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이신 하나님
주는 나의 무시로 피하여 거할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산성이심이니이다 (시71:3)
녹취자: 한성일
그렇게 1절과 2절이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준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신의 ‘의’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의’는 사실은 그 하나님의 사랑과 대조되는 것 같지만, 이 사실은 이 ‘의‘가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로마서 3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분은 ‘의’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 이미 그런 카톨릭의 사상에 이미 깊이 젖어있었기 때문에 ‘의’ 하면은 오직 하나님의 공의, 그래서 죄인을 벌하고 심판하시고 그래서 당신의 ‘의’의 판단을 따라서 인간들에게 행한 그대로 갚으시는 그런 종류의 하나님의 ‘의’ 밖에는 생각하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하나님 어찌하여 복음 속에 하나님의 칼을 두셨습니까” 라고 절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후에 뷔텐베르그에 가서 좀 더 깊이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이 ‘의’가 하나님의 정의로서 인간의 행한 바에 따라 갚으시는 하나님의 공평한 ‘의’에는 틀림이 없는데, 이 ’의’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향하여 갚으심으로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드시는 그런 종류의 ‘의’가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러면서 커다란 복음의 빛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존적인 고백을 보면 한순간의 복음의 찬란한 영광의 빛이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이에 비하면 칼빈은 그 다음 세대의 사람이니까 ‘의’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훨씬 더 균형적인 해석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가 남긴 말 가운데 아주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사랑의 시작이다” 왜 그럴까요? 인간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공평하신 ‘의’를 사람에게 적용하였다면 모두 멸망할텐데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인간들을 당신 자신의 공로로 구원해 내시는 ‘의’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사실은 그 의는 하나님 사랑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3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도대체 이게 누구에게 하는 이야기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겨나게 됩니다. 시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나의 무시로 피하여 거할 바위가 되옵소서” 여기까지는 모를게 없습니다. 그 다음구절이 문제입니다.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도대체 이 명령을 누구에게 내리는 명령일까요?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그다음 구절은 이해 못할게 없습니다.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산성이십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나의 구원이시오 산성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두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여기에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라고 하는 이것을 간접목적어가 누구에게 명하셨는가입니다. 첫 번째 가능성은 천사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이 시인을 구원하거라” 이렇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천사들을 명하여 나를 구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나의 산성이시오. 또 나의 반석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해석의 가능성이 첫 번째 있습니다. 두 번째는 좀 더 나은 해석이라고 믿어지는데, 그게 무엇이냐 하면, 성부가 성자에게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 여러 곳에서 발견이 됩니다. “주께서 내 주께 명하시기를 악인이 발등상에 있을 때까지 너는 보좌에 앉으라” 이런 주께서 주께 명하시는 내용들이 시편 속에 종종 등장합니다. 이는 신학생들이 공통적으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작전적 명령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다음 구절에 대한 해석도 조금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성부께서 성자에게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주가 성부께서 성자에게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이는 성자께서 나의 반석과 산성이 됨이니이다.” 거의 나쁘지 않은 해석이다 저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보면 어떤 결론을 얻게 되느냐 하면, 이 시인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고자하는 이 계획들이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에 일어났던 하나님의 작전 속에 기인하고 있다하는 그런 체험적인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맺으신 언약은 우리가 신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뢰할 수 있는데 인간이 그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할 것인가에 대해서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부와 성자 사이에 이루어진 언약과 작정은 신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시지만 지성과 의지에 있어서는 단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작은 근거를 가지고 있는 본문에 너무 커다란 삼위일체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저는 그런 해석이 마음에 듭니다.
아무튼 본문의 내용으로 들어가서 보자면 이 시인이 “주는 나의 무시로 피할 바위가 되옵소서” 그런 것입니다.. 만약 후자의 해석을 취한다면 여기에 나오는 주도 사실 성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는 무시로 피하여 거할 바위가 되옵소서. 언제든지 내가 피하여 거할 수 있는 바위가 되옵소서“ 라는 고백입니다.
(예화) 이스라엘이라는 지방에 가보면 바위 산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바위산의 구조나 이 모든 것들은 그 패인 곳이 아주 많은데 거기 그렇게 숨으면 진짜 현대 무기로도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에 미군이 파병을 했을때 그렇게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이 바위에 숨으니까 총을 쏘아도 소용이 없고 찾기도 어렵고 그런 것을 이제 나중에 그 정밀 무기로 타격을 하는데 그 바위 속에 몇 십 미터 굴속에 숨었는데 그것을 GPS로 정확하게 찾아내서 거기에 다가 폭탄을 집어 넣는 것입니다. 폭탄이 일단 굴속에 들어가면 더 잘 죽는 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폭탄이 터지면서 사실은 그 프로판가스통 하나만 터지면 사람이 그냥 기절하게 됩니다. 불이나기 전에 ‘쾅’ 터질 때 공기의 충격파가 이 사람을 절도시켜 버리게 됩니다. 절도된 상태에서 이제 화염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쾅’ 터지면 이게 그 불길이 거기까지 가는 것도 문제지만 터질 때 바위니까 어마어마한 울림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충격파로 사람들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좁은 통로 속에 불길이 한쪽으로 확 쏠리면서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무기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거기로 피해서 환란을 면하고 전쟁에서 목숨을 구하고 위기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다 경험하면서 이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고백은 ‘하나님은 무시로 피할 바위요. 산성이시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악한 자들로 인해서 환란과 시련을 만날 때 하나님은 무시로 내가 피하여 거할 혹은 숨을 바위가 되옵소서. 주님이 언제나 나를 구원하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 앞에서 이 시인이 아주 소중한 언약의 백성이요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나를 구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이 천사일 수도 있고 성자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라고 명령하시나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나의 반석이요. 나의 산성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반석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추후’라는 말인데 이게 구약에서 상당히 의미심장한 단어입니다. 그 반석이 상징하는 두 가지 가장 대표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지 않습니까. 커다란 반석이 몇 백년이 됐겠습니까. 몇 십년이 됐겠습니까. 유구한 세월동안 흐르는 것입니다. 우리 아파트 앞에도 왠 돌맹이 하나를 덜렁 갖다 놓고 철재로 삥 둘러놓고 청동기시대 것이라고 그렇게 해놓았습니다. 청도기시대니까 얼마나 됐겠습니까. 최소한 2천년에다가 거의 4~5천년 전에 돌맹이인데 아직도 멀쩡합니다. 그 바위를 보면 불변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무엇이냐 하면 그 바위 자체가 모든 공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해주는 그런 종류의 바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생각하면 오늘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요. 나의 산성이십니다“ 라는 이 간절한 고백은 주님의 불변하심과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렇게 환란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입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로 피하는 주님께로 도망하는 그 의존의 피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외에 자신을 보호해줄 자가 없고 하나님 이외에 자신을 보호할 사람이 없다는 그런 기대 속에서 주님께로 피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이고 믿음생활이고 하나님의 은혜고 그런 것입니다. 시인이 환란 속에서 이런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원수가 강하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를 환란을 당하게 허락하시는 분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시련과 고난을 당하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그 은혜의 날개, 그늘 아래서 믿음으로 아버지 앞에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한 그런 의존의 마음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좋은 신앙이기에, 때때로 고난과 시련은 우리에게 약이 되고 고통과 외로움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믿음의 길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