계하던 사역이었습니다. 훈계라고 하는 것이 우리말에 뜻으로는 꼭 훈장질처럼, 훈장 노릇하는 것처럼 자신은 높은데 앉아있고 지휘봉을 가지고 뭘 시키는 것을 가르키는 것이라서 적당한 번역이 아닙니다. 원래 훈계하라는 단어는 ‘누수’라는 정신이라는 것과 ‘티데미’ ‘어떤 사물을 두다’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누스에테몬’이라는 단어가 분사형태로 나오는데 그런데 결국은 훈계하면서 이렇게 번역이 될 수 있겠습니다. 동시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런 단어인데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니라 뭔가 사람들에게 정신이 다 흐트러져서 제자리에 안가 있잖습니까. 그것을 말씀을 들을 때에 진리가 주는 유익이 뭐냐면 모든 것이 우리의 정신 속에서 제자리를 찾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질서입니다. 우리가 육체의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은 육체의 구성요소들의 질서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의학에서 우리 몸 전체를 보면서 ‘열이 아래에만 몰려있습니다,’ ‘위에만 몰려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위에 몰리니까 머리가 터지는 것처럼 아프고 수족은 냉하고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육체의 건강은 그런 육체들의 구성 요소들이 각각 자기의 질서를 어떤 결함을 가지고 이탈할 때에 건강의 이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구성요소 하나하나가 제 역할을 하면서 하모니를 이루는 것입니다. 합창단의 합창을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우리의 정신도 이것을 자꾸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영적인 침체에 빠지고 방황하는 지체들을 보면 정신이 다 가출했습니다. 질서가 다 없는 것입니다. 집안으로 말하자면 엄마, 아빠, 형, 누나, 언니, 동생 다 이렇게 질서가 갖춰져야 하는데 다 제각기 가출한 것입니다. 집안 살림을 하는 사람도 없고 다 개판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이렇게 되어 있는 상태를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을 훈계하는 것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가출한 한 정신을 제자리에 돌아오게 하고 질서들이 깨진 모든 것들을 우리의 정신 속에서 제자리에 둘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여기에서 도달하는 결론은 이 사람은 그 에베소에 있었던 3년의 사역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던 사역이었습니다. 이것을 모두 포함할 수 있는 동일한 단어가 우리말에 없습니다. 가르치다라는 말도 사실 이렇게 일방적이고 훈장질하는 것 같은 의도가 많잖습니까. 자꾸 나를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하며 기분나빠합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흐트러진 정신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게 해서 제자리로 돌아가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 사역입니다. 그러니까 죽으나 깨나 결국은 성도들의 정신들을 다시 원질서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끌레로보의 베르나르도가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정신이 그런 질서를 그대로 찾아간다고 하면 죄가 들어올 수 있는 틈이 없다 이것입니다. 들어온다 해도 있을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질서가 깨지니까 죄가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사역을 배울 게 4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가 뭐냐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하는 것, 알게 했던 것 그것을 기억하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사라져도 너희들이 서로 말씀의 종이 되어서 양떼들에게 그 말씀을 잘 알게 해서 그래서 그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끔 그런 식으로 가르쳐준다면 그러면 틀림없이 그렇게 어려운 때를 만나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 사역이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주일이 되었는데 설교할 재료를 찾기 위해 성경을 뒤져야할 정도가 되면 안 됩니다. 이 속에 항상 설교하고 가르치고 싶은 말씀이 살아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매주매주 새롭게 자신에게 말씀을 주실 때에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젤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능력이 되든 안 되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그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가르치도록 그렇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제가 주일학교 가르칠 때에도 학생들이 제 눈을 쳐다보지 않으면 난 설교를 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그 눈과 눈을 통해서 가르쳐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됩니다. 그래서 벌써 설교하러 갔을 때에 양떼들이 설교자에게 주목하지 않는 것은 이미 말씀 사역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때엔 설교하러 갔다가 덮고 내려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던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살길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 말씀이 그 사람들 속에 들어가게끔 해주는 사역, 그것을 위해서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두번째는 ‘각 사람을’ 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헤나 헤카스톤’, ‘one each other’라고 영어로 번역됩니다.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은 대중적인 설교자였고, 엄청나게 큰 지도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선교사역을 감당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방식은 자신이 한사람 한사람을 돌보던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집단을 가지고 사역을 하던 CEO같은 마인드도 종종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목양이라는 것은 한 영혼 한 영혼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교회가 너무 큰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나도 개인적으로 목회적으로 행복했던 때는 그저 나의 생각에 250명정도 목회하던 시절, 그 때가 목양적인 측면에서는 참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그 집 아이들까지 다 알고 목양하던 때. 그런데 아무튼 각 사람을 돌보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슴에 새겨야 될 일은 뭐냐 하면 말씀을 많은 사람에게 뿌리는 공중적 선포사역과 함께 한 영혼 한 영혼을 잘 돌보는 그런 사역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어려운 때에는 면담이던지, 아니면 줌이던지, 찾아가던지, 어쨌든 개인적으로 한사람 편지를 쓰던지, 한 사람 한 사람을 다독거리면서 그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 말씀을 향하도록 만들어주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돌봄의 사역, 이것이 사도바울이 힘썼던 사역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뭐냐 하면 ‘쉬지 않고’ 그랬습니다. 희랍어로 “우크 에파우사멘” 원래 ‘우크’라는 것은 아주 강한 부정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나는 쉰 적이 없다 이래서 ‘에파오다멘’이라고 이야기 나오는데 ‘에파오사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히브리어에 ‘샤바트’입니다. 창조하시고 하루를 쉬셨다는 것입니다. 쉬다, 혹은 중지하다 이런 것입니다. 나는 쉰 적이 없었다 그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목회자로써의 성실성과 부지런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일하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제자둘이 고단해보이니까 너희도 좀 쉬어라라고, 한적한 곳에서 쉬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떻게 몸이 기계가 아닌데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신만큼은 쉰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한테 부지런하게 목회사역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으로, 목회자로 살아온 사람으로 내가 여러분에게 하나 충심으로 조언해줄 것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해서 너무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그곳에서 헌신적으로 일하십시오. 이 교회가 내가 담임목사로 있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난 그렇게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어디로 갈지 하나님이 다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냥 기도 많이 하고 교회를 옮기면 그 교회에서 가라하실 때까지 그 교회에서 열심히 헌신했습니다. 그러면 징검다리 건너가는 것처럼 하나님이 준비되면 하나님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한걸음씩 인도해가십니다. 그게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그래서 저는 신학교에 뼈를 묻으려고 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정말로 여기에서 살다, 여기에서 죽을 것이다 그런 각오로 갔습니다. 열심히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또 다른 길을 보여주시고, 또 다른 길을 보여주시고 그러십니다. 사람의 계획대로 안 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대로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 혼자 그렇게 하시지 않고 우리를 통해서 그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목회적인 성실함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능력이 없어서 못했을 수는 있지만 내가 게으른 적은 없었습니다”라고 가슴에 손을 얹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교회 덕보려고 하지도 말아라. 이런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웃기는 이야기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교회에 있다가 교회를 개척하거나 나간 사역자들은 그냥 내보낸 적이 없습니다. 그냥 딱 사역지로 옮기는 사람이야 도와줄 게 없지만, 교회를 개척하면 아직까지 내 기억에는 그냥 있은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아주 건전하지 못한 일을 하고 떠난 사람조차도 웬만하면 쳐다도 안봅니다만 다 도와줬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은 그런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덕볼 생각 같은 것 하지 말고, 마음을 집중해서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와 소떼에 마음을 두고 거기서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입증되면 때가 되면 하나님이 보내십니다. 그리고 가면 거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예비하심과 축복이 있습니다. 난 그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회심하거나 내가 사역한 교회가 두 군데 밖에 안 되지만 세군데 있습니다. 세군데 있지만 마지막 교회야 일년 반쯤 있다가 열린교회를 개척했으니까 있었다고 할 것도 없고, 그거야 내가 교회를 개척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고, 두 교회는 6년 7년 8년 이렇게, 두 교회 있으면서 한 번도 담임목사보다도 내가 교회를 덜 사랑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양쪽 교회 다 티끌만큼 덕본 적 없습니다. 교회를 개척했어도 내가 있던 교회에서 덕본 적 없습니다. 도와줬어도 제가 아마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심정을 가진 것을 기뻐하신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맡겨진 사명에 온힘을 다하십시오. 그러면 반듯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높여주십니다. 어떻게 높이실지 난 모릅니다. 아주 존귀하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눈물로 라고 했습니다. 메타 다크뤼온이라고 되어있는데 ‘눈물로’ 라고 되어 있지만 히랍어 성경에서는 ‘티얼스’라고 복수로 나옵니다. 그래서 바울이 목회하면서 흘린 눈물이 얼마나 많은 양이었는지를 보여주고 동시에 눈물을 흘려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눈물과 함께는 잘 번역이 된 것입니다. 눈물과 함께,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그의 사역은 눈물이 있는 사역이었습니다. 결국은 진실한 목회자는 그래서 언제 한번 저 스스로 그런 정의를 내려봤습니다. 목회란 무엇인가? 마음 속에 눈물이 가득한 것, 그렁그렁한 것, 그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사도바울이 죽은 자들까지도 살려낼 수 있을 정도의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고별 설교 속에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게 행했는지 여러분들이 아는 바니 그러면서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라고 이야기합니다. 결국은 바울이 눈물의 목회를 했다는 것은 자기 의식 속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전부다 부인할 수 없는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눈물의 목회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눈물의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은 좀 단점이 있어도 언젠가는 하나님이 쓰십니다. 눈물의 목회를 하는 사람들은 부족한 것 같아도 하나님이 그를 귀하게 쓰십니다. 여러분들 그런 사람이 되기를 진실로 바랍니다. 우리 같이 마지막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