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섬기는 삶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 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5)
녹취자: 김경애
사도 바울의 유언과 같은 설교입니다. 마지막 에베소에서 온 장로들과 함께 작별인사를 나누고 또 유언과 같은 가르침을 남긴 후에 마지막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면서 서로 끌어안고 울며 헤어지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특별히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나는 모본을 보여주었다.’ 사도 바울은 말로만 한 교사가 아니라 삶 전체를 걸어서 웅변하듯이 살았던 사람입니다. 사실 어떤 사람에게 아주 특별한 사상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가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런데 사람들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사람의 생활, 삶입니다. 굳이 그 삶이 아주 엄청난 금욕적인 삶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상 때문에 든든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확신 있게, 기쁘게, 그리고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삶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본입니다. 그래서 모본은 보여주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은 이미 그것은 참된 모본이 아닙니다.
철학의 역사를 보면 대개 철학자는 두 종류입니다. 머리로 철학을 했던 사람이 있고 가슴으로 철학을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데카르트, 칸트, 헤겔 같은 사람들은 가슴으로 철학을 한 사람들이 아니라 머리로 철학을 한 사람들입니다. 머리로 철학을 한 사람들은 생애를 살펴봐도 생애가 드라마틱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슴으로 철학을 한 사람들의 생애는 아주 드라마틱합니다. 머리로 철학을 한 사람들의 시조는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가슴으로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범상치 않은 삶을 삽니다. 파스칼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니체 같은 사람도 가슴으로 철학을 한 사람입니다. 또 마르크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삶은 아주 불탔고 그리고 인간의 철학하는 활동의 중심을 이성에 두기 보다는 인간의 욕망과 감정에서 뿌리를 찾습니다. 그래서 파스칼만 해도 보통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역동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양식이 없어서 자기 집의 책을 모두 팔 정도였습니다. 사실은 많은 기술의 특허를 가지고 있어서 어마어마한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안일을 다 버렸습니다. 니체도 온몸으로 자신의 철학적인 삶을 도달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살아내려고 몸부림치던 사람이었습니다. 연약하기 짝이 없던 사람이 그렇게 해서 아주 극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마르크스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니체는 말하기를 머리는 심장의 내장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머리는 심장의 내장일 뿐이라고 말할 정도로 가슴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신앙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기독교에서도 똑같습니다. 스콜라시대 때에는 사람들이 철저하게 머리를 중심으로 기독교를 생각합니다. 아퀴나스가 최고봉에 서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보나벤추라 뒤에 오는 두우스구스투수스, 그 사람들에 의해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 두 사람의 공통점을 어거스틴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철저한 지성을 강조하지만 여전히 그의 신학은 가슴으로 하는 신학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칼빈은 어디에 속하는 사람입니까? 나는 아주 Definitely하게 가슴으로 신학을 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마르틴 루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인 이것입니다. 어떤 모본은 ‘내가 이제부터 모본을 보여야지!’ 그것은 학급에서나 일어나는 일이고 실제의 삶에서의 모본은 자기가 확신을 가지고 가슴으로 살아냈던 삶의 결과입니다. 그것이 목표일수는 없습니다. 모본이 되라는 그 말은 모본만 되라는 것이 아니라 모본이 열매로 맺힐 수 있게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건강하게 살면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그 삶이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실은 온 가슴으로 하나님 앞에 신학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의 신학자였고 그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범사에 내가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것 같이’ 그랬습니다. 어떤 한 가지를 특별히 다른 사람에 비해서 잘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청빈한 것만큼은 모든 사람위에 뛰어난데 나머지는 못했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범사에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이 여러분들에게 ‘나는 여러분들에게 모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서입니다. 그러니까 무식한 사람은 결코 모본을 남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본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보면 나만 못한 사람이 많이 있지만 그리스도를 보면 자신은 너무 비천한 인간일 뿐이고 끊임없이 거기서 자기를 부정하고 부인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덕을 이루는 삶입니다.
자, 그러면 첫 번째 작은 결론을 내면 결국 사도 바울이 ‘범사에 내가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은 사도 바울이 직접 그것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면서 살아간 결과였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 자신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어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닮았나? 그리고 지금 나는 어제와 비교해서 그리스도와 얼마나 닮았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이 팡세에서 이야기합니다. ‘너는 다른 사람과 너를 비교하지 말고 나와 너를 비교하거라.’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삼위일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의 깊이는 바로 이것을 얼마나 많이 의식하면서 사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내가 끼친 모본을 인정해주는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앞에서 살고 관계를 맺었던 주님이 나의 행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삶 전체로 그리스도 제자의 삶을 살아서 그분을 본받는 삶을 살아서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사람들에게 모본을 끼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수없이 가르쳐 주어도 추상적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면서 살아간 어떤 사람의 상을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와 연결시킬 때 사람들 속에는 아주 뚜렷하게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가 또렷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했던 것이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목회의 원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곳에서 1년, 2년, 3년, 4년, 5년을 사역을 하면 그가 밤이나 낮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또 찾고, 그를 추구하는 사람이며 그가 변해가는 것이 주위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세계가 없으면 일에 익숙해지고 사람은 교만해지고 태만해지고 무엇인가 구태의연해지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그 무엇이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세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첫 번째로 우리가 깨닫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모본을 보여주게 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약한 자들을 도우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약하다는 것은 모든 방면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 경제적으로 약한 사람,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이 약하다는 것을 느낄 때 그때에 우리는 그 약한 것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기보다는 자신과 비교하면서 우월한 느낌을 받기가 일쑤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도와주어도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 같은 한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데서 비롯되는 그런 섬김이 아니라 높은 자리에서 아랫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내려주는 하사하는 것 같은 우월감 속에서 이루어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동정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깊이는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인간 존엄성에 기반을 둔 사랑이어야 합니다. 베푸는 자신과 도움을 받는 사람이 서로 우열의 관계에 있지 않고 자유로운 주체로서 하나님 앞에 엄숙하리만치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가운데 섬김의 행위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동정을 베푸는 것도 동정에 압도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동정으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동정은 니체에 의하면 야전침대와 같은 것입니다. 너무 지치고 힘들면 잠깐 남의 동정의 도움을 받아서 누울 수 있지만 조금만 있으면 온몸이 쑤시고 더 이상 누워있을 수 없는 야전침대와 같은 것입니다. 왜? 결국 우리의 삶은 남의 동정에 의해서 대신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의지와 결단을 가지고 자기 자신이 힘을 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정을 베풀 때에도 기독교적인 동정은 하사하는 동정이 아닙니다. 나와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사람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가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이유 때문에 결코 무시 받아서는 안 되는 그런 동등한 영혼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동정입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내가 그를 도왔다는 자부심이나 우월감, 그리고 자만심 같은 것들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생은 약한 자를 돕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강한 자를 도와서 그에게 인정을 받아서 무엇을 나누어 갖는 삶이 아니라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돕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그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렇게 섬기는 것입니다. 거기서 삶의 보람을 찾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 경제적으로 누구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나도 생존을 너무 힘들게 생존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경제적으로 도울 수 없습니다. 나의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상처받고 고통 받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넘치도록 그렇게 베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자원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큰 것이든지 적은 것이든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를 것이지만 그런 여유가 없으면 자기 자신에게 자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매일 매일 살아가면서 자원을 획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가족과 이웃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건강관리를 못해서 건강이라는 자원이 거의 동나고 나면 다른 사람을 노동을 통해서 섬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있는 사람이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삶이라는 것은 항상 자기가 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는 삶이 건강한 삶입니다.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모든 면에서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누구를 돕는 것이 조금도 부담되지 않는 그리고 그 일을 하면서 오히려 자신을 실현해 나가는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보면 주변에 약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에게 도움을 기대하지만 그러나 자신은 누구에게 도움을 베풀어야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남의 동정에 끊임없이 기대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주체성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매우 나쁜 것입니다. 도움을 받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도움을 자신의 생존으로 삼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꼭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받고 삶의 원기를 받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동정을 받는 것이 아무 느낌도 없이 무덤덤해지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방식으로 그렇게 도움을 받는 것은 자신의 삶의 주체성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느냐 하면 ‘나는 일생을 살면서 결코 동정이 필요 없다. 나는 누구의 동정도 필요 없다. 그러나 나는 누구도 동정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이 가장 덕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무에게도 사랑을 받지 않아도 외롭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자기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배기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가장 덕스러운 삶입니다. 이런 사람은 상처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연약한 사람을 도운 적이 언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약한 자들을 찾아내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강한 자들 속에서는 나의 사명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약한 자들 속에서 나의 사명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도움으로써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만약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고백할 신앙의 터전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돕고, 동정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동정을 하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들은 고맙게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달란트입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고 그 말씀을 매일 매일 묵상하면서 자기의 마음에 불꽃처럼 타오르게 합니다. 그것은 자원입니다. 그 자원을 가지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도 그것을 소망으로 해석할 수 있고 또 나보다 더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생겨날 때 그들을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줄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훌륭한 사역자는 부자입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모든 면에서 부자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해야 할 의무 중 어떤 것도 귀찮게 느껴지지 않고 하고 싶은 모든 일중에 어떤 것도 더 이상 마음에 의욕이 없어서 못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충성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충성된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원이 많이 축적된 사람이어야 충성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불꽃처럼 산다는 것은 어떤 가연성인 물질이 그 사람 안에 가득 있을 때 그것이 불꽃이 될 수 있는 것이지 물로 가득한 마음속에는 불꽃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약한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기억해야할 것이 마지막 세 번째로 나옵니다.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다. 주는 것이 받는 것이 복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어디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학자들의 하나의 궁금증입니다. 복음서에는 이런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도 바울이 지어냈을 리는 없습니다. 아마도 당시에 널리 돌아다니던 예수님의 어록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혹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가 사도 바울에게 전해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근원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도 바울이 말한 이 내용이 영감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받아들입니다. 근원은 찾을 수 없지만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주는 것이 받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면 자신의 자원의 소비이고 자신의 자원을 퍼내는 것인데 왜 그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했을까? 주는 것은 자원의 낭비요 소비요 자원을 퍼내는 것이고 자원을 받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요 성장하는 것이요 내가 소유하는 것인데 그런데 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이렇게 남에게 베푸는 사람에게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서 사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생동안 자기를 다 버려 다른 사람을 돕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이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치시기 까지 우리를 위해 모두 주셨는데 결국은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희생을 한없이 가상하게 여기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만물을 그분의 발 앞에 무릎을 꿇어 그를 주라 시인하게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충만한 생명과 모든 복을 인류에게 나누어주는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고 베풀고 다른 사람을 위해 소비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준 것보다도 더 근원적이고 놀라운 은혜와 복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더욱 부요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뒤에서 이야기한 복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복입니다. 그런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물질을 소유하고 세상의 권력을 소유하는 것을 통해서는 결코 행복 자체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사람들을 돕고 그들을 위해 허비함으로써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방면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충만한 복 안에서 우리는 이전보다 더 많은 자원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서 그들에게 모본을 보이고 또 약한 자들을 도우면서 살아서 우리 속에 증진되는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것을 목표로 할 수는 없지만 삶 자체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자기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보다 못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경제적으로, 신체적으로 연약한 많은 사람에게 삶의 온기를 느끼게 만들어 주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감동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어루만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깊이 느끼며 다른 사람을 위해 베푸는 삶을 살아서 세상 모두가 사랑의 질서로 가득한 세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과 부요한 사람이 있지만 누구도 가난한 사람은 없고,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과 약한 사람은 있지만 이 사람이 저 사람을 섬김으로 그들도 부요함에 참여하는 삶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