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죽음의 신학
이는 내게 사는것이 그리스도시니 죽는것도 유익함이라(빌 1장21절)
녹취자:이경순
사도바울은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식은 좋은 소식과 괴로운 소식이 함께 있었습니다.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혔는데 그는 감옥 속에서도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복음 때문에 사슬에 매인다음에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덕스럽게 복음을 전파하는 담대한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허영적인 이기심과 야망으로 복음을 전하여 사도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감옥 속에서 자유가 속박당하고 인신이 구속당하는 것 같은 고통보다도 더 큰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고통이 밀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 감옥살이가 사도바울에게는 인생노년에 그를 성숙시키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고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이 감옥에 갇혀서 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말하기를 이 감옥에서 당하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고통이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 일까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이 사람이 갑자기 행위 구원론 자가 된 것일까요? 로마 청에서 유정하게 펼쳤던 이신칭의의 교리를 잠시 망각한 것일까요 아니죠. 오히려 그는 자신의 서신서 속에서 즉각적인 칭의의 구원과 점진적인 성화의 구원, 그리고 마지막에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적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완성으로서의 구원을 함께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바로 그 점진적인 성화의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도바울의 사상을 깊이 받아들인 존 칼빈이 자신의 기독교 각료에서 우리를 하나님께서 성화시키시는 위대한 계획을 유장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면서 그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십자가가 어떤 의미인지를 우리에게 해석학적으로 제시 합니다. 미성숙 하고 불완전한 우리들은 거룩하고 성숙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당하게 되는 모든 고통과 시련 이 모든 것의 총체를 가리켜 십자가라고 해석을 하였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죄악과 우리의 허물 때문에 우리는 시련과 고통을 당하기도하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순전하게 살려고 몸부림치기 때문에 오히려 고난과 괴로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십자가 이고 이 십자가를 우리자신이 신앙 속에서 올바로 지게 될 때에 바로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이천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예수의 죽음에 영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죽음의 그 기운이 이천년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의 영혼 속에 실재 화되고 이 죽음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들었던 우리의 정욕에 대하여 죽는 것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바로 그 안에서 현재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부활의 권능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클레르보에베르나르보로부터 시작 되어서 칼빈에 와서 완성된 유니오콤 크리스도의 교리입니다. 이것은 개혁주의 영성의 핵심이고 종교 개혁가들의 경건의 중심부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이 유니오콤 크리스도의 교리를 터득하기 전까지는 그는 진정으로 개혁신학자가 아니다 그는 진정으로 개신교 교인이 아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그 감옥 속에서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으며 십자가를 지고 있는데 그 위에 정신적이고 영적인 십자가를 더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가슴을 찌르는 가시였고 그리고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옥 속에서 깊이 이고난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새로운 해석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평생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옥에 갇히기까지 일하였으나 아직도 그리스도를 닮지 못한 나의 이 추루한 인간됨을 고쳐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한 그 정화의 과정이다 라는 것을 깨닫고 나게 되니까 커다란 은혜가 밀려오게 된것이지요.
제임스 페커 교수는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그 위대한 청교도들로부터 본받아야 될 것은 두 가지다. 성숙한 경건과 연단된 굳굳함 .경건인데 연애감정같이 여리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 같다가도 약간의 어려움이 오면 기가 질려서 주저앉고 마는 그런 유약하고 감상적인경건이 아니라 비바람이 몰아치고 눈보라가 오고 핍박의 칼날이 오가도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경건, 그리고 연단된 굳굳함, 어느한 순간의 불의를 보고 파르르 떨듯이 히스테리를 부리며 솟구치는 혈기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정의인가를 깨달은 다음 그 자신의 정의에 대한 태도가 진리위에 서있음을 깨닫고 든든한 기초를 가지고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굳함, 온갖 시련과 풍파와 환란을 만났기 때문에 웬만한 것에 의해서는 꿈쩍도 하지 않는 그런 연단된 굳굳함 거룩한 강인함, 이것이야 말로 오늘날 우리들이 청교도들로부터 배워야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자신이 당한 이 모든 고난을 통해서 자신이 저절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 교인들의 간절한 기도와 그리고 자기를 도우시는 성령님의 은혜로서 자신이 이 감옥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주님의 사람이 되어간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수련회 때도 말씀드렸거니와 다시 한 번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이 바로 이렇게 기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어떤 사람들은 투덜거리듯이 불만을 토하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아이 우리 친구는 장모님이 권사님이여서 기도를 많이해 주시고, 장인어른은 돈 많은 장로님이여서 개척할 때 뒷돈도 대주시는데 우리마누라는 도대체 뭐야’이게 바로 크리스천 찌질이입니다. 찌질이예요.이런 찌질 이들이 어디 있어요. 그건 섭리 속에서 이미 다 끝난 겁니다. 나는 기도 많이 하는 권사님이 없으니 더 많이 기도의 십자가를 지라고 주님이 우리 아내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하셨구나. ‘우리 장인어른은 친구 장인처럼 돈많아서 개척교회 해줄 수 있을 정도가 아니니까 돈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 의지하라고 나에게 이 십자가를 주셨구나. 그리고 간절히 기도 하면 오히려 그 십자가 때문에 더 훌륭한 목회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집에 가서 핍박하지 마세요.
그러면서 이 사도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케 되게 하려 함이라 그랬습니다. 여기에서 몸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를 가르치는 몸으로서의 소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자신을 전 존재로서의 몸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만을 존귀케 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하는 유명한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자기죽음의 신학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사도는 자기 안에 사는 이가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천 여년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지금은 부활하여 승천 하셔서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아계시는데 어떻게 그 예수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살아계실수 있다는 것인가요. 여기에서 우리는 자기죽음과 예수의 생명에 대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회사역은 요한복음 10장에 의하면 두 가지의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고 더욱 풍성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생명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죠 .그것은 뭐냐 하면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이죠. 그러면 그 풍성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날 신 번영주의에서 이야기 하는 자아의 실현이나 혹은 성취, 거기에서 느끼는 자기계발의 희열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겟죠.그러면 그 풍성한 삶이란 것은 무엇일까, 그야말로 금시발복을 하여 많은 물질을 누리게 되고 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리는 것, 그것이 풍성한 삶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죠. 최근에 저는 고난주간에 우리교회에 깊이 병든 환자들을 심방 했습니다. 그중에 우리교회 집사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50이 넘도록 방황을 하시다가 이분이 우리교회에 와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회심을 경험 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형제중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지만 완강하게 거절했습니다. 그 집은 커다란 우환이 겹쳤고 그리고 남편인가가 암에 걸려서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당신도 만약에 나와 같은 처지가 되면 절대로 그렇게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를 찾지 못할것이다.이분이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일 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을 받는데도 6개월 만에 다시병원에 갔어요. 청천병력같은 선고가 떨어졌습니다. 혈액암 3기에서 4기로 넘어가고 있다고요. 인간적으로 보면 회생의 가능성이 없어요. 그런데 심방을 갔어요. 얼굴이 환하게 빛나요.그러면서 ‘목사님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그 선고를 받자마자 자기 동생들이 제일먼저 달려왔어요. ‘나도 암에 걸렸다.’ 그런데 주님이 내안에 계신다.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오히려 심방간 사람들을 위로하는 완전한 평화로운 얼굴을 보았어요. 사랑은 죽음을 초월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에 잇대어 그 충만한 생명을 현실적으로 누리면서 사는 그 삶이 풍성한 삶이예요. 이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진리와 은혜로 묘사를 하는 거예요 진리에 대한 풍성한 앎과 그 진리대로 사랑하며 살게 만들어주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인 그 은혜가 그 사람 안에 충만 할때에 이 모든 것을 이기며 살 수 있는 풍성한 삶이 전개되는 거예요. 바로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 그런 일들을 사람들 속에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들을 부른거예요.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목회를 통해서 진정으로 이루어야할 그 모든 섬김과 봉사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되요.목회에 성공을 하고 이름을 내고 큰 교회를 하고 그래서 사회에 유명인사가 되는 것처럼 여러분들이 널리 알려지는 유명인사가 되고 이런저런 자리에 올라서 다른 사람들을 지휘하고 지배하는 그것이 비전이라면 그 사람은 세상 바깥에서 추구하던 그 영광을 이번에는 똑같이 가지고 들어와서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추구하는 사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목회의 변화는 자신의 신앙의 차원에서의 변화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렇게 고난과 역경과 많은 시련이 있는 이 신학교세월을 지나면서 얼마나 많은 괴로움과 고통이 있겠어요. 저는 3년 동안 눈물로 다녔어요. 교회에 가서 열심히 봉사를 해요. 그러면 도대체 공부할 시간이 없어요,맨날 눈물이 나요. 뭘 알아야지 가르치던지 목회를 할 거 아니예요 그런데 정말 상상도 안갈 정도로 일을 많이 시키는 거예요. 구역이 4구역,성경공부두크라스,주일학교, 고등부, 청년부, 교회청소까지 했어요. 쓰러질 거 같았어요. 학교에 오면 너무 괴로워요, 왜? 이렇게 와서 공부하는 시간이 너무 좋은데 교회에는 구원받지 못하고 변화 받지 못한 나의 양떼들이 너무 많아 그 양떼들이 소리치는 것 같아 전도사님 지금 학교 가서 공부하고 있을 여유가 있어요?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주어야지, 이 둘 사이에 끼어서 고통을 받는 거예요. 그러다 가정에 물질이 없고 가난하고 괴로운 일이 생길라치면 그 괴로움은 진통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의 새까만 가슴을 가지고 어디에 가서든지 하나님 앞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너무 놀라워요. 이 세상에서는 한 인 격안에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해요.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인격에서는 이게 가능해요. 오히려 진정한 슬픔이 있는 그곳에 진정한 기쁨이 있는거예요.이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거예요.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인가하면 가장 아프고 괴로웠던 때예요.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며 아프고, 내게 맡겨진 영혼들의 그 회심하지 못한 상태를 보며 괴로워하고, 또 내가 맡은 공동체가 변화되지 않는 것 때문에 아파하는 이 모든 고통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은 충만한 연합의 기쁨을 주셨던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예요,여기에서 개혁신학이 기도의 피의 세례를 받는 거예요. 속에서 고통 받는 자기죽음의 끔직한 피어린 그 고통 속에서 신학의 내용들이 피의 물에 풍덩 잠기는 거예요.
그 속에서 피 묻은 개혁신학책을 펼치면 찬란한 광채가 나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광채가 나는거예요.그래서 칼빈은 읽어도 통하지 않던 언어의 소통이 이루어 지는 거예요. .그래서 기독교 각료를 두 줄을 읽어도 한권의 책으로 칼빈속에 있었던 그 마음을 풀어서 쓸 수 있는 유장한 해석학적 능력이 생기나는 거예요. 그것은 신학의 차원자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차원에서 신학으로 상승하면서 생겨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신뢰하지 않는 목회자들이 있어요. 신학생들이 있어요. 참된 예배자 여본 적이 없는 예배인도자, 좋은 설교 청취자 이었던 적이 없는 열렬한 설교자, 누군가의 훌륭한 제자였던 적이 없는 스스로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선생님, 스승, 당의 치리에 복종 해본 적이 없는 당회장, 이런 사람들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예요. 왜냐하면 모든 섬김의 원리가 신앙의 차원에서 솟아오른 것이 아니고 그의 지위와 그의 위치가 그것을 하겟금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인도하는 예배이니까 딴 예배때는 떠들어도 되지만 오늘은 조용해야 된다, 말이 안 되잖아요. 이렇게 깊은 고통 속에서 찢어지는 것 같은 내적 분열을 경험하면서 이것을 사람을 향한 원망이나 환경을 향한 불평으로 쏟아놓지 않고 혹은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때에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경험하는 거예요. 이때에 죽는 self, 자아라는 하는 것이 정욕의 덩어리예요. 소위 ‘콘스피스껜띠아’ 라고 하는 이 정욕은 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되요. 좁은 의미로 사용이 되면 성적인 욕망 이예요. 정상적이지 않는 성적인 욕망 이예요. 그리고 넓은 의미로 사용이 되면 자기를 주인 삼으려는 모든 정신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거예요. 이 정과 욕심은 사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이미 못 박은 거예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예요.그 한번 못 박은 자기 자신이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는 그 무수한 삶의 고비들을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에 자신을 투영시키면서 사는 거예요. 그것이 믿음으로서만 그것이 가능해 지는 거예요.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것이죠. 우리의 몸 전체는 약 60조개의 작은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3개월이면 우리의 몸에 있는 세포중 3개월 전에 있던 세포는 하나도 없이 완전히 새로운 세포인것이예요. 단, 뇌세포만이 죽으면 다시 생성되지 않아요. 그렇게 우리의 온 몸은 비유를 하자면 60조개의 꼬마전구를 뭉쳐놓고 그 꼬마전구들이 반짝반짝 하는 것 그것이 깜박이는 것이 우리의 몸이라고 생물학적으로 분자생물학적으로 우리들이 추론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생물학에서 설명하기 굉장히 어려운 생명현상 하나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면 우리의 몸에 세포가 있는데 이 세포는 끊임없이 죽고 다시 태어나요. 이 세포의 죽음을 가리켜서 네크로시스라고 말해요. 세포의 죽음이 네크로시스라는 죽음이 있는데 이 네크로시스의 죽음은 세포가 그야말로 괴멸되는 거죠. 노화되어버린다던지 아니면 타살에 의해서 세포기능이 파괴되면서 생명의 기능을 할 수 없이 죽어버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거 말고 밝혀지지 않는 또 다른 종류의 죽음이 있어요. 이것을 세포의 아포푸텁시스라고 말해요. 과학자들이 이 원인을 밝히지 못하는데 이것은 세포의 자살적 죽음 이예요. 생물학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는데 어느 세포가 옆에서 그냥 죽는 거예요, 자살하는 거예요. 자살할 때 에티피라고 하는 화학 에너지가 나와요. 이 에너지가 전기처럼 옆의 세포에 전달이 되요. 그 화학 에너지를 동력으로 사용해서 세포에 생명을 돌리고 세포분열을 하게되는거예요.그런데 어떤 세포는 이렇게 아포푸텁시스의 죽음을 안 해요 주위에 있는 모든 세포들이 아무도 이 아포푸텁시스의 죽음을 안 해요. 이 기능이 멈췄어요. 그래서 모든 세포들이 서로 살겠다고 몸부림을 쳐요. 그러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쪽에 있는 영양분들을 빨아들여요. 빨아들이니까 죽지 않으면서 세포가 증식하니까 세포가 특정부위만 계속 뭉치면서 커져요. 이게 의학적으로 암에 대한 설명 이예요. 그러니까 무슨뜻이냐면 살아있는 생명체인 인간이라는 것은 무수한 세포들이 자살이 이루어질 때만 살아있는 사람 이예요. 이것이 멈출 때 죽음으로 가까이 가거나 생명이 끝난사람이예요. 이것은 분자생명학적으로 우리의 인체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서 우주를 바라보면 놀라운 일치하는 현상들이 발견이 되요.
이 우주 전체는 은하계들로 이루어져있고 하나의 은하계는 약1000억 개 내지 2000천억 개의 항성들로 이루어져있어요. 그리고 우주전체는 약 2000천억 개의 항성의 군단들로 이루어져있다고 보는 거죠.
하나의 은하의 크기는 각각 다르지만 우리 은하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직경이 길이가 20만 광년정도 되고 그리고 두께가 900광년정도 되는 타원형 비슷하게 바람개비처럼 되어 있어요. 그리고 중심부에는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블랙홀이 있고 그 중심부로부터 우리는 약 2만6천 광년 떨어진 곳에 태양이 있고 그 주위를 돌고 있는 8개의 행성중 세 번째 행성이 지구예요. 이항성이 50년에 하나씩 생성이 될 정도니까 항성 하나의 연령이 40억년에서 70억년, 100억년정도 된다고 보면 얼마나 많은 별들이 이 은하계 안에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이 별들이 생겨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별구름들이 형성 되요. 이 별구름들은 별이 폭발하면서 이 우주에 아주 옅은 가스층이 형성 되어 있어요.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든지 모여 있게 되어요.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최근에도 하나의 우주구름이 발견되었는데 그 직경이 2광년 이예요 빛이 2년을 가도 끝이 나오지 않는 엄청난 구름덩어리가 발견이 되요. 그러다가 인근에 있는 별들이 폭발을 하면서 죽어요. 죽을 때는 백성 외상 상태가 되어서 장엄한 폭발을 일으키면서 사라지는데 만약에 몇십억년후 태양이 폭발하면 그 폭발한 태양의 크기가 이 지구를 다 삼킬 수 있을 정도로 까지 태양계를 삼킬 수 있을 정도까지 거대한 별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에 폭발을 하면서 사라지는 거예요. 그때 폭발해서 나오는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이 구름들의 규칙성을 깨뜨리면서 뭉치게 만들고, 뭉친 것들이 말하자면 핵반응을 일으키면서 어마어마한 열들을 내면서 그 안에서 끊임없는 원소의 변이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속에서 한계에 이르면서 다시 폭발하면서 구름 속에서 떨어져 나와서 찬란한 별들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새로운 별의 탄생 이예요. 그러니까 새롭게 태어나는 별은 어딘가 폭발하며 죽는 별 때문에 재료를 만들고 어디선가 폭발하며 사라지는 그 별의 소멸 때문에 그것이 남겨준 에너지 때문에 별이 될 수 없는 것들이 별이 되면서 이 모든 우주의 원리들이 이루어져 가는 거예요. 이 똑같은 원리가 오늘은 천문학과 분자생물학을 지나서 영적인 세계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뭐라고 얘기 하냐면 ‘내 안에 나와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런데 내가 죽을 때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자아가 자신이 주인 삶을 살고자 하는 자신이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 끊이없이 죽을 때 그 안에서 주님이 충만하게 사시는 것을 경험한다. 라고 말하는 것이에요.
오늘날 교회가 왜 그렇게 시끄럽고 끊임없는 소송, 멱살잡이, 어디다 내놓고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그게 아무도 안죽을려고 그러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끊임없이 물고 뜯으면서 아무도 안 죽으려고 몸부림치는 가운데 교회는 암덩어리가 되면서 이게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는 거예요. 학교 다닐때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목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다보면 하나 깨닫게 되는 게 있어요. 목회자가 잘 죽으면 교회는 절대 죽지 않아요. 어떤 더러운 악인이 그 교회를 가득 채워도 절대로 그 공동체는 죽지 않아요. 그리스도의 몸 이예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노래 중의 하나가 그거 아녜요?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난 여태까지 이 찬송이 싫다고 그런 사람은 아무도 못 만났어요. 심지어 TV에 무슨 시엠송으로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난 여러분들에게 말하면 여러분들에게는 해당 안 되는 노래예요. 그거 해당 안 돼요. 왜냐하면 목회자는 죽기위해 태어난 사람 이예요. 특별히 교회의 지도자는 죽기위해 태어난 사람 이예요. 성도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고 우리는 죽기위해 태어난 사람 이예요. 그 모본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셨고 그 모본을 본받은 사도바울이 보여주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기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신학교 시절은 여러분들이 끊임없는 죽음을 연습하는 시간 이예요. 그 속에서 자기의 죽음이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 자신이 죽어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유익을 가져오는 사람 ,내가 죽음으로 내가 돌보는 영혼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터득하게 되는 사람은 신학을 이미 배운 사람 이예요.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이 이 짧은 시간 동안 신학의 훈련을 받으면서 치열하게 공부하고, 무엇보다도 피가 있는 기도생활을 해야 되요. 죽음과 삶 사이를 오가는 피절인 기도가 여러분 속에서 나와야되요.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이 죽는 것을 경험할 때 그때에 주님께서 여러분들을통해 사시게될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목회자가 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준비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