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7일 새벽예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녹취자 : 김세나
앞에서 사도는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신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그렇게 말합니다. 11장에 나오는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그렇게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온전히 분투하는 삶을 살았고 이 거기에는 자기 절제와 희생, 그리고 인내, 이러한 것들이 필요했었습니다. 그렇게 그런 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에 그게 사실은 육신의 성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항상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신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여기에서 믿음의 주 온전케 하시는 이, 이것은 전부다 믿음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야말로 믿음의 originator, 믿음의 원저자이시고 또 온전케 하신다고 했는데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의 원저자이시고 동시에 그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이거에요. 그래서 누구든지 믿음이 있지만, 그 믿음이 온전하지 않을 때에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온전해 질 수 있다는 그러한 이야기인 것이죠. 치열하게 달려갈 길을 가야하는데 그것이 굉장히 많은 고통을 요구하죠. 그 때 예수를 바라보면 그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보면서 그 믿음의 길을 달려가기 위해서 감당해야 하는 많은 고통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점점 더 온전해 지게 되는 것이죠.
세상의 유혹이나 이러한 것들이 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죠. 그 때에도 예수를 바라봄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들이 얽매이기 쉬운 모든 죄와 유혹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방식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원저자이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믿음을 더 완전하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2절 하반절에서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직접적으로 예를 들면서 그 분이 어떻게 이 그 믿음으로 생애를 사셨는가 하는 것을 말하는 거죠. 예수님의 그 믿음으로 사신 생애의 완성은 예수님께서 사신 믿음으로 사신 지상세계의 완성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편이라고 하는 말은 성경에서 보면 택한 자의, 택한 자의 상징입니다. 우편, 오른 편 그래서 그 사람들도 오른편 이것이 힘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우리도 보면 왼손보다는 일반적으로 오른손이 힘이 세죠. 그래서 이사야에서도 나의 의로운 오른손이 너를 붙들리라. 오른손으로 저를 지키시며. 그것이 뿐만 아니죠. 이 축복할 때에도, 자녀들을 축복할 때에도 이 오른손으로 축복을 받는 이 자녀가 진짜 그 장자로서 하나님 그 하나님의 축복을 아버지로부터 받는 상징이었단 말이죠. 그 오른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자, 하나님의 힘, 이런 의미가 있고 그 다음에 앉으셨으니, 라고 하는 이것은 이제 사역이 끝났다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쉼의 의미와 함께 권세에 오른 좌정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셨느니라, 라고 하는 의미는 이제 한편으로 보면 예수님이 지상 세계를 믿음으로 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더더욱 그를 지극히 높이셔서 그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의 영광을 경험하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셔서 그가 택하시고 그가 권위를 주시고, 그가 힘을 위탁하셨다라고 하는 이야기이고 동시에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끝나고 이제는 쉬게 되셨으며 이게 이 세상을 위하여 역사하고 다스리시는 방법이 지상 생애에 계실 때 하셨던 방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이죠. 지상생애는 어떻게 예수님이 다스리셨어요? 다스리셨다라기 보다는 섬기셨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병든 자를 고치고 무지한 자를 깨우치시고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이렇게 노예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들보다 낮아진 자리에서 우리들을 섬기신 것이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그렇게 무릎을 꿇고 섬기신 생애가 예수님의 생애였다라고 할 것 같으면 이 모든 사역을 마치신 후에 지금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종처럼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왕처럼 다스리시죠. 하늘나라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옆에 있는 그저 수종드는 사람정도의 자리가 아니라 사실 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성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우주를 통치하고 다스리실 수 있는 권한을 위탁하셨으니 사실은 하늘에서 예수 그리스도 홀로 이 모든 우주의 세계를 다스리신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왕처럼 좌정하셔서 하늘나라를 지배하시고 그 아래 있는 온 땅의 나라를 주관하시며 온 우주를 붙들고 계시며 다스리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이죠.
사실 이렇게 이루어진 구속이 완성된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시는 장엄한 우주적 왕권으로 통치하시는 이 모습은 이 땅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갈릴리로 데가볼리로 복음을 전하시다가 박해를 받는 생애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이러한 영광스러운 우주적 왕권을 가지고 그 우주적인 통치권으로 온 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셨습니까. 그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서 다스리시는 이 우주적 왕권의 통치가 바로 지상생애에서 믿음으로 사셨던 예수님의 그 헌신적인 삶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상급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여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이 이러한 놀라운 상급을 받는 삶을 사셨을까. 어떻게 예수님이 그러한 놀라운 상급을 받는 삶을 사셨을까. 그렇죠. 그것에 대해서 성경이 오늘 몇 가지로 이야기 하는데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무엇이냐 하면 즐거움, 잠시 있을 즐거움이 아니라 영원한 즐거움을 바라보신 생애였다. 믿음의, 예수님의 지상생애를 사셨던 믿음의 특징이 잠시 있을 즐거움이 아니라 영원한 즐거움을 바라보는 생애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 생애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오래 참으신 생애였다고 하는 것이죠. 이 짧은 아침 시간에 다 말씀을 드릴 수 없어서 앞의 한 가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그 이 잠시 있을 즐거움이아니라 영원한 즐거움을 바라보신 생애였다. 당신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그랬거든요.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햐여. 앞에 있는 즐거움이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이미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서시려고 하는 그 순간에 마귀는 앞에 있는 즐거움을 제시했습니다. 천하 만국을 보여주면서 네가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만국을 너에게 주겠노라. 예수님에게 제한을 했습니다. 그것도 바로 예수님 앞에 있는 즐거움이 아니었습니까. 그 온 세상. 그 온 세상을 예수님 앞에 보여주면서 이 세상이 네 것이 되고 그리고 온 세상이 너를 경배하리라. 사실 예수님에게 얼마나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공생애 들어서기 전 30년 동안의 예수님의 생애는 너무 부당한 생애였습니다. 왜요. 왜 부당한 생애였죠?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모르는 세상에 의해서 예수님이 너무 부당한 대접을 받으신 생애였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죠. 이 온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상속자 이시죠. 이 땅에 있는 모든 만물과 온 세상의 왕들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그 분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그 분께 경배함이 마땅했죠. 그런 때에 마귀가 이 온 세상을 너에게 주겠다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예수님에게 예수님 자신이 누리실만한 합당한 즐거움이었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것을 거절하셨죠. 그 이유는 그 같은 재안을 마귀가 했기 때문에 거절하신 것이기도 했지만, 마귀가 아니라 다른 착한 사람이 제의하고, 그리고 혹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왕들이 면류관을 벗어서 이 땅에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십시오. 예수님이 왕 중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당신의 졸병에 불과합니다라고 하셔도 예수님이 그 면류관을 이 세상에서 쓰셨을까, 안 쓰셨을까. 쓰셨을 리가 없죠.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죠? 당신이 누리실 더 큰 즐거움과 영광이 고난 뒤에 있었기 때문이죠.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순례자의 삶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자랑과 즐거움에 너무 집착하면 그 하늘나라의 진정한 영광과 그 즐거움을 바라보며 살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무조건 형통한 길로만 인도하시지 않으셔요. 우리는 물론 그것을 원하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무조건 형통한 길로만 인도하시지 않으시죠. 왜, 그렇게 하면 그렇게 하면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그리고 이 세상이 마치 그 우리의 궁극적인 고향인 것처럼 생각을 하는 거죠.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착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죠. 은혜를 많이 받으면 하나님이 형통하게 해 주시죠. 돈도 벌고 자녀들도 잘 되고 사업도 잘 되고 이렇게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죠.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우리는 원래 하늘나라에서,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굴러먹던 세상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이 택해 주셔서 하늘백성 삼으셨어요.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셔도 항상 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이 세상의 본향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어요. 아무리 성화된 신자라고 할지라도 그에게는 하늘나라는 하늘나라보다는 훨씬 이 세상의 나라가 덜 낯설어요. 하늘나라는 가보지 못한 나라이고, 땅의 나라는 원래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요. 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적당하게 이 세상에서 배신당하게 만들어 주시는 거죠. 그리고 핍박도 당하게 만드시고, 고난도 당하게 만드시고, 뭔가 뜻대로 안 되게 만드시는 거예요. 그래서 뭘 깨닫죠.
(찬양)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배는 저 하늘에 있네
천국 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그 때 비로소 아주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거예요.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나. 그런데 사실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적절히 버림을 받게 만드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뭔가 하는 일이 잘 안 되고 어려움이 생기고 그럴 때에 너무 자기를 학대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이런 것들은 모두 잘못된 반응이에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오히려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오히려 정 반대로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내 뜻대로 안 되거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할 때, 그 때 깨닫는 거에요. 내가 그 동안에 주님이 은혜를 많이 주시니까 이 세상을 너무 사랑했구나. 하늘나라에 있는, 앞에 있는 그 즐거움을 잊어버릴 정도로 그런 즐거움이 그리워지지 않을 정도로 내가 이 세상을 너무 사랑했구나. 아 이것은 정말 내가 잘못했구나. 또 이 땅에서의 택한 백성으로서의 더러운 기질들이 발동하기 시작하는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다시 한 번 나를 이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씻기시는 구나.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다시 다듬어 지는 거예요.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만 코 박고 살아가는지 몰라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때로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 오고 그리고 괴로운 일이 닥치고 그 견디기 힘든 고난이 닥칠 때에 그 때마다 우리는 죄 많은 이 세상이 우리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그리고 사도들이 말했던 것처럼 세상에서 우리가 환란을 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해요. 왜, 여기가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 아니니까. 여기에서 맛보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큰 사랑, 하나님의 자비, 이런 것들은 앞에 있는 영원한 즐거움의 맛보기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예화) 시골에서, 시골이 아니죠. 옛날에 어렸을 때 엿장수들이 와가지고 동네 애들을 다 부르죠. 왜냐하면 동네 애들이 고물들을 다 가지고 나오니까, 그리고는 아직 인색하게 그 엿을 조금씩 잘라서 입에다가 조금씩 넣어주죠. 그것을 아이들이 한입씩 먹고는 환장을 하는 거예요. 그 집에 달려가서 아직 우리 할머니가 신고 다니는 고무신, 집에서 쓰는 찌그러진 오강, 아직까지도 개밥 끓여주는 남비, 다 나중에 가서는 산수갑산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동생 전과까지 아직 쓰는 것, 말이지. 그것을 전부다 다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와서 말이지, 그리고 맛보기 말고 진짜 엿을 잘라서 가지고 와서 먹고 그리고 저녁때는 되지게 두들겨 맞죠.
바로 그런 거예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모든 이 세상에서의 은혜, 이게 하늘나라의 맛보기에 불과한 거예요. 그 은혜를 주시는 것은 이 세상에서 형통하게 하시는 것은 세상에 코 박고 정붙이면서 살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 험한 세상에서 주님을 의지하고 살 때 하나님이 이렇게 천국을 맛보기로 보여주셨는데, 이렇게 맛있고 너무 아름다우니 이러한 세상으로 뛰어 들어가서 뭐 든지 다 가지고 와요. 그런데 고물들 말이에요. 그래서 마치 그냥 그 맛보기 하나 먹고 나니까 집에 오니 모든 것이 고물로 보이는 거예요. 집에 있는 솥단지부터 시작을 해서 말이지. 엄마 아빠 신고 다니는 고무신까지 전부다 고물로 보이는 것같이 하늘나라의 맛보기를 맛보고 나서 우리의 삶 전체를 보면서 모두 주님께 드리고 그리고 영원히 맛볼 즐거움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쓰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여겨지는 그러한 생각들이 떠올라야 되는 거예요. 그것들을 보면서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면서 그런 것들을 하나님 앞에 많은 즐거움을 맛보면서 그것이 사실 더 큰 영원한 앞에 있는 즐즐거움을 위해서 우리들에게 주신 것이구나. 그것을 깨닫는 거죠. 예수님이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의 삶을 사셨던 이유도 바로 그 앞에 있는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즐거움, 십자가 뒤에 찾아올 그 영원한 즐거움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아셨던 것이죠.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무것도 없는 생애를 사셨고 그리고 특별한 즐거움을 모르고 일생을 사셨고 그리고 엎드려 기도하시고 자기를 희생하고 복종시키신 그런 생애를 사실 수 있으셨던 것이에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의 맛보기를 주실 때에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맛보는 이 하늘나라의 즐거움이 이렇게 크고 아름다우니 앞에 있는 이 즐거움은 얼마나 클까. 그러면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당해야 하는 고통과 시련, 괴로움과 좌절, 치열한 영적인 전투, 이런 것들을 조금도 힘겹다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