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고란 무엇인가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시 22;24)
녹취자: 허혜숙
22편은 고난 시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그 고통을 돌아보면서 이 시를 썼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실 때에도 이 성경이 응한 것으로 신약에서 보도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롭고 은혜로운 분이신지 설명을 하면서 곤고의 경험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라고 하셨습니다. 곤고나 멸시는 싫어하거나 미워함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고통의 문제이니까 자신이 무슨 싫어함과 미워함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인격체가 아니니까 그렇습니다. 문학적으로 돌려서 말했지만 결국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은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곤고하다’라고 하는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 참 많이 나오는데 언어적으로 이 뜻을 보면 폭넓은 고통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곤고하다’라고 하는 것은 결국 고통인데 성경은 특히 이 시편에서는 이 고통을 크게 둘로 나눕니다. 그것은 영적인 고통, 그리고 육적인 고통으로 나눕니다. 심적인 고통은 그 중간 정도 들어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육적인 고통은 시편 130편에서 ‘내가 깊음 속에 있나이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존 오웬도 그것을 영적인 깊음과 육적인 깊음으로 나누는데 깊음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에 짐승들을 포획하기 위해서 길거리에 웅덩이 같은 것을 만들어 놓으면 짐승들이 지나가다가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설계할 때부터 짐승이 한 번 빠지면 스스로 못 나오게끔 설계가 된 것입니다. 나오면 그 구덩이를 팔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파서 하나의 상징화해서 깊음이라고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곤고는 육체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고 하는 것들을 육적인 곤고라고 말한다면 육적인 곤고를 당하면서도 영혼이 큰 부흥을 누림으로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성경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곤고한 날에 오히려 주님을 찬송하던 사람들, 육신으로는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던 사람들이 마음에는 자유를 얻었던 날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으니까 육신은 곤고하게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의 영혼은 오히려 곤고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인간의 마음이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의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 들어오는 외부세계와 우리의 내면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상상과 추론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기억과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내면세계 사이의 창문과 같은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바깥세상에서 들어오는 모든 정보들을 받아들이면서 희로애락의 정동을 느끼면서 그 사물을 판단하기도 하고 또 마음 자체가 창조적인 행동을 해서 상상하고 그 다음에 연결하고 흩어진 사실들을 종합하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일까지도 마음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은 이쪽 외부세계에서 감각기관을 통해서 두드리기도 하고 혹은 외부세계는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밤중에 누웠는데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정신의 작용들과 정동들이 이 마음을 두드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우리의 마음의 작용들이 너무 감각적인 것들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자기 자신을 반성하기가 매우 어려워지는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 자신을 반성할 때 그 때 나를 대상으로 객관화를 시킵니다. 그리고 내가 또 다른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 마음 안에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게 만드는 어떤 진리의 빛이 내 마음에 비칠 때 내 자아는 분열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찢어집니다. 그래서 파악할 수 있는 나, 나라는 대상이 떠오르고 그것을 또 다른 내가 객관적인 것처럼 나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칸트 같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여기에 대상인 나를 이렇게 보고 있는 나는 이성이나 오성으로 파악되지 않는 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칸트는 무제약자라고 했습니다. 하나의 신의 형상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 이성입니다.
내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곤고한 사람들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정신입니다. 육체적으로 곤고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이것이 마음을 파고들어서 마음에 영향을 끼쳐서 말할 수 없는 심한 고통을 내 마음속에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이 실제로 일어나는 이 무게가 그때 그 때마다 고통의 다른 크기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남편하고 한 번 싸웠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그 정도 말다툼에 웃으면서 나오지는 못했지만 ‘뭐 그런 일도 있겠지’ 하고 나오고 심지어 더 좋은 때는 ‘다 내가 부족해서 그렇겠지, 더 잘 섬겨야지’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면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부부싸움을 했는데 어떤 날은 ‘그냥 끝내 버려?’ 이런 마음까지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곤고의 문제는 객관적인 환경의 문제만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내 자신의 마음의 구조와 상태가 얼마나 나를 버틸 수 있느냐 라고 하는 내적인 힘과 상태 이런 조건과 매우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학적 공식으로 말하자면 외부적 고통 상소 X는 항상 내부적 고통 Y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그 때 그 때마다 다릅니다. 그래서 아주 커다란 시련을 훌륭하게 이겨내던 사람들이 그보다 훨씬 가벼운 시련을 당했을 때 와르르 하고 무너지는 경우가 교역자들뿐만 아니라 장로들 심지어 목사들까지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곤고함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결국 중간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바깥에서 일어나는 육체적인 곤고함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을 키워왔는가 하는 것이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곤고하게 되는 이유는 시인의 경우 의롭고 올바르게 행하며 다윗이 살았는데도 곤고할 때가 있었습니다. 사울의 박해를 받으면서 광야로 도망을 다니고 미친 척 하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서 굶주리고 하면서 살 때 너무 힘들었습니다. 기쁨으로 산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 곤고하던 시절에 자신은 무죄했지만 얼마든지 곤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더 많은 경우 인간의 곤고함은 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시인의 경우를 보면 그렇게 사울의 박해를 받아서 곤고해지지만 항상 그 자신의 곤고한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서 해결하는 습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습성이라기보다 그것은 신앙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 말고 자신의 곤고를 해결할 수 있는 무슨 적절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후에 왕이 된 다음에는 엄청나게 많은 재산도 있고 그 다음에 왕궁에 후궁들도 있고 자기가 눈의 즐거움을 선택하려고 했다면 솔로몬이 말한 것처럼 자기 눈에 좋아하는 것을 금할 사람이 없고 자기가 바라던 것들을 막을 조건들이 없이 그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원도 없습니다. 그런 속에서 그래도 신앙이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놀랍게 환경은 바뀌지 않았는데 그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이 시인에게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곤고를 이기면서 그것 때문에 오히려 자신을 찬양하는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침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뭐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어쨌든 몸에 좋다고 합니다. 나무가 자기 스스로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치유물질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고통이 없이는 쏟아질 수 없는 물질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자신이 자신의 아픈 부분을 치료하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진액을 모아가지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쏟아내는 액이 송진 같은 덩어리인데 그것을 채집해서 모은 것을 침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자신의 몸을 자가 치료하는 것처럼 신앙도 시인도 고통을 받을 때에 신앙이 있으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사실 거기에서 어떤 하나님에 의한 자기 치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데 마음에서 놀라운 기쁨이 솟아나면서 평안하게 살았을 때는 몰랐던 하나님의 성품들이 아주 찬란한 빛으로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크기만큼 사람이 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생의 크기만큼 깊어지지는 않습니다. 고생과 고난은 다릅니다. 고생은 객관적인 고통이고 고난은 그 객관적인 고통을 신앙으로 수용해서 소화해서 인격화 시킨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입니다. 그래서 고난이라는 말 속에는 항상 어떤 목표를 찾아가는 구도자의 심상이 그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조직폭력배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듯이 당하는 것을 우리들이 고난이라고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고난은 고생을 항상 자신의 인생의 목적, 그리고 이 고통의 의미와 연결시키면서 이해하는 작용이 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한 것처럼 자기가 하나였는데 그 고생을 통해서 자기를 객관화 시키고 또 다른 자기가 자기를 보면서 판단하기도 하고 처벌하기도 하고 옹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자기 깨어짐은 바로 이 작용입니다. 하나였던 자아가 어떤 계기를 통해서 둘로 갈라지고 한 자아가 한 자아를 보는 것입니다. 이 자아는 하나님과 시선이 통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고 책망하고 꾸짖으면서 그를 굴복시켜 결국은 참 자기가 아닌 것을 버려서 다시 둘이 화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다시 죄가 쌓이고 진리의 빛이 비치면 다시 이것을 떼어내어 객관적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되는 사람이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제일 못 하는 사람들이 철학자들입니다. 철학자들은 사실 맑고 깊은 정신과 이성을 가지고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번쩍하고 뭔가 옵니다. 그리고 거기에 꽂힙니다. 마치 우리가 이단에 미혹되듯이 펑 하고 꽂힌 다음에 나머지를 모두 무로 만들어버리고 그것을 극대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을 거기에 맞게끔 해석해서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충동입니다. 어떤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강력한 어떤 충동이 그것으로 모든 것을 보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의 글은 심각하게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더구나 성경을 보듯이 믿음의 눈을 가지고 그것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미친 짓입니다. 항상 대등하게 칸트나 나나, 플라톤이나 나나, 찬송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대등하게 그것을 읽으면서 그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참고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작업은 우리의 정신세계를 깊고 넓게 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줍니다. 그것이 신앙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철학 공부를 많이 하고 온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진짜 지혜로운 사람은 옛날부터 인간의 도리를 부모에게 배우며 그렇게 살았던 농부들이 오히려 더 깊습니다. 실컷 배워서 그 사람들 이야기를 받아서 자기가 이해한다는 사실을 가지고 깊은 긍지를 느끼는데 그렇게 이해해야 될 사람은 자기로부터 30대부터 아들 손자 수십 대를 물려가면서 이해해도 여태까지 나온 철학들을 다 소화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렇게 어마어마한 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올바를 지혜가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아무리 많은 철학을 하고 공부를 해도 자기를 반성하게 하는 것은 그 많은 철학들이 자기를 반성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객관화 한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설교 속에서 인간으로서 이 대지 위에 살면서 대지 위에 돋아나는 봄날의 새싹들 이런 것을 감각으로 많이 누리는 축복을 이야기 하면서도 감각적인 문화에 매몰되지 말라고 항상 설교에서 당부하는 이유는 이것이 감각적인 것에 매몰이 되어버리고 나면 거기에 묻히다 시피 되어버리고 나면 자기반성이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떼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에게는 안 일어나는 일입니다. 극히 드문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살면서 우리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내가 죽도록 미웠던 적 얼마나 있습니까? 그리고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나 자신을 쳐다보니까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었던 때가 언제입니까? 그런 심오한 반성이 거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늘 말하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두 개의 자아가 로마서 7장에 나오는데 내가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자아를 보니까 끊임없이 자기가 죄 아래로 사로잡혀 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 둘 다 자기입니다. 그리고 죄 아래 사로잡혀 가는 것도 내가 강요를 받은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의지 한 부분이 선택해서 본인 스스로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켜보는 것은 이 자아와는 다른 것처럼 나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자기도 있고 이러한 자기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그 속에서 끊임없는 갈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느꼈던 곤고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킹 제임스 버전은‘오 미제라블 맨 데라이 앤’ 그렇게 나옵니다. 여기에서 ‘미저러블’은 정신적으로 말할 수 없이 비참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속에서 깊은 비참을 거기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좋은 집이 없고 애인이 없고 금 수저를 못 물고 태어나서 비참한 그런 종류와는 다른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이것이 찢어진 채로는 살아갈 수 없다라고 하는 깊은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이것이 하나가 된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예 이것이 찢어진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그 사람은 사실은 거짓된 자아에 자신의 참된 자아가 삼킨바 되어서 도저히 분리가 되지 않은 상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곤고한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냥 오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은 그런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곤고의 대부분은 우리의 죄와 불순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곤고하다는 것은 엄청난 죄를 짓고 덜컹 하고 주저앉아서 거의 죽을 것처럼 되어버린 그런 상태만을 말하지 말고 옛날에 우리 어른들이 말할 때 ‘어디가세요?’ ‘기도원에 가야겠어.’ ‘왜요?’ ‘마음이 이렇게 컬컬해’ 아직도 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이해는 가는데 정확하게 국어사전적으로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컬컬하다’이것은 뭔가 호흡이나 이런 것들이 원활하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뭔가 막힘이 있다라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것을 심리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가득 차 있지를 못하고 무엇인가 커다란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싫증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고 하지 말고자 하는 마음도 있는데 두 가지가 엉켜서 어느 쪽으로도 의욕이 잘 생기지 않아서 자유를 잃어버린 상태를 우리 조상들은, 우리 선배들은 그런 식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컬컬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 앞에 이야기 할 때 넓은 의미에서 곤고하다는 표현입니다.
안양대학교에 있을 때인데 옆방에 있던 교수님께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하니까 자기는 이번 주간에 고난주간이라 금식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러시냐고 저는 사실 특별 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를 한 적은 있지만 고난주간에 금식기도를 한 적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없습니다. 그러시냐고, 그래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냐고 하니까 마음이 요새 너무 드라이 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곤고’입니다. 이 ‘곤고’를 큰 죄를 짓고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만을 생각하지 말고 마음이 컬컬하고 건조해져서 아무것도 마음에 흐르지 않고 신령한 것들이 감지되지 않은 그런 상태까지 모두 포함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은 하나님은 그런 곤고한 사람을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않으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것이 왜 우리에게 소망이 되느냐 하면 만약에 이것이 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싫어하실 리가 없고 또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곤고함이라면 더더욱 하나님 앞에서 밖에 해결할 데가 없는 것입니다. 왜?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니까, 은혜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뿐이시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곤고한 것은 하나님에게 미움이나 싫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만약에 그 곤고함이 죄 때문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할 이유가 없고 죄 때문이라면 더더욱 하나님 앞에서 밖에는 해결할 길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는 이것입니다. 존 오웬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왜 하나님은 우리들이 죄에 빠졌을 때에 즉시 타력으로 구해주시지 않으실까? 그 중의 대답 중 하나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인줄을 깨닫기 하시기 위해서, 그것으로서 우리를 교훈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곤고하면 곤고한 대로 내버려두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곤고하게 되는 것도 우리 스스로 의지를 갖고 걸어 들어감으로 곤고한 길로 가고 곤고함에서 벗어나는 길도 결국 우리 자신의 믿음과 의지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곤고할 때에 그 곤고를 내버려두면 삶이 모두 엉키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상태로 우리를 잡아 당겨서 바닥에까지 매다 칩니다. 그럴 경우에 우리가 섬기는 것은 영혼이 없는 섬김이 되고 우리가 부르는 찬양은 마음이 없는 찬양이 되고 우리가 읽는 말씀은 읽어도 눈앞에서 글자만 그냥 지나갈 뿐입니다. 우리 마음을 두드리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럴 때에는 사면을 향하여 내 관심을 끊고 웅덩이에 갇힌 사람에게는 사방이 보이지 않습니다. 깊은 웅덩이에 빠진 사람에게는 사방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하늘밖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이 특별한 곤고한 때에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흩어졌던 마음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순간도 내가 지금 곤고하며 나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기도를, 특별한 말씀을, 특별한 찬양을, 특별한 절제를, 특별히 자신의 마음의 초점을 분산시키지 않고 하나로 이렇게 모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실어서 간절히 기도함으로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내 자신이 두 개로 찢어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두 개가 찢어지지 않고 함께 붙어있는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나의 육적인 자아가 영적인 자아를 삼켜서 못 찢어지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너무 순수하게 사랑하기 때문에 이것을 삼켜서 못 찢어지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 속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반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기에서 찢어진 자신을 보면서 도저히 자기 자신을 자기가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간절히 매달릴 때에 예수 죽음의 기운이 이렇게 찢어진 나를 삼켜버리고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죽음의 고통과 나 자신이 죽는 고통이 지평에 통합을 이루면서 하나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가 죽는 곳이 내가 죽는 곳이고 내가 죽은 곳에서 예수가 죽은 고통이 함께 스며들면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곤고한 날에 부르짖는 시인의 회개하는 기도였고 통회하는 기도였습니다. ‘저 놈은 나쁜 놈이고 나는 고통을 당하고 있나이다’ 라고만 생각하다가 나중에 생각을 바꾸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옳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들어서 나를 치시고 나를 반성하게 하시나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깨어지는 것입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들이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경우입니다. 그 때에 신기하게 그 회개 기도가 끝나고 나면 생명의 기운이 우리 속에 파고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를 향한 헛된 사랑을 버리고 피 흘려 죽은 십자가를 바라보게 됩니다. 생명의 기운이 솟아나게 됩니다. 그 생명의 기운이 사랑의 기운입니다. 병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함께 다시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 때 놀라운 에너지가 이 마음속에서 확 솟구쳐 오른 것입니다. 그 때 도저히 내가 할 수 없을 것 같던 것도 내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고 어떠한 고난이 와도 이것쯤은 예수의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비밀은 외부적으로 복 때는 아무 모자랄 것이 없는데 끊임없는 고통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길 필요가 없는 이유는 고통의 눈물을 흘리는 만큼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는 기쁨의 은혜도 거기에서 함께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 4장 10절에서 사도바울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에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는 것, 그래서 결국은 예수와 함께 나의 찢어진 자아가 죽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는 이 사람이 결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그리스도가 왜 죽으셨냐? 바로 나의 이 불순종 때문에 죽으셨구나.’ 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참된 자아가 반성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예수그리스도께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면서 뉘우치는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시인이 우리처럼 충만하게 하지는 못했겠지만 놀라울 정도까지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한 성품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곤고하다고 멸시하거나 우리를 싫어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마치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을 가지고 있는 엄마가 이 아이를 잠깐 내 놨더니 밖에 나가서 온갖 난리를 피우면서 진흙이니 뭐니 잔뜩 묻혀가지고 온 것입니다. 하얀 옷을 입은 엄마가 그 아이를 끌어안아주지는 못하지만 ‘움직이지 마, 너 거기 있어’ 라고 하지만 그 더러운 것이 묻었다는 이유 때문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까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성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곤고할 때 사단이 참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 같은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거룩하신 주님께 나아가려고 하느냐? 참소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용기를 꺾고 가책을 극대화 시키는데 그 가책이 예수를 붙잡게 하는 가책이 아니라 낙심하고 포기하게 만드는 가책입니다.
결국 양심은 고소하고 율법은 정죄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께 가도록 우리를 믿음으로 이끌지 않는 방식으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곤고한 사람은 기도가 안 됩니다. 거기에서 마음을 풀어야 됩니다. 내가 이렇게 곤고하기 때문에 나는 주님이 필요하고 주님은 내가 곤고하다는 이유 때문에 나를 싫어하거나 미워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면서 주님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 잘 섬길 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비참한 눈물을 흘리고 곤고할 때도 하나님이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을 하면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그래서 곤고한 생활을 박차고 나와서 다시 은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