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영원히 사는 길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시 22;9)
녹취자: 이 솔
22편은 고난 시인데 너희의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이 구절이 오늘 읽은 성경 구절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앙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도 우리의 마음을 영원히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이유도 우리의 마음이 영원히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실 때 주시는 새 힘도 우리의 마음이 영원히 사는 힘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영원히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간략하게 말해서 마음이 영원히 산다는 것은 육체가 시간 안에서 산다는 것과 대조를 이루어요. 우리는 젊고 늙고 병들고 그리고 죽어가요. 매일매일 우리 자신이 늙어가고 변해가는 모습을 봐요. 만약에 우리들이 신앙이 없다면 이 모든 것에서 엄청난 허무감을 느낄 거예요. 그래서 이 중에는 아직 그 강을 건너보지 못한 사람들이 뭐 건너는 사람도 있고 아직 못 건너본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사람은 노인이 된 모든 사람은 갱년기라는 강을 건너가요. 그때 이 말씀이 절절히 실감이 나요. 마음이 영원히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요. 그래서 나는 단연코 이야기하는데 갱년기는 사춘기보다 결코 쉽지 않다고. 다행히 우리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그래도 나은데 신앙이 없다고 그럴 때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이 갱년기는 사춘기보다 훨씬 무서워요. 그래서 사실은 청년의 자살률도 문제지만 노년의 자살률이 문제잖아요. 마음이 영원히 산다는 것이 그 무엇인가? 이것은 시간 안에 있는 모든 사물들 때문에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어떤 영원한 기쁨을 마음이 가지고 사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 기쁨과 생명은 아주 밀접해요. 기쁨이 사라진 것은 생명이 모자라는 증거이고 생명이 충만하면 살아있는 것들은 기쁜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우리의 관심사는 마음이 영원히 사는 것이에요.
시편 73편에서 그렇게 인생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일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던 사람이 성막에 들어갈 때의 악인의 결국을 깨달으면서 결국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내게 복입니다 라고 고백을 해요. 그런 마음이 바로 영원히 사는 것이 마음이 영원히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복이에요.
우리의 모든 목회 활동과 교회의 활동은 사람의 마음을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한 것이에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떠내 보내면서도 너무 슬퍼하지 않을 수 있어요. 마음이 영원을 향하여 살아 있기 때문에 잠시 후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신자같이 그렇게 애도해 하지 않아요. 인간의 정은 마치 끊을 수가 없어서 고통스럽지만 그러나 그것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마음이 영원히 사는 것 이것이 오늘 하나님이 우리의 말씀에 명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시간 안에만 마음이 살아있을 때 그 눈에 보이고 사라지고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것들 때문에 끊임없이 고뇌하고 괴로워요. 그래서 삶은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고 죽음과 생명 사이를 오가면서 영혼은 끊임없이 요동쳐요. 고통을 받아요. 근데 마음이 영원히 살 때 그것들을 이겨낼 수 있는 거죠. 아프지. 힘들지. 그러나 그것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용기와 힘을 하나님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생에 대한 부당한 애착이 사라지고 소유에 대한 부당한 애착이 사라지게 되는 거죠. 마음이 영원을 향하여 살아있기 때문에 그 충만한 생명과 기쁨의 힘이 그것을 하찮게 여기도록 만들어 주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오늘 성경은 겸손한 자가 배부를 것이며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인은 지금 죄 가운데서 몸부림치며 하나님 앞에 탄식하고 있기 때문에 관심사가 영혼이에요. 여기에서 이 배부르다 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만족하다 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예요. 그러면 결국 겸손한 자가 마음의 만족을 얻게 될 것이며 그런 것이죠. 그러니까 배부르고 나면 음식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잖아요. 그런 만족을 얻게 될 것을 이렇게 생리적으로 표현하는 거죠.
그럼 어떤 자가 겸손한 자가 배부르게 될 것이며 라고 합니다. 사람 사이에 통용되는 겸손은 내가 너보다 낫지만은 그러나 내가 너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마 라는 것이 겸손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하나님 신앙에서의 겸손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돌아봄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한 인간인지를 깨닫는 거예요. 그것만 깨닫는 것으로는 겸손이 될 수가 없어요. 그런 자신을 한없이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을 함께 느끼는 것이 겸손이에요. 그래서 자신이 복음적으로 겸손해진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요. 그래서 자신 때문에 비참해진 것만큼 하나님 때문에 소망을 갖게 되는 거죠. 소망을 누군가에게 두고 있는 한 그를 사랑하게 되는 거죠. 그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어요.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기대하는 바가 있고 때로는 그 기대하는 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자기를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이 사랑이에요.
그래서 이 겸손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며 자기가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알아서 하나님 앞에 낮아지는 건데 그 기억을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 속에서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 겸손이예요. 세상에는 우리로 하여금 낙심하게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요새도 책을 이렇게 읽다 보면 어쩜 이렇게 머리가 좋을까? 그리고 어쩜 이렇게 이렇게 기가 막히게 글을 쓸까 가지고 있는 학식의 방대함은 읽는 사람이 따라가기도 버거울 정도의 방대한 학식의 양이에요. 그때 마음 한 구석이 뭔가 그 은근하게 외로움을 느껴요. 소외감을 느껴요. 그래서 이런 사람에 비하면 나의 지식은 얼마나 하찮은가 하는 거를 느끼죠.
목회도 잘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잘 합니까? 하나하나를 따져보면 참 우리로 하여금 뭔가 살아가야 할 그 용기를 갖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고 나면 이 모든 것들은 또 사라지는 것들이예요. 그렇게 천재 같은 머리를 가지고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사던 사람도 치매가 오니까 아무것도 부러워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도 봤어요. 인생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이예요. 나는 비록 학식에 있어서 누구만 못하고 능력에 있어서는 누구만 못하고 외모에 있어서는 누구만 못하고 어떤 어떤 면에서는 누구만 못하다고 할지라도 내가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기에 내가 그분의 사랑 속으로 떠내려갑니다 라는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사는 거지. 이런 겸손한 자의 마음속에는 항상 눈물이 가득해요. 언제든지 주님의 품 안에서 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세상의 명예는 주시지 않을지 몰라도 이런 사람의 영혼에 만족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영혼을 향하여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겸손한 사람들이 되기를 그래서 영혼이 배부른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제 찬송할 것이오. 특히 시편에서 이 찬송은 그냥 의례적으로 부르는 찬송이 아니라 찬송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득 넘치던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기쁨과 경외심의 표현이에요. 이걸 잘 알 수 있는 대목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하잖아요. 근데 홍해를 건너잖아요. 이 홍해를 건널 때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물이 갈라지면서 벽같이 서고 마르 약바시아라는 게 마른 땅이 드러났어요. 땅이 드러났어도 그게 늪이였으면 어떻게 그 적어도 200만명, 300만명 되는 사람이 걸어 나올 수 있었겠어요. 마른 땅이었어요. 그리고 거기서 애굽의 병거들이 모두 수장당하는 광경을 모두 보았어요. 그리고 미리암과 여인들의 소고에 맞춰서 이스라엘 백성이 장엄한 찬송을 불러요. 그때에 그 찬송은 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일을 본 이 감격을 모두 표현했겠어요? 못했겠어요? 다 표현 안 되죠. 이게 죽어 있는 찬양의 문제는 뭐냐 하면 마음에 느낀 것은 없는데 많이 찬송을 불러야 되요. 진정한 찬송은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요.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뵙고 그분 앞에 경외심과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찬양할 게 별로 없어요. 무슨 일을 보든지 간에 거기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는 이것이 찬송이에요.
근데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찬송하게 되느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예요. 와카시 라고 하는데 히브리어로 피케시라고 피엘 동사를 썼는데 아주 뭔가 이렇게 그것 하나의 정신이 꽂혀서 그것에 몰입하면서 찾는 거예요. 못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찾으면 다행이지 라고 찾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의 아이를 군중 속에서 잃어버린 엄마가 그 새끼를 그 자식을 간절히 찾는 그 마음을 생각하면 돼요. 그런 사람에겐 대용품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어요. 그게 대용품이 안 되는 거예요.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거 그게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찾는다는 거예요.
시편에서 말하는 의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완전에 도달한 사람이 아닙니다. 시편에 나오는 인간관의 특징이에요.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이에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죄를 지어도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은 의인이고 도덕적으로 죄를 지은 적이 없어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은 악인이에요. 그래서 이 복음이 의존이라는 하나님께 대한 의존이라는 복음의 사상이 가장 빛깔 짙게 묻어난 성경책이 가운데 하나가 시편이에요. 그래서 시편에서 어떤 한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다 라는 것을 그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 라는 말로 표현하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에 보면 하나님을 구하라 찾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라 찾으라. 수없이 나오는데 모두 동의어예요.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은혜와 감격이 넘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거죠.
결국 믿음은 그 자기가 처한 모든 삶의 상황을 하나님과 연결 지어서 해석하고 거기서 그 하나님의 능력과 그 은혜를 갈망하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될 때에는 그렇게 하신 그렇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분을 만나면서 하나님이 주신 이 선물보다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사랑하게 되는 거죠.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그 어려움 때문에 고통을 받지만 그러나 이 어려움을 이 어려움에 너무 집중하느라고 하나님을 찾을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이 되지 않고 오히려 이 어려움이 내게 있기 때문에 결국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거예요. 그리고 그분께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 연연해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어차피 인생이 지나는 나그네 길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또 야곱이 바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내 나이가 130살이고 조상의 연조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냈노라고 했던 그 고백이 야곱 한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될 수 있다는 걸 아는 거죠.
어차피 우리는 살면서 이런 일도 겪고 저런 일도 겪고 때로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가슴 아픈 일도 만나고 가슴 벅차는 기쁜 일도 드물지만 만나게 되어 있어요. 항상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쓴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단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지 이 두 가지가 함께 겹쳐서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요.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기뻐하고 슬픈 일이 있을 때 가슴 아파한다면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요동쳐요. 아파도 그것을 묵묵히 견뎌내고 기뻐도 그것을 너무 과하게 표현하지 않고 허무에 빛 아래에서 봄으로 겸손해질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돼야 되요. 그래서 주님이 마지막까지 나를 버리시지 않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어떤 삶의 상황에 처하든지 주님을 간절히 찾는 자가 되면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그에게 어떠한 상황에서도 찬송이 울려 퍼질 수 있도록 그 마음을 붙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