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회심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행 22:6-7)
녹취자 : 이미란
원래 초대교회에서 기독교의 전통은 예수를 믿으면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윤리적인 생활이 먼저가 아니라 예전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던 세계관과 인생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롭게 받아들인 인생관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인생관과 세계관이 망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모든 사람은 철학자라고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다신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광범위하게 다신 주의를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들도 보면 갑론을박하고 시끄럽게 떠들다가 토론이 끝나면 각기 모두 시간이 되었으니까 제사 지내러 갑시다 하고 만신 전으로 제사를 지내러 갔습니다.
여기에 등장한 사람은 사도바울이 사울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로마 사람이긴 했지만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람이고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의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어서 바울의 설교하는 사도행전의 설교 내용을 보면 그리스 희곡에 나오는 내용도 인용이 됩니다. 굉장히 희랍(그리스) 문헌에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아테네에서 철학자들과의 논쟁도 가능했을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적으로는 유대주의였습니다. 유대주의밖에는 모른다고 말할 수 없지만, 유대주의가 그의 가장 큰 세계관이었습니다. 유대주의의 입장에서는 나사렛에서 나온 그 젊은이가 감히 하나님과 자기가 동등하다고 말하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까지 말하는 이것은 참을 수 없는 모독이었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유대교적 세계관과 예수의 발언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군다나 그는 그 종교에 헌신하기 위한 지도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고, 마침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가 부활했다고 떠드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에 공문을 청해서 권위를 가지고 핍박하러 가는 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밌는 부분은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해하고 비교도 안 되는 눈부신 밝은 빛이 나타나면서 자기를 둘러서 비친 것입니다. 이 경험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이 이야기를 세 번 간증하는데, 찬란한 빛이 자기를 둘러서 에워싸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바울이 가진 당시의 구약에 익숙한 신앙관을 가지고 설명하자면 이것은 뭔가 굉장히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때만 구약에서 이런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찬란한 빛이 내려오는 그 사건이 일어난 것 자체가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대교적 구약에 사로잡혀 있는 이 사람의 세계관에 딱 부합하는 방식으로 뭔가 하나님이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을 보여주실 때와 똑같이 찬란한 빛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이 빛을 보는지 못 보는지 그런 걸 상관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찬란한 빛이나 불꽃이 내려온 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데 어떻게 이 땅에 내려오셔서 소위 쉐키나를, 그것도 구약에서 진짜 특별한 때나 있었던 그것을 여기에 이렇게 자기에게 둘러 비추시나 하는 것이 엄청난 충격이었고 이것은 어마어마한 메시지가 주어지는 것이라 했는데 그 빛 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사울아, 네가 왜 날 박해하느냐?’ 하는 예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알고 있었지만, 사도바울이 다시 한번 여쭤보는 것입니다. ‘주여’ 이미 ‘주여’라고 불렀단 자체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꼭 주라는 말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데에만 쓰여진 것만 아니라 높은 사람도 가리켰지만 자기가 그렇게 지체 높은 사람이 나타나서 이런 기적을 베푼다고 생각을 안 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틀림없이 아도나이를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여, 뉘시니이까?’ 예수님이 명백하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나사렛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서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바울이 여태까지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사상누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알고 있는 어떤 사실들은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합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포로기 이후로 생기는 유대교의 가르침은 구약 여호와의 신앙에서 신학적으로 이탈합니다. 그렇게 된 것을 자신은 정통적인 신앙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것이 우르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사도바울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정말 자존심 상하는 질문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이것은 지금 당장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라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뭐냐면 (그것은) 이제는 한 걸음 더 앞으로 갈 수도 없고 주저앉을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살아온 모든 길에 비추어서 갈 길을 생각했었는데 살아온 길이 잘못된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에 대한 관점과 세계에 대한 관점, 자신에 대한 관점, 자기가 믿었던 종교적 신념에 대한 관점, 모든 것들이 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아 상실입니다. 자기 정체성의 상실입니다. 내가 누군지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를 나라고 규정하던 하나님과의 관계, 이스라엘과의 관계, 역사와의 관계 등등 이렇게 메꿔있던 것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들이 우르르 끈 떨어지듯이 떨어지면서 자기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질문도 평생 자기가 이 사람은 이걸 안다고 믿었고, 그래서 이것을 가르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사람들에게 이것을 전파하고 살아야 하는데 이 가르침과는 현저히 다르게 자신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할 이단의 종자 같은 것들이 생겨났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메섹을 향해 달려가던 중이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냐면 요새 제가 초대교회와 중세 교회사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뚜렷한 차이가 뭐냐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미가 불명확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전에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보고 인생을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만나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회개하고 눈물이 나고 하는 그거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이 년 전에 알렉스더 맥그래스 박사가 ‘지성적 회심’이라는 책을 썼는데, 자기가 어떻게 마르크스 주의를 신봉하고 과학 결정주의에 갇혀 있었던 사람이 어떻게 서서히 거기에서 벗어나면서 기독교적인 지성을 갖게 되었는가를 지성적 회심의 과정을 자전적으로 그린 이야기입니다. 거기에서도 노킨스를 측은하게 내려다보는 심정이 묘사됩니다. 내가 옛날에 그 틀에 갇혀서 그게 전부인 줄 알고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하고 그다음에 닫힌 세계관을 가지고 우주의 자연적인 법칙 안에 그 이상의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갇혔던 바로 그 함정에서 나는 벗어났는데 그는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을 가엽어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회심을 한다는 것은 신학적인 회심인데 그 신학적인 회심은 반드시 철학적인 회심을 동반합니다. 철학이라는 이야기는 철학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사상을 공부하는 게 철학이 아닙니다.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독특한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그 철학을 몰랐던 때와는 다른 관점에서 세계와 인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보니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아는 가치의 질서들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엉성하기 짝이 없는 것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아주 탄탄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의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 이것도 철학입니다. ‘아 인생 뭐 있어, 오늘 그냥 동태전에 막걸리나 하나 먹고 그저 웃으면서 내일은 더 좋아지겠지 하고 집으로 들어가는데 인생이지’ 이것도 철학입니다. 그런데 좀 허접합니다. 왜냐하면 그걸 가지고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많은 난관에 가까운 삶의 사태들을 설명할 수 없고 세계를 더더욱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여기서 자기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들, 세계관과 인생관이 와르르 무너진 것입니다. 그리고 무너진 그 속에서 남아 있는 그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재배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 이 사람이 유대인이었던 것도 너무 소중하게 쓰임을 받고 그다음에 정치적으로 로마니즘에 배경을 갖고 있던 것도 훌륭하게 쓰임을 받고 정신적으로 학문적으로 헬레니즘의 심취해 있었던 그것도 훌륭한 쓰임을 받아서 기독교 최초의 최고의 변증가가 되고 모든 역사가가 공통으로 사도바울이 아니었다면 기독교는 존립 자체가 가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존립했다면 예수가 가르치려고 했던 종교와는 훨씬 다른 그런 종류의 종교들이 난무했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여러분들의 회심이 과연 신학적인 회심이었는가 하는 것을 물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회개하다’라는 단어가 두 개가 나오는데, 하나는 ‘메타노에오’라는 단어이고, 두 번째는 ‘메타멜로마이’라는 단어입니다. ‘메타멜로마이’라는 단어는 그냥 슬퍼하는 것입니다. 서럽고 슬프고 후회되고 해서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롯 유다에게 쓰인 말입니다. ‘예수 판 것을 후회하니라’ 할 때 말입니다. 그런데 ‘메타노에오’에서 ‘메트’는 ‘after’ 혹은 ‘beyond’ 혹은 ‘second’라는 뜻이고 ‘노에오’는 ‘생각하다’라는 뜻입니다. 원래 ‘메타노에오’라는 단어가 코인의 헬라어에 들어와서 자리 잡기 전에 그리스 아티카 문헌에서는 ‘메타노에오’라는 단어가 이미 일반화되어 있었습니다. 이 단어는 회개하고 눈물 흘리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어떤 지혜의 빛에 의해서 번쩍하는 깨달음을 통해서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던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서 터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메타노에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권에 들어오면서 그 단어에다가 의미를 첨가해서 그리스도 예수, 혹은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후회하는 감정적인 경험이 함께 묻게 되어 있는데, 근데 원래는 정신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전에 많은 사람이 미국에 대해서 호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특히 중동 사람들에 대해서 (그러다가) 911이 일어나고 알카에다 사건이 일어나면서 입국 심사 검문이 굉장히 까다로워지고 직원들은 직원들대로 인원은 한정되어 있지, 방문하려는 사람은 너무 많아서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으면서 권위주의와 짜증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입국 심사대를 지나는 동안에 친미주의자가 반미주의자가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어떤 사건을 통해 자기가 큰 피해를 볼 때 사물을 보는 관점 자체를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로 일어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목양하면, 회개도 있고 눈물도 있고 이야기하면 잘 알아듣고 은혜를 받는데 인생에 대한 관점이 거의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돼지가 씻은 데에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고 들어가는 것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게 은혜가 적어서 그렇게 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신학적인 회심이 뒤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교부들의 입장에서 신학적인 회심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확고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한 인물을 소개하려 합니다. 이탈리아 누시아라고 하는 곳에서 480년경에 태어나서 70세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독교 역사를 움직이는 한 위대한 인물이 한 사람이 태어납니다. 베네딕투스라는 인물입니다. 5세기, 솔로몬 제국은 바로 망했고, 로마 제국이 울타리를 치고 있었던 나라들은 우후죽순처럼 무너지기 시작하고 통제가 안 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이 격변하면서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 화려하게 꽃피우던 서로마제국의 문명을 무식한 게르만족이 와서 다 때려 부수고 그들이 지도자로 등극하는데 머리에 생각이 거의 없고 무력만을 가지고 지도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많은 지성인이 현실 비관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게르만족에게 아부해서 벼슬을 얻고 우리 친일파들 하듯이 그런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격변하는 인생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 베네딕투스 집안은 굉장히 부유하고 명망 있는 집안이었습니다. 신심이 두텁고, 공부에 대한 야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문명이 최고의 문명을 구가하던 로마에 가서 공부해서 뭔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로마로 가게 됩니다. 로마로 갈 때, 이 사람이 신학을 공부하려고 간 것 같지는 않고 어쨌든 지혜에 대한 욕구는 있었고, 경건한 신앙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 가서 어쨌든 세계적인 도시에 가서 정말 많은 것을 섭취하고 배워서 무엇인가 이 불행한 시대에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잘 차려입고 로마로 들어갑니다. 로마에 가서 로마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너무 처참한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이미 벌써 공황 상태가 되었고, 나라가 망했으니까, 엉망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현실에 대한 희망이 없는 허무주의 같은 것들이 묻어나면서 도시 생활이 아주 방탕해진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경건에 어떤 훈련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라는 사실을 보면서 깊은 회개를 느끼고 떠납니다.
떠나서 하나님을 우러러보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복받치는데 이 도시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광야로 나가서 은둔 생활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론가 가야 할 텐데, 그때는 이미 벌써 4세기경서부터 수도회들이 생겨납니다. 수도회는 모나스트리움이라고 하는데, 테두리를 쳐서 뭔가를 가두어놨다는 뜻입니다. 파울로라는 사람으로부터 파코미우스라든지 어거스틴을 회심하는데 큰 기여했던 성 안토니우스라든지, 그런 사람들의 수도 생활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가게 됩니다. 가서 수비학고라고 하는 은둔자들이 모여서 조용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그런 수도원이라기보다는 공동생활을 하는 곳으로 가서 자기를 받아달라고 하는데, 거기에 있던 지도자 로마노스라는 사람이 베네딕투스를 받아줍니다. 그러나 베네딕투스는 그 생활에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깊은 곳으로 주님을 만나러 가고 싶은데 마음 깊은 곳으로 가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몸이라도 들어가 보자 해서 수비학고라는 곳에 바위가 있고 바위 사이에 좁은 길이 나 있었습니다. 거기는 한번 줄을 타고 내려가면 누가 끌어 올리지 않으면 올라올 수 없는 곳으로 혼자 독립해서 내려가게 됩니다. 거기서 은둔 생활을 하면서 위에서 내려다 주는 최소한의 빵과 물을 먹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일어납니다. 모든 것을 끊고 자기의 부와 명예와 미래의 꿈 같은 것들을 다 포기하고 수비학고 동굴에서 주야로 주님을 묵상하면서 살아가는데, 뜬금없이 옛날에 젊은 시절에 한 번 스치고 지나갔던 어떤 자매의 얼굴이 묵상 시간마다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게 심정적으로 외로우니까 더 잘 떠오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러 갔는데 이 자매 얼굴만 계속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네딕투스는 너무 괴로워하면서 어느 날 동굴에서 나와서 ‘주여 내가 어찌하리이까’ 이런 유혹과 이런 것들이 막 닥치는 것입니다. 그때 옷을 다 벗습니다. 마침 가장자리에 아무도 내려가는 사람이 없으니 거친 가시넝쿨이 빽빽하게 자라난 것입니다. 거기에서 뒹구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정욕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살려달라고 뒹구는 것입니다. 온몸이 다 피투성이가 됩니다.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정욕과 씨름을 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거기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이제는 어느 정도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되는데 이미 벌써 그 사람의 높은 신앙심과 더욱이 기적을 행한 놀라는 능력 같은 것들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그 사람의 가르침을 받기를 원할 때 수도회에서 일치단결에서 그분을 원장님으로 모셔가게 됩니다. 와서 제발 우리를 지도해달라고 하여 가서 그 사람들하고 같이 생활하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 선생님이 엄격했습니다. 선생님은 정욕을 이기기 위해서 온몸을 다 벌거벗고 가시나무 넝쿨 속에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피투성이가 되기까지 자신과 더불어서 싸웠는데 이 수도사들은 단지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매한 인격과 높은 학식 같은 것들을 취하고자 했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이 ‘메테노에오’라는 그런 의식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제자들과 사제들로부터 두 번의 살해 위협을 당하고 포도주에 독을 타고 빵에다 독을 타고 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떠나게 됩니다.
떠나서 몬테카지노라는 곳으로 갔는데 원래는 이교도의 사원이었던 곳이었습니다. 거기를 깨끗이 정리하고 몬테카지노에서 베네딕투스 수도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교황이 성인들 40여 명에 대한 전기를 씁니다. 4권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에 제2권이 전부 다 베네딕투스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베네딕투스가 12명씩으로 무리를 지어서 전혀 커다란 공동체가 아닌 12명씩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만들면서 외친 구호가 있습니다. 두 개인데, ‘어라이텔라보’, ‘기도하라, 그리고 노동하라’ 그러면서 기도와 노동 이 두 가지를 철저히 순종하면서 몇 가지 규칙들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청결, 정결, 순결, 순명 그리고 침묵과 겸손이 더해지게 됩니다. 그것이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철학사의 지성의 불꽃이 다 사라져가던 캄캄한 어둠의 시대가 오는데 하나님이 이 한 사람의 수도회를 통해서 그 로마 시대에 있었던 그 화려한 로마 시대에 지성의 흔적들을 간직해서 그래서 그것들을 교회를 부유하게 하고 지적인 유산들이 게르만족에 의해서 사라지지 않고 그것이 간직되었다가 화려하게 부활해서 오늘날의 서구사회를 이류는 원동력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속편을 이야기하기로 하고 마무리하자면, 결국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전에 가지고 있지 않던 독특한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태어난 시대에 산다고 하는 것은 회심했든지 안 했든지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새로 받은 세계관과 인생관이 너무 독특하여서 내가 이 현실 사회에서 이탈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빛이 되려면 세상 속에 있어야지 세상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그러면 비록 이 시대에 살면서 이 시대의 문화를 누리고 교통하고 또 어떤 면에서 그 문화를 즐기고 누리고 그 문화에 영향을 끼치고 받으면서 살아도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신학적인 회심을 했을 때 세계관과 인생관에 대한 기본적인 스텐스는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사도바울이 염려했던 너희는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했던 그 본이 되는 것입니다. 틀 속에 붕어빵처럼 구워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회심할 때 가졌던 세계관과 인생관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시대는 계속 다르게 변하더라도 그것을 그 시대와 바뀐 사조 속에서 조화롭게 살면서 자신의 신학적 회심을 통해 얻게 된 세계관이 근본이 흔들리지 않는 그래서 사람들과 같은 문화를 누리면서도 결국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인생관이 월등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 가치관 속으로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베네딕투스 같은 실존적인 몸부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 이 세상 속에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라는 몸부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추종했던 수도 주의를 100퍼센트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깎아내리지 말아야 할 것은 뭐냐면 그들은 그렇게 수도 생활하고 도시로부터 이탈하는 것 자체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으로 철학적인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한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달리 세상 속에 섞여서 함께 살아가면서 그것을 지탱해야 하니까 사실 수도원에서 살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해야 하고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자신의 마음을 세속에서 씻어내면서 자기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