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7일 새벽예배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 6 : 8)
녹취자 : 김용재
아주 그 절묘한 비유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 농경사회니까 이제 농사를 짓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농사꾼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과 비유하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 일에 매우 익숙하고 그 문화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이제 그렇게 말할 때에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냐면 땅에다가 채소를 심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그리고 물을 주고 이렇게 하면서 애써서 농부가 가꾸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채소를 잘 가꿔서 자기 식생활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심었는데 거기에 이제 가시도 나고 풀도 나고 그럽니다. 그러면 가시가 좀 나고 풀이 좀 나고 잡초가 돋아난다고 해서 그것을 갈아 엎어버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가서 쭈그리고 앉아서 열심히 김을 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상하다 내가 왜 채소를 심었는데 채소도 아닌 이상한 풀이 올라오나 난 이런 씨도 심지도 않았는데 가시가 올라오나 농부는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안합니다. 왜냐면 늘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쭈그리고 앉아서 밭이랑을 하나씩 하나씩 다 지나가면서 풀들을 다 뽑아내지 않습니까. 그것을 김을 맨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김을 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김을 매면서 하는데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는데 그런데 반대로 말입니다. 심었는데 그냥 이렇게 채소 사이에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난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많이 가시와 엉겅퀴가 번성해서 그래서 그것이 다수가 되어 버리고 그렇게 해서 가시와 엉겅퀴가 천지가 되어버린다면 그렇다면 밭을 포기하고 버리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은 농부가 원하지 않는 게 자라지 않는 것 보다는 땅위에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게 농부에게는 좋습니다. 왜냐면은 모든 식물이라는 것이 지력을 빨아먹고 자라기 때문에 거기에서 식물들이 자라게 되면 결국엔 땅의 영양분을 빨아먹고 자라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 다음에 농사를 지을 때 땅을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을 하나하나 솎아내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다 태워버리려고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의 삶에 있어서 온전하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많이 분투하지만 그러나 늘 허물이 남아있습니다. 부족한 것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을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성령의 빛으로 깊이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하시고 그래서 마음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뽑아버리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게 하시고 이렇게 하면서 계속 우리를 고쳐나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얘기하는 배교라고 하는 것은 주된 경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이러는 것인데 거기에 간간히 잡초가 섞이는 것처럼 죄와 불순종 허물 이런 것들이 개입되는 것이 아니라 방향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강퍅해지고 절대적으로 완고해져서 그래서 거기에 강한 성향이 생겨나는데 그 성향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성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많은 죄들이 생겨나면서 악한 열매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포기하시고 그리고 그들을 심판에 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사른다는 것은 심판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혼돈을 느낄 필요가 없고 결국 신약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보면 구원받은 신자라고 할지라도 항상 마음속에서 자신이 이런 배교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경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아름다운 신앙의 본을 보면서 본받으려고 하고 한편으로는 악한 본을 보면서 절대로 본받으려고 하지 않고 하는 이런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오히려 참된 구원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참된 구원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이 이렇게 배교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실패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자만하지 않고 매일 매일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면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성도의 신앙생활은 잠깐 동안 우리들이 훌륭하게 살았다고 해서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잠깐 잘 살았다고 해서 우리가 이제는 완전히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정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범죄에 빠지게 되지 않습니까. 노아와 같은 사람은 당세에 완전한 자요 의로운 자라고 했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많은 계시를 누리고 그 사람밖에는 하나님께서 살려두시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 그 사람의 의를 보시고 오히려 그 가족들까지 건져주셔서 인류의 새로운 조상으로 삼으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홍수가 끝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이 경건을 다 잃어버리고 술에 취한 채 방탕한 모습이 되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그뿐만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 사라의 일로 인해서 아비멜렉에게 아내가 잡혔을 때 하나님 앞에 온전한 믿음을 인정을 받았는데 결국엔 믿음이 없어서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이고 그 어려움을 당하지 않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다윗 같은 경우는 좋은 예입니다.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받고 계시를 누렸는데 미끄러지지 않습니까. 사울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내가자고 하지 못하게 하리라 하여 사단의 가시를 두셨느니라. 보니까 다메섹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속에는 교만해 지려는 성질이 계속 있었고 그것을 사도도 느꼈단 말입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을 하고 최고의 칭찬을 받은 후에 사단아 물러가라 그러면서 예수님이 혼내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많은 은혜를 받은 이후에 이렇게 되는 사람들이 있단 말입니다.
왜 그러냐면 그릇된 안전감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가 이런 놀라운 은혜를 받았으니까 나는 안전할 것이다. 또 이런 상태가 영원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에 교만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닫고 나서 사도바울의 고백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난 버림을 받을까봐 두려워한다.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확실하게 믿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신앙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껏 내가 잘 살았다고 해서 마지막까지 잘 산다는 보장은 없다. 히스기아나 아사 같은 사람들도 그렇게 영명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지만 나중에 그렇게 육적인 사람들로서 인생을 마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항상 그런 확신과 경계를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오늘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내가 확신이 있기 때문에 내가 나를 온전히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내가 방해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고 애를 쓰면서 많이 분투하고 그리고 애쓰는 그런 삶을 매일 매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