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콘웰 새벽예배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 119:67)
녹취자: 윤은정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시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동행하면서 살았는지에 대한 간증을 적고 있습니다. 이 시인은 고난을 많이 겪으면서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는 사람이었는데, 고난을 당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노라고 자기 말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유교 역사에 보면은 렉치오 디비나라고 하는 신학 훈련의 방식이 있었습니다. 렉치오는 읽기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디비나는 디바인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것을 종종 성독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인가를 읽음으로서 경건을 배양하고, 그렇게 읽어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삶 전체를 규율하는 신앙의 내용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리빙 투 갓’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독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지만, 멀리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의 전통에서부터 있었고, 종종 이것이 신비주의로 흐르는 수도사들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지만 이 성독의 전통은, 원래는 성경을 읽고 성경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묵상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이런 단계들을 거치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 속에 육화되는 훈련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2단계, 3단계, 5단계, 6단계를 이야기하는 시대도 있었는데 이런 성독의 전통을 아주 성경적인 방식으로 재현한 사람들이 종교 개혁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야기하는 소위 큐티라고 하는 것은 너무 가벼운 것이고, 그 이전에 이미 이런 거룩한 성경 읽기의 전통에 있어서 그래서 성경 속에서 신학을 발견하고, 발견한 그 신학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그것을 마음을 쏟아 기도하고, 그리고 거기서 자기 자신의 삶을 적용하고 하면서 배운 바 지식의 삶 전체와 어우러져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이러한 삶의 포메이션의 결정체로서 이러한 성경을 읽는 관습들이 재현이 된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 사람의 신학함이라고 하는 것은 정통적인 신학의 틀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만은 개인의 삶의 연대기에 의해서도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제 마틴 루터같은 사람들은 렉치오 디비나를 이야기할 때 3개를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첫째로, 렉치오, 성경을 깊이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은 성경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보조적인 책을 읽는 것을 모두 포함을 합니다. 그러면서 매디타치오가 이루어 집니다. 묵상입니다. 그런데, 그는 아주 실천적인 요소를 이 렉치오 디비나의 과정에 도입을 합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텐타치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뇌, 혹은 고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은 성경을 읽고, 그 진리를 깊이 묵상하고, 그 다음에 말씀대로 살아가려다가 고난을 당합니다. 이걸 통해서 객관적인 성경지식이 자신의 삶속에 육화된다라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오늘 이 시인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입니다. 왜냐하면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님의 율례를 혹은 주님의 말씀을, 주님의 율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다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읽고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면 배우는 거잖아요. 그것은 우리들의 생각이고, 특별히 구약성경에서는 신약도 마찬가지 이지만 히브리 사람들의 사유의 방식에서는 그런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히브리에 가면 이스라엘에 가면 여자가 ‘나는 저 남자를 안다’라고 이야기하면은 큰일 납니다. 그것은 뭐냐하면은 아주 깊은 관계까지 갔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영어 표현에서 ‘나 그 남자하고 아주 친밀한 사이야’라고 그러면은 오해를 받듯이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고난을 당하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잖아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예전에 알지 못하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전달해 주었겠죠.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시련을 당하고 난 뒤에 비로서 그 말씀이 자신에게 깨달아졌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겠죠. ‘그러면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는 아주 놀라운 힘이 있군요.’ 라고 말입니다. 고난은 우리가 경험하는 기쁨과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것입니다.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도구로 사용하실 때, 그 고난을 인내하는 태도가, 그 고난을 인내하고 견디는 태도와 방식이 이 시인과 같은 고백을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다. 성경에 보면은 ‘초달을 차마 못하면 아이를 망치느니라.’ 그랬습니다. 여기서 초달은 가죽 채찍 같은 걸로 때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매로 다스리지 아니 하면은 망치느니라.’ 이 뜻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을 때리는 가죽 채찍질, 채찍으로 아이들을 후려치는 이 매질에 아이들을 좋은 사람 만드는 그 어떤 영향력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부모가 매로 다스렸기 때문에 빗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아이가 부모가 때리는 그 채찍질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바뀌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가지가 결정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데에 있어서 작용을 한다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뭐냐하면 고난, 그리고, 고난을 대하는 태도. 고난은 우리의 삶 속에 언제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여기 앉아서 ‘나는 아무 염려가 없습니다.’ 이렇게 여기서 공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실제로 고난이 별로 없을 수도 있고, 또, 어떻게 보면은 마땅히 그것이 깊은 고통이 되어야 할텐데 여러분들의 심령이 바람직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괴로움을 고통으로 못 느끼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신대원에 다닐 때의 얘기입니다. 어떻하다가 채플을 드립니다. 1교시 수업을 하고 그리고 채플을 드렸습니다. 1교시가 8시 반입니다. 그러면 양지까지 새벽에 용인에 있는 양지까지 셔틀버스를 타면 항상 8시에요. 30분 시간이 남습니다. 가을이면 거기 경치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항상 유혹을 받습니다. 일반 은총이며, 특별은총이며, 일반은총은 커피를 한잔 빼서 가을 숲속을 30분 동안 산책하는 것이고, 특별은총은 예배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후자가 이겼습니다. 들어갑니다. 예배당에 조용히 앉자마자 눈물이 쏟아집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눈물이 막 쏟아집니다. 뭐 저는 그렇게 좋은 조건에서 신학을 공부한 것도 아닙니다. 그 당시에 학교 등록금은 50만원 정도 됐는데, 교회에서 주는 사례금은 12만원이었습니다. 한 경제적인 쪼들림에 고통을 받습니다. 그것뿐이에요? 공부를 하면서 사역을 해야 되는데, 사역의 짐이 살인적으로 과중합니다. 지금은 아마 그런 짐 지어주면 붙어있을 전도사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족들이 그때만 해도 완전히 예수를 안 믿었어요. 거기서 오는 갈등과 찢어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난 아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괴로움,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그렇게 힘든 괴로운 일들이 있는데, 담임목사님의 성격이 아주 유별났습니다. 내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저 비유를 마출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참 놀라운 게 말이죠. 물질적인 고통 때문에 연단받는 기간이 지나는데, 하나님께 이제는 그 물질의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겠다라는 그런 열매가 맺히면, 하나님은 그 다음에 다른 고난을 주십니다. 또 다른 고난을, 또 다른 고난을, 또 다른 고난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회개척한지 20년이 되었는데, 지금은 경제적인 쪼들림 때문에 고난을 받지를 않아요. 주님이 보실 때, 나는 그것을 학점을 이수한 것 같애요.
또, 한 때에는 별난 사람들을 하나님이 보내주셔서 그렇게 괴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만나는 사람마다 특수인간만 만납니다. 평범한 얘기가 통하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받고 한 8년 지나니까 무슨 자신감이 생기냐면, ‘이제 내가 이 교회를 떠나면 진짜 어떤 별난 인간을 만나도 목회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키지 못합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을 만날 때 인간에 대한 이해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는 확장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지만 많은 사람들을 가슴에 품으면서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깊은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하나씩, 하나씩 지나는 것입니다. 교회를 개척하니까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 다른 고난, 또 다른 고난, 또 다른 고난... 요즘은 어떤 마음이냐면은 기대하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왜? 하나가 끝나면은 그 다음에 꼬리를 물고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디바리우스라는 사람이 1700년대에 살았습니다. 이 사람은 바이올린만 제작한 것이 아니라, 하프, 뭐 목관악기까지 많은 악기를 제조하던 당대의 유럽의 명장이었습니다. 지금도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만든 악기가 600개정도 남아있다고 그럽니다. 그 중에 하나를 내가 직접 눈 앞에서 봤거든요. 우리 교회 자매가 가지고 연주하러 온 건데, 스트라 디바리우스 바이올린 이었습니다. 45억이라고 그러더군요. 요만한 바이올린 하나에... 도대체 300년이 훨씬 넘었는데 그게 여전히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 요호마에 첼로는요 시가가 72억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설명 중에 하나가 뭐냐하면은 제일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은, 물론, 명장이 기가 막히게 그것을 깎고 제작하는 기준도 포함이 되지만은, 그것 못지않게 너무너무 중요한 팩터가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하면은 나무가 보통 나무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악기를 만드는 나무는 변형이 되지 않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카나다에 콜롬비아에 있는 아이스 필드에 가보면 아이스 필드 옆에 나무가 죽 서있습니다. 키가 어른 키정도, 끽 해야 어른 키 한배 반, 두배, 아주 짝달막한 나무들이 죽 깔렸습니다. 그게 수명이 전부 다 300년이 넘은 것입니다. 그 나무가... 그러니까 지독하게 춥고, 바람부는 악 조건 속에 살아남으려고 하니까 안으로, 안으로, 안으로 오그라 들면서 나무가 아주 옹골지고 차진 나무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톱으로 켜도 잘 잘라지지가 않습니다. 도끼는 물론이고, 송곳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막 딱딱한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나무를 깍아서... 그런 나무를 기름에다 튀기고, 그 다음에 소금 물에다 집어 넣고, 말리고 해가지고, 여러 달을 거치고 심지어는 1년씩, 2년씩 거치면서, 그러면서 그늘에다 말려서 쪼개지는 것들은 다 버리는 것입니다. 그 지금 팔만 대장경 같은 게 저렇게 오래 가는 게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것을 몇 년을 반복을 해서 금이 가고 터지는 나무를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한 열 개 가지고 와서 바다에다가 집어 넣으면은 하나 쓸까 말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변형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 나무를 이용을 해서 이제 기가 막힌 악기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아름다운 음색이 나오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사람이 공부를 마치고 큰 교회 목사가 되느냐? 아니면 이름도 빛도 없는 작은 교회의 목사가 되느냐? 혹은 총장이 되느냐? 어느 학교의 교수가 되느냐? 뭐가 되느냐? 이것은 삶의 방식의 문제이지 본질은 아닙니다. 저 화란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가 그랬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을 당대의 최고의 학자로 알고 존경을 하니까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신앙으로 구원을 받는다.’ 우리 같은 사람이 해야 그렇게 대단한 말이 아니지만 그렇게 주목받은 학자가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신앙으로 구원을 받는다.’ 학문이 아니라... ‘나는 신앙으로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의 사랑,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그 큰 은혜, 자비, 은총, 모든 것들이 전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할 때에 그 마음의 태도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악인으로부터 많은 고난과 시련을 당했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그런 상처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런 시련과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믿음으로 그 고난에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 칼빈은 자기의 책속에서 0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십자가란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성숙시키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모든 고난의 총체를 가리킨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 십자가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합니다. 하나는, 절대적인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난입니다. 불신자들로부터 오는 핍박, 소명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받는 냉대, 뭐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가하면, 이제 상대적인 십자가는 자기가 잘못했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십자가입니다. 그리 원만치 않기 때문에동료들에게 미움을 받는다든지, 아니면은, 성품이 게으르기 때문에 자기의 의무를 당하는 일에 있어서 많은 고통을 느낀다든지, 도덕적으로 바르지 않은 습관이 몸에 베었기 때문에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으면 그것을 이길 수 없는 어려움을 갖는다든지,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로의 십자가든지 간에 그것을 통해서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앞에 간절히 메달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뭐냐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메디다치오’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이런 저런 고난을 당하는데, 그것이 힘들게 느껴질 때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이 작은 고난도 이렇게 아프다면 주님이 나를 위해 당하신 그 고난은 얼마나 큰 것일까? 얼마나 괴로운 것일까? 이것을 하나님앞에 고난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면서 아버지 앞에 간절히... 이것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앞에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겸손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고난의 신앙을 통해서 예수와 더 가까이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입니다. 임하고, 크리스틴, 예수의 형상을 회복해가는 것입니다. 자기안에...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의 형상안에서 가장 완벽하게 인간에게 나타난바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객관적인 고난을 주관적으로 소화하면서 믿음으로 예수를 닮아가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 뭐냐하면은 묵상과 기도입니다.
신학을 공부할 때에는 교수님들이나 독서를 통해서 배우는 많은 지식은 음식물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것이 아닙니다. 그 책의 저자의 것이고, 가르치는 선생님의 것이지, 여러분들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그 음식에, 그것을 놓고 묵상과 기도로 그것을 소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있는 시간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그 혼자 있는다는 이야기는 물리적으로 혼자 있는다는 뜻이 아니라, 소위 얘기하는 거룩한 외로움... 그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책도 멀리하고, 사람도 멀리하고, 조용히 배운 진리를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하나님만을 간절히 앙망하며 바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객관적인 배움의 지식들이 소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강한 고통과 괴로움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공부하는 과정은 진리의 관하여 배우는 것이지만, 그런 묵상의 과정은 진리를 자기의 것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항상 진리가 우리를 칭찬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진리가 우리를 꾸짖고, 우리를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고, 하면서 우리의 인격과 삶 자체가 진리라는 기준에 부합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메디테이션을 잘 안합니다. 신학자는 철학자보다 더 위대한 thinker가 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의 지식이나 팔아먹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질러스피라고 하는 영국의 청교도가 있었습니다. 스코트랜드 사람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동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기억이 안나는데 그 당시의 목사들이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모임이었냐 하면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신앙고백을 작성하기 위한 모임이었습니다. 그 목사들이 정한시간이 되어서 모두 모였습니다. 사회를 보던 분이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 우리 신문에 관한 신앙고백을 작성하는 모임을 위해서 토마스 질러스피 목사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토마스 질러스피가 “거룩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이러면서 이제 하나님을 adoration하는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에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천국으로 올라갔대요. 기도가 끝났을 때 다시 땅으로 내려왔대요. 그랬더니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한 사람이 동의를 했습니다. “의장, 동의했습니다.” “그게 뭡니까?” “저는 여지까지 교리를 배웠지만, 하나님이 어떠신 분인가에 대해서 오늘 이 질러스피 목사님의 기도처럼 아름답고 정확하게 서술된 고백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질러스피 목사가 기도했던 내용들을 복원해서 우리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기로 동의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채택이 됬습니다. 그것은 정말 메디다치오입니다.
아인 패커가 어 몬드 자이어트라는 책에서도 얘를 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일 먼저 어떤 젊은 설교자의 설교 한 단락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카맨트를 답니다. 하나님의 관한 이러한 묘사가 코에 솜털이 나기 시작하는 19살 남짓한 청년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는 것이 나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 청년이 누구냐하면, 찰스 스펄전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신학에는 경험적인 요소, 미학적인 요소가 동반되지 않으면은 신학은 신학으로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려운 신학을 공부해서 학원 강사들이 지식을 파는 것처럼,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그렇게 밥은 먹고 살 수 있겠죠. 그것은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말씀사역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괴로움을 당할 때, 그것을 고통스러워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짐승도 다 하는 것입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그 고난 속에서 그 고난의 의미를 묻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과,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가는 것입니다. 심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깊어져가는 것입니다. 홀로 있는 시간을 꼭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조용히... 어떤 시간에는 성경조차도 손에서 떼어놓고 하나님 한분만을 앙망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수시로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영혼의 목마름이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묵상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가 뭐냐하면은, 간절한 기도입니다. 의학적으로 뼈가 부러지잖아요? 젊은 나이에 뼈가, 뭐 발이, 사고가 나서 발이나 팔이, 뚝하고 분질러 집니다. 골절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이제 어떡하죠. 의사가? 뼈를 맞춥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못 움직이게끔 기부스를 합니다. 석고를 발라서 못움직이게 한 두달 이상 석고를 해서 못 움직이게 합니다. 그리고, 이제 나중에 다시 엑스레이를 찍습니다. 뼈가 잘 붙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톱으로 기부스 한 것을 이제 떼어냅니다. 그리고 이제 물리치료를 하면서 다시 합니다. 그 부러진 부분은 절대 다시 뿌러지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뼈가 여렇게 되었었는데, 딸깍 뿌러졌습니다. 두 개를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대로 잘 해놓으면 여기서 뼈 사이에서 아교질이 나옵니다. 뼈가 어떻게 되냐하면, 요렇게 됩니다. 부러진 부분이 아교질이 많이 나와가지고 두꺼운 뼈가 됩니다. 절대 안 뿌러집니다.
기도는 바로 그렇게 우리가 성격적으로나, 인성에 있어서나, 모든 것에 있어서 고난을 당하게 되잖아요? 그 고난 자체는 우리를 아름다운 능력을 만드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메디테이션, 간절한 묵상과 열렬한 기도를 통해서 그 고난을 극복하지 않으면 그 고난이 인간을 자꾸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으면서 험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위험한 측면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간절한 기도는 마치, 아교질의 역할을 해서 부러질 수 밖에 없는 고난의 결과를 아주 아름답게 엮어주는 것입니다. 0들은 신학공부를 아주 많이 하려고 하는데, 기도를 잘 안합니다. 특히 유럽에 있는 학자들, 자주 만나는데, 신학은 아주 복음적입니다. 개혁주의적 입니다. 그런데, 현저하게 기도를 안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이길 수 있는 거룩한 영적인 힘, 이런 것들을 형성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지식을 가르치고 사람들에게 변증하고 하는 거지, 이것 자체를 하나의 커다란, 어제 내가 저녁때 여기에 앉아서 강의했던 것처럼, 신학의 질료라고하는 커다란 떡덩어리를 떼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그런 종류의 풍성함이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 보면은,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나니’ 이것은 신학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주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아주 중요한 표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편견이 없이 칼빈의 주석이나, 기독교 강요를 천천히 읽어 보면은 이 글이 아주 깊은, 기도 속에서 쓰여진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얘를 들자면은 주석을 쭉 해나가다가 멈추고 마음속에서 막 쏟아 오르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서 써내려가는 것입니다. ‘오, 주여’ 써내려가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영과 설교의 영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풍부한 가르침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 배움의 끝은 어디일까요?
나는 신학을 공부해왔고, 혼자서 독자적으로 공부해온지가 2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60을 눈앞에 둔 나이에 신학을 얼마나 알았느냐하면 이제 신학에 길이 이런 거라는 약도를 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학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모든 이 세계에 관한 모든 지식들의 약도를 그릴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희미하게나마... 그런데 이제는 공부를 마무리해야 될 시간이 다가 오면은 나는 존재가0 그러면서. 이 모든 지식의 도움을 받으면서 우리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면서 공부해야 됩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깊은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깊은 기도를 동반한 신학자가 없습니다. 지식에 있어서는 탁월하지만, 영적으로는 어린아이와 같은 학자들 뿐입니다. 신학공부를 할 때 학교가 끝나면, 항상 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한 주간 동안을 금식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괴로운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한 학기동안 공부하면서 뭍은 영혼의 때를 기도로 씻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살아오는 신학의 모든 탐구의 과정에 얼마나 커다란 도움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기도 속에서 위선과 허위, 야만, 야심, 조잡함, 이런 것들을 내어버립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앞에 씸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단순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힘입니다. 0만 하지 말고 실제로 기도를 하고, 다른 사람이 어떻든지 그것은 상관하지 말고, 각자 그 사람들의 몫입니다. 내가 얘기하는 것은 개인 기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보에티우스라고 하는 17세기의 화란의 개혁자는 아스게티카라는 책속에서 ‘기도야 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최고의 표현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다면 여러분들이 여기서 공부하면서 훈련받는 동안에 당하는 괴로움과 어려움들을 하나님앞에 살게 될 것이다.
우리 기도할 때에 오늘 말씀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 저희와 함께 해주시고 은혜를 내려주셔서 아버지 하나님 의지하며 저희들이 이 신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우리같이 하나님앞에 한 마음으로 기도하시다가 돌아가기 바랍니다.