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찾는 사랑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원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룻 1:16-17)
녹취자: 허혜숙
사사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었고 먹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유대 베들레헴에서 살던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편의 이름은 엘리멜렉이고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였습니다. 그리고 말론과 기룐이라는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베들레헴을 떠났습니다. 거기에서 제일 먼저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두 아들이 남았는데 거기에서 아들들이 이방여자들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거기에서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어머니 ‘나오미’라는 이름이 원래 기쁨이라는 뜻인데 너무 어울리지 않는 슬픈 여자가 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형사취수제라고 해서 형이 후손을 끼치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형의 집안에 자손을 이어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이 같이 죽었으니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으니 나오미가 두 며느리를 불러놓고 자기는 어차피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테니까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라, 나에게는 또 다른 아이도 없고 아무 희망도 없으니까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첫째 며느리는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둘째 며느리 룻은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룻도 오르바도 모두 이방여자였고 사실 어머니를 따라간다는 것은 자기들의 고향을 등지는 것인데, 더욱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이방인을 대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여자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특이한 태도를 보였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이었습니다. 물론 오르바도 어머니를 사랑했으니까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많은 눈물을 흘린 끝에 어머니를 떠나가기도 했지만 룻이 이 어머니를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은 그 이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이라는 구도에서 보면 분명히 이해가 되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고 어쨌든 이 룻은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시아버지가 죽고 그 다음에 남편과 형제들이 모두 죽고 여자 셋만 남은 처지가 되었는데도 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신뢰가 얼마나 깊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사랑이 룻의 마음에 강력하게 불타오르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시점에서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둘은 그 사랑으로 연합되어 있었다는 것까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런 사실을 발견하면서 결국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것은 상황과 환경에 달린 것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환경으로 말한다면 좀 더 자기 자신을 위한다고 생각하면 이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야 하는 이 시어머니와 속히 헤어지는 것이 불행에 더 깊이 빠지지 않은 지름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그런 영리함 대신 올곧은 사랑을 택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깊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환경에 핑계를 대고 상황에 이유를 댑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이 없음을 정당화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룻에게는 시어머니를 사랑해야 할 어떠한 환경도 없었습니다. 그냥 사랑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사랑은 가능하다는 확신을 오늘 룻의 본보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환경을 탓하지 말고 기회 있는 대로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성심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자유로운 것이며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운명을 함께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나를 어머니를 떠나서 다시는 당신을 따라오지 말라고 그렇게 나에게 말하지 마십시오.’ 그러면서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가 머무는 곳에 나도 머물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결정적으로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신앙고백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하사행위가 아닙니다. 사랑은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이 어머니는 자기의 이름이 나오미(기쁨)였는데 베들레헴으로 돌아간 다음에 사람들이 ‘나오미가 왔구나’그랬더니 아주 단호하게 말하면서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마라, 나를 마라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마라’는 ‘쓰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마라’쓴 물이 나오는 곳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쓰디쓴 길을 걸어온 여인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가 살아온 그 모든 길이 두 아들과 남편 세 사람 중 한 사람만 죽었어도 씻을 수 없는 비극인데 셋이 차례대로 모두 죽는 광경을 지켜보는 이 며느리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사랑은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능력이 모자란 사람에게 베푸는 하사행위가 아닙니다. 비록 내가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어도 그 때 그가 아파하던 자리에 함께 해 주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계시가 주어지면서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는 이 계시는 그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충격적인 위로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임마누엘.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요한복음 1장에서 ‘에스케노스’라고 하는데 ‘사칸’이라는 히브리어에서 따 온 것입니다. 약간 이렇게 텐트를 친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 몸을 텐트처럼 펼쳐서 이 땅에 와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까? 그것은 그 후에 그를 믿는 사람들이 하는 고백이고 예수님이 계시는 동안에도 어떤 사람은 기적의 떡을 먹었지만 어떤 사람은 여전히 굶은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지도해 주셔서 마음을 바꾸고 올바른 길로 돌아갔지만 탐관오리들과 육욕에 치우치고 탐욕에 가득 찬 사람들이 가령 유구를 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일은 예수님이 살아서 갈릴리를 다니실 때에도 여기저기에서 일어나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하나님의 위로와 같은 하나님이시던 그 분이 우리와 함께 있어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중요한 의도 중 하나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사도들을 택했습니다. 함께 있어주는 그것은 그 자체가 최고의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몰트만이 그런 질문을 합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수없이 죽어가고 광란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날 때 그 때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마지막에 내린 대답이 그 역사의 현장 거기에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고통받는 인간이 있는 그곳에 신도 함께 고통을 받으며 거기에 계셨다고 하면서 답을 찾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받았던 최고의 위로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땅을 주시고 집을 주시고 직장을 주시고 너무 감사하죠. 그런데 그 감사가 항상 똑같이 반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돈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돈을 볼 때마다 감사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혼할 때 저런 남편을 나에게 주셔서 감사하다고 생각하지만, 자매가 매일 그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매일 생각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반대로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선물에 아주 익숙해지는 존재입니다. 선물이 반복되면 더 이상 선물이라고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 우리와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하나님이 여기에 나 혼자 두신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셨구나’ 그것을 느끼면서 우리의 마음이 깊은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임마누엘의 신앙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신약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이상적인 신앙이 사도바울의 신앙을 통해 표출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 막연히 구원 받아서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것,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는 것을 성령의 임재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최고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룻은 그 불행한 시어머니에게 자신의 사랑을 함께 있어주는 것으로 표현을 합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어디를 가시든지 나는 따라갈 것이며 어디에 머물든지 거기에 나도 머물 것이며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될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어머니와 운명을 같이 하고 어머니와 운명을 같이 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나에게는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나에게 최고의 소중한 관계는 어머니와의 이 관계입니다. 라고 하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예수를 붙들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가장 감동을 주는 고백은 신앙고백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비록 기근을 피하여 모압 땅으로 피난을 온 처지였지만 어떤 사람은 이것을 하나님의 땅을 떠난 징벌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쨌든 가난과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서 모압으로 내려온 것 아닙니까? 그러면 룻이 보기에 그렇게 내려와서 불행한 일을 세 번이나 당하고 결국은 이미 가문이 멸망한 지경에 이르렀을 그 때에 엘리멜렉의 집안에 무슨 선한 것이 있겠습니까? 나오미의 성품과 신앙, 인격이 얼마나 훌륭한지는 이 짧은 본문만으로는 알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 하나는 그 불행한 처지 속에서도 시어머니와 함께 고난을 이기고 견뎌오면서 시어머니 안에 있는 하나님을 느낀 것입니다. 결국 이 여자도 신앙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들이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 성공하고 잘 돼야지만 복음이 잘 전파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을 공식화 시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예수님은 세상적인 성공에서 어떤 모본을 보이셨으며 선교사적으로 백여만 명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사도바울은 세상적으로 어떤 성공과 성취의 피의 보증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까? 피 뿌리며 죽어 간 사도들의 발자취는 사람들에게 과연 세상적으로 매혹적인 복을 받은 것 같은 생애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끼리 잘 먹고 잘살고 부를 이루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그 무엇을 사람들의 마음에 전해 줄 때 그것이 신앙이 생기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지 우리가 규정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룻이 나오미와 함께 살면서 자기가 혈육에게 돌아가 다시 그 모압 족속 중의 한 백성으로 돌아가서 제2의 삶을 사는 것 보다는 어머니를 따르는 과부로서 어머니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과 자신도 관계를 가지며 사는 것이 훨씬 복될 것이라고 하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단순한 어머니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신앙심을 물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하나님이 전파되는 것은 성공하고 이 세상에서 복 받고 하는 것을 통해서만 전파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룻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하면서 더욱 결단하는 것은 ‘죽는 것 이외에 내가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자기 자신을 일종의 아나데마이 정신에 내어 맡기면서 ‘내가 오직 어머니와 함께 하나님을 따르겠습니다.’라는 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역으로 추적해 보면 결국 그 큰 불행 중에서도 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고 어머니를 끝까지 사랑하게 만들었던 것이 신앙이 아니었겠느냐 하는 생각을 우리가 역추적해서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결론을 내자면 결국 우리는 상황과 처지와는 상관없이 언제든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결국 우리가 섬기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최고의 복은 우리가 하나님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분을 향유하고 그분을 즐거워하고 내가 어떤 상황과 처지에 처해있든지 나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선교적인 삶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처지에 있든지 올 한 해도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서 그들도 여러분처럼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되도록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