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편 강해
(2017년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설교기간|2017년 10월 30일 - 11월 2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7년 12월 13일
목 차
1. 주의 얼굴을 숨기실 때(시 13:1) 2017.10.30.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3
2. 원수가 나를 칠 때(시 13:2) 2017.10.31.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7
3. 고난중의 염려(시 13:3-4) 2017.11.01.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0
4.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함(시 13:3-4) 2017.11.02.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4
시편13편강해 (2017. 10. 30. 가을말씀사경회새벽 1)
경륜이 있는 복음 (2017.07.30._청년부여름수련회 저녁1)
1. 주의 얼굴을 숨길 때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녹취자 : 김세나
시편 13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언제 이 시를 지었는지 정확하게 추측할 수 없지만, 내용 전체가 하나님 앞에 올리는 극한 탄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비탄의 탄원시’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 짧은 시편에서 반전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하나님만이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면서 스스로 믿음을 추스르고 그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는 장면으로 이 시를 마칩니다.
우리가 읽은 1절은 시인의 탄식을 먼저 적고 있습니다. 시인은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토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아주 오래 계속되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이 말속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매우 힘겹고 어려운 상황이라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많은 시간을 참았지만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계속 고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무도 다윗이 왕이 되기 전 사울의 박해로 말미암는 고통이든지 그 인생의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한 대적의 상태가 계속 되는 것이든지, 둘 중 하나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한 많은 고통의 시간이 오래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 동안에 시인이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께 이런 종류의 시를 써 올리며 자기를 탄원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오랫동안 고통이 계속 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버려져 있는 것 같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를 영원히 잊으셨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당돌하게 질문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는 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구원을 당장 갈망하고 있는 사람이 느끼는 상대적인 반기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이 소외된 것 같은 마음이 들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관심을 끌지 못하는 그러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를 영원히 잊으셨습니까, 한 마디로 “주님이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탄식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믿음이 없기 때문에 토해놓는 탄식이라기보다는 자기가 처한 상황이 너무 위중하고 어렵기 때문에 그 속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구원을 갈망하는 탄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이 자신을 향해 얼굴을 숨기신 것 같은 때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점층법입니다.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숨기신다.’고 하는 것은 우선, 주의 얼굴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에 대해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 묘사하는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갖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 이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먼저 이야기하는 ‘하나님과의 평화’라는 토대 위에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그 평화의 핵심이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빛을 자기 백성들에게 비춰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빛을 인간에게 향하실 때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백성들을 복 주시기 위해, 그리고 악인을 징벌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대면해 주시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진노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비교할 수 없는 특권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얼굴빛을 자신에게 비춰주시는 탁월한 영적 교제는 수없이 경험하면서 살아온 시인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나누는 것으로 말하자면 구약에서 다윗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살아간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그렇게 탁월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날이 되었고 지금은 환경적으로도 깊이 낙심한 가운데 있고 대적들에게 에워싸인 가운데 있고 하나님과의 친밀함도 마음속에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이 시인은 탄식하며 하나님 앞에 울부짖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사는 이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당신이 그렇게 선택하시고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그를 통하여 내가 하고자 하는 뜻을 다 이루리라. 다윗의 위는 영원하리라.”고 까지 하신 하나님께서 왜 이 시인을 지금 이러한 상태로 내버려 두셨겠습니까. 참으로 긴 시간 동안 고통이 계속되고 하나님께 잊어진 것 같은 상태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의 복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영적인 행복을 상실한 채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일까,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것이 어느 시점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으니까, 이것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이 내리시는 징벌이었는지, 아니면 다윗의 믿음이 많이 흔들려서 그 긴 세월 고통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토하는 가운데 나오는 탄식인지 우리는 정확하게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이러한 영적인 깊은 단절을 주시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꾸로 생각하면 죄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려고 하는데 그것을 못 하도록 하나님을 억제하거나 우리 안에 그러한 영향을 끼쳐서 하나님과의 친교를 누리지 못하도록 만들어 준다고 쉽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죄의 능력이 분명히 있고 그리고 그것이 어떤 때는 놀라운 힘으로 우리 안에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과 비교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이것은 더 큰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보면 심지어 죄 까지도 하나님께서 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는 경험까지도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 좋은 것을 선택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잠시 버렸는데 그 결과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죄를 미워하고 자기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그래서 신앙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인격적인 신앙입니다. 부모에게 징계를 받고 매를 맞을 때 무시무시한 폭력의 가능성을 부모와의 관계에서 생각하기만 하고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징계를 통해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그렇게 우리를 때리시지만,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의 잘못에 대한 복수나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고통 받는 것 보다 더 절실한 아픔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징계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또 한 가지 가능성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인이 사실은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악인의 횡횡함으로 그렇게 순전한 이 시인이 고통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그 결과로 받을 때도 있고 때로는 순전하게 하나님 앞에 살았는데 악인들이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압살롬의 반역은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다윗이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사후의 징계였다고 하더라도, 기름부음을 받은 후 사울에게 모질게 박해를 받은 그 모습은 마치 죄 없으시면서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욕과 고난을 한 몸으로 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만들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신자는 어려움을 당할 때 ‘나의 고난은 다윗과 같고 예수의 고난과 같다.’고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 되지만, 그러나 얼마든지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보복하지 않으면서도 그 오랜 기간 동안 고통을 지속하게 하시고, 그리고 잊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하시고 얼굴빛이 비춰지지 아니함으로 버려진 것 같은 인상을 받도록 그 긴 세월들을 이 시인을 비롯하여 우리들을 내버려두시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간절히 찾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잃어버리지 않고는 가지고 있는 것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상실하지 않고는 그것을 획득하고 있는 상태가 얼마나 복된 상태인지를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인데도 때로는 그렇게 큰 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때로는 이러한 영혼의 깊은 어두움의 시기를 지나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전에 하나님과 누리던 교제가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지, 그리고 매일 매일 주님의 도움을 받으며 시련을 극복하며 사는 생활이 얼마나 복된 생활인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언제나 귀를 기울이시고 가까이에서 응답하시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때로는 그렇게 커 보이지 않는 이 작은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은 커다란 고난과 시련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죄를 회개하게도 하시지만, 때로는 특별한 죄가 없는 대도 마지막에 죄를 깨닫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신문에 날만한 큰 범죄가 아니더라도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행복을 그렇게 소중한줄 모르고 살았던 자신에 대해서 뉘우치고, 그래서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 주님의 품을 파고드는 사람들이 되게 하려고 하나님은 종종 영혼의 어두움의 때를 지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영혼의 어두운 시간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깨닫게 되고,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버릴 때도 있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버리고 얻은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절실히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 가까이 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모세가 고백했듯이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가까이에서 응답해 주신 민족이 없고 그렇게 간구할 때 하나님이 가까이에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즐거움이 하나님께 있나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그러한 하나님의 얼굴이 가려진 것 같은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향해 복수하거나 지난날의 잘못에 관해 보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지금도 훈련시키고 계시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인이 이렇게 긴 세월을 고통 받았지만 그 긴 세월은 그의 고통의 약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긴 어두움의 시간들을 지나며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느낌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해 주시지 않으시는 일보다는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사망에 잠들어버려 잊어버리는 자가 될까, 두려워하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살게 해달라고 몸부림쳤습니다. 그가 구한 것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더 가까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말할 수 없는 비탄한 탄식이 믿음의 소망으로 끝을 내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아침 여러분도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 주님을 뵈옵는 영혼의 복된 때를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시편13편강해(2017. 10. 31. 가을말씀사경회새벽2)
2. 주의 얼굴을 숨길 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 13:2)
녹취자 : 김세나
어제는 시인이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숨기시는 것 같은 상황에서 고뇌하며 깊이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원수가 자기를 이기는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괴로워하며 근심을 토해놓고 있습니다.
우선 그는 안팎으로 큰 시련을 당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자신의 내밀한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아마 그의 영혼, 곧 그의 마음이 얼마나 많은 불안과 고통 속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이 이 시 안에서 이보다 더 적난하게 나타난 적은 없습니다. 영혼이 번민한다고 하는 것은 영혼이 행복한 질서가 아니라 고통 받는 질서 속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욱이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눈앞에 전개되는 사태를 보니, 수많은 상상의 작용들이 생겨나는데 미래에 무엇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에 깊은 근심에 휩싸여 있습니다. 밖으로는 원수가 자신을 실제적으로 공격해서 죽도록 때리고 자신이 바로 이 시인을 이겼노라고 자랑을 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까지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 상황은 개인적으로 악한 사람이 자기를 이긴 정도의 상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자신은 고립되고, 악인은 자기를 향한 승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시련이 일어나면 언제나 그것은 우리의 환경에서도 일어나고 우리의 마음에서도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영혼이 깊은 웅덩이에 빠진 것 같이, 그렇게 어려운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그것은 나의 내면의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우리의 삶 속에도 고난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러한 고난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고, 또한 그러한 고난을 아무리 많이 겪었다고 할지라도 누구도 그러한 고난이 자연스러워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눈을 뜨면 번민하는 영혼과 그리고 근심하는 마음으로 시달립니다. 그리고 원수의 공격은 매 순간 계속되고 자신은 죽도록 얻어맞으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수는 자신에게 거둔 승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높임을 받고 자신은 자기의 원수에게 패배한 것이 마치 하나님께서 내리신 당연한 벌인 것처럼 그렇게 치부를 당합니다. 이러한 많은 고통 속에서 시인은 괴로워하고 있고 이 많은 괴로움 속에서 시인은 오늘 이 시를 적고 있습니다.
2절 한절이 우리에게 다소 우울한 시인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러나 잘 읽어보면 시인이 이러한 시련과 고통 속에서 붙들고 있는 신앙의 자세를 엿보게 됩니다. 제일 먼저 첫째는 그가 이렇게 오래토록 번민하고 근심하며 많은 폭력을 당하면서도 이 시인은 어느 한순간도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만약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이 현실을 가지고 괴로워하며, 이것을 하나님 앞에 고할 수 있겠습니까. 한순간도 이러한 폭력과 수치, 마음의 깊은 번민과 고통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당신의 주권을 믿으며 탄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시련과 고난, 번민과 마음의 근심이 일어나고 원수가 우리가 이기는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질 때 사실 진정한 원수는 내 밖에서 나를 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면서 자신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접는 자기 자신의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큰 경륜 속에서 때로는 우리가 잘못이 없는데도 영혼으로 번민하고 마음에 근심해야 하는 상황이 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지 않았는데도 원수가 놀랄 정도로 강해져서 나를 비웃듯이 가격하고 폭력을 행사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렇게 악을 행하는 사람 편에 서서 그를 인정하고 박수를 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어느 한순간도 그것을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그 상황을 접지 않습니다.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그는 이러한 고난을 당할 때 자주 벙어리가 되고 귀머거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으니 하나님께는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는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번민과 근심을 그대로 토하고 원수가 자기를 이기고 있는 것, 그가 영광을 받고 자신은 수치스럽게 된 것을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토해놓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더 이러한 치욕스러운 상황을 지나고, 얼마나 더 하나님의 도움으로부터 멀리 버려진 것 같은 외로움 속에서 살아야 할지 모르지만 시인은 하나님은 반드시 살아계셔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전적으로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아버지 앞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눈앞에는 아무 좋은 증거가 보이지 않습니다. 눈앞에는 원수들이 자신을 이기고 있는 현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그러한 모든 시련과 고난 속에서 한 번에 그 원수를 꺾을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이때 조용히 눈을 들어 산을 지으신 여호와를 봅니다. 그리고 그 산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였던 시온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로움이나 장점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변함없는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고 고난 속에서도 결국 그들을 건져내 주시고 잠시 수치를 당하였으나 그 수치를 변하여 영광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는 모순적인 상황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죽어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 우리 앞에 전개됩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 앞에 어떤 종류의 삶인지를 묻습니다. 그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기업으로 삼아 살든지 죽든지 그분만 존귀하게 하려는 믿음으로 내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악인은 우리를 때리고 치고 우리의 생명을 빼앗고 우리를 번민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려고 수많은 시련과 폭력을 우리에게 주고 또 행사하지만, 신앙은 그 모든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한순간도 이러한 불안과 폭력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아하거나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시련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하나님의 경륜,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인식,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큰 능력을 보여 우리를 이 시련에서 벗어나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가장 곤고한 날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했습니다. 단 한순간도 악인이 처처에서 횡횡하고 자신에게 번민과 근심이 엄습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믿었습니다. “어느 때까지이니까? 이렇게 계속 될 상황이 아닙니다. 무슨 뜻이 계셔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지속하도록 저에게 이 시련을 허락하십니까? 도와주옵소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이 시인의 영혼과 같은 상태에 있지 않습니까? 속에 근심, 밖에 걱정,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원수들에 의해서 내가 공격을 받고 그가 나를 이긴 것 같은 상황이 전개되는 분들은 이 중에 없습니까?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에 모든 고통을 신앙화하십시오. 그리고 주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그리고 어느 때까지 하나님이 나에게 괴로운 순간들을 허락하실지 모르지만, 이것은 결코 우리들이 받아들일 상황이 아니고 하나님이 반드시 나를 돌아 보사 이 상황을 바꿔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어두운 날들을 지나며 하나님 앞에 내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살아서 이 영혼의 어둠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이전에도 이보다도 더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 큰 능력으로 자신을 건져 주셨는지를 생각하며 우리 주님을 붙들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시편13편강해(2017. 11. 01. 가을말씀사경회새벽3)
3. 주의 얼굴을 숨길 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시 13:3-4)
녹취자 : 김세나
큰 시련 중에서 고통 받는 시인이 이제 3절과 4절에서 많은 고난 중에 당하는 염려를 토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3-4절에서 시인 다윗의 직접적인 간구는 한 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눈을 밝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난의 눈을 밝히소서.”라는 것입니다. 이미 시편 13편 앞부분에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탄원이 있었기 때문에 응답해 달라는 간청은 바로 1절에 나오는 내용일 것입니다. 어느 때까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나에게서 숨기시고 얼굴을 가리시고 또 나를 잊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여기에서 응답해 달라고 하는 간구는 하나님이 이 큰 고난에서 나를 도와주십시오, 라는 그래서 당신이 나를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도 알고 내 원수들도 깨닫게 해달라고 하는 탄원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생각한다.’는 단어는 사랑한다는 말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어도 괜찮습니다. 특히 그 상대가 특별한 언약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인 경우에 생각한다는 것이 사랑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이 이러한 고백을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 그래서 생각하는 것과 찾아오는 것을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사랑의 방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말머리에 덧붙입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결정적인 간구가 있습니다. 3절에 나오는 독특한 간구는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이러한 내용이 여러 번 반복되고 특히 시편에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서 눈을 밝혀달라고 하는 탄원들이 나옵니다. 그것은 언제나 진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대한 이해가 탁월해져서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과 자신의 현재 상태나 미래에 영광스러운 기업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을 ‘눈을 밝히시며’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가장 잘 나타나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말합니다. 기도 속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너의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명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중략)… 알게 하시기를 간구하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기에 나오는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를 지혜롭게 하시고 또 영적으로 깨어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야고보 선생이 1장에서 시험을 당한 사람들이 간구해야 할 내용을 소개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시험을 당하였을 때 성도가 구해야 할 가장 간절한 것은 시련에서 벗어난 것뿐만 아니라 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너그러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시험 중에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간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심으로 당신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지혜와 사랑이 쌍으로 성경에서 제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시인은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의 눈을 밝혀서 끊임없이 지혜롭고 판단에 뛰어난 사람이 되셔야 할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사망의 잠을 잘까 염려된다고 고백합니다. 자, 때로는 시련과 어려움이 우리의 죄 때문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우리의 죄는 아닌데 애매하게 이러한 큰 시련을 당해 무고하게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 때를 믿음으로 지내지 못하면 영적인 깊은 잠에 빠져 손해를 보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말입니다. 모든 환경이 좋고 모든 것이 순적하게 될 때에만 교만해져서 영적인 잠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하지 않는 시련이 계속되면 그때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단지 고통 받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생생한 영적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요나였습니다. 니느웨를 가라고 명령하셨는데 다시스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온 뱃사람이 두려워할 정도로 배는 요동을 쳐서 급기야 가지고 있던 그 귀한 화물을 바다에 내던지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요나는 어떠했습니다. 배 밑창에 가서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인간이 느끼는 평화로운 마음의 기원이 둘입니다. 하나는 모든 질서에 뛰어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또 하나는 죄도 종종 우리에게 평안을 줍니다. 무감각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시련과 환란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열렬히 하나님을 찾거나 깨어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평안할 때는 그래도 하나님을 어느 정도 찾으면서 살았던 사람들이 시련을 만나고 나면 오히려 영혼에 깊은 잠에 빠져 판단력이 어두워지는 때가 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는 시련은 종종 키와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이야 그런 것을 하지 않지만 옛날에 시골에 보면 쌀이 아까워서 쌀을 털어서 골라내고 나면 반 토막 난 쌀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물질들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이것을 털어냅니다. 큰 키에 놓고 높이 곡식을 던지고 확 내리면 바람이 불면서 쌀은 떨어지고 나머지는 밖으로 날아갑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시련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어디까지 왔는가 한 번씩 우리의 마음에 어떠한 것들이 하나님이 용납할 수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을 털어내십니다.
시인은 이와 같은 것들을 느낀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 원수들에 대한 미움, 복수의 불붙는 마음에만 불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 이러다가 내가 영적인 깊은 사망의 잠 속에 들어가겠구나.’ 혹은 ‘실재로 내가 저 원수들에게 죽임을 당해서 잠을 자는 것 같은 깊은 사후의 상태로 들어가겠구나.’하는 두려움을 깊이 느꼈기 때문에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로 나의 영혼에 밝은 빛을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시험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밝은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합니다.” 이것은 원수의 승리입니다. 원수의 승리. 그러니까 여기에 나오는 “나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지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지혜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원수에게 들볶이고 고통을 당하지만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이 원수와의 싸움에서 내게 승리를 주옵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어떤 때는 모든 것을 손 놓고 오직 하나님 앞에 기도만 해야 하는 때도 물론 있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할 일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홍해까지 가서 모여 있는데 애굽의 군사들이 추격해 들어왔습니다. 앞에는 바다이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쳐들어옵니다. 그때 모세는 말합니다. “잠잠하라.”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오직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바다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 가운데로 지나게 하십니다. 그런 때도 있지만, 많은 때에는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눈을 밝혀 주셔서 육신적으로도 지혜롭고 영적으로도 더욱 탁월한 지혜가 있어야지 원수가 자신을 이기지 못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도 이렇게 시험 속에서 지혜를 구하며 반드시 이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대적들의 기쁨입니다. 시인은 “내가 흔들릴 때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흔들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대게 두 가지를 말하는데 우선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해서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서 시련을 당해서 자기들과의 싸움에서 불안해하며 떨며 어찌할 줄 모르는 그러한 상태를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적들이 매우 기뻐하게 될 터인데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지혜를 주셔서 자기의 눈을 밝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눈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시련을 해쳐 나가며 주님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견고합니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이 문제가 해결될지 훤히 알 수 없지만 믿음이 평안을 줍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기르리라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저의 인생을 생각했습니다. 걸어오는 인생길은 이상하게도 꽃길을 지나거나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아름다운 숲이 있는 인생길을 걸어가는 시간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비록 메마른 땅을 걸어가는 풀 한포기 없는 메마른 광야를 걸어가는 인생길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 비록 꽃길은 아니고 그리고 기분 좋은 오솔길은 아니지만 그 메마르고 황량한 광야에서 때로는 하나님이 하늘에 구름으로 덮어 당신의 선하심을 보여주시고, 메마른 때에는 비를 주시고 비오는 날에는 피할 초막을 주시고 굶주린 날에는 먹을 것을 주시고 목마른 날에는 샘을 터뜨리셔서 지나게 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역설적으로 광야와 같은 인생이었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도움을 받는 추억이 많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인을 보십시오. 정말 대적들에게 에워싸여 죽을 것 같은 상황을 지납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 여전히 정말 좋은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을 이길 더 많은 칼이나 창을 구하고 함께 무찌를 동료 군사들을 구하는 대신 진리의 밝은 빛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판단력을 잃지 않도록 자신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지금 비록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지나지만 바로 그 광야와 같은 시기를 지나면서 하나님이 당신의 선하심과 사랑을 보여주실 기회가 많았음을 기억하고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며 지혜로운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함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3-4)
녹취자 : 김세나
시인은 고난 중에서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오늘 이 비탄을 노래하던 시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향한 찬송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 시인이 고난 중에서라도 가지고 있었던 믿음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우선 성경은 제일 먼저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다고 말합니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였습니다. 어떤 사랑이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만물을 사랑하고 그것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은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과 언약관계 안에 있는 이 시인을 향한 하나님의 개인적이고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시련과 고난을 당할 때마다 잘 하였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과거에 인생길을 걸어오면서 겪었던 극한 어려움의 때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도우셨는지를 기억하며 하나님을 회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고 나면 마음의 불안과 염려가 사라지면서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이제 원수들이 나를 이길 것처럼 날뛰고 있지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고 있으니 나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결코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하는 현재의 확신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에 관한 많은 약속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서 사는 정도가 우리의 신앙의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말도 신뢰하고 그 사람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 자신도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합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을 칭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오늘의 믿음과 과거에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다루셨는가에 대한 경험에 함께 묶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만난 것만큼 성경의 깊이를 보게 되고 또 성경을 깊이 읽는 것만큼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시인은 틀림없이 예전에 많은 경우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라고 하는 이 말속에서 이미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정말 시련으로 가득차고 어려운 때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셨던 것을 회상하면서 그 하나님이 오늘도 나의 인생을 붙들고 계시다는 현재적인 확신에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과거를 회상하는 기술은 오늘 현재를 굳건하게 합니다. 시인이 고난을 당할 때 갖고 있는 굳센 믿음이 있었으니 그 첫 번째가 바로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주님을 붙들고 폭풍과 시련의 날들을 지납니다. 원수들이 이길 것 같은 상황에도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굳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신앙으로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고난과 시련을 지날 때 그때 지난날들을 회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지키고 내 인생을 붙드셨는가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수시로 변하며 살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변함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삶의 상황이 힘겹고 어려울 때마다 과거를 생각합니다. 더욱 힘들고 어려웠던 때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얼마나 힘겹고 어려웠는가 회상하면서 지금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가 너무 크다는 감사의 이유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시련 가운데 오직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인이 가진 두 번째 믿음은 마음으로 주님의 구원을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시련과 고통 속에서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있을 때 마음이 분산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이 위경에서 나를 건져내 주실 것이며 나는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이 오직 여호와에게서 난다고 하는 하나님 주권사상을 일깨워 줍니다. 시인은 이렇게 시련과 고난 속에서 오직 자신의 구원이 주께로 부터만 온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삶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이 자신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굳센 마음으로 우리 하나님 한분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매순간 우리가 이러한 믿음으로 살고 있는지 살펴보고 계십니다. 똑같이 어려움을 당해도 어떤 사람은 그 어려움 속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 사랑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며 그 안에서 그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맛보고 즐거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영혼의 깊은 침체에 들고, 심지어는 그 침체를 계기로 악에 빠지기도 합니다. 얼마나 사뭇 다른 삶이 그들 속에 펼쳐졌는가 보십시오. 신앙이,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사는 믿음 하나가 인생을 그렇게 바꿔 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들도 사실은 나쁜 일이 아니고 일어나는 모든 좋은 일들도 좋은 일일 수 없습니다. 나쁜 일들도 이렇게 신앙으로 주님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주님이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 안에서 산다면 나쁜 날들도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그러한 어려움을 내게 주셨던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을 모르는 사람들, 시련의 아픔과 쓰라림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찌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구원의 능력을 깨달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고난과 시련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최근에 인간 사회가 한 2천 년 대 초, 길게 보면 1990년대 중반부터 우리가 예전에 마주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놀랍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가 얼마나 빠르고 과격한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시 묻게 만듭니다. 우리에게는 얼마 전에 소개 되었지만 ‘알파고가 뭔데?’ 라고 생각했었는데 세계적인 바둑기사들을 모두 재패하고 지금은 훨씬 더 강력한 지능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역할을 대신하는 지능적인 기계들이 생겨날 때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면서 이제까지 생각했던 인간에 대한 생각을 훨씬 넓히고 인간 중심주의라고 하는 것을 더욱 확장해야 한다고 하는 사상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발된 과학 지식들을 사용하여 우리의 몸의 뇌에 어떤 부분을 빼내고 집어넣고 하면서 가능한 모든 고통을 줄이고 행복하고 효율성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트랜스휴머니즘’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저는 그 책들을 쭉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교회는 이것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만약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에게서 그러한 가능성을 뇌에서 추출할 수 있다면,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항상 태도가 거만해서 문제가 됩니다. 거만하게 하는 요소를 뇌에서 떼어 버립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고분고분한 사람이 되게 만든다고 하든지, 아니면 언어가 어눌한 사람을 뇌에 무엇인가를 심어서 언어가 유창한 사람이 되게 한다든지, 그 정도이겠습니까? 아침마다 늦게 일어나는 사람의 습관도 고쳐놓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긴 세월동안 분투하며 회개하며 게으름을 읽고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 빼 버리고 나면 시계처럼 5시에 딱 일어나서 5시30분에 새벽기도에 달려올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게 정말 인간일까, 그렇게 해서 변화되는 것이 정말 기쁘겠는가. 여러분, 쉬면서 정말 좋다, 어쩌면 휴식이 그렇게 달콤한가, 정말 살 것 같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노동의 고통 속에 시달려 본 사람들만이 휴식의 달콤함을 알 수 있습니다. 연중무휴 백수로 늘 놀고 있는 사람에게 그러한 고백을 받아낼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정말 편안합니다. 그렇게 의사선생님이 “어떠세요?” 물어보니까, “선생님, 살 것 같아요. 편안해요. 아픈 데가 하나도 없고요 제가 정말 건강합니다.” 이것은 연약하고 아파본 사람만이 그러한 감탄을 할 수 있습니다. “네가 내 옆에 있어서 너무 좋아.” 오늘도 제가 코코에게 하고 온 말입니다. “코코야 네가 내 옆에 있어서 정말 좋아.” 이것은 홀로 있어본 외로움을 아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만나서 “너무 반갑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헤어져서 쓰라려 본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항상 인간을 한없이 행복하게 하는 아름다움의 감정과 인식들은 그 반대의 것들과 동전의 양면과 같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어두움을 모르는 사람은 찬란한 빛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없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있다고 하는 말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서 인간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과 같이 쓰디 쓴 인생 속에서도 달콤한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 때로는 대적들에게 에워싸이는 고난이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신 증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시련과 고통 속에서 어떻게 당신의 사랑을 의지하고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며 살아가는지를 훈련시키십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그 고통과 시련 때문에 오히려 환희와 기쁨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행복한 상태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경건한 자녀들을 때로는 이러한 시련과 고통의 날들을 통과함으로써 이 세상에 진정한 행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자신의 복이시며 하나님만이 생사 간에 의지하며 살 수 있는 단 한분이시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를 가지고 세상 한복판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를 모든 선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비탄의 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시13:6) “하나님, 어느 때까지이십니까. 나를 영원히 잊으셨습니까. 주님의 얼굴을 언제까지 숨기시겠습니까.” 라고 탄식을 쏟아놓는 것으로 이 시를 시작하였던 시인은 이 시를 쓰면서 시인의 마음이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국 “나는 하나님을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믿음이 부족하였을 때는 고난밖에 안 보이고 하나님이 자기를 홀로 내팽겨 치신 것처럼 보였는데 묵상하며 하나님께 이 시를 노래하고 나니까 결국 자신은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결국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은 말할 수 없는 은혜와 덕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은덕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이 은총으로 베푸신 사랑입니다. 우리의 공로, 그리고 우리가 그러할 만한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엇인가 베푸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 자신의 사랑의 성품 때문에 우리에게 베푸신 은덕을 말합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고난 속에서 우리 주신을 꼭 붙들고 이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