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관용으로 살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4-5)
녹취자: 황인준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대한 편지를 거의 마무리하면서 일반적인 신앙의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뻐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살다 보면 기쁜 날들은 너무 희소하고 항상 염려와 근심 속에서 사는 날들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우울하고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 말했던 것처럼 결국 우리는 백 년도 살지 못하면서 천년의 근심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삶이 이렇게 기쁠 수 있구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세상 사람이 말하는 행복과는 다른 것입니다. 가난할 때, 예수 믿은 사람이 그 이튿날 부자가 되었다거나, 예수를 믿는 즉시 없는 돈이 생겼다든지, 못생긴 사람이 잘생겨졌다든지, 나쁜 부모를 만난 사람이 좋은 부모로 바뀌었다든지 그런 건 아닙니다. 환경과 처지는 있는 그대로인데 이 세상을 바라보는 그 마음과 눈이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이 샘솟는 겁니다. 예전에는 여유가 너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자기 먹고 입고 살고 하는 몸부림 속에서 살아오고 그나마 여의치가 않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한 욕망을 계속 품게 되니깐 끊임없이 삶이 고통스러웠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서 기쁨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거기서 아주 충격적으로 깨닫게 되는 사실이 우리 마음속에 샘솟는 기쁨이 바깥에 있는 것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본다’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그냥 하나님이 아름다우시다고 아름다운 게 아니라 보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인식하는 누군가가 있어야지만 ‘하나님이 아름답다’라는 말을 해줄 사람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찬송을 기뻐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에 반응해주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결국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예전과 다름없지만 달라진 관점을 가지고 그 아름다움 속에서 세상에 흘러가는 모든 희로애락의 사건 속에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깊이가 곧 사랑입니다. 그 읽어내는 마음의 구조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보게끔 만들어집니다. 아사밤을 추천해 주었던 나태주 시인이 꽃에 관한 시를 쓰면서 이야기한 것처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지나갈 때는 모르는데 자세히 보면 예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은 위로 상승했다가 상승해서 아름다움의 감각을 얻고 하강하면서 이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보면서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면서 감동을 받으며 아래로 내려오게 됩니다.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위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 구조가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의 구조입니다. 그런데 처음 하나님을 만날 때에는 사실 하나님이 너무 찬란하고 빛나서 하나님을 분해하여 보지는 못합니다. 말하자면 찬란한 빛으로 아름다움이 표현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도 아주 눈부시게 찬란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보게 되는데 그것을 풀이하자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아주 탁월한 증거입니다.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빛으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사도 바울은 순식간에 그분이 신이시라는 사실에 대해서 평생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나면 그 다음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성품을 읽어낼 때는 조화와 비율, 균형 속에서 읽어내는 겁니다. 모든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당구장에 당구공이 여러 개 놓여 있지만 당구치는 사람이 칠 때는 무슨 생각으로 저 빈 곳으로 공을 보내느냐고 생각하지만 보낸 공이 하나 맞고 둘 맞고 셋 맞고, 맞은 공이 또 다른 공을 때리고 때린 공이 다른 공을 맞으면서 홀(Hole)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감탄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못 읽지만 그 사람들은 그 경우의 수를 다 읽으면서 공을 보내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 없는 사람은 못 읽어내지만, 신앙이 있는 사람은 인간사 흘러가는 이 무질서해 보이는 삶 속에서 하나님 손의 간섭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간섭이 하나님의 질서를 보여줄 때, 우리는 거기서 찬란한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그 형언할 수 없는 빛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보이는 비율, 균형, 조화 이 속에서 당신의 뜻을 살피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을 읽어낼 수 없을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곧게 믿으며 기쁨의 삶을 유지해 가는 것이 신앙이고, 그것을 못 읽을 때 결국은 자신이 그것을 읽어낼 사랑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는 대신에 하나님이 무능하시고, 간섭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좌절하고 낙담하는 것을 불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이 기뻐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감옥 속에 갇혀서 사형받을지 모르는 죄수의 몸으로서 갇혀있는 어떤 의미에서 언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 모르는 그런 운명에 있는 사람인데 그 속에 있는 사람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먹을 거 먹고 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쁨이라는 단어를 거의 20번 정도 그냥 쓰면서 기뻐하라고 얘기하니깐 이 속에서 희열과 감사의 마음이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에 갔을 때, 그게 그것이라고 믿어지지만, 어느 교회의 밑바닥을 보여주면서 사도 바울이 갇혀 있었던 지하 감옥을 보았는데 의미상으로 눈물이 났습니다. 그 위대한 사도가 거기에 갇혀서 고생하고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낮고 커다란 쇠창살로 가려진 지하의 공간에서 감옥살이하면서도 이렇게 기쁨의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말씀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제까지 살았던 삶은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훌훌 날려버리고 기쁨의 삶을 살려고 해야 했습니다. 직원들이나 교역자를 데리고 일해 보면 정말 모든 조건으로 잘할 것 같은 사람인데 얼마 안 돼 나가떨어지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을 보면 정말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의 비결이 무엇이냐면 기쁨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무 기쁘고 이 교회에 있는 것이 너무 기쁘고 하나님이 나에게 이 일을 맡겨 주셔서 섬기는 게 너무 기쁘고 주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기쁜 사람들은 동역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기쁜 사람들은 아주 감사하면서 일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쁨이 우리 안에서 예수 때문에 계속 샘솟아 나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는 것. 그것이 사역자로서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활짝 웃고 마음의 평강과 기쁨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 자체가 홍보 전도입니다.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기뻐하고 충만할 수 있을까?’ 그게 아주 극단적으로 달하면 로버트 머리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이 설교하러 올라갈 때, 설교를 시작도 안 했는데 교인들이 그의 얼굴을 보면서 울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와 똑같은 것입니다. ‘주님을 뵙고 온 사람이 저렇게 얼굴이 찬란하고 행복하니 주님을 직접 뵙는다면 그 주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실까?’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여기에 쓰인 것입니다. 사역의 가장 중요한 명함은 (얼굴)입니다. 이 속에서 한없는 기쁨이 솟아나는 겁니다. 그래서 늘 사람들에게 미소를 짓고 환한 얼굴로 대우할 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그 사람을 보면서 “걱정하지 마라, 이것은 정말로 걱정도 아니구나!”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마지막으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하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관용이라는 말이 에피오이케스라는 단어인데 에피와 오이카라는 단어의 합성입니다. 그래서 원래 뜻은 무엇에 관해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이 두 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결국 관용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인간의 기쁨과 특히 인간의 분노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이 내가 원하는 것과 일어나는 것, 내가 이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과 실제 이 사람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느껴질 때, 화가 나고 분노하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관용은 그 모든 것을 다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관용입니다. 그래서 특히 이 관용을 강조했던 스토아학파(Stoicism)의 사고를 보면 모든 것을 비슷하다고 본 근거가 모든 사물은 태어나서 흘러가고 마지막에는 소멸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잘난척하는 나나 못난척하는 너나 여기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시간이라는 물결에 흘러 떠내려가면 너도 떠내려가는 것이고 나도 떠내려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인생이라는 것이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관용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 차이가 대단한 것이 아니구나’ 생각하면서 너그럽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선과 악의 차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의 차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것에 대해 관용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에게 믿음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여기선 우리가 얼마든지 다르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는 우리를 향한 것. 하나님의 정의와 불의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편의와 이해에 관계된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다양한 태도나 삶이나 이 모든 것을 보면서 내가 그에게 기대하는 것과 실제 그가 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볼 때, 그것이 비슷한 것으로 생각해 주는 것을 그리스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관용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하나님의 정의와 불의, 선과 악. 이런 것들에 대해선 또렷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다른 것들, 자기와 자기의 이익이 관련된 것, 성경이 아디아포라(Adiaphora)의 영역으로 남겨둔 것.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과 안 하는 것 사이의 경계를 정하는 것이 분명한 성경의 근거가 있지 않을 때, 이럴 때에 마음을 너그럽게 품고 관용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을 보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보겠습니다. 권목사님께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람에게 화를 내는데 그때 이 사람에 대해 화를 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무엇인가를 어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을 때, 내가 화를 많이 내나요?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중요한 지침을 위반해서 나를 대했을 때, 화를 내나요?”, “전자인가요? 후자인가요?”, “후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 사람은 십계명 중 아무것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시간에 대해 칼인데 이 사람은 약속 시간에 10분을 말없이 늦은 겁니다. 그때 나는 이 사람이 열 개의 계명을 모두 범한 것보다 더 분노가 치밀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 비율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관용을 못 하는 것입니다. 관용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출렁거리는 판단력이라고 하는 것이 변덕스럽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자기 시간약속 어겼을 때는 펄쩍펄쩍 뛰다가도 자신은 시간을 수시로 어깁니다. 그때 난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어가지만, 앞뒤가 모순적으로 됩니다. 그래서 관용이 있는 사람들은 일어난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일어난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앞으로도 결국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분명히 가지고 사람들에게 관용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을 하게끔 장려한다든지 내버려 두라는 뜻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그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관용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짝으로 나오는 ‘너희 관용을’ 그냥 품고 있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알게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하라!’ 성경에서 잘 나오는 표현으로 ‘알게하라’. 그 뜻은 내가 관용한다고 떠들어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이 인격에 베어서 모든 사람이 볼 때에 모를 수가 없게끔 알게 한다는 뜻입니다. 방점이 알게 하라에 찍힌 것이 아니라 알려질 수 있을 정도로 그 관용이 충분하게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결국은 네가 관용한다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이 너에게 부당하게 했다는 것을 주님이 판단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 주님이 가까이 오시면 너의 관용에 대해서 상급을 주실 것이요. 네가 관용함으로써 빛났고 그는 잘못 행동함으로써 주님의 이름을 땅에 떨어뜨렸지만, 그것은 네가 아니라 내가 심판한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관용을 행사함에 있어서 예수님에 의하면 관용을 행사하는 아주 훌륭한 마음의 지침은 만물이 가까워져 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서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만물에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려라’. 이러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나는 많은 일들이 사실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관용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성경 구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흴 구하실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그리스도 예수의 평강이 너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리라’한 성경 구절이 이 두 개를 기초로 쌓아 올려지는 겁니다. 그래서 평강과 그리고 관용.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기도에 있어서 영혼에 온전한 자유를 가지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일에 대해서 기도와 간구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기쁨과 관용은 우리를 자유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기쁨과 관용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고 얽매이지 않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다면 기도 못 할 이유 없고, 간절히 기도하여 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다면 우리가 넘지 못할 산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올 한 해를 보내면서 하나님을 기쁨에 살지 못했던 것들은 이젠 뉘우치고 관용의 삶을 살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마음의 반성을 하면서 새해에는 넘치는 기쁨과 충만한 관용으로 살면서 삶 전체가 기도의 향불이 되도록 그렇게 섬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