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배우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녹취자 : 이은정
수고하고 무거운 자를 부르시면서 그 수고하고 무거워하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님이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배우라.”이고 다음에 “쉼을 얻어라” 두 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배우라가 먼저입니다. 그런데 그“배우라”라는 말씀을 하기 전에 예수님이 자기 마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결국, 인생의 무게, 인생의 수고라는 것이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암시해주시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설교했지마는, 고통과 통증은 다릅니다. 고통은 객관적인 고통스러운 상황이고 통증은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작은 통증에도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큰 고통에도 작은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디서 그런 차이가 벌어지냐 하면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생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해결하는 방법을 말씀하시기 전에 자기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겠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돌려보면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이 편안한 인생을 보내셨다는 뜻이 아니라 ‘너희들이 쥐고 있는 그런 의미에서의 고달픈 인생의 무게를 나는 지니고 있지 않다.’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았던 인간의 영원한 표상입니다.
그러면 이제 좀 더 진전해보면, 온유하고 겸손하다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겠습니까. 온유하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부드럽고 사람들을 어떤 이유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너그럽고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대해준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무골호인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도 주위에서 보면 이 사람이 이렇게 치이고 저 사람한테 저렇게 치여도 아무 말도 못하고 호구처럼 사는 사람이 있잖습니까? 이 온유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 온유함을 어떤 한 사건이 잘 보여줍니다. 그게 바로 민수기에 나오는 그 모세와 미리암, 아론의 사건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대적하잖습니까. 근데 그 사람은 그때에 모세에 관해서 뭐라고 말했냐면 비난받을 때에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들보다 승하더라”고 그랬습니다. 그렇다고 모세가 결단력이 모자란다든지 용기가 모자란다든지 비겁하다든지 그렇게 생각할 사람은 없잖습니까. 근데 자기를 그렇게 비난하고 더군다나 사랑하는 형제들인데 그렇게 자기를 비난하고 백성들에게 시기해서 말하기를‘여호와가 모세와만 말씀하셨냐 우리와도 말씀하셨다. 나도 우리도 모세와 거의 동급의 사람들이다’라고 이야기하면서까지 모세를 비난했습니다. 대적했습니다. 그때“온유함이 지면에 승하였더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결국 그 온유한 건 뭐냐 하면 그렇게 대적하는 사람에 대해서 원한을 품거나 대적하거나 함께 그를 응징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없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그런 놀라운 여유는 어디서 온 것이겠습니까.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인정받고 있다라고 하는 그 신뢰에서 오는 자신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온유, 겸손 모두 다 핵심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인격이지만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 성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이제 겸손으로 넘어가면, 겸손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보면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낮추는 것인데,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이 그게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사람들 중에 자기만 못한 사람을 만나도 교만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두 그림을 함께 겹쳐보면서 자기 인간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인데 그게 마음의 짐입니다. 해결책은 예수님께 배우라 하는 것입니다. 근데 예수님께 배우기 전에 기억해야 될 게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성품을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기적을 행했는데 그걸 배워라. 내가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지를 봐라. 내게 배워라. 내가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 봐라. 내게 배워라. 내가 수많은 귀신들을 물리쳤다. 내게 배워라“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예수님 당신의 마음에 주목하라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그걸 봐라.
결국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또 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가르치시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많은 일들을 보잖습니까. 그거는 망원경입니다. 망원경은 자기를 들여봐 달라고 망원경이 있는 게 아니라, 망원경은 자기를 이용해서 먼 다른 곳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 어마어마하게 놀라운 일, 없죠? 그런 게 아니라 그걸 망원경으로 해서 더 깊이 있는 거를 보라 이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분이 얼마나 온유하셨는지 겸손하셨는지 그걸 보라는 것입니다. 그거는 사실 겸손과 온유만 보라는 게 아니라 이건 일종의 제유법적인 의미로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모든 성품을 대변하는 제유법적 표현으로 이 두 가지 덕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 이하는 예수님이 충성이 없었겠습니까, 순결이 없었겠습니까. 그렇죠? 그거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나 예수님을 묵상할 때도 항상 마지막에 우리가 회귀하여야 할 거는 예수의 마음으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는 위대한 능력을 보면서 나도 저런 능력을 주시옵소서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니까 그렇게 능력을 행하시지 않을 수 없는 그 죄인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주신 그 마음, 그거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앎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데 그 지식은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의 시행 방식입니다. 모두서 페란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아는 지식,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거를 보면서 결국 마지막으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 있는 마음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워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뭔가 어려운 일이 있어서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주님이 응답해 주십니다. 그때 그렇게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감격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한테 이익이 좀 떨어져서 그게 아니라, 그래서 나를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그 응답 안에서 읽어내는 것입니다. 아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향해 이런 성품을 가지고 계시는구나 하면서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게 죄지었을 때 정의의 성품을 발견하면 회개가 되는 거고, 비참했을 때 자비의 성품을 발견하게 되면은 긍휼의 심정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감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이거를 우리의 사역에다 적용을 시켜서 한번 봅시다. 이게 우리의 일평생 사역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예수의 마음이 어떤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의 마음을 알게 될 때, 삶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주체로 돌아가게 됩니다. 자기 삶의 참다운 주체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 원리입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의 성장이라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감옥에서 그 나이든 사도가 빌립보 교회에 남긴 말이 무엇입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이게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사도 바울이 마음이라는 주제로 회귀를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다메섹에서 체험을 하고 오직 전도, 그리스도 예수를 순교의 각오로 선포하다가 저들을 구원하는 거 있잖습니까.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그 복음의 진수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복 받아라. 전도 많이 해라. 큰 교회가 되거라. 헌금 많이 내라. 그리고 한 번 부흥 운동을 일으켜 봐라.” 그러지 않고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니 죽기까지 복종하셨음이라” 거기에서 이 온유와 겸손의 성품이 생애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밌는 게 뭐냐는 말입니다. 뭔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람들이 없다고 욕을 해도 서럽질 않습니다. 공부 잘한 것을, 공부 많이 한 것을 자타가 공인하는 형제에게 “에이 무식해 가지고 그것도 몰라”(라고 해도) 상처 절대 안 받습니다. 멘탈 갑(입니다). 얼굴 예쁘게 생겼다는 거 자타가 공인하는 자매한테 “에이고 얼굴도 못생긴 게” 그래도 “그러게 말이야.”(라고 말하면서) 여유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분의 성품을 깊이 물려받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느끼고,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람인지를 이 신앙 속에서 자기가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신앙적인 자존감이 매우 높습니다. 그래서 무슨 소리를 들어도 마음의 동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모세가 그런 예입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이고.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마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역을 잘하는 것도 너무 좋은데, 그런데 그거는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이 일을 하게 하고, 또 일을 하는 그 마음이 그 일을 하면서 주님을 배우게 만들어주는 그게 구도자로서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구도자로서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마음에 배움으로 쌓이면서 고통의 통증을 덜 느낄 수 있는, 혹은 안 느낄 수 있는, 그 매우 중요한 삶의 기술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마지막으로는 이제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위로를 우리들이 받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 마음의 문제가 처음부터 해결된 사람이 있는 게 아니구나. 그리고 처음부터 온유함과 겸손함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 고통을 당해도 통증을 덜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재산, 이런 것들이 덜컥하고 누군가에게 선물처럼 주어지는 게 아니구나라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배우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근데 배운다라고 하는 게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무슨 교리를 배우고,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를 배우는 것 같은 그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뭐라고 얘기 하냐면,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그럽니다. 이게 문화적인 그 백그라운드가 있습니다. 로마 시대 때 배운다라고 하는 거는 로마 시대의 교육을 보면은 교육의 내용과 삶이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거는 그 학문을 배우든 기술을 배우든 똑같았습니다. 지금은 그런 전통이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이모부가 옛날 말로 하면 양복쟁이였고, 좋게 말하면 양복 장인이었습니다. 근데 그 양복점에 들어와서 일하는 사람들을 모든 가족들이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그 제자들이 하는 거를 보면은 와가지고 그 이모부한테 양복 만드는 기술을 배우러 왔는데 기본이 뭐냐 하면은 딱 오면은 맨 처음에 오면은 청소하는 것부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우러 온 사람은 양복을 보는 게 아니라 양복 장인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장인이 어떤 마음으로 옷감을 다루고 어떤 마음으로 옷을 만들고, 어떤 마음으로 고객을 대하고, 파는지, 심지어는 거래에 있어서 얼마나 정직하고, 진실한지 이거를 총체적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에 1960년대 얘기인데 그 시대에는 모든 방면이 안 그런 사람들도 나쁜 사람들 많이 있었겠지만, 대장간이든지 뭐든지 제자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에게는 의리가 있었습니다. 자기 제자들에게. 물론 월급 많이 안 줍니다. 처음에 가면 밥이나 먹여주는 정도입니다. 그러다가 애가 제법 쓸 만 하면은 “너 옷감 좀 잘라봐라” 이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양복 장인으로서 살아야 될 삶 전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고객과 나누는 대화 한마디 옷감을 다루는 자세, 정직성, 성실함, 부지런함, 기술 모든 걸 보면서 그 자기 선생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 “나의 멍에를 메고”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제 밭 같은 거를 갈잖습니까. 그러면 혹은 연자맷돌 같은 걸 돌리잖습니까. 그러면 소가 한 마리가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거를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소를 두 마리씩 이렇게 매달아 가지고 하나의 멍에를 짊어지고 밭을 갈게 한다든지 아니면 연자맷돌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멍에를 같이 한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같은 운명 공동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거를 삶 자체를 트랜스퍼런스(transference)하는 그런 관계에 있는 사제 관계에 대한 그 당시의 묘사였습니다. 제자를 향해서 너는 나와 함께 같은 멍에를 진 사이다. 그게 바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멍에가 우리 멍에라는 게 아니라 내 멍에다. 근데 네가 내 멍에 아래로 들어와서 같이 이 멍에를 지면서 그러면서 배우는 거다. 그 배움의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삶 자체를 배우는 것입니다. 삶 자체를 배우는 것입니다.
나는 무슨 그렇게 나의 제자들을 만드는 일에 나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럴 만한 위인도 못 되지만 애정이 없다. 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그렇게 큰 관심이 없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혹시라도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이 나를 스승으로 생각하면 나는 사다리입니다. 나를 밟고 올라간다면 발로 차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이지현을 이지현답게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좀 참고하라고 한 번 밟고 올라가라고 주신 사다리입니다. 언젠가는 내가 필요 없어지는, 사람들이 필요 없어지는 사람이 되어야지만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참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닙니다. 근데 뭘 이렇게 나를 중심으로 무리를 만들고 무슨 뭐 그런 거에 대해서 나는 관심이 없다 이겁니다. 각자 자기의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 서로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그런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게 성경이 얘기하는 자유인의 개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이외에는 우리가 묶인 곳이 없는 사람들이 되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배울 때까지는 멍에를 함께 지는 것입니다. 삶 자체를 공유하고 그다음에 스승의 마음을 배우고, 제자의 마음을 서로 물려받고 하면서 이게 말하자면 요즘 말로 간부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데워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많이 공부했는데 왜 그런지 말씀을 설교하는데 지식은 많은데 별로 진리의 빛은 비추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뭐를 많이 하지는 않았는데, 투박하고 논리도 좀 부족한데 선명한 빛이 그 가르침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있단 말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와 함께 멍에를 지고 예수의 삶과 인격 전체를 흠모하고 배우려고 하는 때가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의해서 이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도 말입니다. 철학자는 두 부류인데, 머리로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가슴으로 철학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머리로 하는 사람은 머리를 돌격 앞으로 하고 가슴으로 하는 사람은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제3의 부류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한 거를 열심히 정리해서 카피하면서 먹고 사는 직업 철학자들입니다. 그러면 이제 머리로 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 그다음에, 데카르트, 칸트, 헤겔 이런 사람들입니다. 가슴으로 하는 사람들은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그다음에 계열은 좀 다르지만 토머스 홉스 그다음에 루소 그리고 니체, 파스칼, 마르크스 이런 사람들입니다. 결국은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안에서 결국은 머리가 없는 가슴, 가슴이 없는 머리,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앞섰느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보면은 가슴으로 철학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인물이 그럽니다. 그리고 그 가슴으로 읽어낸 것들을 머리로 정리하면서 삶 속에서 녹여내는 게 신앙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배우다라는 이 말에는 아주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글씨를 쓰면서 배우는 게 아니라 삶 전체를 체득해 가면서 그 예술로서의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술들을 터득해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멍에를 메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마음, 인류를 향한 마음, 역사를 향한 마음 그리고 나라고 하는 인간 존재를 향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갖지 말아야 될 생각이 내 인생의 의미는 70억의 인구가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70억 분의 1일 것이다. 그런 계산을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에게는 내가 세계의 전부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세계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가 드러낼 찬란한 영광의 빛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죄인까지도 희망이 없는 악인까지도 하나님이 용도가 있으셔서 창조하셨고, 거기에 있음으로 보다 더 당신의 창조의 세계가 빛날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거를 자기가 어떻게 살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의해서 더 찬란하게 드러날 수도 있고, 덜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은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악할지라도 선해서 거기 있는 것입니다. 그 악도 선에 기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은 인생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나 칠십분의 일이 아니다. 나야, 뭐 제대로 하는 게 뭐가 하나 있나? 사람은 자기에게 관심을 별로 안 가질지도 모릅니다. 누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렇게 대단한 관심을 갖겠습니까. 노래를 불러도 가수만 못하고, 그림을 그려도 화가만 못하고 설교를 해도 뛰어난 설교자들만 못하고 공부를 해도 수제들만 못 하는데, 외모를 비교해도 배우들만큼은 안 되잖습니까. 배우도 배우 나름이지. 그렇잖습니까? 그런 것에서부터 해방돼야 됩니다. 나는 70분의 70억 분의 일이 아니다. 내가 전부다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거를 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멍에를 지는 것입니다.
근데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뭔가 우리에게 쐐기를 박으시는 것처럼 미리 딱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왜 이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당신의 멍에를 지게끔 해보니까 그게 무겁다 그러는 사람이 아주 많은 걸 암시하는 것입니다. 근데 예수 따라가는 길 주님의 마음을 본받으며 살아가는 길이 그게 어렵고 힘든 길이입니다. 근데 그거를 자랑할 것은 아닙니다. 근데 그거를 많이 자랑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기 안에 그러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는 거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섬기고 사역을 하고 또 나 자신의 병든 자아를 덜어내고, 그 주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그것이 힘들고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한 가지를 생각하면 갑자기 무게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게 뭐냐 하면 무신론의 벼랑에서 죽고 싶었던 때, 예수를 믿지 않으면 안 될 때에 그 인생의 수고와 무게를 생각하면 이거는 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근데 인간이 그거를 새까맣게 까먹습니다. 까먹으니까 이게 너무 힘들게 느껴지는데 사실은 그 힘든 게 자기의 마음이 멍에를 벗어버리고 예전에 수고와 무거운 짐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느끼는 그 무게입니다. 깊어지고 있는 게 아니라 무거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거를 매일매일 버리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간절한 기도, 말씀을 깊이 자신을 그 말씀에 깊이 침잠하는 은혜의 생활 그리고 사색, 묵상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며 자기를 반성하는 것, 이게 무겁다, 이게 너무 힘들다고 느끼는 것은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주는 고통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주는 고통의 무게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그 의무가 우리를 무겁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행하고 있는 일과는 다른 데에 가 있는 그 마음이 나를 무겁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그거는 어차피 처음 예수를 믿을 때부터 마음에서 덜어내지 않으면 아주 쉽게 얘기하면 예수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마음입니다. 내가 해결해 줄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의 구조는 그렇게 안 돼 있는 겁니다. 마음의 주인은 자기입니다. 성결한 마음을 가지거라 뭘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그냥 성결한 마음으로 성결할지어다 그러고 만들어버리시면 (되는데,) 근데 하나님은 인간을, 인간의 마음의 구조를 그런 식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자기의 마음에 자기 스스로 주인이 되게 하셔서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자기 스스로 자기 의지를 가지고 자기의 병든 자아를 덜어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자유가 주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말입니다. 놀라운 게 뭐냐 하면,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느냐에 따라서 무게는 너무 달라지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고 그리고 가정을 사랑하고 이런 엄마들은 자식을 위해서 운동화를 빨고 남편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집안 청소를 하고 이런 일이 짜증이 안 납니다. 마음이 가정에서 떠난 아낙네들은 그런 거 자체가 아주 더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내가 이거나 하고 살아야 되나, 하면서 빨던 운동화를 내던져버리고 세탁기를 발로 차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일이 무거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이 주님께로 가 있으면 성경을 읽는 시간만큼 달콤한 시간이 없습니다. 마음을 쏟아 기도하는 시간만큼 행복한 시간이 없고 거기서 뭔가 자기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시간만큼 행복한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자기가 그렇게 그분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거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면 고통은 있는데 통증이 잘 안 느껴지는 것입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관우 관원장이 전투에 나갔다가 독화살에 맞았습니다. 뼈까지 캐고 들어갔습니다. 이게 이제 화살을 뽑는 정도는 안 되고 칼을 집어 넣어가지고 독을 먹은 그 살을 그 잘라내고 뼈까지 긁어내야 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화타로 기억을 하는데 당대의 유명한 의사였습니다. 제가 고쳐드릴 수 있습니다. 근데 인간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걱정 말게. 하게” 그러니까 이제 물을 설설 끓이고 불을 태워가지고 거기다가 칼을 이제 수술 칼을 대가지고 살을 찢고 들어가서 뼈를 긁어내는 것입니다. 이제 이쪽 어깨였거든요. 이쪽 손으로 장기를 두고 있는데 이 앞에서 장기 두는 사람이 새파랗게 질리는 겁니다. 뭐 하고 있나? 장기를 두게”이 객관적인 이 그림은 고통입니다. 근데 관우 안에 있는 어떤 정신이 이 고통 이코르 통증이 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그 어떤 정신이 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줄이는 일은 매우 매우 어렵습니다. 굉장히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사회적인 문제와 연결돼 있을 경우에는 고통을 줄이는 문제가 어렵습니다. 여성이 차별받고 있잖습니까. 이거를 내가 오늘 피 한 모금 확 뿜어낸다고 해서 이게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여성들에겐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남성들도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요새 맞사모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고 사는 남자들의 모임. 하루라도 안 맞으면은 마음이 편하지 않답니다. 그런 것들은 그 고통 자체를 없애는 거는 너무 힘든 일입니다. 어떤 때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 우리의 인생이 그 속에 들어가면 그냥 고통이 나를 박살내기 전에 내 안에서 느끼는 통증이 내 정신을 부서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몸은 멀쩡한데 정신이 부서져 가지고 망가져 버리잖습니까. 우울증이라든지 뭐 해가지고 스스로 자살도 하고 막 이렇게 되잖습니까. 자기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이 속 알맹이가 다 뭉그러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되기 위해서는 뭐냐면 고통은 때로는 피할 수 없이 온다고 하더라도 통증을 적게 느끼는 훈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 앞에서 말씀과 기도로 경건하게 주님을 의지하며 자기를 성찰하며 살아가는 이게 수고로운 일이긴 하지만 이거는 현재 그리고 미래에 다가올 고통에 대한 아주 훌륭한 준비입니다. 그거를 이기고 사는 것입니다.
2014년 8월에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을 하는데 네 시간을 수술했습니다. 그러면은 얼마나 아픈지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거기다가 펌프를 하나 달아줬습니다. 그래서 날 보고 하는 말이, 되게 아플 거랍니다. 참을 수 있는 만큼 참다가 죽어도 못 참겠으면 여기를 펌프를 한 번 누르라는 것입니다. 진통제가 들어오는 겁니다. 그거 가지고 어림도 없습니다. 대학병원에서만 주는 그 파란색하고 빨간색으로 된 그 진통제가 있습니다. 그거는 보통 병원에서는 못 구합니다. 마약입니다. 마약. 그거를 하루에 이렇게 한 봉지씩 이렇게 주는 것입니다. 근데 그거를 아플 때마다 먹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일주일인가 입원을 했습니다. 근데 주는 약에 40%만 먹었습니다. 60%는 내가 너무 아프면 나중에 먹어야지 그리고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아프다라는 생각에 골몰해서 고통과 똑같은 통증을 내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정신 구조밖에 안 되면은 인생사는 게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고통을 없애준다고 함부로 그렇게 교만하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잘 가르쳐서 통증을 선택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필수인데 통증은 선택입니다. 그래서 통증 그게 다 사라지고 나면 옆에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을 보면서 저렇게 고통스러운데 어떻게 사나 하는데 당사자는 웃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인생사는 게 다 그렇죠 뭐. 견딜만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자기와는 비교도 안 되게 편안하게 살고 있는 사람의 어려운 형편을 돌아보면서 그를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게 이 세상에서 이긴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수께 배우는 것 그분과 함께 멍에를 지는 것 그분의 마음을 익히는 것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