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부흥과 교회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행 2:42-43)
녹취자: 김지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고 교회의 부흥이 일어나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교회에는 커다란 영적인 권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 두려움은 공동체에 대한 두려움이고 정확히 말하면 공동체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말씀 사역을 하는데 많은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이 기사와 표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니 두려움이 하나님에 대한 것이라면 이제 이 기사와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어떻게 믿음으로 바뀌어야 할지를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셔서 그래서 교회는 큰 부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모르던 많은 허망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와서 예수를 믿고 단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교회가 이렇게 살아있는 생명력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다른 것을 두려워하고 다른 것을 믿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삶이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질서를 따르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죠. 그러면 이제 교회가 이렇게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지고 또 말씀 사역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칭찬하고 그리스도인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야 될 텐데 어떻게 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오늘 42절에 답이 있는데 몇 가지 요소가 나옵니다.
첫째는 사도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즉 이것은 말씀의 부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이 능력 있게 선포되니까 이런 교회의 영적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한 해를 보내고 내년을 맞으면서 마음으로 간절히 빌어야 될 것이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지쳐있고 힘들어 있기 때문에 위로받기를 원하고 병들어 있기 때문에 치유받기를 원하고 또 너무 주저앉아 있기 때문에 회복되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와 치료 그리고 회복을 넘어서서 개인이나 교회나 아주 강한 영적인 무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수비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격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돼요 그런 충만한 은혜와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 일을 위해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에 충만해야 합니다.
이때 사도들은 성령을 받고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전은 주저주저하고 또 무엇인가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성령 체험을 한 다음에 이들은 아주 굳센 확신을 가지고 목숨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담대하게 그 복음을 전파해 선포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주일학교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아주 권능 있게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우리가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제의 부흥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하기를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게 교제의 부흥이라는 것이 그 본질이 무엇이겠습니까?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누구든지 최근에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 마음이 끌리는 것 그것이 최상의 관심사입니다. 마음의 관심사의 순서와 말하는 순서가 달라질 때 말은 자꾸 꼬이게 되고 그리고 헛방이 나오게 됩니다. 제일 좋은 것은 마음에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이 감정 상태와 관련된 것을 말할 때 그때 가장 편안하게 말이 나오는 거죠. 그래서 여기에서 이 교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은 성도들의 교제예요. 당연히 이 교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더 감화하고 더 많이 적용하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들이 말씀을 함께 나누면 자기가 혼자 말씀을 깨달았을 때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 마음속에서 말씀이 아주 풍성해지고 그리고 아주 현실적이 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는데 아 이 지체는 이런 시련 속에서 이런 것들을 이렇게 이겨내면서 살았구나 아 저 지체는 저렇게 어려움 속에 있었는데 이 말씀을 저런 식으로 적용해서 살았구나 하는 거를 깨달으면서 자신의 경험의 범주를 넘어서서 많은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다양하게 역사하는지를 보게 되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사람이 그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말이 많아져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그게 바로 성도의 교제예요. 이 교재는 육적인 교재가 아니라 영적인 교재예요. 영적인 교제에 부흥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에게 함께 나누어지면서 더 풍성한 양식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는 마음이 강해지지만은 말씀을 이렇게 나눌 때 그 말씀이 우리들 속에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들 가운데 말씀이 충만하게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한다고 하는 확신이 드는 거예요. 그런 교제를 나누고 집에 돌아갈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깨닫고 싶은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풍성하게 받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교재의 부흥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꿈꿔야 할 바입니다.
성도들이 아무리 많이 교제해도 말씀이 사라지고 나면 그 교재가 아주 인간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거죠. 교회에 많은 시험과 그리고 교회에서 일어나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 심지어 죄를 짓는 일들조차도 홀로 조용히 행하는 건 별로 없어요. 사람과 사람이 결탁하고 교제하면서 결국은 죄도 짓고 악도 행하고 하는 거죠. 그래서 악인들은 끊임없이 모여서 회의하고 끊임없이 모여서 의견을 나누며 나쁜 일을 모의해요. 이렇게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와 교제를 통해서 양산이 되는 거죠. 그러면 교회가 사모해야 할 바는 바로 이런 교재의 부흥이에요.
여기에 보면은 떡을 뗀다는 말이 나오는데 사실 그 문화적인 맥락에서 등가로 번역을 하면 떡을 뗀다는 게 아니라 밥을 먹는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이 떡이 뭐 알토스라도 번역이 알토스라고도 나오고 혹은 브로마라고도 나오는데 이들에게 이 빵이 주식이었어요. 그러니까 이건 하나의 제유법적인 표현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의 맥락에서 함께 떡을 먹는다라고 하는 것은 가족이 되었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 교재는 말씀의 교재인 동시에 사랑의 교재였음을 보여주는 거죠.
우리들이 어떻게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서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형제가 있다라고 하는 이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이에요. 그 형제의 사랑이 진실한 사랑일 때 그때 그것은 우리의 인생에 말할 수 없는 위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평화를 가져다 주는 아주 훌륭한 도구예요. 그 교재가 하나님의 말씀이 부어지고 그 교재가 성도 안에서 교재의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고 그 영적인 교제가 사랑의 교제가 될 때 우리 모두가 영적인 피붙이라는 것을 느끼고 서로를 사랑하게 될 때 그때 우리 자신도 그 사랑 속으로 함께 들어가게 되는 거죠. 성령의 가장 중요한 증표는 사랑이예요. 성령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성령의 충만함의 증거는 사랑이이예요.
이 세상에 아귀 다툼 심지어는 철학 사조 속에서도 나타나는 그 끔찍한 말하자면 다툼과 그리고 세상에 대한 어떤 그 잔인한 그 잔인하고 비장한 각오로 자기를 보호하며 살아야 된다고 가르치는 이런 모든 사상들도 결국 알고 보면은 사랑 없이 살아가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거죠.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이 한쪽 뺨을 때리면 다른 뺨을 돌려내라고 가르쳤지만 니체는 한 대를 때리면 너는 다섯 대를 때려라 하고 가르쳤어요. 그렇게 하면서라도 자기 자신의 존재를 유지해야 하는 그러한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에요. 근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의 사랑은 매일 숨 쉬는 공기와 같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면 내가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고 오늘 아침에 눈 뜨지 못하고 죽은 사람도 많이 있는데 이렇게 아침을 보게 하신 것이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이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을 읽으면 그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져요. 사랑 속에 살다가 마지막에 기도하면서 사랑으로 하루를 덮고 지나가는 것이죠. 그런 사랑이 우리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교제 속에서 충만하게 누려질 때 그때 그 받는 위로는 이로 말할 수가 없는 거죠. 그 교재의 힘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루마니아에서 공산 치하에서 선교를 하던 리차드 범브런트 목사라고 있습니다. 근데 그분이 결국은 서방의 압력에 의해서 차우체스크 정권이 그를 풀어줬어요. 풀어줬을 때 그의 고백이 감옥 속에 있을 때는 천국이 있는 것 같았는데 감옥을 막상 나오니 땅으로 뚝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바로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 감옥의 엄혹한 시련의 시기 그 끔찍한 고문을 어떻게 견뎠습니까? 감옥에 가기 전에 지하 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나누던 성찬을 생각하며 그 고난을 이겼습니다. 그게 많은 믿음의 위대한 사람들이 용기와 힘을 갖게 만든 비결이 바로 성도의 교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소유하려고만 들어요. 그래서 어떡하든지 저 사람도 내 말을 듣게 만들고 내 마음대로 저 사람도 내 마음대로 움직이도록 그렇게 만든 거죠. 그래서 굳이 에이리 포럼의 존재냐 소유냐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무엇을 자기의 손에 넣는 데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사람을 손에 넣는데도 인간의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행복은 끊임없이 자신이 희망하는 존재가 되어가는 거기에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있는 거죠. 종교가 필요한 이유는 그 희망이 오류가 없는 희망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재를 통해 행복해지는 이유는 바로 그렇게 교제를 통해서 누구도 누구에게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람이 교재의 동기 자체가 위로부터 내려온 거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은혜를 받으니까 교제를 하게 된 거잖아요. 뭐냐하면 나의 간절한 소원은 내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것이고 또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이 원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사랑은 다르고 사람도 자기 안에 있지만 그 사랑을 가지고 합치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건 모두 하나가 되는 거죠. 거기에서 인생의 행복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데 그게 바로 교재예요.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될까 그리고 살아가는 모든 삶은 모두 다 양상에 지나지 않아요. 그래서 꽃같이 아름다웠던 젊음도 시간이 지나가면 다 사라져가는 곱고 아름다웠던 모습을 찾을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이 그래요 그렇게 변해가는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 속에서 의미를 찾게 만들어 주는 건 그런 역할들을 이 교재가 훌륭하게 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연약한 사람들이 그 교제를 통해서 새 힘을 얻게 되는 거죠. 그래서 교재의 부흥이 일어나야 되는 것이죠.
마지막은,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오로지라고 하는 말은 기도밖에 한 것이 없다. 그런 뜻이 아니라 삶의 삶 모두가 그 기도로 모아지도록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작은 시냇물들이 막 수없이 많은데 그 시냇물들이 모여서 개천 개울을 이루잖아요. 개울이 큰 하천을 이루고 하천이 모여서 마지막에 강을 이루어요 그래서 이제 저 멀리 산골에서 시작된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북쪽에서 북한강으로 내려오고 남쪽에서 남한강으로 내려오다가 두물머리에서 만나서 그야말로 한강을 이루면서 바다로 흘러가잖아요. 그러면서 그 물들이 두루두루 평야를 적시면서 생명의 기운을 창출하는 거죠.
그렇듯이 이제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겪는 모든 일을 내가 만나는 모든 사건 그리고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전부 다 다 모여서 그래서 결국은 기도로 모아지게 되는 겁니다. 그 기도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고 때로는 살아가면서 여러분들이 현실을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있잖아요. 굳이 여기서 현실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막 어마어마한 시련을 닥쳐서 죽을 위기에 도달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마음이 툭 떨어지는 것 같으면서 갑자기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그런 것 아니면은 두려움 그리고 두려움이나 이런 게 없을지라도 하루의 삶에 내가 그냥 질질 끌려가는 듯한 느낌, 학교 가기 싫은 아이가 그냥 밍기적대다가 무거운 책가방을 끌고 신발을 땅바닥에 끌면서 고개를 숙이고 가기 싫은 학교를 가는 것처럼 그렇게 하루를 시작해야 되는 때가 있잖아요. 근데 이런 것들은 모두 다 결국 우리에게 힘이 모자라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현실을 감당하고 그리고 항상 그 살아있는 한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어떤 원동력 그런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잖아요.
정주영 씨 자서전을 읽어보니까 얘는 쌀 가게의 점원으로 들어갈 때부터 시작을 해서 마지막에 죽기 직전까지 아침에 일어나면 매일매일 가슴이 설랬대요 설레는 마음으로 가게 문을 여는 오늘은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내가 무슨 일이 있을까 근데 그거를 읽으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도 없는 그 무엇이 이 사람에게 있는 그 근거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 그러는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고 살 현실을 감당할 힘이 없는 것 같은 이런 마음에 뚝 떨어지는 것 같은 이런 낙심이나 아니면은 삶의 활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옛 사람의 그림자요 우리가 그랬기 때문에 예수께 피한 거거든요. 그래서 결국은 어 하나님의 말씀과 교제를 통해서 우리 안에 충만하게 공급되는 그 무엇이 없으면 우리도 다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겸손을 배우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모든 마음들을 기도 속에서 녹여내야 되는 거죠.
그래서 하루에 한 번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아침에도 기도하고 낮에도 시간이 나면 짧게라도 기도하고 밤에는 또 밤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이렇게 하면서 우리 자신을 모든 삶을 기도로 녹여내면서 살아가는 거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살아갈 때 그때 교회는 거대한 영적인 강물을 흘려보내면서 세상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죠.
비가 안 오면 아 강물의 수위가 툭 낮아져요. 왜냐하면 강물은 그냥 도도히 흐르는 것 같아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실개천과 하천들 개천 개울들에서 물을 모두 모아서 강물은 도도히 흘러가는 거죠. 근데 비가 오지 않아서 작은 실개천이 물이 마르면 개울에 물이 마르고 개울이 물이 흘러가지 않으면 개천에도 하천에도 물이 없어요. 그러면 강물은 바닥을 줄어들고 바닥을 드러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가는 삶이 사실은 어 나 개인의 삶이 아니라 교회론적인 삶이에요.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교회에 날개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 날개에 매달리는 무거운 추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달린 거죠. 우리 모든 사람이 그 교회의 비상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죠. 그래서 나의 영혼은 나의 삶은 나 하나의 삶이 아니라 뭐든 지 체들과 함께하는 삶이고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기도해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 이 세 가지잖아요. 오로지 모든 것을 기도로 연관 짓고 기도를 하고 힘썼다는 이야기는 결국은 기도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힘써야 할 것임을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장시간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어도 마음을 간절히 쏟아놓지 않으면은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마음도 바꿀 수 없고 하나님의 보좌도 움직일 수 없어요. 그런 마음으로 매 순간 기도에 힘써야 됩니다. 그래서 말씀에 부흥, 교재의 부흥, 기도의 부흥이 있는 삶을 여러분들이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